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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대 2016. 2. 5. 23:12

대조선/SBS/역사

한민족, 서양보다 3700년 앞서 ‘지동설’ 입증했다.

| 2014.04.09. 13:3

한민족, 서양보다 3700년 앞서 ‘지동설’ 입증했다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21)-신시배달국사(神市倍達國史)(13)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4-03-29 18:29:25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외로 자기나라 역사를 안다고 하면서도 우리 역사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중국과 일본의 잘못 조작된 날조의 역사는 말하면서 진작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선조들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 의해 철저히 파괴 된 정체성(停滯性)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나아가 우리가 얼마나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민족인 것을 모르고 사는 국민이 너무 많다.

 

이러한 한민족의 역사무지에 대해서 이를 보는 외국학자들이

한국 역사의 진수를 알려주는 역사의 진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우리가 1만년의 찬란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이면서도 아직도 우리 국민은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안타깝다.

국경일이 되면 이야기 하는 사람들과 신문의 칼럼리스트 등에서도 드러나는

소위 역사를 안다는 전문가들의 무지함 또한 여전하다.

 

우리는 1만년이 넘는 위대한 역사를 가진 세계으뜸의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지도급인사까지

창피한 역사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최초·최고의 인류문명을 일으킨 민족 아닌가!

고대 요하문명, 피라미드, 신석기 유물, 쌀농사, 토기, 배 만들기(造船), 고래잡이, 고인돌,

천문세계도, 빗살무늬토기, 자연화약과 화포, 금속활자, 신기전(로켓), 철갑선, 책력,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등에서 보듯이

 우리는 5천년역사가 아니라 1만년이 넘는 역사란 것을 왜 모르는가.


필자의 명치대 선배이신 한갑수(韓甲洙) 선생은 군복무로 미국 공군 지휘 참모 대학에 입교했었다.

그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의 학자 서량지 교수가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귀국 한민족은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음으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는 이 말을 하고 한갑수 선생에게 넙죽 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1943년10월 초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4천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이 점령해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 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했다.

동이는 은(殷), 주(周) 이전은 물론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활동무대가

오늘날의 중국 산동, 하북, 발해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 등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했다. 그 중에서도 ‘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가 바로 중국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5천년 역사 운운하고 있으니 그 역사무지가 하늘에 닿아있다.

이로 인해 우리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갖지 못하고 있는 인사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지난 100여년 일본의 침략역사에 의한 괴기(怪奇)한 일들로 정신이 마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너무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나 역사를 모른 채 잊고 사는 자가 많음에 놀란다.

국가는 없고 자신만이 잘살면 그만이다고 하는 망국적인 행태가 매일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데,

왜 이렇게까지 망가졌는지 실로 안타깝다.

이번 칼럼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실체를 ‘천문학’에서 찾아 찾아보고자 한다.

천문학의 시조도 우리한민족이다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천문학에 대해 세계천문학회는 조선시대까지 2천년 이상 꾸준히

하늘의 천문관측이 이루어져 기록이 남아있는 국가는 우리나라와 중국뿐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고대부터 하늘의 자손인 천민(天民=천손)으로서

하늘에 제사하면서도 동시에 천체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그것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마련한 고인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고인돌에 북두칠성과 많은 별을 새겨 놓은 것은 태고 때 환인시대부터

천문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천문학도 우리 민족에 의해서 시작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전 서울 대 박창범교수는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서구의 천문관측역사가 기껏해야 300년인데 비해 우리 동이족 배달민족은 BC 5000년 전부터 시작했다.

북두칠성을 비롯해 카시오페아 등을 새긴 고인돌이 북한지역에서만도 약 200여개가 남아 있다’

(1997.9.29 한국일보)고 발표했다.

 

그는 우리 천문학의 연구가 가장 오래됐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대동강유역의 고인돌에서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가 발견되고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 10호 고인돌 덮개돌 겉면에는 11개 별자리 80여개의 별을 나타내고 있다.

 

별의 밝기에 따라 구멍의 크기도 각각 달리했고 중심부에는 북극성이 그려져 있다.

이 고인돌의 별자리를 측정해보니 무려 BC 2800~220년으로 지금부터 약 5000년 가까이에 이른다.

지금까지 세계천문학계에서 고대천문학의 원형(별자리의 원형)이라고 한

메소포타미아(바빌로니아)지역  토지경계비의 천문기록 1200보다 1800년이나 앞선다.

천문학의 시작도 우리 한민족에 의한 것임이 입증된다고 하겠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세계 첫 천문도 중국과 일본은 이를 숨겼다.

이것도 중국의 경우는 한무제(漢武帝)시대 중국인이 서방의 세계와 접촉한 것이

태초원년(太初元年)에 행해진 역법개정(曆法改正) 운운하며,

이 무제의 역법(曆法)이 중국역법(曆法)의  기본이 됐다고 변조했다.

 

또한 일본 명치유신 이전의 역(歷) 즉, 구태음력(舊太陰曆)의 기본이 됐다고

요시가와 고지로(吉川幸次郞-경도대 교수)도 이와나미신서(岩波新書P214~5)에 버젓이 쓰고 있다.

참으로 못 말리는 행태다.

 

중국의 양심적역사학자인 서량지(徐亮之)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책력을 만든 이는 희화자(羲和子)이다. 중국의 책력 법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됐다.

그는 은나라 출신으로 동이의 조상이다.

동이가 책력을 만든 사실은 진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천문학계에서도 가장 오래된 별자리 지도로 인정하고 있는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우리가 천문학의 선구자로 결코 우연이 아님을 방증하고 있는 셈이다.


고구려의 석각천문도(石刻天文圖)를 기본으로 12개의 분야로 하늘을 나누고

그 안에 크기와 밝기에 따라 1460여개의 별을 새겨놓고 293개의 별자리를 그린 웅장한 천문도는

단지 하늘의 별자리를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황도(黃道=해가 1년 동안 지나가는 길)의 경사가 24°(도)라는 사실과 춘분점과 추분점의 위치,

계절의 변화 등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 고구려인의 천문학 수준이 최고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 화폐 만원권 지폐 뒷면에 있는 별자리 그림 일부가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다.

중국의 1247년 ‘순우천문도’보다 900년이 앞서고 서양 천문학사보다 100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도다.


조선조에 와서 태조4년(1395)에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중앙부와 달리

고구려 시대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바깥에 새겨진 별들을 보면 고구려 초기하늘의 별들로 작성됐고,

이 같은 고구려 천문도를 기본으로 태조 때의 천문도는 수정된 하늘의 별자리였음이

고등과학원(KIAS) 박창범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BC 2099년 고조선 5대 단군, 인류 최초 지동설 이론

고조선 5대 단군인 구을(丘乙) 황제(BC2099) 때

황보덕이란 재상이 50여 년간 천체를 관측하고 구을(丘乙)단군에게 보고한 기록이 ‘환단고기’에 나온다.

북극성과 태양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으로 수성, 금성, 지구성, 화성 등 10개의 행성이름은 물론

인류최초의 ‘지동설’을 밝히고 있다.

 

이는 서양보다 37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서양은 16세기에 와서야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고 있다.

지구는 태양주위를 도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지동설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잘못된 우주관이기 때문이다.

서양은 조선 선조(1552)이전 까지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중심에서 군림하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과 해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는 잘못된 우주관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사물의 원리를 발견하는데 귀납법으로 도출시키는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4대 성인의 한 사람인

소크라테스(BC,469~399)도  해와 달은 행성이 아닌 그들의 신으로 절대 숭배대상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서양의 천문지식은 이처럼 우리에 미치지 못했다.

 

’단군세기‘에는 10대 단군인 노을(魯乙)황제 35년(을축년, BC1916)에

지금의 천문대인 감성대(監星臺)를 두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첨성대(瞻星臺)도 이 감성대에 근원을 두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지금 첨성대 별 관측소가 남아있어 이것이 세계최초라는 것은 우리의 자랑이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조선시대 일식 정확히 예측, 1년 시간도 현재와 1초 오차

또한 ‘단군세기’에는 고조선 제13세 흘달(屹達)단군(BC1782~1720)때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집결을 말하는 오성취루현상(무진50년)기록이 정확히 나와 있다.

BC 1733년 7월 13일 그것이 사실이었음이 천문학자(박창범 교수)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에

의해서 밝혀졌다.

 

또한 박석재 천문위원, 이종호 과학저술가 등 많은 학자들의 연구로

고대시대부터 우리 조상의 천문학 발달이 어느 정도였나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삼국시대에 와서 극히 한정된 장소에서만 관측할 수 있다던 백제의 기록도 있다.

세계천문학계를 선도하는 박창범 교수는 잃어버린 우리 고대사를 되살리고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일식기록을 현대 천문과학으로도 틀림이 없는 옳은 기록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에서 백제의 일식 관측기록이 당시 백제영역인

현재 중국발해만 유역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곳은 우리 백제의 중심지였다.

조선조에서는 세종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돼 6시55분 53초에 끝났다고

정확히 예측한 것이 맞았다.

1년을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음으로서 지금의 48분 46초에 비해 1초의 오차밖에 없다.

이를 오영수선생은 ‘이순지’에 밝혔다.

 

반면 우리보다 천문지식이 뒤진 중국의 ‘현현기경’ 같은 중국의 고전에는 1년이 360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일본학자의 ‘세계천문학사’에는 당시 인류 역사상 가장 과학적이고 정확한 책력으로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의 칠정력(七政曆)을 꼽고 책력서로는 ‘칠정산외편’을 들고 있다.


놀라운 관찰력과 과학성, 실생활에 적용

하늘의 자손임을 자처하는 지혜로운 우리 배달민족은 천문을 관찰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가늠했다.

예컨대, 태양에 검은 흑점이 많아질수록 농작이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을

서양의 갈릴레오보다 1000여년이나 앞서 정확히 예측했다.

 

또 옛 중국의 오로라(Aurora=極光) 기록은 292개인데 비해

우리는 국제적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711개에 이른다.

중국의 ‘한서’(漢書)와 ‘후한서’의 중국 한족의 일식기록의 실현율은 78%에 불과하지만

‘삼국사기’ 초기 일식기록의 실현율은 무려 89%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중국은 일식기록도 우리의 천문기록을 베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들의 천문도 역시 우리의 천문도의 원형을 모사한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天下觀)=고구려가 지구의 중심으로 보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석각원본을 수장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덕일 박사)마저 나올 정도다.

 

7세기말~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지는 일본의 ‘기토라 고분에 그려진 별자리 벽화’가

일본 하늘의 별자리가 아닌 BC 3세기~AD 3세기의 고구려 하늘의 별자리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도

우리 선조들은 고구려 이전에 이미 높은 수준의 천문학을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이 우리 한민족은 하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수차례의 수정을 거친 서양의 양력(BC46년 율리우스력, 歷)에 비해 훨씬 먼저인

2311년이나 앞서 BC2357년에 만들어졌지만 지금까지 백분의1의 오차도 없어 수정을 한 일이 없다.

 

이것은 우리가 만든 책력인 음력의 놀라운 과학성(정확성)과 실생활 적용성에 대해 경탄을 했던

세계적인 석학 자코모박사의 이야기다.

1994년 ‘한배달’에서 발간한 ‘천부경연구’의 편집후기에 이런 내용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 최초의 천문학 유물과 최고의 책력이 나온 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우연히 이루워진

것이 아닌 환인(桓因)의 상고시대, 환웅(桓雄) 고대시대, 단군(檀君)시대의 고조선을 잇는 ‘천민(天民)의

민족인 천손(天孫)으로서 태고 때부터 하늘에 감사하고 제사하며 천문을 연구해온 것이 바탕이 됐다.

 

그 천문지식이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에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다.

중국의 명나라는 이러한 연구도 간섭했지만 세종대왕은 더욱더 천체연구에 매달려

농민의 농사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같이 우리가 천체연구의 선구자인 것을 세계가 다 인정하고 세계학자가 모두 경탄을 하는데

우리나라의 학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민족에 대한 죄악이다.

 

우리는 세계를 지배한 민족이다.

우리민족의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두뇌의 명석함은 물론이고 세계를 주도하는 능력이

어느 민족보다 뛰어남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우수성과 창의력, 과학적 사고가 인류발전에 기여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제주도교육위원회 ‘耽羅文獻集’, 최진열 ‘대륙에 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창건 ‘환국, 배달, 조선사신론’,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대조선 민족사’,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稻垣泰彦·川村善二郞·村井益男·甘粕 健 共著 ‘日本史’ 외 다수서책을 참고·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greatchosunsa

 
 
 

역사

천화대 2015. 11. 27. 11:04

 

 

 

 

 

 

선도문화 선도맥

 

우리민족의 전통사상을 흔히 유·불·선(儒·佛·仙)으로 압축, 표현한다. 실제 이 세 종교 중 불교는 삼국과 고려시대를, 유교는 조선시대를 이끌어온 중심사상이었으며 크게는 통치이념으로, 작게는 예의범절까지를 망라하는 문화(문명)체계였다.

 

그런데 선교(仙敎, 이하 仙道로 칭함)는 확실히 어느 시대를 장악했다고 하기에는 문헌과 기록이 크게 부족하다. 그러나 선도는 역사의 위기 때마다 민족 심성 깊은 곳에서 불씨처럼 되살아나 활기를 불어넣고 민족단결의 견인차가 되었다.

 

통설에 따르면 선도는 삼국 이전의 고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동아시아의 고대사나 고대문화를 다룰 때 흔히 휘말리게 되는 '중국이 먼저냐, 한국[東夷]이 먼저냐'라는 난제에 봉착하는 것은 선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승려, 유림, 무당들 사이에서 선도가 전해내려온다. 한국 선도는 일찍이 선불습합(仙佛褶合) 과정에서 사찰의 산신각(山神閣)으로 포함되어 버렸으며 이에 앞서 선무습합(仙巫褶合) 과정에서 무교(巫敎)에 편입되어버렸다. 신선들은 선도에서 모시는 게 아니라 절집이나 당집에서 모셔지고 있다.

거리에 나가보면 종말론과 휴거를 주장하는 기독교인과 '당신은 도(道)를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특히, 요즘 신문이나 TV 등을 통해서 단전호흡이나 기공수련에 대해서 많이 접하게 된다. 현재 국내에는 이같은 각종 행공단체들이 난립, '건강에 자신이 없는' 현대인들을 유혹하고 있다. 또 이들 단체는 저마다 자신들이 정통이요, 뿌리라고 주장한다.

 

건강을 위한 수련장소로서의 의미를 넘어서서 종교로 둔갑한 경우도 있다. 인간의 가장 약한 심리적 요소를 포교의 수단으로 동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종교적 형상을 띠지는 않았으나 행공단체들 중에는 창시자를 신성화·신비화시켜 '교주아닌 교주'로 만들고 있는 경우도 있다.

 

김정빈 선도소설(仙道小說) 『단(丹)』이 나온 84년 이후 행공단체들은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으며, 이 소설은 어쨌든 선(仙)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크게 자극했다.

현재 국내에는 크게 3개 계열의 선도수련단체들이 있다. 먼저 전통적인 선법(仙法)을 이어받은 국선도(국선도법연구회) 계열이 있고 대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연정원(한국단학회연정원), 단학선원 계열이 있다.

 

국선도는 청산선사(현재, 비경도사)가 1967년 3월 3일 문공부에 개인등록(3호)함으로써 출범한 후 1971년 2월 21일 문교부에 정신도법교육회(제35호)로 등록, 전통적인 선도의 문을 열었다. 그후 정식 사단법인 출범은 1986년 10월 24일(서울시교위 제1∼263호) 사단법인 '국선도법연구회'라는 이름이었다.

 

청산은 12살 때 선도에 입문, 1960년대 중반 하산하여 선도의 대중화에 진력하다 1984년재입산.

국선도의 특징은 선도 본래의 정신수양, 양생, 그리고 선도의 이상세계인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추구하고 있다. 즉 순수성이 강하다. 청산이 하산한 후 근대 국선도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국선도는 처음 세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무술시범 등 외공(外功)의 형태를 지향했으나 지금은 내공(內功)에 주력하고 있다. 외공은 한마디로 무술을, 내공은 정신수양을 뜻한다.

 

실제는 내외공이 갖추어져야 온전한 것으로 내외공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도(道)의 길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선도야말로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된 인간상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선도는 정신과 육체,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궁극적으로 지향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관념적이나 언어적인 차원의 득도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또는 자연과의 소통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득도 또는 등선(登仙)을 원하기 때문이다.

▣ 박정진(1990)의 '잃어버린 선맥을 찾아서'에서 발췌·요약 되었음

 

 

선도의 맥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겼다. 하지만 우리민족의 음주가무는 그냥 술먹고 노래부르며 노는 그런 단순한 유희나 오락의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엄숙한 의식이자 거대한 행사였다. 하늘과 조상을 받들고, 행복을 기원하고 한을 푸는 제단이었으며, 상하관민, 남녀노소 모두가 하나되어 어우러 지는 커다란 대동놀이엿다. 이러한 부분과 관련하여 가장 오랜 기록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살펴 보자. 이 시대 우리 역사는 고조선 멸망 후 부여(夫餘), 예(濊), 삼한을 거쳐 고구려 건국으로 이어지는 시기인데 이 때를 우리 조상들의 '주야음주가무'는 이랬다.


부여: 납월(臘月;섣달)에 하늘 굿(天祭)을 올린다. 온나라가 한데 모여 며칠씩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이를 이름하여 이를 영고(迎鼓)라 한다. 이 때는 형벌과 옥사를 끊고 감옥을 열어 죄수의 무리들도 풀어준다.
고구려: 10월에 하늘 굿을 벌이는데, 온 나라가 크게 모인다 이를 동맹(同盟)이라 한다.
: 10월 하늘 굿을 올리는데 밤낮으로 술마시고 노래하며 춤춘다, 이를 무천(舞天) 이라 한다.
삼한: 5월 파종 10월 추수가 끝나면 밤낮으로 술마시고 춤을 춘다. 각 나라(國邑)마다 천군(天君)을 뽑아 굿을 주재케 한다. 또 각 나라가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을 두는데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단다. 이 소도를 성스러이 여겨 도망자가 그 안에 들어와도 돌려보내지 않는다.


이 제례와 의식, 놀이들은 멀리 배달시대의 신선도에서 출발하여 이때에는 하늘굿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 풍류와 신명은 곧 신라의 풍류도(風流道)와 화랑도(花郞道), 고구려의 조의선인과 백제 문무도(文武道)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그 맥은 고려시대 선랑(仙郞), 국선(國仙), 또는 국자랑(國子郞), 재가화상(在家和尙)으로 이어졌음이 국내외 여러 전거에 뚜렷히 기록되어 있다.

◈ 강기준(1997)의 '다물, 그 역사와의 약속'에서 발췌되었음

 

 

도교의 뿌리는 한국의 선도(仙道)

 

이(理)는 정신의 절대적 경지이고 기(氣)는 물질을 담는 빈 공간(그릇)이다. 이런 점에서 이와 기는 정신과 물질보다 더 폭넓은 개념인 것 같다. 그런데 동아시아, 좀더 구체적으로 한국, 중국, 일본은 다 함께 옛부터 흔히 이와 기로 자연과 인간을 분석하고 종합(미적분)해왔으며 그연원은 천지인을 근간으로 하는 샤머니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선사시대의 샤머니즘 문화는 유교, 불교, 기독교 문명의 발생과 함께 주도권을 상실하지만 기원 전 7세기 이전에는 세계문명을 지배한 강력한 종교였다. 칼 야스퍼스는 오늘날 고등종교로 지칭되는 불교, 기독교, 유교, 조로아스터교 등은 모두 신선교(후에 巫敎로 칭함) 이후에 일어난 파생종교로 보았다.

 

샤머니즘(지금의 무당과 다르다)은 종교의 원형이며 인간생활의 원형이다. 샤머니즘은 천 지 인 사상 이외에도 문화적 프로그램(노하우)을 한데 모은 복합적 특성(문화복합)으로 고대미개선사사회를 이끄는 문명체계를 이루었다.

 

더욱이 유교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고대 샤머니즘의 정신을 반영하거나 합리화하여 재구성한 부분이 많다. 춘추전국시대의 공자(孔子)에 이르러 재래의 사상과 원시유교가 집대성되고 합리화되면서 모양이 크게 달라졌지만, 샤머니즘의 천 지 인 사상 등은 유교체계의 기반을 이룬다.

불교도 중국을 거친 '격의불교(格義佛敎)'의 탓으로 한자말로 옮겨지면서 이(理)와 기(氣)라는 용어의 사용과 함께 도교와 습합된다. 그런 점에서 유교와, 불교, 도교 속에서 선맥(仙脈)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무교(巫敎)와 선도(仙道)는 고대에서 구분이 힘들 정도이며 단군은 무당이며 선인(仙人), 신선(神仙)이기도 하다.

 

도교(선도)의 연원이 중국인가, 한국인가? 중국도교와 한국도교(선도)는 무엇이 다른가? 도교(선도)와 샤머니즘은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질문들과 함께 도교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흔히 샤머니즘은 고대의 원초적인 종교현상, 또는 제정일치시대의 사회(국가)지도원리라고 보아왔다. 김범부(金凡父)에 따르면 '산'이니 '센'이니 하는 어원은 '샤먼'에서 온 것이다. 신잡힌 사람을 '사얀'이라고 한다. 상고시대에 '산'이 곧 무당이고 이는 선(仙)의 음(音)인 '센'에서 파생된 것이다. 샤머니즘과 선도 중 시기적으로 선후를 따질 때 선도가 앞설 것 같다.

 

선도는 천지(天地) 속에서 인간의 입지를 정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중개자를 설정하기보다 개인적 자연적(과학적) 삶의 순리를 강조하고 있다. 이에 비해 샤머니즘은 샤먼이라는 중개자를 통해 천지를 통합함으로써 집단적 종교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선도는 종교 이전, 사상 이전, 역사 이전의 가장 비언어적인 수도적 삶의 원형이다.

 

중국의 도교와 한국의 선도(도교) 중 어느 것이 먼저냐를 따질 때 한국선도가 먼저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황제(黃帝)가 한국[東夷] 땅에서 신선술(神仙術, 神仙道)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도 역시 황제가 한국[靑丘] 땅에서 자부(紫府)선생으로부터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다고 전한다.

 

중국도교의 연원으로 보는 『노자(老子)』에도 신선설(神仙說)이 나오지 않고 있다. 중국도교는 『장자(莊子)』에 이르러 신선이 언급되고 있으며 이로 미루어 한국의 선도가 중국화하면서 도교로 되고 이 도교가 다시 한국으로 역류한 성격이 강하다. 한편 한국의 도교도 동명왕(東明王)이 창설했음을 문헌이 전한다.

 

한국문화는 선도(仙道)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선도는 고조선문화와 단군에서 비롯된다. 그후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나오는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로써 선도를 중심으로 당시 유 불 선을 통합함으로써 부활, 아니 명맥을 유지했다.

▣ 본 글은 "박정진"의 저서 "잃어버린 仙脈을 찾아서"에서 발췌되었습니다

 

 

황제헌원과 신선사상

황제헌원의 조상은 소전少典이라는 사람이고, 소전은 신농神農의 조상이기도 하며 배달국에서 갈라져 나온 인물이다. 그런데 《사기》는 헌원의 호가 유웅씨有熊氏라 하여 그가 웅씨熊氏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그의 먼 조상인 소전이 배달국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기》 색은索隱에서는 신농과 헌원은 모두 소전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태백일사》의 내용과도 일치하는 내용으로, 그들의 뿌리, 즉 삼황오제의 뿌리가 동이족에 있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헌원이 자신의 군대를 '운사雲師'라고 부른 것 또한 그가 배달국의 후손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그리고 이를 '황제黃帝'라 일컫는 것은 그가 오행五行에서 중앙에 해당하는 흙(土)의 기운으로 제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치우 천왕과의 싸움에서 패한 뒤 그는 치우 천왕에게 귀의하여 청구국 고유의 천부인 3개에서 유래한 신선도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신선도는 후대의 노자와 장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도교道敎를 일명 신선도교神仙道敎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 뿌리가 청구국(배달국)의 신선도에 있기 때문이다.

 

진晉나라 때의 도인 갈홍葛弘(283∼343)이 저술한 《포박자抱朴子》에는 헌원과 청구국의 신선도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황제黃帝가 동쪽으로 청구靑邱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 자부紫府 선생을 만나 뵙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으며 이로써 만신萬神과 어울렸다.』

 

황제헌원이 청구국의 신선(神人) 자부 선생으로부터 천부天符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은 뒤 이를 깨우쳐 도를 얻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사실은 《태백일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자부紫府 선생이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궁궐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칭찬하시고 삼청궁三淸宮을 세워 그곳에 기거하게 하시니 공공共工·헌원軒轅·창힐倉詰·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와 배웠다.』

헌원 등이 청구국에서 수학하였음을 말하는 내용인데, 이로써 헌원에서 노자로 이어지는 도교의 근원이 청구국(배달국)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사기》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道가 있는데 3교(도·불·유)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 이일봉(1998)의 '실증한단고기'에서 발췌되었습니다.

 

또 중국의 도교와 한국의 선도(도교) 중 어느 것이 먼저냐를 따질 때 한국선도가 먼저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황제(黃帝)가 한국[東夷] 땅에서 신선술(神仙術, 神仙道)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도 역시 황제가 한국[靑丘] 땅에서 자부(紫府)선생으로부터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다고 전한다.

 

중국도교의 연원으로 보는 『노자(老子)』에도 신선설(神仙說)이 나오지 않고 있다. 중국도교는 『장자(莊子)』에 이르러 신선이 언급되고 있으며 이로 미루어 한국의 선도가 중국화하면서 도교로 되고 이 도교가 다시 한국으로 역류한 성격이 강하다. 한편 한국의 도교도 동명왕(東明王)이 창설했음을 문헌이 전한다.

 

한국문화는 선도(仙道)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선도는 고조선문화와 단군에서 비롯된다. 그후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나오는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로써 선도를 중심으로 당시 유 불 선을 통합함으로써 부활, 아니 명맥을 유지했다.

▣ 본 글은 "박정진"의 저서 "잃어버린 仙脈을 찾아서"에서 발췌되었습니다.

 

 

국선도와 심신불이(心身不二):국선도 수련의 이론적 기초를 찾아서

심재룡(서울대 철학과 교수)

국선도는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닦는 운동입니다. 몸과 마음을 따로 닦는 것이 아니라 함께 닦는다는 데에 국선도 수련의 묘미가 있습니다. 함께 닦되 몸과 마음을 둘로 보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이 국선도 행공의 이론적 기초를 토대로 그 몇가지 특징적 장점을 기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몸과 마음을 나누어 보는 이론은 심신이원론이라고 합니다. 서양 근세를 철학적으로 정초한 데카르트에 의해서 주창된 이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런 이론을 마치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심신불이론은 심신이원론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본래 심신의 조화를 지향하는 우리 국선도의 행공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유불도를 막론하고 모든 종교 및 철학전통들이 마음과 몸에 대해서 심신불이론적인 이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 이론의 요점은 마음과 몸을 개념상 따로 떼어 보지 않는 것입니다. 기능상 구분이 가능하지만 존재론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서양의 스피노자도 이와 비슷한 이론을 제출했습니다. 동양적 이론만의 특징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몸이 하나되기란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하는 것이지 결코 마음과 몸이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심신의 합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논점을 이제부터 하나하나 따져 보는 것이 저의 임무이겠습니다.

 

 

수양의 현대적 의미

수양(修養)에서 수(修)는 마음을 갈고 닦고, 양(養)은 마음의 심지를 기른다는 뜻이다. 수양이란 언어가 있다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실천적인 문화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수양문화가 제대로 계승되지 않고 단절되었다. 따라서 어떻게 마음을 갈고 닦으면서 심지를 기를 것인가가 막연할 따름이다.

 

마음의 상태는 호흡에 그대로 나타남을 알 수 있는데 이 호흡의 유형이 물결형, 파도형, 마디형, 비단형 네 가지로 나타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마음을 갈고 닦는다는 것은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유형의 호흡을 비단결 같이 매끄러운 호흡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다. 즉 들뜨거나 거칠거나 옹이진 마디처럼 맺힌 마음을 호흡을 통해서 매끄럽게 가다듬는 것이다.

 

마음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수련을 통해 본인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다. 호흡을 통해 마음을 갈고 닦으면 진정한 마음의 평안이 오며, 모든 스트레스가 풀리고 인간 관계나 일에서 오는 모든 갈등이 해소된다.

마음은 심지를 기르는 것이다. 심지는 마음의 뿌리와 같다. 호흡은 처음에는 가늘고 짧은데 수련이 깊어질수록 굵고 길어진다. 심지를 기른다는 것은 호흡을 할 때 진폭이 커지고 진폭의 축이 실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를 키움으로써 내적인 집중력과 의지력, 강인성과 지구력을 기를 수 있다. 이러한 효과를 외적으로 키우는 것이 요즈음 흔히 말하는 극기훈련이다.

 

집중력과 의지력은 자율성을 신장시켜 자기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바탕이요, 뿌리이다. 나아가 자신의 뿌리가 튼튼할수록 적극적인 성향으로 바뀐다. 가치관과 사회 환경이 급속히 변화하는 데서 현대인들은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해 혼란을 겪고 무기력해지며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이러한 자신을 붙잡기 위해 고집과 오기로 버티어 보기도 하지만 뭔가 부자연스러움을 느낀다. 고집과 오기는 웅크리고 거머쥐는 속성이 있어서 나무의 옹이와 같이 자신이 응축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수양의 원래 의미와 효과를 생각해 보면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수양은 절실하게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 본 글은 임경택 교수(1998)의 저서 '숨쉬는 이야기'에서 발췌되었습니다.

 

 

국선도는 全人的 자기완성에 기여

金仟基 교수

발표논문 요지

21세기 정보화 세계화 시대에 대비한 미래의 교육방향은 전인적(全人的) 인간완성에 맞춰져야 하며 이를 위한 교육개혁은 공생공존과 상생(相生)관계를 증진시키고 일화통일(一和統一)적 관계를 중시하는 국선도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끈다. 사단법인 국선도법연구회가 창립 30주년을 맞아 19일 상오 11시 서울국회의원회관내 대회의실에서 『21세기의 새로운 정신문명 국선도의 역할과 사명』이란 주제로 여는 학술세미나에서 전북대 金仟基 교수(교육학)는 이같은 요지의 『21세기 국선도의 교육적 의의』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다음은 발제요지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있는 시점에서 동양사상의 재발견이 새롭게 이루어지면서 교육에 있어서도 종래 서구식 교육사고의 틀에서 벗어난 동양 전통적인 사고방식이나 세계관에서 재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처럼 동양사상이 재조명되고 있지만 선도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형편이다. 특히 국선도 혹은 풍류도(風流道)에 대한 연구는 극히 미비하고 그것마저도 종교적인 측면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국선도 수련법이 교육에 주는 의의는 무엇인가.

 

첫째 국선도의 목적인 전인적인 자기완성에서 그 교육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정신을 키우고 덕성을 길러주면서 동시에 강인한 몸을 갖도록 하는 전인적 수련을 통해 인간을 선인의 경지까지 이르게 한다는 측면에서 기존 학교교육에서 소홀한 전인교육의 실현에 기여한다.

 

둘째 국선도는 정신적 도덕적 신체적 수련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학교의 전인교육의 단편화를 재검토하도록 해준다.

 

셋째 국선도는 전인적 인간의 완성이 서구교육의 특징인 개념조작적 지식교육만으론 안된다는 점을 밝혀주고 있다. 물론 지식교육을 통해 이성을 계발하고 합리적 사고력을 갖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교육은 지식의 교습(敎習)을 본 뜻으로 삼되 반드시 심신수련이 구반되어야 한다. 현대교육에서 상실한 것은 바로 몸과 마음의 수련이다.

 

넷째 국선도는 전인적인 자기완성이 대자연의 힘에 참여하는 우아일여(宇我一如)와 천인합일(天人合一)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보여준다. 국선도에서 말하는 전인적인 자기완성은 개개인의 이기성과 경쟁과 성공을 중시하는 서구의 개체주의적 자유주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바로 동양사상인 공생공존의 천지인 합일적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선도는 하늘과 땅과 인간의 상생과 공존이 천도 지도 인도임을 주장한다. 그것을 일화통일이라 부른다. 현재의 학교교육은 자신에만 집착하는 이기성을 부추긴다. 선도에서는 욕심과 탐욕을 버리고 대우주심과 합일해야만 기(氣)와 생명을 살릴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교육개혁이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병폐와 문제를 해결하고 21세기 교육의 새 비젼을 제시하는데는 미흡하다. 21세기는 인류의 도덕적 정신적 파산을 초래할 수 있는 경쟁력 향상의 담론을 넘어서서 인간과 인간 혹은 인간과 자연이 협동하며 공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한 교육개혁이 필요하다. 미래교육의 전망을 생태중심 또는 생명중심의 동양사상에서 찾고자 한다면 또한 현실교육의 문제를 이러한 사상에서 새롭게 규정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다고 한다면 21세기 미래교육에 국선도가 시사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국선도와 서양 도수체조의 비교 검토

연구자: 권운택(한국체육대학)

 

논문요약

우리 한국인에게는 여러 훌륭한 전통 도수체조가 있다. 이같은 한국의 체육 문화에 속하는 전통 도수체조를 발굴하여 근대적 서구의 도수체조와 비교 분석을 거쳐 도수체조로서의 가치와 우수성을 입증해 냄으로써 우리의 체육문화를 통한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함과 동시에 국민체조로 확산시키고자 하는 것이 오늘의 바람이다.

제 1장 국선도(國仙道)의 역사와 정신
제 2장 국선도 체조의 제 특징(諸 特徵)
제 3장 서양 닐스북 체조의 특성
제 4장 국선도 체조와 서양 도수체조의 비교검토

 

 

                    제1장 국선도(國仙道)의 역사와 정신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옛 기록들에서 밝달임금(檀君王儉)을 한얼사람(天神人, 王人, 神人)이요 신선사람(神仙人, 神人, 仙人)이라 하였다. 이 한얼사람과 신선사람을 한자로 天人, 神人, 仙人이라 하였다. 여기서 仙은 선( 天)이라고도 쓰는데, 우주를 한나라(國)로 보고 人과 天이 妙合(仙)하니 이러한 大自然의 길을 모아 이름하여 국선도라는 것이다. 국선도의 수련방법은 단전[丹田(下腹部)]를 중심으로 깊은 숨쉬기(深呼吸)를 통하여 정(精)을 충일시키는 축기방법(畜氣方法)과 함께 굴신(屈身) 동작(체조동작)을 천천히 하는 것이다. 이것을 행공(行功)이라 하는데, 행공을 하루 한두 시간씩 수도함으로써 도심(道心)과 도력(道力)을 체득하여 전인적(全人的)인 참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선도법이요 국선도이다.

 

국선도의 정신으로 충효사상과 건강장수사상을 들 수 있겠다.

 

첫째, 忠孝思想: 국선(국선), 선랑(선랑), 선인(선인) 등이 모두 같은 말로 배달임금 한배검으로부터 유래하였다. 단군왕검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자기의 얼로 삼았는데, 이것은 배달민족의 얼이요 국선도(화랑도)의 얼이 되기도 한다. 국조 단군왕검은 자기의 얼인 홍익인간의 발전적 전개로 하늘, 땅 숭배와 조상공경 그리고 애인(愛人), 즉 사람 사랑을 자기의 근본사상(根本思想)으로 삼는 동시에 우리 배달겨레에 가르쳐 주었고, 이러한 충효사상은 고구려의 조의선인( 衣仙人)을 통해서 일찍이 전수 발전되었고, 신라 화랑들의 기백과 기풍의 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健康長壽思想: 우리 조상들은 심신의 모순이나 분리를 생각지 않았다. 한국인들에 있어 몸은 마음에 관한 일체의 표현이었으며, 마음은 몸의 생명인 실체란 고유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현대의 일반적인 신체관(身體觀)과 별 다름이 없다. 국선도의 건강장수사상은 단학(丹學)과 연관이 되는데 본성(本性)에 연결시킨 단학의 기본이념은 제하(臍下)의 1촌(寸) 3분(分)의 단전(丹田)을 기준으로 몸을 안정시키고 일호 일흡(一呼 一吸)을 잘해서 전신(全身)에 분산된 원기(元氣)를 단전(丹田)에 응집시킨 상태에서 유지, 보존하여 심신(心神)의 명징(明澄)함과 건강함을 지니면서 장생불로(長生不老)에 이르려는 것이다. 이것이 국선도의 건강 장생술의 근간이라 하겠다.

 

 

제2장 국선도 체조의 제 특징(諸 特徵)

국선도는 양생비법(養生秘法)인 동시에 道이다. 국선도의 성격은 제일의적으로 종교(宗敎)가 아니며, 신(神)이나 영(靈)을 직접 위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의 실존을 그대로 대상으로 삼는 실존생명(實存生命)의 자연과학(自然科學)일 뿐이다. 국선도 정신과 수련방법에 근거해 볼 때 국선도 체조는 조신과 호흡에서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조신(調身)이란 몸을 균형있게 고르게 움직여 주는 동작을 말한다. 그런데 국선도에서는 운동의 정도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즉 부분적인 운동은 전체적 운동만 못하고, 전체적 운동은 내공을 갖춘 전체적 운동만 못하며, 한편에 치우친 운동은 몸의 균형에 조신(調身)의 조화가 되지 못하여 신체적 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사람은 숨을 쉬지 않고는 한 시간도 살 수 없으며, 한 사람의 건강을 진찰하는데 있어서도 그 사람의 숨쉬기는 대단히 중요한 단서를 준다. 그런데 국선도 체조에서는 단리를 응용한 돌단자리(下丹田)로 숨쉬고 몸을 고르는 동작을 하여 우리 몸안의 정력의 원천을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돌단자리 숨쉬기와 고요한 몸놀림을 하는 가운데 정(精)이 충일(充溢)하면 기(氣)가 장(壯)하여 진다고 하여 이 원리를 정수기 기수신(精隨氣 氣隨神)의 단학원리(丹學原理)라 한다.

 

국선도 체조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그 효과를 높이고 또 성과를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신체 수련의 규범이 있고 현대 체조에서는 찾기 힘든 정신적 수련 규범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 체조가 대부분 서서 동작을 하는 데 비해 국선도 체조는 앉거나 누워서 하는 부분이 상당히 포함돼 있다.

 

 

 

 제3장 서양 닐스북 체조의 특성

서양 도수체조(徒手體操)의 대표적인 닐스북 체조를 체조형(體操形), 체조구성(體操構成), 운동방법(運動方法), 신체효과(身體效果), 체조의 성격 등으로 분석해 볼 때 신체효과 측면에서 닐스북 체조는 리듬을 존중하고 탄력성(彈力性)을 이용한 동적인 체조이며 힘찬 운동이다. 율동(律動)이 끊어짐이 없이 연속적으로 흘러가며 하지(下肢)와 전신운동(全身運動; 跳躍, 走)이 많이 채택되어 있지만 각부(各部)는 균형이 잡혀져 있다.

 

닐스북 체조는 청년의 근육을 유연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기술이 고도의 것이었고 복합기술 및 연속기술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는 너무 수준의 차가 심하여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한 목표로 많은 노력을 해왔다. 서양 도수체조인 닐스북 체조는 정지된 자세에 의한 것보다도 잘 구성된 활발한 율동적 동작을 구사하고 있다. 닐스북은 체조의 중요성을 유연성(柔軟性), 근력(筋力), 조정력(調整力), 혹은 민첩성(敏捷性) 발달의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제4장 국선도 체조와 서양 도수체조의 비교 검토

국선도 체조와 닐스북 체조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유사한 면을 찾을 수 있다. 즉 아무런 기구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하며 공간 외의 다른 시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스프츠나 그 외의 모든 본운동전에 준비운동으로서 할 수 있으며, 남녀 노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체조동작, 신체구성 면, 운동방법적인 면, 체조성격적인 면 등에서 거의 같다.

 

그러나 서양 도수체조인 닐스북 체조는 정지된 자세에 의한 것보다도 잘 구성된 활발한 율동적 동작을 구사하는 반면, 국선도 체조는 모든 관절과 근육을 여러 각도에서 무리함이 없이 조화있게 움직여 신체의 말단에서 기 중심부로, 다시 온몸으로 기혈을 순환시켜 몸과 마음을 튼튼히 한다는 체조로서 발생지가 동양인 점에서 서양의 그것과 다르다.

 

국선도 체조와 서양 도수체조인 닐스북 체조의 비교를 통해 그 우수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① 근대의 닐스북 체조는 그 체조의 운동이 모두 일상 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근육과 관절을 운동시켜서 스포츠 기능을 향상하고자 함에 반해서, 국선도 체조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쓰지 않는 근육과 관절도 고루 운동시키는 점이 그 차이라 하겠다.

 

② 닐스북 체조는 부분적 개별적 복합적 연속 운동이 많이 포함되어 일반적으로 단련적이고 동작이 경쾌하여 안정적이지 못하나 국선도 체조는 동작이 정적이고 복합적이고 무리하지 않아서 중심과 평형 유지가 용이하며 또한 운동 상해도 방지될 수 있다.

 

③ 닐스북 체조는 힘을 발산시켜서 근육의 힘을 강화시키나 국선도 체조는 호흡을 통해서 조식, 조신, 조심(調息, 調身, 調心)의 효과로 안정되고 힘이 축적되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④ 닐스북 체조는 진동(振動), 굴신(屈身) 및 도약동작(跳躍動作)이 많으나, 국선도 체조는 굴신(屈身), 염전(捻轉) 및 전향동작(轉向動作)이 많아 장기(臟器)의 강화와 치료 효과가 크다.

 

⑤ 닐스북 체조는 단련적 연속적인 동작인 데 반해 국선도 체조는 충분한 정적인 운동으로서 정신통일의 효과가 크다.

 

⑥ 닐스북 체조는 서양의 선가주의적(仙家主義的) 애국심의 발로로 탄생되었으나 국선도 체조는 우리 고유의 토속신앙인 경천사상과 충효사상에 뿌리를 둔다.

 

이상과 같은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극소수에 의해서만 비전되고 있거나 이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전통문화의 발굴 계승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매우 인간적이면서 과학적 이론이 뒷받침되어 있는 국선도 체조의 범국민 실용화 단계가 보다 앞당겨질 수 있도록 하는 후속 연구와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단침과 열기

단전호흡을 통해 나타나는 단침과 열기는 하늘이 준 보약이다. 몸 안에서 스스로 정화하는 자정 능력, 치유력, 면역력과 복원력의 가장 핵심적인 원리는 "단침과 열기"이다.

 

♣단침이란 무엇인가?
잡념이 없어지고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을 때 생기는 것이 단침이다.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3∼4개월 정도 수련하면 단침을 느끼게 되는데 이 정도 수준이면 불면증이나 극도의 불안감, 편두통과 마음 속의 가슴앓이는 없어지게 된다.

 

♣열기란 무엇인가?
호흡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열기가난다. 그것은 정신 통일이 되어 간다는 증거이다. 이때 나오는 열은 기력의 원천이고 모든 염증을 없애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

단전(丹田)이란 말 자체가 '열이 나는 밭' '열기가 나는 곳'이라는 말이다.

▣ 본 글은 임경택 교수(1998)의 저서 '숨쉬는 이야기'에서 발췌되었습니다.

 

 

김시습

15세기 한국사상사를 대표하는 김시습(金時習)은 문학사의 전개에 있어서 <금오신화>란 한문소설을 창작한 인물인 동시에, 유교의 이기철학(理氣哲學)과 불교의 화엄사상(華嚴思想), 그리고 선도의 내단사상(內丹思想)을 한몸에 지닌 사상가이면서, 세조의 찬탈로 인한 왕권교체의 충격을 감당해야 했던 불우한 선비의 전형이기도 하다. 김시습의 모순된 행적과 그의 사상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논의를 전개하지 않고, 행적과 사상을 각기 개별적 현상으로 따로 다룬 관계로 그를 나쁘게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겠다.

 

김시습은 고려말 길재 등으로부터 전승된 도학정신을 계승하여 생육신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에 의탁한 행적이 문제되어 유학사에서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김안로가 일으킨 여러 차례의 옥사 이후에 사림의 정신적 지주가되어 매월당(梅月堂)으로 지칭될 정도로 사후에 그의 청절(淸節)이 인정되었다.

 

김시습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사육신이 죽음을 당하자, 세상에 뜻을 잃고 스님이 되었다. 스님이 된 뒤로는 방방곡곡을 바람처럼 떠돌아다녔다. 그는 한때 오세암에 은거했었다. 선가(仙家)에서는 그가 오세암에 머무는 동안 선도(仙道)를 닦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선 선가서(仙家書)인 <해동이적(海東異跡)>과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자세히 쓰여 있다.

 

<해동전도록>에 따르면, 김시습에게 선도를 가르친 사람은 김고운(金孤雲)이다. 김고운은 원래 중국 사람으로 본명히 설현( 賢)이었다. 설현은 고려 때 우리 나라에 유람차 왔었다. 그는 지리산에 들렀다가 권청(權淸) 진인(眞人)을 만났다. 권진인은 영생불사(永生不死)하는 선인(仙人)이 되어 최치원 선생과 함께 지리산에 머문다는 분이다.

 

이 권진인이 설현을 선도에 입문시켰다. 훗날, 설현은 명오(明悟)라는 스님을 서대산에서 만났는데, 명오스님한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설현은 명오스님의 지도에 따라 8년 동안 수행하여 득도(得道)했다.

 

설현은 득도하자 곧 선계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도(道)를 전수해줄 제자를 만나지 못해 인연이 닿는 사람을 기다렸다. 이 때 이름을 김고운으로 고쳤다. 이름을 바꾼 뒤에는 경상도와 강원도를 오가며 백여 년 동안 어린이들에게 <통감>을 가르쳤다. 그사이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교분을 맺었으나 누구도 그의 참모습을 몰랐다.

 

김고운은 조선 세종 18년(1436)에 드디어 선도와 인연이 깊은 사람을 만났다. 바로 매월당 김시습이었다. 두 사람은 춘천에서 만났다. 당시 매월당은 팔팔한 청년이었다. 또 자기를 극진히 아꼈던 세종이 아직 왕위에 있던 때였으니, 세상에서 큰일을 하고 싶었다. 김고운이 매월당에게 수도(修道)하라 권했지만, 매월당은 관심이 없었다.

 

그후, 매월당이 오세암에 머물 때 김고운이 그를 찾아왔다. 매월당은 이번에는 서슴지 않고 김고운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리고 열심히 선도를 닦았다. 김고운은 매월당에게 도를 전한 뒤에 수해선(水解仙)이 되었다. 수해선이란 몸이 물로 화(化)했다가 선계(仙界)로 올라가는 선인(仙人)을 일컫는 말이다.

 

<해동이적>은 매월당이 오세암에 머물 때에 있었던 일화를 이렇게 전한다.

김시습이 일찍이 설악산에서 은거하는데, 강릉 사람 최연이 친구 대여섯 명과 함께 제자가 되겠다며 찾아왔다. 김시습이 그들의 인물됨을 살펴보니, 최연이 제일 쓸 만했다.

 

이에 다른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최연만을 제자로 삼았다. 최연은 오세암에서 매월당과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이 사제지간이 된 지 어느덧 반 년이 지났다. 최연은 자나깨나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밤중에 어쩌다 잠이 깨어 눈을 떠 보면 스승이 온데간데없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최연은 김시습이 한밤중에 도대체 어딜 가서 뭘 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자는 체하고 있다가, 김시습이 방을 나간 다음 곧바로 뒤쫓았다. 그런데 순식간에 사라져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 실패한 끝에 드디어 하루는 스승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김시습은 골짜기 하나와 능선 하나를 넘어 넓은 바위가 있는 데로 갔다.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먼저 와서 김시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바위에 앉아 한참 동안 얘길 나눴다. 최연은 그들이 하는 얘기를 너무 멀어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김시습은 최연이 몰래 숨어서 엿본 것을 알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김시습이 정색을 하고 최연을 꾸짖었다. "나는 너를 제자로 삼을 만하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네가 너무 번거롭고 조잡하여 더 이상 가르칠 수가 없다. 물러가라." 최연이 백배사죄했으나, 김시습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반 년 만에 깨지고 말았다.

 

<해동전도록>에 의하면, 김시습은 도(道)를 홍유손, 정희량, 윤군평 등에게 전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유명한 이인(異人)들이다. 정희량은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까지 지냈는데,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될 줄 알고 종적을 감췄다.

 

김시습이 열반에 든 곳은 충남 부여에 있는 무량사다. 김시습은 열반에 들 때 스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땅 속에다 3년 동안 묻어둬라. 그후에 정식으로 화장해 다오"라고 했다.

스님들은 그가 원한 대로 시신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3년 후에 다시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려고 무덤을 열었다. 관을 뜯고 보니, 김시습의 시신은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았다. 얼굴에는 불그레하게 핏기가 감돌았다. 누가 봐도 산 사람이지 시신이 아니었다. 스님들은 모두들 그가 성불(成佛)했다고 확신했다.

 

김시습이 열반에 든 지 7년 후의 일이다. 놀랍게도 제자 윤군평이 스승 김시습을 개성에서 만났다. "아니 스승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선화(仙化)하신 지 벌써 7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윤군평은 눈을 휘둥그래 뜨고서 스승에게 여쭸다. "나는 오고 감이 자유자재다. 요새는 서경덕에게 도(道)를 가르치고 있다. 이곳에 왕래한 지 벌써 2년째가 된다." 윤군평의 물음에 김시습이 이렇게 대답했다.

 

김시습이 죽어서 3년이 지난 뒤에도 시신은 산 사람과 똑같았는데 얘기는, 이율곡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김시습전>에도 나온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세암은 선계(仙界)의 기운이 왕성한 곳이다. 매월당 김시습이 선인(仙人)이 되었다는 얘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는다

 

      

 

 

 

 
 

             


 

 
 

 

 

비밀댓글입니다

 
 
 

역사

천화대 2014. 8. 17. 15:41

우리 나로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도 크셨겠지만 저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런데 대략 6시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7시에 거의 그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저는 성공을 너무너무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날 연구실을 나오면서 이러한 생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그날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로호의 실패에도 있었지만 행여라도 나로호를 만들었던 과학자,

기술자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그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고

그분들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런 글을 하나 봤습니다.

 

1600년대에 프랑스에 라 포슈푸코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활활 타오른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의지가 강열하다면 또 우리 연구자, 과학자들의 의지가 강열하다면

 나로호의 실패가 더 큰 불이 되어서 그 바람이 더 큰 불을 만나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그런데 이 나로호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것도 바로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고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을 국민이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1957 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습니다.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학생인 저도 충격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뱅가드호를 발사했는데 뱅가드호는 지상 2m에서 폭발했습니다.

이것을 실패하고 미국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왜 소련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가,

그 연구보고서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미국)가 중학교, 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꿔야 한다.

’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도 독일 과학자들의 힘이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이 뱅가드호를 실패하고 그 다음에 머큐리, 재미니, 여러분들이 아시는 아폴로계획에 의해서

우주사업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미국의 힘이 아니라 폰 브라운이라고 하는 독일 미사일기술자를

 데려다가 개발했다는 것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중국은 어떻게 되냐면 여기는 과학자들이니까 전학삼(錢學森)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텐데요,

전학삼은 상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에 공과대학에서

 29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를,

2차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팀장을, 그리고 독일의 미사일기지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핵심기술자입니다.

 

그런데 이 전학삼이라는 인물이1950년에 미사일에 관한 기밀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귀국하려다가

 이민국에 적발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첩혐의로 구금이 되었고

그때 미국에서는 ‘미국에 귀화해라. 미국에 귀화하면 너는 여기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 ’라고

이야기했고 전학삼은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미국 정부에 전학삼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 중국 정부는 미국인 스파이를 하나를

구속하고 있었고,이 둘을 1 대 1로 교환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미국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전학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너와 우리의 스파이를 교환하지만 네가 미국에 귀화한다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있다.

그랬더니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전학삼에게 ‘너는 중국에 가더라도

책 한 권, 노트 한 권, 메모지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다, 맨몸으로만 가라!

’그래도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여섯에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일화입니다.모택동이 ‘우리도 인공위성을 쏘고 싶다, 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전학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런데 5년은 기초과학만 가르칠 것이다.

그 다음 5년은 응용과학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 5년은 실제 기계제작에 들어가면 15년 후에 발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동안의 성과가 어떠하냐 등의 말을 절대 15년 이내에는 하지 마라.

그리고 인재들과 돈만 다오. 1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성과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15년 후에는 발사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택동이 그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재와 돈을 대주고 15년 동안은 전학삼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나이 61세, 1970년 4월에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이 모든 발사제작의 책임자가 전학삼이라는 것을 공식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중국의 우주과학 이러한 것도 전부 전학삼에서 나왔는데

그것도 결국은 미국의 기술입니다. 미국은 독일의 기술이고 소련도 독일의 기술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도 다 그랬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건국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았다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가 잇었는데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 할 것이 아니냐’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직접 물어봅시다.

’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도 42분 51초, 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도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鼓?)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鼓?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 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 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물리학사, 건축학사가 나옵니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