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사찰을찾아서

도시애들™ 2009. 1. 1. 01:44

 


천태산 영국사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무더운 여름날에도 땀이 쏙 들어갈 정도로 시원하기도 하고 또 그늘도 많다. 올라오는 길목에 폭포도 두 개나 있어 시원함을 만끽하며 입구까지 올라오면 고목인 은행나무가 반겨준다. 은행나무 옆으로 넘어서면 넓은 주차장이 나타나며 영국사 경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영국사는 충청북도 영동군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천태산의 깊은 산속 넓은 대지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의 풍경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창건연혁은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 말에 선종과 관련해 창건된 것으로 보이고, 고려 중엽에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을 계승한 원각국사의 하산처가 되면서 크게 번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시대 전기까지도 번영하였으나 조선의 억불 정책으로 사세는 위축되기 시작하였으나 명찰로서의 명맥은 계속 유지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잠시 폐사되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사세가 위축되었다. 1934년 주봉조사의 중건에 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영국사에는 보물로 원각국사비와 영국사부도, 대웅전 앞의 영국사 삼층 석탑과 망탑봉의 삼층 석탑이 있다. 또한 지방유형문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해 석종형 부도와 원구형부도 등이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외에 요사와 산신각 및 누각이 있고, 부속 암자로는 계월암이 있다.


[영국사 연혁 안내판...]


[영국사 만세루...]


대웅전 앞마당 앞쪽 경사면에 대웅전과 중심축을 맞추어 동향시킨 누각이 위치하고 있다. 경사진 지형에 세 단으로 축대를 구성하고 제2단 축대에 높이를 맞추어 세웠다. 최근에 조영한 건물로 단청을 베풀지 않았고, 현판이나 누상(樓上)의 시설도 갖추지 않았다. 누하 축대의 계단 위치로 보아 대웅전 앞마당, 절의 중심 영역으로 누하진입(樓下進入)을 하도록 하기 위한 누문으로서 세운 것이다. 주변의 경관이 뛰어나 누각에 올라 바라보는 풍경이 좋다. 평면은 도리통 5간, 양통 3간으로 절의 규모에 비해 비교적 큰 규모이다. 도리통은 어간을 다른 간의 거의 2배가 될 정도로 넓게 설정했음이 특징이다. 도리통 협간과 양통의 각 주간은 동일하게 설정했다.


내부는 기둥을 두지 않은 통간(通間)으로 구성했고, 창호나 벽 없이 사방을 개방시켰다. 기단은 누각이 제2단 축대의 앞쪽으로 돌출한 부분만 화강석을 장대석 형태로 거칠게 가공해 쌓았다. 초석은 모두 팔각형의 장주형(長柱形)으로 민흘림을 두었다. 기둥은 모두 원주로 흘림은 거의 없으며, 누하주(樓下柱)와 누상주(樓上柱)를 별도의 기둥으로 세웠다. 이익공식으로 초익공은 앙서형, 이익공은 수서형으로 초각했는데, 초각한 모습은 내부 쪽의 양봉형과 함께 둔탁한 느낌이다. 행공은 조선시대 이익공식의 전형적인 초각을 하였다. 주간에는 단순한 형태로 조각한 화반을 하나 씩(어간에만 2개) 두었는데, 상부에 운공(雲工)을 두었음이 특징이다.


[만세루 밑에서 올려다본 대웅전...]


가구는 무고주(無高柱)5량(樑)으로 전형적인 조선후기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세부 수법에서는 오늘날의 기법들이 반영되어 있다. 대량과 종량 및 충량은 모두 단면이 모자라는 부분만 약간 휜 상태가 반영되어 있을 뿐 직선적인 형태이다. 모서리를 둥글게 접었는데, 단면이 방형이므로 보가 무겁게 느껴질 뿐 아니라 쳐져 보이기까지 한다. 한편 대들보는 단면이 방형일 뿐 아니라 그 크기가 작아 구조적으로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천장이다. 우물마루를 깐 바닥은 기둥 바깥으로 약간 돌출시키고 계자난간을 들였다.


[영국사 대웅전...]


영국사의 중심 전각인 대웅전은 도리통 3간, 양통 3간으로 주간을 넓게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규모는 작은 편이다. 그러나 지형의 경사를 이용해 두 단의 높은 축대를 조성한 위에 세워 위치하므로 규모에 비해 당당한 느낌이 든다. 도리통 3간은 모두 동일한 주간으로 설정했으며, 양통은 전후퇴를 어간에 비해 약간 좁혔다. 정면 3간에는 모두 3분합문을 달았고, 양 측면에는 전퇴에 외여닫이문을 두어 출입을 하도록 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와 부분은 모두 벽을 들여 감실형의 평면을 구성했다. 내부에는 측면의 뒤쪽 기둥 열에 맞추어 내주(內柱)를 세웠으며, 여기에 의지해 불벽을 세웠다. 축대는 비교적 네모지게 다듬은 막돌을 이용해 쌓았고,


상층의 축대가 기단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축대 가운데 계단을 두었으나, 대웅전 우측, 즉 요사채 쪽에 별도의 계단을 두어 출입을 하도록 하였다. 초석은 다듬은 초석과 막돌초석을 혼용하였다. 그 중 일부 다듬은 초석은 수평으로 다듬은 초반 위에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원형주좌와 인방받침을 받든 원형초석이다. 그 수법으로 보아 남북국시대 신라의 전형적인 초석 형식에 속하는 것으로 절의 역사와 관련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기둥은 모두 원주로 흘림은 두드러지지 않으나 분명한 귀솟음을 두었다. 기둥 상부는 창방으로 연결했고, 그 위에 평방을 올렸다. 맞배지붕임에도 불구하고 양 측면 툇간까지 창방과 평방을 돌리고 있음이 특징이다.


[내부 기둥열에 맞추어 올린 영국사 대웅전내 불단...]


창방과 평방의 뺄목을 비교적 길게 돌출시킨 점도 이 건물이 지니는 특징이다. 창방뺄목은 단면을 수장폭으로 줄였고, 그 아래에 초각을 베풀었다. 공포는 주심포와 함께 각 주간에 1구씩의 주간포를 둔 다포식이다. 맞배지붕이므로 측면에는 공포대를 두지 않았다. 내외3출목, 즉 내외7포로 주심포는 상부에 보뺄목을 노출시켰다. 모든 살미는 조선시대 건축의 일반적인 법식을 따라 상하가 맞닿도록 하여 하중을 받는데 유리하도록 하였다. 제1단에서 제3단까지의 살미는 모두 앙서형으로 상부에 연봉과 연꽃을 초각해 장엄했다. 제4단은 끝이 위로 올라가도록 변형시켰으나 기본적으로는 수서형에 속한다.


주간포에만 둔 제5단 살미는 끝을 두루뭉술한 간단한 형태로 초각했는데, 서까래로 인해 초각을 완전하게 베풀지 못한 모습이다. 초제공, 이제공, 삼제공, 사익공, 오운공으로 이어지면서 제공의 끝을 일직선으로 맞춘 것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다포 수법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각의 내용은 상당히 변형된 모습을 지닌다. 살미의 내부는 전체를 한 몸으로 초각한 양봉형이다. 다만 주간포의 제5운공만은 내부에 봉취형을 조각했다. 조선시대 후기의 다포식 불전에서는 살미 내부를 연봉이나 연화 등을 새겨 극히 화려하게 조각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그 초각의 형태가 주심포식의 구성에 가깝다. 조선시대 후기의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영국사 대웅전 좌측부 탱화...]


변형된 모습이다.첨차는 단부를 直切하였고, 그 아래를 사절(斜切)한 교두형이다. 이렇듯 사절한 것으로 인해 첨차의 모습은 뻣뻣한 느낌이 든다. 한편 조선시대의 다포식 공포는 최외곽 출목을 제외한 출목과 주심선상에 소첨(小?)과 대첨(大?)의 첨차 두 개를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주심과 내?외1출목선상에 첨차 하나를 더 올려 3개의 첨차를 중첩시켰음이 특징이다. 내주는 고주 형식이며, 여기에 의지해 전후면 주심포에서 대들보와 퇴보를 걸었다. 보의 단면은 비교적 둥근 형태이며, 아랫면만 반듯하게 깎았다. 고주와 만나는 부분은 보아지를 끼워 보강하였다. 대들보 바로 위쪽에 천장을 들였기 때문에 그 위쪽의 가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기와는 막새와 망와를 사용했을 뿐 별다른 장식기와는 사용하지 않았다. 지붕이 측면으로 돌출한 길이는 매우 짧으며, 박공에는 큼직하게 風板을 달았다. 정면의 창호는 모두 삼분합문으로 하부에 1단의 궁창부를 둔 세살의 구성이다. 내부 바닥은 전체에 우물마루를 들였다. 천장은 불단을 중심으로 한 전면 쪽 3×2간에 우물천장을 들였고, 그 뒤쪽 3×1간에는 평천장을 약간 경사지게 설치했다. 대들보 바로 위에 천장을 설치했는데, 천장과 대들보 사이의 공간에 흙벽을 쳤다. 천장의 높이와 형태 모두 조선시대 후기 불전의 일반적인 천장 구성에서 벗어난 모습이다.


[영국사 대웅전 우측부 탱화...]


어간의 우물천장은 소란대에 조각을 베풀어 어간과 협간의 것에 위계를 두었다. 건물 내외는 단청을 베풀어 장엄했다. 축부는 주칠을 바탕으로 테두리를 흑백의 선으로 긋기단청을 했다. 창방을 포함한 상부는 모로단청을 베풀었는데, 포벽의 포벽화를 그리지 않아 비교적 허전한 느낌이 있다. 다만 우물천장의 청판에는 연꽃을 새김으로서 내부는 외부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한 느낌이 든다. 벽화는 전혀 그리지 않았다. 대웅전 후면에 걸려있는 '寧國寺重修記'는 1893년(고종 30)에 척죽당(隻竹堂)이 쓴 것으로 춘계(春溪)를 비롯한 승려들에 의한 영국사의 중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 1934년에 주봉조사가 쓴 '寧國寺重修記에도 주봉조사를 중심으로 한 영국사의 중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한 중수공사의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이들 기록과 함께 대웅전의 양식으로 보아 대웅전은 1893년 또는 1934년에 새로 지은 것일 가능성이 높은데, 특히 1934년에 창건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대웅전은 1974년에 단청불사가 있었음이 대웅전 후면에 걸려 있는 '寧國寺大雄殿丹靑佛事文'에 기록되어 있고, 1979년에 영동군에서 해체보수를 실시한 바 있다.


[영국사 대웅전과 삼층석탑...]


[영국사 삼층석탑...]


대웅전 앞마당 한쪽 편에 서있는 삼층석탑은 옛 절터에 넘어져 있던 것을 1942년 주봉조사가 현 위치로 옮겨 복구한 것이라 한다. 주변에 방형 평면을 이루도록 돌을 놓아 지반을 정리한 속에 동향으로 세워져 있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옥개를 올리고 최상부에 보주형의 상륜을 올린 모습으로 신라 석탑의 기본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전체 높이는 3.41m로 크지 않은 편이다. 기단은 하층기단에 비해 상층기단의 폭을 많이 줄였다. 1층 탑신 역시 기단에 비해 폭을 많이 줄였다. 전체적으로 체감이 커서 안정감이 강한 반면 지나친 체감으로 인해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용된 화강석은 절 주변의 석재와 석질이 비슷하므로 주변의 돌을 채취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구성되는데, 지대석과 면석은 하나의 돌에 조각을 하여 만들었고, 갑석은 별도의 돌을 덮어서 만들었다. 면석에는 각 면에 3개씩의 안상(眼象)을 새겼다. 안상 하면은 면석과 지대석이 만나는 경계면에 해당하며 내부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갑석은 모두 4개의 돌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윗면은 바깥을 향해 구배를 이루도록 하였다. 따라서 모서리에 약간의 지붕마루가 형성되었고, 이 부분을 약간 치켜 올렸다. 마치 목조건축의 지붕처럼 만든 것인데 신라의 석조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갑석 윗면에는 1/4원을 이루는 두 단의 쇠시리를 두었다. 상층기단을 받치는 고임에 해당하는데, 쇠시리는 위단의 것을 아래 단의 것에 비해 매우 낮게 했다.


[영국사 삼층석탑...]


상층기단은 각 면에 하나씩 모두 네 개의 판석을 세워 면석을 구성한 위에 갑석을 덮어서 만들었다. 갑석은 하나의 판석을 사용했다. 면석에는 네 면의 각 면 전체를 차지하는 커다란 안상을 새겼다. 이 면석은 아래위가 뒤집혀 있던 것을 최근의 보수로 바로 잡은 바 있다. 안상의 아랫면은 하층 기단 갑석과의 경계면과 일치한다. 갑석에는 상하를 거의 비슷한 높이로 양분하는 턱을 두었다. 이 갑석 상면도 하층 기단의 갑석과 마찬가지로 바깥을 향해 약간의 구배를 주었으며, 모서리 부분을 약간 반곡시켰다. 또한 상면에 1/4원을 이루는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탑신고임을 이루도록 하였는데, 상,하 쇠시리의 높이를 거의 비슷하게 했다.


3층의 탑신과 옥개는 각각 하나씩의 석재로 만들었다. 탑신석은 모두 우주(隅柱)를 비교적 두껍게 새겼다. 면석에는 아무런 조각을 새기지 않았는데, 1층 탑신의 정면에만 문비(門扉)를 조각했다. 세로로 약간 긴 장방형의 윤곽을 돌려 문골을 표현했다. 이 윤곽은 2중의 쇠시리로 만들었으며, 각 쇠시리의 단면은 1/2원을 이룬다. 문골 속 중앙에 수직선을 그어 두 짝의 문을 표시했는데, 음각한 수직선의 윤곽은 매우 희미한 편이다. 상륜부에는 보주(寶珠)만 올려져 있다. 하부에 받침부를 둔 연봉형의 보주이다. 그러나 원래는 복발(覆鉢),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 등을 갖춘 상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사 삼층석탑과 종무소로 쓰이는 요사채...]


현재 절의 창고에는 이 석탑의 상륜부를 구성했던 것으로 보이는 보륜과 보개, 수연 등의 부재가 보관되어 있다. 탑 정면에는 배례석으로 사용하고자 설치한 석재 하나가 있다. 원래는 건물의 신방석으로 사용하던 돌을 탑을 복구하면서 배례석으로 전용(專用)한 것이다. 현재 두 조각이 나 있는데, 원래는 더욱 길어 고막이가 연결되고 반대편에도 신방목 받침이 새겨져 있었던 부재로 보인다. 이 탑은 신라계 석탑의 기본적인 조형을 지니고 있으나 규모가 작고 기단과 탑신부가 간결해진 점, 체감이 커서 안정성을 도모한 반면 탑신부가 왜소해진 점,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약화된 반면 문비 속의 자물통과 문고리가 상대적으로 크게 조각되었다.


비례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조각수법이 약화된 점도 이 탑이 지닌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탑은 신라 후기, 9세기말경에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의 불교문화가 선종의 유행과 함께 지방화 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탑은 영국사의 창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고려 중기 원각국사의 하산처가 되면서 번성하기 전 적어도 신라 말에는 이 절이 창건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마당에는 남은기와담과 소각탑이...]


[자그마한 수련이 애처롭게...]


[신도들의 정성이 가득한...]


[영국사 복원 불사 계획도...]


[영국사 삼층석탑 주위엔 탑을 쳐다보는 많은...]


[영국사 산신각...]


산신각은 대웅전 뒤편 우측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영국사 경내의 가장 뒤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건축형식은 매우 간단하여 사방 1간 규모이며, 초익공계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초석은 원형 주좌가 있는 것으로 옛 건물터의 초석을 활용한 것이며, 기둥은 원주로 세장한 편이며, 흘림은 거의 인식할 수 없다. 모든 부재는 기계대패로 깎아낸 흔적이 역력하다.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벽에만 가칠단청을 한 위에 긋기단청으로 테두리를 돌렸다. 산의 신령(神靈)으로 존경하며 신앙의 대상인 호랑이신앙을 불교화하면서 산신(山神)으로 승격시켜 모시고 있는 전각을 '산신각'이라고 한다. 산신각은 산 기슭에 대부분 건립된다.


[호랑이를 타고 계신 산신령...]


[영국사 산신각 산신도...]


내부 후벽에는 불단을 마련하고 산신도를 걸어놓았다. 산신도는 하단 우측에 화기를 적었는데, ‘光武十一年’, 즉 1907년에 조성된 것이다. 대웅전의 칠성탱과 함께 현재 영국사에 보관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불화로 유리 액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산신이 소나무와 폭포를 배경으로 시자(侍者) 2인의 시중을 받으며 앉아 있는데, 품에 호랑이를 안고 있다. 산신의 얼굴은 대머리에 치켜 올라간 눈과 눈썹, 그리고 검은색 수염을 하고 있음이 특징이고, 호랑이도 민화적 수법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화기에는 ‘天台山 寧國寺’로 적고 있는데, 시주자 명단을 제외한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光武十一年丁未五月日 山神幀新造成奉安于天台山寧國寺 證明 禾廣一萬 誦呪 圓澤周行 持殿 禮雲應眞 出草 錦湖若效 片手 普應文性 性曄 都監 月明德基 化主 東隱元奎 施主秩 ……(이하생략)' 산신도 앞의 불단에는 호랑이를 올라탄 산신의 상(像)과 함께 ‘聖山王大神之位’라 쓴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한편 내부 측면의 벽에는 최근에 새로 조성한 산신도가 있다. 하단 좌우에 화기란을 마련했으나 화기는 적지 않았다. 중앙에 의자에 앉아있는 산신을 그렸으며, 좌측에 시중을 드는 동자 2인과 폭포, 우측에 호랑이와 소나무를 그렸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일반적인 산신도의 구성과 동일하지만 표현방법은 지나치게 사실적이며 경직되어 있다.


[대웅전에서 내려다본 경내 앞마당...]


[대웅전에서 내려다본 영국사 삼층석탑...]


[건물부지가 역사를 말해주는듯...]


[요사채 뒷편에는 정감이 흐르고...]


[산신각 옆산에는...]


[요사채 담장과 건물...]


[영국사 만세루가 새까맣게...]


[영국사 원각국사비각...]


얕게 돌을 쌓아 난간처럼 주위에 두르고 기둥을 세워 빗살을 꽂았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정자(亭子)에서 많이 볼수 있는 4면의 모임지붕이다. 안에는 원각국사비(圓覺國師碑)가 모셔져 있다. 그래도 이 비는 행복한 편에 속한다. 덜 답답하게 가두어 놓은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든다. 창살이 너무 오밀 조밀하게 되어있으면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영국사 원각국사비...]


이 비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원각국사 덕소(德素)(1119~1174년)는 속성(俗姓)이 전씨(田氏)로 자(字)는 혜약(慧約), 어렸을 때의 이름은 자미(子美)이다. 9세가 되던 1127년에 대선사(大禪師) 교웅(敎雄)의 문하에서 머리를 깎았다. 울주의 영축산(靈鷲山)에서 법을 강론하였다. 의종대에 선사를 거쳐 대선사가 되었고, 명종대인 1171년에는 왕사가 되었다. 국사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으로부터 시작되어 익종(翼宗), 교웅(敎雄)으로 계승된 천태종의 법계를 계승하였으며, 문하에 선사 승지(承智)를 비롯해 삼중대사(三重大師)와 중대사(重大師), 입선학도(入選學徒) 등 많은 승려를 비롯해 불은사(佛恩寺)와


국청사(國淸寺), 천수사(天壽寺) 등 천 명이 넘는 승려를 거느리고 있었다. 명종 4년(1174년)에 입적하자 왕의 명령에 의해 유해를 영국사에 안치하였고 비는 그로부터 6년이 지난 명종10년(1180년)에 세워졌다. "新增東國輿地勝覽"과 "大東金石書"에서는 원각국사비의 찬자가 한문준(韓文俊;1121~1190년)임을 밝히고 있다. 한문준은 한유충(韓惟忠)의 아들로 시호는 정의(貞懿)이다. 그는 원각국사비에 나오는 관직으로 보아 1180년경에는 정3품 벼슬인 판사재사(判司宰事)는 물론 종2품 벼슬인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랐고 지제고(知制誥)로서 왕명을 관장하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다. 비는 영국사 대웅전 남쪽에 위치한 계곡인 낭골을 거슬러 올라간


[영국사 원각국사비...]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에서 약 150m 떨어진 곳이다. 경사지형을 이룬 곳으로 잘 治石한 장대석을 사면으로 돌려 쌓은 속에 위치하고 있다. 장대석으로 쌓은 축대는 네 면의 각 면 중앙에 220cm 정도의 폭으로 출입구를 만들었다. 이로 미루어 원래 방형의 비전(碑殿)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비(碑)는 새로 만든 비각(碑閣) 속에 있는데, 비각은 사방 3간, 초익공식의 사모지붕이다. 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로 구성된 전형적인 형식이다. 귀부는 파손이 거의 없으나 그 위에 세운 비신은 일부가 깨어져 나갔고 풍화가 심해 비문도 알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이수는 비신에서 떨어져 나와 귀부 옆 바닥에 보관되고 있는데,


일부 깨진 부분이 있으나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귀부는 네 장의 석판을 깔아 만든 242×257cm의 지대석 위에 올려져 있다. 지대석은 모서리를 쌍사 형태로 접었다. 윗면에는 테두리를 남기고 안쪽을 약간 파내 귀부를 안정적으로 올려놓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귀부는 한 개의 커다란 석재를 깎아 만들었다. 머리의 상면이 수평을 이루며, 그 면은 비신받침의 상면과 거의 동일한 수평면을 이룬다. 치석(治石)의 양을 최소화하려는 방편에서 비롯된 조형 특성이며, 그만큼 조각은 약화되고 형식화되었다. 목은 매우 짧고 두툼해 튼튼하기는 하나 경직된 모습이다. 큼직한 6각의 귀갑무늬를 음각한 선으로 새겼으며,


[영국사 원각국사비...]


테두리를 도드라지게 해 귀갑의 전체 윤곽을 강조했다. 앞발은 가슴에 붙여 매우 작게 표현해 약화되었고, 뒷다리도 약화된 모습으로 간단히 조각했다. 수직으로 고추 세운 꼬리는 두껍고 짧아 형식화된 모습을 보인다. 귀부 상면 중앙에는 비신받침을 두었다. 받침의 양 측면에는 안상을 새겼다. 비신(碑身)은 점판암으로 만들었으며, 세로로 긴 장방형이다. 상단에 凸형으로 길게 돌출한 부분이 있어 이수를 꽂도록 했다. 비신은 넘어져 있던 것으로 다시 세웠는데, 귀부와 중심이 어긋나 있다. 전면에 원각국사의 일대기 등을 적은 비문을 해서체(楷書體) 종행(縱行)으로 새겼고, 후면에는 국사의 문도 등 음기(陰記)을 새겼다.


비문 주변에는 보상당초문을 음각했다. 그러나 풍화가 심해 비문을 알아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수는 귀부나 비신에 비해 작은 편으로 정면 중앙에 장방형의 윤곽을 마련한 속에 3행(行) 종서(縱書)로 “圓覺國師碑銘”이라는 여섯 글자를 양각했다. 하면에는 1단의 각형괴임을 새긴 주변으로 단엽앙련(單葉仰蓮), 다시 주변으로 권운문(卷雲紋)을 새겼다. 상부에는 좌우에 각 1쌍씩 모두 4마리의 용을 조각했다. 정상부에는 보주가 있었으나 깨졌다. 귀부와 이수의 전체적인 윤곽과 조각이 평면적이며, 둔중한 형태와 약화된 조각 수법 등은 시대적 특성을 반영한 결과이다.


[영국사 원각국사비...]


[영국사 원구형 부도...]


원각국사비 뒤편에 위치한 이 부도는 주인공을 알 수 없다. 하대석과 중대석 및 상대석을 갖춘 위에 탑신을 놓고, 옥개석으로 덮었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구성은 신라 이래 부도의 전형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각 부분의 구성과 비례는 시대가 많이 떨어지는 모습은 지니고 있다. 하대석은 방형 평면으로 네 주변으로 복련을 새기고 그 안쪽에 중대석받침을 두었는데, 조각은 평면적이고 오목한 음각(陰刻)의 성향을 지닌다. 역시 방형의 중대석은 높이가 낮은 편이며, 각 면에는 윤곽을 돌린 안쪽에 안상(眼象)으로 보이는 조각을 한 것으로 보이나 풍화가 심해 정확한 조각내용은 알 수 없다. 상대석은 원형평면으로 상면은 평평하게 한 중앙을 오목하게 파내 구형(球形)의 탑신을 올려놓을 자리를 마련했다.


하면은 반구형(半球形)으로 연잎 사이에 간엽(間葉)을 새긴 앙련의 조각을 베풀었다. 탑신은 구형(球形)으로 별다른 조각을 하지 않았다. 옥개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처마는 두툼한 편이며, 처마 상하면 모두 완연한 곡선을 이루도록 반곡시켰다. 옥개석 위에는 보주(寶珠)형 또는 연봉(蓮峯)형으로 보이는 장식을 올렸다. 탑신이 구형이고 다른 부분에 비해 비례가 커 어색하고 투박하다. 또한 연꽃잎이 한 겹으로 되어 있고 조각수법은 평면적이며, 음각화 및 간략화 경향이 강하게 보인다. 이로 미루어 이 부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 부도의 조영 연대에 대해서는 고려 말 조선 초로 추정하는 견해와 함께 원각국사비와 연관시키는 경우도 있으나 조형기법상 시기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국사 석종형, 원구형부도가 나란히...]


[영국사 석종형 부도...]


원각국사비 뒤편에 원구형부도와 함께 있는 이 석종형부도는 그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지대석을 갖추고 있으며, 그 위에 하대석과 중대석 및 상대석으로 구성되는 기단부를 두었다. 탑신은 석종형이며, 탑신 위에는 머리장식을 두었다.지대석은 장방형 판석 2개를 붙여 만들었으며, 평면은 방형이다. 하대석과 중대석 및 상대석으로 구성되는 기단부는 수미좌형식으로서 아래위를 대칭으로 구성하였다.하대석은 원형으로 복련(伏蓮)을 새겼고, 상부에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중대석을 받도록 했다. 중대석은 8각형으로 각 면에 상하좌우로 양각한 테두리를 돌린 속에 세 겹 정도의 장방형 무늬를 새겼다.


상대석은 원형으로 연꽃과 그 사이의 間葉을 앙련으로 조각해 하대석과 대칭을 이루도록 했다. 한편 상대석은 연꽃의 간격을 잘 못 맞춘 듯 한 부분의 연꽃 조각이 생략되었다.탑신은 한국종의 전형적인 한국종의 윤곽을 갖춘 종형(鐘形)이다. 탑신에는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았고, 머리장식과 만나는 최상부에만 음각의 수평선 하나를 새겼다. 머리장식은 하나의 석재를 이용했지만 상하로 조형이 나누어지며, 아래는 방형으로 노반을, 위는 보주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석종형의 탑신, 선각화(線刻化)되고 평면적인 조각수법을 사용한 점 및 연꽃의 형상과 생략적 표현, 그리고 정연한 모습을 이루지 못한 점 등으로 미루어 고려 말 조선 초에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선방이 있던곳인데 요즘신축한 계월암이 떨어져 자리하고...]


영국사 경내를 다 돌아본 후 다시 은행나무가 있는 곳으로 내려서면 언덕에 표지판이 나온다. 망탑 250m 라고 쓰인 안내판이다. 그곳으로 올라 조금가면 삼단폭포로 내려가는 곳에 다리가 놓여있고 그 다리를 넘어 조금 오르면 커다란 바위에 올려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망탑봉 삼층 석탑이 눈길을 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망탑봉 위에 서있는 삼층 석탑이 이곳에서만 보인다는 것이다. 영국사에서는 능선이 하나 가로막고 있어 보이지를 않았었다. 이 언덕에 서서 그 기나긴 세월동안 비바람 다 맞으며 말없이 서있는 망탑에 매력이 느껴진다.


[망탑봉 가는길을 알려주는 안내판...]


[삼단폭포 위에 놓여진 예쁜 다리...]


[다리위에서 내려다본 아찔한 삼단폭포...]


[망탑봉위 넓은 바위에 올려져 있는 상어같이 생긴 바위...]



[망탑봉위 넓은 바위에 올려져 있는 하마같이 생긴 바위...]


[망탑봉 정상에 서면 계곡을 넘어서 큰길까지 자세히 보이고...]


[영국사 망탑봉 삼층석탑...]


이 탑은 영국사에서 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속칭 망탑봉(望塔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영국사와 망탑봉 사이에는 능선 하나가 가로 막고 있어 영국사에서는 직접 조망할 수 없다. 망탑봉 정상은 바위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풍경 좋은 전망점이 된다. 탑은 반석으로 이루어진 망탑봉 정상의 한쪽 끝에 솟은 높이 3m 정도의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이 바위를 지반으로 삼고 그 상부에 기단을 조출한 후 별도의 석재로 석탑을 세웠다. 이처럼 천연의 바위 위에 세운 석탑은 9세기경에 조영된 경주 남산의 용장사곡 삼층석탑에서 시원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신라 하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이러한 형식의 탑이 조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것이 대부분으로 풍수도참설과 연관하여 불력(佛力)에 의지한 산천비보(山川裨補) 사상과 연관된 것으로 생각된다. 천연의 바위와 그 바위에 새긴 기단을 제외하면 그 상부에 세워진 삼층석탑은 신라계의 일반적인 석탑형식을 따르고 있다. 바위 위에 조출한 기단은 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그 하부에 두 단의 쇠시리를 두고 있다. 또한 이 방형기단은 상면을 하면에 비해 줄임으로서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다. 한편 풍화가 심해 확실하지는 않으나 두 단의 쇠시리 위에는 기둥형과 안상을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사 망탑봉 삼층석탑...]


이 조출된 기단부를 포함한 현존 탑의 높이는 약 2.8m이다. 3층의 탑신과 옥개는 각각 1개씩의 석재를 사용해 만들었다. 석재는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이다. 탑신은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높이와 폭을 줄였는데, 2층 탑신은 1층에 비해 높이를, 3층 탑신은 2층에 비해 폭을 많이 줄이고 있음이 특징이다. 높은 바위 위에 세웠기 때문에 탑은 하늘을 배경으로 올려다보게 되는 모습인데, 이에 따른 착시현상을 고려한 체감수법이라 생각된다. 1층 탑신은 하부에 비해 상부의 폭을 많이 줄인 민흘림 수법을 보이고 있음이 특징이다. 2층과 3층 탑신에도 동일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곳이 봉우리 정상으로 바람을 많이 타는 곳이므로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조형으로 인해 탑은 시각적으로도 더욱 안정되어 보인다. 특히 각층 탑신의 가장 아래는 쇠시리를 한 단 두어 탑신 바깥으로 돌출한 받침을 만들고 있는데, 이로 인해 시각적 안정성이 도모됨은 물론 구조적으로도 더욱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각층 탑신은 아래와 양 측면을 일정한 폭으로 돋을새김 하였다. 양 측면과 하면을 잇는 윤곽선을 새긴 것인데, 하부는 탑신받침을 양 측면은 우주(隅柱)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1층 탑신에서는 이 윤곽 안쪽으로 세로로 긴 장방형의 면을 돋을새김 하였다.


[영국사 망탑봉 삼층석탑...]


여기에는 아무런 조각을 새기지 않았으나 생략적인 수법에 의해 문비(門扉)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옥개석은 1층 옥개석의 하부와 모서리 부분이 약간 파괴되었고, 그 위치가 약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반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옥개석 하부에는 네 단의 층급받침을 두었으나 물끊기는 만들지 않았다. 처마는 아래 면을 직선으로 하고, 윗면은 직선의 양쪽 끝만 약간 반곡시켰다. 지붕면은 약간 오목한 곡선을 이룬다. 상륜은 소실되었다. 탑신석 자체에 민흘림을 두고 구조 및 시각적 안정성을 고려한 탑신의 체감방법은 이 탑이 지닌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자연 암반을 제외하면 탑은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한다. 또한 탑의 형태와 조각수법은 정연하지 못하고 생략적이며, 단순한 편에 속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석탑은 신라계 석탑의 기본 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그 규모와 수법이 상당히 약화된 시기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영국사가 원각국사의 하산처가 되는 시점과 연관된 고려 중엽 12세기경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충청대학박물관, 영동군, 영동영국사에서도 이 탑을 12세기경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국사 망탑봉 삼층석탑과 그밑의 커다란 바위...]


[망탑봉밑 절벽끝에서 내려다본 앞산계곡위 암벽이 멋지게 보여서...]


[절벽끝에 매달린 로프...]


망탑봉에서 계곡 쪽으로 내려서려니 멋진 암릉이 나온다. 이 암릉으로 절반쯤 계곡으로 내려오니 급경사진 곳에 로프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능선의 방향이 계곡위쪽인 반대쪽으로 방향이 되어있어 입구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등산객들로 이곳에서 돌려 내려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다시 돌려 망탑 뒤를 돌아 삼단폭포를 경유 옆계곡으로 직선으로 내려와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었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것 같다. 이제 천태산을 뒤로 하고 이곳에서 제일 가까운 대둔산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끝>-자료출처:코리아템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