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고독한 왕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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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8.

광해군, 고독한 왕의 투쟁[역사스페셜]

명분인가 실리인가?

 

     

광해군의 시대가 막을 내린 후, 조선의 역사는 다시 쓰였다.  인조 15년, 광해군은 제주도 유배지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 있었다.  패륜 군주로 몰려 인조에게 왕위를 빼앗겨야 했던 광해군. 

     

그러나 이 무렵, 인조는 청태종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조선 국왕이 청나라 황제 앞에 나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숙인 수치스러운 사건.  인조의 굴복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일이었다. 광해군의 비극과 함께 시작된 조선의 비극.  

광해군이 쫓겨나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광해군은 반정세력의 구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나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해야했던 불운한 왕이었습니다. 광해군은 폭군이라는 이름으로 낙인 찍혀 임금이라는 칭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쫓겨난 패륜 군주, 이것이 광해군에 대해서 지금까지 내려졌던 역사의 냉혹한 평가였습니다.

 

그런데 광해군이 패위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내려다보면 광해군에 대한 이러한 평가 뒤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광해군을 패륜 군주로 몰아갈 수 밖에 없었던 정치석 상황이 있었다는 뜻인데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선조 41년

아버지 선조에게 아침 문안을 드리러 온 광해군은 뜻밖의 말을 듣는다.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아버지의 명령. 광해군은 그 자리에서 피를 쏟으며 충격을 감추지 못한다. 선조는 왜 광해군의 문안을 거부했던 것일까?   선조의 오랜 고민은 왕위를 이을 적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열세명의 아이를 두었지만 모두 후궁에게서 얻은 아이였다. 

 

이 중에서 선조가 눈여겨둔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던 광해군이었다. 그런데 선조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다. 선조는 더 이상 문안인사조차 받지 않으며 광해군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부자간의 갈등이 일어나게 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부터다.  선조 25년,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을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조정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했다. 신하들은 선조에게 서둘러 왕세자를 책봉하고 피난길에 오를 것을 청했다. 왕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선조는 결국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에게 국왕의 권한 일부를 떼어준다. 이른 바, 분조. 조정을 둘로 나누어 절반은 왕세자에게 통치를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오종록 교수 성신여대 사학과-

결국 국가를 나눠서 경영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만, 전쟁이 일어나서 선조가 개성, 평양을 거쳐서 의주까지 피난을 가있는 상태여서 결국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아래에 내려가서 국왕 대신에 전쟁을 수행하는 신료들을 총괄지휘하는 책임을 맡아야하는데 그런 책임을 나누어 맡게 된 것이 광해군이었습니다. 

    

 

     

1592년 임진년 4월

왜군이 충청도까지 북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선조는 마침내 피난길에 나선다.  궁궐을 지키던 호위무사들마저 도망쳤고 100여명만의 문무대신들만이 선조를 따랐다. 최악의 경우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건너갈 생각까지 했다.  임금의 피난 소식에 백성들은 분노를 터트렸다. 곳곳에서 약탈을 하고 궁궐을 불지르는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악화된 인심을 진정시킨 것은 바로 광해군이었다. 선조가 의주에서 피난하는 동안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이천까지 내려왔다. 광해군은 지방 각지를 돌아다니며 백성을 달래고 의병들의 전투를 격려하는 등 항전활동에 앞장섰다. 광해군 휘하에 군사들은 죽음을 무릎쓰고 적과 맞써싸웠으며 왜군의 진격을 가로막는데 성공한다.

 

광해군은 의병들에게도 관군과 마찬가지로 군량을 보급하고 면세혜택을 내리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전국의 의병을 조직적으로 지휘함으로써 조선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왜군의 교통로는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천일 의병장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나주의 정열사.

호남 최초의 의병장인 김천일은 광해군의 항전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한 광해군의 명령을 각지의 의병장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메신저 역할을 했다.  조정의 명이 지방 각지로 전달되자 광해군은 더욱 효율적으로 전쟁을 지휘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상황은 예기치못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보여준 광해군의 능력은 명나라에서조차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급기야 명에서는 광해군에게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방어를 담당케하라는 칙사를 보내게 된다.

 

이 뿐 아니라 선조의 무능함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며 광해군에게 아버지의 실패를 만회하라는 주문까지 내린다. 선조로써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선조와 광해군은 더 이상 이전의 부자지간이 아니었다.


 선조 39년, 전쟁이 끝난지 8년째 되던 해. 

    

 

선조는 그렇게 바라던 적자를 얻었다. 광해군보다 무려 9살이나 어린 계비를 통해 적자 영창대군을 본 것이었다.  선조는 신하들에게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할 정도로 영창대군에 대한 절실한 마음을 드러냈다. 광해군 앞에 나타난 인목왕후와 영창대군. 광해군은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영창군의 탄생으로 광해군의 왕위계승은 더욱 불투명해졌습니다. 임진왜란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세자로 책봉된 것이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선조의 태도도 완전히 달라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적자가 태어났으니 더욱 불안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선조는 자신이 서자 출신이라는 컴플렉스때문에 적자를 얻고자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이 마음을 아는 신하들조차 영창군 지지세력이 되어 광해군을 위협합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으로 상황은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선조 41년 2월 1일.

     

 

이 날, 선조의 점심삼에는 찹쌀밥이 올랐다.  불과 몇시간 전, 약방에 문안을 전했을 때만해도 편히 잘 잤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찹쌀밥을 먹은 후, 선조는 갑자기 기가 막혀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선조의 죽음. 조정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당시 신하들 대다수는 영창군 즉위를 주장하며 광해군과 대립하고 있었다.


1608년 광해즉위년 2월 1일 

      

그러나 영창대군이 아직 어린 상태에서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른 것은 광해군이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임금이 된 광해군. 그 앞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았다. 

    

 

 

광해군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피폐해진 민생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즉위 초, 광해군이 실시했던 대동법. 백성들이 기념비를 세웠을 정도로 대동법은 백성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백성들이 공물로 특산물을 바치는 대신 쌀을 내게 하자는 법이었다. 

-박성복 평택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특히 대동법을 통해서 공납제도가 쌀이나 배로 바뀌면서 쌀은 육로로 통해서 한양에 갔고 배같은 경우는 바다를 통해 한양에 바쳤습니다.  공물을 쌀로 내게 하는 것은 방납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당시 방납인들은 특산물을 대신 조달해주고 그 댓가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광해군은 대동리의 출납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선혜청을 설치했다. 선혜청이라 명명한것은 광해군이 전교에서 선혜라는 말을 쓴 것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은 이내 벽에 부딪혔다. 양반 지주들의 비방이 들끓었고 방납인들의 항의도 계속됐다.   심지어 선혜청이 혁파됐다는 괴소문도 나돌았다.  지배계층의 반발은 그만큼 거셌다.  결국 광해군은 경기도 지방에서만 대동법을 유지하고 다른 지역으로는 확대 실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개혁의지는 번번히 좌절되었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직권층의 이익에 반하는 광해군의 개혁정치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으로서는 더 실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광해군의 유일한 지지기반은 실천적인 학풍의 북인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임진왜란때 의병활동으로 실질적인 조력자가 되었던 인물들이다.  

      

특히 정인홍은 광해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의병장이었다. 

    

 

정인홍을 비롯한 북인들 중 일부는 정계로 돌아와 광해군의 지원군으로 나섰다. 이들이 소위 대북파였다.

 

-오종록 교수 성신여대 사학과-

정통성에서는 취약하지만 전에 왕으로서의 자질을 경험으로 입증했던 광해군을 지원했던 세력 중에서 정치적인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는데 당시 정치세력 중에서 대북세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었습니다.  숫자적으로 너무 적어서 그들 단독으로 정치를 주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광해군은 그 세력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하는  곤란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거죠.


    광해 5년  

  

 

문경 조령에서 은장수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주모자들은 벼슬길에서 밀려난 양반의 서얼들이었다. 그런데 범인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만다. 

조정에는 일대 파란이 일었다. 대북파들은 영창대군이 화의 근본이라고 주장하며 영창대군을 사사할 것을 청했다.  신하들의 상소는 8달이 넘도록 계속됐지만 광해군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영창대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는 인천 강화읍의 한 마을.

살창이 마을로 불리우는 이 곳은 영창대군이 죽은 곳으로 전해진다.  

 

 

-유중현 연구위원 강화문화원-

영창대군이 죽었다는 자리가 이 동네입니다. 전하는 말씀에 의하면 사주를 받은 강화유수 정황이

초가집 구들방에 문을 닫아걸고 온돌방에 불을 많이 지펴서 돌아가셨다고 해서 뜨거워서 돌아가셨다고 해서 증살시켰다고 하는데요. 죽을 살에 영창대군의 창자가 붙어서 살창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안치되어있다 죽음을 맞이한다.  광해군 일기에 따르면 당시 강화부사였던 정황이 영창대군을 가두고 불을 때서 죽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영창대군의 죽음에는 대북파의 사주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영창대군의 죽음을 사주한 것은 대북파의 이첨이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역모사건은 영창대군의 죽음만으로 진정되지 않았다. 당시 역모의 주동자로 몰렸던 것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었다.  대북파는 김제남의 처형을 주장했고 결국 김제남은 죽임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김제남의 측근들 즉, 대북파의 반대세력인 서인과 남인들이 대거 처벌당했다.

 

 

 

역모사건이 확대되면서 인목대비 폐비론까지 제기되었다.   대북파의 주장은 인목대비도 역모에 연루되었으므로 더 이상 국모로 대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인목대비가 죄를 지어 광해군과 모자관계가 끊어졌으므로 더 이상 같은 궁궐에 거처할 수 없다 했다. 결국 인목대비는 서궁에 은폐되었다.

 

이후에도 신하들은 인목대비의 폐위를 요청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더이상 이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개혁을 위해 손을 잡았던 대북파들이 어느새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커가고 있었다.  광해군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광해군을 지지했던 대북파는 점차 그 세력을 키워서 정국을 장악하게 됩니다.

급기야 그들은 광해군의 의중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해지는데요.

광해군이 더이상 이들과 타협할 수 없는 새로운 국면이 다가오게 됩니다.


 

 

조정의 논의가 뜨거웠다. 명이 후금과의 전투를 위해 조선에 군사를 요청한 것이었다. 광해군은 훈련되지 않은 조선의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군대를 보내야한다고 맞서고 있었다.  신하들이 내세운 명분은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운 명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7세기초 후금은 명을 위협하며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명은 무리하게 후금을 칠 계획을 하면서 조선을 압박하고 있었다.

 

-한명기교수 명지대 사학과-

광해군 자신은 명의 요청을 받았을 때 명에게 충성을 다해야하는 건 분명하지만 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금의 상황에서 파병을 한다고 하면 급속하게 떠오고 있는 후금과 원한을 사게될 것은 분명한 것이고 어느 날 후금의 침략을 받게될 것이고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책이라든지 왕권강화를 위한 시책이 방해을 받게 된다고 생각했죠. 명의 요구를 거부하려고 최후의 순간까지 시도했던 것이죠.

 

  

 

광해 11년

조선군 병사 1만여명은 결국 명과 연합해 후금과 결투를 벌인다.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넌지 보름만에 기마군으로 무장은 후금에 대패했다. 조선의 사령관이었던 강홍립은 후금의 수도로 들어가 항복한다. 

 

 

 

광해군 일기도 강홍립의 항복 사실을 적고 있다.

 

 

 

강홍립의 항복 사실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신하들은 강홍립을 역적이라고 비난하며 그의 가족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동요하지 않았다.

 

 

 

조선군을 명나라로 보내기 전 광해군은 강홍립을 따로 불렀다.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도록 힘쓰게.'

오직 패하지 않을 방법을 찾으라는 광해군의 주문.  전세가 몰린 상황에서 강홍립은 후금의 감금제의를 받고 결국 투항을 선택한다.

 

 

 

강홍립이 투항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함께 참전했던 종사관 이민환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강홍립의 투항에 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강홍립은 후금에 조선의 부득이한 입장을 전하려 애썼다.

 

-신병주 박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광해군의 심정을 이해한 강홍립은 상황을 봐서 우리의 국왕은 당신의 나라와 전쟁을 할 생각이 없다.

우리는 당신과 우호적인 입장을 원한다. 이런 입장을 전달하니까 후금 군대에서도 화해를 맺는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도 광해군의 입장을 전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면서 조선의 충돌을 막아내고 완충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강홍립은 억류된 와중에도 갖은 수단을 동원해 후금 내부의 정보를 광해군에게 올려보냈다. 이렇게 얻는 정보를 통해 후금에 대한 현실적인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대신들의 입장은 달랐다. 패전 이후에도 명은 군대를 요청했고 신하들을 이에 응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듣지 않았다.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 조차 광해군의 외교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신하들은 명나라의 자식된 도리를 해야한다는 한결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광해군은 더 이상 신하들의 명분론을 따를 수 없었다.

 

광해군이 원했던 것은 명분이 아닌 조선의 실리를 위한 정책이었다. 

광해군은 후금과의 관계를 유지하되 견제하면서 직접적인 대응은 피했습니다. 명은 달래고 후금은 자극하지 않는 현실적인 전략으로 양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이 살아갈 방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사대부에게 이 태도는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배신행위였습니다.

결국 광해군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

이 곳에 귀중한 자료 한점이 보관되어있다.  광해군이 입었던 의복이다.  은은한 단청빛의 구름 모양을 새긴 임금의 직령. 의대나 관복에 받쳐 입었던 두루마기의 일종이다.

 

옷은 1965년 해인사 보수공사를 하던 중 발견되었다. 을해생이었던 광해군. 옷에는 국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귀가 새겨져있다. 그러나 임금으로서 광해군의 생애는 길지 못했다. 

임금을 몰아내기 위한 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광해 15년.

반란군은 순식간에 창덕궁을 포위했다.  인조반정이었다.

 

 

 

 

광해군은 내시의 등에 업혀 피신해야했다. 궁내의 호위무사들 조차 반정에 가담한 상황이었다.

반정 직후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을 터트렸다.

 

'내 먼저 이혼 부자의 머리를 가져와서 내가 직접 살점을 씹은 후에야 책명을 내리겠다'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였다는 죄목으로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야했다.  반정세력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다. 훗날의 인조였다.

 

 

반정세력들이 내세운 쿠데타의 명분은 재조지은.

명의 은혜를 배신하고 후금과 내통한 광해군은 물러나야한다는 것이었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 정권은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다시 썼을까.  그들이 내 세운 반정의 명분은 지켜졌을까.  창의문의 현판에는 반정에 공을 세운 핵심세력 서인 세력 63명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이들 세력은 인조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커졌다.

 

그러나 명의 은혜를 다해야한다는 명분론은 지켜지지 않았다.  인조는 병자호란을 겪은 후 청과 군신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청나라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고 세운 삼전도비.

인조반정이 남긴 것은 조선을 기울게 한 치욕의 역사였다.

 

-한명기 교수 명지대 사학과-

인조반정 자체가 성공하고 이후 광해군과 그를 추종하던 북인들이  정치판에서 제거된 다음부터는 정치적 실권이 서인에게 돌아갔고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기되는 계기를 맞지만  기본적인 서인의 집권은 조선이 망할때까지 유지가 되죠.

 

-신병주 박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종묘호란 이후에도 인조와 서인 정권이 후금에 대해서 강경한 노선을 고수하자  총동력을 동원해서 다시 쳐들어온게 1636년 병자호란입니다.  이런 두차례의 호란을 통해서 완전히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러한 역사적인 경험을 보았을 때, 광해군의 외교정책이 현명했다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광해군의 마지막 유배지는 제주도였다. 광해군은 18년간의 유배 생활 중 마지막 3년을 이 곳, 제주도에서 보냈다. 그 흔적이 제주 시내에 남아있다.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집 외부는 가시덩굴로 뒤덮여있다.

 

-송심자 제주민속촌박물관-

제주도에서는 음력 7월 1일에는 햇볕이 쨍쨍했다가도 한번 비가 오는데 그건 우리 대왕이 흘리는 눈물이다라고 해요. 광해군이 7월 1일에 돌아가셨거든요.

 

유배 도중 부인과 아들 모두를 잃고 광해군만이 홀로 살아남았다.  왕세자에서 왕이 되고 다시 왕이 되기까지 광해군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광해군이 폐위된 후 역사는 승자의 손으로 다시 쓰여졌다.  광해군 일기는 실록이라는 이름도 얻지 못하고 일기로 격하되었다.  다행히 광해군 일기는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중간기록본이 남아있어 완성본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숟하게 지우고 붙인 흔적들.... 어떤 역사를 지우고 싶었던 것일까.

 

-한명기 교수 명지대 사학과-

광종이라던가 광해왕이라는 칭호를 받지 못하고 군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는 것은  그가 인조반정을 만나고나서 역사적 평가는 당대에는 정해졌다고 보입니다. 인조반정 공신들은 광해군이라고도 부르지 않고 폐주, 쫓겨난 군주라는 뜻이죠.

또는 혼군, 어지러운 군주, 어리석고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군주라는 뜻인데 폐주, 혼군이라는 말이 광해군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됩니다. 

 

 

 

광해군은 폐위된 후 19년을 더 살았다. 왕위에 있었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었다.

 

                              가고픈 마음에 봄 풀을 실컷 보았고

                              나그네 꿈은 제주에서 자주 깨었네

                              서울의 친지는 생사소식조차 끊기고

                              안개 낀 강 위의 외로운 배 위에 누웠네

 유배 중 제주에서 쓴 광해군의 시 中

 


 

인조반정의 주체들이 내세웠던 반정의 명분은 집권을 위한 구실이었을 뿐, 폐위의 정당한 명분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쫓겨난 임금이라는 오명을 떨치지 못한채 역사의 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륙의 정세가 급변했던 17세기 초,  광해군은 시대의 변화를 앞서 읽었으며  조선의 살길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준비했던 선구적인 임금이었습니다승자의 역사가 남기지 않은 광해군의 진실. 우리가 읽어야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출처] : 긍정적 정윤 블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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