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 "연풍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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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이야기/천주교 성지순례

2011. 6. 21.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 "연풍성지"

 

 연풍성지는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험준한 산골인 이곳에 형성돤 마을 입니다.

최양업(토마스) 신부님과 프랑스 선교사 칼래(강 니콜라오) 신부님도

연풍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면서 교우촌을 순방했습니다.

그럴 때면 신부님들은 연풍 골짜기에 숨어살던

교우들을 방문하여 비밀리에 성사를 주었습니다.
이내 연풍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신앙을 잇는 교차로가 되었고,

신앙 선조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수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체포되어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황석두 루가 성인의 묘

 

 

 

 

 

3백년된 향청건물을 1963년 사들여 공소로 사용

 

 

 

 

 

 

 

 

 

 

 

 

 

 

 

 

 

 

 

 

 

 

 

 

 

소백산맥의 심산유곡에 둘러싸여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는 이곳. 하늘에 닿을 듯한 소백산맥의 조령산(해발 1,017m)과 백화산(해발 1,064m) 사이로 구름도 쉬어 가는 험지 중의 험지. 저 구름마저도 단지 산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 고갯길 굽이굽이에 서려 있는 민초()들의 슬픈 이야기와 피로 얼룩진 신앙의 숭고한 역사를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기 때문이리라.
연풍 남쪽의 주진리에서는 이화령(해발 548m)을 거쳐 경상도 문경으로 통하고, 그 북쪽의 원풍리에서는 새들도 넘기 힘들다는 새재(조령, 해발 642m)와 하늘재(계립령, 525m)가 그리 멀지 않다. 지금의 행정 구역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조선 후기까지는 연풍현으로, 그곳 현감이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해 와 형벌로 다스리곤 하였다.
연풍 지역에 첫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작은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784년 말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되어서였다. 남한강 물길을 따라 북상한 복음의 한 자락이 충주를 거쳐 충청도의 끝자락인 이곳 연풍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는 어린 싹을 틔우던 연풍의 신앙 공동체까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 박해로 몇몇 교우들이 체포되어 서울로 이송되면서 김흥금과 몇몇 교우들은 경상도로 피신해 신앙 생활을 해야만 했고, 이항덕은 그대로 연풍에 남아 있다가 체포되어 귀양을 가야만 했다.
높다란 소백산맥 자락에 막혀 숨을 죽이던 있던 복음의 물줄기는, 신유박해 이후 영남의 관문인 이화령과 새재를 넘어 새 은신처를 찾아가는 억압받는 민초들에 의해 경상도 지역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박해의 서슬을 피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네들은 남부여대()한 채 어린 자식을 업거나 앞세우고, 삭풍을 이겨내면서 천혜의 도주로를 이용하여 험준한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다행히도 이화령의 굽이굽이, 문경 새재의 관문 한쪽에 있는 수구문()은 죄인 아닌 죄인, 도둑 아닌 도둑으로 포졸들에게 쫓기던 교우들을 보살펴 주었다.
이제 그 입구에 위치한 연풍의 비밀 신앙 공동체는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오는 교우들과 새로 복음을 받아들인 입교자들로 인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동정 부부로 유명한 이순이(누갈다)의 어머니가 며느리손자들과 함께 피신해서 신앙 생활을 한 곳도 연풍이요, 황석두(루가) 성인이 만고의 진리를 찾은 곳도 이곳이다. 그 뿐인가. 한국인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 상복으로 위장한 프랑스 사제 페롱(권 스타니슬라오) 신부, 칼래(강 니콜라오) 신부 등이 이화령과 새재를 넘어 영남 지역으로 전교를 다니면서 쉬어가던 곳도 연풍이었다.
연풍은 이처럼 초기 교회 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뿌리깊고 끈질긴 복음의 역사를 간직해 왔다. 연풍의 마을과 마을마다, 이화령과 문경 새재의 구석구석마다 신앙 선조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이곳의 복음사는 1866년에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병인대박해로 인해 피의 순교사로 변하게 된다. 교우들은 이제 연풍 관아로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죽음을 당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도살장(연풍 옥터)이란 곳으로 끌려가 목숨을 바쳐야 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잠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던 교우들도 충주서울 등지에서 다시 박해자의 칼날을 받아야만 했다.
이제 그 지방 사람들에게 도살장으로 알려진 바로 그 장소에 연풍 성지가 들어서 있다. 거룩한 땅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 두 발을 디딘 채, 박해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 당시에 이름 석자도 남기지 못하고 천주 대전에 숭고한 목숨을 바친 민초들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그 모두가 우리 후손들에게 지고한 복음을 남겨 준 신앙 선조들이다.[청주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