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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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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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글은 오랜 세월 동안 라면을 끓이고 또 먹어온 나의 라면 조리법을 소개하려고 시작했는데, 도입부가 너무 길어졌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라면 포장지에는 끓는 물에 면과 분말스프를 넣고 나서 4분 30초 정도 더 끓이라고 적혀 있지만, 나는 센 불로 3분 이내에 끓여낸다. 가정에서 쓰는 도시가스로는 어렵고 야외용 휘발류 버너의 불꽃을 최대한으로 크게 해서 끓이면 면발이 불지 않고 탱탱한 탄력을 유지한다. 면이 불으면 국물이 투박하고 걸쭉해져서 면뿐 아니라 국물까지 망친다.

또 물은 550ml(3컵) 정도를 끓이라고 포장지에 적혀 있지만, 나는 700ml(4컵) 정도를 끓인다. 물이 넉넉해야 라면이 편하게 끓는다. 라면이 끓을 때 면발이 서로 엉기지 않아야 하는데, 물이 넉넉하고 화산 터지듯 펄펄 끓어야 면발이 깊이, 또 삽시간에 익는다. 익으면서 망가지지 않는다.

라면을 끓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국물과 면의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이것은 쉽지 않다. 라면 국물은 반 이상은 남기게 돼 있다. 그러나 그 국물이 면에 스며들어 맛을 결정한다. 국물의 맛은 면에 스며들어야 하고, 면의 밀가루 맛은 국물 속으로 배어나오지 않아야 한다. 이건은 고난도 기술이다. 센불을 쓰면 대체로 실패하지 않는다.

식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분말스프를 3분의 2만 넣는다. 나는 라면을 끓일 때 대파를 기본으로 삼고 분말스프를 보조로 삼는다. 대파는 검지손가락만한 것 10개 정도를 하얀 밑동만 잘라서 세로로 길게 쪼개놓았다가 라면이 2분쯤 끓었을 때 넣는다. 처음부터 대파를 넣고 끓이면 파가 곯고 풀어져서 먹을 수가 없게 된다. 파를 넣은 다음에는 긴 나무젓가락으로 라면을 한번 휘젓고 빨리 뚜껑을 겊어서 1분~1분30초쯤 더 끓인다. 파는 라면 국물에 천연의 단맛과 청량감을 불어넣어주고 그 맛을 면에 스미게 한다. 파가 우러난 국물은 달고도 쌉쌀하다. 파는 공업적 질감을 순화시킨다.

그다음에는 달걀을 넣는다. 달걀은 미리 깨서 흰자와 노른자를 섞어놓아야 한다. 불을 끄고 끓기가 잣아들고 난 뒤에 달걀을 넣어야 한다. 끓을 때 달걀을 넣으면 달걀이 굳어져서 국물과 섞이지 않고 겉돈다. 달걀을 넣은 다음에 젓가락으로 휘저으면 달걀이 반쯤 익은 상태에서 국물 속으로 스민다. 이 동작을 신속히 끝내고 빨리 뚜껑을 닫아서 30초쯤 기다렸다가 먹는다.

파가 우러난 국물에 달걀이 스며들면 파의 서늘한 청량감이 달걀의 부드러움과 섞여서, 라면은 인간 가까이 다가와 덜 쓸쓸하게 먹을 만하고 견딜 만한 음식이 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스승 없이 혼자서 수많은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며 배웠다. 앞으로도 새롭게 열어나가야 할, 전인미답의 경지가 보이기는 하지만 라면 조리법 개발은 이제 그만하려 한다.

나는 라면을 먹을 때 내가 가진 그릇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싼 도자기 그릇에 담아서, 깨끗하고 날씬한 일회용 나무젓가락으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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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의 바다에서는 아침의 첫 빛이 수평선 전체에서 퍼져 오른다. 열대의 바다와 숲은 일사각이 45도쯤에 자리잡는 오전9시께부터 갑자기 빛으로 가득 찬다. 숨어 있던 색들이 일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꽃들은 원색으로 피어난다. 색들은 열려서 익어간다. 열대 해역에는 바람이 없어서 풍경 전체는 문득 거대한 액자처럼 보인다. 깃발도 나뭇잎도 풍향계도 흔들리지 않고 구름이 물 위에 멎는다. 햇빛을 받는 바다는 해안에서 원양까지 연두에서 울트라마린블루의 스펙트럼을 펼치는데, 해가 중천으로 오를수록 울트라린블루는 멀어져가고 햇빛은 수평선 위에서 하얗게 들끓는다.

열대 바다의 저녁은 저무는 해의 잔광이 오랫동안 하늘에 머물러서, 색들은 늦도록 수면 위에서 흔들리고 별들은 더디게 돋는다. 어둠으로 차단된 수억 년의 시공 저편을 별들은 건너온다. 별은 보이지 않고 빛만이 보이는 것인데, 사람의 말로는 별이 보인다고 한다. 크고 뚜렷한 별 몇 개가 당도하면 무수한 잔별들이 쏟아져나와 하늘을 가득 메운다. 별이 없는 어둠 속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눈이 어둠에 젖고 그 어둠 속에서 별들은 무수히 돋아난다. 별이 가득 찬 하늘에서는 내 어린 날의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나는 2012년 2월 중순에 7일간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섬들을 여행했다. 미크로네시아 연방은 괌과 뉴기니 사이의 방대한 해역에 흩어진 6백여 개의 섬과 주민들을 아우르는 연방국가다.

열대밀림 속에서는 무위자연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 말은 허망해서 그야말로 무위하다. 열대밀림은 동양 수묵화 속의 산수가 아니다. 열대 밀림은 인문화할 수 없고 애완화 할 수 없는 객체로서의 자연이다. 그 숲은 인간 쪽으로 끌어 당겨지지 않는다. 자연은 그윽하거나 유현(幽玄)하지 않다. 자연은 저 자신의 볼일로 가득 차서 늘 바쁘고 인간에게 냉정하다. 자연은 인간에게 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이지 않지만 인간은 우호적이지 않은 자연을 적대적으로 여긴다. '무위'는 자연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손댈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열대의 밀림은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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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사건 당일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일곱 시간 동안 일곱 번이나 각급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비서실장이 밝혔다. 그런데 현장의 구조인력은 기우는 배에 접근하지 않았고, 해경 책임자는 구조인력 투입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대통령의 명령은 대체 무엇인가. 명령이란, 복종 되고 실현되기를 강요하는 의사표시다. 대통령의 직무는 언어의 형식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그 명령이 요구하고 있는 내용을 현실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명령은 직무의 발동이고 실현은 직무의 완수이다. 이것이 대통령과 9급의 차이일 것이다. 명령을 일곱 번 내렸다고 해서 대통령의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다. 명령은 허공으로 흩어졌는지, 대통령의 명령이 구중궁궐에 갇힌 대왕대비의 신음처럼 대궐 담 밖을 넘지 못한 꼴이니, 그 나머지 일은 기력이 없어서 더 말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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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료로 받은 10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마누라 몰래 쓰려고 책갈피 속에 감추어놓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맹자』 속에 넣었다가, 아무래도 옛 성인께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다른 책으로 바꾸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맹자』 속에 없고, 『공자』 속에도 없고, 『장자』 속에도 없고, 제자백가서와 동서고금을 모조리 뒤져도 없다. 수표를 찾으려고 『장자』를 펼쳐보니 "슬프다, 사람의 삶이란 이다지도 아둔한 것인가! 외물에 얽혀 마음과 다투는구나!"라고 적혀 있어 수표 찾기를 단념할까 했으나 또 그다음 페이지에 "무릇 감추어진 것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내 언젠가는 기어이 이 수표 두 장을 찾아내고야 말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