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숨을 먹다 /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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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1. 5. 4.

영화 <물숨>을 보았다. <물숨>은 7년여에 걸쳐 우도 해녀들의 일상을 담은 다큐다. 나는 그것을 촬영한다고 했을 때부터 개봉을 기다려왔다. 내 어머니가 평생 바다에서 산 해녀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모르는 것들을 제작자는 놓치지 않았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

내레이터의 음성과 음악이 극한의 노동을 하는 해녀를 감싸 안듯 잔잔히 흐른다.

화면 속 해녀들은 담담하고 담대하다. 그녀들은 내 어머니처럼 어쩌다가 물질을 시작했고, 먹고 살려니 물질을 계속했고, 바다가 가까이 있어서 지금도 물질을 한다. 어느 해녀는 열여덟 살 해녀인 딸을 바다에서 잃었다. 그 딸이 파도에 쓸려 섬 건너 어느 마을에 떠올랐다. 그녀는 딸을 묻고 다시 딸을 앗아간 바다에서 물질을 한다. 촬영을 하던 기간엔 노령의 해녀가 '물숨'을 먹어 숨을 거둔다. 그녀의 딸 역시 삼우제를 치르고 나서 또 그 바다에서 물질을 한다. 머뭇거리면 영영 바다에 들 수 없을 것 같아서란다. 머뭇거리면 바다에 영영 들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언젠가 자신의 목숨도 어떻게 해 버릴지 모르는 바다, 그곳에 기대 사는 것이 얄궂은 그들의 운명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운명에 순종한다.

땅에선 숨을 쉬지 않는 것이 죽음이나 아이러니하게도 물속에선 숨을 쉬는 것이 죽음이다. 물속에서 숨을 참지 못하고 숨을 쉬면 물을 먹기 시작한다. 해녀들은 그걸 '물숨을 먹는다'고 한다. 살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힘은 빠지고 '물숨'은 또 물숨을 부른다. 물의 깊이는 수십 미터. 곁에 도와줄 동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없으면 바로 황천길이다.

나도 물숨 맛을 본 적이 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모두 깊지 않은 곳이었는데 물에 빠지는 순간 물을 먹기 시작했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나는 물속으로 자꾸 빨려 들어갔다. 시야는 깜깜했고 세상의 소리는 아득해졌다.

처음은 네 살 즈음이었다. 마당에 있는 연못에 나리꽃이 비쳤고 그 꽃에 손을 뻗었다가 물에 빠졌다. 죽음 직전에 외출했다 돌아오던 엄마가 살렸다는데 뒷 기억은 없다. 두 번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마을 연못에서 발이 미끄러졌다. 허리춤까지 오는 얕은 물이었지만 누군가 발을 당기는 것처럼 점점 깊은 곳으로 끌려갔다. 한참 물을 먹고 허우적대는 걸 친구들이 건져주었다. 그런데 정작 어이없는 건 세 번째였다. 어른이 되어 아이들과 리조트엘 갔는데, 수영장에서 발이 미끄러지며 물을 먹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야 옆에 있는 남편이 내 손을 잡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물은 가슴에도 못 미치는 깊이였다. 남편은 내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며 해녀의 딸이 접싯물에 코 박고 죽게 생겼다고 놀려댔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수영을 배웠다. "음~~파! 음~~~파!" 호흡만 배우는 데 한참이 걸렸다. 그리곤 겨우 평형을 할 수 있을 때 그만두었다. 그만하면 접싯물에 빠져 죽을 일은 없겠다 싶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물과 상극인지 도무지 재미가 없었다.

내가 바다에 가는 걸 극도로 싫어하던 엄마가 선심 쓰듯 바닷속 구경을 시켜준 적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백중날이었다. 엄마는 태왁에 긴 줄을 매달아 해안가 바위에 묶어놓고, 나를 태왁에 의지하게 한 뒤 내 키를 훌쩍 넘는 바다로 함께 들어갔다. 나는 엄마가 알려주는 대로 발을 가만가만 휘저었다. 몸이 둥실 물 위로 뜨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수경을 쓴 얼굴을 수면에 갖다 대었다. 바닷속엔 까뭇한 성게들이 바위틈마다 박혔고, 그 바위 위를 집게들이 기어 다녔다. 해초는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나무들처럼 파도에 너울거렸다. 그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출렁 파도가 밀려왔고 나는 그만 물을 먹고 중심을 잃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엄마는 공부를 핑계로 더 심하게 바다에 가는 걸 막았지만 애당초 내가 겁쟁이란 걸 알았던 것

그런데 내 친구의 엄마는 달랐다. 그녀의 엄마는 초등학생인 그녀에게 물옷도 태왁도 준비를 해주었다. 친구는 중학교 다니면서 물때가 좋으면 아침에 한 시간 정도 물질을 하고 난 뒤 학교에 갔다. 주말엔 어른처럼 종일 바다에서 살았다. 당차고 숨이 길어서 제대로 하면 상군이 될 거라는 말과는 달리 친구는 공부를 잘해서 고향을 떴다. 그녀는 도시에서도 하는 일에 거침이 없어서 매사 성공을 했다. 하지만 나는 땅에 사는 것조차 미숙해서 번번이 '물숨'을 먹었다. 해녀들의 '물숨'을 내 엄살에 쓰는 건 가당치 않지만, 실수로 한 번 삼킨 물이 물을 부르듯 일을 해결한다고 벌이는 일들이 종종 악재가 되었다.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저승에 맡겨 놓은 돈을 찾아오는 일이 물질이라 했다. 아무런들 내 처지가 목숨을 담보하고 살 만큼 나쁘기야 할 건가.

​ 얼마 전 여든이 넘은 어머니가 물질을 다녀왔다. 핑계는 '몸이 아주 녹슬어 버릴까 봐'였다. 그날 어머니는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창때 다니던 깊은 바다까지 가게 되었다. 힘에 부치고 검도 생겨서. 옆에서 작업하는 해녀에게 다금바리가 사는 곳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내려갔다가 곧 올라와선 아무것도 없더라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몸소 바다 밑으로 잠수했다. 바위 아래에서 커다란 놈이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단번에 명중했으나, 녀석이 요동치는 바람에 어머니는 소살(해녀용 작살)을 놓고 말았다. 움직임이 둔해지기를 기다리다 숨이 찼다. 물 위로 올라와 숨을 고른 뒤 내려갔을 때 녀석은 소살만 남긴 채 사라지고 없었다. 어머니는 '그것도 살 운명, 나도 살 운명, 뭍에서든 물에서든 욕심이 과하면 물숨을 부른다'고 했다.

영화를 보는 지금 나는, 내가 살면서 먹은 '물숨'은 늘 과한 욕심 값이었다는 걸 안다.

"숨이 남았을 때 물 위로 올라가야 살지. 그런데 이상하게 숨이 차서 그만 올라가야지 할 때 꼭 홀리듯 대단한 녀석들이 보인다구. 그게 대부분 목숨값이여. 그걸 포기할 줄 알아야 진정한 고수인디…."

영화속 노구의 해녀가 그 말을 남기고 바다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