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반가사유상 / 윤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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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1. 5. 4.

동산의 등성이에 차오르는 아침 기운이 서재 안으로 들어와 나에게 스민다. 이런 순간을 느껴본 지가 오래전 일 같다. 힘이 넘치는 듯한 능선의 모습은 산이 맞고 보낸 서사의 형상이다. 오늘 아침에서야 그 곡절에 마음을 기울인다. 코로나19 때문에 어부지리로 얻은 사흘간의 완벽한 여유 덕분이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산행으로 숨이 찬 시간을 사람들은 험한 길 탓이라며 편한 길을 찾아 걷기도 하지만 난삽하고 거친 능선의 매력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등산을 즐기지 않지만 고된 산타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산과 사람의 행로가 서로 다르지 않으니 산의 고된 역사와 서사에 밀착하여 들숨 날숨으로 교감하는 순간 일체감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 순간 산의 속마음도 들을 수 있을 듯하다. '나도 당신처럼 하루하루가 다리 후들거리는 무거운 짐이라오. 하지만 나의 고통 위에 뭇 생명은 뿌리를 내리고, 또다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며 그 생명들은 나의 고통을 먹고 자란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역사라고 하더군요.'라며 말이다.

만물은 누구의 밥이거나 누구를 밥으로 삼아 존재한다. 험한 산일수록 서사는 다양하고 사연은 많고도 깊다. 산의 희로애락이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우린 본능적으로 근원이 맞닿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울적하고 힘들 때 산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산으로 간다. 하다못해 낮은 앞산이라도 한 바퀴 휙 돌고 온다. 무언의 위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는 일이 한순간도 같지 않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재생의 시간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앞산과 닮은 점이 많은 이웃과 종종 산책을 한다. 비슷한 연배라 동질감을 느끼는 듯 때로는 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지가요, 고민이 있심더." 그 고민이라는 것이 장성하여 출가한 자식들이 이제는 좀 웃으면서 살라는 말이란다. 사실 자신은 웃고 있는데 우는 것처럼 보인단다. "지 얼굴이요, 평생 슬퍼하고 걱정하는 표정만 지어서 근육이 그렇게 굳어진 기라요." 유독 딸이 엄마의 표정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웃으려고 하면 더욱 기괴한 모습이 되어 딸의 말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웃는 일을 잊어버린 자신의 얼굴 근육이 가여워 슬프다고 했다.

가난한 집안의 맏이로 사는 일이 지긋지긋해 도망치듯 결혼을 했는데 그곳 역시 형제가 많은 집안의 맏며느리에 인물값 하는 남편이 사업까지 하더란다. "여우를 피해 갔더니 범을 만난 기지요." 그녀의 손은 중견기업의 안주인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땅 위로 노출된 소나무 뿌리를 닮아 있었다. 말씨와 몸의 자세는 늘 공손하여 얼굴조차 바로 볼 기회가 별로 없을 정도다. 그녀는 아직도 바쁘지만 별로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인 듯 '언제든지 말씀하시소.'가 무척 자연스럽다. 이미 큰 산이 되어 있는 것도 모른 채 자신을 내놓는다.

"웃고 있는데도 아~들이 자꾸 웃으라고 해서 골이 나서 마, 나는 생긴 대로 살란다 캐심더." 그녀는 이미 온갖 생명을 기른 산등성이가 되어 있었다. 웃음과 울음을 구분하는 근육의 움직임이 별 의미를 갖지 못할 듯하다. 그녀는 재가불자이며 일상이 걸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자식들의 무거운 마음을 헤아려 마음 한편은 자신의 겉모습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이 생명을 기르는 따사로운 모성일 것이다.

낙엽 진 앞산과 너무도 닮은 그녀가 험한 세월 앞에 섰을 때 이존당에 숨은 장중거의 인생은 닮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라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본질을 외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본질을 읽고 바른길로 가는 일이 때로는 인간 본능의 한 가지를 잊어버려야 할 만큼 버겁다. 이 말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삶이라 해도 주어진 몫을 살아내야 한다는 말일 듯하다. 그래서 그녀는 본인은 자각하지도 못한 사이 자신의 희생을 통해 자기 세계를 구축하면서 동시에 주변의 많은 생명을 길렀을 것이다.

나 역시 누구의 산일 게다. 부모님 덕분에 부실하지만 오만 가지의 서사를 품고 지금에 이르렀다. 앞산에서 보잘것없는 내 모습을 본 듯한데 지난가을 산책길에 대화하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졌다.

얼마 전 모 일간지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반가사유상 국보 78호와 국보 83호를 상시 관람할 수 있게 된다는 기사를 봤다. 그중에 국보 83호는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 생로병사에 대해 고뇌하던 모습이란 설도 있다. 사람이라면 피해 갈 수 없는 생의 여정에 부여되는 화두이다. 반가사유상을 볼 때마다 고뇌에 찬 모습을 읽으려는 내 마음과의 거리는 천리만리인 듯 아득하기만 했다. 떨쳐버릴 수 없던 오묘한 그 이미지를 웃어도 우는 것처럼 보인다는 그녀의 미소에서 발견할 줄이야.

설 연휴 마지막 날 오후 자동차 두어 대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더니 코끝이 찡하다. 분명 그녀는 차 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대문 밖에서 일생이 버무려진 오묘한 그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여사님, 당신의 미소는 반가사유상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우리가 찾고 있던 이 시대의 미소가 아닐는지요."

以存堂 편액이라도 건 듯 산속 살이를 한 지가 십여 년이 되었다. 생사의 산 만들기를 반복하며 서서히 소멸해 가는 여정이 삶이라는 것을 깨달은 시간이다. 뜻하지 않게 이웃 여인의 미소에서 이 사실을 배우게 되니 나의 엄살이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 以存堂 : 장중거란 사람이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자 이존당(以存堂)이란 편액을 붙이고 숨어 살았다. 문제의 본질을 간과한 아둔한 행위를 꼬집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