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벽화 이야기 / 김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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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1. 6. 8.

분명 잘못된 그림이었다. 어느 산사에서 절 안팎을 둘러보며 벽화를 감상하고 있는데 좀 잘못 그려진 부분이 있었다. 왜 저렇게 그렸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다른 그림이었다.

『빈두설경(賓頭設經)』에 「우물 안의 나그네」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미쳐서 날뛰는 코끼리를 만나 도망치다가 우물 속으로 피신을 하게 되는데 마침 우물터에 있는 등나무 줄기를 타고 들어가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물 밑을 내려다보니 무서운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밖에는 성난 코끼리요, 안에는 독을 품은 독사니 진퇴양난이다. 간신히 등나무 줄기에 생명을 걸고 버티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쥐들이 그 줄을 갉아 먹고 있지 않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연자실, 멍해 있는 얼굴 위로 벌집에서 달콤한 꿀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다. 그 순간, 이 나그네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입 안으로 똑 똑 떨어지는 그 꿀맛에만 취했다. 인생의 생사(生死)와 헛된 욕망을 비유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그린 그림에는 분명 쥐들이 사람 매달린 등나무 줄기를 갉아 먹고 있어야 맞다. 그런데 내가 본 그림은 쥐가 꿀이 떨어지고 있는 벌집 달린 줄기를 갉아 먹고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었다. 적어도 절의 벽화를 그리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상식은 알고 있을 터인데, 그렇게 그린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어 한참을 그 그림 밑에서 서성였다. 잘못 그려진 그림이라고 단정하기엔 화가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 같아 내심 어떤 이유를 찾고 싶었지만 내 안목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마침 지나가는 스님이 계시기에 여쭈어 볼까 하다가 무심코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일부러 그렇게 그린 것 아닐까 싶었다. 시대가 변하면 의식도 변하듯이 그 그림이 주는 상징을 다르게 변화시켜 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쥐들로 하여금 이도 저도 못하는 중생의 생명줄을 갉아 먹게 할 게 아니라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꿀맛 같은 유혹의 손길을 잘라 내는 것이 중생을 구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싶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폭력을 일삼는 영상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날로 늘어 가는 모텔들, 가정을 파탄시키는 내용의 드라마들, 이런 달콤한 꿀맛에 어찌 마음 뺏기지 않고 견디랴. 정서를 키우고 감정을 다스리는 프로보다는 서로 속이고 할퀴고 모함하는 드라마들의 시청률이 더 높다지 않은가. 그런 속에서 어찌 정서적인 감성을 키우며 형제애와 효를 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수 있을까. 세태가 변했다거나 걷잡을 수 없다 하기 전에 되도록 그런 환경을 만들지 말아야 할 일이다. 한 단계 높은 발전 뒤에는 어느 정도의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주위의 너무 급격한 상승과 감당하기 어려운 후유증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날로 심해 가는 환경 파괴가 무서운 불길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빠져드는 사람에게 경고하는 메시지에 그치는 상징일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걷어내 가엾은 중생을 보호하는 역할로 진전해야 할 것도 같다.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은 그런 걸 마음에 둔 게 아니었을까.

물론 어떤 환경에서도 꼿꼿이 버티고 비켜 가는 지혜로움을 갖춰야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위의 환경에 쉽게 지배를 받는 어리석은 󰡐우물 안의 나그네󰡑들이다. 좋은 환경에서 올바른 가족관이 성립된 환경이어야 건전한 사회가 되고 강력한 나라가 될 수 있을 텐데, 기본적인 가정 윤리나 사회 윤리마저 허물어져 가고 있는 세태이다.

이럴 즈음에 잘못 그려진 그 그림이 크게 마음에 와 닿는다. 헛된 욕망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성 가르침도 좋지만 저 꿀맛 같은 유혹의 손짓을 걷어 내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가정에서, 교육의 현장에서, 사회의 일선에서 누군가 나서서 한번 쯤 생각하고 살펴보아야 할 일인 듯싶다.

그런 이유로 잘 보이지 않는 부분에 살짝 빗나간 붓칠이지만 그것은 그린 사람의 간절한 염원이리라는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이것이 비록 나 혼자의 착각일지라도 그 의미를 번복하고 싶지 않기에 의문을 풀고자 했던 마음을 접고 조용히 산사를 빠져나왔다. 한 가닥 작은 희망을 느낀 사뿐한 발걸음 뒤로 나직이 울리는 풍경 소리가 적막한 산속으로 길게 여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