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쌓인 벌판에 혼자서 서라 /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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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6. 8.

눈 쌓인 벌판에, 백지와 대면하듯이 혼자서 서라. 막막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아무 말도 못하다 보니 할말도 없는, 백지가 되라.

천지간에 어스름이 고양이 발걸음같이 깔리더니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적막하게 소복소복 쌓이는 것도 아니고 싸락눈이 싸르락싸르락 소곤대는 것도 아니다. 구물구물 밤벌레 같은 눈이 시름없이 기어 내려온다. 강풍이 시샘하지 않으니 아장아장 하강한다. 하염없이 내린다.

백설아,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마음의 갈피에 꽂아 둔 누구인가, 그 사람에게 말 걸고 싶다. 설원의 새끼짐승처럼 겅중겅중 눈 속을 헤매고 싶다. 눈밭에 개 뛰듯 뛰고 싶다.

아뿔싸.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서서 뭣, 뭣, 뭣을 하고 싶다고? ‘하고 싶다’는 일종의 허영. 삶의 포장지에 불과하다. 포장지를 찢어야 알맹이가 나온다. 어서 저 문을 열고 한 발자국 내딛어야 한다. 일상 탈출에 주눅든 소시민 근성을 접어 두고 늙은 몸의 겁도 접어 두고 하루쯤 빈둥거리자. 생애만큼 촘촘히 쌓인 티끌을 털어 눈발로 날리자. 소나무에 설화로 피어나자.

생애에 몇 번쯤이나 이런 폭설을 만나랴. 걸어서 걸어서 눈 쌓이는 도시를 빠져 나가자. 허허벌판 김제 땅에는 백설이 첩첩이 쌓여 하늘도 대지도 희디희었다. 막무가내로 백설군단을 하강시키는 하늘의 설해전술. 눈발이 하늘을 지우고 산을 지우고 벌판을 지운다. 신과 인간의 천지창조에 지우개질을 한다. 희디흰 모조지 세상에 아련히 지워지다 만 전신주 실금이 보인다. 저기 저 눈 쏟아지는 하늘에 빗금을 그으며 날아가는, 검은 듯 허이연 까마귀의 무리를 보아라. 까마귀야, 내 마음도 실어 가렴. 백설아, 사는 데 토라진 내 마음을 지워 주어라. 잘못 색칠한 내 청춘도 지워 주어라. 하이얀 물감을 풀어 내 인생에 덧칠할 수 있다면 참 괜찮으련만.

검정 외투에 초록색 카츄샤 스카프를 쓰고서 바벨탑 같은 서울의 빌딩 사이로 내리는 백설을 마중하던 그 시절,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면사포처럼 받아 쓰던 백설을 잃어버린 후, 깡시리던 카츄샤의 유형의 길처럼 막막하고 비참했던 길, 길, 길. 모든 여자의 운명 같은 카츄샤의 길 위에 눈이 덮인다. 움푹움푹 빼툴빼툴 그어진 과거의 길 위에 눈이 내린다.

백설의 벌판에 홀로 서라. 세계의 낯선 곳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된다. 길인 듯 길이 아닌 곳에 선, 잘 아는데도 뚫고 갈 방향을 찾지 못하고 뱅뱅이질 하는 그 두려움과 낯설음. 사실은 내 삶이 혹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진행되어 온 것이다. 겁나는 세상, 늘 낯설은 사람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고 싶어한 게 아니라, 세상이 나에게 이렇게 살 수밖에 없게 했다.

지상에 눈이 두터워지면 더 이상 먹이를 찾을 수 없는 노루 한 마리. 드문드문 저녁연기 피워 올리는 인가가 있는 들판으로 겁먹은 채 내려오는 노루 한 마리. 허기지고 지쳐 아니 오직 목숨줄인 먹이를 위해, 살고 싶어, 죽음을 겁내면서 막막하게 설원을 걸어온 노루 한 마리. 그 노루가 나였다.

먹장 같은 죽음의 커다란 아가리가 나를 덥썩 삼킬까 봐 염불처럼 외워댔다. 살고 싶어, 살아야 해, 살아 남아야 해.

인생의 맛은 참 지랄 같았다. 달콤새콤하거나 다달보드레한 어린 시절은 잠깐, 헛물켜게 들쩍지근하거나 시큼떨떠름해졌지. 지금에야 물론 무맛의 신선함과 담백함을 알 만하지만 인생은 아직도 타분하거나 짐짐하다. 솜사탕처럼 눈을 한 움큼 퍼서 먹는다. 개운하고 시원하다. 한 움큼 퍼서 머리 위로 던진다. 면사포가 아니라 하이얀 고풀이 띠다. 활개치며 눈사진도 찍고 얼굴을 깊이 눈 속에 묻어 마스크도 찍어낸다. 그 위로 눈발이 쌓여 희미해진다. 그렇게 나는 사라져 갈 것이다 흔적도 없이. 그래도 나는 포근하다. 눈밭에 서서. 꼭꼭 처닫은 마음을 열어 주니까. 가벼워지니까. 작아지니까. 비워지니까.

설경에는 아름다운 시학(詩學), 깊은 미학(美學)이 있다.

오늘 내내 내려온 눈발의 숫자는 우주자연이 갖고 노는 공깃돌 몇 개에 지나지 않을 터. 무한한 수의 눈알갱이가 오직 한 덩어리 하양으로 일원화한다. 설경은 신묘하고 신비하다.

편리한 만큼 지저분하고 탐욕스런 세상 것과 작은 새만큼도 삶을 수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따돌리고, 텅 텅 하얗게 빈 벌판에 의연히 눈 뒤집어쓰고 서 있는 나무들. 등이 휜 황토집. 크리스마스 카드의 교회처럼 뾰족지붕을 높이 올린 둔덕 위의 시골 교회. 알몸처럼 부드럽고 섹시하게 곡선을 드러내고 누워 있는 풍만한 언덕바지. 그 적적한 풍경에도 어떤 사람들의 과거와 미래가 서려 있다.

과거. 이미 죽어 버린 아니 묻어 버린 과거의 현실이 꼼지락거린다. 말짱히 잊혀지지 않는, 아주 사소하지만 질풍이나 벽력같이 나를 할퀴고 간 과거. 그 중 몇 가지는 억누르기 힘든 회한과 향수를 몰고 온다. 그때, 그 일, 그 사람에게 충분히 마음을 쏟지 못했다는 자괴 때문이다. 어찌할 수 없는 과거는 저 설원처럼 묻어 두자. 과거로 인하여 내일을 낭비해선 안 된다.

천지가 하얗다. 하양 속으로 길을 뚫고 청하산 청운사를 찾아간다. 꼭꼭 숨어 버린 청운사. 저수지인지 논바닥인지 그 사잇길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길. 영원히 멎지 않을 것 같던 통증의 시절이 가버린 것마냥 표백된 대지에 새 발자욱을 찍으며 길을 내듯이, 사슴사슴 낯설게 간다. 스님께서 힘드시거나 말거나- 사실은 힘드시리란 생각조차 안 한 채 포로롱 하이얀 덤불숲으로 날아드는 쑥새를 보라고 탄성 지르니, 도원스님께서 백지같이 웃으신다. 온통 희구나.

희디흰 날개의 천사도 검은 망토의 악마도 더러운 이기심으로 가득 찬 어른의 동화일 뿐. 어머니의 자궁 밖 첫 세상을 만나던 아기 영혼은 백설이었을 것이다. 너무 쉽게 부서지는 백설이지만 매일, 거듭 태어나는 아기 영혼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청운사는 적요 그 자체였다.

눈 시리게 맑은 배추색 단청. 무릎까지 닿는 눈의 마당. 눈 무게에 낭차짐하게 휘어져 마치 법당을 향해 읍하는 듯한 대나무들. 이따금 진저리치듯 눈을 털어 면사포를 늘어뜨리는 빈 나뭇가지들. 어깨에 백설기 견장을 얹고 촉촉이 웃음띠는 미륵보살님. 간간이 박새소리, 직박구리소리, 까마귀가 줄지어 청하산을 서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떨어진다. 설야(雪野)에 눈이 자꾸 내린다. 눈이 자꾸 쌓인다. 침묵도 쌓인다.

이제, 과거라는 한 편의 영화 상영을 끝내야 한다. 수많은 조역들과 단역들의 이름이 줄줄이 끝자막으로 사라진다. 그렇다. 아무리 감동적인 영화의 끝일지라도 그 끝은 언제나 저 설원처럼 막막하게 하얗다. 끝이기도 하고 시작이기도 한 하이얀 스크린. 난 어느새 백지 영혼이 되는 듯하다.

“스님. 이제 저는 세상 속으로, 환속해야겠네요.”

눈물겹게 깨끗한 하양 속을 지금 떠나지 않으면, 다시는 세상 속에서 뒹굴고 싶지 않아질까 봐 겁났다. 미련 없는 세상, 덧정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것들 속에서 나는 아직 닳아져야 하나니.

스님께서 앞장서서 눈을 쓸며 가신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나 ‘피터 팬‘이 타고 날던 마법의 빗자루를 들어 눈을 좌우로 쓸어 날린다. 그 뒤를 폴짝폴짝 내가 따라간다. 알량한 중생을 스님께서 보살핀다.

법당 토방에 올라 눈 아래 펼쳐진 모조지 세상을 본다. 신천지다. 하이얀 스크린에 새 영화 제목을 뭐라 쓸까.

스님의 오른손에 법장처럼 들려 있던 빗자루를 받아 온몸으로 쓴다. 눈밭에 큼직하게 새겨지는 법문 한마디.

사 랑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