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시인

댓글 0

시詩 느낌

2021. 6. 11.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남기고/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 보아야 한다./ … 등대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있어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 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 박인환
동양의 오케스트라/ 가메란의 반주악이 들려온다/ 오 약소민족/ 우리와 같은 식민지의 인도네시아// 삼백년 동안 너의 자원은/ 구미 자본주의 국가에 빼앗기고/ 반면 비참한 희생을 받지 않으면/ 구라파의 반이나 되는 넓은 땅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가메란은 미칠 듯이 울었다// 오란다의 58배나 되는 면적에/ 오란다인은 조금도 갖지 않은 슬픔에/ 밀시(密柹)처럼 지니고/ 육천칠십삼만인(六千七十三萬人) 중 한 사람도 빛나는 남십자성은/ 쳐다보지 못하며 살아왔다// 수도 바다비아 상업항 스라바야 고원분지의 중심지/ 반돈의 시민이여/ 너희들의 습성이 용서하지 않는// 남을 때리지 못하는 것은 회교서 온 것만이 아니라/ 동인도회사가 붕괴한 다음/ 오란다의 식민정책 밑에 모든 힘까지도 빼앗긴 것이다// 사나이는 일할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약한 여자들은 백인 아래 눈물 흘렸다/ 수많은 혼혈아는 살길을 잃어 애비를 찾았으나/ 스라바야를 떠나는 상선은/ 벌써 기적을 울렸다// 오란다인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처럼/ 사원(寺院)을 만들지는 않았다/ 영국인처럼 은행도 세우지 않았다/ 토인(土人)은 저축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축할 여유란 도무지 없었다/ 오란다인은 옛날처럼 도로를 닦고/ 아시아의 창고에서 임자 없는 사이/ 보물을 본국으로 끌고만 갔다// 주거와 의식은 최저도(最抵度)/ 노예적 지위는 더욱 심하고/ 옛과 같은 창조적 혈액은 완전히 부패하였으나/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생의 광영은 그놈들의 소유만이 아니다//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인민의 해방/ 세워야 할 너희들의 나라/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성립하였다 그런데/ 연립 임시 정부란 또 다시 박해다/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모략을 부숴라/ 이제는 식민지의 고아가 되면 못쓴다/ 전인민은 일치단결하여 스콜처럼 부서져라/ 국가방위와 인민전선을 위해 피를 뿌려라/ 삼백 년 동안 받아온 눈물겨운 박해의 반응으로/ 너의 조상이 남겨놓은 저 야자나무의 노래를 부르며/ 오란다군의 기관총 진지에 뛰어들어라// 제국주의의 야만적 체제는/ 너희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욕/ 힘 있는 대로 영웅 되어 싸워라/ 자유와 자기보존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야욕과 폭압과 비민주적인 식민정책을 지구에서/ 부숴내기 위해/ 반항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라// 참혹한 옛날이 지나면/ 피 흘린 자바섬에는/ 붉은 칸나 꽃이 피리니/ 죽음의 보람은 남해의 태양처럼/ 조선에 사는 우리에게도 빛이려니/ 해류가 부딪치는 모든 육지에선/ 거룩한 인도네시아 인민의 내일을 축복하리라// 사랑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고대 문화의 대유적 보로 로도울의 밤/ 평화를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가메란에 맞추어 스림피로/ 새로운 나라를 맞이하여라//
* 일제강점기를 거친 우리나라와 같은 처지의 인도네시아를 향한 동질감을 노래함


대하(大河) / 박인환
큰물이 흐른다/ 역사와 황혼을 품안에 안고/ 인생처럼/ 그리고 지나간 싸움처럼/ 구비 치며 노도(怒濤)하며/ 내 가슴에 큰물이 흐른다./ 신비도 증오도/ 피라미드도 불상도 그 위에 흐르고/ 내가 살던 아크로폴리스 마을에/ 큰물이 흐른다./ 어느 산줄기에 그 수원이 있는가/ 어느 가슴 아픈 인간의 피눈물인가/ 나는 보았다/ 썩은 다리와 고목들이/ 큰물에 씻겨 나가는 것을/ 벼루와 서책이 출렁거리는 것을/ 큰물이 흐른다/ 목메어 우는 사람과/ 고달픈 역사와 황혼을 품안에 안고/ 침울한 큰물이 흐른다./ 과거는 잠자고/ 오직 대하가 있다.//
* 《國都新聞》, 1956년 1월 29일

 

태평양에서 / 박인환
갈매기와 하나의 물체/ 고독/ 연월도 없고 태양도 차갑다./ 나는 아무 욕망도 갖지 않겠다./ 더욱이 낭만과 정서는// 저기 부서지는 거품 속에 있어라./ 죽어간 자의 표정처럼/ 무겁고 침울한 파도 그것이 노할 때/ 나는 살아 있는 자라고 외칠 수 없었다./ 그저 의지의 믿음만을 위하여/ 심유한 바다 위를 흘러가는 것이다.// 태평양에 안개가 끼고 비가 내릴 때/ 검은 날개에 검은 입술을 가진/ 갈매기들이 나의 가까운 시야에서 나를 조롱한다./ 환상/ 나는 남아 있는 것과/ 잃어버린 것과의 비례를 모른다.// 옛날 불안을 이야기했었을 때/ 이 바다에선 포함이 가라앉고/ 수십만의 인간이 죽었다./ 어두침침한 조용한 바다에서 모든 것이 잠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인식하고 있는가?// 바람이 분다./ 마음대로 불어라, 나는 데키에 매달려/ 기념이라고 담배를 피운다./ 무한한 고독 저 연기는 어디로 가나?// 밤이여 무한한 하늘과 물과 그 사이에/ 나를 잠들게 하라.//

고향에 가서 / 박인환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繪畵)/ 피 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렬과 함께/ 세상엔 없다.//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 거기 나는 동상(銅像)처럼 서 있었다./ 내 귓전엔 싸늘한 바람이 설레이고/ 그림자는 망령과 같이 무섭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운동장을 뛰다니며/ 미래와 살던 나와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황혼 속으로/ 감상(感傷) 속으로/ 차는 달린다./ 가슴속에 흐느끼는 갈대의 소리/ 그것은 비창(悲愴)한 합창과도 같다.// 밝은 달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부르던/ 그것뿐이다.// 비 내리는 사경(斜傾)의 십자가와/ 아메리카 공병(工兵)이/ 나에게 손짓을 해준다.//

 

자본가에게 / 박인환
나는 너희들의 마니페스토의 결함을 지적한다/ 그리고 모(靦)본이 붕괴한 다음/ 태풍처럼 너희들을 휩쓸어 갈/ 위험성이/ 파장처럼 가까위진다는 것도// 옛날 기사(技師)가 도주하였을 때/ 비행장에 궂은 비가 내리고/ 모두 목메어 부른 노래는밤의 말로(末路)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자본가여/ 새삼스럽게 문명을 말하지 말라/ 정신과 함께 태양이 도시를 떠난 오늘/ 허물어진 인간의 광장에는/ 비둘기 떼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신작로를 바람처럼 굴러간/ 기체(機體)의 중추는/ 어두운 외계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조종자(操縱者)의 얇은 작업복이/ 하늘의 구름처럼 남아 있었다.// 잃어버린 일월의 선명한 표정들/ 인간이 죽은 토지에서/ 타산(打算)치 말라/ 문명의 모습이 숨어 버린 황량한 밤// 성안(成案)은/ 꿈의 호텔처럼 부서지고/ 생활과 질서의 신조에서 어긋난/ 최후의 방랑은 끝났다.// 지금 예날 촌락(村落)을 흘려 버린/ 슬픈 비는 내린다.//

가을의 유혹 / 박인환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리킨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무른/ 서울의 노대(露臺)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적거리며/ 적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자처럼 또는/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 때/ 목메인 소리로 나는 사랑의 말을 한다// 그것은 폐원에 있던 벤치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다시 오는 것이다/ 회색양복과 목관악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구름 / 박인환
어린 생각이 부서진 하늘에/ 어머니구름 작은 구름들이/ 사나운 바람을 벗어난다/ 밤비는/ 구름의 층계를 뛰어내려/ 우리에게 봄을 알려 주고/ 모든 것이 생명을 찾았을 때/ 달빛은 구름 사이로/ 지상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새벽문을 여니/ 안개보다 따스한 호흡으로/ 나를 안아 주던 구름이여/ 시간은 흘러가/ 네 모습은 또다시 하늘에/ 어느 곳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전형/ 서로 손잡고 모이면/ 크게 한 몸이 되어/ 산다는 괴로움으로 흘러가는 구름/ 그러나 자유 속에서/ 아름다운 석양 옆에서 헤매는 것이/ 얼마나 좋으니//

거리 / 박인환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붉은 지붕 밑으로 향수가 광선을 따라가고/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운하의 물결에 씻겨갔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지나간 날의 동화를 운율에 맞춰/ 거리에 화액(花液)을 뿌리자/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지금 그곳에는 코코아의 시장이 있고/ 과실처럼 기억만을 아는 너의 음향이 들린다/ 소년(少年)들은 뒷골목을 지나 교회에 몸을 감춘다/ 아세틸렌 냄새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음영같이 따른다// 거리는 매일 맥박을 닮아갔다/ 베링해안 같은 나의 마을이/ 떨어지는 꽃을 그리워한다/ 황혼처럼 장식한 여인들은 언덕을 지나/ 바다로 가는 거리를 순백한 식장으로 만든다// 전정(戰庭)의 수목 같은 나의 가슴은/ 베고니아를 끼어안고 기류 속을 나온다/ 망원경으로 보던 천만(千萬)의 미소를 회색 외투에/ 싸아/ 얼은 크리스마스의 밤길로 걸어 보내자//

최후의 회화 / 박인환
아무 잡음도 없이 멸망하는/ 도시의 그림자/ 무수한 인상(印象)과/ 전환하는 년대(年代)의 그늘에서/ 아 영원히 흘러가는 것/ 신문지의 경사(傾斜)에 얽혀진/ 그러한 불안의 격투.// 함부로 개최되는 주장(酒場)의 사육제(謝肉祭)/ 흑인의 트럼펫/ 구라파 신부(新婦)의 비명(悲鳴)/ 정신의 황제!/ 내 비밀을 누가 압니까?/ 체험만이 늘고/ 실내는 잔잔한 이러한/ 환상(幻像)의 침대에서.// 회상의 기원(起源)/ 오욕의 도시/ 황혼의 망명객/ 검은 외투에 목을 굽히면/ 들려오는 것/ 아 영원히 듣기 싫은 것/ 쉬어빠진 진혼가/ 오늘의 폐허에서/ 우리는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일구오(一九五)0년의 사절단.// 병든 배경의 바다에/ 국화가 피었다./ 폐쇄된 대학의 정원은/ 지금의 묘지/ 회화(繪畵)와 이성(理性)의 뒤에 오는 것/ 술 취한 수부(水夫)의 팔목에 끼어/ 파도처럼 밀려드는/ 불안한 최후의 회화(會話).//

회한의 긴 계곡 / 박인환
아름답고 사랑처럼 무한히 슬픈/ 회상의 긴 계곡/ 그랜드 쇼우처럼 인간의 운명이 허물어지고/ 검은 연기여 올라라/ 검은 모양(幻影)이여 살아라.// 안개 내린 시야에/ 신부(新婦)의 베일인가 가늘은 생명의 연속이/ 초후의 송가(頌歌)와/ 불안한 발걸음에 맞추어/ 이디로인가/ 황폐한 토지의 외부로 떠나가는데/ 울음으로서 죽음을 대치하는/ 수없는 악기들은/ 고한 이 계곡에서 더욱 서럽다.// 강(江)기슭에서 기약할 것 없이 쓰러지는/ 하루만의 인생/ 화려한 욕망/ 여권(旅券)은 산산이 찢어지고/ 낙엽처럼 길 위에 떨어지는/ 캘린더의 향수를 안고/ 자잔거의 소녀여 나와 오늘을 살자.// 군인이 피워물던/ 물뿌리와 검은 연기의 인상(印象)과/ 위기에 가득 찬 세계의 변경/ 이 회상의 긴 계곡 속에서도/ 열을 지어 죽음의 비탈을 지나는/ 서럽고 또한 환상에 속은/ 어리석은 영원한 순교자./ 우리들.//

세 사람의 가족 / 박인환
나와 나의 청순한 아내/ 여름날 순백한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플랫폼으로 화려한/ 상품의 쇼우윈도우를 바라보며 걸었다.// 전쟁이 머물고/ 평온한 지평에서/ 모두의 단편적인 기억이/ 비둘기의 날개처럼 솟아나는 틈을 타서/ 우리는 내성과 회한에의 여행을 떠났다.// 평범한 수확의 가을/ 겨울은 백합처럼 향기를 풍기고 온다./ 죽은 사람들은 싸늘한 흙 속에 묻히고/ 우리의 가족은 세 사람/ 토르소 그늘 밑에서/ 나의 불운한 편력인 일기책이 떨고/ 그 하나 하나의 지면은/ 음울한 회상의 지대로 날아갔다.// 아 창백한 세상과 나의 생애에/ 종말이 오기 전에/ 나는 고독한 피로에서/ 빙화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을 위해/ 시를 써본다.// 그러나 창 밖/ 암담한 상가/ 고통과 구토가 동결된 밤의 쇼윈도우/ 그 곁에는/ 절망과 기아의 행렬이 밤을 새우고/ 내일이 온다면/ 이 정막의 거리에 폭풍이 분다./

신호탄 / 박인환
위기와 영광을 고(告)할 때/ 신호탄은 터진다./ 바람과 함께 살던 유년도/ 떠나간 행복의 시간도/ 무거운 복잡에서/ 더욱 단순으로 순화(醇化)하여 버린다.// 옛날 식민지의 아들로/ 검은 땅덩어리를 밟고/ 그는 주검을 피해/ 태양 없는 처마 끝을 걸었다.// 어두운 밤이여/ 마지막 작별의 노래를/ 그 무엇으로 표현하였는가./ 슬픈 인간의 유형을 벗어나/ 참다운 해방을/ 그는 무엇으로 신호하였는가.// 적을 쏘라/ 침략자 공산군을 사격해라./ 내 몸뚱어리가 벌집처럼 터지고/ 뻘건 피로 화(化)할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주신 어머니/ 어머니 나를 중심으로 한 주변에/ 기총을 소사하시오. 적은 나를 둘러쌌소// 생(生)과 사(死)의 눈부신 외접선(外接線)을 그으며/ 하늘에 구멍을 뚫은 신호탄/ 그가 침묵한 후/ 구멍으로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단순(單純)에서 더욱 주검으로/ 그는 나와 자유의 그늘에서 산다.//

열차 / 박인환
폭풍이 머문 정거장 거기가 출발점/ 정력과 새로운 의욕 아래/ 열차는 움직인다./ 격동의 시간―/ 꽃의 질서를 버리고/ 공규(空閨)한 너의 운명처럼/ 열차는 떠난다./ 검은 기억은 전원에 흘러가고/ 속력은 서슴없이 죽음의 경사를 지난다// 청춘의 복받침을/ 나의 시야에 던진 채/ 미래에의 외접선을 눈부시게 그으며/ 배경은 핑크빛 향기로운 대화/ 깨진 유리창 밖 황폐한 도시의 잡음을 차고/ 율동하는 풍경으로/ 활주하는 열차//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관습과/ 봉건의 터널 특권의 장막을 뚫고/ 피비린 언덕 너머 곧/ 광선의 진로를 따른다/ 다음 헐벗은 수목의 집단 바람의 호흡을 안고/ 눈이 타오르는 처음의 녹지대/ 거기엔 우리들의 황홀한 영원의 거리가 있고/ 밤이면 열차가 지나온/ 커다란 고난과 노동의 불이 빛난다/ 혜성보다도/ 아름다운 새날보다도 밝게//

인천항 / 박인환
사진잡지에서 본 홍콩[香港]야경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중일전쟁 때 상해부두를 슬퍼했다.// 서울에서 삼천 킬로를 떨어진 땅에/ 모든 해안선과 공통된 인천항이 있다.// 가난한 조선의 인상을 여실히 말하던 인천항구에는/ 상관(商館)도 없고 영사관도 없다.// 따뜻한 황해의 바람이 생활의 도움이 되고저/ 나푸킨같은 만내(灣內)로 뛰어들었다.// 해외에서 동포들이 고국을 찾아들 때/ 그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 인천항구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은주(銀酒)와 아편과 호콩이 밀선에 실려오고/ 태평양을 건너 무역풍을 탄 칠면조가/ 인천항으로 나침을 돌린다.// 서울에서 모여든 모리배는/ 중국서 온 헐벗은 동포의 보따리같이/ 화폐의 큰 뭉치를 등지고 부두를 방황했다.// 웬 사람이 이같이 많이 걸어다니는 것이냐./ 항부(航夫)들인가 아니 담배를 사려고 군복과 담요와 또는 캔디를 사려고―/ 그렇지만 식료품만은 칠면조와 함께 배급을 한다.// 밤이 가까울수록 성조기가 퍼덕이는 숙사(宿舍)와/ 주둔소(駐屯所)의 네온사인은 붉고 짠/ 그의 불빛은 푸르며 마치 유니온 작크가 날리는/ 식민지 홍콩[香港]의 야경을 닮아간다/ 조선의 해항(海港) 인천의 부두가 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 상해의 밤을 소리 없이 닮아간다.//

여행 / 박인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먼 나라로/ 여행의 길을 떠났다/ 수중엔 돈도 없이/ 집에 쌀도 없는 시인이/ 누구의 속임인가/ 나의 환상인가/ 그저 배를 타고/ 많은 인간이 죽은 바다를 건너// 낯설은 나라를 돌아다니게 되었다/ 비가 내리는 주립공원을 바라보면서/ 이백 년 전/ 이 다리 아래를 흘러간 사람의 이름을/ 수첩에 적는다/ 캡틴xx/ 그 사람과 나는 관련이 없건만/ 우연히 온 사람과 죽은 사람은/ 저기 푸르게 잠든 호수의 수심을/ 잊을 수 없는 것일까// 거룩한 자유의 이름으로 알려진 토지/ 무성한 삼림아 있고/ 비렴계관과 같은 집이/ 연이어 있는 아메리카 도시/ 시애틀의 네온이 붉은 거리를/ 실신한 나는 간다// 아니 나는 더욱 선명한 정신으로/ 타아반에 들어가 향수를 본다/ 이지러진 회상/ 불멸의 고독/ 구두에 남은 한국의 진흙과/ 상표도 없는 공작의 연기/ 그것은 나의 자랑이다/ 나의 외로움이다// 또 밤거리/ 거리의 음료수를 마시는/ 포틀란드 이방인/ 저기/ 가는 사람은 나를 무엇으로 보고 있는//

침울한 바다 / 박인환
그러한 잠시/ 그 들창에서 울던 숙녀는/ 오늘의 사람이 아니다.// 목마의 방울 소리/ 또한 번갯불/ 이지러진 길목/ 다시 돌아온다 해도/ 그것은 사랑을 지니지 못했다.// 해야 새로운 암흑아/ 네 모습에/ 살던 사랑도/ 죽던 사람도/ 잊어버렸구나.// 침울한 바다/ 사랑처럼 보기 싫은/ 오늘의 사람.// 그 들창에/ 지나간 날과 치울한 바다와 같은/ 나만이 있다.//

검은 신이여 / 박인환
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입니까./ 1년이 끝나고 그 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쟁이 뺏어간 나의 친우는 어데서 만날 수 있습니까./ 슬픔 대신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 인간을 대신하여 세상을 풍설로 뒤덮어주시오./ 건물과 창백한 묘지 있던 자리에/ 꽃이 피지 않도록./ 하루의 1년의 전쟁의 처참한 추억은/ 검은 신이여/ 그것은 당신의 주제일 것입니다.//

검은 강 / 박인환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후(最後)의 노정(路程)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驛前)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合唱)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者)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情欲)처럼 피폐(疲弊)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불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爆音)과 초연(硝煙)이 가득 찬/ 생(生)과 사(死)의 경지로 떠난다.// 달은 정막(靜寞)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피로 이룬/ 자유의 성채(城砦)/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다리 위의 사람 / 박인환
다리 위의 사람은/ 애증과 부채를 자기 나라에 남기고/ 암벽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에 놀래/ 바늘과 같은 손가락은/ 난간을 쥐었다./ 차디찬 철(鐵)의 고체/ 쓰디쓴 눈물을 마시며/ 혼란된 의식에 갈앉아아버리는/ 다리 위의 사람은/ 긴 항로 끝에 이르는 정막(靜寞)한 토지에서/ 신(神)의 이름을 부른다.// 그가 살아오는 동안/ 풍파(風波)와 고절(孤絶)은 그칠 줄 몰랐고/ 오랜 세월을 두고/ DECEPTION PASS에도/ 비와 눈이 내렸다./ 또다시 헤어질 숙명이기에/ 만나야만 되는 것과 같이/ 지금 다리 위의 사람은/ 로사리오 해협에서 불어오는/ 처량한 바람을 잊으려고 한다./ 잊으려고 할 때 두 눈을 가로막는/ 새로운 불안/ 화끈거리는 머리/ 절벽 밑으로 그의 의식은 떨어진다./ 태양이 레몬과 같이 물결에 흔들거리고/ 주립공원 하늘에는/ 에머랄드처럼 반짝거리는 기계가 간다./ 변함없이 다리 아래 물이 흐른다/ 절망된 사람의 피와도 같이/ 파란 물이 흐른다/ 다리 위의 사람은/ 흔들리는 발걸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전원 / 박인환
1/ 홀로 세우는 밤이었다 지난 시인의 걸어온 길을/ 나의 굼길에서 부딪혀 본다/ 적막한 곳엔 살 수 없고 겨울이면 눈이 쌓일 것이/ 걱정이다/ 시간이 갈수록 바람은 모여들고/ 한칸 방은 잘 자리도 없이/ 좁아진다/ 밖에는 우수수 낙엽소리에/ 나의 몸은 점점 무거워진다//

2/ ?토의 냄새를 산마루에서/ 지킨다/ 내 가슴보다도 더욱 쓰라린/ 늙은 농촌의 황혼 언제부터 시작되고/ 언제 그치는 나의 슬픔인가/ 지금 쳐다보기도 싫은/ 기울어져 가는/ 만하 전선위에서/ 제비들은 바람처럼/ 나에게 작별한다//

3/ 찾아든 고독 속에서/ 가까이 들리는 바람소리를 사랑하다/ 창을 부수는 듯 별들이 보였다/ 7월의 저무는 전원/ 시인이 죽고 괴로운 세월은/ 어디론지 떠났다/ 비 나리면 떠난 친구의/ 목소리가 강물보다도/ 내 귀에 서늘하게 들리고/ 여름의 호흡이 쉴새없이/ 눈앞으로 지낸다//

4/ 절름발이 내 어머니는/ 삭풍에 쓰러진 고목 옆에서 나를/ 불렀다. 얼마 지나/ 부서진 추억을 안고/ 염소처럼 나는 울었다/ 마차가 넘어간 언덕에 앉아/ 지평에서 걸어오는/ 옛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생각이 타오르는 연기는 마을을 덮는다//

불행한 신 / 박인환
오늘 나는 모든 욕망과/ 사물에 작별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친한 죽음과 가까워집니다/ 과거는 무수한 내일에/ 잠이 들었습니다/ 불행한 신/ 어디서나 나와 함께 사는/ 불행한 신/ 당신은 나와 단둘이서/ 얼굴을 비벼대고 비밀을 터놓고/ 오해나/ 인간의 체험이나/ 고절된 의식에/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또다시 우리는 결속되었습니다/ 황제의 신하처럼 우리는 죽음을 약속합니다/ 지금 저 광장의 전주처럼 우리는 존재됩니다/ 쉴새없이 내 귀에 울려 오는 것은 불행한 신/ 당신이 부르시는/ 폭풍입니다// 그러나 허망한 천지 사이를/ 내가 있고 엄연히 주검이 가로놓이고/ 불행한 당신이 있으므로/ 나는 최후의 안정을 즐깁니다//

불행한 샹송 / 박인환
산업은행 유리창 밑으로/ 대륙의 시민이 푸롬나아드하던 지난해 겨울/ 전쟁을 피해온 여인은/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 과거로/ 수태하며 뛰어다녔다.// 폭풍의 뮤즈는 등화관제 속에/ 고요히 잠들고/ 이 밤 대륙은 한 개 과실처럼/ 대리석 위에 떨어졌다.// 짓밟힌 나의 우월감이여/ 시민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데모스테네스/ 정치의 연출가는 도망한/ 아를르캉을 찾으러 돌아다닌다.// 시장(市長)의 조마사(調馬師)는/ 밤에 가장 가까운 저녁때/ 웅계(雄鷄)가 노래하는 부루스에 화합되어/ 평행면체(平行面體)의 도시계획을/ 코스모스가 피는 한촌(寒村)으로 안내하였다.// 의상점(衣裳店)에 신화(神化)한 마네킨/ 저 기적은 Express for Mukden/ 마로니에는 창공에 동결되고/ 기적처럼 사라지는 여인의 그림자는/ 재스민의 향기를 남겨주었다.//

일곱 개의 층계 / 박인환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하니/ 지난 하루하루가 무서웠다./ 무엇이나 거리낌없이 말했고/ 아무에게도 협의해본 일이 없던/ 불행한 연대였다.// 비가 줄줄 내리는 새벽/ 바로 그때이다/ 죽어간 청춘이/ 땅속에서 솟아나오는 것이……/ 그러나 나는 뛰어들어/ 서슴없이 어깨를 거느리고/ 악수한 채 피 묻은 손목으로/ 우리는 암담한 일곱 개의 층계를 내려갔다.// `인간의 조건'의 앙드레 말로/ `아름다운 지구(地區)'의 아라공/ 모두들 나와 허물없던 우인(友人)/ 황혼이면 피곤한 육체로/ 우리의 개념이 즐거이 이름 불렀던/ `정신과 관련의 호텔'에서/ 말로는 이 빠진 정부(情婦)와/ 아라공은 절름발이 사상과/ 나는 이들을 응시하면서……/ 이러한 바람의 낮과 애욕의 밤이/ 회상의 사진처럼/ 부질하게 내 눈앞에 오고간다.// 또 다른 그날/ 가로수 그늘에서 울던 아이는/ 옛날 강가에 내가 버린 영아/ 쓰러지는 건물 아래/ 슬픔에 죽어가던 소녀도/ 오늘 환상처럼 살았다/ 이름이 무엇인지/ 나라를 애태우는지/ 분별할 의식조차 내게는 없다/ 시달림과 증오의 육지/ 패배의 폭풍을 뚫고/ 나의 영원한 작별의 노래가/ 안개 속에 울리고/ 지난날의 무거운 회상을 더듬으며/ 벽에 귀를 기대면/ 머나먼/ 운명의 도시 한복판/ 희미한 달을 바라/ 울며울며 일곱 개의 층계를 오르는/ 그 아이의 방향은/ 어디인가.//

지하실 / 박인환
황갈색 계단을 내려와/ 모인 사람은/ 도시의 지평에서 싸우고 왔다// 눈앞에 어리는 푸른 시그널/ 그러나 떠날 수 없고/ 모두들 선명한 기억 속에 잠든다// 달빛 아래/ 우물을 푸던 사람도/ 지하의 비밀은 알지 못했다// 이미 밤은 기울어져가고/ 하늘엔 청춘이 부서져/ 에메랄드의 불빛이 흐른다// 겨울의 새벽이여/ 너에게도 지열과 같은 따스함이 있다면/ 우리의 이름을 불러라// 아직 바람과 같은/ 속력이 있고/ 투명한 감각이 좋다//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 / 박인환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 가느다란 1년의 안젤루스// 어두워지면 길목에서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숲속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의 얼굴은 죽은 시인이었다// 늙은 언덕 밑/ 피로한 계절과 부서진 악기// 모이면 지낸 날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저만이 슬프다고// 가난을 등지고 노래도 잃은/ 안개 속으로 들어간 사람아// 이렇게 밝은 밤이면/ 빛나는 수목이 그립다// 바람이 찾아와 문은 열리고/ 찬 눈은 가슴에 떨어진다// 힘없이 반항하던 나는/ 겨울이라 떠나지 못하겠다// 밤새우는 가로등/ 무엇을 기다리나// 나도 서 있다/ 무한한 과실만 먹고//

1950년의 만가(輓歌) / 박인환
불안한 언덕 위에로/ 나는 바람에 날려간다./ 헤아릴 수 없는 참혹한 기억 속으로/ 나는 죽어간다./ 이 행복에서 차다된/ 지폐처럼 더럽힌 여름의 호반/ 석양처럼 타올랐던 나의 욕망과/ 예절 있는 숙녀들은 어데로 갔나/ 불안한 언덕에서/ 나는 음영처럼 쓰러져간다./ 무거운 고뇌에서 단순으로/ 나는 죽어간다./ 지금은 망각의 시간/ 서로 위기와 인식과 우애를 나누었던/ 아름다운 연대를 회상하면서/ 나는 하나의 모멸의 개념철머 죽어간다.//

1953년의 여자에게 / 박인환
1953년의 여자에게// 유행은 섭섭하게도/ 여자들에게서 떠났다./ 왜?/ 그것은 스스로 기원을 찾기 위하여// 어떠한 날/ 구름과 환상의 접경(接境)을 더듬으며/ 여자들은/ 불길한 옷자락을 벗어버린다.// 회상의 푸른 물결처럼/ 고독은 세월에 살고/ 혼자서 흐느끼는/ 해변의 여신과도 같이/ 여자들은 완전한 시간을 본다.// 황막한 연대여/ 거품과 같은 허영이여/ 그것은 깨어진 거울의 여윈 인상(印象).// 필요한 것과/ 소모의 비례를 위하여/ 전쟁은 여자들의 눈을 감시한다./ 코르셋으로 침해된 건강은/ 또한 유행은 정신의 방향을 봉쇄한다.// 여기서 최후의 길손을 바라볼 때/ 허약한 바늘처럼/ 바람에 쓰러지는/ 무수한 육체/ 그것은 카인의 정부(情婦)보다/ 사나운 독을 풍긴다.// 출발도 없이/ 종말도 없이/ 생명은 부질하게도/ 여자들에게서 어두움처럼 떠나는 것이다./ 왜?/ 그것을 대답하기에는/ 너무도 준열한 사회가 있었다.//

사랑의 Parabola / 박인환
어제의 날개는 망각 속으로 갔다./ 부드러운 소리로 창을 두들기는 햇빛/ 바람과 공포를 넘고/ 밤에서 맨발로 오는 오늘의 사람아// 떨리는 손으로 안개 낀 시간을 나는 지켰다./ 희미한 등불을 던지고/ 열지 못할 가슴의 문을 부쉈다.// 새벽처럼 지금 행복하다./ 주위의 혈액은 살아 있는 인간의 진실로 흐르고/ 감정의 운하로 표류하던/ 나의 그림자는 지나간다.// 내 사랑아/ 너는 참 기후에서 긴 행로를 시작했다. 그러므로/ 폭풍우도 서슴치 않고 참혹마저 무섭지 않다.// 짧은 하루 허나/ 너와 나의 사랑의 포물선은/ 권력없는 지구 끝으로/ 오늘의 위치의 연장선이/ 노래의 형식처럼내일로/ 자유로운 내일로.....//

기적(奇蹟)인 현대 / 박인환
장미는 강가에 핀 나의 이름/ 집집 굴뚝에서 솟아나는 문명의 안개/ 시인(詩人) 가엾은 곤충이여/ 나의 울음이 도시에 들린다.// 오래도록 네 욕망은 사라진 회화/ 무성한 잡초원(雜草園)에서/ 환영(幻影)과 애정과 비벼대던/ 그 연대(年代)의 이름도/ 허망한 어젯밤 버러지.// 사랑은 조각에 나타난 추억/ 이녕과 작별의 여로에서/ 기대었던 수목은 썩어지고/ 전신(電信)처럼 가벼웁고 재빠른/ 불안한 속력은 어디서 오나.// 침묵의 공포와 눈짓하던/ 그 무렵의 나의 운명은/ 기적(奇蹟)인/ 동양의 하늘을 헤매고 있다.//

센티멘탈 쟈니 / 박인환
주말여행/ 엽서.......낙엽/ 낡은 유행가의 설움에 맞추어/ 피폐한 소설을 읽던 소녀// 이태백의 달은/ 울고 떠나고/ 너는 벽화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숙녀// 카프리 섬의 여정/ 파이프의 향기를 날려보내라/ 이브는 내 마음에 살고/ 나는 그림자를 잡는다// 세월은 관념/ 독서는 위장/ 그저 죽기싫은 예술가// 오늘이 가고 또 하루가 온들/ 도시에 분수는 시들고/ 어제와 지금의 사람은/ 천상 유사를 모른다// 술을 마시면 즐겁고/ 비가 내리면 서럽고/ 분별이여 구분이여// 수복은 외롭다/ 혼자 길을 가는 여자와 같이/ 정다운 것은 죽고/ 다리 아래 강은 흐른다// 지금 수목에서떨어지는 엽서/ 긴 사연은/ 구름에 걸린 달 속에 묻히고/ 우리들은 여행을 떠난다/ 주말여행/ 별말씀/ 그저 옛날로 가는 것이다// 아 센티멘탈 쟈니/ 센티멘털 쟈니//

한줄기 눈물도 없이 / 박인환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용사가 누워 있었다/ 구름 속에 장미가 피고/ 비둘기는 야전병원 지붕 위에서 울었다/ 존엄한 죽음을 기다리는/ 용사가 대열을 지어/ 전선으로 나가는 뜨거운 구두 소리를 듣는다// 아 창문을 닫으시오/ 고지탈환작전/ 제트기 박격포 수류탄/ 어머니! 마지막 그가 부를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옛날은 화려한 그림책/ 한 장 한 장마다 그리운 이야기/ 만세소리도 없이 떠나/ 흰 붕대에 감겨/ 그는 남 모르는 토지에서 죽는다// 한 줄기 눈물도 없이/ 인간이라는 이름으로서/ 그는 피와 청춘을/ 자유에 바쳤다/ 음산한 잡초가 무성한 들판엔/ 지금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죽은 아포롱 / 박인환
- 이상 그가 떠난 날에// 오늘은 3월 열 이렛날/ 그래서 나는 망각의 술을 마셔야 한다/ 여급 마유미가 없어도/ 오후 세시 이십오분에는/ 벗들과 제비의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그날 당신은/ 동경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 허망한 서울의 하늘에는 비가 내렸다// 운명이여 얼마나 애태운 일이냐/ 권태와 인간의 날개/ 당신은 싸늘한 지하에 있으면서도/ 성좌를 간직하고 있다// 정신의 수렵을 위해 죽은/ 랭보와도 같이/ 당신은 나에게/ 환상과 흥분과/ 열병과 흥분과/ 열병과 착각을 알려주고/ 그 빈사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문학에// 따뜻한 손을 빌려준/ 정신의 황제// 무한한 수면/ 반역과 영광/ 임종의 눈물을 흘리며 결코/ 당신은 하나의 증명을 갖고 있었다/ 이상이라고//

어느 날 / 박인환
사월 십일의 부활제를 위하여/ 포도주 한 병을 산 흑인과/ 빌딩의 숲속을 지나/ 에이브라함 링컨의 이야기를 하며/ 영화관의 스틸 광고를 본다./ ……카아멘 죤스……// 미스터 몬은 트럭을 끌고/ 그의 아내는 쿡과 입을 맞추고/ 나는 `지렛' 회사의 텔레비전을 본다.// 한국에서 전사한 중위의 어머니는/ 이제 처음 보는 한국 사람이라고 내 손을 잡고/ 시애틀 시가를 구경시킨다./ 많은 사람이 살고/ 많은 사람이 울어야 하는/ 아메리카의 하늘에 흰구름./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들었다 나는 보았다/ 모든 비애와 환희를.// 아메리카는 휘트먼의 나라로 알았건만/ 아메리카는 링컨의 나라로 알았건만/ 쓴 눈물을 흘리며/ 브라보……코리언 하고/ 흑인은 술을 마신다.//

어느 날의 시가 되지 않는 시 / 박인환
당신은 일본인이지요?/ 차이니이즈? 하고 물을 때/ 나는 불쾌하게 웃었다./ 거품이 많은 술을 마시면서/ 나도 물었다./ 당신은 아메리카 시민입니까?/ 나는 거짓말과 같은 낡아빠진 역사와/ 우리 민족과 말이 단일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황혼.// 타아반 구석에서 흑인은 구두를 닦고/ 거리의 소년이 즐겁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여우 가르보의 전기책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디텍티브 스토리가 쌓여 있는/ 서점의 쇼우 윈도우/ 손님이 많은 가게 안을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비가 내린다./ 내 모자 위에 중량이 없는 억압이 있다./ 그래서 뒷길을 걸으며/ 서울로 빨리 가고 싶다고/ 센티멘털한 소리를 한다.//

새벽 한 시의 시(詩) / 박인환
대낮보다도 눈부신/ 포오틀란드의 밤거리에/ 단조로운 그렌 미이라의 랍소디가 들린다./ 쇼우 윈도우에서 울고 있는 마네킨.// 앞으로 남지 않은 나의 잠시(暫時)를 위하여/ 기념이라고 진 피이즈를 마시면/ 녹슬은 가슴과 뇌수에 차디찬 비가 내린다.// 나는 돌아가도 친구들에게 얘기할 것이 없구나/ 유리로 만든 인간의 묘지와/ 벽돌과 콘크리트 속에 있던/ 도시의 계곡에서/ 흐느껴 울었다는 것 외에는……./ 천사처럼/ 나를 매혹시키는 허영의 네온./ 너에게는 안구(眼球)가 없고 정서(情抒)가 없다./ 여기선 인간이 생명을 노래하지 않고/ 침울한 상념만이 나를 구한다.// 바람에 날려온 먼지와 같이/ 이 이국의 땅에선 나는 하나의 미생물이다./ 아니 나는 바람에 날려와/ 새벽 한시 기묘한 의식으로/ 그래도 좋았던/ 부식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래의 창부: 새로운 신에게 / 박인환
여윈 목소리로 바람과 함께/ 우리는 내일을 약속하지 않는다./ 승객이 사라진 열차 안에서/ 오 그대 미래의 창부(娼婦)여/ 너의 희망은 나의 오해와/ 감흥(感興)만이다.// 전쟁이 머무른 정원에/ 설레이며 다가드는/ 불운한 편력의 사람들/ 그 속에 나의 청춘이 가고/ 절망이 살던/ 오 그대 미래의 창부(娼婦)여/ 너의 욕망은/ 나의 질투와 발광만이다.// 향기 짙은 젖가슴을/ 총알로 구멍 내고/ 암흑의 지도, 고절(孤絶)된 치마 끝을/ 피와 눈물과/ 최후의 생명으로 이끌며/ 오 그대 미래의 창부(娼婦)여/ 너의 목표는 나의 무덤인가/ 너의 종말도 영원한 과거인가.//

불신의 사람 / 박인환
나는 바람이 길게 멈출 때/ 항구의 등불과/ 그 위대한 의지의 설움이/ 불멸의 씨를 뿌리는 것을 보았다.// 폐에 밀려드는 싸늘한 물결처럼/ 불신의 사람과 망각의 잠을 이룬다/ 피와 외로운 세월과 투영되는 일체의 환상과/ 詩 보다도 더욱 가난한 사랑과/ 떠나는 행복과 같이 속삭이는 바람과/ 오 공동묘지에서 퍼덕이는/ 시발과 종말의 깃발과/ 지금 밀폐된 이런 세계에서/ 권태롭게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등불이 꺼진 항구에/ 마지막 조용한 의지의 비는 내리고/ 내 불신의 사람은 오지 않았다/ 내 불신의 사람은 오지 않았다.//

영원한 일요일 / 박인환
날개 없는 여신이 죽어버린 아침/ 나는 폭풍에 싸여/ 주검의 일요일을 올라간다.// 파란 의상을 감은 목사와/ 죽어가는 놈의/ 숨 가쁜 울음을 따라/ 비탈에서 절름거리며 오는/ 나의 형제들.// 절망과 자유로운/ 모든 것을...// 싸늘한 교외의 사구(砂丘)에서/ 모진 소낙비에 으끄러지며/ 자라지 못하는 유용식물(有用植物).// 낡은 회구의 공포와 함께/ 예절처럼 떠나 버리는 태양.// 수인(囚人)이여/ 지금은 희미한 철형(凸形)의 시간/ 오늘은 일요일/ 너희들은 다행하게도/ 다음 날에의/ 비밀을 갖지 못했다.// 절름거리면 교회에 모인 사람과/ 수족이 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복음도 기도도 없이/ 떠나가는 사람과//

술보다 독한 눈물 / 박인환
눈물처럼 뚝뚝 낙엽/ 지는 밤이면/ 당신의 그림자를 밟고 넘어진/ 내 마음을 잡아보려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그렇게/ 이별을 견뎠습니다.// 맺지 못할 이 이별/ 또한 운명이라며/ 다시는 울지 말자 다짐했지만/ 맨 정신으로 잊지 못해/ 술을 배웠습니다.// 사랑을 버린 당신이 뭘 알아/ 밤마다 내가 마신 건 술이 아니라/ 술 보다 더 독한/ 눈물이였다는 것과/ 결국 내가 취해 쓰러진 건/ 죽음보다 더 깊은/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장미의 온도 / 박인환
나신과 같은 흰 구름이 흐르는 밤/ 실험실 창 밖/ 과실의 생명은/ 화폐 모양 권태하고 있다.// 밤은 깊어가고/ 나의 찢어진 애욕은/ 수목이 방탕하는 포도에 질주한다.// 나팔소리도 폭풍의 부감도(俯瞰圖)/ 화변(花辨)의 모습을 찾으며/ 무장한 거리를 헤맸다.// 태양이 추억을 품고/ 암벽을 지나던 아침/ 요리의 위대한 평범을/ Close-up한 원시림의/ 장미의 온도.//

남풍 / 박인환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일찍이 의복을 빼앗긴 토민(土民)/ 태양 없는 말레이/ 너의 사랑이 백인의 고무원(園)에서/ 쟈스민(素香)처럼 곱게 시들어졌다.// 민족의 운명/ 쿠멜신(神)의 영광과 함께 사는/ 앙코르 와트의 나라/ 월남인민군/ 멀리 이 땅에도 들려오는/ 너희들의 항쟁의 총소리// 가슴 부서질 듯 남풍이 분다/ 계절이 바뀌면 태풍이 온다// 아세아 모든 위도(緯度)/ 잠든 사람이여/ 귀를 기울여라// 눈을 뜨면/ 남방의 향기가/ 가난한 가슴팍으로 스며든다.//

낙하 / 박인환
미끄럼판에서/ 나는 고독한 아킬레스처럼/ 불안의 깃발 날리는/ 땅 위에 떨어졌다/ 머리 위의 별을 헤아리면서// 그후 20년/ 나는 운명의 공원 뒷담 밑으로/ 영속된 죄의 그림자를 따랐다/ 아 영원히 반복되는/ 미끄럼판의 승강/ 친근에의 증오와 또한/ 불행과 비참과 굴욕에의 반항도 잊고/ 연기 흐르는 쪽으로 달려가면/ 오욕의 지난날이 나를 도욱 괴롭힐 뿐// 멀리선 회색사면과/ 불안한 밤의 전쟁/ 인류의 상흔과 고뇌만이 늘고/ 아무도 인지하지 못할/ 망각의 이 지상에서/ 더욱 더욱 가라앉아 간다// 처음 미끄럼판에서/ 내리달린 쾌감도/ 미지의 숲 속을/ 나의 청춘과 도주하던 시간도/ 나의 낙하하는/ 비극의 그늘에 있다//

행복 / 박인환
노인은 육지에서 살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시들은 풀잎에 앉아/ 손금도 보았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정사(情死)한 여자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을 때// 비둘기는 지붕위에서 훨훨 날았다./ 노인은 한숨도 쉬지 않고/ 더욱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성서(聖書)를 에우고 불을 끈다./ 그는 행복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잠드는 것이다.//노인은 꿈을 꾼다./ 여러 친구와 술을 나누고/ 그들이 죽음의 길을 바라보던 전날을.// 노인은 입술에 미소를 띠우고/ 쓰디 쓴 감정을 억제 할 수가 있다./ 그는 지금의 어떠한 순간도/ 증오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죽음을 원하기 전에/ 옛날이 더욱 영원한 것처럼 생각되며/ 자기와 가까이 있는 것이/ 멀어져 가는 것을/ 분간할 수가 있었다.//

어린 딸에게 / 박인환
기총(機銃)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 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3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의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 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哀訴)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금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 박인환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륙(殺戮)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靜寂)과 초연(硝煙)의 도시/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 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流刑)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反逆)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侮蔑)의 오늘을 살아 나간다.// ……아 최후로 성자(聖者)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贖罪)의 회화(繪畵) 속의 나녀(裸女)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亡靈)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詩人)/ 나의 눈 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屍體)일 것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 박인환
나는 언제나 샘물처럼 흐르는/ 그러한 인생의 복판에 서서/ 전쟁이나 금전이나 나를 괴롭히는 물상(物象)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한줄기 소낙비는 나의 얼굴을 적신다.// 진정코 내가 바라던 하늘과 그 계절은/ 푸르고 맑은 내 가슴을 눈물로 스치고/ 한때 청춘과 바꾼 반항도/ 이젠 서적처럼 불타버렸다.// 가고 오는 그러한 제상(諸相)과 평범 속에서/ 술과 어지러움을 한(恨)하는 나는/ 어느 해 여름처럼 공포에 시달려/ 지금은 하염없이 죽는다.// 사라진 일체의 나의 애욕아/ 지금 형태도 없이 정신을 잃고/ 이 쓸쓸한 들판/ 아니 이즈러진 길목 처마 끝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한들/ 우리들 또다시 살아 나갈 것인가.// 정막처럼 잔잔한/ 그러한 인생의 복판에 서서/ 여러 남녀와 군인과 또는 학생과/ 이처럼 쇠퇴한 철없는 시인이/ 불안이다 또는 황폐롭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한들/ 광막한 나와 그대들의 기나긴 종말의 노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노라.// 오 난해한 세계/ 복잡한 생활 속에서/ 이처럼 알기 쉬운 몇 줄의 시와/ 말라 버린 나의 쓰디쓴 기억을 위하여/ 전쟁이나 사나운 애정을 잊고/ 넓고도 간혹 좁은 인간의 단상에 서서/ 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서로 만난 것을 탓할 것인가/ 우리는 서로 헤어질 것을 원할 것인가.//

얼굴 / 박인환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 -/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무도회 / 박인환
연기와 여자들 틈에 끼어/ 나는 무도회에 나갔다.// 밤이 새도록 나는 광란의 춤을 추었다./ 어떤 시체를 안고.// 황제는 불안한 샹들리에와 함께 있었고/ 모든 물체는 회전하였다.// 눈을 뜨니 운하는 흘렀다./ 술보다 더욱 진한 피가 흘렀다.// 이 시간 전쟁은 나와 관련이 없다./ 광란된 의식과 불모의 육체…… 그리고/ 일방적인 대화로 충만된 나의 무도회./ 나는 더욱 밤 속에 갈앉아아간다./ 석고의 여자를 힘있게 껴안고// 새벽에 돌아가는 길 나는 내 친우(親友)가/ 전사한 통지를 받았다.//

벽 / 박인환
그것은 분명히 어제의 것이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헤어질 때에/ 그것은 너무도 무정하였다// 하루 종일 나는 그것과 만난다/ 피하면 피할수록/ 더욱 접근하는 것/ 그것은 너무도 불길을 상징고 있다./ 옛날 그 위에 명화가 그려졌다 하여/ 즐거워하던 예술가들은/ 모조리 죽었다.// 지금 거기엔 파리와/ 아무도 읽지 않고/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격문과 정치 포스터가 붙어 있었을 뿐/ 나와는 아무 인연이 없다.// 그것은 감성도 이성도 잃은/ 멸망의 그림자/ 그것은 문명과 진화를 장해하는/ 사탄의 사도/ 나는 그것이 보기 싫다./ 그것은 밤낮으로/ 나를 가로막기 때문에/ 나는 한점의 피도 없이/ 말라 버리고/ 여왕이 부르시는 노래와/ 나의 이름도 듣지 못한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 박인환
넓고 개체(個體) 많은 토지에서/ 나는 더욱 고독하였다./ 힘없이 집에 돌아오면 세사람의 가족이/ 나를 쳐다 보았다. 그러나/ 나는 차디찬 벽에 붙어 회상에 잠긴다.// 전쟁 때문에 나의 재산과 친우(親友)가 떠났다./ 인간의 이지(理知)를 위한 서적 그것은 잿더미가 되고/ 지난 날의 영광도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다정했던 친우(親友)도 서로 갈라지고/ 간혹 이름을 불러도 울림조차 없다./ 오늘도 비행기의 폭음이 귀에 잠겨/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을 위해 시를 읽으면/ 공백한 종이 위에/ 그의 부드럽고 원만하던 얼굴이 환상처럼/ 어린다 미래에의 기약도 없이 흩어진 친우(親友)는/ 공산주의자에게 납치되었다./ 그는 사자(死者)만이 갖는 속도로/ 고뇌의 세계에서 탈주하였으리라.// 정의의 전쟁은 나로 하여금 잘을 깨운다./ 오래토록 나는 망각의 피안에서 술을 마셨다./ 하루 하루가 나에게 있어서는/ 비참한 축제이었다.// 그러나 부단한 자유의 이름으로서/ 우리의 뜰 앞에서 벌어진 싸움을 통찰할 때/ 나는 내 출발이 늦은 것을 고한다.// 나의 재산…이것은 부스러기/ 나의 생명…이것도 부스러기/ 아 파멸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냐.// 마음은 옛과 다르다./ 그러나 내게 달린 가족을 위해 나는 참으로 비겁하다/ 그에게 나는 왜 머리를 숙이며 왜 떠드는 것일까./ 나는 나의 말로(末路)를 바라본다./ 그리하여 나는 혼자서 운다.// 이 넓고 개체(個體) 많은 토지에서/ 나만이 지각(遲刻)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나는/ 생에 한 없는 애착을 갖는다.//

밤의 노래 / 박인환
정막한 가운데/ 인광처럼 비치는 무수한 눈/ 암흑의 지평은/ 자유에의 경계를 만든다.// 사랑은 주검의 사면(斜面)으로 달리고/ 취약하게 조직된/ 나의 내면은/ 지금은 고독한 술병.// 밤은 이 어두운 밤은/ 안테나로 형성되었다./ 구름과 감정의 경위도(經緯度)에서/ 나는 영원히 약속될/ 미래에의 절망에 관하여 이야기도 하였다.// 또한 끝없이 들려 오는 불안한 파장/ 내가 아는 단어와/ 나의 평범한 의식은/ 밝아 올 날의 영역으로/ 위태롭게 인접되어 간다.// 가느다란 노래도 없이/ 길목에서 갈대가 죽고/ 우거진 이신(異神)의 날개들이/ 깊은 밤/ 저 기아의 별을 향하여 작별한다.// 고막을 깨뜨릴 듯이/ 달려오는 전파/ 그것이 가끔 교회의 종소리에 합쳐/ 선을 그리며/ 내 가슴의 운석에 가라앉아 버린다.//

의혹의 기(旗) / 박인환
얇은 고독처럼 퍼덕이는 기/ 그것은 주검과 관념의 거리를 알린다.// 허망한 시간/ 또는 줄기찬 행운의 순시(瞬時)/ 우리는 도립(倒立)된 석고처럼/ 불길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낙엽처럼 싸움과 청년은 흩어지고/ 오늘과 그 미래는 확립된 사념이 없다.// 바람 속의 내성(內省)/ 허나 우리는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피폐한 토지에선/ 한줄기 연기가 오르고/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감았다.// 최후처럼 인상은 외롭다./ 안구(眼球)처럼 의욕은 숨길 수가 없다./ 이러한 중간의 면적에/ 우리는 떨고 있으며/ 떨리는 깃발 속에/ 모든 인상(印象)과 의욕은 그 모습을 찾는다.// 195…년의 여름과 가을에 걸쳐서/ 애정의 뱀은 어두움에서 암흑으로/ 세월과 함께 성숙하여 갔다./ 그리하여 나는 비틀거리며/ 뱀이 들어간 길을 피했다.// 잊을 수 없는 의혹의 기/ 잊을 수 없는 환희의 기/ 이러한 혼란된 의식 아래서/ 아폴론은 위기의 병을 껴안고/ 고갈된 세계에 가라앉아 간다.//



박인환(朴寅煥, 1926년~1956년) 시인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하여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을 중퇴하였다. 1946년 〈거리〉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광복 후 서울에서 서점을 경영하였고, 1947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미국을 시찰하였다. 1949년 동인그룹 '후반기'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1949년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았다. 1955년 《박인환 시선집》을 간행하였고 1956년 소설가 이상의 기일때 4일 동안 폭음한 것이 급성 알콜성 심장마비로 이어져 자택에서 사망하였다(향년 29세). 묘소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다. 1976년에 시집 《목마와 숙녀》가 간행되었다.

 

 

'세월이 가면'과 시인 박인환 (3) - 세종경제신문

을 쓴 일주일 후 세상 떠나 1956년 3월 20일 밤, 31세의 젊은 시인 박인환이 돌연 사망했다.세상 떠나기 3일 전인 3월 17일에 천재 시인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1937) 추모의 밤이 있었는데, 이날

www.sejongeconomy.kr

 

 

 

 

시인 김수영 "나는 (박)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이었다"…시대의 라이벌 김수영과 박인환

시인 김수영 "나는 (박)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이었다"…시대의 라이벌 김수영과 박인환

premiu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