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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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6. 18.

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직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시인(詩人) / 김광섭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 아름 팍 안아 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에 2천 원 아니면 3천 원/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 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만 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국은 있는데/ 타는 놀에 가고 없다.//

마음 / 김광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느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소망 / 김광섭
비가 멎기를 기다려/ 바람이 자기를 기다려/ 해를 보는 거예요// 푸른 하늘이 얼마나 넓은가는/ 시로써 재며 사는 거예요// 밤에 뜨는 별은/ 바다 깊이를 아는 가슴으로 헤는 거예요// 젊어서 크던 희망이 줄어서/ 착실하게 작은 소망이 되는 것이/ 고이 늙는 법이에요//

나의 초상 / 김광섭
나를 금매지라 부르던/ 할머니가 나의 초롱을 만들어/ 불당(佛堂)에 달고 가셨다// 꿈에 그 초롱이 와서/ 들여다 보니/ 무지개가 나려와/ 촛불에 타서 재가 소보록했다//

고독 / 김광섭
내/ 하나의 생존자로 태어나 여기 누워 있나니/ 한 간 무덤 그 너머는 무한한 기류의 파동도 있어/ 바다 깊은 그곳 어느 고요한 바위 아래// 내/ 고단한 고기와도 같다.// 맑은 성 아름다운 꿈은 멀고/ 그리운 세계의 단편은 아즐타./ 오랜 세기의 지층만이 나를 이끌고 있다.// 신경도 없는 밤/ 시계야 기이타./ 너마저 자려무나.//

고혼(孤魂) / 김광섭
콧구멍을 막고/ 병풍 뒤에/ 하얀 석고처럼 누웠다// 외롭다 울던 소리/ 다 버리고/ 기슭을 여이는/ 배를 탔음인가// 때의 집에 살다가/ `구정물'을 토하고/ 먼저 가는 사람아// 길손들이 모여/ 고인 눈물을/ 마음에 담아/ 찬 가슴을 덥히라// 아 그대 창에 해가 떴다/ 새벽에 감은 눈이니/ 다시 한 번 보고 가렴// 누군지 몰라도 자연아/ 고이 받아 섬기고/ 신의 밝음을 얻어/ 영생을 보게 하라//

고향 / 김광섭
타향 삼십 년/ 실향 이십 년// 오십 년의 밀회와 구름다리/ 하늘 높이에 그 저편/ 땅 깊이 꺼지는 곳// 봄바람이/ 꽃 핀 언덕을/ 들고 갔다가/ 그냥 돌아서니/ 참새들이 어리둥절해서/ 헷갈려 숲 속에 숨어 버렸다// 동산대(東山臺)를 지키는 늙은 돌배나무는/ 성황당에나 선 듯 의젓하게/ 싱싱한 바다 냄새를 풍기며// 늦다고 욕지거리하는/ 애들의 콧등에서/ 땀방울을 식혀 준다// 바다에는 낯선 바위들이 서서/ 고기 새끼처럼 옆에 붙어 헴치던/ 나를 보고 놀라서/ 육지에 기어오르다가/ 지친 거북이처럼 육중하게 둥둥 떠 있다// 이런 고향이야 가슴과 손바닥인데/ 빼앗아서 무엇에다 쓰나/ 차라리 푸줏간에서/ 쇠고기나 한두 근 훔쳐다/ 불고기나 맛있게 해 먹을 일이지//

거리(距離) / 김광섭
나는 여기 벽이다/ 너는 거기 꽃이다/ 너와의 사이에/ 얼음 고개가 생겼다// 아지랑이 꿈꾸면/ 고개는 사라진다/ 기다리면 먼 봄/ 꽃이 그리워/ 꽃집에 갔더니/ 꽃이 따라와서 상 위에 앉았다/ 봄도 같이 따라왔다// 거리란 없는 것이다/ 있다 해도 봄이면 풀려서 없어진다/ 가거나 오거나/ 거리는 기다림이다//

3월 / 김광섭
3월은 바람쟁이/ 가끔 겨울과 어울려/ 대폿집에 들어가 거나해서는/ 아가씨들 창을 두드리고/ 할아버지랑 문풍지를 뜯고/ 나들이 털옷을 벗긴다// 애들을 깨워서는/ 막힌 골목을 뚫고/ 봄을 마당에서 키운다// 수양버들/ 허우적이며/ 실가지가 하늘거린다// 대지는 회상/ 씨앗을 안고 부풀며/ 겨울에 꾸부러진 나무 허리를 펴 주고/ 새들의 방울소리 고목에서 흩어지니/ 여우도 굴 속에서 나온다//

봄 / 김광섭
나무에 새싹이 돋는 것을/ 어떻게 알고/ 새들은 먼 하늘에서 날아올까// 물에 꽃봉오리 진 것을/ 어떻게 알고/ 나비는 저승에서 펄펄 날아올까// 아가씨 창인 줄은/ 또 어떻게 알고/ 고양이는 울타리에서 저렇게 올까//

비 갠 여름 아침 / 김광섭
비가 갠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의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가을 / 김광섭
여름 하늘이 밀리면서 훤해지는/ 가을 높은 하늘에서/ 흰 빛깔이 내리니/ 젊음과 꿈의 푸른빛이/ 멀리 건너편으로 날린다/ 천지 허전하여/ 귀뚜라미 마루 밑으로 기어들고/ 가뭄에 시달린 가마귀들 빈 밭에 모여서 운다/ 서풍 찬 바람에 나무 잎새들이 힘없이 진다/ 장미 꽃잎이 우시시 지는 소리에 가슴이 울린다/ 피는 꽃보다 지는 꽃을 따라가는 것이 더 많다/ 갈대와 같이 조용히 생각하는 철/ 돌도 생각에 잠든 빛/ 산이 익어서/ 산마다 단풍이 들며 단풍이 빨갛게 타서/ 풀지 못한 염원의 제석(祭石) 위에/ 피를 흘리며 딩군다// 기러기가 갈갈 울며 고향 하늘을 향해 간다/ 따라 못 가는 서러움/ 꽃보다 짙은 단풍의 강토/ 싸늘한 바람과 가냘픈 햇빛에/ 뉘우치며 혼자 생각는 가을/ 잊어버린 노래가/ 구름에 흘러가는/ 병든 향수의 길// 서러운 세월이 가고서도 서러운 세월이 겹쳐서/ 인간 천년의 꿈이/ 한 마리 산새만도 못하다!//

가을이 서럽지 않게 / 김광섭
하늘에서 하루의 빛을 거두어도/ 가는 길에 쳐다 볼 별이 있으니/ 떨어지는 잎사귀 아래 묻히기 전에/ 그대를 찾아 그대 내 사람이리라// 긴시간이 아니어도 한 세상이니/ 그대 손길이면 내 가슴을 만져/ 생명의 울림을 새롭게 하리라/ 내게 그 손을 빌리라 영원히 주리라// 홀로 한쪽 가슴에 그대를 지니고/ 한쪽 비인 가슴을 거울삼으리니/ 패물 같은 사랑들이 지나간 상처를/ 입술을 대이라 가을이 서럽지 않게.//

겨울날 / 김광섭
마당에서 봄과 여름에 정든 얼굴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갔다/ 그렇게 명성이 높던 오동잎도 다 떨어지고/ 저무는 가을 하늘에 인가(人家)의 정서를 품던/ 굴뚝 보얀 연기도/ 찬바람에 그만 무색해졌다// 그런 늦가을에 김장 걱정을 하면서 집을 팔게 되어/ 다가오는 겨울이 더 외롭고 무서웠다/ 이삿짐을 따라 비탈길을 총총히 걸어/ 두만강 건너는 이사꾼처럼 회색 하늘 속으로/ 들어가 식솔들이 저녁상에 둘러 앉으니/ 어머님 한 분만 오시잖아서 별안간 앞니가/ 무너진 듯 허전해서 눈 둘 곳이 없었다/ 낯선 사람들이 축대에 검정 포장을 치고/ 초롱을 달고 가던 이튿날 목 없는 아침이/ 달겨들어 영원한 이별인데/ 말 한 마디 못하고 갈라진 어머니시다!// 가신 뒤에 보니 세월 속에 묻혀 있는 형제들 공동의 부엌까지/ 무너져 낙엽들이 모일 데가 없어졌다/ 사람이 사는 것이 남의 피부를 안고 지내는 것이니/ 찬바람이 항상 인간과 더불어 있어서/ 사람이 과일 하나만큼 익기도 어려워/ 겨울 바람에 휘몰리는 낙엽들이 더 많아진다// 고난의 잔에 얼음을 녹이며 찾는 것은/ 그 슬픔이 아니요 겨울 하늘에 푸른빛을 띤 봄이다/ 그 봄을 바라고 겨울 안에서 뱅뱅 돌며/ 자리를 끌고 한 치 한 치 태양의 둘레를/ 지구와 같이 굴러가면서/ 눈과 얼음에 덮인 대지(大地)의 하루를 넘어서는 해 질 무렵/ 천장에서 왕거미가 내리고/ 구석에서 귀또리가 어정어정 기어 나온다/ 어느 날 목 없는 아침이 또 왈칵 달려들면/ 이런 친구들에게 눈짓 한 번 못하고/ 친구들의 손 한 번 바로 잡지도 못하고 가리라//

빈손 -아파트 9층에서 / 김광섭
하늘과 살기 위해/ 창에 가서/ 커어튼을 걷으면/ 오월의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든다/ 나는 인간성외(人間城外)에 산다// 밥은 혼자 먹어도/ 일은 혼자 못한다// 하늘끝으로 보이리/ 꿈이 서린 곳으로 보이리/ 바람이 이는 곳으로 보이리/ 해가 지는 곳으로 보이리/ 달 뜨는 곳으로 보이리/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보이리// 낮이 순간처럼 지나가다가/ 못잊어 돌아온 저녁/ 사랑과 그리움/ 더 있노라/ 옛얼굴 별을 찾아/ 어둠 속을 허우적이는/ 나는 빈 손//

인생 / 김광섭
너무 크고 많은 것을 혼자 가지려고 하면/ 인생은 불행과 무자비한 칠십년 전쟁입니다./ 이 세계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신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낮에는 해뜨고 밤에는 별이 총총한/ 더 없이 큰/ 이 우주를 그냥 보라고 내 주었습니다.//

생의 감각 / 김광섭
여명에서 종이 울린다/ 새벽 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는 것이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 깨진 그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르런 빛은/ 장마에 황야처럼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었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동경(憧憬) / 김광섭
온갖 사화(詞華)*들이/ 무언(無言)의 고아(孤兒)가 되어/ 꿈이 되고 슬픔이 되다.// 무엇이 나를 불러서/ 바람에 따라가는 길/ 별조차 떨어진 밤// 무거운 꿈 같은 어둠 속에/ 하나의 뚜렷한 형상(形象)이/ 나의 만상(萬象)에 깃들이다.//
* 사화(詞華): 아름답게 수식하거나 뛰어나 시문(詩文)

​해바라기 / 김광섭
바람결보다 더 부드러운 은빛 날리는/ 가을 하늘 현란한 광채가 흘러/ 양양(洋洋)한 대기에 바다의 무늬가 인다.// 한 마음에 담을 수 없는 천지의 감동 속에/ 찬연히 피어난 백일(白日)의 환상을 따라/ 달음치는 하루의 분방한 정념에 헌신된 모습.// 생의 근원을 향한 아폴로의 호탕한 눈동자같이/ 황색 꽃잎 금빛 가루로 겹겹이 단장한/ 아! 의욕의 씨 원광(圓光)에 묻힌 듯 향기에 익어 가니// 한줄기로 지향한 높다란 꼭대기의 환희에서/ 순간마다 이룩하는 태양의 축복을 받는 자/ 늠름한 잎사귀들 경이를 담아 들고 찬양한다.//

꽃 단상 / 김광섭
꽃은 영감 속에 피며/ 마음을 따라다닌다/ 사람이 외로우면/ 사람과 한방에 같이 살면서 외롭고/ 사람이 슬프면// 사람과 같이 가면서 슬프다/ 이런 꽃은 꽃 속에 꽃이 있고/ 사랑이 있고 하늘이 있지만/ 그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그 속을 좀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잡초들 / 김광섭
아 밝은 태양 맑은 물/ 바람 센 여의도 강뚝/ 말라서 흙이 갈라질세라/ 덮은 풀들이여/ 이름도 없는 잡초 처음엔 꽃인데/ 다시 한번 꽃이 되고파라// 가물에 논밭처럼/ 바닥이 드러난 강/ 얕은 줄 모르고/ 더듬더듬 건너는/ 무거운 철 교각// 현재에서 미래로/ 아파트에 눌려/ 산도 가고 물도 갔다// 화신 등진 저 아낙네들/ 지나간 고운 날을 삼키며/ 쑥을 캐는 눈시울이 따가워선가/ 가난이 얼굴 바닥에 탄다//

산 / 김광섭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댔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지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봐/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좋게 엎데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기어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도 되고 명산도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행인 / 김광섭
갑자기 가시니/ 사방이 어두워서/ 동서남북이 다 없어졌네// 저 어진 산 나직한 봉우리를/ 어머님 계신 지붕으로 알고/ 먼 절을 하며 가다보니/ 그 아닌 길을 혼자가고 있었네// 어머님 앞에 어물거리던/ 고향의 낡은 뒤안길/ 창구미 상송 흰 벌!// 남북이 통하면 먼저/ 뫼시고 가오리 가오리 하던/ 그 길이 다시 열릴 때// 아들 따라 살려고 넘어오신/ 어머님을 산에 혼자 두고/ 천지간에 산을 보며// 눈물이 나서/ 어찌 혼자 가오랴//

너를 가져가라 / 김광섭
내 가슴에서 너를 가져가라/ 네 간 자리 아픔 더할지라도/ 내 가슴에서 너를 가져가라// 네 간 곳에 마음 가고/ 정들고 생각 깊건만/ 네 옆을 지나 나는 간다// 너와 있을 날 길이 믿고/ 보낸 날 헛되이 돌아보니/ 눈물 속에서 네가 다시 건너간다//

가는 길 / 김광섭
내 홀로 지킨 딴 하늘에서/ 받아들인 슬픔이라 새길까 하여/ 지나가는 불꽃을 잡건만/ 어둠이 따라서며 재가 떨어진다// 바람에 날려 한 많은/ 이 한 줌 재마저 사라지면/ 외론 길에서 벗하던/ 한 줄기 눈물조차 돌아올 길 없으리// 산에 가득히…… 들에 펴듯이……/ 꽃은 피는가…… 잎은 푸른가……/ 옛 꿈의 가지 가지에 달려/ 찬사를 기다려 듣고 지려는가// 비인 듯 그 하늘 기울어진 곳을 가다가/ 그만 낯선 것에 부딪쳐/ 소리 없이 열리는 문으로/ 가는 것을 나도 모르게 나는 가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나라 / 김광섭
지상에 내가 사는 한 마을이 있으니/ 이는 내가 사랑하는 한 나라이러라// 세계에 무수한 나라가 큰 별처럼 빛날지라도/ 내가 살고 내가 사랑하는 나라는 오직 하나뿐// 반만년의 역사가 혹은 바다가 되고 혹은 시내가 되어/ 모진 바위에 부딪혀 지하로 숨어들지라도/ 이는 나의 가슴에서 피가 되고 맥이 되는 생명일지니/ 나는 어디로 가나 이 끊임없는 생명에서 영광을 찾아// 남북으로 양단되고 사상으로 분열된 나라일망정/ 나는 종처럼 이 무거운 나라를 끌고 신성한 곳으로 가리니// 오래 닫혀진 침묵의 문이 열리는 날/ 고민을 상징하는 한 떨기 꽃은 찬연히 피리라/ 이는 또한 내가 사랑하는 나라 내가 사랑하는 나라의 꿈이어니//

조국 / 김광섭
지상(地上)에 내가 사는 한 마을이 있으니/ 이는 내가 사랑하는 한 나라이러라.// 세계(世界)에 무수한 나라가 큰 별처럼 빛날지라도/ 내가 살고 내가 사랑하는 나라는 오직 하나뿐.// 반만년(半萬年)의 역사(歷史)가 바다가 되고 혹은 시내가 되어/ 모진 바위에 부닥쳐 지하(地下)로 숨어 들어갈지라도.// 이는 나의 가슴에서 피가 되고 동맥(動脈)이 되는 생명일지니/ 나는 어디로 가나 이 끊임없는 생명(生命)에서 큰 영광(榮光)을 찿아.// 남북으로 양단(兩斷)되고 사상으로 분열된 나라일망정/ 나는 종(鐘)처럼 이 묵거운 나라를 끌고 신성(新成)한 곳으로 가리니.// 오래 닫혀진 침묵(沈默)의 문이 열리는 날/ 상징하는 한떨기 꽃은 찬연(燦然)히 피리라.//

사랑을 꿈꾸는 그대에게 / 김광섭
사랑을 꿈꾸는 그대/ 마음 먼저 열어 주세요// 지난날 아팠던 추억일랑 미련없이 지워버리고/ 갇혀 답답하던 갈증/ 산산에 실려 보내고/ 깊은 구석의 창문까지 열어주세요// 사랑이 먼저/ 별빛 되어 다가갈 때/ 밝고 고운 희망 보태주시고/ 따뜻한 마음 향기 되어 주세요// 맞잡은 두 손에는/ 가을 국화 미소 한 줌/ 터질 듯 행복 한 줌/ 꼬옥 쥐여 주세요// 멀리 있어 안 들려도/ 풋풋한 알밤 터지는 소리로/ 다정한 별빛 속삭임으로/ 사랑한다 해주세요//

우정 / 김광섭
구름은 봉우리에 둥둥 떠서/ 나무와 새와 벌레와 짐승들에게/ 비바람을 일러주고는/ 딴 봉우리에 갔다가도 다시 온다// 샘은 돌 밑에서 솟아서/ 돌을 씻으며/ 졸졸 흐르다가도/ 돌 밑으로 도로 들어갔다가/ 다시 솟아서 졸졸 흐른다// 이 이상의 말도 없고/ 이 이상의 사이도 없다/ 만물은 모두 이런 정에서 산다//

바다의 소곡 / 김광섭
구름 날고 섬 뜨고 하늘 푸른데/ 靑玉(청옥)빛 깊은 바다 珊瑚堂(산호당) 속에/ 아름다운 비밀이 숨어 있으니/ 하얀 조개 꿈꾸는 금모랫가에/ 끝없이 밀려오는 물결 우으로/ 나도 가고 배도 가도 바람도 간다//

 



김광섭(金珖燮, 1905년~1977년) 시인, 번역문학가, 문학평론가
이산(怡山) 김광섭(金珖燮) 시인은 1905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해외문학』 동인으로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고요한 서정과 냉철한 지성에 시대적․민족적 고뇌와 저항이 융화된 시를 써서 주목받았다. 창씨개명 반대와 반일 사상으로 인하여 일제 말기에 3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을 맞아 문화계, 언론계, 학계, 관계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면서도 시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아서 삶에 대한 깊은 관조와 아름다운 인간 의지를 원숙하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육화시킨 작품들을 발표했다.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에도 창작의 붓을 멈추지 않아서 1977년 타계할 때까지 『동경(憧憬)』(1938), 『마음』(1949), 『해바라기』(1957), 『성북동 비둘기』(1969), 『반응(反應)』(1971) 등 다섯 권의 창작 시집과 『김광섭시전집』(1974), 그리고 『겨울날』(1975) 등의 시선집을 발간했다.
서울특별시문화상(1957),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69), 국민훈장 모란장(1970), 예술원상(1974) 등을 수상했다.경희대 교수와 대통령 공보실장을 역임했다. 1965년 야구 경기 관람 도중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에도 계속 창작활동을 하여 그의 대표작인 〈성북동 비둘기〉를 발표했다. 이 시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실렸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36>김광섭의 ‘성북동’

시인 김광섭 1973년 1월 하순 서울 서소문의 명지대학 빌딩 15층 강당에서 열린 한국문인협회 정기총회. 오랫동안 병석에 있던 노시인 김광섭이 휠체어에 실린 채 회의장에 입장하자 참석한 70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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