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비상금 / 김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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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1. 6. 16.

겨울답지 않게 눅진눅진 꿉꿉한 나날이다. 사계절이 진퇴양난에 빠진 듯했다. 애써 깎아 말리던 곶감에 곰팡이가 슬어 내버린 지도 제법 되었다. 가을걷이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장터 고스톱 꾼들은 매일이다시피 판을 벌였다. 적막한 시골살이에 심심풀이 땅콩과도 같은 고스톱판은 티격태격 정을 쌓고 소주잔을 나누는 사랑방과 같았다.

그렇긴 해도 다슬기를 주워 판 알토란같은 돈을 몽땅 털리게 된 날 나는 어슬어슬 추웠다. 찬물에 떨며 허덕댄 보람이 밤새 도루묵이 된 것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더니, 재주가 모자라는 데다 운도 없는 날이었다. 잃을 때도 있고 딸 때도 있어 그게 뭐 그리 대수이랴 마는 생고생한 돈이라 섭섭하였다.

“지갑이 썰렁 타, 돈 좀 주소.”

“얼마나?”

“돈 십만 원이면 안 되겠나.”

“현찰이 어디 있나, 농협 가면 찾아 주께 기다리소.“

아내 대답이 심드렁했다. 사부작사부작 밤마실을 나다니더니만 그거 봐라, 쌤통이라는 표정 같기도 했다.

내가 아내에게 용돈이나 타 쓰는 신세가 될 줄은 몰랐다. 퇴직할 땐 인생 선배들의 권유대로 비자금깨나 챙겼다. 적금 해약과 동시에 재계약하기, 학자금 유용하기로 삥땅을 취하는 건 스릴 넘치는 즐거움이었다. 동료들은 아내에게 들키지 않을 이런 노하우를 당연한 듯 공유하였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긴긴 터널을 빠져나가면 신세계가 펼쳐질 것이며 그런 호시절이 오면 일탈할 꿈에 부푼 자금이기도 했다.

공제회에서 보낸 예금증서를 들키기 전까지 나는 행복하였다. 하지만 좋은 일에는 마가 끼듯이 안 될 일은 희한하게 꼬이는 법이다. 증서를 보내지 마라, 일렀어야 옳았다. 그도 못 했으면 우편물을 내가 먼저 봤어야 했다. 그도 저도 아니면 임기응변이라도 잘해야 했다.

“이기 머꼬?”

“뭐 말이고, 아니!”

아뿔싸! 아내가 손에 들고 갸우뚱거리고 있는 증서를 보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표정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사람이다. 머뭇머뭇 벌레 씹은 표정에 눈빛은 흔들렸을 것이다. 상기된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우체통 옆 잔디밭을 헤적이는 척 딴전을 피워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하루 이틀 같이 살아봤나, 예리하기 짝이 없는 여자 눈을 어찌 속일 수 있으랴. 퇴직한답시고 마음이 들떠서 엄벙덤벙 허공을 딛고 살았으니 그 수상한 낌새로 긴가민가하던 판에 딱 걸렸다. ‘바보, 축구, 온달….’ 악동들이 관사 벽에 갈겨놓은 분필 낙서가 떠올랐다.

아내는 아내대로 성이 났다. 이날 이때까지 믿고 살았는데 배신당했다고 펄쩍 뛰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글쎄, 살다 살다 이런 꼴이 다 있을까, 들킨 것도 억울한데 고개 숙인 남자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런 된장, 내 인생의 봄날은 갔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인생의 후반전엔 아등바등 살기 바빠 못다 한 걸 벌충하며 살 줄 알았다.

나는 안되는 게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내 비자금이 만 원 한 장 남김없이 막내딸 원룸 전세금을 보태는 것으로 아내의 성이 어지간히 누그러졌다. 그래도 투정할 수 없는 것은 집짓기에 쓰인 아내 돈도 적잖았기 때문이었다. 중도금 기한은 다가오는데 가용可用할 돈은 없고 적금 해약은 손해를 보게 되니 마지못해 현실을 수용한 것이다.

나도 나지만, 알뜰살뜰 모은 돈이 빼도 박도 못 할 사정으로 탈탈 털리게 된 아내도 우울한 듯싶었다. 거시기 콧구멍에 마늘을 빼 먹었으면 먹었지 그런 돈을 쓰고 보니 할 짓이 아닌 것 같았다. ‘밥심’ 보다는 ‘돈심’이 더 든든한 세상이라는데 얼른 채워주고 싶었다.

삼재三災가 끼었을까, 올해는 아내가 자주 입원하였다. 적잖게 나온 보험금을 아내 통장에 몽땅 넣어줬다. 그런 보답일까, 내 썰렁한 호주머니 사정을 헤아린 아내도 살림 통장에서 선뜻 이체해 가란다. 그렇다 한들 부처님 손바닥 안이 아닌가. 들통 난 돈은 팥소 빠진 찐빵이요 고무줄 없는 팬티다.

나이가 들면 더는 아등바등 살지 말아야 한단다. 지당하신 말씀이나 내 돈이 없으니 먼 나라 남의 얘기요, 재미없는 세월이다. 등 따시고 배부른 소리랄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의 마지막 돈은 이렇게 스러지고 말았다. 풍진세상風塵世上이라더니 별꼴을 다 겪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