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들에 서있는 지게 하나 / 한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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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1. 6. 16.

200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사람 하나 세상에 와서 살다가는 것이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고, 베어지는 풀꽃 같다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아침 안개처럼 살다 홀연히 떠나버려도 그로 인해 아파하는 가슴들이 있고, 그리운 기억을 꺼내어보며 쉽게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질녘 밭에 갔더니 시아버님의 지게가 석양을 뒤에 지고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생전에 그 분 성품을 말해 주는 듯 꼼꼼하게 싸매어 파라솔 아래 묶어두었다. 겨우 이 세상 떠난 지 보름 되었는데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지게 작대기는 아득한 옛날로부터 와서 서 있는 것 같았다. '언제 와서 다시 쓰시려고…….' 지게에 눈을 두지 않으려 애써 피해도 다시 눈이 거기에 머물렀다.

혹시 발자국이 있을까 싶어 밭고랑을 살펴보았다. 자식 돌보듯 키운 대파가 굵은 몸피에 쭉쭉 곧은 잎을 달고 여전히 밭을 지키고 있다. 텅 빈 들판에 유독 푸르게 서서 가을과 겨울이 오고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한 떼의 바람이 우수수 지나간다.

아버님은 세상에 사는 동안 최소한의 소비를 하다가 가셨다. 변변한 양복 한 벌이 없었다. 이십여 년 전에 맞춘 양복을 깨끗이 손질해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입으셨다. 새 옷을 마련해 드리려 해도 마다 하고 아들이나 사위의 입지 않는 옷들을 갖다 입으셨다.

비 오는 날이면 돋보기를 콧등에 걸치고 헤진 신발이나 살이 부러진 우산 등을 고치셨다. 내가 버린 쓰레기 중에 구멍 난 양말이나 장갑, 겉이 성한 볼펜, 또 당신 보기에 희귀한 물건들은 어김없이 주어 다시 내게 주셨다. 나는 못 신게 된 신발을 아버님 몰래 버릴 연구를 하기도 했다.

돌아가신 뒤에 어머님은 장롱 정리를 하셨다. 작년 생신 때 아이들이 선물한 새 러닝셔츠가 '할아버지 생신 축하합니다'라고 쓰인 쪽지를 그대로 붙인 채 나타나자 목을 놓아 우셨다.

목이 늘어난 양말은 늘 그 분 것이었고 바닥에 자작자작 남은 생선찌개를 물리시며 "다음 끼니에 내가 먹을 테니 버리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문지나 파지를 잘라 두고 당신 방에 화장지 대신 쓰셨다. 세수하고 난 물은 버리지 않고 놓아두셨고, 면도할 때도 작은 대야에 절반도 안 되는 물만 떠 가셨다.

어머님 회갑 때 바쁜 며느리 대신 손자를 돌보셨다. 기저귀 빨래를 할 여유가 없어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했는데 빨랫줄에 종이 기저귀가 하나 둘 널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말려서 한 번 더 써도 되겠다 싶어 아버님께서 널어놓은 것이었다. 우리들은 한바탕 웃으며 딱딱하게 굳어져 다시 쓸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 드렸지만 웃음 뒤끝에 가슴이 따끔거리는 무엇이 남아 있었다.

웃어른으로서 나를 제일 편하게 해주신 것은 뭐든지 잘 잡수셨다는 점이다. 뇌출혈로 갑자기 돌아가시기 전 날까지 반찬 투정 한번 없이 해드린 음식을 맛있게 드셨다. 그리고 열심히 일을 하셨다. 일흔 일곱 연세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지게를 지고, 자전거를 타며 들을 오가셨다. 체질이기도 하겠지만 잠시도 쉬지 않으니 몸에 살이 붙지도 않았다.

사실 아버님은 왼손이 조막손이었다. 젊었을 때 병이 나서 침이니, 뜸이니 온갖 민간요법을 썼는데 그렇게 손이 굳어버렸다 했다.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뛰신 어머님의 이야기는 가히 무용담을 능가했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 꼭 한 손은 뒷짐을 지셨고 손자들이 말을 배우고 나면 "할아버지 손 아파?" 하고 묻곤 했다. 그런 손으로 한 시를 가만히 앉아 있지 않으셨다. 하다못해 구멍 난 면장갑을 깁고 줄여서 왼손을 위한 장갑 만들기라도 하시는 것이었다. 돌아가신 뒤에 가족들은 뭉툭한 장갑들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

그 분은 멋쟁이셨다. 외출을 하시는 날은 최소한 두 시간을 단장하셨는데 면도, 세수, 머리감기, 옷매무새 고치기……, 끝으로 내게 머리 기름을 발라 머리 손질을 해달라셨다. 그리고 연미복 입은 제비처럼 말쑥하게 외출을 하셨다. 그렇지만 약주를 거나하게 드시고 돌아오실 때는 아침에 준비하고 나갔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서 나를 종종 웃게 하셨다.

술을 좋아하셨지만 그 분을 아는 사람들 중에 그 분을 싫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잔정이 워낙 많아서 아는 분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셨고 집에 찾아온 방문객은 동네 어귀까지는 배웅을 하셨다. 아이들을 좋아하셨으며 아이처럼 천진한 웃음을 띠던 분이셨다.

나는 아버님을 좁쌀영감님이라고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좁쌀영감님을 그리워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잘못한 것만 생각나는 이런 아픈 그리움이 될 줄을 그 때는 몰랐다.

돌아가시기 전에 나와 함께 했던 일은 짚 비늘 쌓기였다.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빙 돌아가며 짚단을 쌓아 가는 것인데 나는 짚단을 가져다 던져 올리고 아버님은 받아서 쌓아 올렸다. 맨 꼭대기 지붕을 만들 때, 한 손으로도 능숙하고 꼼꼼하게 짚을 엮는 솜씨를 유심히 보았었다. 그 논을 지나갈 때마다 짚 비늘 하나하나를 그냥 보며 지나치지 못한다. 파도가 모래성을 쓸어가듯 아버님의 흔적이 하나 둘 사라져 갔다. 손수 해 놓으신 짚 비늘도 겨우내 소먹이로 헐어졌다.

그 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던 들길을 따라가면 들을 지키고 서 있는 빈 지게 하나 있다. 세상에 와서 맡겨진 짐을 묵묵히 두 어깨에 지다가 모든 것 벗어놓고 훌쩍 가신 아버님의 외로운 발자국이 있다.

어느 날 아지랑이 실린 그 지게를 남편이 지고 아버님처럼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