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덤 / 황미연

댓글 0

수필 읽기

2021. 6. 18.

가슴이 두근거린다. 물살을 가르는 뱃머리에 올라서서 가뭇없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수년 전에 보았단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어서, 언젠가는 다시 와봐야지 하면서도 마음 같지 않았다. 내 눈을 멀게 하여 다른 꽃들은 볼 수 없게 만들어버린 동백꽃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섬에 닿자 다급해진 마음이 걸음을 재촉한다. 육지로 돌아가려고 죽 늘어선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와 섬을 둘러싸고 있는 동백 숲을 울려다본다. 오늘도 언덕배기에 무더기로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한껏 들뜬 걸음걸이로 언덕을 올랐으나 기대했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날씨가 추워서 꽃이 피려다가 멈춰 버렸을까. 동백터널에는 꽃망울조차 맺지 않았다. 바다와 맞닿은 가파른 절벽에는 바람이 데려다 놓은 파도만 하얗게 기어오른다.

섭섭함을 달래며 바람이 수시로 드나드는 산책로를 걷는다. 시원하게 뻗은 대나무 군락지를 지나 해안 절벽을 가던 중 드디어 동백꽃을 만났다. 선홍색 동백 꽃잎 위에 노란 꽃가루가 흩뿌려진 것이 마치 꽃의 눈물처럼 여겨졌다. 붉은 솥 안에서는 한창 피어날 때 떨어져야만 하는 꽃의 설움이 철철 끓어 넘쳤다.

걸음을 멈췄다. 고심한 인사말도 잊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못 하고 말없이 바라만 본다. 저 눈물은 누가 닦아 줄 것인가. 아픔은 또 어떻게 어루만져 줄 것인가. 요즘 들어 사소한 것에도 감정이 북북 올라와 주체할 수 없던 터라 동백의 눈물을 마주하자 또, 울컥한다.

동박새가 아니면 그 누구도 소용없다는데, 그 새는 어디로 가버린걸까. 내가 돌아서면 곧바로 허공으로 몸을 던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거운 마음이 더해져 꼼짝할 수가 없다. 오도 가도 못 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해안 절벽 전망대에 세워진 푯말에 ‘그대 발길 돌리는 곳’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동박새 한 마리가 동백꽃을 입에 물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마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발걸음을 돌렸다. 몇 걸음을 걸었을까. 툭 하는 소리가 어깨를 스치더니 발꿈치에 닿았다. 작은 우주 하나가 떨어졌다. 사위는 더 고요해졌다. 잠시 땅이 울렸을 뿐 아무런 변화도 없다. 몸을 살짝 비틀던 동백나무도 무덤덤하다. 마른 잎이 바스락거렸으나 숲은 풀썩 주저앉지도 않았다. 청청한 소나무도 그저 묵묵히 지켜만 본다. 하늘만 조금 전보다 더 파랗다. 수직으로 낙화한 꽃 한 송이가 생을 마감하는 시간은 섬뜩할 만큼 적막하다.

한창일 때 지는 것이 어디 동백꽃뿐일까. 언젠가 아들 녀석이 그 큰 덩치로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것을 보았다. 녀석의 친구가 ‘안녕’이라는 짧은 메시지를 넣은 후, 초침이 시계 바늘 두 바퀴를 돌자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두 바퀴면 들숨과 날숨이 서른 번도 넘게 몸속을 드나들었을 긴 시간이다. 나 좀 봐달라는 구원의 메시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어느 겨울날, 그녀도 붉은 꽃무더기 속에 꽃 아닌 꽃 한 송이가 되어 검은 주검으로 누워 있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예쁘게 사랑하고 있다더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남들은 쉽게 사랑하고 헤어지기도 하던데 어쩌자고 동박새가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피웠을까.

떨어진 꽃송이를 보며, 다하지 못한 생이 저물어가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꽃이야 저들의 순리이니 어쩔 수 없다 쳐도 꽃 핀 자리에서 서서히 지는 다른 꽃에 비하면 서러운 일이다. 꽃의 순리처럼 그들의 운명도 거기까지인가 싶다가도 한 번이라도 활짝 피었다가 저물었으면 하는 애처로운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랑에 빠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나도 한때 동박새가 된다고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적이 있다. 이른 아침마다 새소리는 전화선을 타고 날아와 허공에 꽃을 피우고 돌아갔다. 그 향기에 눈 멀고 귀 먹은 채 세찬 바닷바람보다 더 강한 추위에 맞섰다. 세상에서 가장 춥다는 오야마콘 마을에 홀로 고립된 듯 참연했다. 미처 걷지 못한 빨래는 얼어서 산산조각 나버려 털옷도 없이 견뎌야만 했다. 무슨 말이든 내뱉기만 하면 얼어버렸다. 혹독한 추위를 이기고 나는 기어이 사랑을 안고 따뜻한 봄을 맞았지만, 그녀는 사랑을 품고 깊게 잠들어 버렸다. 고통 없는 사랑이 없듯이 미치지 않고서는 그 마음을 알 수 없는 게 그놈의 사랑이다.

어디서 날아왔을까. 동박새 한 마리가 노란 꽃가루를 부리에 묻히고선 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어느 바닷가에 가서 떨어뜨릴 것인가. 아무도 오지 않는 해안 절벽 위나, 볕이 잘 드는 섬 기슭으로 날아가 또 다른 세상 하나를 심어놓겠지. 그러고는 애잔한 동백꽃을 찾아서 부지런히 봄빛을 물어다 나를 것이다.

지심도는 섬 전체가 동백 숲으로 우거져서 종일 걸어도 심심하지 않다. 누구든 놓친 사랑을 그리며 혼자 자박자박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삶은 영원할 수도 없고 죽음은 리허설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마음먹은 게 뜻대로 되지 않아서 터널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동백 숲을 거닐면 환기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덤으로 섬 구석구석에 무더기로 피어있는 동백꽃을 마음에 담아보는 것도 좋을 테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동박새가 되어 섬으로 날아오른다. 송이째로 떨어진 붉은 꽃무더기 앞에서 새는 말이 없다. 절절한 눈빛으로 저무는 생을 어루만지며 혼자 묻고, 답하다가, 돌아간다. 바람의 등을 타고 날아온 푸른 파도 소리가 고요한 꽃무덤 위로 부서져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