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觀照) / 윤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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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1. 6. 21.

 

수필을 쓰는 사람에게 좋은 수필을 쓰는 일은 가장 즐거운 일일 것이다. 잘 씌어진 수필을 대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평화롭다. 작가의 놀라운 통찰력과 사물을 분석하여 혼을 실은 글을 대할 때마다 머리가 숙여진다.

수필공부를 하면서 선배작가들처럼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앞섰다. 이러한 욕심은 부질없는 나의 생각이었다. 글을 쓰면 쓸수록 어려움이 앞을 가로 막았다. 처음에 붓 가는대로 쓰는 게 수필인 줄 알았다. 무조건 지나온 나의 삶을 신변잡기로 글을 썼으니 내 글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문학적 사고가 없는 글에 얼마나 식상했을까? 어느 날 책을 읽는 도중 관조란 낱말이 내 뒤통수를 호되게 때렸다. 관조란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여 비추어 보는 것이라 했다. 나의 부족한 사고로 생활 속에서 사물의 현상을 어떻게 관찰하며 어떻게 글을 쓸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욱신거렸다.

서점에 가서 수필에 관한 책을 한 보따리 사왔다. 작가들의 작품 속에 내재되어있는 관조의 눈으로 관찰한 수필을 보기 위해서였다. 수필에 관한 내용들이 서로 비슷비슷해서 몇 페이지를 읽고 나니 곧 바로 싫증이 났다. 많은 책을 읽으면 글에 대한 해답을 얻으리란 미련한 생각으로 대했으니 말이다. 내 앞에 쌓인 많은 책들이 나를 비웃으며 힐난하는 듯했다. 방법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100인의 수필가들이 쓴 좋은 글을 골라 읽고 그 글에 대한 평론이 실려 있는 글을 읽었다. 제3의 작가의 눈으로 비교하며 내 생각을 보태어 읽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의 의도와 평론가가 보는 시각을 비교하고 나라면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삼위일체가 되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윤오영 선생의 “방망이 깎던 노인” 피천득 선생의 “인생은 작은 인연으로 아름답다” 손광성 선생의 “달팽이” 등은 내가 읽은 수필 중, 진흙 속에서 핀 연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명 수필이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의 오묘한 감성과 진리가 내 가슴에 와 닿았다. 한 사물을 보통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관조의 눈으로 봄으로써 독자에게 수필의 아름다움과 진수를 느낄 수 있도록 감동을 불어넣어 주었다.

어느 작가는 돌을 보면서 돌 속에 들어있는 살아있는 부처의 모습을 유추하고, 어느 작가는 인간의 배설물을 관조하여 분탑기를 수필소재로 썼다. 작가는 사물에 대한 뛰어난 해석과 관찰력으로 이미 독자들의 마음속에 수필이란 공감대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우연히 연암 박지원 선생님의 글을 감상하다 문장작법과 병법이란 글을 대했다. 글자를 비유하면 군사이고, 글 뜻을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은 적국敵國이고 전고典故와 고사는 전장의 보루이다. 글자를 묶어서 구句를 만들고 구를 묶어 문장을 만듦은 대오를 편성하여 행진하는 것과 같다. 음으로 소리를 내고 문채文彩로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치고 깃발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 조응照應은 봉화烽火에 해당되고 비유譬喩는 유격병에 해당하며, 억양반복은 육박전을 하여 쳐 죽이는 것에 해당하고, 파제破題를 하고 결속結束하는 것은 먼저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사로잡는 것에 해당한다. 함축含蓄을 귀하게 여김은 늙은 병사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운을 남기는 것은 군사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글을 병법에 부쳐 관조한 연암선생의 꿰뚫는 혜안을 보는 듯했다. 소재와 사물을 관찰하기위해서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몸높이를 낮추어야한다. 몸을 낮추는 것은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기 위한 낮은 문이다. 몸을 낮추면 작고 하찮아 눈에 띄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섬세한 조직과 빛을 발하는 모습을 발견하여야한다. 일본작가 이토우 게이츠는 나무 한 그루를 보는 눈을 이렇게 말하였다.

“처음에는 나무의 그대로의 모습을 본다.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다./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나 본다. / 나무의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세밀한 모습을 본다. /나무속에 승화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다./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사상을 본다. /나무를 흔들고 있는 본질을 본다./ 나무를 매체로 하여 나무의 저쪽 세계를 본다.”

나무 한 그루를 보는 눈이 이렇게 다양할 수 없지 않은가? 조금은 수필의 맛을 알 것 같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물을 대하고 깊이 생각하다보면 자꾸 흐트러지고 정신적으로 한 느낌을 가지려면, 어느 순간에 살짝 연결고리가 비켜 가는 것이다. 마음먹은 대로 써지지 않는 게 글이었다. 글이란 쌓여진 연륜과 타고난 문학적인 소질이 있어야한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아무런 노력과 도전 없이는 그 반열에 올라선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수십 년 동안 글밭에서 생활한 선배작가들의 글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에 실감이 왔다. 선배들 역시 글에 미쳐 수많은 생각들을 유추하며 지식이란 보고에 관조란 예리한 눈으로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그저 지나온 세월을 일기문식으로 평이하게 적은 글을 읽는 독자들은 금방 싫증을 내고 책을 덮을 것이다. 옛날부터 한 분야에서 경지에 오르려면 10년을 꾸준히 공부하고 정진해야 한다고 한다. 그게 10년 법칙이다. 1~2년 글공부해서 수필집을 내는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다. 꾸준히 수필을 써온 유명한 작가들이 어느 날 절필을 선언하고 글에서 손을 떼는 것을 볼 때 수필이 그렇게 녹녹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독자가 없는 수필은 황량한 벌판에서 바람에 나는 지푸라기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의 사물에 한 편의 글은 작가와 독자가 읽어서 교감이 이루어지는 글이 되어야 한다. 작가는 먼저 글을 쓰고자하는 예리한 눈과 본질을 파악하고 그 사물에 생명체를 이식하여 글이 호흡할 수 있도록 생명력을 부여해야 한다.

항상 좋은 글을 읽고 글속에 녹아있는 작가가 추구하는 세계와 그 속에 담긴 혼을 발견할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 수필을 쓰는 사람들이 사실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 문학적인 관조의 힘을 길러야 좋은 글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