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차와 인생과 수필 / 윤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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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1. 6. 21.

애주가는 술의 정을 아는 사람, 음주가는 술의 흥을 아는 사람, 기주가嗜酒家, 탐주가耽酒家는 술에 절고 빠진 사람들이다. 이주가酒家는 술맛을 잘 감별하고 도수까지 알지만 역시 술의 정이나 흥을 아는 사람은 아니다. 같은 술을 마시는 데도 서로 경지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이다.

누구나 생활은 하고 있지만 생활 속에서 생활을 알고, 생활을 말할 수 있는 그리 많지가 않다. 누구나 책을 보고 글을 읽지만 글 속에서 글을 알고 글을 말 할 수 있는 사람 또한 드물다. 민노자閔老子의 차를 마시고 대뜸 그 향미와 기품이 다른 것을 알아 낸 것은 오직 장대張岱뿐이다. 그는 낭차茶가 아니고 개차岕茶인 것을 알았고, 봄에 말린 것과 가을에 따 말린 것을 감별했고 끓인 물이 혜천惠泉의 물인 것까지 알아내어 주인을 놀라게 했다. 장대는 과연 맛을 아는 다객茶客이다. 다도락茶道樂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마시는 바에는 이쯤 되어야 비로소 다향茶香의 진미와 아취를 말할 수 있지 아니한가.

하물며 인생 백년을 생활 속에서 늙되 취생몽사, 생활을 모르고, 주야로 책상머리에 앉았으되 도능독徒能讀, 글맛을 모른다면 또한 불행하고 쓸쓸한 인생이 아닌가. 시사時事를 고담高談하고 박학을 자랑하고 학술어나 신구대작新舊大作을 입버릇으로 인용하는 속학자류의 공소한 장광설보다 장대의 혀 끝으로 민노자의 참 맛을 알듯 아는 것이 진실로 아는 것이다. 울 밑에 민들레, 밭둑의 찔레꽃, 바위 틈의 왜철쭉, 지붕 위의 박꽃, 다 기막히게 정겨운 꽃들이다. 우리의 생활 속에 파고 들고 인생에 배어든 꽃들이다. 왜 도연명의 황국黃菊이며 주렴계周濂溪의 홍련紅蓮이었을까. 날마다 일어나고 되풀이되는 신변잡사라고 그저 번쇄하고 무가치하다고만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을 다 떼어낸다면 인생 백년에 남은 것이 무엇인가. 생활 속에서 생활을 찾지 아니하고 만리창공의 기적이나 천재일우의 사건에서 생활을 찾으려는 것도 공허한 것이 아닌가. 더욱이 분분한 시정市井의 시비, 소잡한 정계의 동태, 불어오는 사조의 물거품, 그것만이 장구한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위대한 사람을 정신적으로 위대한 사람과 육체적으로 위대한 사람으로 나누면 육체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작아 보이고, 정신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커 보인다.”

이것은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정신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거리가 가까워올수록 평범하고 작아져서 우리의 눈앞까지 오면 결함과 병통투성이의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위대한 까닭이다.” 이것은 위의 말을 적의적適意的으로 인용한 노신魯迅의 말이다.

내가 사서삼경에서 <논어>를 애독하는 이유는 공자가 평범한 인간으로 접근해 오기 때문이다. 그의 문답과 생활 모습에서 풍기는 인간미, 그의 평범한 신변잡사에서만 인간 중니仲尼와 가까이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생활이란 곧 위대한 생활이다. 치졸한 글이 가끔 인간미를 지니고 있거니와, 인간미를 풍기는 글이란 또한 위대한 글이다. 서가書家들이 완당阮堂의 글씨 중에서도 예서를 높게 평하는 것은 그 고졸한 것을 취하는 것이 아닐까.

저속한 인품의 바닥이 보이는 문필의 가식, 우러날 것 없는 재강을 쥐어 짜낸 미문美文의 교태, 옹졸한 분만憤懣, 같잖은 점잔, 하찮은 지식, 천박한 감상感傷, 엉뚱한 기상奇想, 이런 것들이 우리의 생활을 얼마나 공허하게 하며, 우리의 붓을 얼마나 누추하게 하는가.

‘절실’이란 두 자를 알면 생활이요, ‘진솔’이란 두 자를 알면 글이다. 눈물이 그 속에 있고, 진리가 또한 그 속에 있다. 거짓 없는 눈물과 웃음, 이것이 참다운 인생이다. 인생의 에누리 없는 고백, 이것이 곧 글이다. 정열의 부르짖음도 아니요, 비통의 하소연도 아니요, 정精을 모아 기奇를 다툼도 아니요. 요要에 따라 재才를 자랑함도 아니다. 인생의 걸어온 자취 그것이 수필이다. 고갯길을 걸어오던 나그네, 가다가 걸러온 길을 돌아보며 정수情愁에 잠겨도 본다. 무심히 발 앞에 흩어진 인생의 낙수落穗를 집어 들고 방향芳香을 맡아도 본다.

“봄을 아껴 날마다 까부룩히 취했더니, 깨고 보매 옷자락엔 술 자욱이 남았고나 惜春連日醉昏昏, 醒後衣裳見酒痕.” 三春行樂도 간 데 없고, 옷자락에 떨어진 두어 방울의 주흔酒痕!이것이 인생의 반점이요, 행로의 기록이다. 이 기록이, 이 반점이 곧 수필이다. 이것이 인생의 음미다.

등잔불 없는 화롯가에서 젊은 친구와 마른 인절미를 구어 먹으며 담화의 꽃을 피우다 손가락을 데던 일을 회상하는 문호 박연암은 지나간 우정에 새삼 흐뭇했다. 달밤에 잠을 잃고 뒷산으로 올라갔던 시인 소동파는 때마침 마루 끝에서 반겨주는 상인上人(寺僧)을 보고 이 세상에 한가한 손이 둘이 있다고 기뻐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마는 이것이 다 인간 생활의 그윽한 모습들이 아니냐.

첫 번째 방향芳香, 두 번째 감향甘香, 세 번째 고향苦香, 네 번째 담향淡香, 다섯 번째 여향餘香이 있어야 차의 일품逸品이라 한다. 그런 차를 심고 가꾸고 거두고 말리고 끓이는 데는, 각각 남모르는 고심과 비상한 정력이 필요하다. 민옹閔翁의 차가 곧 그것이다. 이 맛을 아는 사람이 곧 장대다. 엽차는 육미봉탕六味鳳湯이나 고량진미는 아니다. 누구나 평범하게 마시는 차다. 그러나 각각 향香과 품品이 있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향기를 거두고 품을 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필이란 거기서 우러난 차향이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진실을 깨치고, 그것을 아끼고, 또 음미하고 기뻐하고, 눈물과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즐길 수 있는 글이다. 그러나 민옹과 장대는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