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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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6. 28.

흔적 / 정희성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어머니가 벗어놓은 그림자만 남아있다./ 저승으로 거처를 옮기신 지 2년인데/ 서울특별시 강서구청장이 보낸/ 체납 주민세 납부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화곡동 어디 자식들 몰래 살아 계신가 싶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어머니의 지팡이 / 정희성
무릎 아픈 어머니께/ 사다 드린 지팡이// 자식이 사준 지팡이 짚으면/ 자식 앞세운다고/ 신발장 한켠에 놓아둔 채/ 절며 가신 어머니// 오늘 새벽/ 출근길에 보았네/ 어둠속, 불도 켜지 않고/ 허옇게 앉아 계시던 자리// 텅 빈// 어머니//

 

술꾼 / 정희성
겨울에도 핫옷 한 벌 없이/ 산동네 사는 막노동꾼 이씨/ 하루 벌어 하루 먹는다지만/ 식솔이 없어 홀가분하단다/ 술에 취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낯선 사람 만나도 알은체하고/ 남의 술상 앞에서 입맛 다신다/ 술 먹을 돈 있으면 옷이나 사 입지/ 그게 무슨 꼴이냐고 혀를 차면/ 빨래 해줄 사람도 없는 판에/ 속소캐나 놓으면 그만이지/ 겉소캐가 다 뭐냐고 웃어넘긴다//

초승달 / 정희성
혹은/ 이상한 나라의 밤하늘에 몸을 숨긴/ 모습 없는 고양이의 웃음!//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 정희성
발표 안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한다/ 시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시인 본색 / 정희성
누가 듣기 좋은 말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시(詩)를 찾아서 / 정희성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 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자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 우바이 : 불교를 믿는 여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

임진각에서 얻은 시상 / 정희성
박봉우 「휴전선」시비에 헌화하고/ 망배단(望拜壇)으로 자리를 옮겨/ 고은 선생의 유장한 연설을 들었다/ 꽃 속에서도 폭음을 들을 수 있어야/ 비로소 시인이라는 그의 말을 듣고/ 햐, 이건 시다, 하고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박봉을 털어 『시인』지를 낸다는 이도윤이 옆에 와서/ 시 두 편만 달라는데 그것도 안 주느냐고 성화다/ 시 두 편이면 내 일년 농사라고/ 그거 털어주면 나는 거지라고 하니까/ 그럼 방금 한 그 말이라도 써서 달란다/ 그래서 이걸 글이라고 쓰기는 쓰는데/ 시가 될지 어쩔지는 나도 모르겠다//

말 / 정희성
세상에 입 가진 자 저마다 떠들어대서/ 나는 오랫동안 참고 말 안하는 버릇을 들이다가/ 이제는 말도 잊어버리고 말하는 재미도 잊어버리고/ 그것이 그렇게 마음 편해서/ 마침내는 시를 쓰는 것도 잊어버리고 살다가/ 시인이 시를 안 쓰고 말도 안하면/ 무엇에 쓰겠냐고 누가 혀를 차는 바람에/ 그도 그렇겠다 싶어 원고지 앞에 다시 앉으니/ 도무지 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애마냥/ 서투르고 그 말이라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나는 말하는 법을 새로 배워야겠다//

옹기전에서 / 정희성
나는 웬지 잘 빚어진 항아리보다/ 좀 실수를 한 듯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를 따라와 옹기를 고르면서/ 늘 느끼는 일이지만/ 몸소 질그릇을 굽는다는/ 옹기전 주인의 모습에도/ 어딘다 좀 빈데가 있어/ 그것이 그렇게 넉넉해 보였다/ 내가 골라놓은 질그릇을 보고/ 아내는 곧장 화를 내지만/ 뒷전을 돌아보면/ 그가 그냥 투박하게 웃고 섰다/ 가끔 생각해보곤 하는데/ 나는 어딘가 좀 모자라는 놈인가 싶다/ 질그릇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수한 것보다는 차라리/ 실패한 것을 택하니//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얼은 강을 건너며 / 정희성
얼음을 깬다./ 강에는 얼은 물/ 깰수록 청청한/ 소리가 난다./ 강이여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물은 남 몰래 소리를 이루었나/ 이 강을 이루는 물소리가/ 겨울에는 죽은 땅의 목청을 트고/ 이 나라의 어린 아희들아/ 물은 또한 이 땅의 풀잎에도 운다./ 얼음을 깬다./ 얼음을 깨서 물을 마신다./ 우리가 스스로 흐르는 강을 이루고/ 물이 제 소리를 이룰 때까지/ 아희들아.//

씻김 / 정희성
물에서 나와 산으로 쫓긴 영산/ 태평연월에 총맞아 죽은 영산/ 저승 가다 먹으려고/ 도토리 한 알 손에 쥐고/ 올 같은 풍년에 굶어 죽은 영산/ 가랑잎 뒤집 쓰고 산에서 죽은 영산/ 애면글면 살겠다고/ 버섯 따다 죽은 영산/ 칠성산 총질 끝에 쓰러져간 젊은 영산/ 넋이야 넋이로다 죽은 영산 죽인 영산/ 모두 다 우리 동포 아니시리/ 우리 형제 아니시리//

봄소식 / 정희성
이제 내 시에 쓰인/ 봄이니 겨울이니 하는 말로/ 시대 상황을 연상치 마라/ 내 이미 세월을 잊은 지 오래/ 세상은 망해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저 산에도 봄이 오려는지/ 아아, 수런대는 소리//

꽃샘 / 정희성
봄이 봄다워지기까지/ 언제고 한번은 이렇게/ 몸살을 하는가보다/ 이 나이에 내가 무슨/ 꽃을 피울까마는/ 어디서 남몰래 꽃이 피고 있기에/ 뼈마디가 이렇게 저린 것이냐//

사랑 사설(辭說) / 정희성
가여운 입술이나 손끝으로 매만질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더러는 우리가 어둑한 심장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을 왜 몰라/ 오늘따라 어설피 흰 살점의 눈내리고 이 겨울 우리네 마음같이 어두울/ 뽕나무 스산한 가지 설운 표정을 목로에서나 달래는 심정으로 훼훼/ 탁한 술잔을 흔들다가는 시나브로 눈발이 흩날리는 거리로 나서보지마는/ 언제 우리네 겨울이 인정같이야 따뜻한 것가 어두운 나무에서 반짝이는 눈빛같이야/ 어차피 반짝일 수 없는 우리네 마음이 아닌 것가/ 미쳐간 누이의 치마폭에 환히 빛나던 싸리꽃 등속의 그 꾀죄죄한 웃음결만치도/ 밝게 웃을 수 없다면야 순네의 슬픔에는 순네의 슬픔에 맞는 가락지/ 우리 모두가 우리네 슬픔에 맞는 사랑을 찾아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나서볼 일이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학교 가는 길 / 정희성
모든 문제의 답은 학교에 있고/ 정답은 언제나 근엄해서/ 담임선생님의 얼굴 같지요/ 답답한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삼차방정식보다 난해하게 변해버린/ 선생님의 표정을 읽으며/ 정답까지 가는 길은 너무도 아득해/ 나는 가끔 다른 길을 갑니다/ 비록 험하기는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엔 즐거움도 있겠지/ 생각하며 길모퉁이 돌아서면/ 찍소리 말고 공부나 하라는/ 어머니의 고함소리 멀어지고/ 친구가 다닌다는 공장을 지나면/ 신축공사장 인부들/ 오락실 근처에선 재수할 때 만난/ 친구의 옆모습도 보이지요/ 무언가 고달파 보여도/ 정답처럼 엄숙하지 않아서/ 볼수록 정다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나는 교실로 돌아오곤 하지요/ 그러면서 나는 자신에게 곧잘/ 어리석은 질문을 던집니다/ ―정답은 학교에만 있는가//

일월(日月) / 정희성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 그 즈음에/ 해와 달을 몸받아/ 누리에 나신 이여/ 두 손 모아 비오니/ 천지를 운행하올 제/ 어느 하늘 아래/ 사무쳐 그리는 이 있음을/ 기억하소서//

몽유백령도(夢遊白翎圖) / 정희성
풍경은 얼마쯤 낯설아야 풍경이고/ 시도 얼마쯤 낯설어야 시가 된다/ 이 섬의 이름은 원래 곡도(鵠島)/ 따오기 모양의 거대한 흰 날개를 가졌다는/ 이 섬의 아름다움은 기이하다/ 평화와 상생을 위한 문학축전을 마치고/ 두무진(頭武津)으로 가 유람선을 탔다/ 아홉시 방향을 보라/ 선장의 말에 시선이 한쪽으로 쏠린다/ 구멍 뻥 뚫린 바위 옆에 우뚝 솟은 촛대바위/ 괭이갈매기 가마우지 똥이 하얗게 쌓인/ 촛대바위 뒤로는 병풍절벽 가까스로/ 절벽을 기어오른 덩굴식물 사이로 초소가 보이고/ 구멍 속에는 초병(哨兵)이 하나 서서/ 장산곳 하늘의 매를 감시하고 있다/ 아니, 그는 아마 눈먼 아비를 위해/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에/ 연꽃이 언제 피는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가마우지가 몇번 자맥질을 하고/ 물개가 몇번이나 솟구쳐 휘파람을 불고/ 괭이갈매기는 또 몇번이나 울며 날았는지/ 하루 종일 심심풀이로 헤아렸을 터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다 한가운데/ 병사를 세워둘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언젠가는 병사들도 심봉사처럼/ 눈뜬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심청이 환생했다는/ 연화리(蓮花里)가 여기 있을 턱이 없지/ 그렇지 않고서야 심청각 옆에/ 탱크를 세워둘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옛날 이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크기가 몇천리가 되는지 모르나/ 이것이 변해 붕(鵬)이라는 새가 되었다/ 붕새는 얼마나 큰지/ 한번 날면 하늘을 뒤덮는 구름과 같았다/ 지금까지 바다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던 그 큰 새가/ 제 몸에 얹힌 온갖 것 훌훌 털고/ 크고 흰 날개 퍼득여 하늘로 오를 날/ 오기는 올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백령도가 황해바다 한가운데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사랑 / 정희성



        사랑아 나는 눈이 멀었다
        멀어서
        비로소 그대가 보인다
        그러나 사랑아
        나도 죄를 짓고 싶다
        바람 몰래 꽃잎 만나고 오듯
        참 맑은 시냇물에 봄비 설레듯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 정희성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남몰래 울며 하는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이 될까 몰라/ 아픈 꽃이 될까 몰라//

친구여 네가 시를 쓸 때 / 정희성
친구여, 네가 非詩的(비시적)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곳에 뜨겁게 으스러진 나의/ 삶이 있고, 굶주린 식구가 있고/ 노동이 있고/ 그리고 억센 팔뚝뿐이다/ 삽과 망치뿐이다// 아니다 친구여, 너의 正義(정의)가 사는 곳/ 이 푸른 하늘 아래/ 뜨거운 태양이 있고, 땅이 있고/ 너와 나 그리고/ 햇빛 뒤에 패어진 그늘도 있다// 친구여,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 침묵 뒤의 소란이,/ 정신 뒤의 육체가/ 우정 뒤의 敵意(적의)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한때는 너와 내가 만나/ 詩(시)를 말하고 인생을 논하고/ 政治(정치)를 말하고 自由(자유)를 말했지만/ 친구여, 30을 넘어 이제는/ 나이보다 더 많은 것이/ 우리를 가로막는구나// 친구여, 네가 詩를 쓸 때/ 나는 굶는 식구를 생각했고/ 네가 詩를 쓸 때/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네가 天國(천국)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나는 죽음 뒤에 오는 것을 생각하며/ 네가 내민 손수건을 눈에 대고/ 울며 너더러 개새끼라 했구나/ 내게 너더러 개새끼라 했구나//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 정희성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 사러 왔냐고/ 우리 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겠느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나는 자연을 표절했네 / 정희성
어떤 이는 말하네/ 시인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고 듣는 사람이라고/ 나는 새의 목소리를 빌려/ 나무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받아쓰네/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손녀가 창밖을 내다보며/ 저 혼자 하는 말도 받아 적네/ 아 자연은 신비한 것/ 세상 그 누구도 한 적 없는/ 한마디 말을 하고 싶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네/ 어느 시인은 말했지/ 나는 자연을 표절했노라고//

 

집에 못 가다 / 정희성
어린 시절 나는 머리가 펄펄 끓어도/ 애들이 나 없이 저희끼리만 공부할까봐 결석을 못했다/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 여자가/ 어머 저는 애들이 저만 빼놓고 재미있게 놀까봐/ 결석을 못했는데요 하고 깔깔댄다/ 늙어 별 볼일 없는 나는 요즘 그 집에 가서 자주 술을 마시는데/ 나 없는 사이에 친구들이/ 내 욕할까봐 일찍 집에도 못 간다//

 

             그리운 나무 / 정희성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꽃자리 / 정희성
촉촉히 비 내리던 봄날/ 부드러운 그대 입술에/ 처음 내 입술이 떨며 닿던/ 그날 그 꽃자리/ 글썽이듯 글썽이듯/ 꽃잎은 지고/ 그 상처 위에 다시 돋는 봄/ 그날 그 꽃자리/ 그날 그 아픈 꽃자리//

 

내가 아는 선배는 / 정희성
술만 취하면 그 얘기였다. 그날도 시장 근처 늘 가던 술집에서 거나하게 마시고 취한 김에 주모를 불러 영화배우 허장강이 하던 식으로,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한번 할까, 하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을렀던 것인데 여자가 그날따라 선선하게 문단속하고 갈 테니 요 앞 여관에 먼저 가 기다리라고 하더란다. 그래 얼씨구나 싶어 그 여자와 잠자리에서 같이 먹을 요량으로 바나나 두 개 홍시 두 개 귤 몇 개인가를 사 비닐봉지에 담아들고 콧노래 흥얼대며 들어가 잠자리 펴놓고 기다리는데,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금방 온다던 사람이 안 오는 거라. 그래 주섬주섬 바지를 꿰어입고 나가보니 술집은 벌써 불이 꺼져 썰렁하고 달만 휘영청 밝은데 전봇대 밑에다 오줌을 깔기며 닭 쳐다 보던 뭐 모양으로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다 그길로 곧장 집에 들어갔던 것인데, 그때까지 잠도 안자고 기다리던 자식놈이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받아들고 아빠 이게 뭐야 하면서 애비 한입 먹어보라 소리도 안하고 게눈 감추듯하는 모양을 보고, 무어라 말은 못하고 내 그놈의 집 두 번 다시 가나 봐라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는 것이다.//

답청 / 정희성
풀을 밟아라/ 들녘에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 수록 푸르른/ 풀을 밟아라.//

서울역 1998 / 정희성
틈만 나면 서울역에 갔다/ 침침한 지하도 한 구석에는/ 지쳐 쓰러진 사람들/ 죄 많은 내가 누워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먼저 와 있다/ 이 꼴을 볼라고 작년에/ 하느님이 나를 인도에 보내셨던지/ 북인도가 아프게 꿈에 보였다/ 노란 겨자꽃이 한창이었다/ 마알간 거울 속처럼/ 이상하게도 세상은 고요했고/ 말을 해도 소리가 되지 않았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 정희성
신문을 보고 있는데/ 이제 중학교 일학년밖에 안되는/ 아들놈이 와서 가훈이 뭐냐고 묻는다/ 너희 학교에 교훈이 있듯이/ 학급에 급훈이 있고/ 아마 어떤 집에는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가르침으로 주는 말이 있을 게라고 했더니/ 아니, 낱말뜻이 아니라/ 우리집 가훈이 뭐냐고/ 학교에서 적어 오랬다고 다그친다/ 열세살밖에 안되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맹랑하게 애비를 다그친다// 글쎄…… 뭐 가훈이랄 게 있겠느냐고/ 그냥 건강하게 살라고 하니/ 여편네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그게 무슨 가훈이냐고/ 아이 자존심을 건드려도 유분수지/ 애비가 돼서 그럴 수가 있냐고/ 왜 이런 놈의 집에 시집와서/ 이 고생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구시렁거린다 괘씸하게/ 괘씸하게 나를 긁는다/ 이를테면 이것이 우리집의 분열이다// 하아…… 가문이 없어 가훈도 없다/ 가훈이 없어 집구석이 이 모양이고/ 집구석이 이 모양이니 새끼들도/ 애비 알기를 우습게 안다/ 가훈이 없다……가문이 없다……/ 가훈이 없어 그럴싸한 집이 없고/ 그럴싸한 집이 없으니/ 그럴싸한 가훈도 못 붙인다// 하루는 꾼 돈을 갚으러 은행에 갔더니/ 거기에 가훈을 전시하고 있었다/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한 여자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앞에서 값을 물었다/ 삼만원이라고 했다/ 삼만원…… 삼만원이면 멋들어진/ 가훈 하나를 살 수 있다/ 낡아빠진 유치한 글귀지만/ 삼만원이면 가화만사성이다// 내 선배 하나는 기자질을 하다가/ 입바른 소리 잘한다고 반공법에 걸리고/ 애비가 콩밥을 먹는 동안/ 아들놈은 반공 글짓기 대회에서/ 기특하게도 특선을 했다/ 가화만사성이다 이를테면/ 이것이 우리나라의 가화만사성이고/ 분단이다/ 최루탄이다// 벙어리가 말은 못해도/ 세월 가는 줄은 안다/ 분단 44년에/ 가화만사성한 놈이 있다면/ 개똥이다/ 하아…… 삼만원이 없다/ 삼만원이 없어 가화만사성을 못한다//

 

바닷가 벤치 / 정희성


마음이 만약 쓸쓸함을 구한다면
기차 타고 정동진에 가보라
젊어 한때 너도 시인이었지
출렁이는 바다와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
그 위를 떠가는 흰 구름
그리고 바닷가 모래 위 작은 벤치에는

너보다 먼저 온 외로움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가야산 홍류동 바위 / 정희성
세상이 다 떠내려갈 것 같네/ 온갖 시비 물소리로 재우며/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 나지 않으리라고/ 바위에 새긴 孤雲*의 시구/ 물결에 지워졌네/ 말은 흘러가고/ 바위만 곧게 앉아/ 비 오면 비 맞고/ 눈 오면 눈을 맞네//
* 孤雲 : 최치원의 호

병상에서 / 정희성
실패한 자의 전기를 읽는다/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실패를 위해/ 누군가 부정하겠지만/ 너는 부정을 위해서 시를 쓴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 시를 쓰고/ 부질없는 줄 알면서 강이 흐른다/ 수술을 거부한 너에게/ 의사는 죽음을 경고했지만/ 너는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 게 실수겠지만/ 너는 예언하지 않는다/ 예언하지 않아도 죽음은 다가오고/ 예언하지 않아도 강이 흐른다/ 네 죽음 하나의 실수에 그치겠지만/ 밖에는 실패하려고 더 큰 강이 흐른다//

눈 / 정희성
나는 안다/ 그대 눈 속에 드리운 슬픔을/ 내가 그윽한 눈으로 그대를 바라볼 때/ 그대는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그대 눈 속의 남해바다/ 그대 눈 속의 보리암/ 그대 눈 속의 연꽃/ 그대 눈 속의 그림자가/ 그대와 함께 있기를 열망하는/ 나를 저물게 한다/ 나는 예감한다/ 내 눈 속에 잦아들 어둠을/ 죽음이 내 눈을 감길 수는 있겠지//

새벽이 오기까지는 / 정희성
새벽이 오기 전에/ 나는 머리를 감아야 한다/ 한탄강 청청한 얼음을 꺼서/ 얼음 밑에 흐르는 물을 마시고/ 새벽이 오기 전엔/ 얼음보다 서늘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새벽이 오기까지는/ 저 어질머리 어둠에 불을 지피고/ 타오르는 불꽃을 확인해야 한다/ 얼음 위에 불을 피우고/ 불보다 뜨거운 마음을 달궈야 한다/ 새벽이 오기까지는// 나는 보리라/ 얼음 위에서 어떻게 불꽃이 튀는가를/ 겨울의 어둠과 싸우기 위해/ 동지들의 무참한 죽음과/ 보다 값진 사랑과/ 우리들의 피맺힌 자유를 위해// 나는 보고 또 보리라/ 불이 어떻게 그대와 나의/ 얼어붙은 가슴을 뜨겁게 하고/ 저 막막하고 어두운 겨울벌판에서/ 새벽이 어떻게 말달려 오는가를/ 아아 눈보라 채찍쳐/ 새벽이 어떻게 말달려 오는가를//

너를 부르마 / 정희성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 쉬는/ 공기(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여.//

세상이 달라졌다 / 정희성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법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날의 한 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진달래 / 정희성
잘 탄다, 진아/ 불 가운데 서늘히 누워/ 너는 타고/ 너를 태운 불길이/ 진달래 핀다/ 너는 죽고/ 죽어서 마침내 살아 있는/ 이 산천/ 사랑으로 타고/ 함성으로 타고/ 마침내 마침내 탈 것으로 탄다/ 네 죽음은 천지에/ 때아닌 봄을 몰고 와/ 너를 묻은 흙가슴에/ 진달래 탄다/ 잘 탄다, 진아/ 너를 보면 불현듯 내 가슴/ 석유 먹은/ 진달래 탄다//

그 짐승의 마지막 눈초리가 / 정희성
비무장지대의 모든 산들이/ 일제히 무장을 하고 나선/ 칠흑의 밤이었네/ 적인 듯 싶기에 쏘았지/ 힘없이 쓰러지데, 허전하게/ 불빛을 비추자 그것은 그러나/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었어/ 나는 똑똑히 확인했네/ 불빛 속에 떨고 있는 네 다리를.// 노루라거니 사슴이라거니/ 좋아 날뛰는 병사들 틈에서/ 대대장의 큰 손이 불쑥 나타나더니/ 수고했노라고 악수를 청하며/ 그런 식으로 하면 적을 잡을 수 있다고/ 친구여, 그가 나를 위로하였지/ 알겠노라고, 알겠노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똑똑히 확인했네/ 불빛 속에 떨고 있는 네 다리를.// 참 알 수 없네/ 확인된 것은 짐승의 다리가 아닐세/ 네 다리는 살아서/ 죽음의 어두운 허공을 휘저으며/ 나의 살의를, 대대장의 살의를/ 우리 모두의 뿌리 깊은 살의를/ 입증하는 것일까/ 죽어가던 그 짐승의 마지막 눈초리가/ 탄환처럼 완강히 내 가슴에 박혀 있네//

지금도 짝사랑 / 정희성
사람을 사랑하면/ 임금은 못되어도/ 가객은 된다.// 사람을 몹시 사랑하면/ 천지간에 딱 한 사람이면/ 시인은 못되어도/ 저 거리만큼의 햇살은 된다/ 가까이 못 가고/ 그만큼 떨어져/ 그대 뒷덜미 쪽으로/ 간신히 기울다 가는// 가을 저녁 볕이여/ 내 젊은 날 먹먹한 시절의/ 깊은 눈이여//

연두 / 정희성
봄도 봄이지만/ 영산홍은 말고/ 진달래 꽃빛까지만// 진달래 꽃 진 자리/ 어린 잎 돋듯/ 거기까지만// 아쉽기는 해도/ 더 짙어지기 전에/ 사랑도// 거기까지만/ 섭섭기는 해도 나의 봄은/ 거기까지만//

태백산행 /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청명 / 정희성


황하도 맑아진다는 청명날
강머리에 나가 술을 마신다
봄도 오면 무엇하리
온 나라 저무느니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
머리칼 날려 강변에 서면
저물어 깊어가는 강물 위엔
아련하여라 술취한 눈에도
물 머금어 일렁이는 불빛


여기 타오르는 빛의 성전이 / 정희성
그 누가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이마가 시원한 봉우리/ 기슭이마다 어린 예지의 서기가/ 오랜 주라기(朱羅紀)의 지층을 씻어내린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리듯이/ 관악의 이마에 흐르는 보배로운 기름이여/ 영원한 생명의 터전이여// 겨레의 염원으로 기약한 이 날/ 헤어졌던 이마를 비로소 마주대고/ 여기 새로 땅을 열어/ 한 얼의 슬기를 불 밝히니/ 「진리는 나의 빛」/ 이 불이 밝히는/ 오 한 세대의 확고한 길을 보아라/ 온갖 불의와 사악(邪惡)과/ 어둠의 검은 손이 눈을 가릴 때에도/ 그 어둠의 정수리를 가르며 빛나던 예지여/ 역사의 갈피마다 슬기롭던/ 아 우리 서울대학교// 뼈 있는 자의 길을 보아라/ 뼈 있는 자가 남기는 이념의 단단한 뼈를 보아라/ 저마다 가슴 깊이 사려둔 이념은/ 오직 살아 있는 자의 골수에 깃드니/ 속으로 트이는 이 길을/ 오 위대한 세대의 확고한 길을 보아라/ 만년 웅비(雄飛)의 새 터전/ 이 영봉(靈峰)과 저 기슭에 어린 서기(瑞氣)를/ 가슴에 서리담은 민족의 대학/ 불처럼 일어서는 세계의 대학/ 이 충만한 빛기둥을 보아라/ 온갖 어두움을 가르며/ 빛이 빛을 따르고/ 뼈가 뼈를 따르고/ 산이 산을 불러 일어서니/ 또한 타오르는 이 길을/ 영원한 세대의 확고한 길을 보아라// 겨레의 뜻으로 기약한 이 날/ 누가 조국으로 가는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민족의 위대한 상속자/ 아 길이 빛날 서울대학교/ 타오르는 빛의 성전 예 있으니/ 누가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 1971년 4월 2일 서울대학교 관악종합캠퍼스 기공식 축시(학생대표로 축시 발표)

길 / 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사람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맞수 / 정희성
바둑판을 무겁게 만든 건 이유가 있어서일 게다. 장기를 잘 두던 앞집 친구 일남이와 마주 앉으면 저녁 먹으라고 부르러 올 때까지 일어설 줄을 몰랐는데 그걸 늘 못 마땅히 여기던 아버지가 하루는 장기판 앞에 나를 불러 앉혔다. 열 판이면 열 판 아버지는 외통수에 몰려 쩔쩔 매었고 일수불퇴인지라 물려달라는 소리도 못하고 내가 오줌 누러 갔다 와도 얼굴이 벌개진 채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끙끙 앓으며 장기알만 만지작거리시는 것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남들이 늘 하는 대로 따먹은 상(象)이나 마(馬)따위를 딸그닥거리며,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 하고 약을 올렸던 것인데 그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 하며 장기판이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놈의 자식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나중에 혼자 있을 때 가만히 생각해보니 장기판이 너무 가벼워서 장기를 오래 두다보면 사람도 그렇게 경망스러워지는가보다 싶어, 그다음부터는 아버지하고 장기는 안 두고 바둑만 두기로 마음에 다짐을 두었던 것이다.//

안한 신호음 / 정희성
사람들 품속에서 신호음이 울린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리는 저 소리/ 나는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지만/ 남의 안주머니에서 들리는 신호음이/ 이상하게도 나를 불안에 떨게 한다/ 어머니가 암 수술을 받다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고/ 부도를 낸 동생의 빚보증 때문에/ 봉급을 차압해간 대한보증보험의/ 이진우가 거는 전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잘못하면 이 겨울에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식구들이 거리로 나앉을지도 모르는데/ 속수무책인 나는 전화기 옆에 있기가 싫어서/ 한가로운 사람처럼 거리를 쏘다니지만/ 내 마음과 영혼까지 압류해간/ 불안한 신호음은 끝까지 나를 따라다닌다/ 어디로 가야 하나 저승에 가면 거기에도/ 나를 찾는 전화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정희성씨 거기 와 있나요?'/ '그런 사람 없다고 해. 오늘 아침 이승에 갔다고 그래./ 이승으로 가서 다시 안 온다고 그래.'//

저 산이 날더러 -목월 시 운을 빌려 / 정희성
산이 날더러는/ 흙이나 파먹으라 한다/ 날더러는 삽이나 들라 하고/ 쑥굴헝에 박혀/ 쑥이 되라 한다/ 늘퍼진 날 산은/ 쑥국새 울고/ 저만치 홀로 서서 날더러는/ 쑥국새마냥 울라 하고/ 흙 파먹다 죽은 아비/ 굶주림에 지쳐/ 쑥굴헝에 나자빠진/ 에미처럼 울라 한다/ 산이 날더러/ 흙이나 파먹다 죽으라 한다//

숲 / 정희성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가을날 / 정희성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가을의 시 / 정희성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얼마나 황홀한가/ 황홀 속에 맞는 가을은/ 잔고가 빈 통장처럼/ 또한 얼마나 쓸쓸한가/ 평생 달려왔지만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네/ 가여운 내 사람아/ 이 황홀과 쓸쓸함 속에/ 그대와 나는 얼마나 오래/ 세상에 머물 수 있을까//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


그날도 요로코롬 왔으면 / 정희성
감꽃 지자 달린/ 하늘 젖꼭지/ 그대여 날 가는 줄 모르고/ 우리네 사랑 깊을 대로 깊어/ 돌아다보면 문득/ 감이 익겠네//

희망 / 정희성
그 별은 아무데서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어둠속에서 / 정희성

빛 안에 어둠이 있었네/ 불을 끄자/ 어둠이 그 모습을 드러냈네/ 집은 조용했고/ 바람이 불었으며/ 세상 밖에 나앉아/ 나는 쓸쓸했네//

봄날 / 정희성
날 좋다 햇빛 알갱이 다 보이네/ 하늘에서 해가 내려 알을 슬어놓은 듯/ 볕 바랜 이불호청 해 냄새 난다/ 꺄르르 가시나들 웃음소리에/ 울밑에 봉선화도 발돋움하겠네//

산 / 정희성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붉은 꽃 / 정희성
어디쯤일까 어디 쯤일까/ 그리움 가는 길에 발돋움하고/ 누구를 향한 마음에/ 이렇게 몸부림쳐 붉은 꽃일까/ 먼 발치로 사라지는 세월을 두고/ 한 세상 마당귀에 불을 지르네//

소나기 / 정희성
날 기울고 소소리바람 불어 구름 엉키며/ 천둥 번개 비바람 몰아쳐 천지를 휩쓸어오는데/ 앞산 키 큰 미루나무 숲이 환호작약/ 미친 듯 몸 뒤채며 雲雨의 정 나누고 있다/ 나도 벌거벗고 벼락 맞으러 달려나가고 싶다//

당신에게 / 정희성
세상에는 이름 모를 신이 많다/ 나는 자신이다/ 어쩌면 당신도 신/ 당쇼ᅟᅵᆫ이라는 이름의 신인지 모른다//

남주 생각 / 정희성
남주는 시영이나 내 시를 보며 답답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뉘 섞인 밥을 먹듯 하는 어눌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시영이나 나는 죽었다 깨도 말과 몸이 함께 가는 남주 같은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기껏 목청을 높여보았자 자칫 목소리가 따로 놀 테니까 시영이도 그렇겠지만 나는 나대로 감당해야 할 몫이 따로 있기도 하고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건 무슨 변명 같기도 하고 비겁한 듯도 하고 하여튼 일찍 간 남주 생각을 하면 내가 너무 오래 누렸다는 느낌이다//
* 남주 : 김남주(金南柱, 1946~1994) 시인

독경 / 정희성
일하고 돌아와/ 발 씻고/ 나를 마주해 앉다// 빈 마음자리에 차오르는/ 빛!//

희망공부 / 정희성
절망의 반대가 희망은 아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빛나듯/ 희망은 절망 속에 싹트는 거지/ 만약에 우리가 희망함이 적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을 비추어줄까//

하회에서 / 정희성
저녁 무렵 만대루에 올라/ 바라보노라/ 병풍같은 절벽은/ 세상을 막아서고/ 강물은 마을을 둘러 흐르는데/ 이쯤에서 나도 그만/ 다리를 뻗고 싶다/ 저물어 깊어 가는/ 강물을 바라보느니/ 어디선가 고인의/ 글 읽는 소리/ 골이 깊어 다시 돌아가기도/ 어려울 터 글공부나/ 할 밖에 예서 달리/ 무얼 할까//

청도를 지나며 / 정희성
문상할 일이 있어 밀양 가는 길/ 기차가 마악 청도를 지나면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감나무숲/ 잘 익은 감들이 노을젖어 한결 곱고/ 감나무 숲 속에는 몇 채의 집/ 집안에는 사람이 있는지/ 불빛이 흐릿한데, 스쳐 지나는/ 아아, 저 따뜻한 불빛 속에도 그늘이 있어/ 울 밖에 조등(弔燈)을 내다 걸었네//

애월(涯月) / 정희성
들은 적이 있는가/ 달이 숨쉬는 소리/ 애월 밤바다에 가서/ 나는 보았네/ 들숨 날숨 넘실대며/ 가슴 차오르는 그리움으로/ 물미는 소리/ 물써는 소리/ 오오 그대는 머언 어느 하늘가에서/ 이렇게 내 마음 출렁이게 하나//

통점(痛點) / 정희성
매운 것은 맛이 아니라/ 통증이라고 한다/ 아마 사랑도 그렇지 싶다/ 내가 아는 한 사랑에는/ 지울 수 없는 통점이 있다/ 처음 그것은 기분 좋은/ 설렘으로 시작되지만/ 가슴 어디께에 분명한/ 통증으로 온다//

雨期(우기)는 가볍다 / 정희성
오후의 生은 바람이 눕는 방향을 연습하는 시각 같은 것,/ 허름한, 더러 허망한 빛 빼고 어울리는 色 하나 걸치는 것,/ 그리하여 저 비탈의 억새만큼이나 가벼워지려는 것.// 후두두둑 제비 날 듯 장맛비,/ 그러므로/ 雨期는 가볍다.//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 정희성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심 란해서 어디 가 조용히/ 혼자 좀 있다 오고 싶어서/ 배낭 메고 나서는데 집사람이/ 어디 가느냐고/ 생태학교에 간다고/ 생태는 무슨 생태?/ 늙은이는 어디 가지도 말고/ 그냥 들어앉아 있는게 생태라고/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고/ 봄이 영영 다시 올 것 같지 않아/ 그런다고는 못하고//

음지식물 / 정희성
음지식물이 처음부터 음지식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큰 나무에 가려 햇빛을 보기 어려워지자/ 몸을 낮추어 스스로 광량(光量)을 조절하고/ 그늘을 견디는 연습을 오래 해왔을 것이다/ 나는 인간의 거처에도 그런 현상이 있음을 안다/ 인간도 별수 없이 자연에 속하는 존재이므로//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 정희성
너도밤나무가 있는가 하면 나도밤나무가 있다// 그런가 하면 바람꽃은 종류도 많아서 너도바람꽃 나도바/ 람꽃 변산바람꽃 남방바람꽃 태백바람꽃 만주바람꽃 바이/ 칼바람꽃뿐만 아니라 매화바람꽃 국화바람꽃 들바람꽃 숲/ 바람꽃 회리바람꽃 가래바람꽃 쌍둥이바람꽃 외대바람꽃/ 새바람꽃 꿩의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등 종류도 많은데 이들/ 은 하나같이 꽃이 아름답다// 어떤 이는 세상에 시인이 나무보담도 흔하다며 너도 시/ 를 쓰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시인이 많은 게 무슨 죄인가 전/ 국민이 시인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들은 밥을 굶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 은 시인이 정치꾼보다 많기 때문 아닌가//

고척동에서 / 정희성
머리 둘 곳 없는 고척동/ 여인숙에서 뜬눈으로 밤을 세우고/ 새벽이 오기 전 우리는/ 남은 몇 모금 소주로 목을 축여/ 네 이름을 부른다/ 밤이 우리들을 갈라놓은 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갔는가/ 더디고 더딘 새벽이여/ 새벽의 친구여/ 공화국의 밤은 깊고 깊어/ 별은 저리 총총하고/ 하늘 밑 외롭고 적막한 막바지길에/ 우리를 이렇게 세워두는구나/ 담벼락에 기대 너를 기다리며/ 차마 바라보는 구치소의 불빛/ 눈시울 뜨거워라//

그대 무덤 곁에서 / 정희성
내 못 가네 흰빛도 서러울 옷깃에/ 상기 못 놓아 서글픈 손길로/ 그대는 남아서 이 내 마음속에/ 산골 그늘밭에도 살아 있을 봄눈처럼/ 아깝고 깨끗한 사랑으로/ 그대는 남아서/ 흰빛도 차거울/ 그대 그냥 거기 있으니/ 또한 멀기도 멀 내 사랑의 길/ 버리고 간다 하고 내 못가네//

넋두리 / 정희성
시만 쓰면 다냐/ 살림이 기우는데/ 시만 쓰면 다냐/ 공자 말씀에 토나 달고 앉아서/ 술잔에 코를 박고 졸기나 하고/ 남들이 술값 낼 때/ 구두끈만 매면 다냐/ 나라가 꼬이면/ 말이 어지럽고/ 말이 헷갈리면/ 넋도 달아나느니/ 네 말은 뉘 집 개가 물어 가서/ 거렁뱅이 맨발로 떠도느냐/ 헷갈리지 마라,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은 것은/ 한국어가 아니다//

눈 덮인 산길에서 / 정희성
눈이 내리네/ 바람 맞서 울고 섰는 나무들이/ 눈에 덮이네/ 그대와 걷던 산길/ 북한산 기슭의 그 외딴 숫막/ 함께 앉던 그 자리에도/ 눈이 내려 쌓이네/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와도/ 굳은 맹세 변함 없건만/ 괴로워라 지금 여기 없는 그대를 위해/ 나는 술잔을 채울 뿐/ 눈이 오는 날은/ 울고 싶어라/ 그러나 기약한 그날은 갑자기/ 눈처럼 오는 법이 없기에/ 빛나는 아침을 위해/ 나는 녹슨 칼날을 닦으리/ 눈보다 차갑고/ 눈보다 순결한 마음으로/ 깊이 깊이 사랑을 새겨두리//

눈을 퍼내며 / 정희성
눈을 퍼낸다/ 북한산 날맹이에 날새기가 무섭게/ 날마다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갈수록 춥기만한 이 겨울/ 삽을 들고 북한산 눈을 퍼낸다/ 끼니마다 빈 뒤주에 고개를 처박고/ 아내가 숨죽여 어깨를 들먹이면/ 이 병신아, 이 병신아/ 귀뺨을 후리는 북풍에 몰려/ 돌아서서 북한산마루를 보며/ 나는 목침더미 같은 울음을 삼키고/ 삽을 들어 북한산 눈을 퍼낸다/ 퍼내도 바닥이 흰 서러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놈이/ 팔다리만 성해서 무얼 하나/ 공사판엔 며칠째 일도 없는데/ 삽을 들고 북한산을 퍼낼까/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북한산 바닥까지 눈을 퍼낸다//

물구나무서기 / 정희성
뿌리가 뽑혀 하늘로 뻗었더라/ 낮말은 쥐가 듣고 밤말은 새가 들으니/ 입이 열이라서 할 말이 많구나/ 듣거라 세상에 원/ 한달에 한번은 꼭 조국을 위해/ 누이는 피흘려 철야작업을 하고/ 날만 새면 눈앞이 캄캄해서/ 쌍심지 돋우고 공장문을 나섰더라/ 너무 배불러 음식을 보면 회가 먼저 동하니/ 남이 입으로 먹는 것을 눈으로 삼켰더라/ 대낮에 코를 버히니/ 슬프면 웃고 기뻐 울었더라/ 얼굴이 없어 잠도 없고/ 빵만으론 살 수 없어 쌀을 훔쳤더라/ 물구나무서서 세상을 보고/ 멀리 고향 바라 울었더라/ 못 살고 떠나온 논바닥에/ 세상에 원/ 아버지는 한평생 허공에 매달려/ 수염만 허옇게 뿌리를 내렸더라//

백씨(白氏)의 뼈 1 / 정희성
죽은 백씨(白氏)의 뼈 속에서/ 휘파람소리 들린다/ 그 생전에 불어 못 본 휘파람을/ 비바람이 대신 분다/ 죽어 오랜 김대건 신부(神父)의 뼈도 뼈지만/ 개뿔도 믿을 게 없던/ 그의 해골 악문 잇사이에서도/ 바람은 곧잘 치음(齒音)을 낸다/ 엊그제 들에서 주워온 그 흰뼈가/ 가슴 어디 붙어 있던 것인지/ 어느 쪽을 불어도 휘파람소리를 내는/ 신기한 백씨(白氏)의 뼈/ 살아 못 분 휘파람을/ 죽어 전신(全身)으로 부느니 백씨(白氏)여//

버스를 기다리며 / 정희성
주머니를 뒤지니 동전 나온다/ 100원을 뒤집으니 세종대왕 나오고/ 50원 뒤집으니 벼이삭이 나온다/ 퇴근길 버스 정거장에서 동전을 뒤집으며/ 앞에선 여자 궁둥이도 훔쳐보며/ 동전밖에 없어 갈 곳은 없고/ 갈 곳 없어 아득하여라/ 조정에선 이 좋은 날 무엇을 할까/ 나으리들은 배포가 커서 끄떡도 않는데/ 신문에 나온 여공의 죽음을 보고/ 동전밖에 없는 제 자신도 잊은 채/ 울먹이는 못난 나는 얼마나 작으냐/ 말 한마디 큰 소리로 못하고/ 땡볕에 서서 동전이나 뒤집으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다보탑 뒤집으니 10원 나온다/ 주머니를 뒤집으니 먼지 나오고/ 먼지를 뒤집으면 뭐가 나올까/ 생각하며 땡볕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무엇이든 한번 뒤집기만 하면/ 다른 것이 나오는 게 신기해서/ 일없이 일없이 동전을 뒤집는다//

봉화산 / 정희성
당신 떠난 그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당신 떠난 그 자리에/ 사람들이 서성이며 울고 있습니다/ 아아 천둥번개 비바람 지난 뒤에도/ 당신 떠난 빈자리에/ 사람들은 숲이 되어 서 있습니다//
* 노무현(1946~2009) 16대 대통령(2003.2.~2008.2)의 추모시

 

김대중 / 정희성
김대중 대통령/ 서둘러 그대를 칭송하지 않으리/ 이승의 잣대로 그대를 잴 수야 없지// 그대는 나에게 한이고 아쉬움/ 이 아쉬움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우리들의 몫이지만// 그대는 처음 죽는 사람도 아니고/ 이 더러운 현대사 속에서/ 이미 여러 번 살해당한 사람// 나는 전쟁 통에도 불타지 않은/ 금강산 건봉사 불이문(不二門)에 이르러/ 그대의 마지막 부음을 듣는다// 둘이 아니라면 하나/ 하나도 못 된다면 반쪽이지// 통일의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걸어온 길이 뒤집히는 꼴을 보면서/ 그대는 기어이 등을 보이는구나// 아아 노여움을 품고/ 한 시대가 이렇게 가는 거지!// 누가 와서 내 가슴 쓸어주었으면!// 사명대사 동상과 만해 시비(詩碑) 앞에 서서/ 나라 사랑 못 느낄 자 누구랴마는/ 나는 별수 없는 떠돌이 시인// 그대가 끝까지 귀를 열고 기다렸을/ 좋은 소식 전해주지 못한 채/ 고성 외진 바닷가에 이르러/ 마시던 술을 바다에 쏟아 버린다// 그대여 이 경박 천박한 세상 말고/ 개벽 세상에나 가 거듭나시라//
* 김대중(1924~2009) 정치가, 15대 대통령.

첫 고백 / 정희성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을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불망기(不忘記) / 정희성
내 조국은 식민지/ 일찌기 이방인이 지배하던 땅에 태어나/ 지금은 옛 전우가 다스리는 나라/ 나는 주인이 아니다/ 어쩌다 아비가 물려준 남루와/ 목숨뿐/ 나의 잠은 불편하다/ 나는 안다 우리들 잠 속의 포르말린 냄새를/ 잠들 수 없는 내 친구들의 죽음을/ 죽음 속의 꿈을/ 그런데 꿈에는 압핀이 꽂혀 있다// 그렇다, 조국은 우리에게 노예를 가르쳤다/ 꿈의 노예를,/ 나는 안다 이 엄청난 신화를/ 뼈가 배반한 살, 살이 배반한 뼈를/ 뼈와 살 사이/ 이질적인 꿈/ 꿈의 전쟁,/ 그런데 우리는 갇혀 있다/ 신화와 현실의 어중간/ 포르말린 냄새나는 꿈속 깊이// 사월에, 내 친구는 사살당했다/ 나는 기억한다 국민학교 시절/ 그가 책 읽던 소리,/ 그 죽은 지 십여년/ 책을 펴면 포르말린 냄새가 난다/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면/ 죽어서 자유로운 그의 목소리/ 그런데 여기엔 얼굴이 없다/ 눈도, 코도, 입도, 귀도,/ 그런데/ 소리만 들린다/ 오 하느님, 하는 소리만/ 생각난다/ 어젯밤 붙잡혀간 시인의 넋두리,/ 그는 부정한다고 했다/ 세번도 더,/ 조국의 관형사여/ 제 이름에 붙은 관형사/ 시인의 관이 무겁다고/ 머리를 떨구고/ 이제는 아름다운 말도 가락도 다 잊었다던/ 그가 돌아오지 않는 밤이 무섭다/ 그가 돌아올 수 없는 땅이 무섭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 땅에서 사는 내가 무섭다/ 그러나 나는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 오, 기억하게 하라/ 우리들의 이름으로 불러보는/ 자유, 나의 조국아//

사월(四月)에 / 정희성
보이지 않는 것은 죽음만이 아니다/ 굳이 돌에 새긴 피/ 그 시절의 무덤을 홀로/ 지키고 있는 것은 석탑(石塔)뿐/ 이 땅의 정처없는 넋이/ 다만 풀 가운데 누워/ 풀로서 자라게 한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룬 것은 없고/ 죽은 자가 또다시 무엇을 이루겠느냐/ 봄이 오면 속절없이 찾는 자 하나를/ 젖은 눈물에 다시 젖게 하려느냐/ 사월(四月)이여//

쇠를 치면서 / 정희성
쇠를 친다/ 이 망치로 못을 치고 바위를 치고/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실한 팔뚝 하나로 땀투성이 온몸으로/ 이 세상 아리고 쓰린 담금질 받으며/ 우그러진 쇠를 치던 용칠이/ 망치 하나 손에 들면 신이 나서/ 문고리 돌쩌귀 연탄집게 칼 낫/ 온갖 잡것 다 만들던 요술쟁이/ 고향서 올라온 봉제공장 분이년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다던 용칠이/ 떡을 치고 싶으면 용두질치며/ 어서 돈벌어 결혼하겠다던 용칠이/ 밀린 월급 달라고 주인 멱살 잡고/ 울분 터뜨려 제 손 찍던 용칠이/ 펄펄 끓는 쇳물에 팔을 먹힌 용칠이/ 송두리째 먹히고 떠나버린 용칠이/ 용칠이 생각을 하며 쇠를 친다/ 나 혼자 대장간에 남아서/ 고향 멀리 두고온 어머니를 생각하며/ 식모살이 떠났다는 누이를 생각하며/ 팔려가던 소를 생각하며/ 추운 만주벌에서 죽었다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떡을 칠 놈의 세상, 골백번 생각해도/ 이 망치로 이 팔뚝으로 내려칠 것은/ 쇠가 아니라고 말 못하는 바위가 아니라고/ 문고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업보 / 정희성
일찍이 만해 스님이 머물러/ 시심을 닦던 백담사에/ 머리 못 깎은 중/ 일해 전 아무개가 유폐되고/ 그가 서슬 푸르게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온갖 고초를 겪었던 일초선사 고은은/ 유난히 단풍빛도 고운/ 깊어가는 이 가을에/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생각느니/ 아아 어느 시인 말마따나/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이냐//

열쇠 / 정희성
오오냐, 고장난 자물쇠나 고쳐주마/ 목에도 잔등에도/ 팔뚝에도 힘찬 가슴팍에도/ 훈장처럼 열쇠를 걸고/ 금수나 강산 삼천리 방방곡곡/ 가가호호 골목새새/ 오뉴월 숨찬 개같이 헐떡대며/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지폐 한장 받아들고/ 새끼들 양식도 과자도 사야지/ 산등성이나마 숨돌리고 들어갈 대문도/ 열고 들어설 방 한칸도 없어/ 가난은 더 이상 내 훈장이 아니고/ 끝까지 열쇠만이 내 것이구나/ 새끼들아, 세종로바닥 이순신장군처럼/ 이렇게 칭칭 철갑을 두른 애비가/ 신기하냐 무서우냐 왜 아무 말 않고/ 애송아지마냥 눈만 꿈벅대느냐//

우리들의 그리움은 / 정희성
우리들의 믿음은/ 전쟁이 지나간 수수밭/ 죽은 내 형제의 머리맡에/ 미군이 벗어놓은/ 군화 속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소망은/ 끝끝내 결재되지 않을/ 보수정당의 서류함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사랑은/ 알 수 없는 기도와/ 못다 한 노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들의 울음은/ 이 봄에 생생하게 피어날/ 보리밭에 있고// 시퍼렇게 시퍼렇게/ 물어뜯긴 선창과/ 파리하게 떨고 있는 공장의/ 캄캄한 불빛 속에 있어// 우리들의 사랑은 다시금/ 순환하는 계절의 저 눈밭에/ 봄이 와서 붉게 피어날 진달래와/ 참호 속에 얼어붙은 젊은 기침과/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속에 싹터// 그리움은 이다지도/ 시퍼렇게 멍든 풀잎으로/ 너와 나의 가슴 속에 수런대는가// 오오 민주주의여//

유신헌법 / 정희성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국민 되는 요건은/ 민주공화당이 정한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 / 정희성
친구여, 이것은 시가 아니다/ 아무리 수식한다 해도/ 어차피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나와 내 자식의 운명을/ 바로 보마// 내 자식이 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참세상 함께 만들어가는/ 이것은 시가 아니라 싸움임을/ 분명하게 보마// 강철노조의 조합원들이/ 파업한 지하철노조의 조합원들이/ 갇혀 있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한때는 우리들의 교실에서/ 우리와 함께 눈물로 시를 읽던 시절이 있었음을/ 아프게 기억하마// 이것은 시가 아니다/ 아프게 기억하마/ 이 아픔이/ 아닌밤 나와 내 자식의 가슴을 치고/ 배창자 속에 소용돌이쳐/ 피눈물로 서려올 새 세상을/ 바로 보마//

질네야 / 정희성
질네야 질네야/ 비단옷일랑 남에게 주고/ 네 몸 여위어 어디로 가나// 질네야 질네야/ 사랑도 꿈도 잃어버리고/ 네 몸 여위어 비단이 되나// 질네야 질네야/ 비단옷일랑 남에게 주고/ 여윈 몸 서러워 정처없어라//

친구에게 / 정희성
너를 기다린다 나의 오랜 친구여/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나는 어둠이 오는 길목에 서서/ 너를 가둔 감옥의 을씨년스런 벽을 보며/ 오후 다섯시 반의 애국가를 듣는다/ 모든 사람들이 걸음을 멈춘/ 이 삼엄한 정지태의 한순간에/ 오히려 심장은 강하게 뛰고 있음을/ 나는 느끼며 두려워한다/ 두려움 없이 네 이름 부를 수 없고/ 두려움 없이 너를 밝힐 수 없다/ 몸은 노동의 고통으로 쇠약해지고/ 마음은 굶주리는 가족에 대한 염려와/ 차가운 겨울의 분노로 얼어붙을 때/ 오직 한 가지 뜨거운 해방의/ 꿈만으로 마음과 몸을 덥히며/ 시골에서 공장에서/ 신문사 앞에서 법원 뜰에서/ 서성대며 너를 기다리는 동지들을/ 타오르는 불꽃들을 나는 본다/ 누군들 두려움 없이/ 국기 앞에 설 수 있으랴/ 짓밟혀 쫓겨가는 길목마다/ 가슴 찢어 두려운 네 이름 새기고/ 타오르는 온몸 어둠에 던져/ 너를 부른다 자유여 나의 오랜 친구여//

평화 / 정희성
아흔여섯 살 김신묵 권사는 숨을 거두면서/ 내 죽으면 박수치며 보내달라고 했다/ 칠순이 넘은 아들 문목사가/ 잠시 쇠고랑을 풀고 나와 박수로 어머니를 보내고/ 웃으며 감옥으로 돌아갔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세상에 이런 말 못할 평화가 있구나//

하늘을 보다 잠든 날은 / 정희성
법정에 서 있는 친구를 보고 돌아온 날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하늘은 유난히 맑아서/ 나는 새장의 새를 풀어놓았다/ 하늘을 알아버린 탓일까/ 그 작은 눈에 고인 햇빛이 너무 맑아/ 새는 외로워 보였다/ 모든 걸 알아버린 탓일까/ 아직도 하늘이 푸르냐고 묻던/ 그 친구 눈에 패인 그늘이 생각나/ 하늘을 보다 자리에 누운 날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햇빛이 너무 맑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변신 / 정희성
고전의 어느 숲을 지나온 강물 위에/ 지금은 무섭도록 헤진 얼굴이 일렁이는데/ 이것이 글쎄 누구의 얼굴인지/ 이 강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몸을 던지면서/ 생각해 보았는지 몰라./ 죽은 사람과 죽지않은 사람/ 담담한 얼굴을 하고 흘러서는/ 그렇게 쉽사리 돌아 오지는 않을 것// 어느 후광을 따라 나섰을까 조용히/ 등에 칠성판을 깔고 별이나 헤고 있는지/ 내성의 깊이로 꺼져들어간 강/ 그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서/ 우리를 붙잡는 무슨 힘이라도 있는가/ 내가 왜 빠지고 싶은지 나도 몰라// 「바빌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워리가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노라// 침착한 시간의 녹슨 고기를 낚아/ 빛나는 면경처럼 들여다 볼라치면 몰라/ 낯설어진 우리의 얼굴을 우리가 몰라/ 가르쳐 준 것도 귀담아 들은 것도 아닌데/ 부대낀 언덕 저 편에서 누군가 그런다지/ 니힐 니힐리아 부르며 그런다지// 진주남강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놓은/ 보리알 같이 소박한 내 거문고 소리여// 이 어지러운 강변의 오오 산 죽음/ 그대 여인이여,/ 잘리운 손목과 굳은 혀를 들어/ 지금은 돌아와 노래할 때라/ 이렇게 불러보는 나의 노래로/ 너를 파묻고 돌아선 밤 물결은 뒤채고/ 삶은 또 왜 이다지 잔혹하게/ 나를 휘어잡는 것이냐// 광명은 다시 어듬 속에서/ 신지핀 누이마냥 난무하던 적과/ 이방인의 자취를 흡수해 가버렸지만/ 빛은 언제나 음영을 거느리고 찾아들 듯/ 기껏 우리가 찾은 적은 우리의 벗/ 어둠은 항상/ 새로운 형태로 인식되어야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속에서 죽었을까/ 신화와 현실의 어중간에서 우리는 실신한다.// 빛이 외면한 땅속 깊이 욕먕의 불을 넣어/ 그 무던한 밤과 어둠을 지킨/ 우리가 미련한 짐승의 자식인 탓일까/ 마늘과 쑥 대신 풀뿌리 나무껍질을 씹으며/ 너무도 오랫동안 강인(강인)한 여력으로/ 우리는 우리속에서 우리들과 싸워왔다./ 우리?/ 눈물이 나도록 슬픈 상징이여// 한 번 싱싱하게 핀적이 없는 잎들의 내부엔/ 여름같은 이 겨울은 깨칠 수액이 진한채/ 온갖 시새움에 서슬이 시퍼런 신경의 가지끝/ 무고했던 내 백성의 머리,/ 피로에 겨운 스스로의 무게를 가누지 못해/ 저렇게 숱한 나뭇잎으로/ 잊고 싶은, 잊고싶은 기억드러이 나부낀다.// 흡사 성 밑의 가등, 미열이 이는 기류속으로/ 몇마리의 나방이가 어듬을 털며 날아들 듯//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무기력하게 먼들었는가/ 죄많은 왕의 거대한 무덤처럼/ 하늘 가상이로 들어난 능선 그 밑에/ 살아남은 주검들의 형상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또 향나무 제기를 닦고 있다./ 망우리 주목나무 숲에서 슬픔이 살아 오른다./ 시름 시름 시름이 살아 오른다.// 그리고 사월이여, 내 자식은 거리에서 죽었다./ 죽은 이방시인의 싯귀가/ 한국에서 더 절실해지는/ 사월에, 라일락나무숲 독한 향기속에.// 뒤척이는 물결속에선 총탄이 박힌 머리가/ 조국이 무섭다고 중얼거리며 떠오르고/ 목선의 짐대가 바람결에 부딪치며/ 그 옛날 의로운 죽음을 말하고 있을 뿐/ 아무도 그것이 조국의 참된 얼글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족은 혼령들이 속돌에 스민 듯/ 시가에는 해마다 투석전이 벌어지고/ 최루타이 없더라도 사월이여,/ 스스로 우리가 울어야 할 것을 아는데도// 혁명, 오 너의 엇갈린 문맥./ 금 빛 게으른 소가 알 수 없는 음절을 반추하고/ 사미 짐대예 올아서 해금(해금)을 혀거를 드로라// 데모가 나면 어머니 학교에 안 가도 된대요/ 눈이 아픈 걸요 다시 곰이나 될까봐// 눈을 뺀다, 빌어라, 빌어라, 눈을 뺀다// 어쩌면 종말같ㄷ고 어쩌면 시작같은 아침/ 오늘도 혁명, 얄리얄리 출근을 안해도 되는 날// 오늘의 매뉴는 마늘과 쑥/ 또 한번 당신은 변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창 창사 위 비둘기 집은 위태로운 아이러니,//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 안에서 목잘린/ 사슴의 이야기를 전설이라고 생각할 것인지// 밤새 우리는 숨을 족이고 기다렸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 다만 그것을 모르는 채// 일상의 구획된 거리를 빠져나가며/ 나날이 개편되는 우리들,/ 석간의, 늘 위태한 입구에서/ 집적의 우울한 낱말을 손에 쥔다.// 신라의 한 조각 불투명한 기왓장으로/ 사가는 매양 역사를 들여다 보지만/ 곱게 미칠 수 없던 시대의/ 그 갈증나는 아이들은 지금/ 소리없는 전쟁의 기류를 타고/ 하연 껍데기처럼 흐느끼고 있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밤이 기슭에 닿도록 석굴 술집에서/ 마신 술을 퇴게로에서 토하고 나서/ 십자가에 허수아비 얼굴을 걸어놓은 사람들./ 탄흔이 가신 피부 속으로 황달이 스민 듯/ 잎진 나무들 새로 먼 해원을 바라보며/ 영혼의 죽은 나무 이파리를 들춘다.// 이것이 주구의 얼굴인가./ 누구의 얼굴이어야 하는가./ 글쎄, 이것이 정말 거짓말인가 몰라/ 어항 속에서는 물고기가 익사했다는데/ 어느 날 우리가 우리속에서 돌연히 죽을지/ 우리들의 시대에 아이들이 그런다지/ 니힐 니힐리아 부르며 그런다지/ 가르쳐 준것도 귀담아 들은 것도 아닌데/ 노래는 즐겁다, 노래는 끝났다 그런다지/ 그대 오른 손이 다시금 수금을 쥐더라도/ 여인이여,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마디를 풀고 흐를 수 없는 우리,/ 웃기는 웃어도/ 웃으라면 내가 그렇게 웃기는 하여도/ 시시로 파고드는 시름의 주둥이를/ 종이 접듯 안으로 사릴 줄 아는 슬기로/ 슬픔을 접어 하늘에다 날릴 날이/ 다시 노래한 날이 있을까 몰라.//
*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정희성(鄭喜成) 시인
1945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나 용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72년부터 숭문고등학교 교사로 35년 교단을 지키다가 정년 퇴직했다.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변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비, 197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비, 1991), <시를 찾아서>(창비, 2001),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6), <고마워요 미안해요>(화남출판사, 2009), <고래>(책만드는집, 2012), <그리운 나무>(창비, 2013), <고래 2018>(문학나무, 2018) 등이 있다. 제1회 「김수영문학상」, 「시와시학상」, 제16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