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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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6. 29.

어머니 1 / 정한모
어머니/ 지금은 피골만이신/ 당신의 젖가슴/ 그러나 내가 물고 자란 젖꼭지만은/ 지금도 생명의 샘꼭지처럼/ 소담하고 눈부십니다// 어머니/ 내 한 뼘 손바닥 안에도 모자라는/ 당신의 앞가슴/ 그러나 나의 손자들의 가슴 모두 합쳐도/ 넓고 깊으신 당신의 가슴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머니/ 새다리 같이 뼈만이신/ 당신의 두다리/ 그러나 팔십년 긴 역정/ 강철의 다리로 걸어오시고/ 아직도 우리집 기둥으로 튼튼히 서 계십니다./ 어머니!//

어머니 3 / 정한모
어머니가 가꾸시는/ 호박넝쿨이 뻗어나간다// 아침마다 아침마다/ 뼘 반쯤씩 쭉쭉 뻗어나간다// 아들의 장미밭/ 며느리의 일년초 꽃밭을 지나/ 어머니의 호박넝쿨이 뻗어나간다// 비껴서라 비껴서라/ 어머니의 생활이 뻗어나간다/ 어머니의 기운이 뻗어나간다/ 어머니의 보람이 뻗어나간다// 서울의 하늘 아래/ 서울의 담장 안에서/ 아들의 장미밭/ 며느리의 꽃밭을 지나/ 필십년 살아오신 역사의 줄기/ 올해도 도도한 강물같이/ 어머니의 호박넝쿨이 뻗어나간다.//

어머니 6 / 정한모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光澤)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검은 손이여/ 암흑이 광명을 몰아내듯이/ 눈부신 태양을/ 빛을 잃은 진주로/ 진주로 다시 쓰린 눈물로/ 눈물을 아예 맹물로 만들려는/ 검은 손이여 사라져라.//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아버지는 횡단(橫斷)하고 / 정한모
문은/ 온 종일 기다림에서 산다/ 참새 소리와 더불어 나간 영이며 숙이의 란드셀이며/ 아버지의 코오트 자락이 아물거리는/ 햇빛같은 환한 기다림 속에/ 노래 부르는 영어의 입이 있고/ 흐르는 거리, 아버지가 횡단하고// 오늘도/ 두려움과 미소 사이에 서서/ 기다리는 문// 문이 닫힌다는 것은/ 기다림이 끝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하루의 결론이냐// 닫힌 문이 어둠 속에 가라앉고/ 하루의 이야기며/ 숙이의 책이며/ 잠드는 숨결들이/ 따뜻이 피어오르는 잠// 닫힌 창들만이 숨 쉬는/ 바람이 몰려가는 낯설은 골목을 나는 가고/ 어둠 속 지금도 열려 있을 나의 문/ 내가 버려둔 먼 나의 문엔/ 바람이 몰아치는 것일까//

가을에 /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작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쥔 아기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버리는/ 해저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상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주십시오//

그것이 내 것이다 / 정한모
하늘이 무너지는 폭풍우 속/ 天刀를 휘두르는 뇌성벽력 속에서/ 꺾일 듯 휘어질 듯 견디어온 나무/ 드디어 맑게 개인 하늘 아래/ 반짝반짝 윤기나는 이파리들은/ 미풍에 하늘대는 생명의 희열은/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것이다// 봄을 물들이던 꽃잎은 이울어가고/ 검은 숲을 이루던 무성했던 잎들은/ 하나씩 물들어 발 아래 깔리어도/ 가지마다 주렁주렁 흐드러지게 매달려/ 속살 단단하게 익어가는 열매들은/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것이다// 얼어붙은 삼동의 인고를 거쳐/ 캄캄한 밤, 그 긴 불면의 시간을 거쳐/ 드디어 햇살 눈부신 아침/ 말라 굳어진 樹皮를 터뜨리며/ 여리디여린 새로운 생명의 환희로 피어나는/ 희한한 裸木의 강인한 의지는/ 남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내 것이다//

교실 / 정한모
초롱초롱한 눈들이 한곳으로 빛날 때/ 교실은 초록색 짙은 향기를 풍긴다// 집중해오는 의욕의 초점에서/ 나의 점잔은 분해되어// 꽃송이처럼 환한/ 하나하나의 동자 안에 자리잡는다// 제각기 다른 얼굴이 된 내가/ 빤히 나를 쏘아보며 묻는 것이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이냐/ 저 약삭빠른 눈은 내 몸뚱어리를 삼킬 듯 핥고 있다/ 저 시원스런 눈이 나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 무엇인가를... 무엇인가를.../ 뜨겁도록 타는 별들의 빛발 속에서/ 나는 겨우 몸을 가누어 선다// 지난날/ 초록빛 짙은 향기로 가득 찼던/ 어느 교실의 나 같아서/ 밉기도 귀엽기도 한/ 내 과거와/ 이제는 내가 따라갈 수 없는 파릇한 꿈들 앞에서/ 나의 점잔은 다시 기침이 되어 나온다//

멸입(滅入) / 정한모
한 개 돌 속에/ 하루가 소리 없이 저물어 가듯이/ 그렇게 옮기어 가는/ 정연(整然)한 움직임 속에서// 소조(蕭條)한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미루나무의 나상(裸像)/ 모여드는 원경(遠景)을 흔들어 줄/ 바람도 없이// 이루어 온 밝은 빛깔과 보람과/ 모두 다 가라앉은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끝 가지 아슬히 사라져/ 하늘이 된다.//

바람 속에서 / 정한모
1// 바람은/ 발기발기 찢어진/ 기폭// 어두운 산정에서/ 하늘 높은 곳에서// 비장하게 휘날리다가/ 절규하다가// 지금은/ 그 남루한 자락으로/ 땅을 쓸며/ 경사진 나의 밤을/ 거슬러 오른다// 소리는/ 창밖을 지나가는데// 그 허허한 자락은/ 때묻은 이불이 되어// 내 가슴/ 위에/ 싸늘히/ 얹힌다.// 2// 바람은 산 모퉁이 우물 속 잔잔한 수면에 서린/ 아침 안개를 걷어 올리면서 일어났을 것이다/ 대숲에 깃드는 마지막 한 마리 참새의 깃을 따라 잠들고 새벽 이슬잠 포근한 아가의 가는 숨결 위에 첫마디 입을 여는 참새소리 같은 청청한 것으로 하여 깨어났을 것이다./ 처마밑에서 제비의 비상처럼 날아온 날신한 놈과 숲속에서 빠져나온 다람쥐 같은 재빠른 놈과 깊은 산골짝 동굴에서 부시시 몸을 털고 일어나온 짐승같은 놈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그러나 언제든 하나의 체온과 하나의 방향과 하나의 의지만을 생각하면서 나뭇가지에 더운 입김으로 꽃을 피우고 머루넝쿨에 머루를 익게 하고 은행잎 물들이는 가을을 실어온다/ 솔잎에선 솔잎소리 갈대숲에선 갈대 잎 소리로 울며 나무에선 나무소리 쇠에선 쇠소리로 음향하면서 무너진 벽을 지나 허물어진 포대 어두운 묘지를 지나서 골목을 돌고 도시의 지붕들을 넘어서 들에 나가 들의 마음으로 펄럭이고 산에 올라 산처럼 오연히 포효하며 고함소리는 하늘에 솟고 노호는 탄도를 따라 날은다./ 그 우람한 자락으로 하늘을 덮고 들판에서 또한 산정에서 몰아치고 부딪쳐 부서지던 그 분노와 격정의 포효가 지나간 뒤 무엇이 남아 있는가 다시/ 푸른 하늘 뿐 외연한 산악일 뿐 바다일 뿐 평지일 뿐 그리하여 어두운 처마 밑 기어드는 남루한 기폭일 뿐// 바람이여/ 새벽 이슬잠 포근한 아가의 고운 숨결 위에 첫마디 입을 여는 참새소리 같은 청청한 것으로 하여 깨여나고 대숲에 깃드는 마지막 한 마리 참새의 깃을 따라 잠드는 그런 있음으로만 너를 있게 하라/ 산모퉁이 우물 속 잔잔한 수면에 서린 아침 안개를 걷으며 일어나는 그런 바람 속에서만 너는 있어라//

나비의 여행 –아가의 방(房) 5 / 정한모
아기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記憶)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絶壁),/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히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火藥) 냄새 소용돌이,/ 전쟁(戰爭)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恐怖)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이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아가의 방 별사(別詞) 7 / 정한모
누가 눈뜨고 있는가/ 누가 눈물 없이 울고 있는가/ 이 한밤에// 어둠 속/ 마른 나뭇가지 사이/ 지나가는 바람소리/ 가늘한 쇳소리// 또렷하게 반짝이는 별 하나 보인다/ 바람에 떨고 있는 별 하나 보인다// 누가 눈뜨고 있는가/ 누가 눈물 없이 울고 있는가/ 겨울 이 한밤에//

등대가 있는 고도 / 정한모
토실토실 푸른 열매가 매달린/ 동백나무 그늘에 앉아서/ 등대수의 늙은 아버지는/ 졸고 있었다/ 발아래 낭떠러지 암벽 따라 하얀/ 비말(飛沫) 선조(線條)*/ 그 아름다움도/ 파도소리도/ 돌같이 굳어버린/ 늙은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한다// 상피병(象皮病) 부어오른 사내는 눕고/ 아내는 갈퀴 같은 손으로/ 산비탈 돌밭에 김을 맨다// 그래도 밤이 오면/ 바다가 온통 어둠이 되어/ 덮싸이는 밤이 들면은/ 밤이 키워 온 비정(非情)의 별/ 맥박처럼 반짝이는 희한한 광망(光芒)// 어두운 해면을 향하여/ 밤을 향하여/ 거창한 침묵을 향하여/ 절규하는/ 고독의 의지여//
* 비말(飛沫) 선조(線條) : 물방울의 가는 선

고향길 / 정한모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은/ 초록빛 바람이었다./ 날으는 새였다./ 제비의 날개였다.// 휘도는 산모롱이/ 배다리에 이르면/ 들판 건너 저 멀리/ 꿈에서처럼 보이는 마을들.// 터진목 징검다리/ 맑은 물 빠른 물살/ 양지뜸 비선거리/ 하마비는 이제/ 내 키보다 낮아지고// 평천마을 높은 집/ 저기 대청마루에서/ 발돋움 돋움하며/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시던/ 그런 여름날.//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은/ 날으는 새였다./ 지금도 향기로운/ 초록빛 바람이었다.//

길 위에서 / 정한모
늙은 사람들은 어느덧/ 보이지 않는다// 무거운 지식들을 들고/ 바쁜 걸음들이 뒤따른다// 그들이 또 말할 것이다/ 「늙은 사람들은 어느덧/ 보이지 않는다」고//

새벽 1 / 정한모
새벽은/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게만/ 빛이 된다./ 새벽은/ 홰를 치는 첫닭의 울음소리도 되고/ 느리고 맑은 외양간의 쇠방울 소리/ 어둠을 찢어 대는 참새 소리도 되고/ 교회당(敎會堂)의 종(鐘)소리/ 시동하는 엑셀레이터 소리/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도 되어/ 울려 퍼지지만// 빛은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게만/ 화살처럼 전광(電光)처럼 달려와 막히는/ 빛이 된다. 새벽이 된다.// 빛은/ 바다의 물결에 실려/ 일렁이며 뭍으로 밀려오고/ 능선을 따라 물들며 골짜기를 채우고/ 용마루 위 미루나무 가지 끝에서부터/ 퍼져 내려와/ 누워 뒹구는 밤의 잔해들을 씻어 내어/ 아침이 되고 낮이 되지만//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겐/ 새벽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되고/ 소리나기 이전의 생명이 되어/ 혼돈의 숲을 갈라/ 한 줄기 길을 열고/ 두꺼운 암흑의 벽에/ 섬광을 모아/ 빛의 구멍을 뚫는다.// 그리하여/ 새벽을 예감하는 눈만이/ 빛이 된다. 새벽이 된다./ 스스로 빛을 내뿜어/ 어둠을 몰아내는/ 광원(光源)이 된다.//

                  갈대 / 정한모


바람이 분다/ 갈대가 울고 있다.
두고 온 강가에서
강가에서 강가에서 울고 있다./ 아니에요,/
우는 것이 아니에요.
갈대가 된 그리움이 바람이 쓸려
소리를 내네요,
바람이 분다.
두고 온 강가에서/ 갈대가 울고 있다.
내 가슴 속 깊은 반천에서
갈대가 소리 내어 울고 있다.



아름다운 부끄러움은 / 정한모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는/ 너는 네 눈을 감고/ 나는 내 눈을 감으면 된다// 아름다운 부끄러움은/ 차라리 목숨과도 같은 것// 구름의 생리로 부푸는 젖가슴과/ 허벅다리의 야무진 힘과/ 뜨겁게 젖어 물결치는 입술과// 토실하게 잘 익은/ 이 과실의 변두리를/ 어둠이 핥는다//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여백(餘白) 속에 묻혀서/ 나눌 수 없는 미각(味覺)의 샘을 한 입 하여 마시면서/ 너의 맹목(盲目)은 오히려 슬기롭고/ 나는 굴욕(屈辱)조차도 흐뭇한 종일 뿐// 산의 무게 아래 실눈을 감고/ 바다의 움직임에 흔들리는 배가 되고/ 아름다운 기슭의 굴곡(屈曲)을 더듬으며/ 둘이서 찾아내는 마음의 섬// 어둠이 씻어주는 이 순수한 공간(空間)에 누워/ 손끝이나 장심(掌心)에서/ 뜨겁게 살아나는 생명(生命)의 줄기에는/ 꽃이 열리고/ 너는 내 팔을/ 나는 네 가슴을 갖는다// 비슷비슷한 모든 나로부터/ 나를 찾아/ 비슷비슷한 모든 너로부터/ 너를 찾아내어/ 우리는 이제// 이슬진 알알 소담히 열린/ 우리의 석류(石榴)송이를/ 하나로 차지한다// 장미나 라이락의 꽃내음 속을/ 긴 돌담을 끼고 혼자서 돌아가며/ 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던/ 욕망의 날에서부터// 버들가지 물을라 맴도는/ 봄을 지나/ 꽃씨 하늘로 터지는/ 가을과/ 즐겁고 괴로웠던/ 젊은 날의 모든 꽃밭을 지나서// 이제/ 더 호화로울 수 없는 사치와/ 또한 적막과/ 완전(完全)한 망각(忘却)의 심연(深淵)에/ 꽂히는/ 이 전율(戰慄)의 화살// 이것은/ 부끄러움일 수 없다// 아름다운 부끄러움은/ 어둠 속에 열리는 까만 눈동자같은 것// 나도 믿을 수 없는 억센 힘과/ 너조차 헤아릴 수 없는 너의/ 사랑스러움으로 환히 열리는/ 까만 동자 안에/ 우리의 밤을 빨아 들이기 위하여/ 너는 네 눈을/ 나는 내 눈을 감자구나.//

새 / 정한모
연보랏빛 안개의 저편에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날으고 있는/ 한 마리/ 새여// 햇빛을 받아/ 금빛날개를 반짝이며/ 하늘을 누비고// 어둠 속/ 가는 빛으로 선을 그으며/ 내 가슴에 울려오는/ 맑은 바람소리// 문득 눈뜨는 새벽/ 연보랏빛 새벽 안개 저편에서/ 보일 듯 나타날 듯 날으고 있는/ 새여//

설원에서 / 정한모
흩어진 밀알처럼/ 밀어들이 묻힌/ 밀밭 위에도 하얀 눈// 피맺힌 절규와/ 눈물어린 슬픔들이/ 낙엽과 더불어 바람에 쓸리던/ 광장 위에도 하얀 눈// 백지로 펼쳐진/ 이 거대한 망각 위에서/ 사람들은 새하얀 마음으로/ 다시 걸음마를 시작한다// 자욱 내며 소리 내며/ 열고 가는 길// 나도 이렇게/ 다시 출발한다//

눈보라 속에서 / 정한모
그 풍요한 계절의 편력에서/ 너는 돌아왔구나.// 가을과 여름과 봄/ 장려(壯麗)하던 하늘빛/ 이제 자랑스런 보람 이루어/ 하늘과 땅 사이 가득히/ 축제의 코오러스처럼 쏟아지는 것이냐.// 기다리던 날이 날마다/ 어제도 남겨 놓은 피곤한 가슴 속/ 무수히 뚫린 허망한 벌집마다/ 네 순박한 체온 포근히 자리하면/ 잃었던 빛깔 내게로 돌아와 환히 밝다.// 스쳐 가는 사람마다 이웃 같은데/ 떠나간 너도 돌아오는가./ 허무 위에 쌓이는 가상(假像)일지라도/ 잠깐 타오르는 불길일지라도-// 기쁨처럼 밝아오는 내 가슴에/ 이제야 돌아오는 즐거움으로/ 달려오는 숨, 막히도록 마구 달려오는/ 너를/ 여기 눈보라 속 오연(傲然)히 서서/ 달려와 안길 너를 기다리게 하여 다오.//

빈 의자 / 정한모
그날 밤/ 너를 기다리던/ 저녁 밥상이/ 어머니의 가슴에서/ 언제까지나/ 식지 않는 눈물이듯//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책가방을 끼고/ 계단을 내려간/ 마지막/ 네 인사// 오늘도 너는/ 빈 의자 위에/ 착한 그의 눈짓으로/ 돌아와 앉는다//

삼월(三月)의 편지 / 정한모
--보리밭 너머로/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는/ 고향의 뜰악에서/ 오늘은 양말을 벗고/ 하얀 고무신을 신어 보았습니다--// 울타리를 넘어서/ 맨 처음 날아 든// 한 마리/ 노랑 나비// 그 나비를 쫓던/ 어린 봄의 경이(驚異)를// 삼월(三月)은/ 오늘에도/ 이렇게/ 한 장 너의 편지로 보내왔구나.//

심상(心像) - 시인 정한모가 시인 김남조에게 / 정한모
주검 옆에 마련된 목숨 속에도/ 달밤이면 부푸는 숨결이 있었다고/ 어느 가슴 있어 기억이나 해줄 것인가 - 남조 -// 주검이 바다처럼 발 밑에 내려다 보이는/ 목숨의 종점에서/ 무거운 어둠 속/ 멀리 한줄기 별빛으로 영롱하는 밤의 창 같이/ 시와 목숨과 사랑을 그렇게도 알뜰히 말해주던/ 그 까아만 눈이며// 거친 바람 속/ 수정져 가는 대리석처럼/ 미운 것이 더 많은 이 세상에서/ 꿈과 미소와 달밤을 그처럼 청초히 거느리고/ 곱게 가슴 앓던 하아얀 얼굴// 하늘과 성좌와 영원 같은 것/ 바닷가 모래알 헤여보는 마음으로 생각도 해보면서/ 또한 이렇듯 목숨의 강인함을 노래하면서/ 이름 지을 수 없는 그리움 속에 이루어가던 너의 성전.// 열화같이 달아오르는 흥분의 절정. 그런 어지러움 속에서/ 문득 머무는 내성의 고요한 일각// 물농울처럼 퍼져나갈 여운과 가능이 멈추는/ 이 생명의 핵심일 수 있는 동글아미 속에 자리하고/ 안윽히 웃고 있는 얼골.// 53년 6월 8일 정한모//

 



정한모(鄭漢模, 1923년~1991년) 시인, 국문학자
충청남도 부여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일모(一茅). 일본 오사카[大阪]에 있는 나니와 상업학교(難波商業學校)를 졸업한 뒤, 1955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ㄹ르 나와 1959년 동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휘문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8년 동덕여자대학 교수로 부임하였고, 1966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 1988년까지 재직하였다. 문단 등단은 8·15광복 직후 김윤성(金潤成)·구경서(具慶書) 등과 함께 동인지 『백맥(白脈)』을 발간함으로써 이루어졌으나, 본격적인 활동은 1955년『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멸입(滅入)」이 당선된 뒤부터이다. 서울대학교 교수, 문예진흥원장, 노태우 정부 시절에 문공부 장관 등을 지냈다. 시집으로 《카오스의 사족》,《여백을 위한 서정》,《아가의 방》,《새벽》,《아가의 방 별사(別詞)》,《원점에 서서》 등이 있다. 《현대시론》,《한국 현대시 문학사》《한국 현대시의 정수》 등 다수의 학술서가 있다.

 

 

‘월북문인 작품 해금’ 숙원 푼 문단의 해결사

1990년 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시절의 정한모. [중앙포토] 1988년 2월 제6공화국의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면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이며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교수직의 정년을 앞둔 정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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