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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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7. 1.

가족의 휴일 / 박준
아버지는 오전 내내/ 마당에서 밀린 신문을 읽었고/ 나는 방에 틀어박혀/ 종로에나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날은 찌고 오후가 되자/ 어머니는 어디서/ 애호박을 가져와 썰었다/ 아버지를 따라나선/ 마을버스 차고지에는/ 내 신발처럼 닳은 물웅덩이/ 나는 기름띠로/ 비문(非文)을 적으며 놀다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바퀴에/ 고임목을 대다 말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동생 / 박준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세 번 탕탕탕 뛰어 귓속의 강물을 빼내지 않으면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여자아이가, 밤에 소변보러 갈 때마다 강가로 불러낸다고 했습니다 입 속은 껍질이 벗겨진 은사시나무 아래에서도 더러웠고요 먼 산들도 귀울림을 앓습니다// 강에 일곱이 모여 가서 여섯이나 다섯으로 돌아오던 늦은 저녁, 아이들은 혼나지도 않고 밥을 먹습니다 그때 여기저기 흘리던 밥풀 같은 걱정들은 금세 떠오르던 것이었지만요// 한낮 볕들은 깊은 소()의 위와 아래를 뒤섞습니다 물은 그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새로 지어가기도 하고 근처 밭머리에 수수들은 잔기침도 멈추고 일어섭니다// 며칠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아이들로 강가는 다시 분주합니다 북쪽의 바위 위에는 봉분도 올리지 못한 누이들의 무덤가처럼, 그새 푸르르고 파릇해진 입술로 오른손과 왼손을 공손히 모으고 강물로 뛰어들던 동생들도 여럿이었습니다//

종암동 / 박준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느 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쑥국 / 박준
방에/ 모로 누웠다// 나이 들어 말이 어눌해진/ 아버지가 쑥을 뜯으러 가는 동안// 나는 저녁으로/ 쑥과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일 생각을 한다// 내가 남도에서 자란/ 얼굴이 검고 종아리가 두꺼운 사내였다면/ 된장 대신 도다리 한 마리를 넣어/ 맑게 끓여냈을 수도 있다// 낮부터 온 꿈에 그가 보였지만/ 여전히 말 한마디 없는 것에 서운하다// 서향집의/ 오후 빛은 궂기만 하고// 나는 벽을 보고 돌아누워/ 신발을 길게 바닥에 끌며/ 들어올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밀국수 철원에서 보내는 편지 / 박준

분지의 여름밤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밤이 되어도 화기火氣가 가시지 않을 것 같아 저녁밥을 안치는 대신 메밀국수를 사 먹고 돌아왔습니다// 동송으로 가면 삼십 년 된 막국숫집이 있고 갈말로 가면 육십 년 된 막국숫집이 있는데 저는 이 시차를 생각하며 혼자 즐거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말한 제 아버지는 사십 년 동안 술을 드셨고 저는 이십 년 동안 마셨습니다// 돌아오는 길, 문밖으로 나와 연신 부채질을 하던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에게 저녁을 먹었는지 물었습니다 국수를 먹었다고 대답하기도 했고 몇 분에게는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주인집 어른께는 입맛이 없어 걸렀다고 답했다가 "저녁은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거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말에 큰비가 온다고 하니 이곳 사람들은 그 전까지 배추 파종을 마칠 것입니다 겨울이면 그 흰 배추로 만두소를 만들 것이고요// 그때까지 제가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은 먼 시간을 헤아리고 생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 때 저는 입을 조금 벌리고 턱을 길게 밀고 사람을 기다리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더 오래여도 좋다는 듯 눈빛도 제법 멀리 두고 말입니다//

생활과 예보 / 박준
비 온다니 꽃 지겠다// 진종일 마루에 앉아/ 라디오를 듣던 아버지가/ 오늘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파주 / 박준
살아 있을 때 피를 빼지 않은 민어의 살은 붉다 살아생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 아버지가 혼자 살던 파주 집, 어느 겨울날 연락도 없이 그 집을 찾아가면 얼굴이 붉은 아버지가 목울대를 씰룩여가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단비 / 박준
올해 두 살 된 단비는/ 첫배에 새끼 여섯을 낳았다// 딸이 넷이었고/ 아들이 둘이었다// 한 마리는 인천으로/ 한 마리는 모래내로/ 한 마리는 또 천안으로// 그렇게 가도/ 내색이 없다가// 마지막 새끼를/ 보낸 날부터// 단비는 집 안 곳곳을/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밤이면/ 마당에서 길게 울었고// 새벽이면/ 올해 예순아홉 된 아버지와// 멀리 방죽까지 나가/ 함께 울고 돌아왔다//

낙(落) / 박준
그날 아버지가/ 들고 온 비닐봉지// 얄랑거리는 잉어// 잉어 입술처럼/ 귀퉁이가 헐은/ 파란 대문 집// 담벼락마다/ 솟아 있는/ 깨진 유리병들// 월담하듯 잉어는/ 내가 낮에 놀던/ 고무대야에 뛰어들고// 나와 몸집이 비슷했던 잉어// 그날따라 어머니는/ 치마 속으로/ 나를 못 숨어들게 하고// 이불을 덮고 끙끙 앓다가/ 다 죽기 전에 손수 배를 가르느라/ 한밤중에 잉어 내장을 긁어내느라// 탯줄처럼 길게/ 끌려내려오던 달빛// "당신 이걸 고아먹어야지 뭐하려고 조림을 해"// 다음날 아침/ 밥상에 살이 댕댕하게 오른// 그러니까 동생 같은//

태백중앙병원 / 박준
태백중앙병원의/ 환자들은/ 더 아프게 죽는다// 아버지는 죽어서/ 밤이 되었을 것이다// 자정은/ 선탄(選炭)을 마친 둘째형이/ 돌아오던 시간이다// 미닫이문을 열고/ 드러내 보이던// 형의 누런 이빨 같은/ 별들이 켜지는 시간이다//

 

당신이라는 세상 / 박준

술잔에 입도 한번 못 대고 당신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이 많은 술을 왜 혼자 마셔야 하는지 몰라 한다 이렇게 많은 술을 마실 때면 나는 자식을 잃은 내 부모를 버리고 형제가 없는 목사의 딸을 버리고 삼치 같은 생선을 잘 발라먹지 못하는 친구를 버린다 버리고 나서 생각한다// 나를 빈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여백이 고맙다고, 청파에는 골목이 많고 골목이 많아 가로등도 많고 가로등이 많아 밤도 많다고, 조선낫 조선무 조선간장 조선대파처럼 조선이 들어가는 이름치고 만만한 것은 하나 없다고, 북방의 굿에는 옷()이 들고 남쪽의 굿에는 노래가 든다고// 생각한다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버릴 생각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한다// 술이 깬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버리지 못한다 술이 깨고나서 처음 바라본 당신의 얼굴이 온통 내 세상 같다//

 

나란히 / 박준

새벽의 오한은 어깨로 오고 인후와 편도에 농이 오고 눈두덩이가 부어오고 영은 내 목에 마른 손수건을 매어주고 옆에 눕고 다시 일어나 더운물을 가져와 머리맡에 두고 눕고 이상하게 자신도 목이 아파오는 것 같다고 말하고 아픈 와중에도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웃고 웃다보면 새벽이 가고 오한이 가고 흘린 땀도 날아갔던 것인데 영은 목이 점점 더 잠기는 것 같다고 하고 아아 목소리를 내어보고 이번에는 왼쪽 가슴께까지 따끔거린다 하고 언제 한번 경주에 다시 가보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몇 해 전의 일을 영에게 묻는 대신 내가 목에 매어져 있던 손수건을 풀어 찬물에 헹구어 영의 이마에 올려두면 다시 아침이 오고 볕이 들고 그제야 손끝을 맞대고 눈의 힘도 조금 풀고 마음의 핏빛 하나 나란히 내려두고//

뱀사골 / 박준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되는 꿈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대신 꾸어준 태몽일 거라며/ 당신이 웃었습니다/ 늙은 나무에 하나 열려있는/ 복숭아 열매를 따낸 것이 내 태몽이었다고 하자/ 솔향기 짙은 바람이 어디서 훅 불어든 일이/ 자신의 태몽이었다며/ 당신은 한 번 더 웃어보였습니다//

용산 가는 길 -청파동 1 / 박준
청파동에서 그대는 햇빛만 못하다 나는 매일 병을 얻었지만 이마가 더럽혀질 만큼 깊지는 않았다 신열도 오래되면 적막이 되었다 빛은 적막으로 드나들고 바람도 먼지도 나도 그 길을 따라 걸어 나왔다 청파동에서 한 마장 정도 가면 불에 타 죽은 친구가 살던 집이 나오고 선지를 잘하는 식당이 있고 어린 아가씨가 약을 지어준다는 약방도 하나 있다 그러면 나는 친구를 죽인 사람을 찾아가 패를 좀 부리다 오고 싶기도 하고 잔술을 마실까 하는 마음도 들고 어린 아가씨의 흰 손에 맥이나 한번 잡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는 해를 따라서 돌아가던 중에는 그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

2:8 -청파동 2 / 박준
밤이 오래된 마을의 가르마를 타 보이고 있다 청파동의 밤 열에 둘은 가로등 열에 여덟은 창문이다 빛을 쐬면서 열흘에 이틀은 아프고 팔 일은 앓았다 두 번쯤 울고 여덟 번 쯤 누울 자리를 봐두었다 열에 둘은 잔정이 남아 있었다 또 내가 청파동에서 독거니 온실이니 근황이니 했던 말 들은 열에 여덟이 거짓이었다 이곳에서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당신이 보고 있을 내 모습이 보인다 새실새실 웃다가도 괜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둘 다시 당신을 생각해 웃다가 여전히 슬프고 서러운 일들을 떠올리는 모습이 여덟이었다 남은 청파동 사람들이 막을 떠나가고 있 었다 이제 열에 둘은 폐가고 열에 여덟은 폐허였다//

관음(觀音) -청파동 3 / 박준
나는 걸어가기엔 멀고/ 무얼 타기엔 애매한 길을/ 누구보다 많이 갖고 있다/ 청파동의 밤길은 혼자 밝았다가/ 혼자 어두워지는 너의 얼굴이다// 일제 코끼리 전기밥솥으로 밥을 해먹는 반지하 집, 블라우스를 털어 널고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을 시키고 TV의 음량 버튼을 나무젓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무를 집어먹고 엄마 체르니 삼십 번부터는 회비가 오른대 고장 난 흰건반 대신 반음 올려 검은건반을 치며 목이 하얀 네가 말했습니다 그 방 창문 옆에서 음지식물처럼 숨죽이고 있던 내 걸음을 길과 나의 접()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덕분에 너의 음악을 받아 적은 내 일기들은 작은 창의 불빛으로도 잘 자랐지만 사실 그때부터 나의 사랑은 죄였습니다//

별들의 이주(移住) -화포천 / 박준
오월 천변(川邊)에서는/ 멀리 보는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보리 이삭이 패기 시작하면/ 숭어는 겨울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뜹니다// 천변의/ 긴 밭에서// 새들은/ 어제 심은 들깨씨를/ 잘도 파 물어갔고요// 노인은/ 막대기에 양철통을 들고/ 밭으로 나가// 새들을 쫓다가/ 졸다가// 가져간/ 찰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새로 울고 싶은/ 오월의 밤하늘에는// 날아오른 새들이/ 들깨씨를 토해 놓은 듯/ 별들도 한창이었습니다//

능곡빌라 / 박준
몇 해 전 엄마를 잃은 일층 문방구집 사내아이들이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잠을 잔다 벌써 굵어진 종아리를 서로 포개놓고 깊은 잠을 잔다 한낮이면 뜨거운 빛이 내리다가도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들면 덜컥 겁부터 먼저 나는, 떠나는 일보다 머무는 일이 어렵던 가을이었다//

지금은 우리가 / 박준
그때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네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우리는 안녕 / 박준
벽 앞에서 우리는 눈앞이 캄캄해지지./ 벽은 넘지 못하고 눈만 감을 때가 있어./ 힘을 들일수록 힘이 빠지는 순간이 있고,/ 힘을 내도 힘이 나지 않는 날들이 있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네가 보고 싶어.// 안녕?/ 안녕, 안녕은 처음 하는 말이야./ 안녕, 안녕은 처음 아는 말이야./ 안녕은 마음으로 주고 마음으로 받는 말이야./ 그래서 마르지 않아.// 안녕은 같이 앉아 있는 거야./ 안녕은 노래야./ 안녕은 가리어지지 않는 빛이야./ 안녕은 부스러기야./ 안녕은 혼자를 뛰어넘는 말이야./ 안녕은 등 뒤에서 안아주는 말이야./ 안녕은 눈을 뜨는 일이야./ 안녕은 어제를 묻고 오늘 환해지는 일이지./ 안녕은 밥을 나누어 먹는 거야./ 그러다 조금 바닥에 흘리고는 씨익 웃는 거야.// 안녕은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일이고,/ 셈하지 않고 들어주는 일이지./ 그게 무엇이든.// 안녕은 차곡차곡 모으는 마음이야./ 마음을 딛고, 우리는./ 안녕, 안녕.// 한번 눈으로 본 것들은 언제라도 다시 그려낼 수 있어./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을 그리움이라고 하는 거야.// 안녕, 다시 안녕이라는 말은 서로를 놓아주는 일이야./ 안녕, 다시 안녕이라는 말은 뒷모습을 지켜봐주는 일이야./ 안녕, 안녕.// 안녕, 안녕은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안녕, 안녕은 말하기 싫을 때에도 해야 하는 말이야.// 안녕.//

연화석재 / 박준
저녁이면 벽재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 석재상에서 일하는/ 외국인 석공들은 오후 늦게 일어나/ 울음을 길게 내놓은 행렬들을 구경하다// 밤이면/ 와불(臥佛)의 발을 만든다// 아무도 기다려본 적이 없거나/ 아무도 기다리게 하지 않은 것처럼/ 깨끗한 돌의 발// 나란히 놓인 것은/ 열반이고// 어슷하게 놓인 것은/ 잠깐 잠이 들었다는 뜻이다// 얼마 후면/ 돌의 발 앞에서// 손을 모으는 사람도/ 먼저 죽은 이의 이름을 적는 사람도/ 촛불을 켜고 갱엿을 붙여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돌도 부처처럼/ 오래 살아갈 것이다//

오늘의 식단 -영(暎)에게 / 박준
나는 오늘 너를/ 화구에 밀어넣고// 벽제의 긴/ 언덕을 내려와//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말을 건네는 친구에게// 답 대신 근처 식당가로/ 차를 돌린 나는 오늘 알았다// 기억은 간판들처럼/ 나를 멀리 데려가는 것이었고// 울음에는/ 숨이 들어 있었다// 사람의 울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통곡이 아니라//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숨의 소리였다// 너는 오늘/ 내가 밀어넣었던// 양평해장국 빛이라서/ 아니면 우리가 시켜 먹던/ 할머니보쌈이나 유천집냉면 같은 색이라서// 그걸 색(色)이라고 불러도 될까/ 망설이는 사이에/ 네 짧은 이름처럼/ 누워 울고 싶은 오늘// 달게 자고/ 일어난 아침/ 너에게 받은 생일상을 생각하다// 이건 미역국이고 이건 건새우볶음/ 이건 참치계란부침이야// 오늘 이 쌀밥은/ 뼈처럼 희고/ 김치는 중국산이라// 망자의 모발을 마당에 심고/ 이듬해 봄을 기다린다는/ 중국의 어느 소수민족을 생각하는 오늘// 바람은/ 바람이어서/ 조금 애매한// 바람이/ 바람이 될 때까지/ 불어서 추운// 새들이/ 아무 나무에나/ 집을 지을 것 같지는 않은/ 나는 오늘//

좋은 세상 -영아 / 박준
눈은 다시 내리고/ 나는 쌀을 씻으려/ 며칠 만에 집의 불을 켭니다// 섣달이면 기흥에서/ 영아가 올라온다고 했습니다/ 모처럼 얻는 휴가를/ 서울에서 보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난달에는 잔업이 많았고/ 지지난달에는 함께 일하다/ 죽은 이의 장례를 치르느라/ 서울 구경도 오랜만일 것입니다// 쌀은 평소보다 조금만 씻습니다// 묵은해의 끝, 지금 내리는 이 눈도/ 머지않아 낡음을 내보이겠지만// 영아가 오면 뜨거운 밥을/ 새로 지어 먹일 것입니다// 언 손이 녹기도 전에/ 문득 서럽거나/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전에// 우리는 밥에 숨을 불어가며/ 세상모르고 먹을 것입니다//

문상 / 박준
한밤// 울면서/ 우사 밖으로 나온 소들은/ 이곳에 묻혔습니다// 서둘러 캐는 이곳 사람들도/ 여기만큼은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냉이꽃이 소복을 입은 듯// 향을 피울 것입니다//

환절기 / 박준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새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새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장마 - 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 박준
그곳의 아이들은/ 한번 울기 시작하면// 제 몸통보다 더 큰/ 울음을 낸다고 했습니다.// 사내들은/ 아침부터 취해 있고// 평상과 학교와/ 공장과 광장에도/ 빛이 내려/ 이어진 길마다/ 검다고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해남으로 보내는 편지 / 박준
오랫동안 기별이 없는 당신을 생각하면 낮고 좁은 책꽂이에 꽂/ 혀 있는 울음이 먼저 걸어나오더군요.// 그러고는 바쁜 걸음으로 어느 네거리를 지나 한 시절 제가 좋아/ 한 여선배의 입속에도 머물다가 마른 저수지와 강을 건너 흙빛/ 선연한 남쪽땅으로 가더군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땅 황토라 하면 알 굵은 육쪽마늘이며 편지지처럼 잎이 희고 넓은 겨울 배추를 자라게 하는 곳이지요. 아리고 맵고 순하고 여린 것들을 불평 하나 없이 안아주는 곳 말입니다.// 해서 그쯤 가면 사람의 울음이나 사람의 서러움이나 사람의 분/ 노나 사람의 슬픔 같은 것들을 계속 사람의 가슴에 묻어두기가/ 무안해졌던 것이었는데요.// 땅 끝, 당신을 처음 만난 그곳으로 제가 자꾸 무엇들을 보내고 싶은 까닭입니다.//

이름으로 가득한 -중도에서 보내는 편지 / 박준
머지않아 날은/ 어두워질 것입니다// 인적이 끊긴 길에서 뒤를 돌아보는 것은/ 지금껏 온 길을 다시 가야 할 길로 만드는 일이지만// 오늘은 이곳에/ 가장자리가 헌 배낭을 내려둘 것입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유난히 원색을 좋아해서// 이른 저녁부터/ 집 안 선반마다 놓인 그릇들은/ 가난한 제 빛을 밝힐 것입니다// 물론 그쯤 가면/ 당신이 있는 곳에도 밤이 오고// 꼭 밤이 아니더라도/ 허기나 탄식이나 걱정처럼/ 이르게 맞이하는 일들 역시 많을 것입니다//

꾀병 / 박준
유서도 못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동백꽃 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구를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볕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눈썹 -1987년 / 박준
엄마는 한동안/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빛이 잘 안 드는 날에도/ 이마까지 수건으로/ 꽁꽁 싸매었다// 봄날 아침/ 일찍 수색에 나가/ 목욕도 오래 하고// 화교 주방장이/ 새로 왔다는 반점(飯店)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연히 들른 미용실에서/ 눈썹 문신을 한 것이 탈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며/ 밥상을 엎으셨다// 어린 누나와 내가/ 노루처럼 방방 뛰어다녔다//

발톱 / 박준
중국 서점이 있던 붉은 벽돌집에는 벽마다 죽죽 그어진 세로균열도 오래되었다 그 집 옥탑에서 내가 살았다 3층에서는 필리핀 사람들이 주말마다 모여 밥을 해먹었다 건물 2층에는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이 모이는 당구장이 있었고 더 오래전에는 중절수술을 값싸게 한다는 산부인과가 있었다 동짓달이 가까워지면 동네 고양이들이 반지하 보일러실에서 몸을 풀었다 먹다 남은 생선전 같은 것을 들고 지하로 내려가면 어미들은 그새 창밖으로 튀어나가고 아비도 없이 자란 울음들이 눈을 막 떠서는 내 발목을 하얗게 할퀴어왔다//

미신 / 박준
올해는 삼재였다// 밥을 먹을 때마다/ 혀를 깨물었다// 나는 학생도 그만하고/ 어려지는, 어려지는 애인을 만나/ 잔디밭에서 신을 벗고 놀았다// 두 다리를 뻗어/ 발과 발을 맞대본 사이는// 서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말을/ 어린 애인에게 들었다// 나는 빈 가위질을 하면/ 운이 안 좋다 하거나// 새 가구를 들여놓을 때도/ 뒤편에 王 자를 적어놓아야/ 한다는 것들을 말해주었다// 클로버를 찾는/ 애인의 작은 손이/ 바빠지고 있었다// 나는 애인의 손바닥,/ 애정선 어딘가 걸쳐 있는/ 희끄무레한 잔금처럼 누워// 아직 뜨지 않은 칠월 하늘의/ 점성술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낙서 / 박준
저도 끝이고 겨울도 끝이다 싶어/ 무작정 남해로 간 적이 있었는데요// 거기는 벌써 봄이 와서/ 농어도 숭어도 꽃게도 제철이었습니다// 혼자 회를 먹을 수는 없고/ 저는 밥집을 찾다/ 근처 여고 앞 분식집에 들어갔습니다// 몸의 왼편은 겨울 같고/ 몸의 오른편은 봄 같던 아픈 여자와/ 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 메뉴를 한참 보다가/ 김치찌개를 시킵니다// 여자는 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자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저도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봅니다// 남자는 돼지비계며 김치며 양파를 썰어넣다 말고/ 여자와 말다툼을 합니다/ 조미료를 그만 넣으라는 여자의 말과/ 더 넣어야지 맛이 난다는 남자의 말이 끓어넘칩니다// 몇 번을 더 버티다/ 성화에 못 이긴 남자는/ 조미료 통을 닫았고요// 금세 뚝배기를 비웁니다/ 아이들이 보고 싶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잔뜩 낙서해놓은 분식집 벽면에// 봄날에는/ ‘사람의 눈빛이 제철’ 이라고/ 조그맣게 적어놓았습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 박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광장 / 박준
빛 하나 들여보내는 창(窓)이면 좋았다 우리는,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네가 피우다 만 담배는 달고 방에 불 들어오기 시작하면 긴 다리를 베고 누워 국 멸치처럼 끓다가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정도의 글귀를 생각해 너의 무릎에 밀어넣어두고 잠드는 날도 많았다 이불은 개지도 않고 미안한 표정으로 마주앉아 지난 꿈 얘기를 하던 어느 아침에는 옥상에 널어놓은 흰 빨래들이 밤새 별빛을 먹어 노랗게 말랐다//

​유월의 독서 / 박준
그림자가/ 먼저 달려드는/ 산자락 아래 집에는// 대낮에도/ 불을 끄지 못하는/ 여자가 살고// 여자의 눈 밑에 난/ 작고 새카만 점에서/ 나도 한 일 년은 살았다// 여럿이 같이 앉아/ 울 수도 있을/ 너른 마당이 있던 집// 나는 그곳에서/ 유월이 오도록/ 꽃잎 같은 책장만 넘겼다// 침략과 주름과 유목과 노을의/ 페이지마다 침을 묻혔다// 저녁이 되면/ 그 집의 불빛은/ 여자의 눈 밑 점처럼 돋아나고// 새로 자란 명아주 잎들 위로/ 웃비가 내리다 가기도 했다// 먼 능선 위를 나는 새들도/ 제 눈 속 가득 찬 물기들을/ 그 빛을 보며 말려갔겠다// 책장을 덮어도/ 눈이 자꾸 부시던/ 유월이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 박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은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마음 한 철 / 박준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네'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 / 박준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한 문장 정도의 말을 기억하려 애쓰는 버릇이 있다.// "뜨거운 물 좀 떠와라"는 외할아버지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고/ "그때 만났던 청요릿집에서 곧 보세"/ 평소 좋아하던 원로 소설가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죄송스럽게도 두 분의 임종을 보지 못했으므로/ 이 말들은 두 분이 내게 남긴 유언이 되었다./ 먼저 죽은 이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기억해두고 있는 말이 많다./ "다음 만날 때에는 네가 좋아하는 종로에서 보자"라는 말은/ 분당의 어느 거리에서 헤어진 오래전 애인의 말이었고/ "요즘 충무로에는 영화가 없어"/ 이제는 연이 다해 자연스레 멀어진 전 직장 동료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제 나는 그들을 만나지 않을 것이고 혹 거리에서 스친다고 하더라도/ 아마 짧은 눈빛으로 인사 정도를 하며 멀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 말들 역시 그들의 유언이 된 셈이다./ 역으로 나는 타인에게 별 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만 하더라도 아침 업무회의시간에/ '전략' '전멸'같이 알고 보면 끔찍한 뜻의 전쟁용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썼고/ 점심에는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언제 밥 먹자"라는 진부한 말을 했으며/ 저녁부터는 혼자 있느라 누군가에게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살아 남는다./ 꼭 나처럼 습관적으로 타인의 말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검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유서처럼 그 수많은 유언들을/ 가득 담고 있을 당신의 마음을 생각하는 밤이다.//

 

​​동백이라는 아름다운 재료 / 박준
삼사월이면 애역(呃逆)이 잦고 팔뚝이 가려웠다 원동기 소음기에 덴 상처와 짧은 손끝에서 무너지던 새벽과 새로 배운 어려운 욕들이 동백이 피어 있는 나무 아래서 어울렸다 커다란 꽃잎을 접는 대신 서로에게 매달리고 죄어들며 기생하던 시절 벌어진 일들이 이리도 높이 자랐다 도망치듯 떠나온 이곳의 봄날에서도 낯익은 것들이 돋아나더니 다시 송이째 툭툭 떨어졌다//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 박준
믿을 수 있는 나무는 마루가 될 수 있다고 간호조무사 총정리 문제집을 베고 누운 미인이 말했다 마루는 걷고 싶은 결을 가졌고 나는 두세 시간 푹 끓은 백숙 자세로 엎드려 미인을 생각하느라 무릎이 아팠다//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대화의 수준을 떨어뜨렸던 어느 오전 같은 사랑이 마룻바닥에 누어 있다// 미인은 식당에서 다른 손님을 주인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의 솜털은 어린 별 모양을 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은 밥을 먹다가도 꿈결인 양 씻은 봄날의 하늘로 번지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을 생각하다 잠드는 봄날, 설핏 잠이 깰 때마다 나는 몸을 굴려 모아둔 열(熱)들을 피하다가 언제 받은 적 있는 편지 같은 한기를 느끼며 깨어나기도 했던 것이었다//

 

미인의 발 / 박준

반디미용실에서 처음 낙타를 보았습니다 미용실 누나는 쌍봉낙타 봉 같은 가슴 사이에 제 머리를 묻고 비뚤어짐을 가늠했고 저는 실눈만 떴다 감았다 했습니다 왼쪽과 오른쪽을 맞춰 다듬다 머리는 새싹처럼 짧아지고 쥬시후레시를 건초처럼 씹는 미용실 주인의 잔소리에 미숙한 누나는 푹푹 발이 빠졌습니다 누나는 동네 아저씨들 술자리의 기본 안주가 되기도 하고 아주머니들의 커피 잔에서 설탕과 함께 휘저어졌습니다 엄마보다 동네 형들이 반디미용실에 더 많이 들락거렸고요 낙타가 떠난 날은 감나무집 형이 소주를 댓병으로 마신 날이었습니다 형 가슴보다 까맣게 그을린 반디미용실 건물, 석유 말 통과 담뱃불이 반딧불이처럼 날아들어왔다는 미용실 주인은 양귀비 염색약처럼 까맣게 울었습니다 일방통행로로 천천히 걸어나갔습니다 낙타가 사하라로 갔는지 고비로 혹은 시리아 사막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마음을 걷던 발자국은 아직도 남아 저는 요즘도 간혹 그 발자국에 새로 만나는 미인들의 흰 발을 대어보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문병 -남한강 / 박준
당신의 눈빛은/ 나를 잘 헐게 만든다// 아무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해서 수면(水面)은/ 새의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래된 물 길들이/ 산허리를 베는 저녁// 강 건너 마을에/ 불빛이 마른 몸을 기댄다// 미열을 앓는/ 당신의 머리맡에는// 금방 앉았다 간다 하던 사람이/ 사나흘씩 머물다 가기도 했다//

여름의 일 - 묵호 / 박준
연을 시간에 맡겨두고 허름한 날을 보낼 때의 일입니다 그 허름함 사이로 잊어야 할 것과 지워야 할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때의 일입니다 당신은 어렸고 나는 서러워서 우리가 자주 격랑을 보던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비가 쏟고 걸음이 질척이다 멎고 마른 것들이 다시 젖을 때의 일입니다 배를 타고 나갔던 사내들이 돌아와 침과 욕과 돈을 길바닥으로 내던질 때의 일입니다 와중에도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어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던 때의 일입니다 아니 갈 곳 없는 이들만 떠나가고 머물 곳 없는 이들만 돌아오던 때의 일입니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한동안 눈을 감고 있는 일로 당신으로부터 조금 이르게 멀어져보기도 했던, 더해야 할 말도 덜어낼 기억도 없는 그해 여름의 일입니다//

여름에 부르는 이름 / 박준
방에서 독재했다/ 기침은 내가 억울해하고/ 불안해하는 방식이었다// 나에게 뜨거운 물을/ 많이 마시라고 말해준 사람은/ 모두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팔리지 않는 광어를/ 아예 관상용으로 키우던 술집이 있었다// 그 집 이름하고/ 내 이름이 같았다/ 대단한 사실은 아니지만/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의 사람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벽면에서 난류를/ 찾아내는 동안 주름이 늘었다// 여름에도 이름을 부르고/ 여름에도 연애를 해야한다/ 여름에도 별안간 어깨를 만져봐야 하고/ 여름에도 라면을 끓여야 하고/ 여름에도 두통을 앓아야 하고/ 여름에도 잠을 자야 한다// 잠,/ 잠을 끌어당긴다/ 선풍기 날개가 돈다// 약풍과 수면장애/ 강풍과 악몽 사이에서// 오래된 잠버릇이/ 당신의 궁금한 이름을 엎지른다//

목소리 / 박준
어른들도 상철이라고 했고/ 아이들도 상철이라 불렀는데/ 정말 그이의 이름이었는지 잘 모르겠어// 그런데 다리가 조금 불편했어/ 그러면서도 얼마나 잘 뛰는지// 비 오면 비 온다고 소리치며 뛰고/ 누구 집에 낯선 사람 왔다고 뛰고/ 등꽃 피었다고 뛰고/ 그믐이라고, 보름이라고 뛰고// 그중 목소리가 제일 클 때는/ 밥 먹고 뛸 때였어// 뭘 뭐라고 해/ 자기 밥 많이 먹었다고/ 말하면서 뛰는 거지// 너도 그만 일어나서 한술 떠/ 밥을 먹어야 약도 먹지/ 병도 오래면 정들어서 안 떠난다// 일어나, 일어나요//

선잠 / 박준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사월의 잠 / 박준
밥 먹고 가, 도라지 무처놓은 것도 좀 있는데 금방 차려줄게. 도라지 먹고 트림 안 하면 인삼보다 좋다고 하더라. 아니 그건 겨울 무였나. 하여간 내가 조금 전 깜박 잠이 들었다가 꿈을 꿨는데 안개 자욱한 해변이야.// 사람이 하나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얼굴은 안 보이고 뒷 모습만 보여. 몇 번 불러도 돌아보지 않아. 그러면서도 머리도 긁고 종아리도 긁고 뭐가 있는지 몇 번씩 주머니도 뒤적이더라고. 참 나도 나지. 그냥 지나가면 되는데 궁금하기도 하고 오기도 생겨서 몇 결음 뒤에서 기다리고 섰어.// 그런데 요즘 내가 눈도 침침하고 다리도 아프고 하거든. 그게 꿈에서도 그런데. 한참 서 있다가 나도 쪼그려 앉았지. 그러니까 또 새로 기다릴 만하더라고. 올해는 봄꽃도 늦는다는데 사람 하나 기다리는 일이 뭐 어렵나. 그러다 네 소리듣고 깬 거야.// 뭐? 바로 간다고 ? 밥 안 먹고?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 받아. 나중에 네가 갚으면 되지. 괜히 잃어버리지 말고 지금 주머니에 넣어. 그럼 가. 멀리 안 나간다. 가. 그냥 가지 말고 잘 가.//

세상 끝 등대 1 / 박준
내가 연안(沿岸)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아침 손끝으로 먼 바다를 짚어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세상 끝 등대 2 / 박준
내가 연안을 좋아하는 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 조차 내어 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아침 손끝으로 먼 바다를 짚어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 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세상 끝 등대 3 / 박준
늘어난 옷섶을 만지는 것으로 생각의 끝을 가두어도 좋았다 눈이 바람 위로 내리고 다시 그 눈 위로 옥양목 같은 빛이 기우는 연안의 광경을 보다 보면 인연보다는 우연으로 소란했던 당신과의 하늘을 그려보는 일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별의 평야 / 박준
군장(軍裝)을 메고 금학산을 넘다보면 평야를 걷고 싶고 평야를 걷다보면 잠시 앉아 쉬고 싶고 쉬다보면 드러눕고 싶었다 철모를 베고 풀밭에 누우면 밤하늘이 반겼다 그제야 우리 어머니 잘하는 짠지 무 같은 별들이, 울먹울먹 오열종대로 콱 쏟아져내렸다//

천마총 놀이터 / 박준
심야택시 미터기에서 뛰는 말아, 불안감 조성은 경범죄처벌법 제 24조에 의해 처벌될 수 있다 덕분에 나는 동네 입구서부터 내려 걷는 날이 많다 시유지 놀이터엔 비가 내린다 가로등 그늘은 빈 그네를 쉽게 밀 줄을 알고 나는 오래된 말들을 곧잘 불러 탄다// 그때, 수학여행에 못 가고 벤치에서 몸을 김밥처럼 말아넣는 놀이를 하고 있을 때 친구들은 첨성대를 돌아 천마총으로 향하고 있었을 겁니다 뒷산에서부터 저녁이 미끄러져 내려왔습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는 놀이, 혀가 마른 입술을 아리게 만나는 놀이, 시소가 떠난 무게를 기억하는 간단한 놀이, 누가 부르는 것 같아 자꾸 뒤돌아보는 놀이 들을 모래에 섞어 신발에 넣었습니다 네가 돌아오면 '경주는 많이 갔다 와봐서, 바다로 가족여행을 다녀왔어'라고 신발을 털며 말하고 싶었지만// 놀이를 놀이이게 하고 겨울을 겨울이게 하는 놀이터에 봄이 와도 너는 오지 않았으니 나는 풀어놓은 아픈 말들을 한데 몰아 노트에 적는 놀이를 시작했다 흙이 흙을 낳고 말이 새 말을 하는 놀이, 그 말을 자작나무 껍질에 옮겨 적지 않아도 되는 놀이, 흙에 종이를 묻는 놀이// 고분처럼 뚱뚱한 동네 엄마들이 깨어날 시간입니다 저는 아직 제 방으로도 못 가고 천마총에도 못 가보았지만 이게 꼭 거리의 문제만은 아니어서요 결국 무엇을 묻어둔다는 것은 시차(時差)를 만드는 일이었고 시차는 그곳에 먼저 가 있는 혼자가 스스로의 눈빛을 아프게 기다리는 일이었으니까요//

청룡열차 / 박준
정관을 잘못 묶은 후로 남자는 아랫배가 자주 아프다 옻칠이 벗겨진 찬합을 열면서 여자는 월부금을 부어서라도 카메라를 한 대 사고 싶어한다 가족이 앉은 돗자리 위로 청룡열차 선로가 만든 그늘이 옥(獄)의 창살처럼 내린다 아이들은 김밥에 우엉 대신 게맛살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족들이 검고 푸른 서로의 입안으로 김밥을 밀어넣어줄 때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손과 발의 끝에서는 / 박준
까닭 없이 손 끝이/ 상하는 날이 이어졌다// 책장을 넘기다/ 손을 베인 미인은/ 아픈데가 가렵다고 말했고/ 나는 가렵고 아프다고 말했다// 여름빛에 소홀했으므로/ 우리들의 얼굴이 검어지고 있었다// 어렵게 새벽이 오면/ 내어주지 않던 서로의 곁을 비집고 들어가/ 쪽잠에 들기도 했다//

그해 봄에 / 박준
얼마 전 손목을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느냐는 것이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개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다.//

삼월의 나무 / 박준
불을 피우기/ 미안한 저녁이/ 삼월에는 있다// 겨울 무를 꺼내/ 그릇 하나에는/ 어슷하게 썰어 담고// 다른 그릇에는/ 채를 썰어​/ 고춧가루와 식초를 조금 뿌렸다// 밥상에는/ 다른 반찬인 양/ 올릴 것이다// 내가 아직 세상을/ 좋아하는 데에는// 우리의 끝이/ 한 그루 나무와​/ 함께 한다는 것에 있다// 밀어도 열리고/ 당겨도 열리는 문이/ 늘 반갑다// 저녁밥을 남겨/ 새벽으로 보낸다// 멀리 자라고 있을​/ 나의 나무에게도/ 살가운 마음을 보낸다// 한결같이/ 연하고 수수한 나무에게/ 삼월도 따뜻한 기운을 전해 주었으면 한다//

연풍 / 박준
산문을 나오며/ 그는 두 팔을 벌려/ 새의 날갯짓을 따라 했다// 연한 바람은/ 우리 사이로 불어 들고// 그의 외투가/ 바람에 날리고// 외투에서/ 빠져나온 실올이//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던/ 내 입술에 달라붙었다// 저만치나 가는/ 걸음을 쫓는 대신// 나는 숨 바람을/ 후후 입술로 불어내며// 내연이라는 어려움과/ 외연이라는 다름을 오래 생각했다//

우리들의 천국 / 박준
곁을 떠난 적이 있다 당신은 나와 헤어진 자리에서 곧 사라졌고 나는 너머를 생각했으므로 서로 다른 시간을 헤매고 낯익은 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 시간과 공간 사이, 우리는 서로가 없어도 잔상들을 웃자라게 했으므로 근처 어디쯤에는 그날 흘리고 온 다짐 같은 것도 있었다//

가을의 말 / 박준
들면 허리 다 나가 짐은 하체로 드는 거야 등갓 잘 보고 모서리 먼저 바닥에 놓아 아니 왼쪽으로 조금 더 왼쪽으로,/ 가는 말들 지나/ 외롭지? 그런데 그건 외로운 게 아니야 가만 보면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도 외로운 거야* 혼자가 둘이지 그러면 외로운 게 아니다,/ 하는 말들 지나/ 왜 자면서 주먹을 쥐고 자 피 안 통해 손 펴고 자 신기하네 자면서도 다 알아,/ 듣는 말 지나/ 큰비 지나, 물길과 흙길 지나, 자라난 풀과 떨어진 돌 우산과 오토바이 지나, 오늘은 노인 셋 아이 둘 어젯밤에는 웬 젊은 사람 하나 지나, 여름보다 이르게 가는 것들 지나, 저녁보다 늦게 오는 마음 지나, 노래 몇 자락 지나, 과원 지나, 넘어짐과 일어섬 그마저도 지나서 한 이틀 후에 오는 반가운 것들//
* 이문재 시인의 취한 말.

 

가을의 제사 / 박준
아욱 줄기가 연해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제사도 머지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저는 시장에 나가/ 참조기와 백조기를 번갈아 바라보거나/ 알 굵은 부사를 한참 동안 만지다 내려놓고는// 우리가 함께 신어도 좋았을/ 촘촘한 수의 양말을/ 무늬대로 골라 돌아오곤 했습니다//

마음, 고개 / 박준
당신 아버지의 젊은 날 모습이/ 지금의 나와 꼭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잔돌을 발로 차거나/ 비자나무 열매를 주워 들며/ 답을 미루어도 숲길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나는 한참 먼 이야기/ 이를테면 수년에 한 번씩/ 미라가 되어가는 이의 시체를/ 관에서 꺼내 새 옷을 갈아입힌다는/ 어느 해안가 마을 사람들을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서늘한 바람이/ 무안해진 우리 곁으로 들었다 돌아 나갔다// 어깨에 두르고 있던 옷을/ 툭툭 털어 입으며 당신을 보았고// 그제야 당신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으로 맞이하지 않아도/ 좋았을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호수 민박 / 박준
민박에서는 며칠째/ 탕과 조림과 빵으로/ 민물고기를 내어놓았습니다// 주인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제 점심부터는 밥상을 물렸고요// 밥을 먹는 대신/ 호숫가로 나갔습니다// 물에서든 뭍에서든/ 마음을 웅크리고 있어야 좋습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동네의 개들이 어제처럼 긴 울음을 내고// 안개 걷힌 하늘에/ 별들이 비늘 같은 빛을 남기고// 역으로 가는 첫차를 잡아타면/ 돼지볶음 같은 것을/ 맵게 내오는 식당도 있을 것입니다// 이승이라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이곳은/ 공간보다는 시간 같은 것이었고// 무엇을 기다리는 일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2박3일 / 박준
한 이삼일/ 기대어 있기에는/ 슬픈 일들이 제일이었다// 그늘에서 말린/ 황백나무의 껍질을/ 달여 마시면// 이틀 안으로 기침이 멈추고/ 열이 내렸지만// 당신은 여전히 올리가 없었다// 오늘은 나와 어려서/ 함부로 입을 대던 아이의/ 연담(緣談)이 들려와// 시내로 가는 길에/ 우편환을 보낼까 하다/ 나서지 않았다// 이유도 없이 흐려지는/ 내 버릇도/ 조금 고쳐보고 싶었다//

안과 밖 / 박준
그 창에도 새벽 올까/ 볕 들까/ 잔기침 소리 새어 나올까/ 초저녁부터 밤이 된 것 같다며 또 웃을까/ 길게 내었다가 가뭇없이 구부리는 손 있을까/ 윗옷을 끌어 무릎까지 덮는 한기 있을까/ 불어낸 먼지들이 다시 일어 되돌아올까/ 찬술 마셨는데 얼굴은 뜨거워질까/ 점점 귀가 어두워지는 것 같을까/ 좋은 일들을 나쁜 일들로 잊을까/ 빚도 얼룩 같을까/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 버릴까/ 그래서 나도 버릴까/ 그래도 앉혀두고 한 소리 하고 싶을까/ 삼키려던 침 뱉을까/ 바닥으로 겉을 훑을까/ 계수나무 잎은 더 동그랗게 보일까/ 괜찮아져라 괜찮아져라/ 배를 문지르다가 이내 아파서 발끝이 오므라들까/ 펼친 책은 그늘 같아지고/ 실눈만 떴다 감았다 할까/ 죄도 있을까/ 아니 잘못이라도 있을까/ 여전히 믿음 끝에 말들이 매달릴까/ 문득 내다보는 기대 있을까/ 내어다보면 밖은 있을까//

숲 / 박준
오늘은 지고 없는 찔레에 대해 쓰는 것보다 멀리 있는 그 숲에 대해 쓰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고요 대신 말의 소란함으로 적막을 넓혀가고 있다는 그 숲 말입니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고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거라고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베인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입니다 그러다 겨울의 답서처럼 다시 봄이 오고 '밥'이나 '우리'나 '엄마' 같은 몇 개의 다정한 말들이 숲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 먼 발길에 볕과 몇 개의 바람이 섞여 들었을 것이나 여전히 그 숲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겨울비 / 박준
비는 당신 없이 처음 내리고 손에는 어둠인지 주름인지 모를 너울이 지는 밤입니다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광장으로 마음은 곧잘 나섰지만 약을 먹기 위해 물을 끓이는 일이 오늘을 보내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한결 나아진 것 같은 귓병에 안도하는 일은 그 다음이었고 끓인 물을 식히려 두어 번 저어나가다 여름의 세찬 빗소리를 떠올려보는 것은 이제 나중의 일이 되었습니다//

광(光) / 박준
이게 진짜지 말입니다 물광이 빛나니, 불광이 깨끗하니 하는 얘기는 이제 고향 앞으로 갓, 이지 말입니다 이건 물불을 안 가리는 광이라서 말입니다 제가 지난 휴가 때 용산역을 지나는데 말입니다 거짓말 아니고 말입니다 바닥에 엎어 자던 노숙자 아저씨가 제 군화 빛에 눈이 부셔 깼지 말입니다// 우선 구두 약통에 불을 질러버리고 말입니다 불로 지져둔 군화에 약을 삼삼하게 바르지 말입니다 바르고 바르고 약이 마르면 또 바르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흠집을 데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지 말입니다 깊게 파인 흠집을 약으로 메우는 것은 신병들이나 하는 짓 아닙니까 그렇게 하고 작업이라고 하면 그 약만 떨어져나오지 말입니다// 흠집은 흠집이 아닌 곳과 똑같은 두께로 약을 발라야지 말입니다 벗겨져도 같이 벗겨지고 덮여도 같이 덮이는, 흠집이 내가 되고 내가 흠집이 되는 저희 어머니도 서른셋에 아버지 보내시고, 그때부터 아예 아버지로 사시지 말입니다 지난 휴가 때도 얼굴도 몇 번 못 뵙고 그나저나 이번에 효리 누나 춤 보셨습니까? 막 골반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데 말입니다 아, 다 바른 다음 말입니까?// 이제 약이 이렇게 먹어들었으면 여기에 물을 한 방울씩 털고 헝겊을 손가락에 두르고 같은 방향으로 밀고 나가야지 말입니다. 김병장님 그런데 참 신기하지 말입니다 참말로 더는 못 해먹겠다 싶을 때, 이렇게 질기고 징하게 새카만 것에서 광이 낯짝을 살 비치니 말입니다//

오름 / 박준
산간에 들어서야/ 안개는 빛과 나에게/ 품을 내주었다// 서쪽으로 곧장 내려가면/ 홍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마을에/ 오래 전 큰 병이 돌앗고// 해안으로 가면/ 사람들이 사람들을 죽인 곳도 있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에서도/ 당신은 신록에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사실 꽃 지고 열매 맺힌 이 길을/ 다른 사람과 함쎄 ㄷ걸은 적이 있었다// 한번은 수국이 피어 있었고/ 다른 한번은 눈이 내렸다// 근처에 넓은 목자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나의 무렵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 당신의 걸음은 빠르기만 했다​//

언덕이 언덕을 모르고 있을 때 / 박준
저녁 찬거리는 있냐는 물음에 조금 머뭇거렸습니다 민박집 주인은 턱으로 언덕 채마밭을 가리킵니다// 나는 주인에게 알부민 양철통을 재떨이로 쓰고 계시던데 혹시 간(肝)이 안 좋으시냐 물으려다 말고 언덕을 올랐습니다 근처에 분명 고추밭이 있을 것 같은데 언덕에서 해매입니다// 언덕이 튼 살 같은 안개를 부여잡고 있을 때 반팔을 입고 나가기로 한 조금 전을 후회했다고 언덕이 언덕을 모르고 있을 때 제 몸의 한기를 그 자리에 벗어두고 떠난 그녀를 생각했다고 말하기로 합니다// 변심한 애인들의 향기는 좋고 나는 살아서 나를 다 속이지 못했다라고도 말하기로 합니다 덧셈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간밤에는 달게 잤습니다, 라고 연이어 말 할 때 나는 저녁의 억양과 닮아갑니다// 나는 혼잣말을 할 때면/ 꼭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오래 비어 있던 내 손을 보고 있었는지 주인이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가파른 경사에 닿기 전에 서둘러 상추 몇 잎을 따 언덕을 내려갑니다// 방으로 돌아와서는 나도 같이 텅 비어서 비어 있는 상(像)들이 누군가를 부를 때 짓던 표정들을 따라 지어보기도 했습니다//

나의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 박준
창문들은 이미 밤을 넘어선 부분이 있다 잠결이 아니라도 나는 너와 사인(死因)이 같았으면 한다// 이곳에서 당신의 새벽을 추모하는 방식은 두 번 다시 새벽과 마주하지 않거나 그 마주침을 어떻게 그만두어야 할까 고민하다 잠이 드는 것// 요와 홑청 이불 사이에 헤어 드라이어의 더운 바람을 틀어넣으면 눅눅한 가슴을 가진 네가 그립다가 살 만했던 광장(廣場)의 한때는 역시 우리의 본적과 사이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고// 나는 냉장고의 온도를 강냉으로 돌리고 그 방에서 살아나왔다// 내가 번듯한 날들을 모르는 것처럼 이 버튼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맥주나 음료수를 넣어두고 왜 차가워지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낯빛을 여관의 방들은 곧잘 하고 있다// “다시 와, 가기만 하고 안 오면 안 돼”라고 말하던 여자의 질긴 음성은 늘 내 곁에 내근(內勤)하는 것이어서// 나는 내 낯선 방들에서도 금세 잠드는 버릇이 있고 매번 같은 꿈을 꿀 수도 있었다//

호우주의보 / 박준
이틀 내내 비가 왔다// 미인은 김치를 자르던 가위를 씻어/ 귀를 뒤덮은 내 이야기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 꼭 오래전 누군가에게 받은 용서 같았다// 이발소에 처음 취직했더니/ 머리카락을 날리지 않고/ 바닥을 쓸어내는 것만 배웠다는/ 친구의 말도 떠올랐다// 미인은 내가 졸음을/ 그냥 지켜만 보는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미인이 새로 그리고 있는/ 유화 속에 어둡고 캄캄한 것들의/ 태(胎)가 자라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그날 우리는 책 속의 글자를/ 바꿔 읽는 놀이를 하다 잠이 들었다// 미인도 나도/ 흔들리는 마음들에게/ 빌려온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

눈을 감고 / 박준
눈을 감고 앓다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돌아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역(驛)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넣고 있습니다//

맑은 당신의 눈앞에, 맑은 당신의 눈빛 같은 것들이 / 박준
구미로 간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구미에는 군화 끈을 목에 걸고 죽은 고참이 살았고 아버지가 세 달이나 임금을 받지 못한 농공 단지가 있고 세상 끝의 맛을 낸다는 음식점들이 있다 얼마 전 우연히 만난 친구도 근방 공단에 새 직장을 얻었다고 했다 구미로 가는 길에서 나는 죽은 고참이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를 부른다 취한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와 엎은 밥상, 흘러내린 반찬들을 하나하나 기억해본다 봄에는 살아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날들이 있다고 믿는다 유난히 끝을 잘 맺지 못하는 나의 습관을 그대로 둔다// 구미로 가는 길, 아니 어딘가로 처음 가는 길은 언제나 멀어서 나는 더 먼 걸음을 하고 있을 당신의 눈을 오래 기릴 수 있다 그 당신의 눈앞에도 맑은 당신의 눈빛 같은 것들이 얼핏 내비쳤으면 한다//

비 / 박준
그는 雨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나는 飛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너는 다만 슬프다고(悲) 했다.//

입춘 일기 / 박준
비가 더 쏟기 전에 약국에 다녀왔습니다 큰길에는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제 동네는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처연凄然이 가까워졌다면 기억은 멀어졌다"라는 메모를 해두었습니다 비를 맞듯, 달갑거나 반가운 일 없이 새날을 맞고 있었습니다//

옷보다 못이 많았다 / 박준
그해 윤달에도 새 옷 한 벌 해 입지 않았다 주말에는 파주까지 가서 이삿짐을 날랐다 한 동네 안에서 집을 옮기는 사람들의 방에는 옷보다 못이 많았다 처음 집에서는 선풍기를 고쳐주었고 두 번째 집에서는 양장으로 된 책을 한 권 훔쳤다 농을 옮기다 발을 다쳐 약국에 다녀왔다 음력 윤삼월이나 윤사월이면 셋방의 셈법이 양력인 것이 새삼 다행스러웠지만 비가 쏟고 오방(五方)이 다 캄캄해지고 신들이 떠난 봄밤이 흔들렸다 저녁에 밥을 한 주걱 더 먹은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새벽이 지나도록 지지 않았다 가슴에 얹혀 있는 일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인천 반달 / 박준
혼자 앓는 열이/ 적막했다// 나와 수간(手簡)을/ 길게 놓던 사람이 있었다// 인천에서 양말 앞코의/ 재봉 일을 하고 있는데// 손이 달처럼 자주 붓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나는 바람에 떠는 우리 집 철문 소리와/ 당신의 재봉틀 소리가/ 아주 비슷할 거라 적어 보냈다// 학교를 졸업하면/ 인천에 한번/ 놀러가보고 싶다고도 적었다// 후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에/ 흰 양말 몇 켤레를 접어 보내오고/ 연락이 끊어졌다// 그때부터 눈에/ 반달이 자주 비쳤다// 반은 희고/ 반은 밝았다//

마음이 기우는 곳 / 박준
열무는 거두었는가? 나는 밭은 커녕 광에도 못 들어가보고 밤차 타고 광주 왔어야 긍께 지난번 그 대학병원 여기 인연이 징해 시아버지 시어머니 여기서 보내드렸지 애들 아버지도 보름 입원했다가 여기서 갔지 재작년에 큰애기 암 수술 여서 했지 민옥이? 민옥이가 원무과 그만둔 지가 언젠디 민옥이 타령이여 지 엄마까지 데리고 이민 갔다니까 이제 병원비도 안 깎아주제 근다고 어떻게 사람이 신세만 지고 나 몰라라 하는가 몸 아프고 병들 적마다 쪼르르 와서 앓다 가던 곳인데 좋은 일로도 한 번 와야 쓰지 나무도 처음 기운 쪽으로 자라는 법인게 그려 딸, 요즘 애들은 딸이 더 좋다 하대 아니 예정일은 며칠 남았는디 어젯밤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야야 시방 전화 끊어야 수술 끝난 듯싶소 아침저녁으로 달구새끼 모이 좀 주고 응응 욕보소잉//

미로의 집 / 박준
역과 연결된 지하상가로 들어가 팔 번 출구로 나온 다음 그대로 오 분 정도 걸어오면 전주회관이 나오고 그 건물을 끼고 우측으로 더 걸어오면 안경운이 나오는데 거기서 길을 건너 두번째 골목으로 들어오면 내가 살고 있는 붉은 벽돌집이 있다 그 집의 오전에는 해가 들고 오후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천변 아이 / 박준
게들은 내장부터 차가워진다// 마을에서는 잡은 게를 바로 먹지 않고/ 맑은 물에 가둬 먹이를 주어 가며/ 닷새며 열흘을 더 길러 살을 불린다// 아이는 심부름 길에 몰래/ 게를 꺼내 강물에 풀어준다// 찬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에 가는 한밤에도// 낮에 마주친 게들이 떠올라/ 한두 마리 더 집어 들고 강으로 간다.//

​멸치 / 박준
멸치 상자에서 작은 새우를 몇 개 골라낸 일로 기뻐했다 팬에 기름을 두르지 않고 약한 불로 볶아내면 비린내가 가신다 거처를 뒤집을 때마다 나는 영원이라는 말을 떠올렸지만 연민과 자생과 넠이라는​ 말을 주로 골랐다 천식약을 늘 챙겨 먹던 당신은 이가 무를 것이고 내일은 온종일 바닷바람을 맞다 방으로 돌아오겠다 잔기침이 나오려 헐 때마다 목을 가다듬어 당신이 내던 기침 소리를 흉내 내보면 곧 돌아올 메아리가 반갑기도 할 것이다//

큰 눈, 파주 / 박준
파주에 와서야/ 시간을 긴 눈으로 본다// 아침에는/ 두텁고 무거운 이불을/ 개지 않아도 되어 좋았고// 점심에는/ 개를 잡았다며/ 아랫집에서 수육을 삶아 왔다// 아버지에게는/ 단호박을 쩌 온 것이라고만 말해두었다// 수육이 담겨 있던 접시를 씻어/ 아랫집으로 간다// 그 집 마당에는/ 이제 혼자 묶여 있는 개가// 흰두개골을 옆에 두고/ 언 땅을 자꾸만 파 내려가고 있었다// 내일은 큰 눈이/ 온다고 하고 그러면/ 나에게도 그 개에게도// 발에 밟히는 눈의 소리가/ 재미 있게 들릴 것이다//

잠의 살은 차갑다 / 박준
깊은 잠에 빠진 살은 차다// 간장에 양지를 졸이는 꿈을/ 며칠 이어 꾼 것을 두고/ 나는 마음으로 즐거워했다// 으레 그럴 때면/ 외투를 한 겹 더 입었다// 겨울옷들의 소매는 언제나 길고/ 나는 삐져나온 손끝을 보며// 얼마 남지 않은 욕실의 치약과/ 굳은 치약을 힘주어 짜냈을/ 안간힘에 대해 생각했다// 물건을 새로 뜯지 못하는/ 나의 버릇을 병이라기보다는/ 몸가짐이라 부르고 싶었다// 이 겨울과 밤과 잠과/ 아직 이른 순과 윗바람 같은 것들은// 출현보다 의무에 가까웠으므로/ 불안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살 / 박준
아이를 가졌다는 묻아의 걸음은 분주했습니다 '여기서부터 길이 좁아지니 자네는 따라오지 마시게, 기운이 아직 남았거든 절이나 더 올리고 있게' 처음 와보는 구례의 낯선 산에는 지난 해 내린 잔설이 그득했습니다 잔설은 봄을 맞으면서 저마다 색을 가졌고 저는 입으로 바닥을 후후 불어내다가 이마를 낮게 대었다가 떨어진 편백나무의 껍질이나 만지작거렸습니다 북쪽의 절벽 위로 올라간 무당이 나뭇가지 끝에 제 속옷을 묶어두고 다시 절벽 반대편으로 가 당신 몫의 속옷을 태웠습니다 당신이 입은 적 없고 입을리도 없는 저 희고 평평한 속옷, 사실 저는 당신이 저 희고 평평한 속옷을 입을 때까지 함께 살아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같이 오래 살아서 당신이 끝끝내 숨겨오던 것들에게 우리가 함께 하지못한 그해 여름이나, 폐가 아픈 내 가족의 내력이나, 연한 나의 마음들을 변화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눈 같은 제가 하늘로 날고 날아들고 날아가고 무당은 비탈을 내려오다 말고 아랫배에 손을 오래 짚었습니다//

바위 / 박준
마름 없는 물이 흘러나오던 바위 아래에는 녹빛의 작은 소沼도 하나 있었습니다 밤이면 아이들이 서로의 서투름을 가져와 비벼대었고 새벽에는 무구巫具들이 가지런히 놓읻너 곳입니다 촛농과 술병과 인간의 기도와 아린 혀들이 오방으로 섞였습니다// 어느 해 겨울부터 바위에는 부처가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한 젊은 무당이 그려두고 간 부처의 그림이 가부좌를 틀고 잔설을 덮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와 눈이 많았던 몇 해가 더 지나자 아이들은 바위 앞에 겁을 벗어두고 시내로 떠났습니다 빛에 바랜 부처의 상반신이 먼저 지워졌고 무당들도 바위로 오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바위에 그려진 부처 그림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이 넓어지려 넓어진 것이 아니고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듯 흐릿해지는 일에도 별다른 뜻이 있을까마는// 다만 어떤 예의라도 되듯 바위 밑 여전히 진한 녹빛을 내는 소가 쉴 새 없이 몸을 뒤집고 있었습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 박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당신의 연음(延音) / 박준

맥박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답장을 쓰다 말고// 눅눅한 구들에/ 불을 넣는다// 겨울이 아니어도/ 사람이 혼자 사는 집에는/ 밤이 이르고// 덜 마른/ 느릅나무의 불길은/ 유난히 푸르다// 그 불에 솥을 올려/ 물을 끓인다// 내 이름을 불러주던/ 당신의 연음(延音) 같은 것들도// 뚝뚝/ 뜯어넣는다// 나무를 더 넣지 않아도/ 여전히 연하고 무른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새벽에 걸려온 전화 -이문재 시인 / 박준

슬퍼서 전화했다. 가장 슬픈 일은 장소가 없어지는 일이다. 그러면 어디에 가도 그곳을 찾을 수 없다. 너는 어디 가지 말아라. 어디 가지 말고 종로 청진옥으로 와라. 지금 와라.//

 

광장 / 박준

빛 하나 들여보내는 창()이면 좋았다 우리는,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네가 피우다 만 담배는 달고 방에 불 들어오기 시작하면 긴 다리를 베고 누워 국 멸치처럼 끓다가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정도의 글귀를 생각해 너의 무릎에 밀어넣어두고 잠드는 날도 많았다 이불은 개지도 않고 미안한 표정으로 마주앉아 지난 꿈 얘기를 하던 어느 아침에는 옥상에 넣어놓은 흰 빨래들이 밤새 별빛을 먹어 노랗게 말랐다//

​입속에서 넘어지는 하루 / 박준
길눈이 어두운 겨울이나/ 사람을 잃은 사람이/ 며칠을 머물다 떠나는 길// 떠난 그 자리로/ 가난한 밤이 숨어드는 길// 시레기처럼 마냥 늘어진 길// 바람이 손을 털고 불어드는 길// 사람의 이름으로/ 지어지지 못하는 글자들을/ 내가 오래 생각해보는 길// 골목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림자로 남고// 좁고 긴 골목의 끝을// 달이 크고/ 밝은 날이면/ 별들도 잠시 내려와// 인가(人家)의/ 불빛 앞에서/ 서성거리다 가는 길// 다 헐어버린 내 입속처럼/ 당신이 자주 넘어져 있는 길//

 

돌아오던 날 / 박준

그날 봄에 나는 남해의 어느 소읍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산문집 한 권 분량을 다 쓰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문제는 평소 잘 써지지 않는 글이 타지에 간다고 갑자기 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나는 그곳에서 글을 쓰는데 골몰하는 대신 낯선 환경에 경계하고 적응하느라 분주했고, 그곳에서 만난 새로운 환경 가운데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찾아내고 싫어하는 것으로부터 애써 마음을 피해 다니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곳에서 한 끼에 반찬을 아홉 개나 주는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 식당의 할머니를 좋아했다. 사이다 버튼을 눌러도 콜라가 나오는 느티나무 아래 음료자판기를 좋아했고 그 바로 옆 200원짜리 일반 커피와 300원짜리 고급 커피 맛이 전혀 다르지 않은 커피 자판기를 좋아했다.// 반면 그 식당에서 며칠씩 외상을 하고 값을 치를 때마다 꼭 이삼천원씩 멋대로 깍아 내는 한 중년의 남자를 싫어했다. 하루 종일 흰 개를 묶어두면서도 매번 물그릇을 마르게 두는 카센터 주인과 직원도 싫어했다. 그들은 주로 카센터 사무실 안에 있다가 들어오는 자동차를 보고 짖는 개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오곤 했는데 반려동물에 관한 의식은 고사하고 동업자에 대한 예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가장 자주 한 일은 걷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걸을 때도 있었고 끼니를 거르고 걸을 때도 있었다. 봄볕을 맞으며 걸었고 비가 오는 날에도 걸었다. 길을 걷고 있는 시간만큼은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나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 내가 스스로 세운 목표에 대한 중압감 같은 감정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어 좋았다. 대신 발이 아프다, 목이 마르다, 봄 버드나무는 수피 색이 유독 진하다, 같은 본능적이면서도 당연한 생각을 자주 했고, 오래전 내가 누군가에게 했던 허언을 되새기거나 보고 싶은 사람을 두엇쯤 떠올려보기도 했다.// 여정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던 날, 나는 처음 각오했던 한 권 분량의 산문 원고를 쓰기는커녕 몇 개의 단상만 메모해둔 채 별 소득 없이 서울로 향해야 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낯설기만 했던 그곳 풍경과 사람들이 더없이 친숙해졌다는 것, 얼굴과 목이 많이 탔다는 것, 그리고 평소 지겹고 답답하기만 했던 원래 내 삶의 일상과 거처가 조금 그리워졌다는 것이었다.// 또다시 봄이다. 낯선 어딘가로 떠나기에도 좋고, 익숙한 삶으로 돌아가기에도 좋은 계절이 우리에게 새로 왔다.//

 

모래내 그림자극 / 박준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본 골목은, 왼편 담벼락과 오른편 옹벽처럼 닫혀 있다 막 올려다 본 하늘이 골목처럼 어두워지고 있다// 어느 하루같이 환하게 번지기 시작하는 외등을 보면 사람의 몸/ 에서 먼저 달려나오는 것이 있다 오늘도 골목에서 너는 그림자였고 나는 신발을 꺾어 신은 배역을 맡았다// 서로 다른 시간에서 유영하던 그림자들이 한 귀퉁이씩 엉키고/ 포개지는 일은 몸의 한기를 털어내려 볕 아래로 모이는 일과 같/ 다 집시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림자극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 // 나와 처음으로 스친 그림자는 담에 널린 담요를 걷어 한쪽 다리/ 가 없는 비둘기를 감싸안고 다닌 적이 있다 그림자는 비둘기를/ 날려주고 담요를 다시 널어놓았다 그 그림자는 옆으로 걷는 것이 더 편할 때가 있다// 다음 그림자는 비디오테이프의 같은 장면을 스물여덟 번 돌려보고 집에서 나오는 길이다 스물여섯번째 같은 장면에서 그림자는사정을 했고 서른번째 같은 장면에서 그림자가 울었다 그림자는말 더듬는 일을 즐겨할 것이다 지금 내 그림자가 길게 따라가고 있는 그림자는 언젠가 버스 옆자리에 함께 않고 싶은 그림자다// 다시 말하지만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두/ 운 골목, 사실 사람의 몸에서 그림자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노래다 울지 않으려고 우리가 부르던 노래들은 하나같이 고음(高音)이다 노래가 다음 노래를 부르고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붙잡는 골목이 모래내에는 많다//




박준(朴濬, 1983년 ~ ) 시인
1983년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8년 《실천문학》 '모래내 그림자극'으로 등단했다. 출판사 창비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산문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있다》 《이럴 땐 쓸쓸해도 돼》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신동엽 50주기 기념 신동엽문학상 역대 수상자 신작시집)》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 제7회 박재삼문학상, 제29회 편운문학상, 제31회 신동엽문학상, 2017 젊은예술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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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있다. 초등학교를 나와 10대 때부터 일을 했다. ‘아이스께끼’ 장사가 시작이었다.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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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준

달라지는 건 없더라도 함께 울어요, 우리 | 문학의 위기, 나아가 책의 위기를 말하는 시대에도 꾸준히 사랑받는 작가는 있다. 주목할 만한 30대 시인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박준도 그중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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