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도 팔자인가 / 정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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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1. 6. 30.

퇴직 후 서울에서 남의 고향인 이곳으로 몰래 살러 왔으니 이는 흔히 말하는 귀향(歸鄕)도 낙향(落鄕)도 아닌 도향(盜鄕) 혹은 잠향(潛鄕)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의 고장에 말도 없이 숨어들어와 제 잘난 척하다가 자칫 눈에 거슬리는 날에는 이 고장 토박이들의 텃세에 당장 쫓겨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새나 짐승들도 제자리 텃세를 한다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싶어 조심스러웠지만, 별 탈 없이 정을 붙여 6‧25를 전후해서 아버지 장삿길 따라 와서 살던 15년까지 합하면 올해 30년째 나는 이 고장에서 살고 있다. 뻐꾸기도 뜸부기도 내 어렸을 적 그 시절과 다름없는 울음소리이고 보면 마음 놓고 내 고향이라 소리칠 만도 하지 않은가. ‘여우도 죽을 때는 제가 살던 쪽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한자성어도 있지만, 나는 여우가 아닐뿐더러 정년퇴직한 사람들의 심심풀이로 쓰는 잡문에 단골로 오르는 이 한자성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되도록 이를 멀리하고 싶다. 무엇이든 횟수가 잦으면 흥미가 떨어질 뿐 아니라 괜한 사람이 몰염치해 보이지 않던가.

내가 노후의 휴식처로 이곳을 택한 것은 이곳만의 인심과 자연풍경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수에 인접해 있는데 내 고향 하동 쌍계사의 구름 같은 벚꽃과 꽃보다 고운 섬진강의 저녁놀 그리고 광양 다압면의 매화마을을 지나 구례의 산수유가 천지에 노랗다. 순천의 송광사와 선암사의 온 경내를 덮는 초여름의 철쭉에다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 풍경소리’는 노산(鷺山)의 현대시조 ⟨성불사의 밤⟩이 아니더라도 나의 밤을 뜬눈으로 새우게 하는 남도의 이름난 사찰이 여기 있고, 또한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의 배경인 질펀한 갈대밭이 안개 자욱한 그날의 낭만과 애수를 속삭여 준다. 나선 김에 목포 가는 길로 조금 더 가면 벌교의 그 유명한 ‘꼬막정식’과 ‘조정래문학관’을 만나게 되고, 그 너머에 널리 알려진, 푸르고 향긋한 우리의 쉼터 ‘보성녹차밭’이 있다.

이곳으로 내려온 처음 한두 해는 이런 고장들의 풍토에 반해 집사람과 함께 철철이 담 너머 이웃처럼 찾아 돌아다니다가 그것도 한두 번이지 해마다 되풀이하기는 멋쩍어 여수만 해도 마음 끌리는 곳이 많은데 싶어 한동안 집에서 쉬고 있었다. 하루는 집사람이 시내에서 일을 보고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오던 저녁 길에 공사 중인 인도의 구덩이를 헛짚어 발목 부상을 입어 오랫동안 한의원에 동행하게 된 것을 비롯해서 심지어는 시장보기나 친구들 모임에까지도 내 운전이 필요한 늙은이 부부 동반의 외출이 되었으니 속을 모르는 동네아주머니들의 입방아가 불안해 나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집사람의 발목 치료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주유하기 위해 도중의 단골주유소에 가면 주유도우미 아가씨들은 번번이 반색을 하며 가까이 다가와서는 한 마디씩 한다.

“언제나 이렇게 부부동반으로 함께 다니시니 우리 젊은 사람들이 보기도 좋고 부러워요.”

내 속도 모르고 이들의 칭찬에 나는 별다른 반응 없이 주유소를 빠져 나온다. 뜻하지 않은 사고 때문에 부득이한 동행으로 집사람의 동창모임 장소인 식당에까지 갔다가 그의 친구들에게 들켜 식당 안으로 끌려 들어가다 간신히 빠져 나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용돈이 궁한 요즘에는 종종 끌려 들어가 점심 한 때라도 공짜로 때울 수 있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랐지만, 그것도 그날 일수에 들어 있어야 할 말이지 인력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나의 오래된 심장병 때문에 매월 시내 단골 내과의원에서 정기검진을 받고 약을 타러 갈 때도 동행한 집사람은 진찰실에까지 따라 들어와 이런 저런 내 말을 거들고 있으니 의사가 웃으면서 물었다.

“언제나 이렇게 같이 다니세요?”

무슨 뜻으로 물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못 미더운지 언제나 엄마처럼 내 곁에 붙어 따라다녀요.”

그 잦은 재래시장 걸음에도 나는 번번이 운전기사 노릇을 해야 한다. 집사람의 재래시장 행보는 가끔씩 하는 취미가 아니라 거의 매일 나서는 전공과목이며, 반찬거리 종류도 다양하거니와 감자, 고구마, 무, 토란 등 중량도 남 못지않으니 차에서 내린 장짐을 아파트 3층 우리 집 주방에까지 운반해야 하는 그 중노동은 누가 감당해야 할 것인가. 나는 우리나라의 의젓한 원로 수필가를 자처하며 일거일동이 점잖고 조심스러웠는데, 이런 경우 이웃 사람들이 보고는 저 영감이 험한 막노동도 하는구나 하고 혀를 차며 안쓰러워했을 것이다.

장기전으로 들어선 집사람의 발목 치료 때문에 잠시도 운전대를 놓을 수 없게 된 나의 고충을 모르는 동네 아주머니들은 시체말로 ‘잉꼬부부’로 알고 있으니 혹시 동회에서 이를 잘못 알고 ‘금실부부(琴瑟夫婦)’ 표창장과 금일봉을 주겠다는 전화가 걸려올까 걱정이 되어 요즘 나는 자다가도 놀라 깨어 잠을 설치기도 한다. 걱정도 팔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