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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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7. 20.

 

시집  '현해탄' 

임화의 첫 시집 '현해탄' 초판본. 경매회사 코베이가 진행한 2015.2.25. 경매에서 1938년 출간된 '현해탄' 초판본이 710만원에 낙찰됐다. 이 시집에는 아래와 같이 41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네거리의 순이(順伊) / 임화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듯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웠고,/ 언 밥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듯한 품속에 안아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튜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세월 / 임화
시퍼렇게 흘러내리는 노들 강,// 나뭇가지를 후려 꺾는 눈보라와 함께/ 얼어붙어 삼동 긴 겨울에 그것은/ 살결 센 손등처럼 몇 번 터지고 갈라지며,/ 또 그 위에 밀물이 넘쳐/ 얼음은 두 자 석 자 두터워졌다.// 봄!/ 부드러운 바람결 옷깃으로 기어들 제,/ 얼음판은 풀리고 녹아서,/ 돈짝 구들장 같은 조각이 되어 황해바다로 흘러간다.// 이렇게 때는 흐르고 흘러서, 넓은 산 모서리를 스쳐내리고, 굳은 바위를 깎아,/ 천리 길 노들 강의 하상을 깔아놓았나니,/ 세월이여! 흐르는 영원의 것이여!/ 모든 것을 쌓아 올리고, 모든 것을 허물어 내리는,/ 오오 흐르는 시간이여, 과거이고 미래인 것이여!/ 우리들은 이 붉은 산을, 시커먼 바위를,/ 그리고 흐르는 세월을, 닥쳐오는 미래를,/ 존엄보다도 그것을 사랑한다./ 몸과 마음, 그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세월이여, 너는 꿈에도 한번/ 사멸하는 것이 그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허락한 일이 없고,/ 과거의 망령이 생탄하는 어린것의 울음 우는 목을 누르게 한 일은 없었다./ 너는 언제나 얼음장 같이 냉혹한 품안에/ 이 모든 것의 차례를 바꿈 없이/ 담뿍 기르며 흘러 왔다.// 우리들은/ 타는 가슴을 흥분에 두근거리면서 젊은 시대의 대오는/ 뜨거운 맥이 높이 뛰는 두 손을 쩍 벌리고,/ 모든 것을 그 아름에 끼고 닥쳐오는 세월! 미래!/ 그대를 이 지상에 굳건히 부여잡는다./ 우리는 역사의 현실이 물결치는 대하 가운데서/ 썩어지며 무너져가는 그것을 물리칠 확고한 계획과/ 그것을 향해 갈 독수리와 같이 돌진할 만신의 용기를 가지고,/ 이 너른 지상의 모든 곳에서 너의 품안으로 다가선다.// 오오, 사랑하는 영원한 청춘 세월이여./ 너의 그 아름다운 커다란 푸른빛 눈을 크게 뜨고,/ 오오, 대지의 세계를 둘러보라!/ 누구가 정말 너의 계획의 계획자이며!/ 누구가 정말 너의 의지의 실행자인가?// 오오, 한 초 한 분/ 온 세계 위에 긴 날개를 펼치고 날아드는 한 해여!/ 우리는 너에게 온 세계를 요구한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불 닿는 말썽 가운데서/ 좋은 것을, 더 좋은 것을./ ……/ ……/ ……/ 오오! 감히 어떤 바람이 있어, 어떤 힘이 있어,/ 물결이여, 돌아서라! 하상이여, 일어나라! 고 손질할 것이며,/ 세월이여, 퇴거하라! 미래여, 물러가거라! 고 소리치겠는가?// 미래여! 사랑하는 영원이여!/ 세계의 모든 것과 함께 너는 영원히 젊은 우리들의 것이다.//

암흑(闇黑)의 정신(精神) / 임화
대양(大洋)과 같이 푸른 잎새를,/ 그 젊은 수호졸(守護卒) 만산(滿山)의 초화(草花)를,/ 돌바위 굳은 땅속에 파묻은 바람은,/ 이제 고아(孤兒)인 벌거벗은 가지 위에 소리치고 있다./ 청춘에 빛나던 저 여름 저녁 하늘의 금빛 별들도/ 유명(幽冥)의 하늘 저쪽에 흩어지고,/ 손톱 같이 여윈 단 한 개의 초승달,/ 그것조차 지금은 레테*의 물속에서 신음하고 있는가?/ 동 서 남 북 네 곳에 어디를 둘러보아도,/ 두 활개를 쩍 벌려 대공(大空)을 휘저어보아도,/ 목청을 돋워 소리 높이 외쳐보아도,// 오오, 오오,/ 암흑의 끝없는 동혈(洞穴),/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의 호읍(號泣),/ 뇌명(雷鳴)과 같은 폭풍(暴風), 거암(巨巖)을 뒤흔드는 노호(怒呼),// 오오, 이제는 없는가? 암흑의 이외에!/ 오오, 드디어 폭풍이 우주의 지배자인가?// 생명의 즐거움인 삼월의 꽃들이여,/ 청년의 정신인 무성한 풀숲이여,/ 진리의 의지인 아름드리 교목(喬木)이여,/ 그리고 거인인 삼림의 혼이여?// 새싹 위에 나부끼던 보드라운 바람,/ 풍족한 샘[泉], 빛나는 태양,/ 그리고 불멸의 정신인 산악 창공은,/ 하늘에 떠도는 한 조각 시의(猜疑)의 구름과/ 사(死)의 암흑 멸망의 바람만을 남기고,/ 자취도 없이 터울도 없이 스러졌는가?// 깊은 낙엽송의 밀림과 두터운 안개에 쌓인/ 저 험한 계곡 아래,/ 지금 이 여윈 창백한 새는 날개를 퍼덕이며,/ 숨소리조차 죽은 미지근한 가슴 위에 두 손을 얹고,/ 어둠의 공포 절망의 탄식에 떨고 있다./ ―아무 곳으로도 길이 열리지 않는 암흑한 계곡에서.// 우수수! 딱! 꽝! 우르르!/ 암벽이 무너지는 소리, 천세(千歲)의 거수(巨樹)가 허리를 꺾고 넘어지는 소리,/ 사멸의 하늘에 야수가 전율하는 소리,/ 끝없는 어둠 침묵한 암흑,/ 오오! 만유(萬有)로부터 질서는 물러가는가?/ 이 무변(無邊)의 대공(大空)을 흐르는 운명의 강 두 짝 기슭/ 생과 사, 전진과 퇴각, 패배와 승리,/ 화해할 수 없는 양 언덕에 너는 두 다리를 걸치고,/ 회의에 허덕이는 심장으로 말미암아 전신을 떨고 있지 않으냐// 그러나 빈사(瀕死)의 새여! 낡은 심장이여! 떨리는 사지(四肢)여!/ 안 보이는가 안 들리는가/ 그렇지 않으면 이젠 아무 것도 모르는가// 불길은 바람의 멱살을 잡고/ 암흑인 하늘의 가슴을 한껏 두드리고 있지 않는가?/ 교목(喬木)들은 어깨를 비비며 불길을 일으키고,/ 시들은 풀숲은 불길에 그 몸을 던지며,/ 나뭇가지는 하늘 높이 오색의 불꽃을 내뽑지 않는가/ 그리고 삼림은!/ 커다란 불길의 날개로 거인인 산악을 그 품에 덥석 끼고,/ 믿음직한 근육(筋肉)인 토양과 철(鐵)의 골격인 암석을 시뻘겋게 달구면서/ 백척의 장검인 화주(火柱)를 두르며, 고원한 정신의 뇌명(雷鳴)과 함께 암흑의 세계와 격투(格鬪)하고 있다./ ― 진실로 영웅인 작열(灼熱)한 전산(全山)을 그 가운데 태우면서……// 오오! 새여! 그대 창백한 새여!/ 노래를 잊은 피리여!/ 너는 햄릿이냐? 파우스트냐? 오네긴이냐?/ 그렇지 않으면 유리제(製)의 양심이냐?// 오오 이 미친 무질서의 광란 가운데서/ 주검의 운명을 우리들의 얼굴에 메다치는 암흑 가운데서/ 너는 보는가? 못 보는가?// 이 불길이 가져오는 생명의 향기를/ 이 장렬한 격투(格鬪)가 전하는 봄의 아름다움을/ 만산(滿山)의 초화(草花)와 우거진 녹음, 그러고 황금색 실과(實果)의 단 그 맛[味]을// 이 암흑, 폭풍, 뇌명의 거대한 고통이/ 밀집한 교목의 대오와 그 한 개 한 개의 영웅인 청년, 수목의 육체 가운데/ 굵고 검은 한데의 연륜을 더 들러주고 가는 것을!// 너는 두려워하느냐?/ 사는 것을……/ 너는 아파하느냐?/ 청년인 우리들이 생존하고 성장하는 도표인 ‘나이’가 하나 둘/ 늘어가는 것을!// 영리한 새여! 아직도 양심의 불씨가 꺼지지 않은 조그만 심장이여!/ 불룩 내민 그 귀여운 가슴을 두드리면서/ 이렇게 소리쳐라!// “오라! 어둠이여! 울어라! 폭풍이여/ 노호(怒呼)하라! 사와 암흑의 마르세이유여!”// 그렇지 않은가!/ 누구가 대지로부터 스며 오르는 생명인 봄의 수액을/ 누구가 청년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영웅의 정신을 죽음으로써 막겠는가/ 암흑인가? 폭풍인가? 뇌명인가?//
* 단테의 「신곡」 중의 구(句)로 “영구히 희망을 버리라―”고 쓴 지옥의 문을 들어서면 곧 내[河]가 있어 이 강을 ‘망각의 강’이라고 하야 모든 것을 망각 속에 묻어버린다는 뜻.

주리라 네 탐내는 모든 것을 / 임화
젊었을 그 때엔 저렇듯 아름다운 꽃 이파리도,/ 이곳엔 꿈인 듯 흩어져 버리고,/ 천년의 긴 목숨을 하늘 높이 자랑하든/ 저 아름드리 솔 잣나무의 높고 큰 줄기도/ 역시 이곳에는 허리를 꺾고 넘어지나니,/ 이 모든 것의 위에를 마음대로 오르고 내리는/ 온갖 새의 임금인 독수리여!/ 너도 역시 마지막엔 그 크고 넓은/ 두 날갯죽지를 흐늘어뜨리고,/ 저무는 가을 날 초라한 나뭇잎새 바람에 나부껴 흩날리듯/ 옛 그날이 있는 듯 만 듯 덧없이/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가?// 노한 구름이 비바람 뿌리며 소리치던/ 그 험한 날 천리 먼 길에도,/ 일찍이 날개를 접어 굴욕(屈辱)의 숲속에서/ 부끄러운 눈알을 한번도/ 두려움에 굴려본 기억이 없는/ 오오! 하늘의 영웅이여! 너도/ 주검이 한번 네 큰 몸을 번쩍 들어 땅 위에 메다치면/ 비록 어지러운 가슴을/ 누를 수 없는 노함과 원한에 깨칠지언정,/ 날개를 펼쳐 다시 한 번/ 이곳에서 하늘을 향하여/ 화살처럼 내닫지는 못했는가?// 오오! 말 없는 악령(惡靈)이여!/ 모든 것의 무덤인 대지여!/ 너는 말하지 못하겠는가?/ 정말로 너는 목숨 있는 모든 것을/ 주검으로 거두는,/ 살아있고 살아가는 모든 것의 최후의 원수인지……/ 너는 대답지 못하겠는가?/ 천고의 옛날과 같이 지금도/ 또 끝없을 먼 미래에까지/ 너는 역시 말 없는 짐승이 되어/ 이곳에 엎뎌져 있겠는가?// 높은 산악이여! 굳은 암석이여!/ 끝없는 바다까지도 네 품에 안고 있는/ 무한한 담묵과 암흑의 군주여!/ 만일 네 넓고 푸른 대양이나 호수의 눈과 같이/ 언제나 뜨고서도 보지를 못한다면,/ 이 한 몸 둥그런 돌멩이 만들어/ 영원히 감지 않는 네 속에 풍덩 뛰어 들리라./ 만일 네 누르고 푸른 가죽이나 검고 굳은 바위처럼/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다면은,/ 사랑하는 어머님 젖가슴 뜯으며 어리광 부리던,/ 이 두 손으로 네 위에 더운 피 흐르도록 두드리리라./ 만일 네 아늑한 산맥의 귓전이/ 하늘을 찢는 우뢰(雨雷)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면,/ 못 잊을 임 볼 밑에서 뜨거운 마음을 하소연 하던,/ 이 다문 입을 열어/ 입술이 불되도록 절규하리라./ 만일 네 깊은 심장이/ 어둠과 침묵 밖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싫어한다면,/ 두 손과 다리를 가슴에 한데 모아/ 운석(隕石)이 되어/ 네 위에 떨어지리라.// 그래도 만일/ 네 영원히 침묵의 제왕으로/ 주검밖에 아무것도 알지를 못한다면,/ 주리라! 오오, 네 탐내는 모든 것을……/ 너의 멀고 넓은 태평양 바다의 한옆/ 아늑한 내해 가운데/ 한 오리 내어민 반도 동쪽 가,/ 성천강(城川江) 물줄기 맑게 흐르는 남쪽 기슭인/ 네 한길 품속에 영원히 잠든/ 내 사랑하는 벗 그가/ 네게 내어준 그것과 같이/ 심장 두 팔 두 다리,/ 도 그 위를 뛰고 달리며/ 일찍이 어떠한 두려움에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던/ 청년의 이 온몸을……/ 너는 탐내는가? 말해보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으로도 아직/ 네 탐욕의 목마름은 나을 수가 없겠는가?// 오오! 주리라!/ 그러면 살아있는 이 위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미워하며 울고 웃는 모든 것과,/ 흐르는 세월의 물결 이외의/ 아무런 권위 앞에서도/ 일찍이 머리를 숙여보지 않았던,/ 부라는 정열과 살아있는 생각의 모두를……/ 암흑의 심장이여! 주검의 악령이여!/ 네 이 가운데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를 탐낸다면,/ 소리 높여 대답하라.// 그러나 만일,/ 오오! 그래도 만일,/ 네 악마의 검은 배가/ 그것으로도 아직 찰 수가 없다면,/ 주리라! 그의 벗 되는 이 몸과 나머지 모든 것을……/ 그리고―/ 그가 안고 울고 웃고 즐기고 노하며/ 마지막 그의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오히려 무서운 매발톱이/ 어린 목숨을 탐내어 하늘을 감돌 제,/ 철모르는 어린것을 두 깃으로 얼싸안는/ 어미새의 가슴처럼,/ 그것을 그것을 지키려고/ 온 몸을 흥분에 떨던,/ 그의 평생의 요람이었고/ 그의 모든 벗의 성곽이었던/ 청년의 정열과 진리의 무대까지도……// 그러나 또 만일, 또, 또 만일,/ 탐욕의 열병에 썩어가는 네 오장이/ 그것으로도 아직 찰 수가 없다면,/ 그의 자라나던 성곽과 노래의 대오/ 살림의 진실과 진리의 길을/ 꽃 위에 수놓던 군대의 모두가,/ 열 몇 해 오랫동안 그 배 위에서,/ 산 같은 풍랑의 두려움에도/ 신기루의 달큼한 유혹에도,/ 오직 검은 하늘 저쪽/ 밝은 별 이끄는 만리 뱃길에/ 키 자루를 어지럽히지 않았던,/ 이 검은 쇠로 굳게 무장한/ 전함 돛대 끝 높이 빛나는 우리들/ ‘××××’의 깃발까지도,/ 네 그칠 바 모르는 오장의 밑바닥을 메우려고/ 검은 두 손을 벌린다면,/ 벌레의 구물대는 그 위에/ 내놓기를 아끼지 않으리라!// 그러나 네 높고 큰 산악의 귓전을 기울여보라!/ 네 잠잠히 넓은 대양과 호수의 푸른 눈알을 굴려보아라!/ 벗 ‘김’이 누워있는 불룩한 무덤위에/ 조는 듯 피어있는 머리 숙인 할미꽃이라든가,/ 아침 햇빛에 잠자던 머리를 들어/ 아득히 먼 저 끝까지/ 날마다 푸른 물결 밀려가는/ 이 아름다운 봄철의 들판이라든가,/ 그 위에 우뚝 허리를 펴/ 지나간 시절에게 패전한 흉터가 메일랑 말둥한/ 움 터오는 나뭇가지들의 누런 새 순이라든가,/ 저 버들가지 흩날리는 언덕 아래/ 텀벙 엎더져 눈[雪]을 털고/ 동해바다 넓은 어구로 흘러내리는/ 성천강의 얼음조각이라든가를……/ 으오, 유빙(流氷)이다!/ 보는가! 저 얼음장 뒹구는 위대한 물결을!/ 진실로 미운 것이여!/ 다시 두 번 어깨를 겨누어 하늘 아래 설 수 없는/ 정말로 정말로 미운 것이여!/ 아는가?/ 세월은 네 품이 아닌/ 먼 저쪽에서 흐르면서 죽어가는 것 대신에 영구히 새로운 것을 낳고있다./ 어제도, 지난해에도, 태고의 옛날에도,/ 그리고 끝 모를 먼 미래에까지도……// 정말로/ 가을에 아프고 쓰라린 기억은 한번도/ 누런 풀숲에서,/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는/ 할미꽃의 용기를 꺾지는 못했었고,/ 거센 동해의 산 같은 격랑도/ 삼동(三冬) 긴 겨울/ 길 넘게 얼어붙은 빙하를 녹여/ 하구로 내려 미는/ 한 오리 성천강의 가냘픈 힘을/ 막아본 적은 없었다.// 하물며 이른 봄의 엷은 바람으로/ 어찌 새싹 푸르러/ 손뼉같은 큰 잎새 피어,/ 태양과 함께 청공 아래 허덕이는/ 여름철의 기름진 성장의 힘을/ 누를 수 있겠는가?/ 모진 바람 지동 치는 암흑한 언덕 위에/ 죽은 듯 엎더진 살아있는 모든 것의/ 수없는 슬픔을/ 영구히 벗지 못할 겉옷 속에/ 장사지내려던 눈 덮인 들/ 너와 함께 태초로부터/ 불타던 태양까지가 그의 힘을 잃고/ 헛되이 긴 동안을 글러가던/ 그 끝없이 차고 흰 벌판 위에/ 일제히 생탄의 마당으로 잡아 일으킬/ 이 세월의 영원한 흐름을,/ 철수의 위대한 힘을,/ 닥쳐오는 봄을!/ 살아있는 모든 것의 원수여! 말해보라!/ 막을 수 있겠는가?// 주리라! 주검의 악령이여! 네 탐내는 모든 것을……/ 가을의 산야가 네 위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눈 속 깊이 내어 맡기듯……// 그러나 종달새 우는 오월/ 푸른 하늘 아래 나팔을 불며/ 군호 소리 높이 두 발을 구르고/ 잠자는 모든 것을 일으키고,/ 침묵한 온갖 것의 입을 열어/ 절규의 들로 불러 내이며,/ 죽어진 그 시절의 모든 목숨을/ 무덤으로부터 두손을 잡아 일으킬,/ 저 열길 얼음 속에서도 아직/ 산 것을 자랑하는 어린 물고기의 마음이,/ 한 줄기 빛깔도 엿볼 수 없는/ 이 어두운 땅속에서,/ 두 주먹을 고쳐쥐며 높이고 있는/ ‘한니발’의 굳은 맹서를……/ 암흑이여! 주검의 어머니인 대지여!/ 말해보라! 꽉 그 목을 눌러/ 영구히 숨줄을 끊을 수 있겠는가?// 자거라!/ 이제는 두번 살아 우리 앞에 나서지 못할/ 사랑하는 옛 벗 ‘××’아! 고이 자거라!/ 지금 살아서 죽는 우리들과 함께./ 누가 감히 네가/ 영구히 죽었다고 말하겠는가?// 불길은 타서 숯등걸 되고/ 그것은 일어날 새 불의 어머니 되나니,/ 벗아! 저 컴컴한 골짝 속에서도/ 오히려 머지않아 닥쳐올 대양의 큰 파도 소리를 자랑하며,/ 묵묵히 흐르는 실낱 냇물이 속삭이는/ 옅은 콧노래 가운데,/ 오는 날의 모든 것을 들으면서/ 고이 두 손을 가슴에 얹어라!// 이 아래 한길 되는 어둔 땅 속에/ 지금 대양의 절규 대신에 잠잠한 침묵에 내가 잠자고 있노라!//

나는 못 믿겠노라 / 임화
지금 나는 멀리 남쪽 시골서 온 자네의 봉함편지를 접어 머리맡에 놓고,/ 눈을 감아 생각하려 잠을 멈추고 자리에 누웠다./ 풋내의 밀물이/ 짙어가는 여름 드높은 하늘의 깊은 어둠을 헤여,/ 고기떼처럼 춤출 듯 꼬리를 접어 이슬ㅅ발을 끊어 던지고,/ 내 마음의 적은 배가 어젯날의 거칠은 바다 항로에서/ 풍파가 준 깊다란 상처를 다스리려,/ 헌 뱃등을 비스듬히 언덕에 누이고 있는 내 아늑한 굴강인 좁은/ 방으로/ 얼싸안는 듯 덮치는 듯 듬뿍이 스며든다.// 밤/ 지나간 황혼의 포구와의 별리(別離)가 오래되어 낡아갈수록/ 산악의 푸른 눈썹은 기억의 쓰라림에 젖어,/ 하늘을 나는 새들도 날개를 접고,/ 젊은 식물들이 네 활개 저으며 가쁘게 호흡하는 저 위/ 눈동자 맑은 밤하늘이 호올로 어둠에 슬픈 옷자락을 길게 끄을면서,/ 정강이 허리가 묻혀 곧 머리까지도 보이지 않을/ 시커먼 수렁으로 비척비척 걸어간다.// 어둠/ 오랜 사공인 별들조차 갈 길을 잃어 구름 속에 헤매는 어둠,/ 돌 바위의 굳은 마음이나 산악의 큰 정신도/ 이 속에서는 넋을 잃고 쓰러질 무겁고 진한 풋내,/ 아무리 길고 억센 생명도 재 되어 쓰러질 흙의 독한 냄새,/ 영원히 건강한 태양도 지금엔 다리를 절어 멀리 산 뒤에 숨은/ 이 두렵고 미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구렁 속에서,/ 밤의 몸집은 한없이 크고 넓게 성장하며,/ 나는 새벽 항구를 멀리 남긴 채 나이 먹고 늙어서 죽어갈 것일가?// 우뢰의 큰 소리로 부름도 아니련만,/ 썰물의 굳센 손이 이끎도 아니련만,/ 무엇이 부르는 듯, 이끄는 듯,/ 내 몸과 마음은 밤의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아마도 밤은/ 이 두텁고 무거운 이불을 덮어/ 주검의 검은 자리 우에 나를 누이지 않고는/ 이곳으로부터 내내 물러가지 않으려나보다.// 마치 내 즐기는 산이나 들의 고운 색깔을 걷지 않고는/ 이놈의 여름철이 달아올 수 없는 것처럼, 정말로 밤은/ 의상 없는 심술 사나운 악령인가보다.// 그러나 밤/ 이 두렵고 고단한 오늘날의 긴 밤을 헛되이 달려보고,/ 허위대는 어리석음이라든가/ 내일을 옳게 살으려 고요히 잠자는 것의 중함이라든가를,/ 이 사람, 낸들 어찌 분간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겠는가?// 말없이 움직임 없이 오직/ 죽은 듯 하룻밤을 꿀꺽 참아/ 선뜻 개는 아침,/ 두 팔을 걷어 어지러운 들길을 열어나갈 오늘날의 용력(勇力)일 나는,/ 대망(待望)의 아득한 잠자리의 값을/ 나는 허덕이는 가슴 위에 두 손길을 얹고 눈을 감아 금쳐 본다.// “밤의 굳은 손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누일 때,/ 그저 운명에 종용(從容)함이 오는 아침을 위(爲)하여 가장 현명(賢明)할 것이다.”/ 어찌 자네뿐이겠는가!/ 일찍이 선배인 어느 비평가의 논문도/ 이 ‘냉정한 이성의 지혜로운 길’을/ 우리들이 걸어갈 유일의 길이라고 지시했음을,/ 나는 다시 한 번 새롭게 기억한다.// 정말로 가시덤불은 무성하여 좁은 앞길을 덮고,/ 깊은 밤 날씨는 언짢아, 두터운 암흑이/ 그 위에 자욱 누르고 있다./ 이미/ 자네는 부상한 채 사로잡히고, 나는 병들어 누워,/ 벌써 몇 사람의 진실로 존귀한 목숨이/ 고난에 찬 그 험한 길 위에 넘어졌는가?/ 이제 우리들의 긴 대오는 허물어지고 ‘전선’은 어지럽다.// 그러나 이 사람!/ 이 괴로운 밤이 다시 우리들을 찬란한 들판으로 나르는 대신/ 이름도 없는 세월의 헛된 제물로/ 번쩍 잡초 우거진 엉구렁 아래 메어치고 달아나지나 않을지?/ 나는 벌레 먹어 무너져 가는 내 가슴이 맞이할 운명과 더불어/ 몇 번 고단한 몸을 뒤척이고,/ 몇 번 괘종의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시커먼 파도 가운데서 대답을 찾으며 생각하였을까?/ 내 수척한 육신은 기름땀내 잠기고,/ 돌멩이처럼 머리는 침묵의 괴로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순간/ 나는 주위를 둘러싼 두터운 침묵이 무너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비로소 보이지도 않게 방안 가득 진 친 셀 수도 없는 모기떼의/ 무수한 입추리 가운데/ 참담히 누워있는 내 육신의 전모를/ 나는 모진 아픔과 몸서리를 같이 발견했다.// 오오, 이 밤의 어두운 꿀이/ 그들의 온갖 활동에 얼마나 크고 넓은 자유를 주는 것일까?/ 암석까지도 진땀을 내뿜는 이 계절의 진한 입김이/ 그들의 엷은 두 날개를 얼마나 가볍고 굳세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이 가운데서 보고 아는 모든 자유를 죽여가고,/ ‘습격자’를 향하여 몸을 일으킬 육신의 적은 힘까지도 잃어간다.// 앵! 아우성소리 치며 눈 위를 감돌고,/ 소리개처럼 탁 귓전을 후려,/ 이 밤의 아픔의 가장 혹독한 전초(前帩)들은 꽉 뒷다리를 버티고,/ 우리들의 몸에 입추리를 꽂아,/ 밤이 주고 그들이 탐내는 모든 것을/ 우리들의 전신에서 약탈한 참혹한 자유를 향락하고 있다.// 오, 지금은 육촉 전등 흐릿한 좁다란 마루판자,/ 굵은 창살이 네모진 하늘을 두부같이 저며 놓은 높다란 들창 아래,/ 내 자네의 여윈 몸은/ 고된 일에 넘어진 마소처럼 쓰러져 있지 않은가?/ 얼마나 이 밤의 죄악의 통렬한 집행자들은/ 무참하고 아프게 그 입추리를 박았을까?/ 비비여 죽여도, 눌러 죽여도,/ 벗아, 내 분함이 어찌 풀리겠는가?// 자네, 이 모진 아픔에 잠들 수 있겠는가?/ 자네, 이 무거운 더위에 숨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직도/ 오는 아침 우리는 정말 건전할 수 있겠는가?// 오오, 몸을 일으키어 두 팔을 걷어라./ 그리하여 네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잡아,/ 이 졸음과 생각을 다 한데 깨치고,/ 바로 우리 병들고 수척한 육신을 쥐어뜯는/ 밤의 미운 초병단(哨兵團)을 향하여,/ 주검으로써 야격(夜擊)에 일어서라.// 만일 우리가/ 자네와 그 아류(亞流)들이 말하는 거룩한 철리(哲理)를 좇는다면,/ 닭이 홰를 치고 바자 밑에 울며/ 이놈의 일족(一族)이 밤과 더불어 숲속에 물러갈 그 때,/ 우리들은 두엄이 되어 굴욕의 들판에 넘어졌을 것이다.// 나는/ 우리들의 육신을 뜯기지도 않고/ 우리들을 헛되이 늙히지도 않는/ 그렇게 착한 여름밤이 있다는 신화와 함께/ 내일을 위하여 맘의 아픔에 종용(從容)하라는/ 그 거룩한 철리를 믿을 수는 없다.//

옛 책(冊) / 임화
무더운 여름 한밤의 깊은 어둠이/ 모색의 힘든 노동에 오래 시달린/ 내 노력의 전신을 지그시 누른다.// 꺼칠한 눈썹 아래 푹 꺼진 두 눈,/ 한 끝이 먼 희망의 항구로 닿아 있어,/ 아이 때 쫓던 범나비 자취처럼/ 잡힐 듯 말 듯 젊은 날의 긴 동안을 고달피던/ 꿈길 아득한 옛 기억의 맵고 쓴 나머지를/ 다시 그러모아 마음의 헌 누각을 중수하려/ 몇 번 힘을 내고 눈알을 굴려 방안에 좁은 하늘로 헤매었는가?// 그러나/ 검은 눈썹은 또다시 피로에 떨면서,/ 길게 눈알을 덮고,/ 주검의 억센 품안에서 몸을 떨쳐 휘어나려/ 오늘도 어제와 같이 고된 격투(格鬪)에 시달린 육신은/ 푸근히 식은 땀의 생을 터치며/ 쪽 자리 위에 네 활개를 내어 던진다.// 그러면 벌써 나의 배는 파선하고 마는 것일까?/ 한 조각의 썩은 널조차 나를 돌보지 않고,/ 그것 없이는, 정말로 그것 없이는,/ 평탄한 물에서도 온전히 그 길을 찾을 수 없는/ 진리에로 향한 한 오리 가는 생명의 줄까지도/ 인제는 정말로 끊어져,/ 손을 들어 최후의 인사를 고하려는가?/ 오오, 한 줌의 초라한 내 머리를 실어 오랫동안,/ 한마디 군소리도 없이 오직 나를 위하여 충실하던 내 조그만 베개/ 반딧불만한 희망의 빛깔에도 불길처럼 타오르고,/ 풀잎 하나 그 앞을 가리어도 천오 리 머리털이 활줄 같이 울던/ 청년의 마음을 실은 내 탐탁한 거루인 네가/ 이제는 저무는 가을의 지는 잎 되어 거친 파도 가운데 엎드려지면서,/ 그 최후의 인사에 공손히 대답하려는가?// 나는 다시 한 번 온몸의 격렬한 전율을 느끼며,/ 춥고 바람 부는 삼동(三冬)의 긴 겨울밤,/ 그렇게도 잘 새벽 나루로 나를 나르던,/ 내 착하고 충성되니 거루의 긴 항행(航行)을 회상한다./ 굴욕의 분함이 나를 땅바닥에 메다쳤을 제도,/ 너는 보복의 뜨거운 불길을 가지고 나를 일으키었고,/ 패퇴의 매운 바람결이/ 내 마음의 엷은 피부를 찢어,/ 절망의 깊은 골짝 아래 풀잎 같이 쓰러뜨렸을 그때에도,/ 너는 어머니와 같이 나를 달래어 용기의 귀한 젖꼭지를 빨리면서,/ 아침 해가 동쪽 산머리에 벙긋이 웃을 때,/ 일지도 않게 늦지도 않게 새벽 항구로 나를 날랐었다.// 지금/ 우리들 청년의 세대의 괴롭고 긴 역사의 밤,/ 검은 구름이 비바람 몰고 노한 물결은 산더미 되어,/ 비극의 검은 바다 위를 달리는 오늘/ 그 미덥던 너도 돛을 버리고 닷줄을 끊어,/ 오직 하늘과 땅으로 소리도 없는 절망의 슬픈 노래를 뜯어,/ 가만히 내 귓전을 울린다.// 오오, 이것이 청년인 내 주검의 자장가인가?// 나는 참을 수 없는 침묵에서 몸을 빼어 뒤척일 때,/ 거칫 손에 닿는 조그만 옛 책자를 머리맡에서 집었다.// 책장은 예와 같이 활자의 종대(縱隊)를 이끌고,/ 비스듬히 내 손에서 땅을 향하여 넘어간다.// 이 곳 저 곳에 굵게 내리 그은 붉은 줄,/ 틈틈이 빈 곳을 메운 낯익은 내 서투른 글씨,/ 나는 방안 그득히 나를 사로잡은 침묵의 성돌을 빼는,/ 그 귀여운 옛 책의 날개 소리에 가만히 감사하면서,/ 푸르륵 최후의 한 장을 헛되이 닫칠 때,/ 나는 천지를 흔드는 포성(砲聲)에 귓전을 맞은 듯,/ 꽉 가슴에 놓인 빙낭(氷囊)을 부여잡고 베개의 깊은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N․L 저(著) 「1905년의 의의」// 1905년!/ 1905년!// 베개는 노래의 속삭임이 아니라, 위대한 진군의 발자국 소리를,/ 어둠은 별빛의 실이 아니라, 태양의 타는 열과 눈부신 광채를,/ 고요한 내 병실에 허덕이는 내 가슴 속에 들이붓고 있다.// 저 긴, 긴 북국의 어두운 밤,/ 얼마나 더럽고 편하게 그 자들은 살고,/ 얼마나 깨끗하고 괴롭게 그들은 죽었는가?/ 밝은 것까지도 밤의 질서로 운행되어가는/ 이 괴롭고 긴 밤,/ 주검까지도 사는 즐거움으로 부둥켜안은 청년의 아픈 행복을,/ 나는 두 눈을 감아 아직도 손바닥 밑에 고요히 뛰고 있는,/ 내 정열의 옛 집에서 똑똑히 엿들었다.//

골프장(場) / 임화
까만 발들이 바쁘게 지나간다./ 이슬방울이 우수수 떨어지며,/ 흙 새에 끼었던 흰 모래알이/ 의붓자식처럼 한 귀퉁이에 밀려난다./ 그러면 어린 풀잎들이 느껴 운다.// 뭐, 인젠 그 연한 풀잎이/ 알몸으로 뙤약볕을 쏘여야 하니까……/ 정말 가는 이파리들은 아직 나이 어려도,/ 염천(炎天) 아래서 찌는 듯한 폭양(暴陽)을 온종일 받아야 할 쓰라림을 잘 알고 있다.// 외국말을 쓴 세모난 다홍 기가/ 승리자처럼 흰 깃대 위에 너울거린다./ 흘러가는 흰 구름이나 엷은 바람,/ 모두가 그에겐 행복스런 음악 같다.// 딱! 모진 소리가 까만 저 끝에서,/ 푸른 하늘의 파문을 일으키며 울려온다./ 기다란 커브가 끝나자/ 패랭이의 분홍꽃, 클로버의 긴 줄기,/ 모두다 사태에 밀리듯 쓰러지며,/ 너희들은 사냥개처럼 풀밭 위를 뛰어간다./ 뒤이어 짜그르르 끓는 손뼉 소리에 섞여,/ 신여성의 외국말이 고양이 소리처럼 날카롭다./ 참말 등(藤)나무 시렁 밑이란 무척 시원하렷다.// 해는 벌써 버드나무 위에 이글이글하다./ 그 위에를 달리고 있는 까만 머리 아래 가는 목덜미 마른 잔등이가 가죽처럼 탔구나!/ 잠방이만 입고, 아이들아! 너희는 저고리를 잊었니?/ 아하! 궁둥이가 뚫어졌구나./ 그럼 필연코 너희들은 해진 잠방이밖엔 없던 게구나./ 바가지 모자를 쓴 신사어른들도 잠방이를 입었다./ 허나 누런 빛 월천꾼이 바지는/ 몹시 값진 옷감이다./ 그이들이 아까 공채를 둘러매고 자동차로 왔다./ 물론 신여성이 어깨에 매어달려 달게 웃고,/ 너희를 욕하던 뽀이 놈이 날아갈 듯 인사를 했다.// 월천꾼이가 도랭이 먹은 개처럼 몸을 비틀면,/ “어쩌면 저렇게 스타일이?”……/ 뽀이 놈은 아가리를 벌리고, 신여성은 고양이 소릴 치며 술잔을 든다./ 이래서 담뱃대 같은 공채가 땅만 긁다가 비뚜로라도 공을 맞히면,/ 만세! 소리 박수 소리 찌어지는 여자의 목소리 똑 가축시장 같다.// 별로 공이 가본 일도 없는 싱거운 삼백 야드 말뚝이,/ 어제 정신을 잃고 집으로 업혀 간,/ 그애의 이마를 깠구나./ 죄 없는 풀 이파리가 함부로 짓밟히고,/ 네들은 홧김에 말뚝을 걷어찼다./ 그때도 이놈에 손뼉과 웃음은 멎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이런 유별난 병에 걸렸나 보다.// 아이들아, 너희들은 공을 물어오는 사냥개!/ 월천꾼들은 눈먼 포수(砲手)!/ 그러나 사냥개란 집에서 놀릴 때도 고기를 주지만,/ 그렇게 너희들은 온종일 마당에 풀만 뜯다/ 비를 맞으며 강아지처럼 달달 떨고,/ 둑을 넘어서 집으로 가 내놀 것이란 빈손뿐이니, 들앉았던 아버지는 화를 내실밖에?/ 그럼 너희들은 이곳에 놀러 온 것은 아니로구나.// 이곳은 어른들이 장난하는 곳,/ 공이란 놈은 너희들의 설은 속도 모르고,/ 제 갈 대로 떴다 굴렀다 달아만 난다./ 누구가 알까?/ 넘어지는 풀잎의 아픔이나 네들의 설음을!/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좋아라 즐겨하는 월천꾼이 신여성의 마음은 공보다 더하다./ 아이들아! 네들의 운명은 공보다도 천하구나?// 왜 이렇게 넓은 곳에 곡식을 심지 않았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보던 네 아우에게,/ 착한 아이들아! 네들은 무어라 대답했니?/ 이곳은 우리들의 미움을 심는 곳!/ 그러고……가만히 귓속 해줄 제 고운 풀잎들은 즐거움에 떨었다./ 네 귀여운 동생은 네 가슴에 안기며 머리를 꼭 박고 언니,/ 우리 한 푼도 쓰지 말고 아빠 갖다가 줍시다……./ 네 불쌍한 동생은 눈깔사탕을 단념했다.// 아이들아! 내 아이들아!/ 만일 우리로 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대체 무엇을 아끼겠는가? 네들의 행복을 위하는데……// 햇님까지도 그 큰 입을 벌리라 말하지 않니?/ 이따위 일은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고.//

다시 네거리에서 / 임화
지금도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맞고 보내며,/ 전차도 자동차도/ 이루 어디를 가고 어디서 오는지,/ 심히 분주하다.// 네거리 복판엔 문명의 신식 기계가/ 붉고 푸른 예전 깃발 대신에/ 이리 저리 고개를 돌린다./ 스톱―주의―고―/ 사람, 차, 동물이 똑 기예[敎鍊] 배우듯 한다./ 거리엔 이것밖에 변함이 없는가?// 낯선 건물들이 보신각을 저 위에서 굽어본다./ 옛날의 점잔은 간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다지도 몹시 바람은 거리를 씻어 갔는가?/ 붉고 푸른 네온이 지렁이처럼,/ 지붕 위 벽돌담에 기고 있구나./ ×// 오오, 그리운 내 고향의 거리여! 여기는 종로 네거리,/ 나는 왔다, 멀리 낙산(駱山) 밑 오막살이를 나와 오직 네가 네가/ 보고 싶은 마음에……/ 넓은 길이여, 단정한 집들이여!/ 높은 하늘 그 밑을 오고가는 허구한 내 행인들이여!/ 다 잘 있었는가?/ 오, 나는 이 가슴 그득 찬 반가움을 어찌 다 내토를 할까?/ 나는 손을 들어 몇 번을 인사했고 모든 것에게 웃어 보였다./ 번화로운 거리여! 내 고향의 종로여!/ 웬일인가? 너는 죽었는가, 모르는 사람에게 팔렸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 잊었는가?/ 나를! 일찍이 뛰는 가슴으로 너를 노래하던 사내를,/ 그리고 네 가슴이 메어지도록 이 길을 흘러간 청년들의 거센 물결을,/ 그때 내 불쌍한 순이는 이곳에 엎더져 울었었다./ 그리운 거리여! 그 뒤로는 누구 하나 네 위에서 청년을 ××긴 원한에 울지도 않고,/ 낯익은 행인은 하나도 지나지 않던가?// 오늘밤에도 예전 같이 네 섬돌 위엔 인생의 비극이 잠자겠지!/ 내일 그들은 네 바닥 위에 티끌을 주으며……/ 그리고 갈 곳도 일할 곳도 모르는 무거운 발들이/ 고개를 숙이고 타박 타박 네 위를 걷겠지./ 그러나 너는 이제 모두를 잊고,/ 단지 피로와 슬픔과 꺼먼 절망만을 그들에게 안겨 보내지는 설마 않으리라./ 비록 잠잠하고 희미하나마 내일에의 커다란 노래를/ 그들은 가만히 들고 멀리 문밖으로 돌아가겠지.// 간판이 죽 매어 달렸던 낯익은 저 이계(二階) 지금은 신문사의 흰 기가 죽지를 늘인 너른 마당에,/ 장꾼 같이 웅성대며, 확 불처럼 흩어지는 네 옛 친구들도/ 아마 대부분은 멀리 가버렸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순이의 어린 딸이 죽어간 것처럼 쓰러져 갔을지도 모를 것이다./ 허나, 일찍이 우리가 안 몇 사람의 위대한 청년들과 같이,/ 진실로 용감한 영웅의 단[熱한] 발자국이 네 위에 끊인 적이 있었는가?/ 나는 이들 모든 새 세대의 얼굴을 하나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건재하라! 그대들의 쓰린 앞길에 광영이 있으라”고./ 원컨대 거리여! 그들 모두에게 전하여다오!/ 잘 있거라! 고향의 거리여!/ 그리고 그들 청년들에게 은혜로우라,// 지금 돌아가 내 다시 일어나지를 못한 채 죽어가도/ 불쌍한 도시! 종로 네거리여! 사랑하는 내 순이야!/ 나는 뉘우침도 부탁도 아무것도 유언장 위에 적지 않으리라.//

낮 / 임화
내가 자동차에 실려 유리창으로 내다보던 저 건너 동산도/ 벌써 분홍빛 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넓다란 푸른 이파리가 물고기처럼 흰 뱃바디를 보이면서,/ 제법 살았소 하는 듯이 너울거린다./ 어느새 여름도 짙었는가보다.// 그러기에 내가 이 절에 올 때엔,/ 겨우 터를 닦고 재목(材木)을 깎던 집들이/ 벌써 기둥이 서고 지붕이 덮이어,/ 영을 깔고 용마름을 펴는 일꾼이 밀짚모자를 썼지.// 두드러지게 잘된 장다리밭 머리를/ 곱게 다린 황나적삼을 떨쳐 입고,/ 꽁지가 빨간 잠자리란 놈이 의젓이 날고 있다.// 밭머리에 서 있는 싱거운 포플러나무가/ 헙수룩한 제 그림자를 동그라니 접어 안고,/ 산 넘어 방적회사의 목 멘 고동이/ 서울 온 촌 아기들을 식당으로 부를 때,/ 아주 소리개 모양으로 떠돌아 보고,/ 물을 차는 제비나 된 듯 내달으며 넘놀아도 보던,/ 잠자리 녀석들도 꼬리를 오그리고 죽지를 끌며,/ 장다리가 세로 가로 쓰러져 있는 밭 가운데로,/ 졸리는 듯 내려앉는다./ 정말 요새 뙤약볕이란 돌도 녹일까 보다.// 후끈한 바람이 진한 걸음 내를 품기며,/ 나무 끝을 건드리고 밭 위를 지나간다./ 벌 떼가 몇 개 안 남은 무색한 보라빛 꽃수염을/ 물었다 놓고, 놓았다 물며,/ 왕 왕 날개를 울리면서 해갈을 한다./ 호랑나비는 들어가면 눈이 먼다는 독한 가루를 잔득 실고 아롱거린다.// 꼬리를 건드리고 머리를 만져도/ 저 잠자리란 녀석은 다시 일지를 않으니,/ 졸고 있나, 그렇지 않으면 인제 벌써 죽었나?/ 거미줄 채를 손에 든 선머슴 아이들이/ 신발을 벗어 들고 성큼 발소리를 죽여 가며,/ 한 걸음 두 걸음 곧 손이 그 곳에 미칠텐데,/ 오, 저런 망한 녀석들의 심술궂은 눈 좀 보게.// 어쩌면……/ 고렇게 꼿꼿하고 고운 두 날개,/ 빨간 빛깔이 기름칠 한 것처럼 윤택 나는 날씬한 체구가/ 어찌 될지!/ 어째 맵기 당추 같은 고추짱아의 마음도 모르고 있을까?/ 앵두꽃 진 지가 얼마나 된다고 요만한 뙤약볕에,/ 쨍이야, 벌써 ‘호박’처럼 맑던 네 눈도 어두워졌니?// 녹음의 짙은 물결이 들 가득 밀려오고 밀려간다./ 동산은 어른처럼 말없이 잠잠하다./ 아마 연연한 봄의 고운 배는 벌써 엎어졌나보다./ 정말 이 따가운 뙤약볕의 소나기통에,/ 굳은 날개도 두터운 비름 이파리도 다 또 일수 없이 풀이 죽고 말았을까?/ 골짜기 속에서 낮잠을 자던 게으른 풀숲에,/ 젊은 꾀꼬리가 한 마리 푸드득 나뭇잎을 걷어차고,/ 고요한 침묵의 망사를 찢고 하늘로 날아갔다.// 오오, 고마워라, 얼마나 고마울까!/ 문득 나는 이 조그만 괴로운 꿈을 깨어,/ 단장을 의지하여 허리를 펴서 뒷산을 보았다.// 숲 사이에 원추리가 한 떨기 재나 넘은 보름달처럼,/ 음전히 머리를 쳐들고,/ 꾀꼬리가 남긴 노래 곡조의 여음을 듣고 있지 않은가!/ 나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어 산비탈을 올라가면서,/ “꿈꾸지 말고 시대의 한가운데로 들어오라”는 식물들의 흔드는 손을 보았다./ “너는 아직도 죽지 않았었구나” 하고,/ 원추리가 다정스러이 웃는 얼굴을 보았다./ 나는 잠깐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고운 나비와 무성한 식물들의 겨우살이를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나는 아직 살아있는 행복이 물결처럼 가슴에 복받침을 느끼었다.//

강(江)가로 가자 / 임화
얼음이 다 녹고 진달래 잎이 푸르러도,/ 강물은 그 모양은커녕 숨소리도 안 들려준다.// 제법 어른답게 왜버들가지가 장마철을 가리키는데,/ 빗발은 오락가락 실없게만 구니 언제 대하를 만나볼까?// 그러나 어느덧 창밖에 용구새가 골창이 난지 십여 일,/ 함석 홈통이 병사(病舍) 앞 좁은 마당에 뒹구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침대를 일어나 발돋움을 하고 들창을 열었다./ 답답어라, 고성 같은 백씨기념관(白氏紀念館)만이 비에 젖어 묵묵(黙黙)하다.// 오늘도 파도를 이루고 거품을 내뿜으며 대동강은 흐르겠지?/ 일찍이 고무의 아이들이 낡은 것을 향하여 내닫든 그대와 같이// 흐르는 강물이여! 나는 너를 부(富)보다 사랑한다./ ‘우리들의 슬픔’을 싣고 대해로 달음질하는 네 위대한 범람(氾濫)을!// 얼마나 나는 너를 보고 싶었고 그리웠는가?/ 그러나 오늘도 너는 모르는 척 저 뒤에 숨어 었다, 누운 나를 비웃으며,/ 정말 나는 다시 이곳에서 일지를 못할 것인가?/ 무거운 생각과 깊은 병의 아픔이 너무나 무겁다.// 오오, 만일 내가 눈을 비비고 저 문을 박차고 않으면,/ 정말 강물은 책 속에 진리와 같이 우리들의 생활로부터/ 인연 없이 흐를지도 모르리라.// 누구나 역사의 거센 물가로 다가서지 않으면,/ 영원히 진리의 방랑자로 죽어버릴지 누가 알 것일까?/ 청년의 누가 과연 이것을 참겠는가? 두말 말고 강가로 가자,/ 넓고 자유로운 바다로 소리쳐 흘러가는 저 강가로!//

들 / 임화
눈알을 굴려 하늘을 쳐다보니,/ 참 높구나, 가을 하늘은/ 멀리서 둥그런 해가 네 까만 얼굴에 번쩍인다.// 네가 손등을 대어 부신 눈을 문지를 새,/ 어느 틈에 재빠른 참새놈들이/ 푸르르 깃을 치면서 먹을 콩이나 난 듯,/ 함박 논 위로 내려앉는다.// 휘이! 손뼉을 치고 네가 줄을 흔들면,/ 벙거지를 쓴 꺼먼 허수아비 착하기도 하지,/ 언제 눈치를 챘는지, 으쓱 어깻짓을 하며 손을 젓는다.// 우! 우! 건넛말 네 동무들이 풋콩을 구워놓고,/ 산모퉁이 모닥불 연기 속에 두 손을 벌려 너를 부르는구나!// 얼싸안고 나는 네 볼에 입맞추고 싶다./ 한 손을 젓고 말없이 웃어 대답하는/ 오오, 착한 네 얼굴.// 들로 불어오는 바람이라고 어찌 마음이 없겠니?/ 덥고 긴 여름 동안 여위어온 네 두 볼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철둑에 선 나뭇잎들마저 흐드러져 웃는구나!// 지금 네 눈앞에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오지게 찬 벼이삭이 누렇게 여물어가듯,/ 푸르고 넓은 하늘 아래 자유롭게 너희들은 자라겠지……/ 자라거라! 자라거라, 초목보다도 더 길길이./ 오오! 그렇지만 내 목이 메인다.// 바람이 불어온다./ 수수밭 콩밭을 지나 네 논 두둑 위에로,/ 참새를 미워하는 네 마음아,/ 한 톨의 벼 알을 뉘 때문에 아끼는고?//

가을바람 / 임화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데,/ 무에라고 네 마음은 종이 풍지처럼 떨고 있니?/ 나는 서글프구나 해맑은 유리창아!/ 그렇게 단단하고 차디찬 네 몸,/ 어느 구석에 우리 누나처럼 슬픈 마음이 들어있니?// 참말로 누가 오라고나 했나?/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달아 와서,/ 그리 마다는 나뭇잎새를 훑어놓고,/ 내 아끼는 유리창을 울리며 인사를 하게.// 너는 그렇게 정말 매몰하냐?/ 그렇지만 나는,/ 영리한 바람아, 네가 정답다./ 재작년, 그러고 더 그 전해에도, 가을이 올 적마다,/ 곁눈 하나 안 떠보고, 내가 청년의 길에 충성되었을 때,/ 내 머리칼을 날리던 너는, 우렁찬 전진의 음악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누구가 퇴각이란 것을 꿈에나 생각했던가?/ 눈보라가 하늘에 닿은 거칠은 벌판도 승리에의 꽃밭이었다.// 오늘……/ 오래된 집은 허물어져 옛 동간 들은 찬 마루판 위에 얽매어 있고,/ 비열한들은 이상과 진리를 죽그릇과 바꾸어,/ 가을비가 낙엽 위에 찬데,/ 부지런한 너는 다시 그때와 같이 내게로 왔구나!// 정답고 영리한 바람아!/ 너는 내 마음이 속삭이는 말귀를 들을 줄 아니, 왜 말이 없느냐?/ 필연코 길가에서 비열한들의 군색한 푸념을 듣고 온 게로구나!/ 입이 없는 유리창이라도 두드리니깐 울지 않니?/ 마음 없는 낙엽조차 떨어지면서, 제 슬픔을 속이지는 않는다.// 짓밟히고 걷어채이면서도, 웃으며 아첨할 것을 잊지 않는 비열한들을,/ 보아라! 영리한 바람아, 저 참말로 미운 인간들이,/ 땅에 내던지는 한 그릇 죽을 주린 개처럼 쫓지 않니?// 불어라, 바람아! 모질고 싸늘한 서릿바람아, 무엇을 거리끼고 생각할까?/ 너는 내 가슴에 괴어 있는 슬픈 생각에도 대답지 말아라./ 곧장 이 평양성(平壤城)의 자욱한 집들의 용마루를 넘어,/ 숲들이 흐득이고 강물이 추위에 우[鳴]는 겨울 벌판으로……/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았으니까……//

벌레 / 임화
사람들이 말하기를,/ 벌레는 하등동물이다./ 참으로 이것을 의심할 수야 없는 것이다.// 하룻날/ 가을바람과 함께 오지게 익어가는 논배미 좁은 길을,/ 이슬진 풀잎을 걷어차며 바닷가에 나아가니,/ 벌써 제철을 보낸 늙은 벌레가 하나,/ 새로 쌓아올린 매축지(埋築地) 시멘트벽을 기어가다,/ 나를 보고 놀라기나 한듯,/ 소스라쳐 물속으로 뒹굴어 떨어진다.// 텀벙……지극히 조그만 소리가 나면서 엷은 파문이/ 마치 못 이기어 인사치레나 하듯 스르르 퍼진다.// 그러나 물결이 한번 돌을 치고 물러갈 때/ 바다는 아까와 다름없이 아침 햇발을 눈부시게 반사한다./ 아직 아무도 밟아본 듯싶지 않은 정한 돈대 위에,/ 좁쌀 같은 새까만 뚱알이 여나문 나란히 벌려 있었다.// 이것은 충분히 늙은 벌레가 죽음으로 가던 길이면서,/ 그가 아직도 살았었노라 하던,/ 최후의 유물임을 누구가 의심할까.// 네가 한 마리 이름 없는 벌레와 다른 게 무엇이냐./ 고지식한 마음이 제출하는 질문의 대답을 찾으려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들었을 제,/ 심히 노한 태양의 표정에/ 두 손으로 나는 얼굴을 가리었다.// 이때 물결이 어머니처럼 이르기를,/ 사람은 봄에 났다 가을에 죽는 벌레는 아니니라.// 벌레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도 이젠 소용이 없는가?/ 포구 저쪽으로 물결은 돌아갔다//.

안개 속 / 임화
하늘 땅 속속들이/ 먹 위에 먹을 갈아 부었다./ 발부리조차 안 뵌다만,/ 나는 아직도 외롭지 않다.// 비가 흩뿌리더니,/ 우뢰가 요란하고,/ 번개가 날카롭고,/ 드디어 내 잠자는 마을,/ 뭇 집 들창이 캄캄하다./ 길 가 불들도 꺼졌다./ 별도, 달도,…….// 밀물처럼 네가 쓸어와,/ 다시는 불도/ 내일 낮도 없을 듯하더라만,/ 나의 마을 사람들은 대견하더라!/ 앞을 다투어 깜북 깜북// 여러 들창이 환하니/ 흐득임을 보아,/ 오무러졌다 펴는 불촉이 분명타.// 길 가는 나그네들이/ 나비떼처럼 불 가로 찾아든다./ 볼이 패이고 뼛골이 드러났다./ 별빛보다 희미한 들창이/ 그들에 역력한 고난을 비친다./ 정녕 몇 사람을/ 너는 험한 길 위에 죽었을 게다.// 네 손은 아귀가 세고 끈끈하다./ 부썩 힘을 주어 움키면,/ 아무것이고 다 부여잡히리랴만,/ 모래알처럼/ 손가락 틈을 새는 것이 있으리라./ 꼭 쥐면 쥘수록 틈이 번다./ 안개 끼인 밤에는/ 호롱불이 보름달 같으니라.// 물론 나그네들이야 집도 없고 길도 멀다./ 그 대신 희망이 꽉 찼더라./ 눈동자는 굴속 같아야,/ 한 점 불이 별 같고,/ 가슴은 한층 밝아,/ 밤새도록 환히 아름답더라./ 내야 눈마저 흐리다만,/ 아직 외롭지 않다.//

일년(一年) / 임화
나는 아끼지 않으련다./ 낙엽이 저 눈발이 덮인/ 시골 능금나무의 청용(靑容)과 장년(壯年)을……/ 언제나 너는 가고 오지 않는 것.// 오늘도 들창에는 흰 구름이 지나가고,/ 참새들이 꾀꼬리처럼 지저귄다./ 모란꽃이 붉던 작년 오월,/ 지금은 기억(記憶)마저 구금 되었는가?// 나의 일년이여, 짧고 긴 세월이여!/ 노도(怒濤)에도, 달콤한 봄바람에도,/ 한결같이 묵묵하던 네 표정을 나는 안다,/ 허나 그렇게도 일년은 정말 평화로웠는가?// ‘피녀(彼女)’는 단지 희망하는 마음까지/ 범죄 그 사나운 눈알로 흘겨본다./ 나의 삶이여! 너는 한바탕의 꿈이려느냐?/ 한간 방은 오늘도 납처럼 무겁다.// 재빠른 가을바람은 멀지 않아,/ 버들잎을 한 움큼 저 창(窓) 틈으로,/ 지난해처럼 훑어 넣고 달아나겠지,/ 마치 올해도 세계는 이렇다는 듯이.// 그러나 한개 여윈 청년은 아직 살았고,/ 또다시 우리 집 능금이 익어 가을이 되리라./ 눈 속을 스미는 가는 샘이 대해에 나가 노도를 이룰 때,/ 일년이여, 너는 그들을 위하여 군호를 불러라.// 나는 아끼지 않으련다, 잊어진 시절을./ 일년 평온무사한 바위 아래 생명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넓고 큰 대양의 앞날을 향하여,/ 지금 적막한 여로를 지키는 너에게 나는 정성껏 인사한다.//

하늘 / 임화
감이 붉은 시골 가을이/ 아득히 푸른 하늘에 놀 갈은/ 미결사의 가을 해가 밤보다도 길다.// 갔다가 오고, 왔다가 가고,/ 한간 좁은 방 벽은 두터워,/ 높은 들창 가에/ 하늘은 어린애처럼 찰락어리는 바다.// 나의 생각하고 궁리하던 이것저것을,/ 다 너의 물결 위에 실어,/ 구름이 흐르는 곳으로 띄워볼까!// 동해바다 가에 적은 촌은,/ 어머니가 있는 내 고향이고,/ 한강 물이 숭얼대는/ 영등포 붉은 언덕은,/ 목숨을 바쳤던 나의 전장.// 오늘도 연기는/ 구름보다 높고,/ 누구이고 청년이 몇,/ 너무나 좁은 하늘을/ 넓은 희망의 눈동자 속 깊이/ 호수처럼 담으리라.// 벌리는 팔이 아무리 좁아도,/ 오오! 하늘보다 너른 나의 바다.//

최후(最後)의 염원(念願) / 임화
얼마나 크고,/ 얼마나 두려운 힘이기에,/ 세월이여! 너는/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 왔느냐?// 밀치고, 또/ 박차고 하면,/ 급기야 나는/ 최후의 항구로 외로이/ 돌아오지 않는 손이 되리라만,/ 낙일(落日)이여! 나에겐,/ 아직 한마디 말이 있다.// 참말 머리 위엔/ 별 하나이 없고,/ 어둔 하늘이/ 홍수처럼/ 산하를 덮어,/ 한자욱 발길조차/ 나의 고향을/ 밟을 수가 없다면,// 아아, 꺼지려는 눈아!/ 네 빛이 흐리기 전에,/ 차라리 나는/ 호화로이 밤하늘에 흩어지는/ 오색 불꽃에,/ 아름다운 운명을/ 배우련다.// 최후의 염원이여!/ 너는 나의/ 즐거움이냐? 슬픔이냐?//

주유(侏儒)의 노래 / 임화
나의 마음은 괴롭노라……/ 제군은 나의 이런 탄식을 좋아한다.// 어쩌다 나의 노래가 울음이 될 양이면,/ 제군은 한층 더 나를 사랑한다.// 오!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 제군은 벌써 열광하고 있다.// 물론 나는 잘 안다./ 제군들이 비극을 사랑하는 높은 취미를…….// 막 끝이 되면 주인공은 병아리처럼 쓰러지고,/ 제군은 고조된 비극미에 취할 듯하다.// 하물며 비극의 종말이 가져오는 일장의 희극,/ 제군, 요컨대 나의 말로를 보고 싶다는 게지!// 경애하는 제군, 만일 시이저가, 결코 제군이 아니라, 시이저가,/ 성병(聖餅)의 맛을 경계했다면, 파탄은 좀더 연기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한 번, 아니, 얼마든지 말해줄까?/ 제군, 실로 나의 마음은 괴롭노라.//

적(敵) -네 만일 너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이는 사랑이 아니니라. 너의 적을 사랑하고 너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 「복음서」 / 임화
1/ 너희들의 적을 사랑하라―/ 나는 이때 예수교도임을 자랑한다.// 적이 나를 죽도록 미워했을 때,/ 나는 적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미움을 배웠다./ 적이 내 벗을 죽음으로써 괴롭혔을 때,/ 나는 우정을 적에 대한 잔인으로 고치었다./ 적이 드디어 내 벗의 한사람을 죽였을 때,/ 나는 복수의 비싼 진리를 배웠다./ 적이 우리들의 모두를 노리었을 때,/ 나는 곧 섬멸의 수학을 배웠다.// 적이여! 너는 내 최대의 교사,/ 사랑스런 것! 너의 이름은 적이다.// 2/ 때로 내가 이 수학 공부에 게을렀을 때,/ 적이여! 너는 칼날을 가지고 나에게 근면을 가르치었다./ 때로 내가 무모한 돌격을 시험했을 때,/ 적이여! 너는 아픈 타격으로 전진을 위한 퇴각을 가르치었다.// 때로 내가 비겁하게도 진격을 주저했을 때,/ 적이여! 너는 뜻하지 않은 공격으로 나에게 전진을 가르치었다./ 만일 네가 없으면 참말로 사칙법(四則法)도 모를 우리에게,/ 적이여! 너는 전진과 퇴각의 고등수학을 가르치었다.// 패배의 이슬이 찬 우리들의 잔등 위에 너의 참혹한 육박이 없었더면,/ 적이여! 어찌 우리들의 가슴속에 사는 청춘의 정신이 불탔겠는가?// 오오! 사랑스럽기 한이 없는 나의 필생의 동무/ 적이여! 정말 너는 우리들의 용기다.// 너의 적을 사랑하라!/ 복음서는 나의 광영이다.//

지상(地上)의 시(詩) / 임화
태초에 말이 있느니라……/ 인간은 고약한 전통을 가진 동물이다./ 행위하지 않는 말,/ 말을 말하는 말,/ 이브가 아담에게 따 준 무화과의 비밀은,/ 실상 지혜의 온갖 수다 속에 있었다.// 포만의 이야기로 기아를,/ 천상의 노래로 지옥의 고통을,/ 어리석게도 인간은 곧잘 바꾸었었다,/ 그러나 지상의 빵으로 배부른 사람은/ 과연 하나도 없었던가?/ 신성한 지혜여! 광영이 있으라.// 온전히 운명이란, 말 이상이다./ 단지 사람은 말할 수 있는 운명을 가진 것,/ 운명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말을 가진 것이,/ 침묵한 행위자인 도야지보다 우월한 점이다./ 말을 행위로,/ 행위를 말로,/ 자유로 번역할 수 있는 기능/ 그것이 시의 최고의 원리./ 지상의 시는/ 지혜의 허위를 깨뜨릴 뿐 아니라,/ 분명히 태초의 행위가 있다…….//

너 하나 때문에 / 임화
오직 있는 것은/ 광영 하나뿐이고,/ 정녕 굴욕이란 없는가?/ 있어도 없는 것인가?/ 만일 싸움만 없다면…….// 그러나 싸움이 없다면,/ 둘이 다 없는 것,/ 싸움이야말로/ 광영과 굴욕의 어머니,/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 패배의 피가/ 승리의 포도주를 빚는 것도,/ 굴욕이/ 광영의 향료를 끄어내는 것도,/ 모두 다 싸움의 넓은 바다.// 바다는/ 넓이도 깊이도 없어,/ 승리가 실컨/ 제 즐거움의 진주를 떠내고,/ 패배이 죽도록/ 제 아픔의 고귀한 값을 알아내는 곳.// 회복될 수 없는/ 굴욕의/ ―제군은 이 말의 의미를 아는가?/ 아프고 아픈 상처가,/ 붉은 피가/ 장미 떨기처럼 피어나는 곳.// 아아! 너 하나, 너 하나 때문에,/ 굴욕마저를 사랑한다.//

홍수(洪水) 뒤 / 임화
하나도 아니었고,/ 둘도 아니었다.// 활개를 젓고 건너가,/ 죽지를 늘이고 돌아온/ 이 항구의 추억은,/ 참말 열도 아니었다.// 그러나 굳건하던/ 작고 큰 집들이/ 터문도 없이 휩쓸려 간/ 홍수 뒤,/ 황무지의 밤바람은/ 너무도 맵고 거칠어.// 언제인가 하루아침,/ 맑은 희망의 나발이었던/ 고동 소린 오늘 밤,/ 청춘의 구슬픈 매장의 노래 같아야,// 고향의 부두를 밟는/ 나의 무릎은 얼듯 차다.// 긴 밤차가 닫는 곳,/ 나의 벗들을 사로잡은/ 차디찬 운명 속에서도,/ 청년의 자랑은/ 꺼지지 않는 등촉처럼 밟았으면……// 아아 이 하나로 나는/ 평생의 보배를 삼으련다.//

야행차(夜行車) 속 / 임화
사투리는 매우 알아듣기 어렵다./ 허지만 젓가락으로 밥을 날라가는 어색한 모양은,/ 그 까만 얼굴과 더불어 몹시 낯익다.// 너는 내 방법으로 내어버린 벤또를 먹는구나.// “젓갈이나 걷어 가주올 게지……”/ 혀를 차는 네 늙은 아버지는/ 자리가 없어 일어선 채 부채질을 한다./ 글쎄 옆에 앉은 점잔한 사람이 수건으로 코를 막는구나.// 아직 멀었는가 추풍령(秋風嶺)은……/ 그믐밤이라 정거장 표말도 안 보인다./ 답답워라 산인지 들인지 대체 지금 어디를 지나는지?// 나으리들뿐이라, 누구한테 엄두를 내어/ 물을 수도 없구나.// 다시 한 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양복장이는 모를 말을 지저귄다./ 아마 그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아나보다./ 되놈의 땅으로 농사 가는 줄을 누가 모르나./ 면소(面所)에서 준 표 지(紙)를 보지, 하도 지척도 안 뵈니까 그렇지!// 차가 덜컹 소리를 치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필연코 어제 아이들이 돌멩이를 놓고 달아난 게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에 너 그 사이다병은 집어넣어 무얼 할 때./ 오호 착해라, 그래도 누이 시집갈 제 기름병을 할라고…….// 노하지 마라 너의 아버지는 소 같구나./ 빠가! 잠결에 기대인 늙은이의 머리를 밀쳐도,/ 엄마도 아빠도 말이 없고 허리만 굽히니……// 오오, 물소리가 들린다 넓고 긴 낙동강에…….// 대체 어디를 가야 이 밤이 샐까?/ 애들아, 서있는 네 다리가 얼마나 아프겠니?/ 차는 한창 강가를 달리는지,/ 물소리가 몹시 정다웁다./ 필연코 고향의 강물은 이 꼴을 보고 노했을 게다.//

해협(海峽)의 로맨티시즘 / 임화
바다는 잘 육착한 몸을 뒤척인다./ 해협 밑 잠자리는 꽤 거친 모양이다.// 맑게 갠 새파란 하늘/ 높다란 해가 어느새 한낮의 카브를 꺾는다./ 물새가 멀리 날아가는 곳,/ 부산 부두는 벌서 아득한 고향의 포구인가!// 그의 발밑,/ 하늘보다도 푸른 바다,/ 태양이 기름처럼 풀려,/ 뱃전을 치고 뒤로 흘러가니,/ 옷깃이 머리칼처럼 바람에 흩날린다.// 아마 그는/ 일본 열도(列島)의 긴 그림자를 바라보는 게다./ 흰 얼굴에는 분명히/ 가슴의 ‘로맨티시즘’이 물결치고 있다.// 예술, 학문, 움직일 수 없는 진리……/ 그의 꿈꾸는 사상이 높다랗게 굽이치는 동경(東京),/ 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 다시 이 바다 물결 위에 올랐을 때,/ 나는 슬픈 고향의 한 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청년의 가슴은 바다보다 더 설레었다.// 바람 잔 바다,/ 무더운 삼복의 고요한 대낮,/ 이천오백 돈(噸)의 큰 기선이/ 앞으로 앞으로 내닫는 갑판 위,/ 흰 난간 가에 벗어젖힌 가슴,/ 벌건 살결에 부딪치는 바람은 얼마나 시원한가!// 그를 둘러 산 모든 것,/ 고깃배들을 피하면서 내뿜는 고동 소리도,/ 희망의 항구로 들어가는 군호 같다./ 내려앉았다 떴다 넘노니는 물새를 따라,/ 그의 눈은 몹시 한가로울 제/ 뱃머리가 삑! 오른편으로 틀어졌다.// 훤히 트이는 수평선은 희망처럼 넓구나!/ 오오! 점점이 널린 검은 그림자,/ 그것은 벌써 나의 섬들인가?/ 물새들이 놀라 흩어지고 물결이 높다./ 해협의 한낮은 꿈 같이 허물어졌다.// 몽롱한 연기,/ 희고 빛나는 은빛 날개,/ 우뢰 같은 음향,/ 바다의 왕자가 호랑이처럼 다가오는 그 앞을,/ 기웃거리며 지내는 흰 배는 정말 토끼 같다.// ‘반사이!’ ‘반사이!’ ‘다이닛……’/ 이등 캐빈이 떠나갈 듯한 아우성은,/ 감격인가? 협위인가?/ 깃발이 ‘마스트’ 높이 기어 올라갈 제,/ 청년의 가슴에는 굵은 돌이 내려앉았다.// 어떠한 불덩이가,/ 과연 층계를 내려가는 그의 머리보다도/ 더 뜨거웠을까?/ 어머니를 부르는, 어린애를 부르는,/ 남도 사투리,/ 오오! 왜 그것은 눈물을 자아내는가?// 정말로 무서운 것이……/ 불붙는 신념보다도 무서운 것이……/ 청년! 오오, 자랑스러운 이름아!/ 적이 클수록 승리도 크구나.// 삼등 선실 밑/ 동그란 유리창을 내다보고 내다보고,/ 손가락을 입으로 깨물을 때,/ 깊은 바다의 검푸른 물결이 왈칵/ 해일처럼 그의 가슴에 넘쳤다.// 오오, 해협의 낭만주의여!//

밤 갑판(甲板) 위 / 임화
너른 바다 위엔 새 한 마리 없고,/ 검은 하늘이 바다를 덮었다.//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배는 한 곳에 머물러 흔들리기만 하느냐?// 별들이 물결에 부딪혀 알알이 부서지는 밤,/ 가는 길조차 헤아릴 수 없이 밤은 어둡구나!/ 그리운 이야 그대가 선 보리밭 우에 제비가 떴다./ 깨끗한 눈가엔 이따금 향기론 머리같이 날린다./ 좁은 앙가슴이 비둘기처럼 부풀어 올라,/ 동그란 눈물 속엔 설음이 사무쳤더라.// 고향은 물도 좋고, 바다도 맑고, 하늘도 푸르고,/ 그대 마음씨는 생각할수록 아름답다만,/ 울음소리 들린다, 가을바람이 부나 보다.// 낙동강 가 구포벌 위 갈꽃 나부끼고,/ 깊은 밤 정거장 등잔이 껌벅인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누이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건넛마을 불들도 반짝이고, 느티나무도 꺼멓고, 앞내도 환하고,/ 벌레들도 울고, 사람들도 울고,// 기어코 오늘밤 또 이민열차가 떠나나보다.// 그리운 이야! 기약한 여름도 지나갔다./ 밤바람이 서리보다도 얼굴에 차,/ 벌써 한해 넘어 외방 별 아래 옷깃은 찌들었다.// 굶는가, 앓는가, 무사한가?// 죽었는가 살았는가도 알 수 없는/ 년의 길은 참말 가혹하다.// 그대 소식 나는 알 길이 없구나!// 어느 누군 사랑엔 입맛도 잃는다더라만,/ 이 바다 위 그대를 생각함조차 부끄럽다.// 물결이 출렁 밀려오고, 밀려가고,/ 그대는 고향에 자는가?/ 나는 다시 이 바다 뱃길에 올랐다.// 현해(玄海) 바다 저쪽 큰 별 하나이 우리의 머리 위를 비칠 뿐,/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을 모르는 않는다만,/ 아아, 우리는 스스로 명령에 순종하는 청년이다.//

해상(海上)에서 / 임화
가라앉듯 멀리/ 대마도 남단은 수평선 위에 스러졌다.// 동그란 해가 어느새 붉게 풀려,/ 남쪽으로 남쪽으로 흐르는 곳,/ 드문드문 검은 점들은 유구열도(流球列島)인가?// 물새들도 어느새 검은 옷을 입어,/ 눈 선 나그네를 희롱듯 노니는구나!// 아아! 불빛이 보인다./ 어렴풋 관문해협(關門海峽)의 저녁 불들이/ 그 가운데는 붉고 푸른 불들도 있다.// 연락선은 곤두설 듯 속력(速力)을 돋운다만,/ 인제 고향은 아득히 멀어졌고,/ 나는 저 곳 산천의 이름도 못 들었다.// ―정녕 이곳에 고향으로 가지고갈 보배가 있는가?/ ―나는 학생으로부터 무엇이 되어 돌아갈 것인가?// 가슴을 짚어보아라,/ 하얗고 가는 손아,// 누구가 이러한 저녁/ 청년들의 가슴 위에 얹힌/ 떨리는 손에 흐르는/ 더운 맥박을 짐작하겠는가.// 태평양, 태평양 넓은 바다여!// 일본열도 저 위/ 지금 큰 별 하나이 번적였다./ 내일 하늘엔 어떤 바람이 불 것인가?// 배는 아직 바다 위에 떠있고,/ 인제 겨우 동해도연선(東海道沿線)의 긴 열차는 들어온 듯하나,// 아아! 나는 두 손을 벌리어 하늘을 안고,/ 목적한 땅 위에 서 물결치는 태평양을 향하여/ 고함을 지른다.//

황무지(荒蕪地) / 임화
도망해 나온 시골 어머니가/ 밤마다 머리맡에 울더라만,/ 끝내 나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늙고 병들어 벌서 땅에 묻혔다./ 그래야 나는 산소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도, 고향도,/ 나에게는 소용없었다./ 나는 젊은 청년이다…….// 자랑이 가슴에 그뜩하여,/ 배가 부산 부두를 떠날 때도,/ 고동 소리가 나팔처럼 우렁만 찼다.// 어느 한구석 눈물이 있을 리 없어,/ 그 자리에 내 좋아하는 누이나 연인이 죽는대도,/ 왼눈 하나 깜짝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강을 건너는 내 마음은,/ 웬일인지 소년처럼 흔들리고 있다./ 차가 철교를 건너는 소리가 요란이야 하다,/ 그렇지만 엎어지려는 뱃간에서도,/ 나는 무릎 한번 안 굽혔다.// 대체 네가 무엇이기에,/ 아아! 메마른 들 헐벗은 산,/ 그다지도 너는 내게 가까웠던가!// 벌써 강판은 얼어,/ 너른 구포벌엔 황토 한 점 안 보인다./ 눈발이 부연 하늘 아래,/ 나는 기차를 타고 추풍령을 넘어,/ 서울로 간다./ 서울은 나의 고향에서도 천리,/ 다만 나의 어깨의 짐을 풀 곳일 따름이다.// 자꾸만 차창을 흔드는 바람 소린,/ 슬픈 자장일가? 아픈 신음소릴까?/ ―아이들을 기르고 어머니를 죽인,// 아아! 오막들도 전보다 얕아지고,/ 인제 밤에는 호롱불 하나이 없이 산단구나.// 황무지여! 황무지여!/ 너는 아는가?/ 청년들이 어떤 열차를 탔는가를…….//

향수(愁鄕) / 임화
고향은/ 인제 먼 반도에/ 뿌리치듯/ 버리고 나와,// 기억마저/ 희미하고,/ 옛일은/ 생각할수록/ 쓰라리다만,// 아아! 지금은 오월/ 한창 때다.// 종달새들이/ 팔매 친 돌처럼/ 곧장/ 달아 올라가고,/ 이슬방울들이/ 조으는,/ 초록빛 밀밭 위,// 어루만지듯/ 미풍이 불면,/ 햇발들은/ 화분(花粉)처럼 흩어져.// 두 손을 벌려,/ 호랑나비를 쫓던/ 도랑가의 꿈이,/ 아직도/ 어항 속에/ 붕어처럼/ 맑다만.// 지금은 오월/ 한창때// 소낙비가 지나간/ 도회의 포도(舖道) 위/ 한줌 물속에,// 아아! 나는/ 오월의/ 푸른 하늘을 보며,/ 허위대듯/ 잊기 어려운/ 나비를 쫓고 있다.//

내 청춘(靑春)에 바치노라 / 임화
그들은 하나도/ 어디 태생인질 몰랐다./ 아무도 서로 묻지 않고,/ 이야기 하려고도 안했다.// 나라와 말과 부모의 다름은/ 그들의 우정의 한 자랑일 뿐./ 사람들을 갈라놓는 장벽이,/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얽어매듯 한데 모아,// 경멸과 질투와 시기와/ 미움으로 밖엔,/ 서로 대할 수 없게 만든 하늘 아래,/ 그들은 밤바람에 항거하는/ 작고 큰 파도들이,/ 한 대양에 어울리듯,// 그것과 맞서는 정열을 가지고,/ 한 머리 아래 손발처럼 화목하였다./ 일찍이 어떤 피일지라도,/ 그들과 같은 우정을 낳지는 못했으리라.// 높은 예지, 새 시대의 총명만이,/ 비로소 낡은 피로 흐릴/ 정열을 씻은 것이다.// 오로지 수정 모양으로 맑은 태양이,/ 환하니 밝은 들판 위를/ 경주하는 아이들처럼, 그들은/ 곧장 앞을 항하여 뛰어가면 그만이다.// 어미를 팔아 동무를 사러 간다는 둥,/ 낡은 고향은 그들의 잔등 위에/ 온갖 추접한 낙인(烙印)을 찍었으나,/ 온전히 다른 말들이 부르는/ 단 한 줄기 곡조는,/ 얼마나 아름다웠느냐?// 미여진 구두와 헌 옷 아래/ 서릿발처럼 매운 고난 속에/ 아 슬픔까지가/ 자랑스러운 즐거움이었던/ 그들 청년의 행복이 있었다.//

지도(地圖) / 임화
두 번 고치지 못할 운명은/ 이미 바다 저쪽에서 굳었겠다./ 바라보이는 것은 한가닥 길뿐,/ 나는 반도의 새 지도를 폈다.// 나의 눈이 외국 사람처럼/ 서툴리 방황하는 지도 위에/ 몇 번 새 시대는 제 낙인을 찍었느냐?/ 꾸긴 지도를 밟았다 놓는/ 손발이 내 어깨를 누르는 무게가/ 분명히 심장 속에 파고 든다.// 이 새 문화의 촘촘한 그물 밑에/ 나는 전선줄을 끊고 철로길에 누웠던/ 옛날 어른들의 슬픈 미신을 추억한다.// 비록 늙은 어버이들의 아픈 신음이나,/ 벗들의 괴로운 숨소리는,/ 두려운 침묵 속에 잠잠하여,/ 희망이란 큰 수부(首府)에 닿는 길이/ 경부철로(京釜鐵路)처럼 곱다 안할지라도,/ 아! 벗들아, 나의 눈은/ 그대들이 별처럼 흩어져 있는,/ 남북 몇 곳 위에 불똥처럼 발가니 달고 있다.// 산맥과 강과 평원과 구릉이여!/ 내일 나의 조그만 운명이 결정될/ 어느 한 곳을 집는 가는 손길이,/ 떨리며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이름도 없는 일 청년이 바야흐로/ 어떤 도시 위에 자기의 이름자를 붙여,/ 불멸한 기념을 삼으려는,/ 엄청난 생각을 품고 바다를 건너던,/ 어느 해 여름밤을/ 너는 축복(祝福)지 않으려느냐?// 나는 대륙과 해양과 그러고 성신(星辰) 태양(太陽)과,/ 나의 반도가 만들어진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우리들이 사는 세계의 도면이 만들어진/ 복잡하고 곤란한 내력을 안다.// 그것은 무수한 인간의 존귀한 생명과,/ 크나큰 역사의 구둣발이 지나간,/ 너무나 뚜렷한 발자욱이 아니냐?// 한 번도 뚜렷이 불려보지 못한 채,/ 청년의 아름다운 이름이 땅 속에 묻힐지라도,/ 지금 우리가 일로부터 만들어질/ 새 지도의 젊은 화공(畵工)의 한 사람이란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삼등 선실 밑에 홀로,/ 별들이 찬란한 천공(天空)보다 아름다운/ 새 지도를 멍석처럼 쫙 펼쳐보는/ 한 여름밤아, 광영이 있거라.//

어린 태양(太陽)이 말하되 / 임화
알지 못할 새/ 조그만 태양이 된/ 나의 마음에/ 고향은/ 멀어갈수록 커졌다.// 누구 하나/ 남기고 오지 않았고,/ 못 잊을/ 풀 한 포기 없건만,/ 기적이 울고/ 대륙에 닿은 한 가닥 줄이/ 최후로 풀어지며,/ 그만 물새처럼/ 나는 외로워졌다.// 잊어버리었던 고향의/ 어둔 실현의 무게가/ 떠오르려는 어린 태양을/ 바다 속으로 누를 듯/ 사납다만./ 나무 하나 없는/ 하늘과 바다 사이/ 구름과 바람을 뚫고,/ 하룻저녁/ 너른 수평선 아래로,/ 아름다이 가라앉는/ 낙일(落日)이,/ 나의 가슴에/ 놀처럼 붉다.// 이제는 먼 고향이여!/ 감당하기 어려운 괴로움으로/ 나를 내치고,/ 이내 아픈 신음 소리로/ 나를 부르는/ 그대의 마음은/ 너무나 진망궂은/ 청년들의 운명이구나!// 참아야 할 고난은/ 나의 용기를 돋우고,/ 외로움은/ 나의 용기 위에/ 또 한 가지 광채를 더했으면……// 아아, 나의 대륙아!/ 그대의 말없는 운명 가운데/ 나는 우리의 무덤 앞에 설/ 비석의 글발을 읽는다.//

고향(故鄕)을 지나며 / 임화
당신의 마을은 이미 잠들었습니까?/ 등불 하나이 없이 캄캄하니 답답습니다.// 여기 그대 아들이 있습니다.// 부산을 떠난 막차가 환하니 달리지 않습니까?/ 개 소리 한마디 들림직 하건만 하늘과 땅이 소리도 없습니다.// 두렵습니다. 누런 수캐란 놈도 혹여 양식이 되지나 않았습니까?// 인젠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림도 속절없다./ 주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집도 다하고,/ 기름도 마르고, 기운도 지쳐,// 아아, 마음 아픕니다. 죽은 듯 마당에 쓰러지지나 않았습니까?// 기적이 우니 차가 굴속에 드나봅니다./ 안타깝습니다, 이제 고향은 눈앞에 스러지렵니다.// 어머님 묻힌 건넛산 위 별들이 눈물 어렸습니다.// 인제 내 하나가 있고, 벼락 맞은 수양이 섰고,/ 그대가 늘 소를 매어 여름이면 파리가 왕왕 끓었습니다.// 아들이 마을 전설과 옛 노래를 익힌 곳도 게 아닙니까?// 오는 새벽 비가 내리면, 그대는 또 괭이를 잡고, 논 가운데십니까?/ 당신의 굽은 등골의 아픔이 아들의 온몸에 사무칩니다.// 아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대 슬픔은 너무나 큽니다./ 그대 정숙한 아내도 이 속에 죽었고,/ 당신의 청승궂은 자장가로 자란 누이도 이 속에 죽고,// 그만 떨치고 일어나, 당신을 받들 먼 날을 그리어 내지로 간/ 아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오는 아들의 손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흙방 위에 꼬부리고 누운 그대를 헛되이 눈감아 생각할 뿐.// 한 되는 일입니다. 그대 이름 부를 자유도 없습니다./ 곧장 내일 아침 지정받은 곳에 닿아야 합니다./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은 준엄한 길입니다.// 그대여! 당신은 아들의 길을 축복합니까?// 그대 무릎 아래 다시 엎드려 볼 기약도 막막한,/ 슬픈 길이 북쪽으로 뻔하니 뚫렸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압니까, 아들의 길이 눈물보다도 영광의 어린 것을……//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호올로 흐르는 그대의 눈물이/ 아들의 타는 마음속에 기름을 붓는 비밀을.// 아아!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다시 인젠 천공(天空)에 성좌(星座)가 있을 필요(必要)가 없다 / 임화
바다, 어둔 바다,/ 쭉 건너간 수평선 위,// 다시 인젠/ 별들이 깜박일 필요는 없다.// 파도 위 하늘 아래,/ 일찍이 용사이었던.// 그러니라……/ ―뱃머리를 돌려라,// 돛을 꼬부리고./ 남풍이다./ 에헷! 그물 줄을 늦추고.// 이마 위에 한 손을 얹고,/ 하늘을 우러러 얼굴을 들면,/ 별들은 꽃봉오리처럼/ 아름다웠다.// 별들은 결코 속이지 않았다.// 우리의 가슴은 바다인 듯,/ 고기들과 조개의 온갖 비밀을 알았고,/ 은하 오리온 먼 대웅(大熊)의/ 조그만 속삭임 하나,/ 우리의 귀는 빼놓지 않았다.// 우리의 몸은 새보다도/ 날래고 자유로워,/ 바람이나 파도는/ 얼른 우리 앞에 맞서지를 못했다.// 거친 파도와 바람이,/ 우리들의 가슴속에 묻어 놓은 것은,/ 자신과 굳은 신념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밤 얼굴의/ 깊은 주림과 꺼진 눈자위가/ 밤하늘보다 오히려 어두워,/ 타고 있는 조그만 배가/ 장차 닿을 항구의 이름조차 알 수가 없다.// 살림의 물결, 가난의 바람은,/ 현해 바다보다도 거세게 매웠던가?// 마음과 얼굴에 함부로 파진,/ 깊고 어둔 골창들은/ 험한 생애의 풍우(風雨)가 물어뜯은/ 지울 수 없는 상처들.// 그곳에서 흐른/ 아프고 붉은 이야기가,/ 고향의 온갖 들과 내 위에/ 노래가 되어 흐르고 있다.// 푸른 잎, 붉은 꽃과, 누른 열매,/ 가없는 하늘 밑에 드러누운 대륙의/ 헤아리기 어려운 삼림을 기르랴/ 너무나 비싼 생명들은 노가,// 아아! 벌써 한개 숙명인 얼굴에,/ 그 메마른 피부 위에/ 어둔 해협의 밤바람이 부딪친다.// 앞에도 뒤에도 얼굴/ 아낙네, 아이, 어른, 한줌의 얼굴들// ―눈들은 제각각 알지 못할 운명에 촛불처럼 떨고 있다.// 대체 이런 똑같은 얼굴들아,/ 아아! 그대들은 다 형제인가……/ 통 통 통 통/ 국법을 어기는 명백한 음향이/ 현해 어둔 바다 하늘 위에 떨린다.// ―아아 북구주 해안엔/ 대체 무엇이 기다린단 말인가!// 쳇 쓸데없는 별들이다.// 인젠 곱다란 연락선 갑판 위/ 성장(盛裝)한 손들 머리 위나 빛나거라.// ―너희는/ 그들의 사랑과 축복의 꽃다발이리라.// 몇 번 너희들은 이러한 밤,/ 정말 몇 번/ 눈 밝은 경비선을 안내했는가?// 듣거라, 하늘아!/ 다시 인젠/ 바다 위에 성좌가 있을 필요는 없다.//

월하(月下)의 대화(對話) / 임화
몇 시……/ 두 시.// 삐걱! 뱃전이 울었다.// 물결이 높지요!/ 달이 밝습니다.// 바다가 설레를 쳤다.// 얼마나 왔을까요?/ 반 넘어 왔습니다.// 아직 조선반도는 안 보였다.// 아버님이……/ 아니요, 조선이, 세상이,// 달이 구름 속에 숨었다.// 무서워요,/ 바다가?……// 청년은 여자를 끌어안았다.// 아아! 당신을……/ 나도 당신을……/ 둘이 함께 “인생도 없습니다.”// 물결이 질겁을 해 물러섰다.// 그 다음/ 여자가 어찌했는지,/ 청년이 어찌했는지,// 본 이가 없으니, 울 이도 웃을 이도 없고,/ 나란히 놓인/ 남녀의 구두가 한 쌍,// 갑판 위엔 유명한 춘화(春畫)가 한 폭 남았다.// ―일봉이 좋기사 좋습디더/ ―아모덴 와? 없어 병이구마// 삼등선실 밑엔 남도 사투리가 한창 곤하다.// 어느 해 여름 현해탄 위,/ 새벽도 멀고,/ 마스트 위엔 등불이 자꾸만 껌벅였다.//

눈물의 해협(海峽) / 임화
아기야, 너는 자장가도 없이 혼곤히 잔다./ 너는 인제서야 잠이 들었다만,/ 너무나 오랫동안 보채어,/ 좁은 목이 칼칼하니 쉬었다.// 너는 오늘밤/ 이 해협 위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의 단 한 가지 의미도 깨닫지 못하고 잔다.// 바람이 지금 바다 위에서 무엇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너는 모른다./ 물결이 갑판 위에서 무엇을 쓸어가고 있는지도 너는 모른다./ 물밑에 어족(魚族)들이 무엇을 탐내고 있는지도 너는 모른다./ 이따금,/ 동그란 유리창을 들여다보는 것이 정녕 주검의 검은 그림자인 것도 너는 모른다.// 아마 우리를 실은 큰 배가,/ 수평선 아래로 영원히 가라앉는 비창한 통곡의 순간이 온다 해도,/ 너의 고운 잠은 깨이지 않으리라.// 아기야, 너는 오늘밤,/ 이 바다 위에 기적의 손길이 미쳐 있는 줄 아느냐?// 눈물이 흐른다./ 현해탄 넓은 바다 위/ 지금 젖꼭지를 물고 누워/ 뒹굴을 듯 흔들리는 네 두 볼 위에,/ 하염없이 눈물만이 흐른다.// 아기야, 네 젊은 어머니의 눈물 속엔,/ 무엇이 들어있는 줄 아느냐?/ 한 방울 눈물 속엔/ 일찍이 네가 알고 보지 못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자라난 요람의 옛 노래가 들어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뜯던 봄나물과 꽃의 맑은 향기가 들어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꿈꾸던 청춘의 공상이 들어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갈아붙인 땅의 흙내가 들어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어루만지던 푸른 보리밭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안아보던 누른 볏단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걸어가던 촌 눈길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나무를 베던 산의 그윽한 냄새가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죽이던 도야지의 비명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듣던 외방 욕설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받았던 집행 표지가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작별한 멀리 간 동기의 추억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떠나 온 고향의 매운 정경이 있다./ 이 속엔 그이들이 이따금 생각했던 다툼의 뜨거운 불길도 있다.// 참말로 한 방울 눈물 속은 이 모든 것이 들어있기엔 너무나 좁다./ 그러므로 눈물은 떨어지면 이내 물처럼 흘러가지 않느냐?// 나의 아기야, 그래도 이 속엔 아직 그들의 탄 배의 이름도 닿을 항구의 이름도 없고,/ 이 바다를 건너 간 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조금도 똑똑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바람과 파도와 그밖에 온갖 악천후에 대하여,/ 눈물은 다만 하염없을 따름이다.// 밝은 날 아침 다행히 물결과 바람이 자서/ 우리의 배가 어느 항구에 들어간대도 이내 세 운명이 까마귀처럼 소리칠 게다./ 나는 그 고이한 소리가 열어놓는 너의 소년과 청춘의 긴 시절을 생각한다./ 아기야, 해협의 밤은 너무나 두려웁다.// 우리들이 탄 큰 배를 잡아 흔드는 것은 과연 바람이냐? 물결이냐?/ 아! 그것은 현해탄이란 바다의 이상한 운명이 아니냐?/ 너와 나는 한 줄에 묶여 나무토막처럼 이 바다 위를 떠 가고 있다.// 아기야, 너는 어찌 이 바다를 헤어가려느냐?/ 날씨는 사납고,/ 아직 너는 어리고,/ 어버이들은 이미 기운을 잃고,/ 내 손은 너무 희고 가늘고,/ 기적이란 오늘날까지 있어본 일이 없고,// 그러나, 아끼는 나의 아기야,/ 오늘밤 이 바다 위에 흐르는 눈물이,/ 내일 너의 젊은 가슴 속에 피워 놓을 한 떨기 붉은 장미의 이름을/ 아아! 나의 아기야, 나는 안다.//

상륙(上陸) / 임화
전차도 커지고,/ 자동차도 새로워지고,/ 삼층 사층 양실들이 곱다란/ 이 넓은 길이 어디로 통하는가?// 정신을 차려라……// 클랙슨이 먼지를 풍기며 노호(怒呼)한다./ 인제 부산도 옛 포구가 아니다./ 트럭이 지냈는가 하면,/ 자동차들이 벌떼처럼 달려든다./ 스톱! 하늘엔 여객기의 통과다.// 정녕 나는 연락선에서 들고 내린,/ 묵은 가방을 털어보아야 할까보다./ 몇 해 전 가지고 건너갔던/ 때 묻은 선입견이 남은 모양이다./ 부두의 딸가닥 소리가 사람들을 놀랜 것은 벌써 옛 목가(牧歌)로구나.// 내가 입고 자란 옷,/ 주절대고 큰 말소린/ 하나도 찾을 길이 없다./ 나는 고향에 돌아온 것 같지도 않고,/ 아, 고향아!/ 너는 그 동안 자랐느냐? 늙었느냐?// 외방 말과 새로운 맵시는 어느 때 익혔느냐?// 벌렸다 다물고, 다물었다 벌리는,/ 강철 개폐교(開閉橋) 이빨 새에/ 낡은 포구의 이야기와 꿈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리라만,/ 그렇다고 나는 저 산 위 올망졸망한,/ 오막들의 고달픈 신음 속에,/ 구태여 옛 노래를 듣자 원하진 않는다./ 나의 귀는 신음과 슬픈 노래에 너무나 찌들었다.// 비록 오는 날,/ 나의 조상들의 외로운 혼령이/ 잠시 머무를 한낱 돌이나 나무가 없고,/ 늘비한 굴뚝이 토하는 연기와 그을음에,/ 흰 모래밭과 맑은 하늘이/ 기름걸레처럼 더러워진다 해도,/ 아아, 나는 새 시대의 맥박이 높이 뛰는 이 하늘 아래 살고 싶다.// 연기들은 바람에 날리면서도,/ 끝내 위로 높이만 오르는/ 저 하늘 한복판에,/ 나는 오는 날의 큰 별을 바라본다.// 행인들아!/ 그대들은 이 포구의 흰 모래가/ 시커멓게 변한 위대한 내력을 아는가?/ 나는 제군들 모두의 손을 잡고,/ 아, 친애의 정을 베풀고 싶다.// 일찍이 저 시커먼 큰 건물들은,/ 제군들의 운명을 고쳤으나,/ 이내 제군들이 아름다운 항만의 운명을 개척할 새 심장이,/ 또한 저 자욱한 건물들 속에서 만들어짐은 즐거웁지 않으냐./ 나의 고향은 이제야, 대륙의 명예를 이을 미더운 아들을 낳았구나.// 바다에는 기폭으로 아로새긴 만국지도,/ 거리엔 새 시대의 왕자 금속들의 비비대는 소리./ 목도(牧島) 앞뒤엔 여명이 활개를 치고 일어나는 고동 소리,/ 이따금 현해 바다가 멀리서/ 사자처럼 고함치며 달려오고……// 바야흐로 신세기의 화려한 축제다.// 누가 이 새 고향의 찬미가를 부를 것이냐?/ 교향악의 새 곡조를 익힌 악기는 어느 곳에 준비되었는가?/ 대양, 대양, 대양,/ 실로 대양의 파도만이 새 시대가 걸어가는/ 장엄한 발자취에 행진곡을 맞추리라.//

현해탄(玄海灘) / 임화
이 바다 물결은/ 예로부터 높다.// 그렇지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대마도를 지내면,/ 한 가닥 수평선 밤엔 티끌 한 점 안 보인다./ 이곳에 태평양 바다 거센 물결과/ 남진해온 대륙의 북풍이 마주친다.// 몽블랑보다 더 높은 파도,/ 비와 바람과 안개와 구름과 번개와,/ 아세아의 하늘엔 별빛마저 흐리고,/ 가끔 반도엔 붉은 신호등이 내어걸린다.// 아무러기로 청년들이/ 평안이나 행복을 구하여,/ 이 바다 험한 물결 위에 올랐겠는가?// 첫번 항로에 담배를 배우고,/ 둘쨋번 항로에 연애를 배우고,/ 그 다음 항로에 돈 맛을 익힌 것은,/ 하나도 우리 청년이 아니었다.// 청년들은 늘/ 희망을 안고 건너가,/ 결의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은 느티나무 아래 전설과,/ 그윽한 시골 냇가 자장가 속에,/ 장다리 오르듯 자라났다.// 그러나 인제/ 낯선 물과 바람과 빗발에/ 흰 얼굴은 찌들고,/ 무거운 임무는/ 곧은 잔등을 농군처럼 굽혔다.// 나는 이 바다 위/ 꽃잎처럼 흩어진/ 몇 사람의 가여운 이름을 안다.// 어떤 사람은 건너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돌아오자 죽어갔다./ 어떤 사람은 영영 생사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아픈 패배[敗北]에 울었다./ ―그 중엔 희망과 결의와 자랑을 욕되게도 내어 판 이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지금 기억코 싶지는 않다.// 오로지/ 바다보다도 모진/ 대륙의 삭풍 가운데/ 한결같이 사내다웁던/ 모든 청년들의 명예와 더불어/ 이 바다를 노래하고 싶다.// 비록 청춘의 즐거움과 희망을/ 모두다 땅속 깊이 파묻는/ 비통한 매장의 날일지라도,/ 한번 현해탄은 청년들의 눈앞에,/ 검은 상장(喪帳)을 내린 일은 없었다.// 오늘도 또한 나젊은 청년들은/ 부지런한 아이들처럼/ 끊임없이 이 바다를 건너가고, 돌아오고,/ 내일도 또한/ 현해탄은 청년들의 해협이리라.// 영원히 현해탄은 우리들의 해협이다.// 삼등선실 밑 깊은 속/ 찌든 침상에도 어머니들 눈물이 배었고,/ 흐린 불빛에도 아버지들 한숨이 어리었다./ 어버이를 잃은 어린 아이들의/ 아프고 쓰린 울음에/ 대체 어떤 죄가 있었는가?/ 나는 울음소리를 무찌른/ 외방 말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다.// 오오! 현해탄은, 현해탄은,/ 우리들의 운명과 더불어/ 영구히 잊을 수 없는 바다이다.// 청년들아!/ 그대들은 조약돌보다 가볍게/ 현해의 큰 물결을 걷어찼다./ 그러나 관문해협 저쪽/ 이른 봄바람은/ 과연 반도의 북풍보다 따사로웠는가?/ 정다운 부산 부두 위/ 대륙의 물결은,/ 정녕 현해탄보다도 얕았는가?// 오오! 어느 날,/ 먼 먼 앞의 어느 날,/ 우리들의 괴로운 역사와 더불어/ 그대들의 불행한 생애와 숨은 이름이/ 커다랗게 기록될 것을 나는 안다./ 1890년대의/ 1920년대의/ 1930년대의/ 1940년대의/ 19××년대의/ ……/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간/ 폐허의 거칠고 큰 비석 위/ 새벽 별이 그대들의 이름을 비칠 때,/ 현해탄의 물결은,/ 우리들이 어려서/ 고기떼를 쫓던 실내처럼/ 그대들의 일생을/ 아름다운 전설 가운데 속삭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바다 높은 물결 위에 있다.//

구름은 나의 종복(從僕)이다 / 임화
흰 구름은 하늘에 비끼고,/ 나는 풀밭에 누워 휘파람을 불고,/ 공상이란 미상불/ 고삐를 끊어 던진 흰 말이다.// 만일 구름보다 자유로운 것이 있다면,/ 대체 그것은 무엇일가?// 그놈의 흰 갈기를 부여잡고,/ 힘을 모아 배때기를 걷어차면,/ 우박송이처럼 당황하여,/ 나의 곁을 지내가는 별들을 볼 것이다.// 참으로 그 뭉글뭉글한 잔등을 어루만지며,/ 나는 구름 위에 유유히 앉은 내 모양을 칭찬한다.// 생각할수록 별들이란/ 겁이 많고 지나치게 영리한 게으름뱅이다./ 저렇게 많은 족속들이/ 한낱 태양 아래 박쥐처럼 비겁할 수가 있는가?// 그러나 태양이란 것도/ 한껏 교만할 따름이지 실상은/ 앞산 그림자가 한 발을 더듬기 시작만 하면,/ 벌써 산정에 꼬리를 감추는/ 교활한 노총각이다.// 그렇다고 나는 하늘을 휩쓰는 장한 바람이 되어보고 싶지도 않다./ 조그만 숲 하나를 헤어나가려/ 몸부림을 치고 아우성을 지르고,/ 법석을 하는 꼴이란/ 너무나 치졸하다./ 한껏 죽지를 벌려 고개를 들고,/ 높은 산마루에서 화살처럼/ 하늘을 날아보려던/ 일찍이 꿈꾸었던 코스는,/ 지금 생각하니 일부러/ 고운 하늘을 눈알을 휩뜨고 날기도 애석하고,/ 피곤하여 바위 아래 허덕이며,/ 숨을 들이는 비장한 순간이란/ 나의 적들이 볼까 두렵고,// 아아, 역시 희고 가벼운 구름아!/ 네가 오로지 한 평생 가도/ 넓은 하늘이 좁은 줄을 모른다.// 산맥처럼 장한 체수건만,/ 어느 모서리에 부딪쳐야,/ 깨어지는 수도 없고,/ 아프지도 않고,/ 솜처럼 자꾸만 피어 나가다가,// 칵 답답하여/ 짜증이 날 때도 없고,/ 아아! 나는 너의 그 무한한 탄력성을 사랑한다.// 영맹한 저기압과/ 원지(遠地)의 바람이,/ 우리들의 지상을 향하여,/ 엄청난 습격을 시험할 때,/ 너는 잽싸게 검은 연막으로 무장을 고쳐,/ 시급한 방어 임무에 당하더라.// 자재(自在)한 둔갑술이여!// 이윽고 ×두가 한창 격연(激然)할 때,/ 한 줄기 소나기가 되어,/ 마른 남새밭을 발을 구르며 지내면,/ 나는 초목들과 더불어 손뼉을 친다.// 생생한 목숨이여!// 새들이다./ 어린 참새들이다. 제비들이다./ 마을 추녀 끝에 물초가 쥘 때쯤,/ 너는 어른처럼 옷깃을 걷어 들고/ 햇볕이 쨍쨍한 하늘 가로/ 붉은 놀이 되어 스러진다.// 선(善)한 결단력이여! 구름아!/ 어느게 너의 자유이고 의지이냐?/ 너는 부자유도 자유이냐?/ 그렇지 않으면, 너는 불가능이란 것을 모르느냐?/ ‘나폴레옹’이다!// 지금 네가 떠있는 곳은 바다이냐, 섬이냐?/ 하늘이다!// 너는 오늘 가벼이 하늘을 거닐고,/ 사자가 되어 이리를 쫓다가,/ 바위가 되어 물결을 차다가/ 강아지가 되어 공을 굴리다가,/ 어린애가 되어 달음질을 하다가,/ 너는 유희를 즐기는구나!// 자 듣거라, 구름아!/ 오늘 나는 너의 주인이다./ 휘파람 부는 내 가슴은 줌을 못 넘고,/ 머리는 땅 위에 한길을 못 오를 망정,/ 한대도 나의 생각은 네 위/ 너른 하늘을 내려본 일이 없느니라.// 종순(從順)한 나의 흰 말아!/ 고삐를 내게 던져라.//

새 옷을 갈아입으며 / 임화
젊은 아내의/ 부드런 손길이 쥐어 짠/ 신선한 냇물이 향그런가?// 하늘이 높은 가을,/ 송아지 떼가 참새를 쫓는/ 마을 언덕은/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이냐만,/ 고혹적인 흙내가/ 나의 등골에 전류처럼/ 퍼붓고 지나간 것은,/ 어째서 고향의 불행한 노래뿐이냐?// 언제부터 살찐 흙 속에 자라난/ 나뭇가지엔 쓴 열매밖에,/ 붉은 꽃 한 송이 안 피었는가!/ 가끔 촌 사람들이/ 목을 매고 늘어진 이튿날 아침,/ 숲속을 울리던 통곡 소리들/ 나는 잊지 않고 있다.// 행복이란 꾀꼬리 울음이냐?/ 푸른 숲에서나, 누른 들에서나,/ 한번 손에 잡히지 않았고,/ 아……/ 태양 아래 자유가 있다 하나,/ 땅 위엔 행복이 있지 않았다./ 새 옷을 갈아입으며,/ 들창 너머로 불현 듯/ 자유에의 갈망을 느끼려는/ 나의 마음아!/ 너는 한낱 철없는 어린애가 아니냐?//

행복은 어디 있었느냐? / 임화
두 손을 포켓에 찌른 채,/ 너는 누런 레인코트를 입고,/ 하늘을 치어다보는 양 어깨 위엔,/ 어느새 밤이슬이 뽀야니 무겁다.// 돌아갈 집도 멀고,/ 걸을 길도 아득한,/ 나의 젊은 마음아./ 외딴 교외의 플랫폼 위/ 너의 따르는 꿈은 무엇이냐?// 첫사랑에 놀란 조그만 가슴이,/ 인젠 엄청난 생각을 지녔구나.// 기다리던 사람은 누구냐?/ 아직도 그가 올 시간은 멀었느냐?/ 시계를 들여다보고,/ 이따금 별들을 헤어보고,/ 너는 달이 밝고,/ 하늘이 푸르고,/ 깨어지는 물방울이/ 진주보다도 아름다운/ 고향의 바닷가를,/ 어린애처럼 거니느냐?// 밤은 깊고,/ 그는 드디어 오지 않았구나./ 구름이 쫓기듯 밀려가,/ 별빛마저 흐린 동경만 위/ 어둔 하늘 아래/ 아아, 너는/ 아무데고 하룻밤/ 안식의 잠자리를 구해야겠다.// 너의 다섯 자 작은 몸을 누일,/ 따뜻한 지붕 밑은 어디메냐?/ 자욱한 집들이나,/ 밝은 길을 가는 뭇 행인은,/ 너무나 눈 설고,/ 싸늘한 남들이라,/ 한낱 두려운 눈알이,/ 불똥처럼 발개서,/ 방황하는 너의 뒤를/ 쏠듯이 따를 뿐이다.// 아아, 만일/ 기다리던 그는 영영 오지 않고,/ 돌아갈 집은 자리 밑까지 흐트러져,/ 모진 운명이 머리 위를/ 쓸어 덮는다면// 나의 마음아!/ 한 가지 장미처럼 곱기만 했던,/ 너는 인제/ 집 잃은 어린 아이로구나!// 가이여운 마음아!// 소금기를 머금은/ 외방 바람이,/ 스미는 듯 엷은 살결에 차다./ 서글픈 밤,/ 머리에 떠올랐다 스러지고,/ 스러졌다간 떠오르는,/ 그리운 사람들 눈동자 속에,/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가도 없는 표박(漂泊)의 길이/ 모두 다 따뜻한 요람이었고,/ 가는 곳마다/ 그들은 고향을 발견하지 않았느냐?/ 어느 날 고향의 요람으로/ 돌아갈 기약도 막막한/ 영원한 길손의 마음이,/ 어리우듯 터를 잡지 않았든가,// 그 속은 언 호수보다 서글펐으나,/ 바다 속처럼 깊더라.// 참말 그들도, 나도,/ 도토리 알 같은/ 어린 때의 기억만이,/ 고향 산비탈, 들판에/ 줍는 이도 없이 흩어져,/ 어쩐지 우리는 비바람 속에 외로운/ 한 줄기 어린 나무들 같다만,/ 누를 수 없는 행복과 즐거움이/ 위도 아니고 옆도 아니고, 오로지/ 곤란한 앞을 향하여 뻗어나가는,/ 아아, 한 가지 정성에 있더구나!//

바다의 찬가(讚歌) / 임화
장하게/ 날뛰는 것을 위하여,/ 찬가를 부르자.// 바다여/ 너의 조용한 달밤을랑,/ 무덤 길에 선/ 노인들의 추억 속으로,/ 고스란히 선사하고,/ 푸른 비석 위에/ 어루만지듯,/ 미풍을 즐기게 하자.// 파도여!/ 유쾌하지 않은가!/ 하늘은 금시로,/ 돌멩이를 굴린/ 살얼음판처럼/ 빠개질 듯하고,/ 장대 같은 빗줄기가/ 야……/ 두 발을 구르며,/ 동동걸음을 치고,/ 나는/ 번개 불에/ 놀라 날치는/ 고기 뱃바닥의/ 비늘을 세고// 바다야!/ x (너의)/ x (가슴에는)/ x (사상이 들었느냐)// 시인의 입에/ 마이크 대신/ 재갈이 물려질 때,/ 노래하는 열정이/ 침묵 가운데/ 최후를 의탁할 때,// 바다야!/ 너는 몸부림치는/ 육체의 곡조를/ 반주해라.//

 

[현해탄 시집] 後書(후서) / 임화


이 책 속엔 이때까지 발표된 내 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수록되었다. 그중엔 발표된 가운데서도 부득이 빼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있으며, 또한 미발표대로 들어간 것도 있으나, 내가 작품 위에서 걸어온 정신적 행정을 짐작하기엔 과히 부족됨이 없을 줄 안다.
 
실상은 지난 가을에 처음 어느 친구로부터 이때까지 쓴 작품을 모아 출판했으면 어떻겠느냐는 즐거운 권유를 받았을 때, 비로소 사산(四散)된 구고(舊稿)들을 모으기 비롯하여 한 권이 되었으나, 그간의 여러 가지 형편으로 초지(初志)를 이루지 못하고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었다.
 
현해탄이란 제() 아래 근대 조선의 역사적 생활과 인연 깊은 그 바다를 중심으로 한 생각, 느낌 등을 약 이삼십 편 되는 작품으로 써서 한 책을 만들어볼까 하였다.
 
이 가운데 맨 뒤에 실린 바다가 많이 나오는 일련의 작품이 그것이다.
 
그러나 재능의 부족과 생각의 미숙 등 외의 여러 가지 곤란에 부닥쳐, 끝까지 써나갈 용기와 자신을 다 잃어버렸다.
 
그래 할 수 없이, 그 전에 한 권에 모았던 가운데서 얼마를 빼고 새로 쓴 작품과 어울러서, 이 한 책이 된 셈이다.
 
편순(編順), 대략 연대순으로 하였는데, 그렇다고 반드시 발표 연월을 고사(考査)하여 차례를 매지도 않았다.
 
이 중엔 약간 그런 의미의 연대는 어긋나는 곳이 한두군데 있으나 전체로서 이해를 방해할 만한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다.
 
단지 네거리의 순이(順伊)로부터 세월에 이르는 동안 내 작품 경향 발전상 한 개 새 시대였다고 볼 수 있는 몇 작품이 들지 않았다.
 
그 밖에도 네거리의 순이(順伊)한 편으로 그 때 내 정신과 감정(感情)생활의 전부를 이해해 달라 함은 좀 유감되나 할 수 없는 일이고, 세월에서 암흑(闇黑)의 정신(精神)그러고 주리라 네 탐내는 모든 것을에 이르는 한 시기로부터, 그 뒤의 한두 번 변한 내 작품 경향을 이해하기엔 충분한 작품이 거의 전부 모여 있다.
 
맨 끝에 실린 바다의 찬가(讚歌)는 이로부터 내가 작품을 쓰는 새 영역의 출발점으로서 특히 넣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더 이런 경향의 작품을 넣으려 하였으나, 매수도 너무 많고 하여 일후 다행의 다시 작품집을 하나 더 가질 수 있다면 하는 요행을 바라고 욕심을 덮어두어 버렸다.
 
자꾸 변명 같아서 구구하지만 하나 더 미진한 점을 말하면 네거리의 순이(順伊)이전 내 전향기의 작품과 그보다도 전, 어린 다다이스트이었던 시기의 작품을 넣고 싶었다가 구할 수도 없고 초고(草稿)도 상실되어 못 넣은 것이다.
 
이것은 내 지나간 청춘과 더불어 영구히 돌아오지 않는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생각하면 쓸 때에 그렇게 열중했던 소위 노력의 소산이란 것이 뒷날 돌아보면 이렇게 초라한가를 생각하면 부끄럽다느니보다도 일종 두려움이 앞을 선다.
 
내 자신이 이럴 바에야 하물며 인연 없는 제군에게 있어선 이 가운데 단 한편이라도 나의 이름과 더불어 기억되리라고는 차마 믿을 수가 없다.
 
단지 바라는 것은 나의 앞날을 위하여 매운 비판의 회초리로 이 작품들이 읽혀짐을 열망할 따름이다.
 
끝으로 일년 넘어 이 책의 탄생을 위하여 노력해주신 동광당 이남래(李南來) 형과, 일산(逸散)된 원고들을 모아준 젊은 우인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이들 없이는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가 도저히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난잡한 글을 일일이 한글로 고쳐주신 이극로(李克魯) 씨에게 삼가 후의를 감사하는 바이다.
 
 
정축(丁丑) 동짓달,
합포(合浦)에서
저자(著者) ()

 

자고 새면 -벗이여 나는 이즈음 자꾸만 하나의 운명이란 것을 생각코 있다 / 임화
자고 새면/ 이변을 꿈꾸면서/ 나는 어느 날이나/ 무사하기를 바랐다// 행복되려는 마음이/ 나를 여러 차례/ 주검에서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지만/ 행복도 즐거움도/ 무사한 그날그날 가운데/ 찾아지지 아니할 때/ 나의 생활은/ 꽃 진 장미넝쿨이었다// 푸른 잎을 즐기기엔/ 나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마른 가지를 사랑키엔/ 더구나 마음이 앳되어// 그만 인젠/ 살려고 무사하려던 생각이/ 믿기 어려워 한이 되어/ 몸과 마음이 상할/ 자리를 비워주는 운명이/ 애인처럼 그립다.//

우리 오빠와 화로 / 임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永男[영남]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火[화]젓가락만이 불쌍한 永男[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卷煙[궐련]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백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永男[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 ─ 가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연기에 싸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 그래서 저도 永男[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製糸機[제사기]를 떠나서 백 장에 일전짜리 封筒[봉통]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永男[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封筒[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永男[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火[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永男[영남]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永男[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슳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永男[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누이동생//

 



임화(林和, 1908년~1953년) 시인, 문학평론가, 정치가
서울 출신으로 본명은 '임인식'(林仁植), 아호(雅號)는 쌍수대인(雙樹臺人), 성아(星兒), 청로(靑爐)이다. 그 외에도 '임화'(林華), '김철우'(金鐵友) 등의 필명을 사용하였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의 멤버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정계에 진출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건국준비위원회 활동, 남조선로동당 창당 활동 등에 참여했다. 1947년 두 번째 배우자이며 소설가인 지하련과 함께 월북, 남북 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였으나 휴전 직후인 1953년 박헌영, 이강국, 리승엽 등 남로당 수뇌부와 함께 ‘미제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일면식도 없지만 인생을 나눠 산 듯한...한일 사회주의 문학가

마쓰모토 세이초. 임화가 빛나던 시기 마쓰모토는 바닥에 있었고, 마쓰모토의 삶이 빛을 뿜기 시작한 시기 임화는 무덤을 향해 가고 있었다.일신이생(一身二生)이라는 말이 있다. 격변기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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