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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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7. 27.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수런거리는 뒤란 / 문태준


산죽(山竹)사이에 앉아 장닭이 웁니다/ 묵은 독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 애처롭습니다/ 구들장 같은 구름들은 이 저녁 족보만큼 길고 두텁습니다/

누가 바람을 빚어낼까요/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산죽의 뒷머리를 긁습니다/ 산죽도 내 마음도 소란해졌습니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둥글게 등이 굽어질까요/ 어둠이 흔들리는 댓잎 뒤꿈치에 별을 하나 박아주었습니다//


병실 / 문태준
그곳에서 나오세요/ 당신의 붉은 피를 뽑지 마세요/ 기침은 곧 멎을 거예요/ 안색은 햇살처럼 화사해질 거예요/ 매일 아침 꽃바구니를 보낼게요/ 고음(高音)으로 핀 튤립과 장미를 보낼게요/ 꽃들이 당신을 돌볼 거예요/ 할머니는 그만 잊으세요/ 복수가 차 부푼 할머니의 배를/ 손으로 쓸어 어루만져주고 계셨지요/ 물이 연못을 살살 돌보듯이/ 그 할머니는 카나리아가 되었을 거예요/ 아름다운 정원에 살고 있을 거예요/ 어머니, 이제 병실에서 나오세요/ 당신의 맥박을 재지 마세요/ 열은 곧 떨어질 거예요/ 침대 위 창백한 시트를 걷어버리세요/ 몇 알 남은 귤을 놓아두고 작별 인사를 나누세요/ 그릇과 수저처럼 닳은 어머니/ 나의 밤에 초승달 같은 어머니//

가재미 /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여 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 준다.//

가재미 2 / 문태준
꽃잎, 꽃상여/ 그녀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벌의 옷을 장만했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옷, 꽃상여/ 그녀의 몸은 얼었지만 꽃잎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두꺼운 땅거죽을 열고 독 같은 고요 속으로 천천히/ 그녀가 걸어 들어가 유서처럼 눕는다/ 울지 마라, 나의 아이야, 울지 마라/ 꽃상여는 하늘로 불타오른다/ 그녀의 몸에서 더 이상 그림자가 나오지 않는다// 붉은 흙 물고기/ 상두꾼들이 그녀의 무덤을 등 둥근 물고기로 만들어 주었다/ 세상의 모든 무덤은 붉은 흙 물고기이니/ 물 없는 하늘을 헤엄쳐 그녀는 어디로든 갈 것이다// 개를 데려오다/ 석양 아래 묶인 한 마리 개가 늦가을 억새 같다/ 털갈이를 하느라 작은 몸이 더 파리하다/ 석양 아래 빛이 바뀌고 있다/ 그녀가 정붙이고 살던 개를 데리고 골목을 지나 내 집으로 돌아오다//

가재미 3 -아궁이의 재를 끌어내다 / 문태준
그녀의 함석집 귀퉁배기에는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방고래에 불 들어가듯 고욤나무 한 그루에 눈보라가 며칠째 밀리며 몰아치는 오후/ 그녀는 없다, 나는 그녀의 빈집에 홀로 들어선다/ 물은 얼어 끊어지고, 숯검댕이 아궁이는 퀭하다/ 저 먼 나라에는 춥지 않는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끌어낸다/ 이 세상 저물 때 그녀는 바람벽처럼 서럽도록 추웠으므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식은 재를 끌어내 그녀가 불의 감각을 잊도록 하는 것/ 저 먼나라에는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듯한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저 먼 나라에서 그녀는 오늘처럼 밖이 추운 날 방으로 들어서며 맨 처음 맨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쓸어볼지 모르지만, 습관처럼 그럴 줄 모르지만/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모두 끌어낸다/ 그녀는 나로부터도 자유로이 빈집이 되었다//

빈집 1 / 문태준
흙더버기 빗길 떠나간 당신의 자리 같았습니다 둘데 없는 내 마음이 헌 신발들 처럼 남아 바람도 들이고 비도 맞았습니다 다시 지필 수 없을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으면 방고래 무너져 내려 피지 못하는 불씨들/ 종이로 바른 창 위로 바람이 손 가락을 세워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한때 부리로 지푸라기를 물어다 지은 그 기억의 집 장대바람에 허물어 집니다 하지만 오랜 후에 당신이 돌아 와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독을 보신다면, 그 안에 고여 곰팡이 쓴 내 기다림 을보신다면 그래, 그래 닳고 닳은 싸리비를 들고 험한 마당 시원하게 쓸어 줄 일입니다.//

빈집 2 / 문태준
지붕 위로 기어오르는 넝쿨을 심고 녹이 슨 호미는 닦아서 걸어두겠습니다/ 육십촉 알전구일랑 바꾸어 끼우고 부질없을망정 불을 기다리렵니다 흙손으로 무너진 곳 때워보겠습니다 고리 빠진 문도 고쳐보겠습니다/ 옹이 같았던 사랑은 날 좋은 대패로 밀고 문지방에 백반을 놓아 뱀 넘나들지 않게 또 깨끗한 달력 그 방 가득 걸어도 좋겠습니다//

노모 / 문태준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백년 / 문태준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百年이라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영원(永遠) / 문태준
어릴 때에 죽은 새를 산에 묻어준 적이 있다/ 세월은 흘러 새의 무덤 위로 풀이 돋고 나무가 자랐다/ 그 자란 나뭇가지에 조그마한 새가 울고 있다/ 망망茫茫하다/ 날개를 접어 고이 묻어주었던 그 새임에 틀림이 없다//

그믐이라 불리던 그녀 / 문태준
옻처럼 검고 얼음처럼 차디차지만/ 얼굴에는 개미굴이 여럿 나 있지만/ 다리는 사슴보다 야위었지만/ 그녀의 너른 속뜰로 들어가/ 마음이 쉬어 가는 날이 많았다/ 나는 그 이상한 평온을 슬픈 그믐이라 불렀다/ 조모를 열다섯 살 때 마지막으로 보았다//

역전 이발 / 문태준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이 살고 있고/ 말라 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 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한 채의 빈집 같다. / 문태준
가을 찬비 지나가고 나면 훨씬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많다./ 가을바람은 냉담하다./ 가을바람은 옹색하다./ 한 채의 빈집 같다.// 그러나 가을바람은 으스스하긴 해도 흐리터분하지는 않다./ 흐린 정신을 바로 세운다./ 가을바람은 서리처럼 흰빛이다.// 이처럼 가을이 기울어져 지나가고 나면/ 나무는 앙상한 가지로 차림차림이 간편해지고,/ 숲의 살림은 더욱 단출해질 것이다.// 그것이 나무와 숲의 본래 면목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있던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길을 떠났던 사람이 그 행로를 되짚어 출발지로 다시 돌아오듯이.// 이제 해는 일찍 떨어진다./ 가을의 주위는 점점 일찍 어두워진다./ 행인들은 이리처럼 점점 사나워지는 날씨 속에 있다./ 그러나 안온하게 감싸주는 이가 없지만은 않다./ 내 바로 맞은편을 지나가는 가을의 얼굴을 본다.//

빈집의 약속 /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별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방이 방 한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 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 뿐, 마음은 늘 빈 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꾸어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은 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태화리 도둑골 / 문태준
딱따구리 한마리가 숲에서/ 목구멍을 치는 소리/ 먹는 입이 저처럼/ 활엽수를 쪼는 딱따구리만큼 맑아질 수 있을까/ 하도 맑아/ 상처를 잊은 듯/ 나무의 존재도 오롯하게/ 허공에 부풀어//

먼 곳 / 문태준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움큼, 한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회고적인 / 문태준
가령 사람들이 변을 보려 묻어둔 단지, 구더기들, 똥장군들./ 그런 것들 옆에 퍼질러앉은 저 소 좀 봐,/ 배 쪽으로 느린 몸을 몰고 가면 되새김질로 살아나는 소리들./ 쟁기질하는 소리, 흙들이 마른 몸을 뒤집는./ 워, 워, 검은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주인이 길 끝에서 당기는 소리./ 원통의 굴뚝에서 텅 빈 마당으로 밀물지는 쇠죽 연기./ 그러나 不歸, 不歸! 시간은 사그라드는 잿더미에 묻어둔 감자 같은 것./ 족제비가 낯선 자를 경계하는 빈, 빈집에 들어서면/ 녹슨 작두에 무언가 올리고 싶은, 도시 회고적인 저 소 좀 봐.//

굴을 지나면서 / 문태준
늘 어려운 일이었다, 저문 길 소를 몰고 굴을 지난다는 것은. 빨갛게 눈에 불을 켜는 짐승도 막상 어둠 앞에서는 주춤거린다./ 작대기 하나를 벽면에 긁으면서 굴을 지나간다. 때로 이 묵직한 어둠의 굴은 얼마나 큰 항아리인가. 입구에 머리 박고 소리지르면 벽 부딪치며 소리소리를 키우듯이 가끔 그 소리 나의 소리 아니듯이 상처받는 일 또한 그러하였다./ 한 발 넓이의 이 굴에서 첨벙첨벙 개울에 빠지던 상한 무르팍 내 어릴 적 소처럼 길은 사랑할 채비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길 내는 법 없다. 유혹당하는 마음조차 용서하고 보살펴야 이 굴 온전히 통과할 수 있다. 그래야 이 긴어둠 어둠 아니다.//

짧은 낮잠 / 문태준
낮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꽃을 보내고 남은 나무가 된다// 魂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있으니// 오늘도 뒷걸음 뒷걸음치는 겁많은 노루꿈을 꾸었다// 꿈은, 멀어져 가는 낮꿈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 낮잠에서 깨어나 나는 찬물로 입을 한 번 헹구고/ 주먹을 꼭 쥐어보며 아득히 먼 넝쿨에 산다는 산꿩 우는 소리 듣는다// 오후는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다//

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 / 문태준
세상 한 곳 한 곳 하나 하나가 저녁에 대해 말하다/ 까마귀는 하늘이 길을 꾹꾹 눌러 대밭에 앉는다고 운다/ 노란 감꽃이 핀 감잎은 등이 무거워졌다고 말한다/ 내가 난 들고양이는 우는 아가 소리를 업고 집채의 그늘을 짚으며 돌아나간다/ 나는 대청에 소 눈망울만한 알전구를 켜 어둠의 귀를 터준다/ 들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찬물에 발을 씻으며 검게 입을 다물었다//

꽃과 사랑 / 문태준
너럭바위 옆에 세 개의 꽃이 피어있었다/ 하체가 남루한 꽃이었다/ 아슴아슴한 햇살을 큰 꽃이 나누어주고 있었다/ 나는 허름한 식당에서 젊은 아들이 밥 먹는걸 나무의/ 밑동 같은 눈빛으로 지켜보던 주름이 많은 아버지를 보아던 적이 있다//

꽃이 핀다 / 문태준
뜰이 고요하다/ 꽃이 피는 동안은// 하루가 볕바른 마루 같다// 맨살의 하늘이/ 해 종일/ 꽃 속으로 들어간다/ 꽃의 입 시울이 젖는다// 하늘이/ 향기 나는 알을/ 꽃 속에 슬어놓는다// 그리운 이 만나는 일/ 저처럼 이면 좋다//

지는 꽃 / 문태준
언덕길에 곱사등이들이 모가지를 빼고 앉아 있네/ 문득 휘몰아친다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힘은/ 등뼈를 바깥으로 탈골시키네 그들은 대갈못처럼/ 더욱 주저앉네, 꽃에서 한 잎의 귀가 떨어지네/ 이 지상에서 잊혀진 소리들이 건너 지방으로……// 우리는 등을 켜고 가만히 보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힘을.//

꽃 진 자리에 / 문태준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푸른 냉이 / 문태준
칠년 된 푸른 냉이가 가늘고 긴 뿌리를 봄마당에 내놓았다/ 마른 둠벙의 물고기처럼 서서히 애처로운./ 수탉 같은 봄햇살이 냉이를 쪼고 쫀다//

찔레 넝쿨에게 / 문태준
찔레 넝쿨에게 오늘 바질바질한 참새때가/ 찔레야! 찔레야! 실눈 좀 떠다오, 한다.//

흰자두꽃 / 문태준
손아귀에 힘이 차서 그 기운을 하얀꽃으로 풀어놓은 자두나무 아래/ 못을 벗어나 서늘한 못을 되돌아보는 이름모를 새의 가는 목처럼/ 몸을 벗어나 관으로 들어가는 몸을 들여다보는 식은 영혼처럼/ 자두나무의 하얀 자두꽃을 처량하게 바라보는 그 서글픈 나무 아래/ 곧 가고 없어 머무르는 것조차 없는 이 무정한 한낮에/ 나는 이 생애에서 딱 한번 굵은 손뼈마디 같은 가족과/ 나의 손톱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봉숭아 -다현(茶顯)에게 / 문태준
봉숭아라는 이름/ 조그만 복숭아뼈 같지/ 오늘 낮에는/ 여섯 살 딸이/ 화단의 봉숭아꽃을 보고 있다/ 홍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쪼그려 앉은 두 발목이 붉다/ 발목에서부터 붉은 물이 번지고 있다/ 한 종이가 사각사각 젖고 있다/ 여섯 살은 아무래도 무른 몸/ 무릎이 젖고 작은 어깨가 젖는데/ 삐에에 울지도 않는다//

수련 / 문태준
작은 독에 더 작은 수련을 심고 며칠을 보냈네/ 얼음이 얼 듯 수련은 누었네// 오오 내가 사랑하는 이 평면의 힘!// 골똘히 들여다보니/ 커다란 바퀴가 물 위를 굴러가네//

석류 / 문태준
윗옷 단추를 끄르듯/ 웃음이/ 웃음의 앞자락을 헤치며// 석류는 툭 터졌네/ 넘어진 화병처럼// 언제라도/ 비탄이 없는/ 악보// 속 깊은 가을의/ 정교한 건축// 붉은 잇몸의 빛/ 알알이/ 조용한 시간의 카펫 위에/ 흩어지네//

붉은 동백 / 문태준
신라의 여승 설요는 꽃 피어 봄마음 이리 설레 환속했다는데/ 나도 봄날에는 작은 절 풍경에 갇혀 우는 눈먼 물고기이고 싶더라/ 쩌렁쩌렁 해빙하는 저수지처럼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어도/ 봄밤에는 숨죽이듯 갇혀 울고 싶더라/ 먼발치서 한 사람을 공양하는 무정한 불목하니로 살아도/ 봄날에는 사랑이 살짝 들키기도 해서/ 절마당에 핀 동백처럼 붉은 뺨이고 싶더라//

매화나무의 해산(解産) / 문태준
늙수그레한 매화나무 한 그루/ 배꽃 같은 꽃 피어 나무가 환하다/ 늙고 고집 센 입부의 해산 같다/ 나무의 자궁은 늙어 쭈그렁한데/ 깊은 골에서 골물이 나와 꽃이 나와/ 꽃에서 갓난 아가 살갗 냄새가 난다/ 젖이 불은 매화나무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

탱자나무 흰 꽃 / 문태준
들마루 양지녘에 오늘 나앉았다가/ 문득,/ 탱자나무 가시 사이/ 흰 꽃 핀 것 알았다/ 응달에,/ 부엉이의 눈 같기만 한/ 탱자나무 흰 꽃송이/ 꽃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가죽나무를 사랑하였다 / 문태준
지난 여름 나는 가죽나무를 사랑하였다/ 늘 어둡고 눈이 침침하던 나무를 사랑하였다/ 지난 여름 나는 가죽나무를 사랑하였다/ 나무에서 둥지를 틀던 검은 소리들을 사랑하였다// 말라붙은 우물처럼 알몸으로 그녀가 우는 것을 사랑하였다./ 매미의 뱃가죽보다 많이 주름진 그 소리들을 사랑하였다./ 사람을 온전히 사랑해 본 바 없이 나는 가죽나무를 사랑하였다.//

팽나무 식구 / 문태준
작은 언덕에 사방으로 열린집이 있었다/ 낮에 흩어졌던 새들이 큰 팽나무에 날아와 앉았다/ 한놈 한놈 한곳을 향해 웅크려 있다/ 일제히 응시하는 것들은 구슬프고 무섭다/ 가난한 애비를 둔 식구들처럼/ 무리에 볼이 튼 어린 새도 있었다/ 어두워지자 팽나무가 제 식구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호두나무와의 사랑 / 문태준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 철 지난 매미떼가 살갗에 붙어서 호두나무를 빨고 있었다/ 나는 지난 여름 내내 흐느끼는 호두나무의 哭을 들었다/ 그러나 귀가 얇아 호두나무의 중심으로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불에 구운 흙처럼 내 마음이 뒤틀리는 걸 보니 나의 이 고백도 바람처럼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겠다//

앵두나무와 붉은 벌레들 / 문태준
앵두나무 가지 위로는 한쪽이 트인 달이 떴다/ 앵두나무 가지에 사는 붉은 벌레들은 오늘 밤에도 만났다/ 누구일까/ 늙은 앵두나무에 이렇게/ 다투는 허공을 담을 줄 안 이는//

개복숭아나무 / 문태준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처음 맺히는 열매는 거친 풀밭에 묶인 소의 둥근 눈알을 닮아 갔다/ 후일에는 기구하게 폭삭 익었다/ 윗집에 살던 어럼한 형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숫기 없는 나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 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 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포도나무들 / 문태준
오래된 포도밭에는 폐경한 여인들이 산다/ 지주목도 비와 바람에 삭아서 죽은 포도나무에 기댄다/ 녹슨 철사줄을 감아 쥔 덩굴손, 살점 다 발라낸 뼈다귀 같다 여름이 솟았다/ 진 자리, 나무들이 더러 죽었다/ 죽은 나무를 건드리자 포도 알갱이들이 송이에서 빠져나온다/ 알은체하니 마르고 쭈그러진 유언들이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것이다/ 나무들은 그제야 죽음쪽으로 돌아눕는다// 마을엔 나무란 나무가 죄다 포도나무, 늙은 생애들뿐이다//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 문태준
외떨어져 살아도 좋을 일/ 마루에 앉아 신록에 막 비 듣는 것 보네/ 신록에 빗방울이 비치네/ 내 눈에 녹두 같은 비/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나는 오글오글 떼 지어 놀다 돌아온/ 아이의 손톱을 깎네/ 모시조개가 모래를 뱉어놓은 것 같은 손톱을 깎네/ 감물 들듯 번져온 것을 보아도 좋을 일/ 햇솜 같았던 아이가 예처럼 손이 굵어지는 동안/ 마치 큰 징이 한 번 그러나 오래 울렸다고나 할까/ 내가 만질 수 없었던 것들/ 앞으로도 내가 만질 수 없을 것들/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이 사이/ 이 사이를 오로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의 혀끝에서/ 뭉긋이 느껴지는 슬프도록 이상한 이 맛을//

강대나무를 노래함 / 문태준
빛이 있고 꽃이 있는 동안에도 깊은 산속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허리를 잡고 웃고 푸지게 말을 늘어놓다가도 나는 불쑥 강대나무를 화제 삼는다/ 비좁은 방에서 손톱 발톱을 깎는 일요일 오후에도 나는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몸이 검푸르게 굳은 한 꿰미 생선을 사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강대나무를 생각한다/ 회사의 회전의자가 간수의 방처럼 느껴질 때에도 강대나무를 떠올린다/ 강대나무를 생각하는 일은 내 작은 화단에서 죽은 화초를 내다 버리는 일/ 마음에 벼린 절벽을 세워두듯 강대나무를 생각하면 가난한 생활이 비로소 견디어진다/ 던져두었다 다시 집어 읽는 시집처럼 슬픔이 때때로 찾아왔으므로/ 우편함에서 매일 이별을 알리는 당신의 눈썹 같은 엽서를 꺼내 읽었으므로/ 마른 갯벌의 소금밭을 걷듯 하루하루를 건너 사라졌으므로/ 건둥건둥 귀도 입도 마음도 잃어 서서히 말라죽어갔으므로/ 나는 초혼처럼 강대나무를 소리내어 떠올려 내 누추한 생활의 무릎으로 삼는 것이다/ 내가 나를 부르듯 저 깊은 산속 강대나무를 서럽게 불러 내 곁에 세워두는 것이다.//

산수유나무의 농사 / 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 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 문태준
검푸른 감나무 속으로 매미 한 마리가 들어섰다/ 감나무를 바싹 껴안아 매미 한 마리가 운다/ 울음소리가 괄괄하다/ 아침나절부터 저녁까지 매미가 나무에게 울다간다/ 우리의 마음 어디에서 울음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듯/ 매미가 나무의 어느 슬픔에 내려앉아 우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나무도 기대어 울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는 이렇게 한번 크게 울고 또 한 해 입을 다물고 산다//

측백나무가 없다 / 문태준
측백나무 곁에 서 있었다/ 참새떼가 모래알같은 자잘한 소리로 측백나무에서 운다/ 그러나 참새떼는 측백나무 가지에만 앉지는 않는다/ 나의 시간은 흘러간다/ 참새떼는 나의 한 장의 白紙에 깨알같은 울음을 쏟아놓고 감씨를 쏟아 놓고/ 허공 한 촉을 물고 그 긴 끈을 그 긴 탯줄을 저곳으로 저곳으로 끌고 가 버리고/ 끌고 가 버리고 다만 떼로 모여 울 때 허공은 여드름이 돋는 것 같고/ 바람에 밀밭 밀알이 찰랑 찰랑 하는 것 같고 들쥐떼가 구석으로 몰리는 것 같고/ 그물에 갇힌 버들치들이 연거푸 물기를 털어 내는 것 같다/ 측백나무 곁에 있었으나 참새떼가 측백나무를 떠나자 내 감각으로부터 측백나무도 떠났다/ 사방에 측백나무가 없다//

하늘 궁전 / 문태준
목련화가 하늘궁전을 지어놓았다/ 궁전에는 낮밤 음악이 냇물처럼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생사 없이 돌옷을 입고 평화롭다/ 목련화가 사흘째 피어 있다/ 봄은 다시 돌아왔지만 꽃은 더 나이도 들지 않고 피어 있다/ 눈썹만 한 높이로 궁전이 떠 있다/ 이 궁전에는 수문장이 없고 누구나 오가는 데 자유롭다/ 어릴 적 돌나물을 무쳐먹던 늦은 저녁밥때에는/ 앞마당 가득 한 사발 하얀 고봉밥으로 환한 목련나무에게 가고 싶었다/ 목련화 하늘궁전에 가 이레쯤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아, 24일 / 문태준
이 지구에서 가장 높이 자란 저 먼 나라 삼나무는 뿌리에서 잎까지 물이 올라가는데/ 꼬박 24일이 걸린다 한다// 나는 24일이라는 말에 그 삼나무가 그립고 하루가 아프다/ 나의 하루에는 쏙독새가 울고 나비가 너울너울 날고 꽃이 피는데/ 달이 반달을 지나 보름을 지나 그믐의 흙덩이로 서서히 되돌아가는 그 24일/ 우리가 수없이 눕고 일어서고 울고 웃다 지치는 그 24일이 늙은/ 삼나무에게는 오롯이 하나의 소천小天이라니! 한 동이의 물이라니!// 나는 또 하루를 천둥 치듯 벼락 내리듯 살아왔고/ 산그림자를 제 몸 안에 거두어 묻으며 서서히 먼 산이 저무는데/ 저 먼 산에는 물항아리를 이고 산고개를 넘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는/ 샘물 같은 산골 아이가 있을 것만 같다// 그 오랜 시간 아스라히 물을 길러 살아가는 삼나무,/ '하루를 천둥 치듯 벼락 내리듯 살아'가는 우리들과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거기엔 동화처럼 샘물 긷는 '산골 아이'들도/ 살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뻘 같은 그리움 / 문태준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놓았었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맷돌 / 문태준
마룻바닥에 큰 대자로 누운 농투사니 아재의 복숭아뼈 같다/ 동구에 앉아 주름으로 칭칭 몸을 둘러세운 늙은 팽나무 같다/ 죽은 돌들끼리 쌓아올린 서러운 돌탑같다/ 가을 털갈이를 하는 우리집 새끼 밴 염소 같다/ 사랑을 잃은 이에게 녹두꽃 같은 눈물을 고이게 할 것 같다/ 그런 맷돌을, 더는 이 세상에서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내/ 외할머니가 돌리고 있다//

나는 심장을 바치러 온다 / 문태준
나는 심장을 바치러 온다/ 호두나무 잎에 어둠이 뭉쳐있을 때 그 끝에서 새벽을/ 기다리는 외로운 산까치처럼 나는 살아왔다/ 거친 꽃을 내뱉으며 늙은 영혼의 속을 꺼내 보이는/ 할미꽃처럼 나는 살아 왔다/ 그러나,/ 허물을 벗어놓고 여름을 우는 매미처럼/ 하나의 열망으로 노래하리니/ 꾹꾹 허공에다 지문을 눌러찍으며 물결쳐 가는 노래여/ 절절 끓는 아랫목으로 불 들어가듯 가는 노래여/ 더 슬픈 노래여/ 나는 이제 심장을 바치러 온다//

뜨락 위 한 켤레 신발 / 문태준
어두워지는 뜨락 위 한 켤레 신발을 바라본다/ 언젠가 누이가 해종일 뒤뜰 그늘에 말리던 고사리 같다/ 굵은 모가지의 뜰!/ 다 쓴 여인네의 분첩/ 긴 세월 몸을 담아오느라 닳아진/ 한 켤레 신발이었다/ 아, 길이 끝난 곳에서도 적멸은 없다//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 문태준
고샅을 돌아 부푼 달 아래 걷는데/ 거뭇거뭇한 논배미에서/ 한 뭉테기로 와글,/ 귀를 촘촘하게 열었더니/ 논개구리들이/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이 봄밤에 방랑악사들이/ 대고를 두드리는데/ 참 멋진 춘화 한 장입니다/ 온 우주가 잔뜩 바람난 꽃입니다//

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 문태준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당신의 눈에서 눈으로 산그림자처럼 옮겨가는 슬픔들/ 오지항아리처럼 우는 새는 더 큰 항아리인 강이 가둡니다/ 당신과 나 사이/ 이곳의 어둠과 저 건너 마을의 어둠 사이에/ 큰 둥근 바퀴 같은 강이 흐릅니다/ 강 건너 마을에서 소가 웁니다/ 찬 강에 는개가 축축하게 젖도록 우는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낮 동안 새끼를 이별했거나 잃어버린 사랑이 있었거나/ 목이 쉬도록 우는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우는 소의 희고 둥근 눈망울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혀 / 문태준
잠자다 깬 새벽에/ 아픈 어머니 생각이/ 절박하다// 내 어릴 적/ 눈에 검불이 들어갔을 때/ 찬물로 입을 헹궈/ 내 눈동자를/ 내 혼을/ 가장 부드러운 살로/ 혀로/ 핥아주시던// 붉은 아궁이 앞에서/ 조속조속 졸 때에도/ 구들에서 굴뚝까지/ 당신의 눈에/ 불이 지나가고// 칠석이면/ 두 손으로 곱게 빌던/ 그 돌부처가/ 이제는 당신의 눈동자로/ 들어앉아서// 어느 생애에/ 내가 당신에게/ 목숨을 받지 않아서/ 무정한 참빗이라도 될까// 어느 생애에야/ 내 혀가/ 그 돌 같은/ 눈동자를 다 쓸어낼까// 목을 빼고 천천히/ 울고, 울어서/ 젖은 아침//

어두워지는 순간 / 문태준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 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시아 흰 꽃은 쌀밥 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 그 모든 게 달려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개이고, 멧새는 좁쌀처럼 울다가 조약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 놓은 아카시아 흰 꽃이고……. 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베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이상하지, 오늘은 어머니가 이것들을 다 버무려서/ 서당골에서 내려오면서 개도 멧새도 아카시아 흰 꽃도 호미도 마당에 선 나도 한 사발에 넣고 다 버무려서, 그 모든 시간들도 한꺼번에 다 버무려서/ 어머니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다 어두워졌네//

시월에 /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 / 문태준
세상 한곳 한곳 하나 하나가 저녁에 대해 말하다/ 까마귀는 하늘이 길을 꾹꾹 눌러 대밭에 앉는다고 운다/ 노란 감꽃 핀 감잎은 등이 무거워졌다고 말한다/ 암내 난 들고양이는 우는 아가 소리를 업고 집채의 그늘을 짚으며 돌아 나간다/ 나는 대청에 소 눈망울만한 알전구를 켜 어둠의 귀를 터준다/ 들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찬물에 발을 씻으며 검게 입을 다물었다//

누가 울고 간다 / 문태준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 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호수 / 문태준
당신의 호수에 무슨 끝이 있나요/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한 바퀴 또 두 바퀴// 호수에는 호숫가로 밀려 스러지는 연약한 잔물결/ 물위에서 어루만지는 미로/ 이것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봄날 쓰다.. / 문태준
그대 없는 물가에/ 얕은 데 물가에/ 너른너른 모래톱 흰 모래에/ 새들/ 오종종하게 논다/ 흘리듯 어지러이 논다/ 잘 놀면 노는데/ 염증이 없다/ 그대 없는 물가에 또 때(時)는 와/ 악기처럼/ 솟고 무너지는 音으로/ 버들 같은 새들이//

봄날 지나쳐간 산집 / 문태준
한 채의 햇살에 끌려 나는 오후의 산집으로 갔습니다// 뜨락에 산도라지가 말라가고 검고 마른 탱자나무에 습하고 푸른 빛이 맴도는 집/ 그 산집에서/ 내 뜰과 울타리에도 마르고 곧 젖는 것들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햇살이 촬촬 끓는 마루에서 흰 찔레꽃처럼 웃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여자는 가는 실을 실꾸리에 감아 옮기고 있었습니다/ 여자의 볼에 붉은 무덤이 쌓였다 허물어지는 걸 보았습니다/ 봄꽃이 지면 나무는 또 숲으로 가고/ 작은 무덤들 붉은 흙 위로도 들쑥이 돋아날 줄 압니다// 그러나 참 오래되었지요,/ 저 멀리서 밀려오는 산그림자를 마중 나가본 지도./ 산그림자에 장지문을 걸어 잠그는 마음의 곳집에 가본지도.//

​봄바람이 불어서 / 문태준
봄바람이 불어서/ 잔물결이 웃고// 봄바람이 불어서/ 굴에서 뱀 나오고// 봄바람이 불어서/ 밑돌이 헐겁고// 봄바람이 불어서/ 진 빚을 갚고/ 새 빚을 내고// 봄바람이 불어서/ 귀신이 흐늘거리고// 봄바람이 불어서/ 저쪽으로 가는 물빛// 세계의 푸른 두 눈//

다시 봄이 돌아오니 / 문태준
누군가 언덕에 올라 트럼펫을 길게 부네/ 사잇길은 달고 나른한 낮잠의 한군데로 들어갔다 나오네/ 멀리서 종소리가 바람에 실려오네/ 산속에서 신록이 수줍어하며 웃는 소리를 듣네/ 봄이 돌아오니 어디에고 산맥이 일어서네/ 흰 배의 제비는 처마에 날아들고/ 이웃의 목소리는 흥이 나고 커지네/ 사람들은 무엇이든 새로이 하려 하네/ 심지어 여러 갈래 진 나뭇가지도/ 양옥집 마당의 묵은 화분도//

여름밭 / 문태준
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밭을 키운다/ 재는 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가 있지/ 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밭이 생겨난다/ 그냥 둬보자는 것이다/ 고구마순은 내 발목보다는 조금 높고/ 토란은 넓은 그늘 아래 호색한처럼 그 짓으로 알을 만들고/ 참외는 장대비를 콱 물어삼켜 아랫배가 곪고/ 억센 풀잎들은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처럼/ 스윽스윽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고/ 흙에 사는 벌레들은 구멍에서 굼실거리고/ 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이고/ 저들마다 막행막식하는 그런 밭/ 날이 무명빛으로 잘 들어 내 귀는 밝고 눈은 맑다/ 그러니 그냥 더 둬보자는 것이다//

정류장에서 / 문태준
언젠가 내가 이 자리에 두고 간 정류장/ 둥근 빗방울 속에 그득 괴어 있던 정류장/ 꽃 피고 잎 지고 이틀 사흘 여름 겨울 내려서던 정류장/ 먼 데 가는 구름더미와 장죽(長竹)을 물고 선 정류장/ 홀어머니 머리에 이고 있던 정류장/ 막버스가 통째로 싣고 간 정류장//

극빈 /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 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극빈 2 -獨房 / 문태준
칠성여인숙에 들어섰을 때 문득, 돌아 돌아서 獨房으로 왔다는 것을 알았다// 한 칸 방에 앉아 피로처럼 피로처럼 꽃잎 지는 나를 보았다 천장과 바닥만 있는 그만한 독방에 벽처럼 앉아 무엇인가 한 뼘 한 뼘 작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흘러 나가는 것을 보았다// 고창 공용버스터미널로 미진양복점으로 저울집으로 대농농기계수리점으로 어둑발은 내리는데 산서성의 나귀처럼 걸어온 나여,// 몸이 뿌리로 줄기로 잎으로 꽃으로 척척척 밀려가다 슬로비디오처럼 뒤로 뒤로 주섬주섬 물러나고 늦추며 잎이 마르고 줄기가 마르고 뿌리가 사라지는 몸의 ​숙박부, 싯다르타에게 그러했듯 왕궁이면서 화장터인 ​한 몸// 나도 오늘은 아주 식물적으로 독방이 그립다//

극빈 3 -저 들판에게 / 문태준
아무도 없는 빈 들판에 나는 이르렀네/ 귀 떨어진 밥그릇 하나 들고/ 빛을 걸식하였네/ 풀치를 말리듯 내 옷을 말렸네/ 알몸으로 누워 있으면/ 매미 허물 같은 한나절이 열 달 같았네/ 배 속의 아가처럼 눈도 귀도 새로이 열렸네/ 함께 오마 하는 당신에겐 저 들판을 빌려주리//

사라진 뱀 이야기 / 문태준
외할아버지의 낡은 옷을 보며 나는 뱀의 껍질 같은 비릿한 내를 맡았다/ 지게의 등이나 받쳐주던 지겟작대기 끝에 뱀 한 마리가 대롱대롱 걸려 들어왔다/ 숫돌에 얹혀져 푸른 등을 내보이던 낫보다 그 능구렁이가 더 무서워 보였다/ (저녁연기가피는집을방문한者/그놈을/낯선꽃이라/부르겠네)// 뱀을 본 누이들이 서둘러 굴뚝을 돌아 도망쳤다/ 목구멍이 조인 그놈을 보니 내 목이 갈근거렸다/ 작고 빈 독을 가져다 놈을 집어넣고/ 외할아버지는 독 안에 뭔가 무서운 것이 들어찼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독에 뚜껑을 얹고 그 위에 큰 돌을 하나 더 얹었다/ 놈의 목이 딸깍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꽃도갇히면숨을멎을까?/낯선꽃이꺾어질까?)// 늙은 능구렁이는 쉬이쉬이 휘파람을 분다고 외할머니는 생전에 얘기했다/ 쉬이쉬이 휘파람이 끝나는 자리에서/ 그놈을 데려갈 놈들이 밤새 기어온다는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쉬이쉬이 숨이 가빠지더니 저승으로 가버렸다/ (외할머니도生이라는것을살았다면/하나의꽃?)// 일전에 동네에 여자가 길 위에서 죽었다/ 여자는 연신 애를 배어, 애를 배게 만든 남정네들이 그 여자를 매번/ 둔덕에서 밀어버린다고 소문이 돌았다/ 둔덕에 매어져 있던 소가 비탈로 굴러/ 솔방울 같은 눈망울을 하얗게 만들며 죽는 것을/ 나는 아주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다, 그 여자도 소처럼/ 눈자위가 하얗게 쇠어버렸을 게다/ 여자가 미치면 소를 닮는다,고 누군가 말했다/ 미친 여자는 늙은 구렁이가 거두어 간다,고 누군가 말했다/ (미친여자도꽃이었을까?/그꽃씨들은?)// 토끼 귀보다 높게 귀를 허공에다 내다걸어/ 그 작고 까만 독을 나는 꼬박 지켜보았지만/ 아카시아가 많은 공동묘지 산에서부터 길 위에까지/ 해가 천천히 걸어내려오는, 그런, 오래된 아침만 반복되었다/ (들깨하얀꽃망울에피어나던세월이이따금/자줏빛가지꽃에가서/ 피고지고하였다/능구렁이가사라졌다!/아무도독을열지못했다/손끝멀리피어있는꽃!)//

꽃뱀을 쫓아서 / 문태준
까만 혀를 날름대는 게 숯을 삼겼구나, 불탄 장작 한토막처럼 혀를 움직여대는 뱀/ 마당 한구석이 중얼거리더니 그늘이 길고 깊어지다/ 부지갱이를 갖다 모가지를 눌러줄까, 요년!/ 저 혓바닥! 화냥기의 집!/ 집에 든 뱀을 잡아들였다 육촌형은 장마 내내 누워 지냈다, 썩은 나무둥치처럼/ 나는 대숲에 서서 장대비들이 들이치는 걸 보았다/ 썩은 대통에 장대비가 휘두르는 광기를 보았다/ 누군가 죽은 형의 살을 물어뜯었다, 벌 쐰 가슴 벌지블 따주듯/ 누군가 낮 동안 哭을 하고 밤 동안 삽짝에 소금을 뿌렸다/ 쭈그려 앉은 새 곁에서 세월이 혹간 흘러갔으나 나는 살아내는 일이 무구덩이 같았다/ 외바늘 낚시에 걸린 생이라니!/ 부지깽이를 갖다 모가지를 눌러줄까, 요년! 벼르는 사이/ 까만 혀가 쑤욱 내 골 속으로 들어왔다 나간다/ 하얀 침이 고인 자리/ 하얀 햇빛 속으로 꽃뱀도, 육촌형도 사라졌다//

산모롱이 저편 / 문태준
산모롱이 한 굽이 돌아 당신을 만나러 간다. 당신의 희미하고 둥근 눈썹을 예전에 내가 어루만지기나 하듯이 꺼져가는 달을 어루만지는 허공, 저렇게 오래 배웅하는 것도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잠깐 눈발을 그쳐 있다. 산새가 다시 운다. 울음이 성성하다. 나와 당신 사이에 싸락눈에 묻힐 산모롱이가 한 굽이 있다.//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날// 못자리 무논에 산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 한 사람이 그리운 날이 있으니// 게눈처럼, 봄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오후/ 자목련을 넋 놓고 바라본다//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아니었을지도/ 저 수많은 작고 여린 순들이 봄나무에게 중심이듯/ 환약처럼 뭉친 것만이 중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른다/ 물빛처럼 평등한 옛날 얼굴들이/ 꽃나무를 보는 오후에/ 나를 눈물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등하듯/ 어느 하나의 물이 산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들어갈 수 없듯이//

비가 오려 할 때 /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철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비 지나가는 저수지 / 문태준
구름이 사람과 엉킴은 오래된 재실 마당에서나 있을 일이다/ 비 지나가는 저수지 다들 돌아간 녘에/ 어둠이 오리떼를 종용하며 모가지에 절구 같은 울음으로 고인다/ 나는 지렁이의 몸통반을 잘라 저수지에 담가두고/ 이 넣ㅂ은 토란잎에 빗발이 듣는 걸 본다/ 붕어쯤 갈쿠리를 입에 놓고 당기는가본데/ 나는 바둑돌을 올려 놓듯 무십하다/ 마을에서 누군가 올라와 거머리밥이 되기까지의 자살행위가/ 빗발을 받는 이 토란잎의 이력이다/ 한배의 새끼를 낳은 토끼장에 누런 족제비 한 마리를 들여놓고 그놈들끼리 물고 뜯는 것을 멀찌감치서 지켜보듯/ 유쾌하게 나는 내 낚싯대를 당시근 물밑 유속과/ 더 밑에 가라앉은 돌들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씨알 굵은 고기들의 저 근육이 어디서 연유할까/ 오리떼가 거 깊게 절구통을 찧어댈수록 혼자 낭아 있자니/ 이 토란잎이 서낭당 같아 더럭 무서워져 낮게 중얼거린다/ 구름이 사람과 엉킴은 오래된 재실 마당에서나 있을 일이다/ 구름이 사람과 엉킴은 오래된 재실 마당에서나 있을 일이다//

장대비 멎은 소읍 / 문태준
땅이 소란스러운 때를 보냈으니 누에가 갉아먹다 버린 뽕잎같다/ 장대비가 다녀가셨다/ 복사꽃처럼 소란한 논도 걔중에는 있었고/ 귓불이 도톰하고 거위 소리처럼 굵은 울대를 가진 놈도 다녀가셨다/ 비 내린 땅은 돌꽃미냥 꼿꼿이 파인 얼굴이다/ 팔랑팔랑 하얀 나비 새로이 나는 것으로 장대비 멋은 줄 아는 것이지만/ 집을 주섬주섬 나오는 촌로들은 늙고 초췌하다//

하짓날 / 문태준
제비집인데 지베 아닌 뭔 날것 돌아온다/ 찬물 위 기름 돌 듯 매번 처마 아래 그 집 허물 생각/ 그을린 방구들 구름들 서쪽으로 갈아 내놓은 인부들/ 집터 한귀퉁이에 엉켜 살던 푸른 풀배암이/ 가시덤불 우거진 산속으로 소낙비처럼 내쳐간다/ 병 깊어져 오늘 산속으로 간 사람의 무정함/ 묻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초저녁녘 중얼거리는/ 날벌레떼거리, 저 살아 있는 무덤들!/ 나는 피우려던 숙불 그만둔다/ 뜸부기는 별 하나식 골짜기에 따 담아/ 하늘의 벌판에서 꽃들 별똥으로 지는데/ 하현달에 올라 낫을 갈며 나는 끊어지는 인연을 본다//

섬에서 며칠 / 문태준
숫돌에 낫을 갈 듯 오가는 저 파도의 날은 넘어버렸다// 파도야 종을 치듯 하지만 내 귀는 할망구 발톱만큼 두터워져// 가끔 두 근어치의 구름만 눈 안에 얹힐 따름이다// 섬, 거적문 안에 앉아 머리카락도 기르고 손톱도 길러/ 쓸쓸한 생각들이 삼신메를 먹고 생각을 낳아 기르는/ 그 胎生의 과정을 지켜보면 생각의 창도 관대해진다는 것// 섬, 불탄 집에 들어가 불길을 지피던 예전의 바람을 보는 자는 섬에 닿지 못할 것이다// 저 번잡한 새들은 밤새워 울어도 섬을 유혹하진 못할 것이다//

사색(思慕) -물의 안쪽 / 문태준
바퀴가 굴러간다고 할 수밖에/ 어디로든 갈 것 같은 물렁물렁한 바퀴/ 무릎은 있으나 물의 몸에는 뼈가 없네 뼈가 없으니/ 물소리를 맛있게 먹을 대 이(齒)는 감추시게/ 물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네/ 미끌미끌한 물의 속살 속으로/ 물을 열고 들어가 물을 닫고/ 하나의 돌같이 내 몸이 젖네/ 귀도 눈도 만지는 손도 혀도 사라지네/ 물속까지 들어오는 여린 별처럼 살다 갔으면/ 물비늘처철 그대 눈빛에 잠시 어리다 갔으면/ 내가 예전엔 한번도 만져보지 못했던/ 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고요//

마루 / 문태준
먼 곳 수평선 푸른 마루에 눕고 싶다 했다/ 타관 타는 몸이 마루를 찾아, 단 하나의 이유로 속초 물치항에 갔다/ 그러나 달포 전 다솔사 요사체, 고요한 安心寮의 마루는 잊어버려요/ 대팻날을 들이지 않는, 여물고 오달진 그런 몸의 마루는 없어요/ 近境에서 저 푸른 마루도 많은 날 뒤척이는 流民일뿐/ 당신도 나도 한 척의 격랑이오니 흔들리는 마루이오니//

자루 / 문태준
자루는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다// 초봄 뱀눈 같은 싸락눈 내리는 밤 볍씨 한 자루를 꿔 돌아오던 家長이 있었다 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일어나면 나는 난생처음 마치 내가 작은댁의 자궁에서 자라난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입이 뾰족한 들쥐처럼 서러워서 아버지, 아버지 내 몸이 무거워요 내 몸이 무거워요 벌써 서른 해 전의 일이오나 자루는 나를 이 새벽까지 깨워 나는 이 세상에 내가 꿔온 영원을 생각하오니// 오늘 봄이 다시 와 동백과 동백 진다고 우는 동박새가 한 자루요 동박새 우는 사이 흐르는 銀河와 멀리 와 흔들리는 바람이 한 자루요 바람의 지붕과 石榴꽃 같은 꿈을 꾸는 내 아이가 한 자루요 이 끊을 수 없는 것과 내가 한 자루이오니// 보리질금 같은 세월의 자루를 메고 이 새벽 내가 꿔온 영원을 다시 생각하오니//

아무 까닭도 없이 / 문태준
돌담을 지나가고 있었다/ 귀뚜라미가 돌담 속에서 울고 있었다/ 구렁이가 살던 곳이라고 했다/ 돌담을 돌아도 돌담이 이어졌다/ 귀뚜라미가 따라오며 울었다/ 집으로 얼른 돌아와/ 목침(木枕)을 베고 누웠다/ 빈방에 가만히 있었다/ 귀뚜라미가 따라와/ 목침 속에서 울었다/ 방이 어두워지자/ 밤이 밤의 뜻으로 깊어지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 까닭도 없이//

당신에게 미루어 놓은 말이 있어 / 문태준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 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여,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 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 문태준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바닥 / 문태준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바깥 / 문태준
장대비 속을 멧새 한마리가 날아간다/ 彈丸처럼 빠르다/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 갈 곳이 멀리/ 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 하얀 참깨꽃 핀 한 가지에서/ 도무지 틈이 없는/ 빗속으로/ 소용돌이쳐 뚫고 날아가는/ 멧새 한 마리/ 저 全速力의 힘/ 그리움의 힘으로/ 멧새는 어디에 가 닿을까/ 집으로?/ 오동잎 같이 넓고 고요한 집으로?/ 中心으로?/ 아./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

수평(水平) / 문태준
단 하나의 잠자리가 내 눈앞에 내려앉았다/ 염주알 같은 눈으로 나를 보면서/ 투명한 두 날개를 수평으로 펼쳤다/ 모시 같은 날개를 연잎처럼 수평으로 펼쳤다/ 좌우가 미동조차 없다/ 물 위에 뜬 머구리밥 같다/ 나는 생각의 고개를 돌려 좌우를 보는데/ 가문 날 땅벌레가 봉긋이 이어놓은 땅구멍도 보고/ 마당을 점점 덮어오는 잡풀의 억센 손도 더듬어보는데/ 내 생각이 좌우로 두리번거려 흔들리는 동안에도/ 잠자리는 여전히 고요한 수평이다/ 한 마리 잠자리가 만들어놓은 이 수평 앞에/ 내가 세워놓았던 수많은 좌우의 병풍들이 쓰러진다/ 하늘은 이렇게 무서운 수평을 길러내신다//

아침 / 문태준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했다/ 새떼가 몇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번 또 한번 출렁했다/ 서 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아침 항구에서 / 문태준
바다가 아침에 내게 갈치 상자를 건네주었네./ 해풍에 그을린 어부들의 굵은 팔뚝으로./ 미로를 헤엄치는 외롭고 긴 영혼을./ 빛의 날카로운 이빨을./ 한번도 건너지 못한 멀고 먼 곳을./ 깊은 풍랑을./ 갈치 상자만한 은빛 가슴을./ 푸른 바다가 검은 내게 배를 대고서//

여름날의 마지막 바닷가 / 문태준
바닷가는 밀려와 춤추는 파도들로 흥겨워요// 나는 모래밭에 당신의 이름과 나의 질문을 묻었어요/ 나는 모래성을 하나 더 쌓아놓고 바닷새보다 멀리서 올라올 밀물을 기다려요// 모래알에는 보리처럼 뿌린 별이 가득한데/ 모래알에는 초승의 달빛이 일렁이는데// 우린 이 바닷가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우린 이 바닷가에서 다시 알아볼 수 있을까요//

언제 또 여러번 / 문태준
왼 손목의 맥을 짚으며 비를 보네/ 물통을 내려놓고 비를 보네/ 이 비 그치면 낙과(落果)를 줍게 되리/ 천둥 우는 소리는 처음엔 높고 나중엔 낮아지네/ 계곡물은 비옷을 입고 급하게 내려오네/ 오늘 칡넝쿨같이 뻗어가는 구름 아래를 지나며/ 언제 또 소낙비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네/ 쏟아짐이여,/ 여러번의 오후는 여름 위에/ 여러번의 여름은 일생(一生)위에/ 이처럼 쏟아진다 할밖에/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질펀하네//

오랫동안 깊이 생각함 / 문태준
이제는 아주 작은 바람만을 남겨둘 것/ 흐르는 물에 징검돌을 놓고 건너올 사람을 기다릴 것/ 여름 자두를 따서 돌아오다 늦게 돌아오는 새를 기다릴 것/ 꽉 끼고 있던 깍지를 풀 것/ 너의 가는 팔목에 꽃 팔찌의 시간을 채워줄 것/ 구름수레에 실려가듯 계절을 갈 것/ 저 풀밭의 여치에게도 눈물을 보태는 일이 없을 것/ 누구를 앞서겠다는 생각을 반절 접어둘 것//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 문태준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 요를 깔고 아주 가벼운 이불을 덮고 있네/ 한층의 재가 당신의 몸을 덮은 듯하네/ 눈도 입도 코도 가늘어지고 작아지고 낮아졌네/ 당신은 아무런 표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네/ 서리가 빛에 차차 마르듯이 숨결이 마르고 있네/ 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 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하겠네/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 문태준
끔찍하다/ 조그맣게 모인 물속/ 배를 내 눈앞처럼 달고/ 올챙이가 헤엄치고 있다// 아주 어둡고 덜 어두울 뿐인/ 둥근 배 속/ 다리 넷이/ 한테 엉겨 있다// 한 통이다/ 한 통이 통째로 움직인다/ 마음가면 마음이 전부 간다// 속으로 울 때/ 손발이 모두/ 너의 눈물을 받아준다// 너의 몸을 보고/ 내 몸을 보니/ 사람이 더 끔찍하다// 팔을 밀어 넣고/ 나의 다리를 밀어 넣어/ 저 원적(原籍)으로 돌아갔으면// 둥근 배 속/ 아직은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이별이라는 말에 태동(胎動)이 있기 전//

귀휴(歸休) / 문태준
돌아와 나흘을 매어놓고 살다/ 구불구불한 산길에게 자꾸 빠져들다/ 초승달과 새와 높게 어울리다/ 소와 하루 밤새 게으르게 눕다/ 닭들에게 마당을 꾸어 쓰다/ 해 질 무렵까지 말뚝에 묶어놓고 나를 풀밭을 염소에게 맡기다/ 울 아래 분꽃 곁에 벌을 데려오다/ 엉클어진 수풀에서 나온 뱀을 따르며 길게 슬퍼하다/ 조용한 때에 샘이 솟는 곳에 앉아 웃다/ 이들과 주민(住民)이 되어 살다//

한 마리 멧새 / 문태준
소복하게 내린 첫눈 위에 찍어놓은/ 한 마리 멧새 발자국 첫잎 같다/ 발자국이 흔들린 것 보니/ 그자리서 깔깔 웃다 가셨다/ 뒤란이 궁금해 그곳까지 다녀가셨다/ 가늘은 발뒤꿈치를 들어 찍은/ 그 발자국을 그러모아 두 귀에 부었다/ 맑은 수액 같다/ 귀에 넣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니 졸졸 우신다/ 좁쌀 같은 소리들 귀가 시원하다/ 발자국을 따라가니 내 발이 아직 따뜻하다/ 멧새 한 마리 시골집 울에 내려와/ 가늘은 발목을 넞어 앉아 붉은 맨발로/ 마른 목욕을 즐기신다/ 간밤에 다년간 그분 같은데/ 밤새 시골집을 다 돌아보고선 능청을 떨고/ 빈 마루를 들여다보고 계신다//

따오기 / 문태준
논배미에서 산그림자를 딛고 서서/ 꿈쩍도 않는/ 늙은 따오기/ 늙은 따오기의 몸에 깊은 생각이 머물다 지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어느날 내가 빈 못을 오도카니 바라보았듯이/ 쓸쓸함이 머물다 가는 모습은 저런 것일까요/ 산그림자가 서서히 따오기의 발목을 흥건하게 적시는 저녁이었습니다.//

개미 / 문태준
처음에는 까만 개미가 기어가다 골똘한 생각에 멈춰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등멱을 하러 엎드린 봉산댁/ 젖꼭지가 가을 끝물 서리맞은 고욤처럼 말랐다/ 댓돌에 보리이삭을 치며 보리타작을 하며 겉보리처럼 입이 걸던 여자/ 해 다 진 술판에서 한잔 걸치고 숯처럼 까매져서 돌아가던 여자/ 담장 너머로 나를 키워온 여자/ 잔뜩 허리를 구부린 봉산댁이 아슬하다//

개를 데려오다 / 문태준
석양 아래 묶인 한 마리 개가 늦가을 억새 같다/ 털갈이를 하느라 작은 몸이 더 파리하다/ 석양 아래 빛이 바뀌고 있다/ 그녀가 정붙이고 살던 개를 데리고 골목을 지나 내 집으로 돌아오다//

나비 가듯이 / 문태준
나비가 꽃 따먹으러 가듯이 가고 싶은 곳/ 나비가 주물럭 주물럭거리며 날아가네/ 젖무덤처럼 물컹물컹한 당신의 고운 품//

벌레 詩社 / 문태준
시인이랍시고 종일 하얀 종이만 갉아 먹던 나에게/ 작은 채마밭을 가꾸는 행복이 생겼다/ 내가 찾고 벌레가 찾아/ 밭은 나와 벌레가 함께 쓰는 밥상이요 모임이 되었다/ 선비들의 정자 모임처럼 그럴듯하게/ 벌레와 나의 공동 소유인 밭을 벌레 시사詩社 라 불러 주었다/ 나와 벌레는 한젖을 먹는 관계요/ 나와 벌레는 무봉 無縫의 푸른 구멍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노동은 단단한 턱으로/ 물렁물렁한 구멍을 만드는일/ 꽃과 잎과 문장의 숨통을 둥그렇게 터주는 일/ 한 올 한 올 다 끄집어 내면 환하고 푸르게/ 흩어지는 그늘의 잎맥들//

붉은 흙 물고기 / 문태준
상두꾼들이 그녀의 무덤을 등 둥근 물고기로 만들어 주었다/ 세상의 모든 무덤은 붉은 흙 물고기이니/ 물 없는 하늘 헤엄쳐 그녀는 어디로든 갈 것이다//

살얼음 아래 같은 데 / 문태준
가는, 조촘조촘 가다 가만히 한자리서 멈추는 물고기처럼/ 가라앉은 물돌 곁에서, 썩은 나뭇잎 밑에서 조으는 물고기처럼/ 추운 저녁만 있으나 야위고 맑은 얼글로/ 마음아, 너 갈 데라도 있니?/ 살얼음 아래 같은 데/ 흰 매화 핀 살얼음 아래 같은 데//

떼 / 문태준
송사리들이/ 송글송글 떼지어 헤엄치고 있다/ 우루루 몰려다니는데/ 바람이 일지도 않는다/ 축축한 그림자를 끌고 다니고 있다/ 그림자들은/ 우수수 빗방울처럼 떨어져/ 열 지은 기차를 닮았다가/ 열여덟 량 장대 열차가 되었다가/ 대통처럼 직선으로 내뻗었다가/ 등뼈가 휜 곡선이었다가/ 주먹밥처럼/ 돌 밑/ 한군데 모여들기도 한다/ 송사리들이 떼를 지어 다니고 있다/ 일상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역에서 저 역으로/ 봇짐장사들처럼/ 가난한 가족의 저녁 밥상처럼/ 수많은 눈알들이 몰려 다니고 있다//

산비 소리에 / 문태준
누가 푸른 똥을 누시나/ 떨어져 번지는 이끼처럼 번지는, 더 번져 몽글몽글/ 맺히는 똥/ 맺혀도 몰랑몰랑한 똥// 푸른 벌레가 산자두잎 뒤 잎사귀 처마로 들어가 동글동글한 똥을 피한다/ 목주름 펴 처마 바깥을 기웃 거리다 잗다랗고 말랑말랑한 푸른 똥 누고/ 자울자울 존다// 잎사귀 처마를 득득 긁는 산비 소리에/ 윗니 아랫니 돋아 간질간질한 산비 소리에//

묶다 / 문태준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 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 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에/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묶다//

그맘때에는 / 문태준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 빈손이다/ 하루를 만지작만지작 하였다/ 두 눈을 살며시 또 떠보았다/ 빈손이로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보았다/ 무른 나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

평상이 있는 국수집 / 문태준
평상이 있는 국수집에 갔다/ 붐비는 국수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 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 세월 넘어 온 친정 오빠를 서로 만난 것 같다/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주는 말/ 병실에서 온 사람도 있다/ 식당일을 손놓고 온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 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 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 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 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

내 배후로 夕陽, 夕陽 / 문태준
저무는 나무들의 이파리에 내 맨발 흥건히 젖어들 때/ 툇마루에 반쯤 걸터앉은 햇빛에는 애당초 누군가 살고 있는 게다/ 한량처럼 열대의 늪을 건너가는 河馬와/ 南國으로, 남국으로 한절기를 버티려는 되새떼 그 빈사의 폭동 사이/ 개 같은 , 당최 이 개 같은 틈에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때/ 내 맨발이 저무는 나무들의 이파리에 가려질 때/ 눈에 호롱불을 들이고/ 바늘귀를 꿰주마, 중얼거리는 그런 오랜 족속이 있는 게다/ 한번도 보지 못한 내 할머니 넋, 혹은 내가 부려온 세상의 노복들이 있는 게다//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날 / 문태준
못자리 무논에 산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 한 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 게눈처럼, 봄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오후/ 자목련을 넋 놓고 바라본다/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 아니었을지도/ 저 수많은 작고 여린 순들이 봄나무에게 중심이듯/ 환약처럼 뭉친 것만이 중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른다/ 물빛처럼 평등한 옛날 얼굴들이 꽃나무를 보는 오후에/ 나를 눈물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등하듯/ 어느 하나의 물이 산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들어갈수 없듯이//

서리 / 문태준
겨울 찬 하늘/ 한켜 살 껍질을 누가 벗겼나/ 어느 영혼이/ 지난 밤 꽃살문 같은 꿈을 꾸었나/ 갓 바른 문풍지 같고/ 공기로만 빚는 동천산 첫물/ 사락사락 조리로 쌀을 이는 소리가 난다//

번져라 번져라 病이여 / 문태준
1/ 개망초가 피었다 공중에 뜬/ 꽃별, 무슨 섬광이/ 이토록 작고 맑고 슬픈가/ 바람은 일고 개망초꽃이 꽃의 영혼이 혜성이 돈다// 개망초가 하얗게 피었다/ 잠자리가 날 때이다/ 너풀너풀 잠자리가 멀리 왼편에서 바른편으로 혹은/ 거꾸로/ 강이 흐르듯 누워서 누워서// 2/ 오늘 다섯 살 아이에게 수두가 지나가고, 나는 생각한다, 만발하는 것에 대하여/ 수두처럼 지나가는 꽃에 대하여 하늘에 푸른 액정 화면에/ 편편하게 날아가는 여름 잠자리에 대하여 내 생각에 홍반처럼 돋다/ 사그라드는 것에 대하여/ 그리하여 나는 지금 앓고 있는 사람이다// 3/ 그리고 나는 본다, 한 집의 굴뚝에서 너풀너풀 연기가 번져 나오는 것을 그 얼룩을/ 그리고 나는 안다, 이 뜨거운 환장할 대낮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한 여인을 그 얼룩을/ 에미가 황해도 무당이었고 남편은 함경도 어디가 고향이고 여인은 한때 소를 한때/ 묵뫼를 사랑했고 올여름 연기를 지독히 사랑했고/ 불을 때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을 그 얼룩을/ 연기는 아주 굼뜨고, 연기는 무학자이고, 연기는 나부이고, 연기는 풀이 무성한 묵밭이고/ 연기는 아궁이 앞에 퍼질러 앉은 그 여인이고, 갈라진 흙벽의 정신이고, 미친 사람이고// 4/ 하늘의 밭에는 개망초가 잠자리가 연기가 수두처럼 지나가고 있다/ 더듬더듬거리며 옮아가고 있다/ 번져라 번져라 병이여,/ 그래야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덤불 / 문태준
들찔레 가지에 새잎 돋아 덤불 한 감에 푸른 잎물이 번진다/ 들찔레 가지에 새잎 돋아도 엉킨 내 뜻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팔에 팔을 손목에 손목을 굴곡屈曲에 굴곡을 한 획에 한 획을 가필해/ 나의 덤불은 육체는 부끄러움 없이 가을날까지 휘고 번진다/ 나의 오늘이 더 큰 참혹함을 부를 뿐이오나/ 새봄이 오면 나는 또 잊는다, 내 가슴 속 거대한 난필亂筆을//

슬픈 샘이 하나 있다 / 문태준
맹꽁이가 운다/ 비를 두 손으로 받아 모으는 늦여름 밤/ 맹꽁이는 울음주머니에서 물을 퍼내는 밑이 불룩한 바가지를 가졌다// 나는 내가 간직한 황홀한 폐허를 생각한다/ 젖었다 마른 벽처럼 마르는/ 흉측한 웅덩이// 가슴속에 저런 슬픈 샘이 하나 있다//

무늬는 오래 지닐 것이 못 되어요 / 문태준
무늬는 오래 지닐 것이 못 되어요/ 시골 오일장이 서는 날에는 집짐승이 서로 사고 팔리는 날에는/ 흰 개에 대한 오해가 있어서 장날 식전食前에 먹을 갈아/ 먹물을 흰 개 몸에 발라 큰 얼룩을 만드는 집이 어려선 있었지요/ 흰 개를 검은 개로 반절은 만들어 옥시글거리는 장에다 내었지요/ 흰 개는 배가 가렵다고 흙바닥에 기고 뒹굴고 뒷발로 옆구리의 무늬를 긁어대었겠지요/ 그 무늬가 어떻게 되었겠어요/ 용케 개의 배를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러보고 값을 쳐 주는 약삭빠른 장사치가 있었다지만/ 흰 개가 가난한 식구의 밥그릇을 빼앗아간다는 오해도 하나의 무늬여서/ 알고도 모르는 척 속은 척 받아 넘기는 것이 무늬이었지요/ 개칠한 무늬는 보기만 해도 우습지만 무늬는 크게 쓸어내릴 것이 못 되었지요/ 무늬는 오래 지닐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아궁이의 재를 끌어내다 / 문태준
그녀의 함석집 귀퉁배기에는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방고래에 불 들어가듯 고욤나무 한 그루에 눈보라가 며칠째/ 밀리며 밀리며 몰아치는 오후// 그녀는 없다,나는 그녀의 빈집에 홀로 들어선다/ 물은 얼어 끊어지고,숯검댕이 아궁이는 쾡하다/ 저 먼 나라에는 춥지 않은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끌어낸다/ 이 세상 저물 때 그녀는 바람벽처럼 서럽도록 추웠으므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식은 재를 끌어내 그녀가 불의/ 감각을 잊도록 하는 것/ 저 먼 나라에는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뜻한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저 먼 나라에서 그녀는 오늘처럼 밖이 추운 날 방으로 들어서며/ 맨 처음 맨 손바닥을 쓸어볼지 모르지만, 습관처럼/ 그럴 줄도 모르지만/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모두 끌어 낸다// 그녀는 나로부터도 자유로이 빈집이 되었다//

첫사랑 / 문태준
눈매가 하얀 초승달을 닮았던 사람/ 내 광대뼈가 붉어져 볼 수 없네/ 이지러지는 우물 속의 사람/ 불에 구운 돌처럼/ 보기만해도 홧홧해지던 사람/ 그러나 내 마음이 수초 밭에/ 방개처럼 갇혀 이를 수 없네/ 마늘졸처럼 깡마른 내 가슴에/ 까만 제비의 노랫소리만 왕진 올 뿐/ 뒤란으로 돌아앉은 장독대처럼// 내 사랑 쓸쓸한 빈 독에서 우네//

집착에 관하여 / 문태준
지주목에 쓸 요량으로 산에 올라 반나절 톱을 켰다/ 나무들이 지난 세월을 메치는 소리/ 쿵, 쿵 귀가 멍멍하다/ 지게에 쟁여진 나무들은 아직 맥박이 있다/ 아카시아 그 위에 난 길/ 나무의 숨통을 조르며 지나간 칡덩굴/ 너무 용쓰느라 죽는 줄, 썩어질 줄 몰랐겠지만/ 나무 피질에 웅숭깊은 골, 하늘로 올라갔구나//

곳간 / 문태준
바람이 일지 않으면 사람들은 스스로 걸어서 결국 바람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붉은 수수들 출렁이는 벌판에서 마음을 끌어다 들어서는 곳간,/ 나는 머리가 세 개인 매를 잡아다 이곳에 가둔다/ 죽은 쥐들의 악취를 채는 매의 발톱을 읽고 있으면, 나는 유쾌하다/ 이 썩은 무구덩이 속에는 귀신들이 판을 치고 있다/ 휴악범 같은 아버지들의 딱딱한 혀도 한됫박 모여 있다/ 개밥그릇은 개밥그릇처럼 찌그러지고 그 공기에 담기면 세월도 찌그러진다//

오오 이런! / 문태준
나의 집에는 묵은 오리 한 마리가 있다 암컷이다/ 알을 많이 낳아 뒤가 청동주발 같다/ 항우울제를 먹고살고 자두가 익는 오늘 황혼에 눈에 늪이 괴어 있었다/ 눈초리로 늪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옆구리 털이 뽑히고 살이 갉혔다/ 그때 오리 곁으로 쥐 한 마리가 기어왔다/ 땅구멍을 뚫어 오리 곁으로 왔다 번들번들했다/ 곁말 거는 척 도리반거리다 오리 곁으로 바싹 기어왔다/ 更紙를 갉는 소리가 났다/ 조금 후 구멍에서 익사한 몸처럼 부푼 쥐와 새끼쥐가 기어나왔다/ 새끼쥐는 눈망울이 또랑또랑했다/ 一家였다/ 나와 오리와 세 마리 쥐가 눈이 마주쳤다/ 오오 이런!//

길 / 문태준
배꽃이거나 석류꽃이 내려오는 길이 따로 있어/ 오디가 익듯 마을에 천천히 여러 빛깔 내려오는 길이 있어서/ 가난한 집의 밥 짓는 연기가 벌판까지 나가보기도 하는 그런 길이 분명코 있어서/ 그 길이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나 있나 쓸쓸함이 생기기도 하여서/ 그때 걸어가 본 논두렁길이나 소소한 산길에서 봄 여름 다 가고// 아, 서리가 올 때쯤이면 알게 될는지// 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을//

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 / 문태준
세상 한 곳 한 곳 하나 하나가 저녁에 대해 말하다/ 까마귀는 하늘이 길을 꾹꾹 눌러 대밭에 앉는다고 운다/ 노란 감꽃이 핀 감잎은 등이 무거워졌다고 말한다/ 내가 난 들고양이는 우는 아가 소리를 업고 집채의 그늘을 짚으며/ 돌아나 간다/ 나는 대청에 소 눈망울만한 알전구를 켜 어둠의 귀를 터준다/ 들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찬물에 발을 씻으며 검게 입을 다물었다//

 

낮달의 비유 / 문태준

내 목숨이 서서히 무너지고 싶은 곳// 멀리서 온 물컹물컹한 소포/ 엷은 창호문과 성글은 울/ 찬물 한 그릇이 있는 마루/ 꽃도 새도 사람도/ 물보다 물렁하게 쥐었다 놓는,/ 식었던 아궁이가 잠깐만 환한,// 내 귓속에 맑게 흐르는 이별의 말/ 자루에서 겨처럼 쏟아져 내리다 흰빛이 된 말//

모닥불 / 문태준
비질하다 되돌아본/ 마당 저켠 하늘/ 벌떼가 뭉텅, 뭉텅/ 이사 간다// 어릴 때/ 기름집에서 보았떤/ 깻묵 한덩어리, 혹은/ 누구의 큰 손에 들려 옮겨지는/ 둥근 항아리들// 서리 내리기 전/ 시루와 솥을 떼어/ 하늘이불로 돌돌 말아/ 밭두렁길을 지나/ 휘몰아쳐가는/ 이사여,// 아, 하늘을 지피며 옮겨가는/ 따사로운 모닥불//

 



문태준 시인
1970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나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處暑〉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한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가 있으며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목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