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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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7. 30.

춤 / 박형준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연습을 한다.// 근육은 날자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 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려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무늬로 뒤덮인다/ 발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녁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멍 / 박형준
어머니는 젊은 날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땡볕에 잘 말린 고추를 빻아/ 섬으로 장사 떠나셨던 어머니/ 함지박에 고춧가루를 이고/ 여름에 떠났던 어머니는 가을이 되어 돌아오셨다/ 월남치마에서 파도소리가 서걱거렸다/ 우리는 옴팍집에서 기와집으로 이사를 갔다/ 해당화 한 그루가 마당 한쪽에 자리잡은 건 그 무렵이었다/ 어머니가 섬으로 떠나고 해당화 꽃은 가을까지/ 꽃이 말라비틀어진 자리에 빨간 멍을 간직했다// 나는 공동우물가에서 저녁 해가 지고/ 한참을 떠 있는 장관 속에서 서성거렸다/ 어머니는 고춧가루를 다 팔고 빈 함지박에/ 달무리 지는 밤길을 이고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이제 팔순이 되셨다/ 어느 날 새벽에 소녀처럼 들떠서 전화를 하셨다/ 사흘이 지나 활짝 핀 해당화 옆에서/ 웃고 있는 어머니 사진이 도착했다/ 어머니는 한 번도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심장이 고춧가루처럼 타버려/ 소닷가루 아홉 말을 잡수신 어머니/ 목을 뚝뚝 부러뜨리며 지는 그런 삶을 몰랐다/ 밑뿌리부터 환하게 핀 해당화 꽃으로/ 언제나 지고 나서도 빨간 멍 자국을 간직했다/ 어머니는 기다림을 내게 물려주셨다//

 

장롱 이야기 / 박형준

나는 장롱 속에서 깜박 잠이 들곤 했다./ 장에서는 항상 학이 날아갔다./ 가마를 타고 죽은 할머니가 죽산에서 시집오고 있었다./ 물 위의 집을 스치듯/ 뻗는 학의 다리가 밤새워 데려다 주곤 했다./ 신방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오동나무 장롱처럼, 할머니는/ 잎들이 자개붙이에 비로소 처음의 물소리로 빛을 흔들었고/ 차곡차곡 할아버지의 손길을 개어 넣고 있었다./ 나는 바닥 없는 잠 속을 날아다녔다./ 그리운 죽은 할머니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고추가 간지러워 천천히 깨어날 때/ 마지막으로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장롱에서/ 학의 길고 긴 다리가 물 위의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를 듣곤 했다.//

 

해당화 / 박형준
어머니는 겨울밤이면 무덤 같은/ 밥그릇을 아랫목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내 어린 발은/ 따뜻한 무덤을 향해/ 자꾸만 뻗어 나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배고픔보다 간절한 것이/ 기다림이라는 듯이/ 달그락달그락하는 밥그릇을/ 더 아랫목 깊숙이 파묻었습니다// 밥그릇은 내 발이 자라나는 만큼/ 아랫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내 발이 아랫목까지 닿자/ 나는 밥그릇이 내 차지가 될 줄 알았습니다/ 쫓길 데가 없어진 밥그릇은/ 그런데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습니다// 봄이 되자 나는 밥그릇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습니다/ 설령 밥그릇이 있다 해도/ 발이 닿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나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밥그릇의 따뜻한 온기보다 더한/ 여름이 내 앞에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쉽게 시골 소년에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사나운 잠에 떠밀리다/ 문지방에 어른거리는 것이 있어/ 방문을 여니/ 해당화 꽃그늘이었습니다/ 뿌리에서부터 막 밀고 나온 듯,/ 묵은 만큼 화사해진다는/ 처음 꽃 핀,/ 삼년생 해당화 붉은 꽃이었습니다// 거기에 어느새 늙은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저녁 바람에 달그락거리는 밥그릇처럼/ 해당화꽃 그늘 속에 서 계신/ 어머니는 허리가 굽은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꼭 가슴에서 무언가를 꺼내느라/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라졌던 밥그릇은 어머니의 가슴속에/ 묻혀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늙은 어머니의 손에서 떠난 그 작은 무덤들이/ 붉디붉은 꽃으로/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닥에 어머니가 주무신다 / 박형준
침대에 앉아, 아들이 물끄러미/ 바닥에 누워 자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듬성듬성 머리칼이 빠진 숱 없는 여인의 머리맡./ 떨기나무 사이에서 나타난 하느님이/ 서툴게 밑줄 그어져 있다. 모나미 볼펜이/ 펼쳐진 성경책에 놓여 있다./ 침대 위엔 화투패가 널려 있고/ 방금 운을 뗀 아들은 패를 손에 쥔다./ 비오는 달밤에 님을 만난다./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을 찾아/ 아들은 밤마다 눈을 뜨고,/ 잠결에 앓는 소리를 하며/ 어머니가 무릎을 만지고,/ 무더운 한여름밤/ 반쯤 열어논 창문에 새앙쥐 꼬리만한 초생달/ 들어온다, 삶이란/ 조금씩 무릎이 아파지는 것,/ 가장 가까운 사람의 무릎을/ 뻑뻑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저 여인은 무릎이 비어 있다./ 한달에 한번 시골에서 올라와/ 밀린 빨래와 밥을 해주고/ 시골 밭 뒤 공동묘지 앞에 서 있는 아그배나무처럼/ 울고 있는 여인./ 어머니가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가슴을 찢어라 그래야 네 삶이 보인다,고/ 올라올 때마다 일제시대 언문체로 편지를 써놓고 가는/ 가난한 여인, 새벽 세시에 아들은/ 혼자 화투패를 쥐고 내려다보는 것이다./ 불타는 떨기나무는 이미 꺼진 지 오래,/ 불길에 하나도 상하지 않던/ 열매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졌지만/ 일찍 바닥에서 일어난 어머니가/ 침대 위의 화투를 치우고/ 모로 누운 서른셋 아들의 머리를 바로 뉘어주고/ 한시간 일찍 서울역에 나가 기차를 기다린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그 시각/ 밭 갈 줄 모르는 아들의 머리맡에/ 놓인 언문 편지 한 장./ "어머니가 너잠자는데 깨수업서 그양 간다 밥잘먹어라 건강이 솟애내고 힘이 잇다"//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칼 / 박형준
어머니는 팔순을 내다보면서부터/ 손바닥으로 방을 닦는다/ 책상 밑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둠침침한 침대 밑에 한쪽 손을 쭉 뻗어 넣고/ 엎드린 채로 머리칼을 쓸어 내오신다./ 어머니의 머리칼은 하얗고/ 내 머리칼은 짧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것도 있다./ 빗자루로 아무리 쓸어내도 방바닥에는/ 어머니와 내 것이 아닌/ 흔적이 떨어져 있다./ 어머니는 먼지가 가득 묻은 머리칼 한웅큼을 뭉친다./ 그걸 보고 있으면,/ 어머니의 지문이 다 닳아져/ 우리 둘 외의 다른 머리칼로 변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한달에 한번 다녀가실 때마다/ 못난 자식을 두고 가는 슬픔이/ 방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버스정류장 앞에서 나는 그녀를 보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으로 보는 게 아닐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보게 된다.//

창문을 떠나며 / 박형준
지층이라는 주소에서 오래 살았다/ 창문 밖 감나무와 옆집 담쟁이덩굴/ 집으로 돌아올 때면 흐리멍텅해진 눈빛 같은 것이지만/ 밤늦게 시를 쓰려고 내다보면/ 그 눈 속에 차오르는 야생의 불꽃/ 창문에 가득하였다// 가난이 있어/ 나는 지구의 이방인이었다/ 가로등의 불빛과 어둠에 섞인/ 두 그루의 식물이 영혼이었다/ 담쟁이덩굴은 기껏 옆집 난간을 타고/ 고작 2층에 머무르지만/ 지층의 창문에서 올려보면/ 언제까지나 야생의 울음으로 손짓했다/ 감나무의 이파리는 계절이 바귀면/ 햇빛 속에 들어 있는 온갖 바람을 느끼게 했다// 나는 언제까지고 겸손한 무릎으로/ 지구를 찾아온 나무여야 하리라/ 현재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 실상을 꿰뚫어보는 시선을 지녀야 하리라/ 지층의 창문에 왔다 간 것들/ 가령 구름을 향해 뻗어가는 담쟁이덩굴/ 찬 서리가 지층의 창문을 얼리고 있는/ 이사 가기 전날 밤/ 내 영혼은 어떤 나무로 다음 생에/ 지구에 서 있을 것인가/ 감나무에 매달린 홍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는 것이다//

테두리 / 박형준
테두리에서 빛이 나는 사람/ 꽃에서도 테두리를 보고/ 달에서도 테두리를 보는 사람// 자신의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모든 테두리는 슬프겠지// 슬퍼하는 상처가 있어야/ 위로의 노래도 사람에게로 내려올/ 통로를 알겠지// 물건을 사러 잠시 집 밖으로 나왔다가/ 바람에 펄럭이는 커튼 사이로/ 안고 있던 여인의 테두리를 보는 것/ 걸음을 멈추고 흔적을 훔쳐보듯 바라볼 때/ 여인의 숨내도 함께 흩어져간다// 오늘과 같은 밤에는/ 황금빛 줄무늬를 가진/ 내 짐승들이/ 고독을 앓겠지//

달나라의 돌 / 박형준
아라비아에 달나라의 돌이 있다/ 그 돌 속에 하얀 점이 있어/ 달이 커지면 점이 커지고/ 달이 줄어들면 점이 줄어든다// 사물에게도 잠자는 말이 있다/ 하얀 점이 커지고 작아지고 한다/ 그 말을 건드리는 마술이 어디에/ 분명히 있을 텐데/ 사물마다 숨어 있는 달을/ 꺼낼 수 있을 텐데//

황혼 / 박형준
아버지 삼우제 끝나고/ 식구들, 산소에 앉아 밥을 먹는다// 저쪽에서 불빛이 보인다/ 창호지 안쪽에 배어든/ 호롱불// 아버지가 삐걱 문을 열고 나올 것 같다//

전철의 유리문에 비친 짧은 겨울 황혼 / 박형준
한가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붐빈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겨울 저녁의 전철을 타고/ 어디로 가는지/ 잠깐 생각이 안 나는 사이// 황혼은 향수(鄕愁)의 향수로/ 몸에 스미는지/ 저기/ 전철 출입문에 얼굴을 대고/ 한 여자도 울고 있다// 우는 동안만/ 모든 것을 잊지 않겠다는 듯/ 출입문 유리에 흐르는/ 눈물 자국에/ 황혼이 입김처럼 서려 있다// 나와 거리가 멀지 않은/ 저 짧은 황혼에/ 나도 잊지 못한/ 어떤 숨결이 창에 이마를 대고/ 그렇게 사라지고 있다//

저녁나절 / 박형준
능금나무나 살구나무가 반지하 창문을/ 가리던 집,/ 능금나무는/ 살구나무는/ 산들바람에/ 얼마나 많은 나뭇잎과 꽃잎을 가졌는지/ 반지하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떨어지기만 했지/ 슬픔도 환할 수 있다는 걸/ 아무도 없는데 환한/ 저녁나절의 반지하집은 말해주었지// 불 켜진 저녁나절의 창문을 보면/ 아직도 나는 불빛에 손끝이 가만히 저린다//

이 봄의 평안함 / 박형준
강이나 바다가 모두 바닥이 일정하다면/ 사람들의 마음도 모두 깊이가 같을 것이다/ 그러면 나무의 뿌리가 땅 밑으로 뻗어나가는 것과/ 허공을 물들이는 잎사귀의 춤 또한 일정할 것이다/ 저기 나무 속에서 사람이 걸어나오도록 인도하는 것이/ 봄이라면/ 마음 속에서만 살고 있는 말들을 꺼내주는/ 따뜻한 손이 또한 봄일 것이다/ 봄꽃들은 허공에서 우리를 기쁨에 넘쳐 부르는 손짓이며/ 누군가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면/ 우리 또한 그처럼 잊혀진 누군가를 향해 가리라//

봄의 환(幻) / 박형준
1// 이름 떨어진 선술집 유리창에 흐르는 불빛 하나가/ 반짝거리고 있다, 그 불빛 따라 가면/ 인적 끊긴 유곽에 측백나무 한 그루가/ 눅눅한 물관을 통해 다른 불빛을 길어올리고/ 무우꽃이 허기처럼 흩날리는 바람의 집이/ 그 끝에 흔들렸고 가난한 뜰에 꽃나무로 서 있는/ 누이의 오래된 그림자 속으로/ 무우청 같은 靑年들이 도망가는 첫차가 불을 켜고 지나갔다/ 서울에는 무슨 꽃이 폈을까 졌을까/ 채무처럼 경적이 울려나오는 것처럼/ 그렇구나, 故鄕이 저 유곽의 낡은 측백나무가/ 길어올리는 불빛들로/ 유리창에 흐르며 부르는구나/ 꺼져라 불빛, 삶은 늘 그랬다/ 나무 한 짐 하러 산 속으로 들어가/ 어둠이 고여 있는 생소나무 가지를 꺾으면/ 뚝뚝 소리내며 저녁이 떼거리로 몰려오고 그래……/ 민들레 씨앗처럼 흩어져서/ 구년의 도시 생활은 드문드문 빛났다// 2// 잠깐 말소리 끊어졌다가/ 차소리 이어지고/ 나의 큇바퀴 안으로 물 오르는 만큼/ 잎 피는 소리가 들어왔다/ 손님 없는 버스의 환한 내부처럼/ 취기가 퍼진다/ 사람들은 이 세상 낮은 곳에서/ 낮은 만큼 꿈의 水位도 금방 높아진다고 하며/ 높은 분들을 씹다가, 화장실로 하나 둘 사라지고/ 유곽의 나무, 쉼없이/ 유리창에 흐르는 불빛들/ 창 밖에 봄풀씨 날아가다가/ 문 열릴 때마다 하나 둘 들어와 앉고/ 짐짝처럼 풀어진 달이/ 인적 끊긴 유곽의 나무 꼭대기에 터벅터벅/ 창유리로 걸어온다// 3// 비 내린 비포장도로를 대형 트럭이 지나가고/ 타이어 헛돈 자리마다 기름이 고여 있다/ 구석으로만 몰리는 덜 치운 낙엽더미로 뒹구는/ 꿈, 시골 출신의/ 이십대의 젊음 속으로 느릿느릿/ 불켠 트럭이 지나가고 불빛이 쏟아지고 아,무지개가 진창/ 속에 걸려 있고/ 나는 그 기름 덩어리가/ 자꾸만, 나더러 내려 오라고 손짓하는지/ 아니, 내가 내려가고 싶어하는지/ 그 얕은 물 속에 잎을 피우는/ 무지개의 다리, 진창 속에 엉킨/ 기름자국에 걸려 있는 故鄕,어둠 속에 희미해져가는 바퀴/ 자국처럼//

봄밤 / 박형준
술에 취해 눈을 감고 택시 등받이에 기대어 있는데, 눈발이 등 속으로 내리는 것이었다/ 등이 거리에 가득 걸려 있는데, 때늦은 눈발이 등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데없이 등 속을 걸어가는 아이들이 보이는 것이었다/ 여우구슬을 물고 도망치는 아이들이,/ 등 속에서 아우성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택시 차창에 희디흰 눈발로 스치는 것이었다/ 땅에 닿자마자 금세 녹아버리는 흰빛들이어서, 택시기사가 어깨를 흔들었을 때는 이미 하늘로 다시 올라가고 없는 것이었다/ 초파일 달이 차창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봄밤 / 박형준
달에서 아이를 낳고 싶다/ 누가 사다리 좀 다오// 홀로 빈방에 앉아/ 앞집 지붕을 바라보자니/ 바다 같기도 하고/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물결 같기도 하고// 달이 내려와/ 지붕에 어른거리는 목련,/ 꽃 핀 자국마다 얼룩진다/ 이마에 아프게 떨어지는 못자국들/ 누구의 원망일까// 조용히/ 나무에 올라 발자국을 낳고 싶다//

밤의 선착장 / 박형준
오, 오리 두 마리가/ 새벽에 강물을 바라보는 모습/ 왜 저리 편안하고 슬픈가/ 요트 선착장 배 내려가는 경사 끝에/ 호롱불 두 개를 켜놓은 듯/ 밤새 깜빡거리고 있는가// 발아래 찰랑거리는/ 강물에 발을 적시지도 않고/ 밀려오는 물결이 적실랑 말랑/ 찰랑이는 소리만/ 심지인 듯한 발로 빨아들이며/ 둘이 꼭 붙어서 무얼 그리 바라보는가// 애타는 마음도/ 너무 오래되면 편안해지는지/ 슬픔도 편안해지는지/ 강물 저 어디에 두고 온 잃어버린 새끼들을 찾는지/ 나란히 눈빛만 켜고 균형을 취하고 있는가// 어제 밤도 오늘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그 자리 꼭 그렇게 있을 듯/ 요트가 강물로 미끄러져 내려갈 것 같은/ 경사진 맨 끝에 새벽에만 나타나는가// 장마철은 끝나고/ 선착장은 진흙탕이 되고/ 오리 두 마리도 사라지고 없을 때/ 새벽의 그 시간/ 나는 진흙에 구두가 범벅이 된 채로/ 경사 맨 끝 오리들과 똑같은 자리에 서보았네/ 저 먼데,/ 오리 두 마리가 몸을 꼭 붙이고 바라보던 밤/ 강물의 페이지를 넘겨보았네//

지평(地平) / 박형준
석유를 먹고 온몸에 수포가 잡혔다./ 옴팍집에 살던 때였다./ 아버지 등에 업혀 캄캄한/ 빈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읍내의 병원은 멀어,/ 겨울바람이 수수깡 속처럼 울었다./ 들판의 어디쯤에서였을까,/ 아버지는 나를 둥근 돌 위에 얹어놓고/ 목의 땀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 풍경을/ 실제라고 믿고 살았다./ 삶이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들판에 솟아 있는 흰 돌을/ 빈 터처럼 간직하며 견뎠다./ 마흔을 앞에 두고 나는 이제 그것이,/ 내 환각이 만들어낸 도피처라는 것을 안다.// 달빛에 바쳐진 아이라고,/ 끝없는 들판에서 나는/ 아버지를 이야기 속에 가둬/ 내 설화를 창조하였다./ 호롱불에 위험하게 흔들리던/ 옴팍집 흙벽에는 석유처럼 家系가/ 속절없이 타올랐다./ 지평을 향한 生이 만든/ 겨울밤의 환각.//

가구(家具)의 힘 / 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 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家具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나오는 오래 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家具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家具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法)이다/ 家具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의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家具論)을 펼쳤다//

갈대꽃 / 박형준
겨울 갈대밭에/ 휘이익 휘이익 벗은 발을 찍는/ 저 눈부신 비애의 발금/ 살을 다 씻어낼 때까지/ 잠들지 못하는 공포, 겨울 갈대밭에/ 바람의 찬손이 허리를 감아쥐고,/ 빛나는 옷을 입고 내려온 물방울이/ 소금불에 휘고 있다//

공간 이동 / 박형준
보도블록을 밀고 나오는 뿌리,/ 뿌리는 하늘로 솟구친다./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로 흘러가는 세상은 지치지 않는다./ 모래시계의 허리가 가늘어진다//

그린 듯이 앉아있는 풍경 / 박형준
비가 오면 민둥산인 마음은 밑뿌리로 하얗게 울었다/ 비가 오면 새파란 양철지붕의 페인트칠이 벗겨진 자리에/ 녹이 한번 더 슬고,/ 여름 내내 붉은 반점이 집의 살갗을 뒤덮었다/ 우리 집 앞으로 흐르는 개울창에 녹 같은 붉은 꽃들이 섞여 흘러갔고,/ 밤이 되어 송진이 녹아 흐르는 여름의 가장자리에/ 쇠파리떼들이 고요히 끓었다/ 하늘에 붉은 달이/ 양철지붕 칠이 벗겨진 자리에 돋아난 반점 같은 꽃들을 핥아주었다/ 달의 긴 혀로 인해 나의 몸은 언제나 신열이 났다/ 먼지 자욱히 날리며 집을 나간 개는/ 침을 하얗게 흘리며 돌아오고/ 가난한 집일수록 커다란 솥 만한/ 잎을 흔들며 벌레 많은 해당화 그늘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지/ 언덕 위에 언덕이 생기고 구름을 이루며 산들이 달아나고/ 피가 도는 발바닥 같은 꽃들이 해당화 위를 지나가자/ 그 잎 몇 개에는 흔적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린 듯이 앉아/ 흔적을 흔적으로 지우려고 열매를 무수히 매단/ 나무를 떠올리곤 한다,/ 병든 어머니의 희게 빛나는 피부 밑에 천길 낭떠러지 검은 물이 흘러간다//

기도 / 박형준
상어처럼 이빨을 키우고 배고픈 개처럼 침을 흘리며 서성거리는 오, 무수한 절망의 세숫대들 아래, 비누여 닳아빠지며 행복해지는 세상은 없느냐.// 무허가 판잣집의 대문에 문패를 붙인다//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 박형준
어둠을 겹쳐 입고 날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가지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물방울이 흘러나와 더 자라지 않는,/ 고목나무 살갗에 여기저기 추억의 옹이를 만들어내는 시간/ 서로의 체온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하며 잎들이 무섭게 살아 있었다/ 천변의 소똥 냄새 맡으며 순한 눈빛이 떠도는 개가/ 어슬렁 어슬렁 낮아지는 저녁해에 나를 넣고/ 키 큰 옥수수밭 쪽으로 사라져 간다/ 퇴근하는 한 떼의 방위병이 부르는 군가 소리에 맞춰/ 피멍을 진 기억들을 잎으로 내민 사람을 닮은 풀들/ 낮게 어스름에 잠겨갈 때,/ 손자를 업고 나온 천변의 노인이 달걀 껍질을 벗기어/ 먹여 주는 갈퀴 같은 손끝이 두꺼운 마음을 조금씩 희고/ 부드러운 속살로 바꿔준다 저녁 공기에 익숙해질 때,/ 사람과 친해진다는 것은 서로가 내뿜는 숨결로/ 호흡을 나누는 일 나는 기다려 본다/ 이제 사물의 말꼬리가 자꾸만 흐려져 간다/ 이 세계는 잠깐 저음의 음계로 떠는 사물들로 가득 찬다/ 저녁의 희디 흰 손가락들이 연주하는 강물로/ 미세한 추억을 나르는 모래들은 이밤에 시구를 하나 만들 것이다./ 지붕에 널리 말린 생선들이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전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고,/ 용암(熔岩)처럼 흘러다니는 꿈들/ 점점 깊어지는 하늘의 상처 속에서 터져나온다/ 흉터로 굳은 자리, 새로운 별빛이 태어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허름한 가슴의 세간살이를 꺼내어 이제 저문 강물에 다 떠나보내련다/ 순한 개가 나의 육신을 남겨 놓고 눈 속에 넣고 간/ 나를, 수천만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담고 있는/ 멀리 키 큰 옥수수밭이 서서히 눈꺼풀을 내릴 때//

나무 줄기속에 아이를 묻기 / 박형준
하늘로 돌아가려면, 극지에서 길 잃은 사람들이 철대못이 라고 부르는 별을 찾아야 한다. 그 별은 흐릿한 날씨에도 조난자들이 붙들고 있는 희망이라고 한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서는, 새가 잘 찾아오도록 죽은 아이를 마을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 줄기 속에 묻는다고 한다. 어린 영혼은 혼자 갈 수 없기 때문에 새를 타고 가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어머니들이 딱따구리처럼 나무에 매달려 줄기를 파고 그 안에 아이를 매장하면 밤에 새가날아와 아이를 등에 태워 데려간다고 한다. 공기 중에 몸을 비스듬히 숙이고 떨리는 바람에 짧게 전율하면서 죽은 아이가 철대못에 이르면 밤새 서리가 내려 황토를 부풀린다고 한다. 그러면 그 나무가 첫새벽의 햇살에 수많은 물방울을 맺는데 무지개가 가득 돌고 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새와 가장 비슷한 식물이 나무라고 한다. 조난자들이 저마다의 커다란 나무에 도착해 몸을 줄기 속에 집어 넣는다면, 그것이 어디에선가 길을 잃고 헤매는 그들의 뒤를 밟아올 또 다른 이들을 위해 빛나는 지상의 철대못이 되어야 하리.//

노역에 처해진 날개 / 박형준
누구나 날개를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때 남몰래 우표를 모으거나/ 판화를 수집하는 것처럼// 내가 갖고 있는 날개는/ 은밀한 세계에 바쳐졌다,/ 어느날 스크랩해둔 세계가/ 얼마나 작은지 깨우치고/ 어른이 된 아이들은/ 거추장스러운 날개를 떼어버렸지만,// 장님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을/ 회피하는 것은 아직도 그 뒤에서/ 벌어지는 날개의 은밀한 축제를/ 그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검은 도랑물이 흘러가는/ 공장지대의 아파트에 혼자 산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그들이 나의 날개를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금기한 세계에/ 갇혀 살기 때문이다// 달빛이 채색하는 보름밤이면/ 나의 날개는 커다란 그림자를/ 창문에 나타내곤 한다// 그런 밤이면 나 역시 떠나고 싶다/ 이 세상 밖 불꽃을 물고 하늘의 검은/ 심연 속으로 곧장 날아가는 로켓처럼// 나는 창문을 닫고 산다/ 초인종은 내게 날개를 감추라는 신호이다/ 공장의 기계 소리가 식은 금속이 번쩍이는/ 검은 도랑물을 건너, 쇳덩이를 끌 듯/ 무거운 머리를 침대에 눕힌다/ 나는 이틀이고 사흘이고 잠만 잔다// 그동안 비가 죽죽 내린다/ 아스팔트에 짓뭉개진 새 한 마리,/ 빗물에 둥둥 떠 흘러간다// 날개만 남은 납작해진 죽은 새는/ 지상의 노역으로부터 끝내 자유롭지 못한/ 내 영혼의 상징이다//

나비 / 박형준
남묘호랑갱이요 남묘호랑갱이요/ 일만번을 외우면 소원이 이뤄진단다/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죽은 나무 위에 새집이 걸려 있는/ 민둥산, 지난 여름의 끝자락에서/ 매미는 허물을 벗고 날아갔다/ 껍데기만 마른 나무 줄기에 달라붙어/ 빈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얘야, 나는 나비가 되고 싶단다/ 노망든 할머니가 정신이 돌아와/ 개다리소반 위에 국어책을 올려놓고/ 시를 외는 내게 말했다/ 할머니, 벽에 칠해논 변자국 속에서/ 어떻게 나비가 태어나요/ 할머니 냄새로 머리가 지끈거려요// 남묘호랑갱이요 남묘호랑갱이요/ 민둥산에 앉아, 아이들과 새집을 털던/ 죽은 나무 아래 앉아,/ 나는 잡은 매미 껍질을 헤아려 보았다/ 일만번을 세면 소원이 이뤄질까,/ 점점 얇아지는 가을빛 속에서/ 조그맣게 웅크린 채/ 허물을 벗고 있는 아이// 멀리 호곡 속에서/ 명주실 같은 나비떼가/ 손짓을 하며/ 날아온다//

나비는 밤을 어떻게 지새나 / 박형준
외로움에도 색채가 있다면/ 나무에 달라붙어 밤을 견딘 나비의 외로움은/ 아침에 어떤 색깔이 되었을까// 동트는 새벽이 무작정 희망이 되지 못하고/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아침 이슬 한 방울에도/ 쉬이 상처를 입는 나비// 나비 날개에 찍힌 점들은/ 밤 공기의 흔적들일까 불꽃들일까// 밤마다 처음으로 다가오는 대지와/ 폭풍의 소용돌이,// 한 무리의 구름을 인식하며/ 숲 속에서 별들의 흐름을 조용히/ 날개에 잉크처럼 떨구어 가는 나비// 사람들도 모두 저마다의 외로움의 색채가/ 다르가 나타난다는데/ 내 외로움의 색채는/ 누구의 숨겨진 빛에서 오는지// 아침 햇살 속에서 접었다 폈다 하는/ 나비의 날개가/ 공중에 씌어지지 않은 편지처럼/ 분가루를 흘린다//

거미 / 박형준
그루터기는 죽은 자가 쉬는 곳,/ 아침 이슬에 젖은 거미가/ 숲을 뚫고 오는 늦가을 빛을 본다,/ 거미는 어둠 속에서 줄에 매달려 사는 삶을 잘도 참아왔다/ 그래, 처마 끝같이 사위어 가는/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가/ 젖은 태양을 바라보며 죽자./ 늙은 거미는 추위가 오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줄을 흔든다./ 가물거리는 햇빛에 타죽기 위해/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를 미친 듯이 건너뛰는/ 수천의 거미떼들이 떨어진다./ 늙은 거미는 줄에 걸린 이슬 속에서/ 황홀을 본다, 숲을 뚫고 새어들어 오는/ 가느다란 가을빛./ 일순 머리를 치켜들고 거미는/ 설움으로 까맣게 타서 죽는다./ 아침에 한줌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죽은 자가 그루터기에서 쉰다.//

달팽이 / 박형준
달팽이 한 마리가 집을 뒤집어쓰고 잎 뒤에서 나왔다/ 자기에 대한 연민을 어쩌지 못해/ 그걸 집으로 만든 사나이/ 물집 잡힌 구름의 발바닥이 기억하는 숲과 길들/ 어스름이 남아 있는 동안 물방울로 맺혀가는/ 잎 하나의 길을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두 개의 뿔로 물으며 끊임없이 나아간다/ 물을 먹을 때마다 느릿느릿 흐르는 지상의 시간을/ 등허리에 휘휘 돌아가는 무늬의 딱딱한 껍질로 새기며,/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에 섞여/ 저녁 공기가 빠르게 세상을 사라져갈 때/ 저무는 해에 낮아지는 지붕들이 소용돌이치며/ 완전히 하늘로 깊이 들어갈 때까지,// 나는 거기에 내 모습을 떨어뜨리고 묵묵히 푸르스름한,/ 비애의 꼬리가 얼굴을 탁탁 치며 어두워지는 걸 바라본다//

동면 / 박형준
사슴벌레 한 마리 눈밭을 기어간다/ 바람에 날리는 눈발이/ 멀리서 무지개로 부서져 내린다// 햇빛 너무 환해/ 눈밭을 헤치고 나온/ 사슴벌레 한 마리/ 두 뿔로/ 공중에 뻗은 나뭇가지 끝/ 무지개 치받는다// 허연 하상(河床) 같은/ 낮달이 흘러가고/ 까맣게 빛나는 두 뿔에/ 봄은 오지 않아도/ 봄은 온다//

야외 전시장의 두 마리 말 / 박형준
어둠 속에 두 말이 나란히 서 있다./ 낮의 밝음 속에서 그들은/ 단순히 철사 모형에 불과했으리./ 빛이 내부에 들어오자,/ 그들은 다정하게 서로의 목에/ 얼굴을 부빌 것만 같다./ 야외 전시회장에서 빵처럼 환하게 부푸는/ 불빛을 품고/ 그들은 금방이라도 먼 길을 떠날 듯하다./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울 듯이/ 벌써 발굽이 설레고 있다./ 어둠 속에서 찬란히 하늘로 오르는/ 두 마리의 말이 서로의 내부에 빛나는/ 불빛을 바라보며 꿈을 꾼다./ 어둠을 배경으로 한 뒷모습은 어둡지만/ 서로의 눈을 꿈의 구멍인 양 바라본다.//

독신자 / 박형준
입 속에 사는 개구리 한 마리를 알고 있다/ 그는 내가 피곤에 지쳐 쓰러져 있는 밤에만/ 반쯤 몸체를 입 밖에 내민다/ 그러고는 앞다리를 턱에 올려놓고 밖을 살핀다// 나는 얕은 잠을 잔다/ 바닥까지 내려간 잠을 자는 동안/ 벌려진 입 밖으로 개구리가 튀어나와 있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기에,/ 그렇지 않은가/ 방에는 골목으로 나 있는 창이 있고/ 마구(馬具)를 잃어버린 말이 서성거리다/ 창문 안으로 불쑥 목을 집어넣고/ 이쪽을 살피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독신자의 잠은 대개 그렇다/ 악몽조차도 달콤한 슬픔과 함께 온다/ 어느 꿈속에 나는/ 입 밖으로 개구리가 반쯤 튀어나온/ 한 사내를 내려다본 적 있다/ 그 사내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개구리가 밖을 살피다 내 눈과 딱 마주치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독신자의 몸 속에 웅크리고/ 조그맣게 울음 우는 비애의 몸체를 발견한 듯/ 소스라쳐 깨어났기 때문이다//

묘비명 / 박형준
유별나게 긴 다리를 타고난 사내는/ 돌아다니느라 인생을 허비했다/ 걷지 않고서는 사는 게 무의미했던/ 사내가 신었던 신발들은 추상적이 되어/ 길 가장자리에 버려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그 속에 흙이 채워지고 풀씨가 날아와/ 작은 무덤이 되어 가느다란 꽃을 피웠다/ 허공에 주인의 발바닥을 거꾸로 들어올려/ 이곳의 행적을 기록했다,/ 신발들은 그렇게 잊혀지곤 했다// 기억이란 끔찍한 물질이다/ 망각되기 위해 버려진 신발들이/ 사실은 나를 신고 다녔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맨발은 금방 망각을 그리워한다//

무덤은 이 고장의 오래 된 관습이다 / 박형준
얼마나 먹고 싶은 말인가/ 폐허는,/ 얼마나 비약하기 쉬운가/ 흉곽에 몹시 풀과 꽃이 우거진/ 亡國의 사랑은,/ 죽음은 이 고장의 오래 된/ 관습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무덤을 판다/ 그 고장에서 사는 것은/ 단순히 묘비를 하나 늘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기 묘비/ 하나가 나타난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폐허는,/ 오래 전에 꺼진 등불이다/ 무덤 파는 남자의 사랑/ 亡國을 향해 걷는 해와 달이/ 후광으로 남아 있다.//

무덤 사이에서 / 박형준
내가 들판의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는/ 첫서리가 내렸고,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였다./ 추수 끝난 들녘의 목울음이/ 하늘에서 먼 기러기의 항해로 이어지고 있었고/ 서리에 얼어붙은 이삭들 그늘 밑에서/ 별 가득한 하늘 풍경보다 더 반짝이는 경이가/ 상처에 찔리며 부드러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내가 날려 보낸 생의 화살들을 줍곤 했었다./ 내가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영혼의 풍경들은 심연조차도 푸르게 살아서/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 청춘의 불빛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건지러/ 자주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가곤 하였다./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우물의 얼음 속으로 내려갈수록 피는 뜨거워졌다./ 땅 속 깊은 어둠 속에서 뿌리들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얼음 속의 피는/ 신성함의 꽃다발을 엮을 정신의 꽃씨들로 실핏줄과 같이 흘렀다./ 지금 나는 그 징표를 찾기 위해/ 벌거벗은 들판을 걷고 있다./ 논과 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무덤들은 매혹적이다./ 죽음을 격리시키지 않고 삶을 껴안고 있기에,/ 둥글고 따스하게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껴안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봉분들은 밥그릇을 닮았다./ 조상들은 죽어서 산사람들을 먹여 살릴 밥을 한상 차려놓은 것인가./ 내가 찾아 헤매다니는 꽃과 같이 무덤이 있는 들녘,/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어 있는/ 밥공기와 같은 삶의 정신,/ 푸르고 푸른 무덤이 저 들판에 나 있다./ 찬 서리가 내릴수록 그 속에서 잎사귀들이 더 푸르듯이,/ 내가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나를 감싸던 신성함이/ 밭 가운데 숨 쉬고 있다./ 어린아이들 부산을 떨며 물가와 같은 기슭에서 놀고/ 농부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새참을 먹으며/ 죽은 조상들과 후손의 이야기를 나누던 저 무덤,/ 그들과 같이 노래하고 탄식하던 그 자취를 따라/ 내 생이 제 스스로를 삼키는 이 심연 속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겨울이 되면, 저 밭가의 무덤 사이에 누워/ 봉분들 사이로 얼마나 밝은 잠이 흘러가는지/ 아늑한 그 추위들을 엮어 정신의 꽃다발을/ 무한한 죽음에 바치리라./ 나는 심연들을 환하게 밝히는 한순간의 정적 속에서/ 수많은 영혼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내려다보던 지하수의 푸른빛을,/ 추위 속에서 딴딴해진 그 꽃을 캐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리라.//

방주 / 박형준
그것은 다라에 붙어 있었다./ 그것이 자랄수록 다라는 하늘로 떠올랐다./ 인생이란 때로 붉은 다라에서 바라본/ 물빛 세로줄무늬가 연속된 비닐 천막의/ 천장인지 모른다, 포장마차 속/ 아이는 다라에 눕혀져 키워졌다./ 흰실로 몸을 친친 감은 누에고치처럼./ 뜨내기 손님들이 남긴 생의 얼룩이/ 카바이트 불빛 아래 고여가는 雨期의 밤, 포장을 때리는 쉼없는 빗소리에/ 아이는 한 겹씩 고치를 벗고 있다./ 나비로 탈바꿈할 때까지, 비가 내린다./ 우동을 파는 어미의 고단한 잠에 떠밀려/ 새벽을 견디는 시장의 포장마차 속/ 아무도 눈여겨본 적 없는 한 척의 배가, 조심스레 아이를 품고 물거품 이는/ 해변의 풍요로운 기슭으로 간다./ 세로줄무늬의 천장 위로/ 비가, 그치고 있다./ 파리떼가 푸른 등을 반짝이며/ 점점이 박혀 있다.//

옛집으로 가는 꿈 / 박형준
소 잔등에 올라탄 소년이/ 뿔을 잡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땅거미 지는/ 들녘./ 소가 머리를 한번 흔들어/ 소년을 깨우려 한다./ 수숫대 끝에 매달린 소 울음소리/ 어둠이 꽉 찬 들녘이 맑다./ 마을에 들어서면/ 소년이 사는 옴팍집은/ 불빛이 깊다./ 소는 소년의 숨결을 따라/ 별들이 뜨고 지는 계절로 돌아온다.//

빈집 / 박형준
개 한 마리/ 감나무에 묶여/ 하늘 본다/ 까치밥 몇 개가 남아 있다/ 새가 쪼아 먹은 감은 신발/ 바람이 신어보고/ 달빛이 신어보고/ 소리없이 내려와/ 불빛 없는 집/ 등불// 겨울밤을/ 감나무에 묶여/ 앞발로 땅을 파며 김칫독처럼/ 운다, 울어서/ 등을 말고 웅크리고 있는 개는/ 불씨/ 감나무 가지에 남은 몇 개의 이파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새처럼 개의 눈에 아른거린다// 주인이 놓고 간/ 신발들/ 빈집을 녹인다/ 긴 겨울밤.//

지붕 / 박형준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지붕이 비슷비슷한 골목을 걷다가/ 흰 비닐에 덮여 있는/ 둥근 지붕 한 채를 보았습니다.// 새가 떨고 있었습니다./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 날개를 접고 추락한 작은 새가/ 바람에 떠밀려가지 않으려고/ 흰 비닐을 움켜쥔 채/ 조약돌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네모난 옥상들 사이에서/ 조그맣게 웅크린/ 우는 발로 견디는/ 둥근 지붕.//

지붕의 눈 / 박형준
눈이 별의 눈꺼풀인 눈이/ 집 지붕에서 깜박거리는 것을 느낀다/ 낮잠을 자면서도 간혹 나는 저녁을 말하려 애쓰는/ 꿈에 시달렸지 않은가, 그럴 때 낮잠은/ 서늘한 구멍이었고 우물이었고 지붕의 눈이었다/ 눈 오는 날 주름을 겹겹이 껴입고 타는 황홀함을/ 나 이외에는 보지 못한다, 새금새금한 아지랑이/ 혹은 먼 그대, 불꽃을 물고/ 창문에 죽음을 즐기며 오후가 지나간다//

변소에 대한 약사(略史) / 박형준
옹기는 뒤뜰 장독대에/ 앉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허리가 동그란 옹기를 안고 있으면/ 어머니를 안고 있는 기분이 든다./ 두툴두툴한 옹기의 촉감이 설운 것도 그 때문이다./ 지붕이 없는 변소에 앉아/ 어두컴컴한 땅 밑에 웅크리고 있는/ 옹기의 구멍을 내려다본다./ 옹기는 이 집 내력을 알고 있다./ 태어나서 내가 버려졌다는 느낌으로 울었던 것도/ 저 밑을 바라보면서이다./ 파묻은 김칫독처럼 발효하는/ 옹기는, 저 움푹움푹 팬/ 밑바닥에서 깨어져나가며,/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썩는 것은 따뜻하다./ 지붕 없는 설움으로 떠도는 식구들이/ 들락거리며 별과 새와 구름을 보았던 곳,/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역전 뒤 식당에서 만난 여인 / 박형준
밥 한 그릇을 머리에 쓴 수건에다 싸고 있는/ 젊은 아낙,/ 그리고 등에 업혀 꼬무락대는 아기.// 미친 여자면 어떤가./ 주인을 향해 천진한 독처럼/ 웃고 있는 여인 뒤,/ 재를 씹는 것같이 멀리서/ 기차가 레일을 밟고 오네.// 음식 연기로 그을린 벽은/ 오래 전부터 천천히./ 깊게 갈라져왔네.// 벽 틈에 달라붙어 있는/ 나방 한 마리가 눈에 띄네./ 버려진 음식물이 가득한 쓰레기통에서 태어나/ 온종일 파닥거렸을 작은 날개에게/ 벽 틈은 최상의 안식처라네.// 아낙의 등에 업힌 아기는 울다 지쳐./ 애벌레처럼 졸음에 빠지네./ 고개가 천천히 뒤로 들려/ 머리를 까닥까닥하다가/ 그것에 놀라 울다, 또 잠에 빠지네.// 흑암 속에서 나비가 되고 있을 것이네.//

사랑 / 박형준
오리떼가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맨발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 실뱀이 호수를 건너듯 간질여주고 싶다/ 날개를 접고 호수 위에 떠 있는 오리떼/ 맷돌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저녁 해// 우리는 풀밭에 앉아 있다/ 산 너머로 뒤늦게 날아온 한떼의 오리들이/ 붉게 물든 날개를 호수에 처박았다/ 들풀보다 낮게 흔들리는 그녀의 맨발,/ 두 다리를 맞부딪치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기만 한// 해가 지는 속도보다 빨리/ 어둠이 깔리는 풀밭/ 벗은 맨발을 하늘에 띄우고 흔들리는 흰 풀꽃들/ 나는 가만히 어둠속에서 날개를 퍼득여/ 오리처럼 한 번 힘차게 날아보고 싶다// 뒤뚱거리며 쫓아가는 못난 오리,/ 오래 전에/ 나는 그녀의 눈 속에/ 힘겹게 떠 있었으나//

사랑은 꽃병을 만드는 일 / 박형준
오솔길에서 나는 기막힌 사랑을 보았지/ 막 퍼붓던 비가 어느덧 이슬비로 변하고/ 오솔길은 산책하기 알맞게 젖어 있었지/ 풀숲에서 거미가 이슬 다리를 놓고 있었지/ 내 발 밑으로 이슬 속 싹 틔운 행성이 구르고/ 또 구을르고, 그와 함께 무지갯빛 사색은/ 끝도 없이 둥둥 떠오르고 있었지/ 그러나 곧 오솔길의 飛翔은 죽음으로 바뀌었다네/ 내가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푸드덕대는 소리가 들려왔지/ 산비둘기가 공중으로 솟구치려는 순간/뱀이 비둘기의 목을 덮쳐버렸다네/ 끓어오르는 독액을 주체하지 못해/ 비둘기와 함께 날아오르며/ 일순간 공중에 똬리를 틀고 있었네/ 독이 퍼지는 몸은 나른한 듯,/ 허공에 무지개를 긋고 있었네/ 혀는 사랑의 말이 되지 못하고/ 하늘을 원망하며 차갑게 갈라지고/ 점점 옥죄는 꽃병처럼/ 그 안에 꽂힌 힘센 날개를/ 이슬비 내리는 허공에 쳐받들고 있었네//

城에서·1995 / 박형준
죽은 아이들의 얼굴을 매단 작은 무덤처럼, 3층 산부인과 병동의 창에 서 있는 K의 눈 속으로 나무 한 그루가 뻗어 올라온다. 무더운 바람에 잎들이 뱅글뱅글 돌 때마다 막 산모의 배에서 끄집어내진 태아가 울고 있는 환영이 겹쳐진다.“아기가 너무 작아 잡히지가 않아요, 꼬챙이가 들어오면 금세 도망쳐버립니다. 더 자란 일주일 후에 오세요.”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여의사가 말한다.// K는 방을 얻었다. 커다란 벌레가 잠자고 있는 듯, 지하방은 털이 많이 날렸다. K와 여자는 일주일 후 병원에 갔다. 병원은 발은 지상에, 머리는 구름에 반쯤 잠겨 있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잠시 후면 자궁을 채우지 못한, 가엾은 쥐새끼처럼 꼬챙이를 피해 도망다니는 생명체 하나가 도시의 습한 하수구로 사라질 것이다. 하수구는 버려진 것들이 살기 좋은 곳이다. K는 집에 돌아왔다.// K가 집을 얻은 건, 포도나무 때문이었다. 이담 생에 외동딸이 사는 집 뜰 포도나무로 태어나는 것도 좋을 것이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그가 내 열매에 손 대준다면. 포도나무는 대문을 들어서면, 비좁은 마당에서 2층으로 잎을 뻗고 있다.// 그것은 프라스틱에 나무색깔을 입힌 지주대에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푸른열매를 맺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 가득 떨어져 세입자들의 발에 밟혔다. 포도나무는 포도나무를 그리워한다. 포도나무로 태어났으나, 포도나무가 아닌, 아무도 손대지 않는 저것은. 파도가 품고 오는 물새알들의 속삭임도, 외동딸도 없이, 집이 열 채나 되는 주인이 세를 내주기 위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여자의 자궁에 머물다 간 한 알의 작은 포도알이여. K는 불을 끄고 웅크린 채 지하방에 날리는 털에 덮혀 잠들었다.// 여자는 의사의 어깨에 기댄 채 질질 끌리듯 K의 가슴에 들어왔다. 병실 안은 링거병이 매달린 지주대, 철제 침대,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창 밖 너머로 커다란 미루나무가 보인다. 아련하게 링거액이 한 방울씩 떨어져 여자의 몸 속으로 사라진다.“날 좀 바라보세요, 날 좀 지켜봐 주세요.” 잎새들은 금방 꼼지락거리는 아기의 작은 손이 되어 K의 목을 조른다. 여자는 몸을 조그맣게 웅크리고 끊임없이 울었다. 여자의 눈물이 침대 시트를 적실 때 K는 피폐한 성욕의 쾌감으로 몸을 떨었다.// 城은 언제나, K의 내부에 있었다. 성의 흙을 밟으면, 허물어지는 성의 벽에 기대면 K는 한 그루 포도나무였다. K는 파도의 끝자락에서 솟구치는 물고 기들이 가득 잎새에서 반짝이는 것을 느꼈다. K는 더 이상 城을 알지 못했다. 물소리를 잊어버린 나무는 염분의 찌꺼기처럼 뿌리부터 썩어갔다. 커다란 벌레가 지하방 밑에서 꿈틀거리며 K를 낳기 시작했다.//

유성들 -진만에게 / 박형준
사내는 후덥지근한 상가 귀퉁이에/ 음반 가게를 냈다./ 그리고 오늘 맹인 하나가 그에게 왔다./ 사내는 유심히 맹인을 바라보고 있다./ 맹인은 오래오래 음반을 음미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만지듯이./ 사내는 생각한다,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 맹인 하나가 여기로 왔다./ 단 한순간을 위해 황홀한 급사를 하는 者, 파멸의 웅덩이에 몸을 던지려고/ 天體 사이를 날아왔다./ 열대야의 밤이 오고 있다./ 유성이 얼마나 아름다우나를/ 사내는 맹인에게 만지게 하고 싶다./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어깨의 상처/ 그 오래 아물지 못하는 흉터가, 맹인이 만지는 세계 어딘가로 떨어진다./ 열대야의 끝에서 끝으로 가늘게 타고 있다.//

저 곳 / 박형준
空中이라는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 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空中이라는/ 말.//

천식 / 박형준
거품들이 나를 이곳에 데려왔다. 숨죽인 해변에 새들이 죽어 있다. 저것들/ 은, 오래 전의 헛것들이다. 날개를 벗어버린 꿈들이 부서져버린다./ 어느 해안을 떠돌다 왔을까. 나를 차지했으나, 끝내 모습을 감추고 헛되어/ 끼루룩거리는 바다에서, 죽은 새들이 해변을 점령한 오후에, 거품들이 급격/ 히 불어난다. 멀리, 섬들이 솟아 있다.//

빛이 비스듬히 내리는데 / 박형준
새끼 고양이들이/ 대추나무에 올라가 장난을 치네/ 아파트에 혼자 사는 노인이/ 대추를 따려고/ 바지랑대를 들고 서 있네/ 쪼글쪼글해진 붉은 햇살이/ 새끼고양이 앞발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네/ 나무 사이로/ 바지랑대를 올리면/ 새끼고양이들이 발로 밀어내고/ 빨래를 걷듯이 노인은/ 바지랑대로 하늘만 재고 서있네//

빛의 소묘 / 박형준
누가/ 발자국 속에서/ 울고 있는가/ 물 위에/ 가볍게 뜬/ 소금쟁이가/ 만드는/ 파문 같은// 누가/ 하늘과 거의 뒤섞인/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가/ 편안하게 등을 굽힌 채/ 빛이 거룻배처럼 삭아버린/ 모습을 보고 있는가,/ 누가/ 고통의 미묘한/ 발자국 속에서/ 울다 가는가//

여우볕 / 박형준
햇빛이 비 오는/ 속으로 들이쳤다// 죄수들이 빛을 쬐려고/ 감옥의 창살에 매달린다// 얼굴에 달라붙는 것은/ 빗줄기만은 아니었으리// 창살을 타고/ 작은 원숭이들이 내려온다// 눈에서 두 줄기 흘러내리는 빛//

초생달 / 박형준
자기야 저건 상처다 반쯤 뜬 자기의 눈이다/ 자기 눈꼬리에 매달린 사닥다리를 타고/ 이 세상을 벗어나간 그림자와 빛/ 밤바다를 가로질러가는/ 치욕의 지느러미,/ 인광이다//

하현(下弦) / 박형준
창문에 뭉툭한 손이 내려오네// 시골에서 보내온 감자를 삶아먹는 밤, 어머니 한숨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네// 새벽을 기다리네/ 거미가 가등에 달라붙어 새벽이 터지는 빛살들로 날개 한 벌 짜려고 하네/ 꼼짝도 않고 기다리네// 먼 훗날, 감자 껍질을 벗겨 희디흰 속살 먹는 소녀의 창가를 엿보리/ 무서리 저리 내리는 날/ 날개를 반쯤 펴고// 젖어서, 가만히 딸의 창문에 비치리//

초저녁 달 / 박형준
내게도 매달릴 수 있는/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침에는 이슬로/ 저녁에는 어디 갔다 돌아오는 바람처럼// 그러나 때로는/ 나무가 있어서 빛나고 싶다// 석양 속을 날아온 고추잠자리 한 쌍이/ 허공에서 교미를 하다가 나무에 내려앉듯이// 불 속에 서 있는 듯하면서도 타지 않는/ 화로가의 농담(濃淡)으로 식어간다// 내게도 그런 뜨겁지만/ 한적한 저녁이 있었으면 좋겠다//

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 / 박형준
들일을 하고 식구들 저녁밥을 해주느라/ 어머니의 여름밤은 늘 땀에 젖어 있었다/ 한밤중 나를 깨워/ 어린 내 손을 몰래 붙잡고/ 등목을 청하던 어머니,/ 물을 한 바가지 끼얹을 때마다/ 개미들이 금방이라도 부화할 것 같은/ 까맣게 탄 등에/ 달빛이 흩어지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펌프질을 하며/ 어머니의 등에 기어다니는/ 반짝이는 개미들을/ 한 마리씩 한 마리씩 물로 씻어내던 한여름 밤/ 식구들에게 한번도 약한 모습 보이지 않던/ 어머니는 달빛이 참 좋구나/ 막내 손이 약손이구나 하며/ 시원하게, 수줍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철새 같은 이름으로 지나가는 가을 / 박형준
새들의 이름을 몰라 바라보기만 한다// 그런 적이 있었지/ 무심히 앞을 보고 가는 내 곁을 지나가며/ 누군가도 이름이 생각날 듯 말 듯하여/ 손만 들었다 뒷모습에 인사했겠지// 새들은 저마다 강물 속 돌 위에 서서/ 햇빛에 취해 움직임이 없다/ 아침 새들을 나처럼 바라보는 옆 사람에게 용기를 내어/ 이름을 물어보니, 새들의 이름은 철새//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선(禪)을 하듯 새들은 일렬종대로 서서/ 낮잠에 빠져 있다/ 강물 속에선 오후의 가을 햇살이/ 자전거 바퀴를 굴리듯이 반짝이는 물살을 튕겨 낸다// 이름을 부르지 못해/ 나도 뒷모습만 바라보다 떠나보낸 고향 사람 같은/ 이들이 있었지/ 철새 같은 이름으로/ 내 곁을 지나간 그런 가을이 있었지//

가을밤 / 박형준
소금을/ 음식에 살짝 뿌려놓은 듯/ 밤 별들이 내려오는데/ 깊은 밤/ 깊은 밤으로/ 날아간 새는/ 소리만 들려오누나/ 뜰에/ 만조를 이뤄/ 더 이상 꽉 찰 데 없는/ 외기러가 울음//

가을이 올 때 / 박형준
뜰에 찬서리가 내려 국화가 지기 전에/ 아버지는 문에 창호지를 새로 바르셨다/ 그런 날, 뜰 앞에 서서 꽃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일년 중 가장 흐뭇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 해의 가장 좋은 국화꽃을 따서/ 창호지와 함께 바르시곤 문을/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어놓으셨다/ 바람과 그늘이 잘 드나들어야 혀/ 잘 마른 창호지 문을 새로 단/ 방에서 잠을 자는 첫 밤에는/ 달 그림자가 길어져서/ 대처에서 일하는 누이와 형이 몹시 그리웠다/ 바람이 찾아와서/ 문풍지를 살랑살랑 흔드는 밤이면/ 국화꽃이 창호지 안에서 그늘째 피어나는 듯했다/ 꽃과 그늘과 바람이 숨을 쉬는/ 우리 집 방문에서/ 가을이 깊어갔다//

단풍 / 박형준
바람과 서리에 속을 다 내주고/ 물들 대로 물들어 있다// 무덤을 지키고 선 나무 한 그루,/ 저녁 햇살에 빛나며/ 단풍잎을 떨어뜨린다// 자식도 덮어주지 못한 이불을,/ 속에 것 다 비워 덮어준다// 무덤 아래 밭이 있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데/ 종아리에 불끈 일어선 정맥처럼/ 혼자 자라 시퍼렇게 빛나는/ 무 잎사귀//

겨울 호수를 걷는다 / 박형준
눈 내린 호수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거룻배까지 이어져 있다// 먼동이 보고 싶다는 당신과 아침에/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 겨울 호수를 걷는다// 당신은 호수 한가운데에 이르자/ 우리 지금 그냥 걷다가 서로 모르게/ 다리가 굳어버렸으면 좋겠어,/ 하고 말한다/ 이런 아침엔 밤새 얼지 않으려고/ 갈퀴를 젓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쳐버린/ 오리도 있지 않을까,/ 강물에 발목이 얼어붙은 줄도 모르고/ 날개를 퍼덕이다 졸음에 빠져/ 끊임없이 꿈만 꾸는 오리,/ 그런 오리가 나였으면 좋겠어/ 하고 말한다// 호수 건너편 쪽엔/ 거룻배가 빛에 휩싸여 있다/ 발자국이 이어진/ 그 길에/ 점점 사라지는 먼동을 간직한 채//

비의 향기 / 박형준
인도 카나우지 지방에서는/ 미티 아타르라는 이름으로/ 비 향기를 담아 향수를 만든다/ 사람들에게 비가 오기 직전의 고향 땅의 풋풋한 흙내음을/ 사실적으로 떠오르게 한다는 흙 향수/ 내 고향은 정우(淨雨)인데,/ 맑은 비가 뛰어다니는 지평(地平) 마을이다/ 생땅을 갈아엎은 듯한/ 비에서 풍기는 흙내음,/ 비 향기 진동하는 지평선,/ 그 진동을 담은 시를/ 단 한편이라도 쓸 수 있을까//

그 밤 빗소리 / 박형준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빗소리 / 박형준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봄비 지나간 뒤 / 박형준
봄비는/ 간질이는 손가락을 갖고 있나?/ 대지가 풋사랑에 빠진 것 같다/ 꽃보다 먼저 물방울이/ 나무의 몸을 열고 있다/ 물방울마다 가득/ 무지개가 돌고 있다/ 공원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속에 방울방울 떠다닌다//

눈망울 / 박형준
자전거도로 한복판 중앙선에/ 참새 한 마리 앉아 있다/ 바퀴에 날개 한쪽이 잘려서/ 날지도 못한 채 꼼짝 않고 앉아 있다/ 노란 중앙선엔/ 자전거도 넘나들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지/ 몸을 떨며 앉아 있다/ 지나가는 소년 하나가/ 속도에만 관심 있는 자전거와/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로/ 손을 들고 나와 산책로의 속도를 잠시 늦춘다/ 중앙선으로 다가가 참새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길가로 돌아와 풀숲에 내려놓는다/ 손바닥에 앉아/ 소년을 올려다보던 참새의 눈망울/ 손바닥의 참새를 내려다보던 소년의 눈망울/ 그 짧고 느린 시간 동안/ 산책로의 무표정한 속도들 사이로/ 섬 소리가 들리며 흘러가고 있다//

달콤한 눈 / 박형준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는/ 손이 닿지 않는 먼데/ 찬장 위에 올려져 있던 설탕 종지들이 있다/ 그을은 부엌 벽을 기어오르는 개미떼들만 맛을 본// 시골집 마당에서 올려다 본 하늘에서/ 사라져버린 개미들이/ 등에 눈을 한 점씩 입고/ 줄을 타고 내려온다// 찬장 위의 종지에서/ 반짝이는 설탕을 등에 지고 내려오는/ 눈의 푸근한 줄// 오늘은/ 저 줄을 잡고/ 가시는 이도/ 눈발의 달콤함에/ 천천히 올라가시길//

명경(明鏡) / 박형준
강나루 가에 커다란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소매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여인들이 버드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여인들은 잎이 무성한 버드나무를 꺾었다/ 배에 올라탄 남정네들에게/ 버드나무 가지를 둥글게 구부려 정표로 주었다/ 배가 떠날 시간이었다/ 내려서 뒤돌아보지 말고 걸어야 했다/ 책갈피에 버드나무 잎이 끼여 있었다// 저녁 무렵 잠깐 잠이 든 사이였다/ 꿈속에서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꿈속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그 책은 이승에서 내가 평생 써야 할 시였다//

우리가 아직 물방울 속에서 살던 때 / 박형준
이슬방울 속에/ 집 짓는 달// 당신이 불며/ 웃는 모습 좋았죠// 먼발치에서/ 꽃 피는 날 오거든// 이슬방울 집/ 작은 방 불빛// 당신의 입김에/ 흔들리며// 아직/ 켜 있는 줄 아세요//

 



박형준 시인
196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출생했다.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구의 힘〉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제1회 「꿈과시문학상」, 제15회 「동서문학상」, 제10회 「현대시학작품상」, 제24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제9회 「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불탄 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