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몸의 샘, 땀 / 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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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7. 27.

언덕 아래로 마주 보이는 아파트 공장에서 인부 여남은 명이 열심히 철근을 자르거나 나르고 있다. 그 옆으로 거푸집을 조립하고 있는 서너 사람의 일꾼이 더 눈에 띈다. 커다란 쇠손으로 쉴새 없이 흙을 파내어, 줄지어 늘어선 덤프트럭의 짐칸을 금새 채워 버리는 굴삭기도 한 대 아련한 굉음을 내면서 시야에 들어선다.

지금은, 그늘에 서 있어도 하릴없이 땀샘이 솟구치는 뜨거운 여름 한 낮, 저들은 그야말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 온 몸을 드러낸 채 저렇게 무아지경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들 굳이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비로소 연명하는 자들의 저 수고로운 삶을 최상의 인생살이라고 감히 주장할 것인가. 그럼에도 내게는 땀 흘리며 살아가는 저들의 일상이 신선하고 삽상(颯爽)하게 느껴진다. 땀방울의 무채색과 진솔성 때문일까.

땀은 말할 필요도 없이 1% 미만의 무기질과 대부분의 물로 구성되어 있다. 하는 일은 체열을 밖으로 발산시켜 몸의 온도를 조절하고, 자칫 건조해지기 쉬운 피부에 보습을 보충하여 살갗이 메마르지 않도록 만든다. 그러나 땀의 역할은 이러한 생리적인 현상보다는 아름답고 건강한 삶을 가꾸는 활력의 소산물이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땀이야말로 몸과 정신의 열정과 긴장 끝에서 솟구치는 생명의 샘물이며, 마침내 온몸으로 흘러 넘치는 수고로운 노역의 진솔한 흔적인 것이다.

땀 흘리는 노고를 기꺼이 감내하면서 거기서 얻은 삶의 건강한 기쁨을 진정한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우리들의 생각은 아직도 유효한가? 서른 해 전, 나는 월남전에 참전해 한 해를 고스란히 열대의 땅에서 보낸 적이 있다. 그때 틈만 나면 땡볕에서 축구로 전우애를 다졌다. 40도가 넘는 햇빛 아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오히려 전쟁터의 공포와 시름은 한결 견디기 수월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샤워로 씻어 낼 때의 그 청량감! 풋풋하게 깨어나던 육체의 활기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뒤로도 나는 한동안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일거리를 우선해서 찾아 나서곤 했었다.

어느 것도 땀의 대가 아닌 노력의 결과란 의미가 없을 것이건만, 어느새 우리는 불로소득만을 쫓아다니는 세상의 기류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다. 땀의 소중함을 저만치 밀쳐 버리고 되는 대로 쉽게쉽게 살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기피하는 것이 3D라고 하던가. 어렵고 힘든 일을 외면하고 가급적 힘 안들이면서 크게 얻으려고 하는 사회풍조가 미만해지면서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노력들이 무안해지고, 마침내 우리들의 가치관조차 변질되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어느새 우리 주변에서는 삶의 건강함과 그 진정성이 점차 배척되는 것이다.

나는 땀의 구성요소에 거룩함이 있다고 믿는다. 땀을 흘려 노동의 대가를 정직하게 요구하고, 그 노역의 솔직함과 순연함으로 삶을 투명하게 가꾸는 것은 조금도 삿(邪)되지 않다. 심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 것, 삶의 수고로움에 기꺼이 동참하면서 우리의 내력이 튼튼하게 뿌리내리도록 애쓰는 그 넉넉한 실존이 우리 본래의 올곧은 기대와 소망이 아닐까.

몸이 수고로워야 그 밥이 달다. 육체는 땀흘리며 생산을 하고 그 결실로 정신을 부양하거나 지탱하는 것은 지극히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삶이리라. 어느 것이나 가치 있는 것은 그 나름의 자연미가 드러나는 법. 땀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몸 속의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아름다운 자연의 샘이 아닐 것인가.

삶이 화사하지 않은들 또 어떠랴. 사람 사이에 섞여 살면서, 가끔은 땀 흘리며 높은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기도 하고, 무성한 나무 그늘에 앉아 그 땀을 말리면서, 흘러가는 시간의 냇물에 발을 씻어 몸을 상쾌하게 하노라면 눈앞이나 등뒤의 어떤 비난에서도 얽매임 없어, 몸과 마음의 시름을 자연스럽게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순연함이 삶의 제 자리가 아닐까.

살아있는 몸의 샘, 그것이 땀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그 샘이 건강할 때, 언제나 싱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