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일까, 착각일까? / 임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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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2.

끝 간 데 없는 코로나 사태로 강화된 집합금지 명령이 가족 간의 돈독한 정을 갈라놓았다. 올해는 고향집에서 쓸쓸한 설 명절을 보냈다. 아무리 핵가족 시대라고 하지만 명절에는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이번 설에는 직계 가족도 5인 이상 만남을 자제하라는 권고로 시골마을은 적막강산이었다. 마을회관은 문이 닫혔고 양지바른 곳곳에는 노인들이 맥을 놓고 앉아 있다.

아랫마을에 사는 친구가 명절도 자났으니 식사나 하자면서 전화가 왔다. 공무원으로 퇴직하고 귀향하여 살면서 주변 일에 앞장서는 친구다. 나 역시 시골에서 허전하게 명절을 보내고 마음이 울적했는데 친구의 연락이 무척 반가웠다. 정해진 시간에 약속 장소에 갔더니 다른 친구 두 명이 함께 나와 있었다. 둘 다 도회지에서 생활하다가 은퇴하고 고향에 정착한 초등학교 동창이다.

꽤 오랜만에 만나서 식사도 하고 막걸리가 몇 순배 돌고 나니 화두는 자연스레 설 명절 이야기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족 간의 천륜을 끊어 놓는다고 한숨 섞인 푸념들이다. 명절이 되어야 딸자식과 귀여운 손주도 만나고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데, 스마트 폰 영상으로 절 받고 세뱃돈은 온라인으로 송금하니 절에 있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고지식한 친구 B가 예로부터 전해오는 민속 예절인 세배도, 민속놀이 행사도 사라지고 제사마저 지낼 사람이 없다고 걱정이 태산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K 친구가 한마디 한다.

“차라리 잘 됐다. 세배나 민속놀이는 다음에 하면 되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이번 기회에 제사와 묘사는 없애기로 했다. 살아 있을 때 잘 모셔야지 세상 떠난 후에 잘해 본들 무슨 소용이냐, 귀신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친구 B가 되받아

“야, 그런 소리 하지마라. 수백 년 내려오는 전통을 하루아침에 버려서야 되겠느냐? 종교가 다르면 모르지만 세상이 변해도 유교 집안에서는 조상님 섬기는 예는 다 해야지.” 라며 제사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이웃집에 살았던 종조부님이 우리 집에 오시더니 어머님과 나를 앉혀놓고 일장 훈계를 하였다.

“우리 집안 종손이었던 너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도 몇 해가 되었고, 이제 네가 커서 중학생이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종손행세를 해야 한다.”고 강조를 하였다.

사실 그때는 종손이 뭔지도 모르는 때였다. 제삿날이면 어머님은 목욕 재개하고, 나에게도 몸을 씻은 후 항상 경건한 마음으로 극진히 제사를 모셔야 한다고 가르쳤다. 위로 4대 할아버지 내외분까지 제사를 지냈으니 설, 추석을 포함하면 거의 매달 제사를 지낸 셈이다. 한밤중에 제사를 지내기에 잠을 쫓느라 힘이 들었지만, 당숙부가 낭랑한 목소리로 “유세차 00년 0월...”로 시작하여 축문을 읽게 되면 숙연한 분위기에 혼미한 정신이 번뜩 들기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매년 음력 시월이 되면 제물을 준비하여 선조들의 묘소에서 제례를 올리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지금은 시대의 변화로 시조 할아버지 외에는 대부분이 재실(齋室)에서 제를 지내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산속 묘소에서 묘사(墓祀)를 지냈다. 그것도 대종중(大宗中), 소종중(小宗中) 선조를 따로 모셔야 하기에 2,3일은 족히 걸리는 문중 행사였다.

우리 집 내력을 보면 종갓집을 비워둘 수 없다는 어른들의 뜻에 따라 아버님께서 큰집에 양자로 입적하였다. 예전에 종손은 재산과 함께 조상 일도 물려받아 종중 어른 행세를 하였으나 아버님은 몰락한 가문에 허울뿐인 종손이었다. 열여덟에 시집와서 종부(宗婦)가 된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4남매를 키우면서 종갓집 며느리로 평생을 살아오셨다.

어머님이 지켜 온 종가 일을 넘겨받은 지도 이십 년이 지났다. 선진 과학의 발달로 시대가 급변하고 있다. 전통적 가치관은 코로나 사태가 아니더라도 가정생활에서 위기의 경계에 서 있다. 세대 간의 갈등은 고조되고 전통 가정 예법이 무너지고 있기에 마음이 착잡하다. 내가 숙명처럼 지켜온 제례(祭禮) 문화도 시대 변화에 따라 결단의 시간이 멀지 않은 듯하다.

관혼상제를 살펴보면 관례는 사라졌고, 혼인 의식도 간편해진 지 오래되었다. 남은 것은 일생의 끝을 마무리하는 상례(喪禮)와 돌아가신 분의 추모 행사인 제례가 있을 뿐이다.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 시대의 전통적 의례 문화가 실용성을 중시하는 현대 생활에서 거추장스러운 일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몇 해 전만해도 세상을 떠나게 되면 무덤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화장하여 수목장, 납골당을 활용하고 무덤도 가족묘원에 평장을 하고 있다. 긍정적 변화로 보는 이가 많지만 장례 후 행사는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전에는 고인을 애도하면서 1년 정도 상장(喪章)을 달기도 하고, 불교적으로 사십구재를 올리면서 천도를 하였으나, 지금은 장례 후 2~3일이면 끝나는 삼우제(三虞祭)도 없이 바로 탈상(脫喪)하는 가정이 많다. 또한 제례 문제도 어느 종교이던 추모 행사를 하는데 유독 유교 가정의 제사나 묘사가 문제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돌아가신 분의 예(禮) 문제는 조선시대 조정에서도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때가 있었고, 이름 있는 가문마다 경쟁적으로 조상 숭배를 하면서 폐단이 많았다. 일부의 실학자들이 간편하게 실용을 강조하였으나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신분철폐를 내세우면서 개혁하고자 했으나 도리어 너도나도 양반행세를 하느라고 확장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이 되면서 사회, 문화적 구조가 변하게 되었고, 경제성장으로 생활이 풍족해지자 호화로운 가정의례가 더욱더 늘어났다. 1970년대에 정부에서 허례허식 타파를 위해 가정의례준칙을 마련하였으나 지나치게 간편화되었다고 그 당시는 외면하였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의례행사를 간편하게 하면서 이어가려는 의지보다 폐습처럼 없애는 분위기가 많다. 이제는 내가 보기에 민간의 상례, 제례 행사가 가정의례준칙 보다도 훨씬 간편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귀향한 친구 몇이 모여서 도도히 흐르는 세월의 물결을 느끼는 하루였다. 저항한들, 순응한들, 흐르는 물은 제 길을 가겠지만 이 시대의 단상(斷想)을 진지하게 토로했다. 삶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일 텐데 그 이상은 무엇일까?

나는 지금도 ‘유세차’하는 소리가 들리면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 버릇은 습관일까, 아니면 착각일까? 머릿속은 온통 의문 부호만 가득한 채 미궁 속을 헤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