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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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9. 1.

파랑새 / 한하운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 / 한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는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 지까다비 : 일본식 버선

 

시집 ‘보리피리’(초판1995. 인간사/ 2판1955. 인간사/ 3판1959. 인간사) 사진출처:오마이뉴스 모바일

보리피리 /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늴리리.//
* 인환(人寰)의 거리 : 저자거리와 같이 북적거리는 사람 사는 세간(世間)

 

 

목숨 / 한하운

쓰레기 통과/ 쓰레기 통과 나란히 앉아서/ 밤을 새운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죽어버리는 것만 같었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아직도 살아있는 목숨이 굼틀 만져진다.// 배꼽아래 손을 넣으면/ 三十七度(삼십칠도)의 體溫(체온)이/ 한마리의 썩어가는 생선처럼 밍클 쥐여진다.// 아 하나밖에 없는/ 나에게 나의 목숨은/ 아직도 하늘에 별처럼 또렷한 것이냐.//

어머니 / 한하운

어머니/ 나를 낳으실 때/ 배가 아파서 울으셨다.// 어머니 나를 낳으신 뒤/ 아들 뒀다고 기뻐하셨다.// 어머니/ 병들어 죽으실 때/ 날두고 가션길을 슬퍼하셨다.// 어머니/ 흙으로 돌아가신/ 말이 없는 어머니.//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 한하운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쩌구니 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나 / 한하운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벗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 버섯처럼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목숨이올시다.// 억겁을 두고 나눠도/ 그래도 많이 남을 벌이올시다. 벌이올시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운(何雲) / 한하운
나 하나 어쩔 줄 몰라 서두르네/ 산도 언덕도 나뭇가지도.// 여기라 뜬 세상/ 죽음에 주인이 없어 허락이 없어/ 이처럼 어쩔 줄 몰라 서두르는가.// 매양 벌려둔 저 바다인들/ 풍덩실 내 자무러지면/ 수많은 어족(魚族)들의 원망이 넘칠 것 같다.// 썩은 육체 언저리에/ 네 헒과 균과 비(悲)와 애(哀)와 애(愛)를 엮어/ 뗏목처럼 창공으로 흘러 보고파진다.// 아 구름 되고파/ 바람이 되고파// 어이 없는 창공에/ 섬이 되고파.//

자화상 / 한하운
한번도 웃어 본 일이 없다/ 한번도 울어 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러한 슬픔에 굳어 버린 나의 얼굴.//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가는 시장끼냐.// 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짖궂게 왔다가는 포만증(飽滿症)이냐.// 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 검은 눈썹 언저리에 매워 본 덧없음을 이어// 오늘 꼭 가야 할 아무데도 없는 낯선 이 길 머리에/ 쩔룸 쩔룸 다섯 자보다 좀더 큰 키로 나는 섰다.// 어쩌면 나의 키가 끄으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득히 웬 땅을 덮는 것이냐.// …/ 지나는 거리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 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 볼 수 없는 나의 얼굴.//

벌(罰) / 한하운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쩌구니 없는 벌(罰)이올시다.//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 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올시다.//

업계(業界) / 한하운
소년아/ 네 무엇을 찾으려고/ 또 하나 그 위태한 눈을 떴니.// 하늘 한가 둥둥 구름 떠가는/ 높고 푸른 지엄을 우러러/ 어리디 어린 보람을 조약돌로 팔매쳐 보는 것.// 아서라/ 네 아무리 하늘 끝간 델 보았다 하자......// 눈물로 걸음걸음 이르런 곳/ 그래 여기가 바로 어느 동서남북이란 말이냐.// 아득히 하늘 아득히 바라보던// 너의 망원경 렌즈에 아련한 부끄러움을/ 어찌 할테냐.//

자벌레의 밤 / 한하운
나의 상류(上流)에서/ 이 얼마나 멀리 떠내려온 밤이다.// 물결 닿는 대로 바람에 띄워 보낸 작은 나의 배가/ 파도에 밀려난 그 어느 기슭이기에./ 삽살개도 한 마리 짖지 않고......// 아—여기서/ 나는 누구의 이름을 불러 보아야 하나.// 첩첩한 어둠 속에 부표처럼 떠서/ 가릴 수 없는 동서남북에 지친 사람아.// 아무리 불러 보아야/ 답 없는 밤이었다.//

명동(明洞) 거리 2 / 한하운
명동 길 외국 어느 낯선 거리를/ 걸어가는 착각에 허둥거린다.// 알아볼 사람 없고 누구 하나 말해 볼 사람 없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 거리 에트랑제는// 시간과 과잉이 질질 흐르는 사람 틈에 끼어/ 물결처럼 물결처럼 떠 간다.// 누드가 되고 싶은 계집들이 꼬리를 탈탈 터는데/ 노출 과다에 눈이 맴도는 눈 허리에 기름이 돈다.// 누구 하나 같이 갈 사람 없어/ 극장 광고판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나는 담배 꽁초를 다시 피워 문다.// 청춘이 시장끼 들고/ 돈과 계집이 그리워지는 거리에/ 나 혼자 에뜨랑제는// 누드가 되고 싶은 계집과 계집을/ 따라가는 사내들 틈에 끼어 어둠을 걸어간다.//

명동(明洞) 거리 3 / 한하운
수케 같은 계집들이/ 꼬리를 치고 간다.// 돼지 같은 사내들이/ 계집을 귀속재산(歸屬財産)처럼/ 네것 내것 같이 공것 같이/ 零號婦人(영호부인)으로 스피아로 달고 간다.// 流行(유행)이라면/ 벌거 벗는 것도 사양치 않는 계집들이/ 밀가루 자루 같은 것/ 마다리 자루 같은 것/ 허리끈도 없이 뒤집어 입고// 이 거리 明洞(명동) 거리는/ 碧(벽) 없는 共同 寢室의 入口.// 末梢神經(말초신경)에다 불을 켜 놓고/ 원숭이 광대줄 타는/ 허기찬 요술이// 하나 밖에 없는/ 國産(국산) 民主主義(민주주의)를 낳고/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개 나팔을 불기만 한다.// 언제나 명절같은 이 거리/ 언제나 명절같은 이 거리에// 수케 같은 계집과/ 돼지 같은 사내가// 어디라 할 것 없이/ 거리라 할 것 없이/ 똥둑간이라 할 것 없이/ 꽉 꽉 차 있다.// 놀고 먹는 거리는// 대포집 당구장 다방/ 극장 땐스홀 빠아// 華食(화식) 洋式(양식) 倭食(왜식)/ 韓食(한식) 집 집 또 또.......// 세상이 삶이/ 혼나간 미친 년 웃음 같아서/ 뻬비 . 당구장/ 수롯트 . 머싱에 진종일 달라 붙은/ 사람들이/ 털컥 털커덕/ 털컥 털커덕/ 시끄럽기만 하다.// 나이롱 양말 같이 질긴 계집이/ 나이롱 양말 같이 질기지 못한 계집이// 포동거리는 謝肉(사육)은/ 실속이 없는 숟가락 같은/ 疑餌(의이)의 낚시밥이 되어// 하많은 것을/ 잃어 버린다.// 한 떨기 꽃도 피어날 수 없고/ 한 마리 새도 울 수 없는/ 이 거리 明洞 거리에// 수케 같은 계집과/ 돼지 같은 사내가/ 사람이 망가진 人造人間(인조인간)들이// 네온 불 原色(원색)을 밟는/ 부나비가// 벌레 먹은 서울 어두운 골자기를 헤멘다.//

양녀(洋女) / 한하운
먼 열두 바다를 건너 오너라구/ 저리 황새처럼 멋없이 긴 다리를/ 벗었나 보다.// 바다마다의 밀물에 깎이운 허리를/ 만곡선(彎曲線) 가느랗게 졸라맨 계집들.// 해풍에 퇴색한 머리칼 날리며/ 걸음걸이 사내들처럼 히히대며 간다.// 하늘 높이 비행기가 날을 때면/ 하늘을 우러러 돌아가고 싶은 저들의 고국도 있어// 하늘 빛 향수에 눈이 푸른 계집들.//

고오·스톱 / 한하운
빨간 불이 켜진다/ 파란 불이 켜진다.// 자동차 전차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모두들 신호를 기다려 섰다.// 나도 의젓한 누구와도 같이/ 사람들과 사람들 틈에 끼어서/ 이 네 거리를 건너가 보는 것이다.// 아 그러나/ 성한 사람들은 저이들끼리/ 앞을 다투어 먼저 가버린다.// 또다시 빨간 불이 켜진다/ 또다시 파란 불이 켜진다.// 또다시 자동차 전차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모두들 신호를 기다려 섰다.// 또다시 나도 의젓한 누구와도 같이/ 사람들과 사람들 큼에 끼어서/ 이 네거리를 건너가 보는 것이다.// 아 그러나/ 또다시 성한 사람들은 저이들끼리/ 앞을 다투어 먼저 가 버린다.// 또다시 나에게 어디로 가라는 길이냐/ 또다시 나에게 어디로 가라는 신호냐.//

막다른 길 / 한하운
저 길도 아닌/ 이 길이다 하고 가는 길.// 골목 골목/ 낯선 문패와/ 서투른 번지수를 우정 기웃거리며.// 이 골목/ 저 골목/ 뒷골목으로 가는 길.// 저 길이 이 길이 아닌/ 저 길이 되니/ 개가 사람을 업수녀기고 덤벼든다.//

데모 / 한하운
뛰어 들고 싶어라/ 뛰어 들고 싶어라.// 풍덩실 저 강물 속으로/ 물구비 파도소리와 함께/ 만세 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물구비 제일 앞서 핏빛 깃발이 간다/ 뒤에 뒤를 줄대어/ 목 쉰 조선사람들이 간다.//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는/ 아우성 소리 바다소리.// 아 바다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
* 시의 원문


열리지 않는 門 / 한하운
감기에는/ ····/ 아스피린 하얀 정제를/ 두어개만 먹으면 낫는다.// 빈혈증에는 포도당 주사요/ 매독에는 606호를 맞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또/ 신농씨(神農氏)의 유업을 받아서// 가지가지 초근목피로/ 용하게 병을 고치는 수도 있다고 한다.// 의학박사도 많고/ 약학박사도 많고// 내과 외과 소아과/ 치과 신경과 피부과/ 병원도 많기도 한데.// 그러나 병원 문은 집집이 닫혀 있다/ 약국이란 약국은 문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제 막 인력거 위에 누워서 가는/ 환자가 있다.// 아니/ 하얀 가운을 입고/ 하얀 마스크를 건/ 의사 선생님과 간호부가/ 바쁘게 내 앞을 지나간다.//

청지유정(靑芝有情) / 한하운
내가 울고 싶어서/ 파랑 잔디를 찾아갑니다.// 남 몰래 한(恨)이 가도록 울고 싶어서/ 파랑 잔디를 찾아갑니다.// 인간 폐업/ 천형 원한(天刑怨恨)을 울었읍니다.// 몇 백번 죽음을 고쳐 죽어도/ 자욱 자욱 피 맺힌/ 그리움과 누우침이 가득찬/ 문둥이 아니겠읍니까// 실컷 울어봐도 유한(有恨)이 가시지는 않아/ 그래도 울음이 울음을, 눈물이 눈물을/ 달래 주는 자위가 그립습니다.// 눈 감고 눈 감고 누워서 조는/ 미령(靡寧)의 피로한 몸에/ 폭신한 파랑 잔디는/ 생명의 태반인 양/ 지령(地靈)의 혈맥이 이다지도/ 내 혈관에 싱싱한 채 순환합니다.//

고향 / 한하운
원한이 하늘을 찢고 우는 노고지리도/ 험살이 돋친 쑥대밭이 제 고향인데/ 인목(人木)도 등 넘으면// 알아보는 제 고향 인정이래도/ 나는 산 넘어 봐도/ 고향도 인정도 아니더라// 이제부터 준령(峻嶺)을 넘어넘어/ 고향 없는 마을을 볼지/ 마을 없는 인정을 볼지//

사향(思鄕) / 한하운
내 고향 함흥은/ 수수밭 익는 마을/ 누나가 시집갈 때/ 가마 타고 그 길로 갔다// 내 고향 함흥은/ 능금이 빨간 마을/ 누나가 수줍어할 때/ 수수밭은 익어갔다//

삼방(三防)에서 / 한하운
사람도 올 수 없이 막았다/ 구름도 올 수 없이 막았다/ 바람도 올 수 없이 막았다// 그래서 삼방이라 하였는가// 하늘을 찌르는 칠전팔도(七顚八倒)의 험산이/ 모조리 올 것을 막아버린 천험비경(天險秘境)에/ 구비 구비 곡수(曲水)는 바위에 부딪쳐 지옥이 운다.// 죽음을 찾아가는 마지막 나의 울음은/ 고산(高山) 삼방 유명을 통곡한다.// 죽음을 막는가/ 바람도 없어라/ 부엉이는 슬피 우는가// 하늘이 쪼각난 천막에/ 십오야 달무리는/ 내 등 뒤에 원을 그린다.//
* 삼방(三防) : 함경남도 안변군에 있는 명승지. 예전에, 남북간의 중요한 통로를 이루어 세 군데에 통행인을 검사하는 관방(關防)이 설치되어 있었던 데서 비롯한 이름이다. 약수로 유명하다.

귀향(歸鄕) / 한하운
고향으로 가는 길은/ 자꾸만 뜨거워지는 것은// 달랠길 없어/ 한때의 잘못된 죄는/ 꽃도 없는 캄캄한 감옥 속에/ 벌을 몸으로 치르고// 이제 법 조문보다/ 자유로운 고향길을 가는데/ 산천을 소리쳐 불러보고 싶구나/ 고향을 소리쳐 불러보고 싶구나// 산에서 들에서/ 뻐꾸기가// 누구를 부르는가/ 누구를 찾는가/ 내 마음같이 흔건히 울고 있는데// 산천은 전과 같이 나를 반기네/ 고향도 전과 같이 나를 반기네//

추억 1 / 한하운
처녀야/ 네 야멸찬 그 눈시울 속에// 도향(桃鄕)을 뒤로 한 사라진 길이 있고/ 고향으로 동아갈 길이 보인다// 네 휘능청 구비친 허리말에/ 옛 머슴아의 사나운 달빛이 감겼댔지./ 산악처럼 웅장한/ 네 젖가슴을 헤치려던/ 너무나도 엄숙한 그 뉘의 대답이었나// 생지짝 비단 치마말이 찢어졌기에// 추억도 흘려버렸지....../ 옛일도 빠쳐트렸지......//

추억 2 / 한하운
일곱해 맞이 해해맞이/ 기울어진 지구가 되어// 쩔뚝이며 빗길로 찾아와 보니/ 모난 하늘이 동쪽으로 삐뚤어졌네/ 어느새 동쪽으로 삐뚤어졌네.// 오늘도 붉은 꽃 파리는/ 머언 해중(海中)으로 흘렀나 본데/ 기다렸던 해변은/ 그 여인의 넑인 양 슬픔인 양/ 추루룩 추루룩 울고만 있네.//

여수(旅愁) / 한하운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죽자고 살아보자던사람.// 만나보자고 찾던 사람.// 한번은/ 만나봤어야 할 사람이였지만/ 어쩐지/ 망설였던 사람.// 세상과 문둥이는 너무나 담이 높아/ 얼마나 얼마나 많이 울어서 무너뜨려야 할 담이 높아/ 서로 길이 헛갈리누나// 이제 그 사람을 찾아 온/ 천리땅 대구(大邱)길은/ 경(慶)/ 그 사람은 가고// 허전한 여수(旅愁)는/ 그런대로 사랑했던 까닭인가.//

수수야곡(愁愁夜曲) / 한하운
잘못 살아온/ 서른살 짜리 부끄러운 내 나이를/ 이제 고쳐 세어본들 무엇하리오만// 이밤에 정녕 잠들수 없는 것은,/ 입술을 깨물며 피를 뱉으며/ 무슨 罰(벌)이라도 받고 싶어지는 것은……// 여껴움을 浪費(낭비)한 젊음도 애탐에 지쳐버린 사랑도, 서서/ 우는 문둥이도 아니올시다.// 별을 닮은 네눈이 위태롭다고/ 어머니의 편지마다 한때는 꾸중을 받어야 했습니다.// 차라리 갈쑤룩 가도가도 부끄러운 얼굴일진댄/ 한밤중 이 어둠속에 뉘우침을 묻어 버리고.// 여기 예대로의 風土(풍토)를 그리워하면서/ 무척도 새로 돌아나고 싶은 보람을 딩굴며/ 잠들지 못하는 이밤이 깊어갑니다.//

부엉이 / 한하운
미움과 욕으로 일삼는 대낮에는/ 정녕 조상을 끄려서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약보다는 좋은 효험(效驗)이라 생각하였다.// 부엉이는 또한/ 싸움으로 일삼는 낮에사/ 푸른 나무 그늘 바위 틈에서/ 착하디 착하게 명상하는 기쁨이/ 복이 되곤 하였다./ 모든 영혼이 쉬는 밤/ 또 하나의 생명과 영혼이 태어나는 밤// 이 밤이 좋아서 신화는/ 부엉이를 눈을 뜨게끔 하였다// 어둠 속에서/ 별이 반짝이며 이슬을 보낸다/ 나무가 숨쉬며 바람을 보낸다/ 꽃이 피려고 향을 훈긴다.//

추우일기(秋雨日記) / 한하운
아치라운 일이다/ 네 싸늘히 서글픔을 눈으로는 노려보지 말아라.// 모두다 모두가 다 이름 있는 모든 것이다./ 가느다란히 정맥에 살아서 숨 쉬는/ 나무며 풀이며 잎잎 떨어지는데.// 싹 다린 옥색 모시치마 사뿐히 꽃아지른 옷맵시./ 참다 못하여 부서질듯이 돌아서면서/ 흐느껴 눈물로 옷깃을 적시는가.//

추석(秋夕) 달 / 한하운
추석 달은 밝은데/ 갈대꽃 위에/ 돌아가신 어머님 환영(幻影)이 쓰러지고 쓰러지곤 한다.// 추석 달은 밝은데/ 내 조상에/ 문둥이 장손은 다례도 없다.// 추석 달/ 추석 달/ 어처구니 없는 8월 한가위/ 밝은 달이다.//

추야원한(秋夜怨恨) -어머님의 옛날에 / 한하운
밤을 새워 귀또리 도란 눈물을 감아 넘기자./ 잉아 빚는 물레소리에 밤은 적적 깊어만 가고./ 천상스리 한숨 쉬며 어이는 듯한 그리움에 앞을 흐리는 밤./ 눈물은 속될진저 오리오리 슬픈 사연을 감아 넘기자./ 바람에 부질없어 문풍지도 우는가/ 무삼일 속절없는 가을밤이여.//

손가락 한마디 / 한하운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우에 떨어진다.// 이 뼈 한마디 살 한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繃帶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날이 따수해지면/ 南山 어느陽地 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파고 묻어야겠다.//

냉수 마시고 가련다 / 한하운
산천아 구름아 하늘아/ 알고도 모르는 척할 것이로되/ 모르면서 아는 척하지를 말라.// 구름아 또 흐르누나/ 나는 가고 너는 오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너와 나와 헛갈리누나.// 아 아 하늘이라면/ 많은 별과 태양과 구름을 가졌더냐// 이렇듯 맑은 세월도/ 푸른 지평(地平)도 건강한 생(生)도 평등할 행(幸)도/ 나와는 머얼지도 가깝지도 못할/ 못내 허공에도 끼어질 틈이 없다.// 삼라만상은 상호 부조의 깍지를 끼고/ 을스꿍/ 저 좋은 곳으로만 돌아가는가// 산천아 내 너를 알기에/ 냉수 마시고 가련다.// 기어코 허락할 수 없는 생명을 지닌/ 내 목으로 너를 들이키기엔/ 너무나도 시원한 이해이어라.//

비창(悲愴) / 한하운
차이코프스키의 <비창(悲愴)>이/ 이 격리된 나요양소(癩療養所)에// 국경도 없이 차별도 없이/ 또 세균학도 없이/ 뇌파에 흐흐 느끼어 온다.// 지금 나는 옛날 성하던 계절에 서 있고/ 지금의 나는 여기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수없이/ 떠내려온 하류에서/ 불시 나는 나의 현실을 차 버린다./ 두 조각 세 조각 산산이 깨어진다.// 지금/ 모든 것이 깨어진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만이/ 영원으로 가는 것이다.//

해변에서 부르는 파도의 노래 / 한하운
바다!/ 억겁(億劫)을 두고/ 오늘도 갈매기와 더불어 늙지 않는 너의 청춘,// 말 못할 가슴속 신음 같은/ 파도 소리/ 한시도 쉴 새 없이 처밀고 처가는/ 해식사(海蝕史).// 바다의 꿈은 대기 만성(大器晩成)인가/ 영겁을 두고 신념의 투쟁인가// 바다는 완성한다!/ 욕망이 침묵하는 그 속에서// 황혼이 깃들어/ 저녁 노을의 빛·빛·빛/ 변화가 파도에 번질거린다.//

버러지 / 한하운
새살이 하려 찾아온/ 또 새손댁 금실기가/ 바램에 부풀은 눈시울에/ 똑똑히 삶을 그린 눈썹이 시물구나// 손가락 떨어지면/ 손목은 뭉뚝한 몽두리 됐다// 분에 못견딘 삶이래서/ 내 몽두리도 마구마구 휘어때린/ 매 맞는 땅바닥은 태연도 한데/ 어이 억울한 하늘이 울음을 대신하나// 한 가지 약을 물어 천 가지를 바래며/ 전설로 걸어가면 신기(神奇)를 만나련가// 이 실천이 꿈이련가/ 꿈이 실천이련가// 큰 목적을 위하여/ 이 몹쓸 고집을 복종시키자/ 인내만이 불행을 달래어 두고/ 의심만이 나와 소곤거리자// 버러지 버러지 약 버러지// 놀래 자지러진/ 네 너로 네딴으로 죄없단 빛이/ 누두둑 푸른 피 흘려 흘려// 헒 짙은 목덜미에/ 왕소름을 끼친다// 내가 버러지를 먹는지/ 버러지가 나를 먹는지//

국토편력(國土遍歷) / 한하운
이 강산 가을 길에/ 물 마시고 가 보시라/ 수정에 서린 이슬 마시는 산듯한 상쾌이라.// 이 강산/ 도라지꽃 빛 가을 하늘 아래/ 전원은 풍양과 결실로 익고/ 빨래는 기어이 백설처럼 바래지고/ 고추는 태양을 날마다 닮아간다.// 산은 산대로/ 들은 들대로/ 빛도 고운 색채 과잉의 축연/ 그 사이로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은/ 하늘과 구름과 가즈런히 멀기도 한데// 마을 느티나무 아래/ 옛날이나 오늘이나 흙과 막걸리에/ 팔자를 묻은 사람들이/ 세월의 다사로움을/ 물방아 돌아가듯이/ 운명을 세월에 띄워 보낸다.// 전설이 시름없이 전해지는/ 저 느티나무 아래서/ 나는 살아 왓었다.// 저 느티나무 아래서 나를 기르신/ 선조들이 돌아가셨다./ 저 느티나무 아래서 저 사람들과/ 적자생존의 이치를 배웠다.// 이제 나보고 병들었다고/ 저 느티나무 아래서 성한 사람들이/ 나를 쫓아내었다./ 그날부터 느티나무는 내 마음속에서/ 앙상히 울고 있었다.// 다 아랑곳 없이 다 잊은 듯이/ 그 적자생존의 인간의 하나 하나가/ 애환이 기쁨에 새로워지며/ 산천초목은 흐흐 느끼는 절통(切痛)으로/ 찬란하고 또 찬란하다.// 아 가을 길 하늘 끝간 데/ 가고 싶어라 살고 싶어라.// 황톳길 눈물을 뿌리치며/ 천리 만리 걸식 길이라도/ 국토 편력 길은 슬기로운 천도(天道)길이라.//

나혼유한(癩婚有恨) / 한하운
흙이 있다. 하늘의 구름과 푸른 지평은/ 넓기만 한데/ 문둥이가 살 지적도는 없어// 버림받은 사내와 버림받은 계집이/ 헌 신짝에 짝을 맞추는 것이// 어쩌면 울고 싶은 울고 싶은/ 하늘이 마련한 뼈아픈 경사냐// 신부는/ 오늘만이라도 성냥개비로 눈썹을 그리고/ 인조 면사포에 웨딩 마아치는 들리지 않으나// 5색 색지가, 색지가 눈같이 퍼붓는데/ 곱게 곱게 다가서라// 진정 그와 그만의 짐승들만이/ 통할 수 있는 인정이 사무쳐// 양호박 울둑불둑 얼굴이 이쁘장해/ 연지바른 신부, 너 모나리자여// 서식(棲息)의 허가(許可) 없는 지대(地帶)에서/ 생명(生命)의 본연(本然)이 터지는 사랑을 허락하니// 하늘이 웃어도 할 수는 없어/ 애당초 족보가 슬퍼함을 두렵지도 않고// 오늘은 이 세상에 왔다가/ 내일은 저 새상에 간다고 하니// 오, 문둥이의 결혼이여// 분홍빛 치마폭으로 신랑방 문을 가려라/ 어서 어서 태양 앞에 새롭게 다가서라//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 / 한하운
푸른 觀世音菩薩像(관세음보살상)/ 寂照(적조)속 慈悲(자비)의 涅槃(열반)// 서라벌 千年(천년)을 微笑(미소)하시는/ 忍辱(인욕) 柔和(유화)의 相好(상호)/ 맑숙한 어깨/ 蓮(연)꽃 봉오리의 젖가슴/ 몸에 몸은 보드라운 均齊(균제)의 線(선)에/ 神韻(신운)이 스며서// 乳白色(유백색) 袈裟(가사)는/ 몸을 휘여 감어 가냘푸게/ 曲線(곡선)이 눈부신 살결을 보일락/ 자락 마다 淨土(정토)의 平和(평화)가 일어/ 瓔珞(영락)이 사르르/ 제 世上(세상)의 音律(음율), 迦陵頻伽(가릉빈가) 소리// 淸楚(청초)한 눈동자는 天空(천공)의 저쪽까지/ 死生(사생)의 슬픔을 눈짓 하시고/ 大超越(대초월)의 慈悲(자비)로,/ 澆季混濁(요계혼탁)한 濁世(탁세)에 허덕이는/ 衆生(중생)을 濟度(제도)하시고/ 淨土(정토) 往生(왕생)시키려는 後光(후광)으로/ 輝煌(휘황)하시다// 돌이/ 無心(무심)한 돌부처가/ 그처럼/ 피가 돌아 生命(생명)을 훈길수야 있을까// 갈수록 多情(다정)만 하여/ 아 문둥이 우는 밤/ 煩惱(번뇌)를 잃고/ 돌부처 觀世音菩薩像(관세음보살상)/ 大超越(대초월)의 涅槃(열반)에/ 그리운 情(정) 나도 몰라/ 生生(생생) 世世(세세)/ 歸依(귀의)하고 살고 싶어라//

은진 미륵불(恩律 彌勒佛) / 한하운
논산 땅 은진 미륵불(恩津彌勒佛)/ 돌로 천년/ 살아 오신 육십 오척// 몸 길이가/ 얼굴 길이가/ 갓 길이가/ 균형을 잃은/ 웅장한 험절의 어처구니 없는/ 옛날의 불구자.// 앙데팡당의 뉘 석장이/ 그지 없는 인간고의 초극상(超克像)을/ 스핑크스로 아로새겼나.// 비원(悲願)에 우는 사람들이/ 진정소발(眞情所發)을/ 천년 세월에 걸쳐/ 열도(熱禱)하였건만// 미륵불은/ 도시 무뚝뚝/ 청안(靑眼)으로// 세월도/ 세상도/ 운명도/ 그렇게만 아득히 눈짓하여// 생각하여도 생각하여도/ 아 그 마음/ 푸른 하늘과 같은 마음/ 돌과 같은 마음// 불구한 기립(起立) 스핑크스로/ 세월도/ 세상도/ 운명도/ 집착을 영영 끊고/ 영원히 불토(佛土)를 그렇게만 지키는 것인가.//

춘곤(春困) / 한하운
꽃샘바람은/ 꽃이 시새워서 분다지만.// 초근목피에 주린 배를 채우면/ 메슥 메슥 생목만 올라// 부황증(浮黃症)에 한속(寒粟)이 춥다.// 노고지리는/ 포만증(飽滿症)을 새기느라/ 진종일 울어야 하지만// 아예 배고픔을 내색않는 문둥이는/ 얼마나 울어야 하는 이야기인가.// 굶주림은/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 아지랑이는/ 아지랑이는// 비실 비실 어질병만 키운다.//

작약도 / 한하운
인천 여고 문예반과// 작약꽃 한 송이 없는 작약도에/ 소녀들이 작약꽃처럼 피어// 갈매기 소리없는 서해에/ 소녀들은 바다의 갈매기// 소녀들의 바다는/ 진종일 해조음만 가득찬 소라의 귀// 소녀들은 흰 에이프런/ 귀여운 신부// 밥짓기가 서투른 채/ 바다의 부엌은 온통 노래소리// 해미(海味)가에 흥겨우며/ 귀여운 신부와/ 한 백년 이렁저렁 소꿉놀이// 어느새/ 섬과/ 바다와/ 소녀들은 노을 활활 타는 화산불// 인천은 밤에 잠들고/ 소녀들의 눈은 어둠에 반짝이는 별, 별빛// 배는 해각(海角)에 다가서는데/ 소녀들의 노래는 // 선희랑 민자랑 해무(海霧) 속에 사라져/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안녕/ 또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

상달 / 한하운
가을 들판에/ 이삭들이 익으면/ 황금의 왕국// 흙의 영가는/ 조국 산신(産神)에/ 상달 풍년 고사인데// 굶주림을 허리끈으로/ 양식삼아 졸라매던// 보리고개 보리고개/ 눈물이 도네// 이제 풍양한/ 황금의 왕국은/ 연가(戀歌)가 에헤라 데헤라//

여인 / 한하운
눈여겨 낯익은듯한 女人(여인)하나/ 어깨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가를 거나리고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살 남직한 저女人(여인)은/ 뒷모양 걸음거리 하며 몸맵시 틀림없는 저…… 누구라/ 할까…….// 어쩌면 엷은 입술 혀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 아슬 눈감길 듯 떠오르는 追憶(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보지?//

山가시내 / 한하운
산 두메/ 하 좁아// 앞 뒤 산을/ 빨래줄 치네// 울 아범/ 뭐 보고// 이 산골에/ 사나// 나이 찬 가시내는/ 뻐꾹새 울면// 머릿채 칠렁이어/ 숨만 가쁘네//

정말 / 한하운
법 조문이 무엇인가/ 자유가 무엇인가/ 인생도 알듯 하는데// 산천초목은 엽록소 싱싱하게 푸르러/ 하늘과 바닷빛/ 아스라한 하늘 끝간 데// 영원에서/ 영원으로// 생명이 넘쳐 흐르고......//

인간행진 -제16회 세계 나병의 날에 / 한하운
못살아서가 아니다./ 짐승같이 산다고 해서가 아니다.// 세상은 혼자들만 잘들 살고 있는데 너무하지 않은가.// 문둥이도 이 땅에 태어난/ 이 나라 이 민족인데// 인간이라는/ 민족이라는 연대의식을 외면하고/ 짐승으로만 눌러놓고/ 언제까지나 굶주림과 학대에 죽게 할 것인가.// 우리는 종이 쪼가리 인간.// 문서상의 완치/ 서류상의 사회복귀.// 오늘만이라도/ 인간임을 확인하는/ 인간에의 소원은// 우리도 인간다운 생활할 권리가 있다./ 이 인권보장은 국가에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종이 쪼가리 인간./ 진정/ 인간선언을 우리 힘으로/ 인간선언의// 나해방을 우리 힘으로// 우리의 파워/ 인간 행진의 성난 파도소리 아우성 소리./ 나해방의 대열은 간다./ 우리 인간 행진은 간다.//

곡(哭), 육영수여사 영전(靈前)에 / 한하운
육 여사님/ 님은// 무지개 찬란한 민족중흥의 희망으로/ 이 천지 안 가시는 곳 없이 다니시며/ 가시는 걸음걸음/ 외로운 사람을/ 가난한 사람을/ 슬픈 사람을/ 병든 사람을/ 유달리 사람들이 꺼리는/ 문둥이촌을 찾으시며/ 나환자의 손을 손을 잡고// 뻔질나게 보내는 편지에 일일이 답을 쓰시고/ 성가시게 달라고만 하는 나환자들의 염치 없음에도/ 언제나 미소로써 도와주시기만 하고/ 나환자의 일이라면 사양치 않으시고/ 문둥이촌을 언제나 찾아 삶을 주신/ 이 지고하고 지순한 대자비심은// 한국인으로서 아니 세계의 어느 누가 이런 일을 하신 분이 있었던가/ 오직 님만이 하셨던 일이 아니겠습니까/ 님은 정말로 행복의 천사로/ 이 나라 이 겨레가 우러러보는/ 영원한 여인상이었습니다// 영원한 여인상이시여/ 이런 님을 저 붉은 마수의 흉탄으로/ 돌아가시게 하다니/ 이 분함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이 나라 이 겨레의 국모님이/ 영영 저 세상으로 가시다니/ 님이시여, 님이시여// 여러 발의 총소리에도 놀라시지 않고/ 태연히 홀로 앉아 계시는 님의 모습은/ 정말로 성스럽고 숭고한 모습임을/ 이 나라 이 겨레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아 님이시여, 순국한 님이시여/ 지금 님이 없는 이 산하는/ 한 떨기의 꽃도 피어 있는 것 같지 않고/ 한 마리의 새도 우짖지 않는/ 아득한 강산이요// 님은/ 흰 목련꽃처럼 우아하셨읍니다./ 또 흰 학처럼 청아하셨습니다/ 님은 이렇게 산하를 차지하셨읍니다./ 지금 학처럼/ 저 永劫(영겁)의 하늘로 승천하셨읍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님이시여// 님께서 차지하신 이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합니까/ 영영 채울 수 없는 이 빈자리에/ 이 겨레의 눈물과 곡소리로 갑니다만/ 울어도 울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아픈 가슴을 어찌하여야 합니까// 님께서 생전에/ 우리에게 성실하게 살라/ 참된 국민이 되라/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라는 교훈이/ 지금 뼈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님의 유덕을 잊을 길 없어/ 또 님을 영원히 그리는 일을 다지려고/ 이 땅의 나환자들이/ 이렇게 님의 명복을 빌고 있습니다// 삼가 님의 유영(遺影) 앞에 엎드려/ 학처럼 영겁의 나라로 승천하신/ 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님이시여/ 님이시여, 영원한 여인상이시여//

 



한하운(韓何雲, 1920년~1975년) 시인
함경남도 함흥군 덕천면 쌍봉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태영(泰永)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이리 농림학교와 베이징 대학 농학원을 졸업하였다. 1943년 나병으로 귀국하여 함경남도·경기도 도청 등에서 근무하다, 1945년 나병이 재발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1948년 월남하여 방랑생활을 하며 병을 고쳐, 1950년 부평 성계원과 신명보육원을 창설하였다. 1954년 대한 한센 연합 위원장을 지냈다. 시집으로 《한하운 시초(詩抄)》, 《보리피리》, 《한하운시전집》이 있고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와 자작시 해설집 《황토(黃土) 길》을 냈다. 자신의 천형(天刑)의 병고를 구슬프게 읊은 그의 시는 애조 띤 가락으로 하여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일생 끊임없이 나병 환자를 위한 투쟁을 진행하였으며, 정부에 의해 나병 환자 중심으로 진행되던 소록도 간척사업이 중단되었을 때는 정부를 비판하는 등 활동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한하운 온라인 문학관

시인 한하운의 생애,작품,연구논문 등을 소개하는 온라인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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