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코쥐코 / 박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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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1. 9. 8.

사람은 다면체 존재다. 앞모습이 다르고 뒷모습이 다르다. 빛을 받을 때 모습이 다르고 응달에 있을 때 모습이 다르다. 마음이나 인격도 겉모습처럼 상황에 따라 팔색조가 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우리는 그걸 가끔 잊고 산다.

의사로부터 백혈병이란 선고를 받은 남편을 입원시킨 날 그녀를 만났다. 반쯤 나간 정신을 겨우 가누며 입원실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보호자가 침대에 앉아 커다란 천에 수를 놓고 있었다. 느닷없이 전학을 온 학생처럼 병실을 둘레거리는 우리를 보고 오랜 친구를 마중하듯 수틀을 던지고 짐을 받아 주었다. 조신하게 수를 놓는 친절한 여자가 처음 본 그녀의 단면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일 년 전에 골수이식을 했다가 재발이 된 환자였다. 골수이식만 하면 완치가 되는 줄 알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다시 항암치료를 받고 골수이식을 해야 하는 첩첩산중 같은 치료가 그들 내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가지의 투병이 공염불이 되었으니 절망스럽기도 하련만 그녀는 어디에도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백혈병 환자라도 중증이 아니라면 보호자가 이십사 시간 붙어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예 병원에서 먹고 잤다. 집에는 먹을거리를 장만하러 주말에 잠깐 들릴 뿐이었다. 집에서 돌아와서는 세상에 돌아다니는 온갖 가십들을 이바지처럼 들고 와 풀어놓았다. 병원생활에도 이력이 붙어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모르는 게 없었다. 수를 놓는 틈틈이 고방에를 들락거리는 쥐처럼 병원에서 생겨난 일을 물어 날랐다. 입 운동을 하든지 남의 일에 참견을 하든지 잠시도 쉬지 않는 그녀가 신기했다. 수를 놓고 있는 조신한 그녀와는 생판 다른 누군가가 그녀 안에 있는 듯했다.. 환자나 보호자나 지쳐있는 병실에서 그녀만 팔팔하게 나부댔다. 수다스러운 모습이 그녀의 또 다른 단면이었다.

병실에서는 환자든 보호자든 남아도는 게 시간이다. 시간이 겨워도 텔레비전은 건성으로 보게 되고, 책을 읽는 건 더더구나 어렵다.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병실에서는 간호사와 보호자만 들락거려도 신경 가는 일이 많은데 문병객까지 숫자를 보태니 조용할 새가 별로 없다. 어쩌다 조용하다 싶으면 위중한 환자가 내는 신음소리에 마음이 심란했다. 환자는 고통을 견디느라, 보호자는 무료함을 견디느라 입원실의 하루는 이틀처럼 지루했다.

당연히 병실 사람들은 그녀가 물어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간밤에 발령되었던 코드 블루 환자가 기어이 사망했다는 소식도 그녀로부터 들었다. 병원에서 퍼지고 있는 전염병에 관한 소식을 물어오는 것도 그녀였다. 환자들에게 다른 사람의 사망 소식은 남의 일이 아니다. 병실 환자 대부분이 면역세포가 부족하여 먹는 것도, 숨 쉬는 것도 자유롭지 못했다. 가능하면 공기도 삶아서 숨을 쉴 판이었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투병생활과 모든 사물이 병균일 수 있다는 보이지 않는 벽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환자들에게 전염병에 관한 소식은 죽음의 메신저 같았다. 저승사자가 문 밖에 서서 이제나저제나 데려갈 시간을 재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은 고약했다. 그런데도 부지런히 소식을 물어들이고 병실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이런 그녀를 남편과 나는 ‘개코쥐코’라고 불렀다. ‘개코쥐코’라는 별명에는 말이 많음을 비아냥하는 뜻이 담겨 있다. 말이 한 곳에 오래 머물지를 못하고 이곳저곳을 회오리같이 떠돌며 북데기를 일으키는 것도, 잘 나가는 연예인을 하루아침에 풍전낙화(風前洛花)를 만드는 것도, 이러쿵저러쿵하는 저런 여자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을 섞지 않는 것으로 못마땅한 마음을 대신했다.

말로 참견하는 것과 행동으로 참견하는 것은 다르다. 못마땅해하는 내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그녀는 과히 병실 안의 대모였다. 새로 입실하는 환자에게는 도우미를, 보호자가 자리를 비운 환자에게는 간병인을 자청했다. 빡빡 깎은 민머리에 퀭한 눈을 하고 있는 남자 환자들이라 꺼릴 만도 한데 익숙한 손길로 수발을 들었다.

어느 날 그녀의 남편에게서 병이 악화되는 증세가 나타났다. 그녀는 종일 입을 다물고 수를 놓았다. 입을 다무니 궁금했다. 그녀가 놓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주기도문과 반야심경이었다. 주기도문은 기독교 신자가 하는 기도이고 반야심경은 불교신자가 하는 기도가 아닌가. 그녀에게는 따로 믿는 종교가 없었다. 불교신자도 기독교신자도 아니면서 상극으로 여기는 두 종교의 기도문을 한 땀 한 땀 수를 놓고 있다니!

남편이 아프고부터 그녀는 기도를 하고 싶었지만 어디에다 어떻게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해봤지만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여 그만두었다. 그러다 생각난 게 수였다. 펼쳐놓은 여러 폭의 흰 천에서 고물고물 글들이 살아 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 글자들이야말로 진정한 기도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죽음도 면역이 생기면 담담히 바라보게 된다고 했다. 굳이 나쁜 소식을 환자들에게 전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는 말에 ‘개코쥐코’라고 낮춰본 것이 되레 켕겼다. 병원에서 수없이 목격하는 게 죽음이다. 그때마다 두려움을 느끼면 스트레스만 쌓이지 않겠냐고 하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또 다른 면이 나를 기죽게 했다.

사실이 그랬다. 죽음에 대하여 나도 남편도 감정이 무디어 있었다. 그녀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물어올수록 마음에 이는 파문은 반비례로 줄어들었다. 야박한 현실을 이겨내는 방법은 강해지는 최선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남편을, 병실 안의 환자들을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단련했다. 때와 장소에 따라 말의 소용이 달라진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화장실에서 눈이 퉁퉁 부어 돌아오는 그녀 마음을 죄다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시시각각 남편을 떠나보내야 하는 시각이 다가온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며칠 뒤 그녀의 남편이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내려간 지 사흘 만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간호사로부터 들었다. 그녀는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개코쥐코’는 다시 돌아왔다. ‘개코쥐코’가 된 내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