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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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9. 14.

달은 추억의 반죽덩어리 / 송찬호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려가는 달빛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 송찬호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 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 물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 머나먼 비단길을 구부려 낙타등을 만들어 타고 가고/ 입벌린 나팔꽃을 구부려 비비꼬인 숨통과 식도를 만들고/ 검게 익어가는 포도의 혀끝을 구부려 죽음의 단맛을 내게 하고/ 여자가 몸을 구부려 아이를 만들 동안/ 굳은 약속을 구부려 반지를 만들고// 오랜 회유의 시간으로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놓았다/ 말을 구부려 상징을 만들고/ 달을 구부려 상징의 감옥을 만들고/ 이 세계를 둥글게 완성시켜 놓았다// 달이 둥글게 보인다/ 달이 빛나는 순간 세계는 없어져 버린다/ 세계는 환한 달빛 속에 감추어져 있다// 달이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듯/ 정교한 말의 장치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오랫동안 말의 길을 걸어와/ 처음 만난 것이 인간이다/ 말은 이 세계를 찾아온 낯선 이방인이다/ 말을 할 때마다 말은 이 세계를 낯설게 한다//

구두 / 송찬호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 넣어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 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분홍 나막신 / 송찬호
님께서 새 나막신을 사 오셨다/ 나는 아이 좋아라/ 발톱을 깍고/ 발뒤꿈치와 복숭아뼈를 깎고/ 새 신에 발을 꼬옥 맞추었다// 그리고 나는 짓찧어진/ 맨드라미 즙을/ 나막신 코에 문질렀다/ 발이 부르트고 피가 배어 나와도/ 이 춤을 멈출 수 없음을 예감하면서/ 님께서는 오직 사랑만을 발명하셨으니//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 송찬호
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 버린다 간단한/ 외과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다/ 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간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단단한 장미의 외곽을 두드려 깨는 은은한 포성의 향기와/ 냉장고 속 냉동된 각진 고기 덩어리의 식은 욕망과/ 망각을 빨아들이는 사각의 검은 잉크병과/ 책을 지우는 사각의 고무지우개들// 오래 구르던 둥근 바퀴가 사각의 바퀴로 멈추어서듯/ 죽음은 삶의 형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미래를 예언하듯 그의 땅에 꽃을 던진다/ 미래는 죽었다 산 자들은 결코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얼마나 찬란한 한계인가/ 그 완성을 위하여/ 세계를 죽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날마다 살인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은// 폐허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망각 속에서 우리가 살인자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풍성한 과일을 볼 때마다/ 그의 썩은 얼굴을 기억하듯// 여기 그가 잠들다/ 여전히 겨울비는 내리고/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봄날 / 송찬호
봄날 우리는 돼지를 몰고 냇가에 가기로 했었네/ 아니라네 그 돼지 발병을 했다 해서/ 자기의 엉덩짝살 몇 근 베어 보낸다 했네// 우린 냇가에 철판을 걸고 고기를 얹어 놓았네/ 뜨거운 철판 위에 봄볕이 지글거렸네 정말 봄이었네/ 내를 건너 하얀 무명 단장의 나비가 너울거리며 찾아왔네/ 그날따라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더없이 향기로웠네// 이제, 우리들 나이 불혹이 됐네 젊은 시절은 갔네/ 눈을 씻지만, 책이 어두워 보인다네/ 술도 탁해졌다네// 이제 젊은 시절은 갔네/ 한때는 문자로 세상을 일으키려 한 적 있었네/ 아직도 마비되지 않고 있는 건 흐르는 저 냇물뿐이네/ 아무려면, 이 구수한 고기 냄새에 콧병이나 고치고 갔으면 좋겠네// 아직 더 올 사람이 있는가, 저 나비/ 십리 밖 복사꽃 마을 친구 부르러 가 아직 소식이 없네/ 냇물에 지는 복사꽃 사태가 그 소식이네// 봄날 우린 냇가에 갔었네, 그날 왁자지껄/ 돼지 멱따는 소린 들리지 않았네/ 복사꽃 흐르는 물에 술잔만 띄우고 돌아왔네//

봄날을 가는 山經 / 송찬호
이그, 저기 가는 저것들 또 산경 가자는 거 아닌가/ 멧부리를 닮은 잔등 우에 처자를 태우고/ 또랑물에 적신 꼬리로 휘이 훠이 마른 들길을 쓸고 가고 있는 牛公이// 어깻죽지 우에 이름난 폭포 한 자락 걸치지도 못한/ 저 비루먹은 산천이 막무가내로 봄날 산경 가자는 거아닌가/ 일자무식 쇠귀에 버들강아지 한 움큼 꽂고 웅얼웅얼 가고 있는 저 풍광이// 세상의 절경 한 폭 짊어지지 못하고 춘궁을 넘어가는/ 저 비탈의 노래가 저러다 정말 산경의 진수를 찾아 들어가는 거 아닌가/ 살 만한 땅을 찾아 저렇게 말뚝에 매인 집 한 채 뿌리째 떠가고 있으니/ 검은 아궁일 끌어 묻고 살 만한 땅을 찾아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저 신선 가족이 가고 있으니//

봄밤 / 송찬호
낡은 봉고를 끌고 시골 장터를/ 돌아다니며 어물전을 펴는/ 친구가 근 일 년 만에 밤늦게 찾아왔다/ 해마다 봄이면 저 뒤란 감나무에 두견이 놈이 찾아와서/ 몇 날 며칠을 밤새도록 피를 토하고 울다 가곤 하지/ 그러면 가지마다 이렇게 애틋한 감잎이 돋아나는데/ 이 감잎차가 바로 그 두견이 혓바닥을 뜯어 우려낸 차라네/ 나같이 쓰라린 인간/ 속을 다스리는 데 아주 그만이지/ 친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옳아, 그 쓰린 삶을 다스려낸다는 거!/ 눈썹이 하얘지도록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다 새벽 일찍/ 그 친구는 상주장으로 훌쩍 떠나갔다/ 문 가에 고등어 몇 마리 슬며시 내려놓고//

가을 / 송찬호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 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이 여태 거기서 뭐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 가지 않구, 다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만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겨울 / 송찬호
이것은 겨울과의 계약서예요/ 죽은 정원을 하나 샀죠/ 그리고는 서둘러 실내로 뛰어들어 왔어요// 겨울은 아무래도 따뜻한 난로곁/ 이야기의 계절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가끔씩 지금이 겨울임을/ 망각하고 이렇게 묻곤 하지요/ 우리집 풍자諷刺는/ 왜 자라지 않는 거죠?// 이번 겨울은 참으로 길어요/ 웃고 떠들다 지쳤는지 이제 아이들은/ 눈트는 씨앗의 입구에 몰려가 있어요// 창 밖 정원은 여전히 잠들어 있어요/ 나는 잠시 망치질을 멈추고/ 깊은 상념에 잠겨있어요/ 꽃피고 새 우는 상자/ 이것의 손잡이를 어디다 붙일까/ 생각해야겠기에//

눈사람 / 송찬호
내가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열차에 뛰어올랐을 때/ 내 옆자리 창가에/ 눈사람이 앉아 있었다// 찌는 듯한 한여름인데도 눈사람은 더워 보이지 않았다/ 겨울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땀도 흘리지 않았다// 눈사람의 모습은 뭐랄까/ 기나긴 겨울전쟁에서 패하고/ 간신히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상이군인 같았다/ 어느 해 겨울 선거에 패하고 흰 붕대를 하고 다니던 사람들 모습의,// 눈사람은 나를 향해 한 번 희미하게 웃는 듯했다/ 찌는 듯 더워도/ 그의 흰 피가 흘러내려/ 의자의 시트를 더럽히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이상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열차는 한 여름 밤/ 자정을 향해 끝없이 달렸다// 얼마쯤 달렸을까 깜빡 졸다 깨어보니/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는 어디쯤에서 내린 걸까/ 털모자나 목도리 하나 남겨두지 않고//

촛불 / 송찬호
촛불도 없이 어떤 기적도 생각할 수 없이/ 나는 어두운 계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난 춥고 가난하였다 연신 파랗게 언 손을 비비느라/ 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손을 비비고 있었을까/ 그때 정말 기적처럼 감싸쥔 손 안에 촛불이 켜졌다/ 주위에서 누가 그걸 보았다면, 여전히 내 손은 비어있고 어둡게 보였겠지만/ 젊은 날, 그때 내가 제단에 바칠 수 있던 건/ 오직 그 헐벗음뿐, 어느새 내 팔도 훌륭한 양초로 변해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어깨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무거운 촛대를 얹고//

촛불 / 송찬호
캄캄한 그들이 다시 왔나이다 그들에 의해,/ 밤이 불려왔나이다/ 불려와 무릎 꿇어졌나이다/ 캄캄한 칼로 밤을 내리쳤나이다// 상수리나무 열매는/ 그리 되게 하사,/ 단단한 돌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나이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나이다/ 밤이 둘로 쪼개졌나이다// 희미한 빛에 사로 잡혀,/ 촛불은 둘로 쪼개졌나이다/ 뜨거운 촛농이 흘러내렸나이다// 금단추가 굴러 왔나이다/ 돌잉어도 헤엄쳐 왔나이다/ 희미한 빛이 시종이 되게 하사,/ 캄캄한 그들이 왔나이다//

접시라는 이름의 여자 / 송찬호
한때는 저 여자도 불의 딸이었다/ 불꽃이 그녀의 일생일 줄만 알았고/ 사랑만이 오직 불순물처럼/ 그녀의 일생에 끼여들 것으로 알았다.// 여자는 언제나 열심히 접시를 닦는다/ 거품 속에서 여자는 잠시 행복해진다/ 거품 속에서 잃어버린 반지를 찾은 것처럼,/ 접시의 당초무늬가 퉁퉁 불은 그녀의 손을 어루만진다// 그런 그녀가 잠시 외출 나와 창가의/ 내가 즐겨 앉는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보았다 잠시 나는 점잖게 미소만 띄워보냈다// 여자의 손톱 밑에서 양파 냄새가 배어나오고/ 설사 그녀가 읽는 책 속에서 내가 싫어하는 카레 요리가/ 쏟아져나온다 했을지라도 그렇게 나는 미소만 띄워보냈을 뿐이다.// 여느 성미 급한 손님처럼/ 종업원을 불러 이렇게 소리치지도 않았다/ 여기 이 먹다 버린 지저분한 접시 좀 빨리 치워주시지 않겠습니까?/ 단지 나는 맞은편에 조용히 다가가/ 넌지시 이렇게 속삭였을 뿐이다/ 부인, 지금 집에서는 위급 상황이 발생했답니다// 오후 여섯시, 마요네즈 군대가 쳐들어온다/ 토마토 군대가 쳐들어온다/ 그 끔찍한 남편과 아이들이 쳐들어온다//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 송찬호
이 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습니다/ 병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황홀합니다/ 이름 모를 꽃과 새들 나무와 숲들 병든 세계에 끌려 헤매다 보면/ 때로 약 먹는 일조차 잊고 지내곤 한답니다/ 가만, 땅에 엎드려 귀 대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세상의 시험에 실패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번씩 세상에 나아가 실패하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리우면 당신들의 세상 가까이 내려갔다/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지난번 보내 주신 약 꾸러미 신문 한 다발 잘 받아 보았습니다/ 앞으로 소식 주지 마십시오/ 병이 깊을 대로 깊어 이제 약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병든 세계를 헤매다 보면/ 어느덧 사람들 속에 가 있게 될 것이니까요//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 송찬호
우리집에는 아주 오래된 얼룩이 있다/ 닦아도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 누런 냄새, 누런 자국의,//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그 건망증이다/ 바스락바스락 건망증은 박하냄새를 풍긴다/ 얘야 이 사탕 하나 줄까, 아니에요. 할머니./ 할머닌 벌써 십 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만년필 / 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꽃밭에서 / 송찬호
탁란의 계절이 돌아와, 먼 산 버꾸기 종일 울어댄다/ 채송화 발톱 깎아주고 맨드라미 부스럼 살펴보다/ 누워있는 아내의 입은 더욱 가물다 혀가 나비처럼 갈라져 있다/ 오후 한나절 게으름을 끌고 밭으로 나갔으나 우각牛角의 쟁기에/ 발만 다치고 돌아오다/ 진작부터 곤궁이 찾아온다 했으나 마중 나가진 못하겠다/ 개와 고양이들 지나다니는 무너진 담장도 여태 손보지 않고/ 찬란한 저 꽃밭에 아직 생활의 문도 세우지 못했으니// 비는 언제 오나/ 얘야, 빨래 걷어야겠다/ 바지랑대 끝 뻐꾸기 소리 다 말랐다//

두꺼비형 / 송찬호
비 온 다음 날/ 엉금엉금 두꺼비가 기어 나와/ 마당 한가운데서 나랑 딱 만났다// 두꺼비와 나는/ 누가 먼저 길 비켜주나/ 내기했다// 그런데 두꺼비 얼굴을 찬찬히 보니/ 울퉁불퉁한 게/ 여드름 많은/ 우리 형처럼 생겼다// 에이, 형이라면 내가 지지 뭐/ 두꺼비 앞에서/ 내가 길을 비켜주었다//

나비 / 송찬호
나비는 순식간에/ 째크 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의 도망이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내었다//

상어 / 송찬호
내가 상어를 만난 곳은/ 전망 좋은 바닷가 카페/ 뻬떼루 삐떼루였어/ 상어는 깜깜한 바닷속 제5공화국에서 태어나/ 침몰한 유물선에서 흘러나온/ 금화를 주워 놀며/ 뻘밭에서 자랐다 했어/ 육지를 동경하여/ 양치식물로 사슴을 쫓고/ 공성(攻城)의 돌들이 날아가는 투석기 옆을 지나/ 붉은곰이 편백나무를 잡아먹는/ 야만의 오지까지 여행한 적도 있다고 했어/ 또 자신은 회고주의자여서/ 먼 대륙에서 잠자는 돌의 심장과/ 죽은 분화구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했어/ 내가 말했지, 그럼 육지로 올라와 나와 같이 살자/ 바다와 육지가 평등해진다면!/ 아니, 육지가 바다라면!/ 상어는 이를 하얗게 드러내 보이며 웃었어/ 우리는 바다의 유리잔에 포도주를 채웠어/ 나는 상어에게 스카프를 선물했지/ 그런데, 이게 바로 신의 장난 아닐까/ 하필 그때 웬 훼방꾼이 나타나/ 아니 바다가 왜 거꾸로 걸려 있지?/ 하고 벽에 걸려있는 액자를 되돌려 놓은 것이/ 상어는 얼른 바다로 뒤돌아갔어/ 꼬리지느러미에 매어준 스카프는 물에 젖어 풀리지는 않을까/ 언젠가 초대하여 보여준다던/ 상어의 정원은/ 바닷속 얼마나 깊은 곳에 있을까/ 나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어/ 사랑의 맹세란 유리잔같이 깨지기 쉬운 것/ 바다의 포도주는 아직 이렇게 많이 남아 있는데/ 이런 생각이 오래 떠나지 않았어/ 포말로 스러져가는/ 물방울무늬 스카프보다/ 차라리 영원을 속박하는 튼튼한 그물이나 준비해 던져 볼 걸//

고래의 꿈 / 송찬호
나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 언젠가 고래를 만나면 그에게 줄/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다// 깊은 밤 나는 심해의 고래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이 동료를 부르거나 먹이를 찾을 때 노래하는/ 길고 아름다운 허밍에 귀 기울이곤 한다/ 맑은 날이면 아득히 망원경 코끝까지 걸어가/ 수평선 너머 고래의 항로를 지켜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한다 고래는 사라져버렸어/ 그런 커다란 꿈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바다의 목로에 앉아 여전히 고래의 이야기를 한다/ 해마들이 진주의 계곡을 발견했대/ 농게 가족이 새 펄집으로 이사를 한다더군/ 봐, 화분에서 분수가 벌써 이만큼 자랐는걸.....// 내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 내일은 5마력의 동력을/ 배에 더 얹어야겠다 깨진 파도의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겠다/ 저 아래 물밑을 쏜살같이 흐르는 어뢰의 아이들 손을 잡고 해협을/ 달려봐야겠다// 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오랜 꿈이 있다/ 하얗게 물을 뿜어올리는 화분 하나 등에 얹고/ 어린 고래로 돌아오는 꿈//

오동나무 / 송찬호
나는 아직도 오동나무를 찾아갔던 그때의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그때 나는 너무도 시를 쓰고 싶었다/ 그리하여 오동나무와의 인사는 아름드리 그 허리를 한 번 안아보는 것// 근처에서는 딸기나무 관리인인 검은 염소가/ 청동의 고삐를 잃어버린 것일까,/ 온통 딸기나무밭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오동나무는 말했다 나무 위쪽으론 빠끔한 하늘을/ 그냥 흑판으로 쓰는 작은 산비둘기 학교가 있고 발 아래/ 뿌리가 뻗어나간 곳까지 일궈놓은 십여평의 그늘이 그의 삶의 전부라고// 그 말을 들어서일까 나무 아래 앉아 먹는/ 청태의 그늘을 뜯어 누른 오동나무 막국수가 얼마나 맛있었던지/ 그리고 오동나무 따님이 내온 냉차는 얼마나 시원하던가// 그때 계절은 참으로 치열했었다/ 염소의 두 뿔과 붉은 딸기가 얼마나 범벅이었는지/ 냇가에서는 돌과 잉어의 배가 얼마나 딴딴해 졌는지// 지금도 나는 언덕 위 그 오동나무를 기억하고 있다/ 다리 건너 입구의 오동나무 우체통, 현관 앞 오분씩 늦게 가는 오래된 오동나무 괘종시계/ 진흙이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던 오동나무 구두, 부엌 쪽 오동나무 도마소리……//

사과 / 송찬호
여기 이 붉은 곳은 사과의 남쪽, 홍수의 개미들이 위태하게 건너가는 저 녹슨 철사줄은 사과의 적도, 그리고 물컹하게 썩어가는 여기 이 곳이 사과의 광대뼈// 이제 허리 구부러진 저 늙은 사과나무의 무릎에서 사금을 캐지 말자 탈옥의 휘파람을 불지 말자 생의 달콤함을 훔쳐 달아나던 팔월의 사과도 저렇게 붉은 조끼 한 벌로 포박돼 가지 끝에 매달려 있으니// 부카치카 부카치카, 벌판으로 달려와 허공으로 앞머리를 번쩍 쳐든 바람의 하모니카 여기는 더 이상 갈 곳 없는 개망초 나라, 가쁜 숨을 헐떡이며 망촛대 몇 단 부러뜨려 침목으로 베고 누운 곳, 물 한그릇 떠놓을 성소조차 없는 이곳은 사과의 뒤편// 여기쯤 파란대문이 서 있었겠다 이 문으로 사내들은 진귀한 낙타눈썹을 찾아 사막으로 떠나고 얼굴 검은 여자들이 태양의 분을 바르고 십리를 걸어 마마와 기근을 영접했겠다 그래도 여길 다시 한 번 보아라 돌로 쌓은 여뀌즙 사랑은 여전히 물고기눈을 찌르고 갈라진 시멘트 틈에서도 아이들은 분수처럼 솟고 천 일의 밤을 팔아 아침 한 때를 맞이하리니,// 누군가 한 입 베어먹고 멀리 던져버린 여기는 사과의 궁전//

늙은 산벚나무 / 송찬호
앞으로 늙은 곰은 동면에서 깨어나도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는기라/ 동굴에서 발톱이나 깎으며 뒹굴다가/ 여생을 마치기로 했는기라// 그런데 또 몸이 근질거리는기라/ 등이며 어깨며 발긋발긋해지는기라/ 그때 문득 등 비비며 놀던 산벚나무가 생각나는기라// 그때 그게 우리 눈에 딱, 걸렸는기라/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등 비비며 놀다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곰은 산벚나무 뒤로 숨고 산벚나무는 곰 뒤로 숨어/ 그 풍경이 산벚나무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우리는 한동안 산행을 멈추고 바라보았는기라/ 중동이 썩어 꺾인 늙은 산벚나무가/ 곰 발바닥처럼 뭉특하게 남아있는 가지에 꽃을 피워/ 우리 앞에 내미는기라//

민들레역 / 송찬호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에 있다/ 고삐가 매여 있지 않은 기관차 한 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기저기/ 철로변 꽃을 따먹고 있다/ 에구, 이 철없는 쇳덩어리야,/ 오목눈이 울리는 뻐꾹새야/ 쪼르르 달려나온 장닭 한 마리 기관차 머릴 쪼아댄다/ 민들레 여러분, 병아리양말 무릎까지/ 끌어올렸어요? 이름표 달았어요?/ 네, 네, 네네네 자 그럼 출발!/ 민들레는 달린다 종알종알 달린다/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

찔레꽃 / 송찬호
그해 봄 결혼식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섭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 수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 빛 사기 희미한데,//

채송화 / 송찬호
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을 쪼그려 앉아야 한다/ 책 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 구두 한 짝/ 깨진 조각 거울이 그곳의 가장 커다란 호수/ 고양이는 고양이수염으로 포도씨만 한 주석을 달고/ 비둘기는 비둘기 똥으로 헌사를 남겼다/ 물뿌리개 하나로 뜨락과 울타리/ 모두 적실 수 있는 작은 영토/ 나의 책에 채송화가 피어 있다//

코스모스 / 송찬호
지난 팔월 아라비아 상인이 찾아와/ 코스모스 가을신상품을 소개하고 돌아갔다/ 여전히 가늘고 긴 꽃대와 석청 냄새가 나는 꽃은/ 밀교에 더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헌데 나는 모가지가 가는 꽃에 대해서는 오래 바라보다/ 반짝이는 조약돌 하나 얹어두는 버릇이 있다 코스모스가 꼭 그러하다/ 가을 운동회날 같은 아침 조무래기 아이들 몇 세워놓고/ 쉼없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저 근육없는 무용을 보아라// 이제 가까스로 궁티의 한 때를 벗어난 오후,/ 젊은 날은 아름답다 코스모스 면사무소 첫 출근날/ 첫 일과가 하늘아래 오지의 꽃밭을 다 세는 일이었던,/ 스물 한 살 지방행정서기보// 바람의 터번이 다 풀렸고나 가을이 길어간다/ 대체 저 깊고 푸른 가을 하늘의 통점은 어디쯤인가/ 나는 오늘 멀리 돌아다니던, 생활의 관절/ 모두 빠져나간 무릎 조용히 불러 앞세우고/ 코스모스길 따라 뼈주사 한 대 맞으러 간다//

칸나 / 송찬호
드럼통 반 잘라 엎어놓고 칸나는 여기서 노래를 하였소/ 초록 기타 하나 들고 동전통 앞에 놓고/ 가다 멈춰 듣는 이 없어도 항상/ 발갛게 목이 부은 칸나/ 그의 로드 매니저 낡은 여행용 가방은/ 처마 아래에서 저렇게 비에 젖어 울고 있는데// 그리고 칸나는 해질녘이면 이곳 창가에 앉아/ 가끔씩 몽롱 한 잔씩을 마셨소/ 몸이 이미 저리 붉어/ 저녁노을로 타닥타닥 타고 있는데// 박차가 달린 무거운 쇠구두를 신고 칸나는/ 세월의 말잔등을 때렸소/ 삼나무숲이 휙휙 지나가 버렸소/ 초록 기타가 히히힝, 하고 울었소/ 청춘도 진작에 담을 넘어 달아나 버렸소/ 삼류 인생들은 저렇게 처마 밑에 쭈구리고 앉아 初老를 맞는 법이오// 여기 잠시 칸나가 있었소/ 드럼통 화분에 잠시 칸나가 있다 떠났소/ 하룻밤 노루의 피가 자고 간, 칸나의 붉은 아침이 있었소//

동백 / 송찬호
어쩌자고 저 사람들/ 배를 끌고/ 산으로 갈까요/ 홍어는 썩고 썩어/ 술은 벌써 동이 났는데// 짜디짠 소금 가마를 싣고/ 벌거숭이 갯망둥이를 데리고/ 어쩌자고 저 사람들/ 거친 풀과 나무로/ 길을 엮으며/ 산으로 산으로 들까요// 어느 바닷가,/ 꽃 이름이 그랬던가요/ 꽃 보러 가는 길/ 산경으로 가는 길// 사람들/ 울며 노래하며/ 산으로 노를 젓지요/ 홍어는 썩고 썩어/ 내륙의 봄도 벌써 갔는데// 어쩌자고 저 사람들/ 산경 가자 할까요/ 길에서 주워/ 돌탑에 올린 돌 하나/ 그게 목 부러진 동백이었는데//

동백이 활짝 / 송찬호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나, 동백꽃 보러 간다 / 송찬호
거긴 혁명가들이 우글우글 하다더군/ 오천 원짜리 음료수 티켓만 있으면/ 따뜻한 창가에 앉아/ 불타는 얼음 궁전을 볼 수 있다더군/ 거긴 백지만 한 장 있으면/ 연필 끝에서 연애가 생기고/ 아직도 시로 빵을 구울 수 있다더군/ 어느 유명한 사상가의 회고록도/ 거기도 집필됐다더군/ 고요한 하오에는 붉은 여우가/ 소리 없이 정원을 지난다더군/ 길의 방향은 다르지만, 폭주족들의/ 인생목표도 결국 거기라더군/ 그리고 거기는 여전히 아름다운/ 장례의 풍습이 남아 있다더군/ 동남풍/ 바람의 밧줄에/ 모가지를 걸고는/ 목숨들이 송두리째/ 뚝, 뚝 떨어져내린다더군/ 나, 면회 간다/ 동백 교도소로//

토란잎 / 송찬호
나는, 또르르르......물방울이 굴러가 모이는 토란잎 한가운데, 물방울 마을에 산다 마을 뒤로는 달팽이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작은 언덕길이 있고 마을 동남쪽 해뜨는 곳 토란잎 끝에 청개구리 청소년수련원의 번지점프 도약대가 있다// 토란잎은 비바람에 뒤집혀진 우산을 닮았다 그래도 토란잎 대궁아래 서면 비가림 정도는 충분하다 한번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던 군인이 하늘에서 길을 잃고 토란잎에 착지한 적 있다 나는 그와 함께 초록뱀이 짧게 발등을 스치고 지나간 청춘의 오솔길에 대해 오래 이야기 하였다// 바람이 없어도 때로 토란잎은 온몸을 흔들며 경련을 한다 어디든 삶의 격절과 단층은 있는가보다 그럴 때마다 물방울들은 의자나 기둥에 매달려 떨며 흔들리며 몹시 아프다// 지난 여름, 소나기가 토란잎을 두드려 드럼을 연주하는 가설 무대가 선 적 있다 한 달간 소나기가 계속되었고 그 다음 한 달은 폭염이 세상을 지배했다 빗속 천둥과 번개가 토란잎 위에서 뒹굴었고 그 다음 전라의 젊은 남녀가 태양을 피해 토란잎 그늘로 뛰어들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을 한껏 치장하는 앵무새의 혀, 사자의 갈기, 원숭이의 다이아몬드 꼬리, 잉어의 수염등은 한낱 삶의 가면에 불과하다// 그리고 지난 여름, 토란잎을 둘러싼 탱자나무 울타리에 커다란 해일이 일었다 그러나 어떠한 사소한 뉴스도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를 뚫고 넘어 오지 못했다 다만, 아무도 다치지 않은 채 오직 탱자나무 가시만 홀로 아팠다 그러고 훌쩍, 여름은 지나갔다// 언제나, 물방울들은 토란잎 한가운데 모여 합창을 한다 또르르르 또르르르 쉬임없는 물방울들의 합창 또르르르 또르르르 힘겨운 물방울들의 노젓기 토란잎, 이 배가 가 닿는 세상의 끝은 어디인가 나는 게으르게 언덕에 누워 아득히 하늘을 지나는 비행기를 본다 어디 저기에서 쓸만한 냉장고 하나 안떨어지나......//

뽕잎 따는 여자 / 송찬호
여자는 뽕잎을 따네/ 아기 젖 물려 얼른 재워 놓고/ 남자는 산적/ 아기는 아직 벌레// 여자는 바삐 뽕잎을 따네/ 아기 깨기 전에,/ 누에는 넉 잠/ 아기는 이제 겨우 한잠/ 그러다 문득 손을 놓고/ 앞 강을 바라보네/ 남자는 산적/ 돌아오지 않는 바람// 손바닥만한 뽕나무밭도/ 머잖아 24시 마트/ 앞 강은 탄식/ 앞 강은 벌써 네온사인// 뽕잎을 따며/ 여자는 노래 부르네/ 나는 뽕잎을 따고/ 누에는 고치를 짓는다지만/ 훗날 비단옷 입는 이 누구인가//

담쟁이 덩굴이 동물해부학을 들여다보다 / 송찬호
오후 세 시, 동물병원은 고요하다/ 뚱뚱한 의자와/ 털이 잘 빗겨진 의자와/ 리본과 방울을 단 의자와/ 발톱에 빨간 메니큐어를 칠한 의자가/ 둘러앉아 소근거리고 있다/ 오늘은 출장 진료도 없었고/ 전화벨 소리도 조용하다/ 수의사 김표상 원장은/ 줄곧 동물 해부학을/ 들여다보고 있다/ 시를 담기 위한/ 여우의 뇌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창문을 넘어온 담쟁이 덩굴이/ 푸른 장미를 봉합하려다/ 실패한 수술가위와/ 바늘과 핀셋을/ 끊임없이 간섭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오늘 한 번의 진료가 있었다/ 모호한 관념과/ 상상력으로/ 두통이 심한 환자/ 자, 미스터 도그씨/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보세요//

술, 매혹될 수밖에 없는 / 송찬호
항아리에 말을 가득 부었다/ 항아리 속에서 말들이 소용돌이친다/ 가장자리에 닿지 않으려, 그렇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려, 그렇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려//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말은 항아리를/ 끌어올리다 그대 매혹의 입술로/ 나는 다시 한 번 죽음을 불러낼 것이다/ 죽음은 옷 입혀질 것이다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죽음은 다시 어느 한 생애의 집이 될 것이다// 뒤엎어진 잔이 기억을 되찾는다/ 한때는 복면이었고 어느 땐가는 부재자였던 그대/ 지금은 그대 입술에 감옥이 모여 있으니// 말,닿으면 부패하는/ 감옥이 되는/ 그러나 매혹될 수밖에 없는// 다시 잔을 비운다 모든 말들이/ 그들이 발생한 곳으로 되돌아간다// 터질 듯한/ 매혹 거품 입술들만 남기고//

외투 / 송찬호
처음 우리는 거뭇한 그것이/ 누군가 내다버린/ 트렁크인 줄만 알았다// 가까이 다가간 우리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무언가 신성한 것을/ 소유하고 있기나 한 듯이// 일테면 성경을 싼/ 검은 가죽 케이스처럼,// 얇은 외투 하나가/ 부랑자인 어느 사내를/ 꼬옥 감싸고 누워 있었다/ 턱까지 단추를 채우고/ 팔과 다리를 오그려 넣고/ 트렁크처럼 등을 부풀린 채,// 이른 아침,/ 추운 날씨 때문에/ 우리는 곧 그 자리를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마치 조개이거나/ 달팽이 껍질이거나 한 듯이/ 누구나 한번쯤 그 앞에/ 불려가 시험을 받을 법했다/ 분주히 사람들이 오가는 지하도 입구에서//

임방울 / 송찬호
삶이 어찌 이다지 소용돌이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그 소용돌이치는 여울 앞에서/ 나는 백 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 어느 시절이건 시절을 앞세워 명창은/ 반드시 나타나는 법/ 유성기 음반 복각판을 틀어놓고,/ 노래 한 자락으로 비단옷을 지어 입었다는/ 그 백 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 들어보시게,/ 시절을 뛰어넘어 명창은 한 번 반드시 나타나는 법/ 우당탕 퉁탕 울대를 꺾으며/ 저 여울을 건너오는,/ 임방울,소리 한가락으로 비단옷을 입은 늙은이/ 삶이 어찌 이다지 휘몰아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바구니 / 송찬호
언제나 하늘은 빈 바구니로 내려왔다/ 바구니가 비었으니 아직 살아있나보다/ 여인은 다시 밥바구니를 하늘로 올려보냈다/ 아, 뭉클한 밥바구니가 한 입에 하늘로 꺼져들어가곤 하였다/ 옷을 넣어 보내면 금방 피고름 빨래가 되어 내려왔다/ 여인의 몸도 점점 꺼져 들어갔다/ 기약 없는 세월은 물같이 흘렀고 그 물가에서/ 여인은 시름없이 빨래를 하였다/ 물은 날마다 더럽혀져 갔다/ 그 물이 흘러가는 어디선가 다시 근심 많은 여인들이/ 더럽혀진 물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빈바구니 속에서 아이는 끊임없이 울었다/ 여인은 바구니처럼 웅크리고 앉아 꼼짝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자라 여인을 버리고/ 다시 이 지상을 떠날 때까지/ 날마다 바구니 가득 그렇게 오르고 싶었던 하늘/ 오, 저 밑 버림받은 세상에는/ 몸 움푹움푹 패인 빈 바구니 같은 늙은 여인들만 남아 뒹굴고 있다//

 

가방 / 송찬호
가방이 가방 안에 죄수를 숨겨/ 탈옥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시내에 쫘악 깔렸다// 교도 경비들은, 그게 그냥 단순한/ 무소가죽 가방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한 때 가방 안이 풀밭이었고/ 강물로 그득 배를 채웠으며/ 뜨거운 콧김으로 되새김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했다// 끔찍한 일이다 탈옥한 죄수가 온 시내를 휘젓고 다닌다면/ 숲으로 달아난다면/ 구름 속으로 숨어든다면/ 뿔이 있던 자리가 근지러워/ 뜨거운 번개로 이마를 지진다면,// 한동안 자기 가방을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열쇠와 지갑과 소지품은 잘 들어있는지/ 혹, 거친 숨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리지 않는지/ 그 때묻은 주둥이로 꽃을 만나면 달려가 부벼대지는 않는지//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 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이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긴/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초원의 빛 / 송찬호
그때가 유월이었던가요/ 당신이 나를 슬쩍 밀었던가요/ 그래서 풀밭에 덜렁 누웠을 뿐인데/ 초록이 나를 때렸죠/ 등짝에 찰싹, 초록 풀물이 들었죠// 나는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아/ 벌떡 일어나, 그 너른/ 풀밭을 마구 달렸죠/ 초록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몰랐죠/ 숨은 가쁘고 바람에 머리는 헝클어졌죠/ 나는 그때 거의, 사랑에 붙잡힐 뻔했죠// 언덕에서 느릅나무는 이 모든 걸 보고 있었죠/ 초록은 꽁지 짧은 새들을 때렸죠/ 키 작은 제비꽃들도 때렸죠/ 더 짙고 아득한 곳으로 재촉하는,/ 한 줄기 어떤 청춘의 빛이 있었죠//

항아리 / 송찬호
물이 반쯤 찼다고/ 항아리 웃네/ 항아리 옹알이 하네/ 물이 반쯤 찼다고/ 항아리 배불뚝하네/ 물이 반쯤만 차도/ 꺄르르 웃는/ 오, 항아리는 튼실하여라/ 항아리 저리 의젓하니/ 물맛도 똑똑해지네/ 젖살이 올라 물이 통통해지네//

병뚜껑 / 송찬호
분명 저 여자는 그 동그란 입술을/ 재빨리 닫지 못했던 것 같다 삽시간에/ 그 육체의 더운 내용물이 흘러나와 버렸으니// 어느 목격자는 저 여자에게 갑자기 사슴이/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급하게 숨을 곳을/ 찾기 위하여 그 사슴이 저렇게 피로 변했다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무지막지한 자동차가 함부로/ 저 여자에게 뛰어들었다고 생각할 순 없는 일이야// 여자의 꺾여진 목은 유난히 희고 깨진/ 무릎 위로 하얀 레이스의 속옷이 얼핏 보인다/ 가슴 앞 단추들은 그 육체의 파탄에도/ 흩어지지 않고 여전히/ 가지런하고 완강하게 붙어 있다/ 그렇다 저 육체는 어떤 경우에도 저렇듯 품위와/ 자제력을 잃지 않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탄식의 연속인 것이다/ 저처럼 한마디 비명으로 삶이 끝날 수 있는데도/ 놀라움과 기쁨과 슬픔 따위의 육체의 서랍을/ 그토록 많이 달고 열어 보여줄 수 있으니// 그리고 횡단 보도 밖으로 튕겨나간 저 하이힐을 보라 참 신기한/ 구름이기도 하다 조금 전까지 어떤 처녀의 발을/ 사로잡던 마술 상자였던 자신을 까마득히 잊은 듯/ 도로 옆 화단에 처박혀 콧등에/ 앉은 나비와 희희낙락하고 있으니// 누군가 앰뷸런스를 부른다/ 우선 저 여자를 덮을 시트가 필요하다/ 얼굴만이라도 덮을 모자도 좋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 그 동그란 입술을 덮을 만한/ 병뚜껑이 운명의 손길이 닿는 곳에 있었어도……/ 나는 그 병뚜껑만도 못한 시를 옆에 놓고 지나간다//

우리들의 찐빵에 대하여 / 송찬호
설레는 마음으로 늦은 저녁 당신과 마주 앉았지요/ 진열장 유리 밖에서 처음 춤추는 당신을 보았을 때/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당신의 춤은 참 보기 아름다웠습니다/ 설탕처럼 반짝이는 불빛 아래 둘러선 사람들은 듬뿍 동전을 던졌구요/ 난 그런 당신을 사모했습니다 내 발걸음은 늘 당신의/ 거리를 향했습니다만, 내겐 눈길도 주지 않고 포근한 그릇에/ 파묻혀 당신은 늘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어요/ 짐작건대 거리 맞은편 진열장 속 그 행복이란 보석을/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오늘 가까이서 당신을 보니/ 퉁퉁 부어오른 당신의 발, 부어오른 당신의 얼굴,/ 오오 당신은 부푼 것이 아니라/ 부르튼 거군요 춤을 추다 지쳐 그대로 주저앉아 빵이 된 거군요//

울부짖는 서정 / 송찬호
한밤중 그들이 들이닥쳐/ 울부짖는 서정을 끌고/ 밤안개 술렁이는/ 벌판으로 갔다/ 그들은 다짜고짜 그에게/ 시의 구덩이를 파라고 했다// 멀리서 사나운 개들이/ 퉁구스어로 짖어대는 국경의 밤이었다/ 전에도 그는 국경을 넘다/ 밀입국자로 잡힌 적 있었다/ 처형을 기다리며/ 흰 바람벽에 세워져 있는 걸 보고/ 이게 서정의 끝이라 생각했는데/ 용케도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이번에는 아예 파묻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나무 속에서도/ 벽 너머에서도/ 감자자루 속에서도 죽지 않고/ 이곳으로 넘어와/ 끊임없이 초록으로 중얼거리니까//

저수지 / 송찬호
저 물의 깨진 안경을 보오/ 저 물의 젖은 손수건도 보오/ 물속에 4人가족 자동차가 살고 있소// 물은 고요하고 깊으오/ 물의 벽지를 바꿔도 좋소/ 물의 침대를 새로 들여도 괜찮소/ 자동차는 바닥의 진흙에 박혀 더 산뜻하오// 유서는 없었소,/ 저들은 지상에서/ 맨몸으로/ 수 없이 폭풍과 눈보라를 찍었소/ 그러니, 저 물에 빠진 도끼를 다시 꺼내지 마오// 저들이 어떻게 사나 가끔씩/ 돌을 던져보아도 좋소/ 물가까지 쫓아온 빚쟁이들도 안부를 묻고 가오// 찢어진 물은 곧 아물 거요/ 벌써 미끄러운 물위로 바람이 달리고 있소//

페인트칠하기 / 송찬호
개에게 페인트칠을 했다/ 꾀죄죄한 흰 털을/ 파랗게 칠했다/ 그랬더니 파란 개가 되었다// 파랗게 되고부터/ 개의 행동양식이 바뀌었다/ 앞발로 자주 땅을 팠다/ 먼 개의 조상을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개와 인간 사이의/ 새로운 계약을 요구했다/ 여행 계획을 짜고/ 마르크스를 읽기 시작했다// 개의 파란 꼬리는/ 로켓 추진 같다/ 조금 전에도 엄청난 속도로 내 앞을 달려 지나갔다/ 주위가 저리 분주하니 정작 해야 할 지붕 칠하기 작업은/ 당분간 미뤄둘 수밖에 없다// 파란 개가 컹컹 짖는다/ 파랗게 짖는다/ 새롭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하다/ 다음번엔 차분한 보랏빛 페인트를 준비해볼까/ 파란 털이 꾀죄죄해질 즈음에//

돌지 않는 풍차 / 송찬호
그는 일생을 노래의 풍차를 돌리는/ 바람의 건달로 살았네/ 그는 때때로 이렇게 말했네/ 풍차가 돌면 노래가 되고/ 풍차가 멈추면 괴물이 되는 거라고/ 그는 젊어서도 사랑과 혁명의 노래로/ 풍차를 돌리지는 못했네/ 풍차의 엉덩이나/ 허리를 만지고 가는/ 바람의 건달로나 살면서/ 바람 부는 언덕에서 덜컹거리는 노래의 풍차는 쉼 없이 돌았네/ 그는 병들고 지쳐 망가져가는 풍차에게/ 이렇게도 말했네/ 멈추지 말게,/ 여기서 멈추면/ 삶은 곧 괴물이 되는 거라네/ 그러나 생은 때로 휴식이 있어 아름다운 것/ 돌지 않는 풍차,/ 그의 노래는 끝났네/ 바람은 벌써 그의 심장을 꺼내 가고/ 그의 지갑에는 피 한 방울 남아있지 않네//

금동반가사유상 / 송찬호
멀리서 보니 그것은 금빛이었다/ 골짜기 아래 내려가 보니/ 조릿대 숲 사이에서/ 웬 금동 불상이/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누고 있었다/ 어느 절집에서 그냥 내다버린 것 같았다/ 금칠은 죄다 벗겨지고/ 코와 입은 깨져/ 그 쾌변의 표정을 다 읽을 수는 없었다/ 다만, 한줄기 희미한 미소 같기도 하고 신음 같기도 한 표정의 그것이/ 반가사유보다 더 오래된 자세라는/ 생각이 잠깐 들기는 했다/ 가야할 길이 멀었다/ 골짜기를 벗어나 돌아보니 다시 그것은 금빛이었다//

귀신이 산다 / 송찬호
그는 전쟁과 독재 시절의 과거에서 왔다/ 어느 장의사가 못질을 잘못한/ 대지의 관을/ 간신히 빠져 나왔다/ 헝클어진 머리/ 천 개의 캄캄한 밤을 보아버린 듯한 퀭한 눈/ 오래 씻지도 않은 것 같았다/ 검푸른 이념의 곰팡이가/ 보기 흉하게 온 몸을 덮고 있었다/ 그는 가끔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어깨 위 허공으로/ 바나나와 사과를 건네기도 하였다/ 한참 거리를 쏘다니다/ 쇼윈도우 거울 앞에 이르러/ 자신의 어깨가 조금 기우뚱한 걸 알아챈 것 같았다/ 그는 히죽 웃으며, 오른쪽 어깨 위의 귀신을 왼쪽으로 옮겨 앉혔다//

백 한번째의 밤 / 송찬호
촛불 세 자매는 밤을 맞을 채비를 했다/ 식탁을 치우고/ 은접시를 닦고/ 아궁이 불을 꺼뜨리고/ 동면에 들어갈 벌들에게 캄캄한 꿀을 먹였다/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커튼이 드리워지고/ 문들은 굳게 닫혔다/ 현관엔 무거운 쇠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문 밖 매어둔 나무염소도 꿈쩍 않고 서 있었다/ 촛불 자매들은 나직나직이 일렁거리며/ 불의 수의를 짰다/ 피투성이 재투성이 밤의 어깨와 허리 치수를 재어가면서/ 그리고, 이런 노래를 불렀다/ 어디선가 싸움은 그치질 않고/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네/ 아득하여라,/ 앞날을 보지 않기 위하여/ 우린 밤의 눈을 찔렀네//

찰흙 거위 / 송찬호
찰흙으로 거위를 만들었다/ 꺼욱 꺼욱,/ 목청 좋게 울라고/ 목을 더 길게 만들었다// 흙이 마른 다음/ 주둥이와 다리와 물갈퀴에는 노란 물감을 칠하고/ 몸통과 날개는 흰 물감을 입혀/ 연못가에 세워 놓았다// 이튿날 새벽, 요란하게/ 거위 우는 소리 들려/ 나가 보니/ 찰흙 거위는 벌써 온데간데없었다// 연못에 사는 거위들이/ 같이 놀자고 데려간 것 같았다//

악어와 악어새 / 송찬호
악어가 입을 딱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악어새가 날아와/ 톡톡톡톡톡/ 쫑쫑쫑쫑쫑// 악어 이빨 사이 고기 찌꺼기를 파먹고/ 악어 입 속을/ 말끔하게 청소해 놓았다.// 악어새가 날아가자/ 악어가 입을 닫았다./ 연주가 끝나고/ 피아노 뚜껑이/ 탁, 하고 닫히는 것 같았다.//

달팽이 전세 계약서 / 송찬호
달팽이가/ 콩잎과/ 전세 계약을 했다// 둥글넓적한 콩잎 마당에서/ 여름 동안/ 살다 가기로 했다// 태풍이 불어/ 콩잎이 뒤집히거나 해서/ 콩잎에 붙어 있던 달팽이집이 땅으로 똑, 떨어지면// 그때 전세 계약이/ 끝나는 걸로/ 계약서에 서명했다//

노루 / 송찬호
폐교가 된/ 산골 학교에/ 아침 일찍/ 노루가 등교했다// 텅 빈 운동장/ 울타리에/ 머루만 까맣게 익어// 아무도 보지 않아도/ 그걸 따 먹을까 말까/ 망설이는// 아무래도/ 노루는/ 혼자 5학년//

모서리의 왕 / 송찬호
모서리에 왕이 살고 있었다/ 모서리, 적막하고 쓸쓸한 궁전이었지만/ 곁에 꽃나무 왕비가 있어 행복했다// 어느 날, 나쁜 새 어치가 날아와/ 불길한 예언을 했다/ 꽃나무는 옮겨갈 것입니다// 정말 누군가 꽃나무 화분을 번쩍 들고가 버렸다/ 모서리의 왕은 왕관을 내동댕이쳐 버리고/ 모서리로만 남았다// 무릎이 부딪히는 곳에,/ 아얏!/ 나지막한 비명소리만 남았다//

책베개 / 송찬호
커다란 덩치의 곰이 도서관 책을 잔뜩 빌려 간다/ 이제 곧 겨울잠을 자야 할 텐데/ 언제 그 책을 다 읽지요?// 사서님, 대출 도서 반납은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깊은 겨울잠에 들면/ 내 머리맡에 와서/ 책만 살짝 빼 가세요//

강아지집 옆 돌멩이 / 송찬호
강아지집 옆에/ 돌멩이가 하나 있는데/ 강아지를 좋아하는 게 분명해/ 돌멩이 이마에/ 강아지똥이 묻었는데도/ 싫지 않은가 봐/ 강아지 뒷발에 채여굴러도/ 멀리 가지도 않아/ 강아지가 없을 땐/ 강아지 대신/ 멍멍 짖기도 하지//

 



송찬호 시인
1959년 충청북도 보은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에 〈금호강〉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제13회 「동서문학상」, 제19회 「김수영문학상」, 제8회 「미당문학상」, 제17회 「대산문학상」, 2제3회 「이상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 《붉은 눈, 동백》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