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우 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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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9. 24.

 

          살구꽃 핀 마을 / 이호우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달밤 / 이호우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淨化)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趙雄傳)에 잠들던 그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이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바람벌 / 이호우
그 눈물 고인 눈으로 순아 보질 말라/ 미움이 사랑을 앞선 이 각박한 거리에서/ 꽃같이 살아보자고 아아 살아보자고.// 욕(辱)이 조상에 이르러도 깨달을 줄 모르는 무리/ 차라리 남이었다면, 피를 이은 겨레여/ 오히려 돌아앉지 않은 강산(江山)이 눈물겹다.// 벗아 너마자 미치고 외로 선 바람벌에/ 찢어진 꿈의 기폭(旗幅)인 양 날리는 옷자락/ 더불어 미쳐보지 못함이 내 도리어 설구나.// 단 하나인 목숨과 목숨 바쳤음도 남았음도/ 오직 조국(祖國)의 밝음을 기약함이 아니던가./ 일찍이 믿음 아래 가신 이는 복(福)되기도 했어라.//

개화 / 이호우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아려 눈을 감네.//

산길에서 / 이호우
진달래 사태진 골에/ 돌 돌 돌 물 흐르는 소리.// 제법 귀를 쫑긋/ 듣고 섰던 노루란 놈,// 열적게 껑청 뛰달아/ 봄이 깜짝 놀란다.//

초원 / 이호우
상긋 풀 내음새/ 이슬에 젖은 초원.// 종달새 노래 위로/ 흰구름 지나가고,// 그 위엔 푸른 하늘이/ 높이 높이 열렸다.//

모강(暮江) / 이호우
낙조 타는 강을/ 배 한 척/ 흘러가고// 먼 마을/ 저녁 연기/ 대숲에 어렸는데// 푸른 산/ 떨어진 머리/ 백로 외로 서 있다.//

비원 / 이호우
저녁 노을 속에/ 첨탑(尖塔) 끝 치솟은 십자(十字)// 천심(天心)은 겨눌수록/ 너무나 허공(虛空)인가// 비원(悲願)은 절규(絶叫)를 견디어/ 기(旗)빨보다 아파라.//

산 샘 / 이호우
가을 산(山)빛이/ 고이도 잠긴 산 샘// 나무잎 잔을 지어/ 한 모금 마시고는// 무언가 범(犯)한 듯하여/ 다시 하지 못하다.//

태양(太陽)을 여읜 해바라기 / 이호우
태양(太陽)을 여읜 하늘은 푸를수록 더욱 서러워/ 오직 고개 숙인 채 우러를 길 없는 해바라기/ 지지도 차마 못하고 외로 섰는 해바라기.// 한마음 빌어온 그날 또 한번 믿기야 하건만/ 어느 사막(砂漠)에서뇨 바람이 바람이 분다/ 말없이 가슴을 닫고 지켜섰는 해바라기.// 번쩍 꿈처럼 번쩍 솟아보렴 아아 나의 태양(太陽)/ 우러러도 우러러도 비인 하늘을/ 오히려 꿈을 헤이며 기다려 선 해바라기.//

비 / 이호우
파초 숨가쁜 잎에/ 뚝뚝 비 듣는 소리// 간절한 은혜를 다투어/ 순(筍)들이 일어나고// 년사(年事)를 근심턴 늙은이/ 창(窓)을 열고 듣는다//

술 / 이호우
임이 달리하곤 나를 미쳤다니/ 외로 남은 몸이 잠자코 더불은 술/ 이제는 임 도루 불러도 내 못 갈까 하도다.// 광자(狂者)는 천지총아야(天之寵兒也) 아암 천지총아(天之寵兒)지/ 하늘과 땅이 마구 물결을 치는구나/ 내 언제 풍선(風船)이 됐길래 둥 둥 이렇게 좋냐.// 젊은 외롬에 겨워 석가(釋迦)는 산(山)으로 가고/ 붉은 목숨의 호사로 기독(基督)은 십자가(十字架)를 지고/ 인생(人生)은 그렇게도 청춘(靑春)이 누려보고 싶은 건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는 그저 납빛 안개/ 광음(光陰)도 범(犯)하지 못하는 무중력층(無重力層)에 나는 있다/ 진실로 이 꿈 아닌 꿈아 다 하도록 깨지 말라.//

학(鶴) / 이호우
날아 창궁(蒼穹)을 누벼도/ 목메임은 풀길 없고// 장송(長松)에 내려서서/ 외로 듣는 바람소리// 저녁놀 긴 목에 이고/ 또 하루를 여의네.//

오(午) / 이호우
쩌응 터질듯 팽창한/ 대낮 고비의 정적 靜寂// 읽던 책을 덮고/ 무거운 눈을 드니// 석류꽃 뚝 떨어지며/ 어디선가 낮 닭소리//

하(河) / 이호우
어떻게 살면 어떻고/ 어떻게 죽으면 어떠랴/ 나고 살고 죽음이/ 무엇이면 무엇하랴/ 대하는 소리를 거두고/ 흐를대로 흐른다.//

허일(虛日) / 이호우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오후(午後)// 파리 한 마리/ 손발을 비비고 있다// 어덴지 크게 슬픈 일/ 있을 것만 같아라.//

휴화산(休火山) / 이호우
일찌기 천(千)길 불길을/ 터뜨려도 보았도다// 끓는 가슴을 달래어/ 자듯이 이날을 견딤은// 언젠가 있을 그날을 믿어/ 함부로ㅎ지 못함일레.//

묘비명(墓碑銘) / 이호우
여기 한 사람이/ 이제야 잠들었도다// 뼈에 저리도록/ 인생(人生)을 울었나니// 누구도 이러니 저러니/ 아예 말하지 말라.//

무화과(無花果) / 이호우
차마 꽃은 못 필레/ 그 아프디 아픈 파열(破裂)// 은행(銀杏)처럼 바라만 보며/ 서로 앓긴 더 못 할레// 차라리 혼자만의 응혈(凝血)로/ 열매하여 견딜레.//

석류 / 이호우
토장맛 덤덤히 밴/ 석새 베 툭진 태생// 두견은 섧다지만/ 울 수라도 있쟎던가// 말 없이 가슴앓이에/ 보라! 맺힌 핏방울//

발자욱 / 이호우
봄은 화려(華麗)해 미웠고/ 가을은 투명(透明)이 싫었다// 추억처럼 눈이 쌓이고/ 불빛 머나먼 밤을// 한 자욱 한 자욱 네가 고이며/ 나는 걷기만 하네.//

병실(病室) / 이호우
밤인지 새벽인지 자꾸만 비가 온다/ 지구(地球)는 이제 어데쯤을 굴르는고/ 싸늘히 가난한 벽은 시계(時計) 하나 없구나.// 머리맡 탁자(卓子) 위에 다만 한 개 약병/ 한 묶음 꽃을 안고 찾아올 사람은 없다/ 너무도 초라한 삶이 병보다도 설워라.// 홀로 등(燈)으로 더불어 밤 새기를 기다리다/ 이 비를 따라서 봄이 행여 오려는가/ 넌즈시 젊음을 믿으며 팔을 걷어 보도다.//

또다시 새해는 오는가 / 이호우
빼앗겨 쫓기던 그날은 하그리 간절턴 이 땅/ 꿈에서도 입술이 뜨겁던 조국(祖國)의 이름이었다/ 얼마나 푸른 목숨들이 지기조차 했던가// 강산(江山)이 돌아와 이십년(二十年) 상잔(相殘)의 피만 비리고/ 그 원수는 차라리 풀어도 너와 난 멀어만 가는/ 아아 이 배리(背理)의 단층(斷層)을 퍼덕이는 저 기(旗)빨.// 날로 높는 주문(朱門)들의 밟고 선 밑바닥을/ `자유(自由)'로 싸맨 기한(飢寒) 낙엽(落葉)마냥 구르는데/ 상기도 지열(地熱)을 믿으며 씨를 뿌려 보자느뇨// 또다시 새해는 온다고 닭들이 울었나 보네/ 해바라기 해바라기처럼 언제나 버릇된 다림/ 오히려 절망(絶望)조차 못하는 눈물겨운 소망이여.//

만사(輓詞) -곡(哭), 백농선생(白農先生)(1659년) / 이호우
차라리 원수 앞엔 이겨 피던 해바라기/ 도루 찾은 이 하늘에 동은 아직 트지 않고/ 도리어 버림 속에서 외로 지고 말다니.// 험한 가시길을 평생(平生)을 앞장 서서/ 영광은 겨레에 돌리고 어려움만 져 왔거늘/ 떠나는 이날에 마자 눈 못 감게 하다니.// 상기도 어두운 바다 조각배 물결은 높은데/ 외로이 남았던 등대(燈臺) 또 하나 꺼져만 가는가/ 뿌린 씨 꽃피는 그날에 거듭 한번 오소서.//

매우(賣牛) / 이호우
송화(松花)가루 나리는 황혼(黃昏) 강을 따라 굽은 길을/ 어슬렁 어슬렁 누렁이 멀리 간다/ 그 무슨 기약 있으랴 정이 더욱 간절타.// 산(山)마을 농사집이 끼닌들 옳았으랴/ 육중한 몸인지라 채질도 심했건만/ 큼직한 너의 눈에는 아무탓도 없구나.// 너랑 간 밭에 봄보리가 살붇는데/ 거두어 찧을 제면 너 생각을 어일거나/ 다행히 어진 집에서 털이 날로 곱거라.//

지일(遲日) / 이호우
채 맞아 쓰러진 파리 바시시 일어난다/ 미미한 벌레인들 생명이 다르리오/ 홀연히 애처로움에 채를 던져버렸다.// 남을 남으로 해 나를 달리하였도다/ 一萬살음이 모두 <내> 아닌가/ 햇빛이 선뜻 窓에 밝으며 낮닭소리 들린다.//

매화(梅花) / 이호우
아프게 겨울을 비집고/ 봄을 점화(點火)한 매화(梅花)// 동트는 아침 앞에/ 혼자서 피어 있네// 선구(先驅)는 외로운 길/ 도리어/ 총명이 설워라.//

목숨 / 이호우
저리도 넓은 하늘/ 어딘들 못 사리오// 이리도 좁은 하늘/ 어디서 살으리오// 수유(須臾)의 목숨을 안고/ 내 우러러 섰도다//

오월 / 이호우
5월(月) 아침비에 부풀은 산(山)과 들을/ 넉넉한 세월처럼 부드러운 낙동강(洛東江)/ 사람도 배도 물새도 숨을 함께 했도다.// 한철 풍경(風景)이긴 너무나 간절한 정(情)/ 부듯이 가슴이 메이며 핏줄이 더워진다/ 내 어이 어디로 가지랴 아아 나의 조국(祖國).// 눈을 감아 본다 아득히 그 새벽을/ 새로운 하늘을 찾아 푸른 목숨들이/ 이 터에 자리를 잡고 복을 빌던 그 모습.// 얼마나 어여쁜가 이 날을 사는 몸이/ 무한한 이 은혜 속에 자손(子孫)들을 심으면서/ 우리 턱 기대어 살자꾸나 사랑하는 사람아.//

춘한(春恨) 2 / 이호우
두견이 운 자국가/ 피로 타는 진달래들// 약산(藥山) 동대(東臺)에도/ 이 봄 따라 피었으리// 꽃가룬 나들련마는/ 촉도(蜀道)보다 먼 한 금.//

춘소(春宵) / 이호우
오붓이 봄 한밤을/ 무르익은 너의 젖가슴은// 너무도 달디단 꽃술/ 나는 취한 한 마리 호접// 이대로 꽃잎 오무라/ 하냥 옥고만지라//

청추(聽秋) / 이호우
아무리 여름이 더워도 싫단 말 다신 않을래/ 이 밤도 또 밤새워 우는 저 가을벌레들 소리/ 더구나 우수수 잎들이 지면 어이 견딜가본가// 늘어난 나이의 부피로 잠은 밀려 갔는가/ 먼지처럼 쌓여지는 사념(思念)의 무게 아래/ 외롬이 애증(愛憎)을 걸려 낙화(落花) 같은 회한(悔恨)들.// 욕된 나날이 견디어 내 또한 이미 가을/ 눈을 감아 보니 청산(靑山)한 벗들이 많다/ 고향도 잊어 이십년(二十年) 이젠 먼 곳이 되었네.// 열어 온 창(窓)들이 닫쳐 하늘과 내가 막혔네/ 유명(幽明)을 갈라 선 병풍(屛風), 그와 같은 먼 먼 거리(距離)/ 종잇장 한 겹에 가려 엇갈려 간 너와 나.//

가을 / 이호우
내머리 이미 희고/ 가을이 또한 깊다// 산야(山野)에 열매 다 영글어/ 젖줄들을 놓았도다// 이제 내 허허 웃는 일 밖에/ 무슨 일이 있으랴.//

겨울 / 이호우
집마다 잠겨진 창(窓)들/ 너마저 가슴을 닫고// 겨울은 절지(絶地)인 양/ 바람보다 고독이 춥다// 언제로 비롯했던가/ 서로 담 쌓 살기를.//

낙목 / 이호우
그 새들 낙엽과 더불어 가고 외로 남은 낙목(落木)/ 칼날 같은 하늬바람 별들도 아파 떠는데/ 지그시 체온(體溫)을 다스리며 지심(地心)으로 뻗는 뿌리.// 주름은 풍상(風霜)의 사연 함묵(含?)은 오히려 믿음일래/ 동지(冬至)의 긴긴 밤도 이젠 닭이 울었거니/ 어덴가 한 걸음 한 걸음 오고 있을 봄이여.// 얼었던 물길이 풀린 듯 이 혈관(血管)의 가려움은/ 머쟎은 봄을 기미챈 재빠른 꽃들의 정(精)이/ 제마다 맹동을 서둘러 스멀대는 낌샌가.// 진실로 나는 모르네 이 벌판에 내가 섬을/ 상춘(常春)의 남(南)녘 다 두고 나도 모를 나의 우연(偶然)에/ 아손(兒孫)들 또한 여기에 심그저야 하련가.//

낙후(落後) / 이호우
궂은비 젖은 낙엽(落葉)을/ 흙발들이 밟고 간다// 철을 여의싶다손들/ 저리 밟혀 말없긴가// 나인 양 낙엽(落葉)이 미워라/ 와락 나도 밟고 간다.//

낙엽 1 / 이호우
임 가신 저문 뜰에 우수수 듣는 낙엽(落葉)/ 잎잎이 한(恨)을 얽어 이밤 한결 차거우니/ 쫓기듯 떠난 이들의 엷은 옷이 맘 죄네.// 피기는 더디하고 지기는 쉬운 이 뜰/ 이 몸이 스ㅣ어지면 봄바람이 되어설랑/ 서럽고 가난한 이를 먼저 찾아가리라.//

단풍 / 이호우
져서 더욱 피는/ 생명의 길 앞에서// 차라리 아낌없이/ 저렇게도 잎 잎들은// 스스로 몸들을 조아/ 남은 피를 뿜고 있다.//

삼불야(三弗也) / 이호우
무슨 업연이기/ 먼 남의 골육전을// 생때같은 목숨값에/ 아아 던져진 삼불(三弗) 군표(軍票)여// 그래도 조국의 하늘 고와/ 그 못 감고 갔을 눈//

균열(龜裂) / 이호우
차라리/ 절망(絶望)을 배워/ 바위 앞에 섰습니다.// 무수한 주름살 위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바위도 세월이 아픈가/ 또 하나 금이 갑니다.//
* 1955년 이호우시조집(爾豪愚時調集)에 실었는데 뒷날 오누이 시조집에서는 제목을 '금'이라 고쳤다.(임종찬 시조시인·부산대 국문과 교수)

청우(聽雨) -1961년 가을. 미소원폭실험 경쟁에 즈음하여 / 이호우
無常을 타이르는/ 가을밤 비소린데// 서로 죽임을 앞서려/ 뿌리는 放射能塵// 두어도 百年을 채 못할/ 네가 내가 아닌가.//

비키니섬 / 이호우
方向感覺을 잃고/ 헤매다간 숨지는 거북// 끝내 깨일 리 없는/ 알을 품는 갈매기들// 자꾸만 그 <비키니>섬이/ 겹쳐 뵈는 山河여.//

회상 / 이호우
몹시 추운 밤이었다/ 나는 커피만 거듭하고// 너는 말없이 자꾸/ 성냥개비를 꺾기만 했다// 그것이 서로의 인생의/ 갈림길이었구나//

깃발 / 이호우
깃발! 너는 힘이었다. 일체(一切)를 밀고 앞장을 섰다./ 오직 승리의 믿음에 항시 넌 높이만 날렸다./ 이 날도 너 싸우는 자랑 앞에 지구(地球)는 떨고 있다.// 온몸에 햇볕을 받고 깃발은 부르짖고 있다./ 보라, 얼마나 눈부신 절대의 표백(表白)인가./ 우러러 감은 눈에도 불꽃인 양 뜨거워라.// 어느 새벽이드뇨, 밝혀 든 횃불 위에/ 때묻지 않은 목숨들이 비로소 받들은 깃발은/ 성상(星霜)도 범(犯)하지 못한 아아 다함 없는 젊음이여.//

진주 / 이호우
배앝아도 배앝아도/ 돌아드는 물결을 타고// 어느새 가슴 깊이/ 자리잡은 한 개 모래알// 삭이려 감싸온 고혈(膏血)의/ 구슬토록 앓음이여//

익음 / 이호우
잠을 잃고 듣는 비소리/ 지구도 하나 낙도 하나// 납빛 지겨운 하루/ 오십년은 수유(須臾)*였네// 투닥, 또 모과가 듣나보다/ 지는 건가 익음이란//
* 수유(須臾): 잠시. 잠시 동안.

임이여 나와 가자오 / 이호우
남향 따스한 뜰에 꽃이랑 과일 심어 두고/ 강섶 풀밭에 오리도 길으면서/ 오로지 너로만 한 폭 그림같이 살자오// 원두막에 달이 오면 노래도 불어보고/ 벌레 우는 밤은 추억도 되새기며/ 외롬이 싸주는 정에 담뿍 취해도 보자오// 찔레꽃 흰 언덕에 벌꿀이 익을 때랑/ 저무는 백양 숲에 노을이 잠길 때랑/ 벗이야 오시든 말든 흰 술 빚어 두자오// 넓은 하늘 아래 목숨은 푸른 것이오/ 가슴에 이끼를 가꾸긴 피가 진하지 않으오/ 사랑이 해처럼 밝은 곳 임이여 나와 가자오//

외가ㅅ집 / 이호우
살구꽃 그늘 속에 외할머니 졸으시네/ 꼬꼬꼬 애미 소리 날며 뛰며 병아리들/ 싹트는 상추밭골로 삐약삐약 해친다.// 굽벅 놀란드시 깨었다가 졸으신다/ 조오 쫓으시고 다시 굽벅 졸으신다/ 꼬꼬꼬 애미를 따라 병아리가 뛰간다//
* 1946. 6월 <兒童> 3호

비파수 정든 노래 / 이호우
비파수 정든 노래 달모래에 숨어들 적/ 말술 앞에 놋코 높은 마음 난우노니/ 봄이야 가든 오든 이 밤 더디 세어라//
* 1934.8.30. 22세 때 지은 육필 시조, 비파수는 시인의 고향 마을의 강

 

 



이호우(李鎬雨, 1912년∼1970년) 시조 시인
호는 이호우(爾豪雨)이며,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도쿄예술대학에서 수학했으나 신경쇠약으로 중퇴했다. 1940년 <문장>지에 시조 <달밤>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이후 대구에 기거하면서 지역 신문사에 몸담고 지방 문화 창달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5년 <이호우 시집>을 간행하고 제1회 경북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누이동생 이영도와 함께 발간한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중의 1권인 <휴화산>을 발간했다. 대표작으로 <개화> <별> <바위 앞에서> 등이 있다. 대구 앞산공원에 그의 시비가 있다.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 (16) 시조시인 이호우

(1)“세기의 태양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봄은 꽃보다도 일찍 오고/ 바람은 향기 앞에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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