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의 여자 /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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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1. 9. 25.

송강 정철 선생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그러나 그가 사랑했던 여인, 강아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K선배를 따라 강아의 묘를 찾은 것은 지난 봄, 춘삼월 호시절이라 하나 아직 매서운 바람이 품속을 파고드는 어느 날이었다. 경기도 고양군 삼천리 골에 송강의 묘가 있었고, 그 오른쪽에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강아의 묘가 있었다.

그들은 사신(使臣)과 기생의 신분으로 마주했다. 송강이 명나라를 다녀오던 길에 강아를 만나게 되었지만, 평양에서 그를 따라 내려왔을 때는 ‘남과 여’의 의미였으리라. 이후 강아는 한 번도 송강의 옆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송강이 노후에 아버지 묘를 지키며 외롭게 지내던 시절에도 강아는 곁에서 벗이 되고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눈에 보이는 강아의 묘는 슬프다 못해 서러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사방으로 우거진 잡목은 길을 묻어버렸고 사람이 다닌 흔적이라고는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돌보지 않은 적지 않은 세월 속에 봉분은 낮아져 가로세로 길이가 석자나 될까? 높이는 두자가 채 못 될 것 같은 작디작은 무덤이었다. 그나마 옷도 벗겨져 붉은 알흙이 드러나고 떼가 산 것은 뒷부분 반쯤이었다. ‘살아생전 혈육 한 점 남기지 못 했단 말인가. 이것이 한 남자를 평생 사랑한 대가란 말인가. 출신이 기생이기 때문일까.’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송강의 묘는 조카가 진천군수로 부임하면서 그곳으로 화려하게 이장되었다.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임을 바라보았던 강아는 그마저 할 수 없게 되었고, 한(恨)이 되었음인가 해마다 사월이 되면 이름 모를 붉은 꽃이 그녀의 무덤에 피어난다고 한다. 마치 피를 토해 내듯이……. 그가 강아의 死後를 자손에게 부탁했던들 그녀의 묘가 지금의 그 모습일까.

러시아 혁명의 주역 ‘레닌’에게 숨겨놓은 여인이 있었다면 믿는 사람이 있을지. 그의 연서(戀書)들이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테른에 공개되었다. ‘이네사 아르만트’라는 미모의 러시아 혁명가가 그 주인공. 그녀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저서를 읽고 뒤늦게 볼셰비키가 되었고,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아르만트가 그를 직접 만난 것은 1910년 파리 망명시절이라 한다. 당시 레닌은 한 살 위의 ‘크루프스카야'’와 결혼한 후였고 아르만트는 네 아이를 두고 남편과 헤어진 상태였다.

슈테른紙는, ‘나이보다 열 살쯤 늙어 보이는 혁명동지이자 아내인 크루프스카야와 단조로운 결혼생활을 하던 레닌에게, 나이보다 열 살쯤 젊어 보이고 우아한 아르만트의 등장은 혁명사업 중의 커다란 휴식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레닌은 혁명사업을 협의한다며 파리의 오를레앙가 카페에서 수 시간씩 그녀와 함께 있는가하면 코펜하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회의에 열흘씩 동반하기도 했다. 게다가 역설적이게 아르만트의 부르주아적 면모를 아끼고 사랑했다. 가끔씩 그녀에게 베토벤의 ‘열정’을 연주하게 하고, 우아한 그녀의 옷차림에 매혹되기도 했다 한다. 그들의 사랑은 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병약한 아르만트가 카프카스 지방에서 세상을 등질 때까지였으니 죽음만이 그들을 갈라놓을 수 있었던 셈이다.

레닌은 크렘린궁 외벽 혁명가의 기념묘지에 그녀를 안장 시켰다. 지금도 붉은 광장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라 한다. 혁명가의 마음엔 과업을 이루어야 하는 냉철한 마음만이 가득할 것이라는 상상은 나의 오산이었다. 얼음처럼 차가웠을 것 같은 레닌에게 그토록 여인을 사랑할 수 있는 따스한 마음과 뜨거운 열정이 어디에 숨었더란 말인가. 더구나 사랑에 대한 그 의리가 놀라울 뿐이다.

두 여인은 모두 그녀들이 사랑했던 사람의 ‘곁의 여자’, 살아생전에 누가 더 행복했으리라는 비교는 할 필요가 없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란 겉모습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아는 기생이라고 편안하게 귀애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송강이 유배를 갈 때마다 곁을 떠나지 않고 애절한 사랑을 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불행했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아내의 입장에서 강아를 보면 동정의 여지가 없다. 부처님도 돌아앉는다는 시앗이 아니겠는가. 허나 같은 여인의 시선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그녀의 생애가 가엽다. 한 남자를 평생 사랑한 대가가 황폐한 무덤 속에 누워있게 되다니. 이제는 진천으로 떠나간 임의 ‘곁의 여자’도 되지 못한다. 차마 상식적이 아닌 사랑의 값을 치르는 거라고 말하기에는 가슴이 저려온다. 북풍한설은커녕 꽃샘추위조차 막지 못할 떼도 없는 그 무덤을 보면.

돌아오는 사월 그의 무덤에 한(恨)이 피어오를 때, 나는 다시 찾으리라는 다짐을 해본다. 술 한 잔을 받아 강아를 찾아간다면 외로워 보이는 넋에 위로가 될 것인지…….

어디선가 “사랑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겠지만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인연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번뇌와 고통을 줄 뿐”이라는 말과 함께.

그러나 그 누가 인연의 줄을 끊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