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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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9. 29.

말의 빛 / 이해인
쓰면 쓸수록 정드는 오래된 말/ 닦을수록 빛을 내며 자라는/ 고운 우리말//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억지 부리지 않아도/ 하늘에 절로 피는 노을빛/ 나를 내어주려고/ 내가 타오르는 빛//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언제나 부담 없는/ 푸르른 소나무 빛/ 나를 키우려고/ 내가 싱그러워지는 빛// "용서하세요"라는 말은/ 부끄러워 스러지는/ 겸허한 반딧불 빛/ 나를 비우려고/ 내가 작아지는 빛//
*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언어 영역 읽기 교과서 수록

살아 있는 날은 / 이해인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길을 떠날 때 / 이해인


길을 떠날 때면 처음으로 빛을 보는 나비가 된다./
바람따라 떠다니는 한숨 같은 민들레씨,/
내일 향한 소리없는 사라짐을 본다./
여행길에 오르면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기쁨을 수없이 감사하고,/
서서히 죽어 가는 슬픔을 또한 감사한다./
산, 나무, 강에게 손을 흔들며 나는/
들꽃처럼 숨어 피는 이웃을 생각한다./
숨어서도 향기로운 착한 이웃들에게 다정한 목례를 보낸다.//

 

꽃 멀미 / 이해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나는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

꽃밭에 서면 / 이해인
꽃밭에 서면 큰 소리로 꽈리를 불고 싶다./ 피리를 불 듯이/ 순결한 마음으로// 꽈리 속의 잘디잔 씨알처럼/ 내 가슴에 가득 찬 근심 걱정/ 후련히 쏟아 내며/ 꽈리를 불고 싶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동그란 마음으로/ 꽃밭에 서면// 저녁노을 바라보며/ 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고 싶다.// 남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받고 싶다.// 꽃들의 죄 없는 웃음소리/ 붉게 타오르는/ 꽃밭에 서면//

제비꽃 연가 / 이해인
나를 받아 주십시오/ 헤프지 않은 나의 웃음/ 아껴 둔 나의 향기/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가까이 오셔야/ 나는 겨우 고개를 들어/ 웃을 수 있고/ 감추어진 향기도/ 향기인 것을 압니다.// 당신이 가까이 오셔야/ 내 작은 가슴속엔/ 하늘이 출렁일 수 있고/ 내가 앉은 이 세상은/ 아름다운 집이 됩니다.// 담담한 세월을/ 뜨겁게 안고 사는 나는/ 가장 작은 꽃이지만/ 가장 큰 기쁨을 키워 드리는/ 사랑 꽃이 되겠습니다// 당신의 삶을/ 온통 봄빛으로 채우기 위해/ 어둠 밑으로 뿌리내린 나/ 비 오는 날에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 작은 시인이 되겠습니다.// 나를 받아 주십시오//

코스모스 / 이해인
바람이/ 가을을 데리고 온/ 작은 언덕길엔/ 코스모스/ 코스모스/ 분홍 빛 하얀 빛/ 웃음의 물결/ 가느다란 몸매에 하늘을 담고/ 조용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소녀들// 푸른 줄기마다/ 가을의 꿈 적시며/ 해맑게 웃는다// 코스모스/ 코스모스/ 바람이 분다//

민들레 / 이해인
은밀히 감겨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차라리 입을 다문 노람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솜털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 꽃씨만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바람한테 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

풀꽃의 노래 / 이해인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아// 바람이 날 데려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하고 싶은 모든 말들/ 아껴둘 때마다/ 씨앗으로 영그는 소리를 듣지// 너무 작게 숨어 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니야/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는 법을/ 노래하는 법을/ 오래 전부터/ 바람에게 배웠기에/ 기쁘게 살 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이기에/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해바라기 연가 / 이해인
내 생애가 한 번 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나의 임금이여/ 폭포처럼 쏟아져 오는 그리움에/ 목메어 죽을 것만 같은/ 열병을 앓습니다.// 당신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불치의 병은/ 사랑// 이 가슴 안에서 올올이 뽑은 고운실로/ 당신의 비단옷을 짜겠습니다.// 빛나는 얼굴 눈부시어/ 고개 숙이면/ 속으로 타서 익은 까만 꽃씨/ 당신께 바치는 나의 언어들.// 이미 하나인 우리가/ 더욱 하나될 날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의 임금이여../ 드릴 것은 상처뿐이어도/ 어둠에 숨지지 않고/ 섬겨 살기 원이옵니다.//

           해바라기 노래 / 이해인

불타는 사랑으로 해를 닮은 꽃/ 언제나 해를 향해 깨어 사는 맘/ 노랗게 빛나네 사랑의 꽃잎/ 해바라기 꽃처럼 살고 싶어라/ 해바라기 마음으로 살고 싶어라//

불타는 소망으로 해를 닮은 꽃/ 언제나 해를 향해 깨어 사는 맘/ 까맣게 익었네 소망의 꽃씨/ 해바라기 꽃처럼 살고 싶어라/ 해바라기 마음으로 살고 싶어라//

불타는 믿음으로 해를 닮은 꽃/ 언제나 해를 향해 깨어 사는 맘/ 땅 깊이 묻었네 믿음의 뿌리/ 해바라기 꽃처럼 살고 싶어라/ 해바라기 마음으로 살고 싶어라//


아름다운 순간들 / 이해인
마주한 친구의 얼굴 사이로,/ 빛나는 노을 사이로, 해 뜨는 아침 사이로./ 바람은 우리들 세계의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메꾸며/ 빈자리에서 빈자리로 날아다닌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잡아 흔들며, 때로는 텅빈 운동장을 돌며,/ 바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이 아름다운 바람을 볼 수 있으려면/ 오히려 눈을 감아야 함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다.//

황홀한 고백 /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 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반지 / 이해인
약속의 사슬로/ 나를 묶는다// 조금씩 신음하며/ 닳아 가는 너// 난초 같은 나의 세월/ 몰래 넘겨보며// 가늘게 한숨쉬는/ 사랑의 무게// 말없이 인사 건네며/ 시간을 감는다/ 나의 반려는// 잠든 넋을 깨우는/ 약속의 사슬//

내 혼(魂)에 불을 놓아 / 이해인
언제쯤 당신 아에 꽃으로 피겠습니까.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노을빛 바람이여. 봉오리로 맺혀 있던/ 갑갑한 이 아픔이 소리없이 터지도록 그 타는 눈길과/ 숨결을 주십시오. 기다림에 초조한 애 비 밀스런 가슴을/ 열어놓고 싶습니다. 나의 가느다란 꽃슬이 가느다란/ 슬픔을 이해하는 은총의 바람이여, 당신 앞에 '네'라고/ 대답하는 나의 목소리는 언제나 떨리는 3월입니다./ 고요히 내 혼에 불을 놓아 꽃으로 피워 내는 뜨거운 바람이여.//

아무래도 나는 / 이해인
누구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결국은 이렇듯 나 자신만을 챙겼음을/ 다시 알았을 때 나는 참 외롭다./ 많은 이유로 아프고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 곁을/ 몸으로 뿐 아니라 마음으로 비켜가는/ 나 자신을 다시 발견했을 때,/ 나는 참 부끄럽다.//

나를 위로하는 날 / 이해인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네// 큰일 나닌데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죽음을 맛볼 때// 남에겐 채 드러나지 않은/ 나의 허물과 약점들이/ 나를 잠 못들게 하고//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에/ 문 닫고 숨고 싶을 때// 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구/ 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 조금은 계면쩍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며/ 조용히/ 거울 앞에 설 때가있네// 내가 나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너그러워지는/ 동그란 마음/ 활짝 웃어주는 마음/ 남에게 주기 전에/ 내가 나에게 먼저 주는/ 위로의 선물이라네//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 이해인
손 시린 나목 가지 끝에/ 홀로 앉은 바람 같은 목숨의 빛깔// 그대의 빈 하늘 위에/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차 오르는 빛// 구름에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된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나의 뜨락에/ 바람이 차고 마음엔 불이 붙는 겨울날// 빛이 있어 혼자서도/ 풍요로워라// 맑고 높이 사는 법을 빛으로 출렁이는/ 겨울 반달이여//

부를 때마다 내 가슴에서 별이 되는 이름 / 이해인
내게 기쁨을 주는 친구야/ 오늘은 산숲의 아침 향기를 뿜어내며/ 뚜벅뚜벅 걸어와서 내 안에 한 그루 나무로서는/ 그리운 친구야/ 때로는 저녁노을 안고 조용히 흘러가는/ 강으로 내 안에 들어와서 나의 메마름을/ 적셔주는 친구야/ 어쩌다 가끔은 할말을 감추어 둔/ 한줄기 바람이 되어 내 안에서 기침을 계속하는/ 보고싶은 친구야/ 보고 싶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그리움과 설레임/ 파도로 출렁이는 내 푸른 기도를 선물로 받아 주겠니?/ 늘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 빙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아주던/ 따뜻한 친구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모였다가/ 어느 날은 한 편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되나보다/. 때로는 하찮은 일로 너를 오해하는/ 나의 터무니없는 옹졸함을/ 나의 이기심과 허영심과 약점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이해의 눈길로/ 감싸 안는 친구야/ 하지만 꼭 필요할 땐/ 눈물나도록 아픈 충고를 아끼지 않는/ 진실한 친구야/ 내가 아플 때엔 제일 먼저 달려오고/ 슬플 일이 있을 때엔 함께 울어 주며/ 기쁜 일이 있을 때엔 나보다 더 기뻐 해주는/ 고마운 친구야/ 고맙다는 말을 자주 표현 못했지만/ 세월이 갈수록 너는 또 하나의 나임을 알게된다...//

별을 보며 / 이해인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올려다본 날은/ 꿈에도 별을 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면/ 반짝이는 기쁨이/ 내 마음의 하늘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혼자일 줄 아는 별/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는 별/ 나도 별처럼 살고 싶습니다.// 얼굴은 작게 보여도/ 마음은 크고 넉넉한 별/ 먼 제까지 많은 이를 비추어 주는/ 나의 하늘 친구 별// 나도 날마다/ 별처럼 고운 마음/ 반짝이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바다새 / 이해인
이 땅의 어느 곳/ 누구에게도 마음 붙일 수 없어/ 바다로 온 거야// 너무 많은 것보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예까지 온 거야// 너무 많은 말들을/ 하고 싶지 않아/ 혼자서 온 거야// 아 어떻게 설명할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이 작은 가슴의 불길// 물 위에 앉아/ 조용히 식히고 싶어/ 바다로 온 거야// 미역처럼 싱싱한 슬픔/ 파도에 씻으며 살고 싶어/ 바다로 온 거야//

다시 바다에서 / 이해인
열여섯 살에 처음으로/ 환희의 눈물 속에/ 내가 만났던 바다// 짜디짠 소금물로/ 나의 부패를 막고/ 내가 잠든 밤에도/ 파도로 밀려와/ 작고 좁은 내 영혼의 그릇을/ 어머니로 채워주던 바다// 침묵으로 출렁이는/ 그 속 깊은 말/ 수평선으로 이어지는 기도를/ 오늘도 다시 듣네// 낮게 누워서도/ 높은 하늘 가득 담아/ 하늘의 편지를 읽어주며/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내게 영원을 약속하는/ 푸른 사제 푸른 시인을/ 나는 죽어서도/ 잊을 수 없네//

살아 있는 날은 / 이해인
마른 향내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아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있는 연필/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너에게 띄우는 글 / 이해인
사랑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진정한 친구이고 싶다./ 다정한 친구이기 보다는 진실이고 싶다./ 내가 너에게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다 하더라도/ 너는 나에게 만남의 의미를 전해 주었다./ 순간의 지나가는 우연이기 보다는 영원한 친구로 남고 싶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할 너와 나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친구이고 싶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너와 나의 만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진실로 너를 만나고 싶다./ 그래, 이제 더 나이기보다는 우리이고 싶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현실을 언제까지 변치 않는 마음으로 접어두자/ 비는 싫지만 소나기는 좋고/ 인간은 싫지만 너만은 좋다./ 내가 새라면 너에게 하늘을 주고/ 내가 꽃이라면 너에게 향기를 주겠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너에게 사랑을 준다//

가을 편지 / 이해인
늦가을, 산 위에 올라/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깊이 사랑할수록/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며 사라지는 나뭇잎들/ 춤추며 사라지는 무희들의/ 마지막 공연을 보듯이/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매일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지켜보듯이//

가을 편지 / 이해인
그 푸른 하늘에/ 당신을 향해 쓰고 싶은 말들이/ 오늘은 단풍잎으로 타버립니다// 밤새 산을 넘은 바람이/ 손짓을 하면/ 나도 잘 익은 과일로/ 떨어지고 싶습니다// 당신 손안에// 호수에 하늘이 뜨면/ 흐르는 더운피로/ 유서처럼 간절한 시를 씁니다// 당신의 크신 손이/ 우주에 불을 놓아/ 타는 단풍잎/ 흰 무명옷의 슬픔들을/ 다림질하는 가을// 은총의 베틀 앞에/ 긴 밤을 밝히며/ 결 고운 사랑을 짜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옛적부터 타던 사랑/ 오늘은 빨갛게 익어/ 터질 듯한 감홍시/ 참 고마운 아픔이여// 이름 없이 떠난 이들의/ 이름 없는 꿈들이/ 들국화로 피어난 가을 무덤가/ 흙의 향기에 취해/ 가만히 눈을 감는 가을/ 이름 없이 행복한 당신의 내가/ 가난하게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입니까// 감사합니다, 당신이여/ 호수에 가득 하늘이 차듯/ 가을엔 새파란 바람이고 싶음을/ 휘파람 부는 바람이고 싶음을/ 감사합니다// 당신 한 분 뵈옵기 위해/ 수 없는 이별을 고하며 걸어온 길// 가을은 언제나/ 이별을 가르치는 친구입니다// 이별의 창을 또 하나 열면/ 가까운 당신// 가을에 혼자서 바치는/ 낙엽 빛 기도/ 삶의 전부를 은총이게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의 매일을/ 기쁨의 은방울로 쩔렁이는 당신/ 당신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가을엔 들꽃이고 싶습니다/ 말로는 다 못할 사랑에/ 몸을 떠는 꽃// 빈 마음 가득히 하늘을 채워/ 이웃과 나누면 기도가 되는/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파란 들꽃이고 싶습니다// 유리처럼 잘 닦인 마음밖엔/ 가진 게 없습니다// 이 가을엔 내가/ 당신을 위해 부서진/ 진주 빛 눈물/ 당신의 이름 하나 가슴에 꽂고/ 전부를 드리겠다 약속했습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잡기 어려운 이여/ 나는 이제 당신 앞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끼 낀 바위처럼/ 정답고 든든한 나의 사랑이여/ 당신 이름이 묻어 오는 가을 기슭엔/ 수 만 개의 흰 국화가 떨고 있습니다// 화려한 슬픔의 꽃술을 달고/ 하나의 꽃으로 내가 흔들립니다/ 당신을 위하여/ 소리 없이 소리 없이/ 피었다 지고 싶은// 누구나 한번은/ 수의를 준비하는 가을입니다// 살아온 날을 고마워하며/ 떠날 채비에/ 눈을 씻는 계절/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 약속의 땅으로 뛰어가고 싶습니다// 낙엽 타는 밤마다/ 죽음이 향기로운 가을/ 당신을 위하여/ 연기로 피는 남은 생애/ 살펴 주십시오// 죽은 이들이 나에게/ 정다운 말을 건네는/ 가을엔 당신께 편지를 쓰겠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직은 마지막이 아닌/ 편지를 쓰겠습니다.//

가을 노래 / 이해인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 소리를 내면 비어 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흐르면 속삭이는 물이 되고 싶어요// 가을엔 바람이고 싶어요/ 서걱이는 풀잎의 이마를 쓰다듬다/ 깔깔대는 꽃 웃음에 취해 보는/ 연한 바람으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풀벌레이고 싶어요/ 별빛을 등에 업고/ 푸른 목청 뽑아 노래하는/ 숨은 풀벌레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감이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 매달린 그리움 익혀/ 당신의 것으로 바쳐 드리는/ 불을 먹은 감이 되고 싶어요//

어머니의 섬 / 이해인
늘 잔걱정이 많아/ 아직도 뭍에서만 서성이는 나를/ 섬으로 불러주십시오, 어머니// 세월과 함께 깊어 가는/ 내 그리움의 바다에/ 가장 오랜 섬으로 떠있는 어머니// 서른세 살 꿈속에/ 달과 선녀를 보시고/ 세상에 나를 낳아주신/ 당신의 그 쓸쓸한 기침소리는/ 천리 밖에 있어도/ 가까이 들립니다.// 헤어져 사는 동안/ 쏟아놓지 못했던/ 우리의 이야기를/ 바람과 파도가 대신해 주는/ 어머니의 섬에선/ 외로움도 눈부십니다./ 안으로 흘린 인내의 눈물이 모여/ 바위가 된 어머니의 섬/ 하늘이 잘 보이는 어머니의 섬에서/ 나는 처음으로 기도를 배우며/ 높이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되는 꿈을 꿉니다, 어머니//

단추를 달듯 / 이해인
떨어진 단추를/ 제자리에 달고 있는/ 나의 손등 위에/ 배시시 웃고 있는 고운 햇살// 오늘이라는 새옷 위에/ 나는 어떤 모양의 단추를 달까// 산다는 일은/ 끊임없이 새 옷을 갈아입어도/ 떨어진 단추를 제자리에 달 듯/ 평범한 일들의 연속이지// 탄탄한 실을 바늘에 꿰어/ 하나의 단추를 달 듯/ 제자리를 찾으며 살아야겠네// 보는 이 없어도/ 함부로 살아 버릴 수 없는/ 나의 삶을 확인하며/ 단추를 다는 이 시간// 그리 낯설던 행복이/ 가까이 웃고 있네//

고독을 위한 의자 / 이해인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으므로,/ 여럿 속에 있을 땐/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삶의 깊이와 무게를/ 고독 속에 헤아려볼 수 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 안 해야 할 일 분별하며/ 내밀한 양심의 소리에/ 더 깊이 귀기울일 수 있으므로,/ 그래/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내가나를 돌보는 시간/ 여럿 속의 삶을/ 더 잘 살아 내가 위해/ 고독 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 이해인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우산이 되어 / 이해인
우산도 받지 않은/ 쓸쓸한 사랑이/ 문 밖에 울고 있다// 누구의 설움이/ 비되어 오나/ 피해도 젖어오는/ 무수한 빗방울// 땅 위에 떨어지는/ 구름의 선물로 죄를 씻고 싶은/ 비 오는 날은 젖은 사랑// 수많은 나의 너와/ 젖은 손 악수하며/ 이 세상 큰 거리를/ 한없이 쏘다니리// 우산을 펴주고 싶어/ 누구에게나/ 우산이 되리/ 모두를 위해//

아침의 향기 / 이해인
아침마다 소나무 향기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고/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솔잎처럼/ 예리한 지혜와/ 푸른 향기로 나의 사랑이/ 변함없기를.../ 찬물에 세수하다 말고/ 비누향기 속에 풀리는/ 나의 아침에게 인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온유하게 녹아서/ 누군가에게 향기를 묻히는/ 정다운 벗이기를.../ 평화의 노래이기를...//

눈물 / 이해인
새로 돋아난/ 내 사랑의 풀숲에/ 맺히는 눈물// 나를 속일 수 없는// 한 다발의/ 정직한 꽃//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처럼/ 간절한 빛깔로/ 기쁠 때 슬플 때 피네// 사무치도록 아파 와도/ 유순히 녹아 내리는/ 흰 꽃의 향기// 눈물은 그대로/ 기도가 되네/ 뼛속으로 흐르는/ 음악이 되네//

사랑 / 이해인
우정이라 하기에는 너무 오래고/ 사랑이라 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좋아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남이란 단어가 맴돌곤 합니다./ 어처구니없이/ 난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신을 좋아한다고는 하겠습니다./ 외롭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할 때면/ 고독이 말없이 다가옵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사랑할수록 더욱 외로워진다는 것을.//

보고 싶다는 말 / 이해인
생전 처음 듣는 말처럼/ 오늘은 이 말이 새롭다// 보고 싶은데...... // 비오는 날의 첼로 소리 같기도 하고/ 맑은 날의 피아노 소리 같기도 한/ 너의 목소리// 들들 때마다/ 노래가 되는 말/ 평생을 들어도/ 가슴이 뛰는 말//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감칠맛 나는/ 네 말 속에 들어 있는/ 평범하지만 깊디깊은/ 그리움의 바다// 보고 싶은데...... // 나에게도/ 푸른 파도 밀려오고/ 내 마음에도 다시/ 새가 날고......//

친구에게 / 이해인
부를 때마다/ 내 가슴에서 별이 되는 이름/ 존재 자체로/ 내게 기쁨을 주는 친구야/ 오늘은 산숲의 아침 향기를 뿜어내며/ 뚜벅뚜벅 걸어와서/ 내 안에 한 그루 나무로 서는/ 그리운 친구야// 때로는 저녁노을 안고/ 조용히 흘러가는 강으로/ 내 안에 들어와서/ 나의 메마름을 적셔 주는 친구야/ 어쩌다 가끔은 할말을 감추어 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내 안에서 기침을 계속하는/ 보고 싶은 친구야// 보고 싶다는 말속에 들어 있는/ 그리움과 설레임/ 파도로 출렁이는 내 푸른 기도를/ 선물로 받아 주겠니?/ 늘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 빙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주던/ 따뜻한 친구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모였다가/ 어느 날은 한 편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되나 보다// 때로는 하찮은 일로 너를 오해하는/ 나의 터무니없는 옹졸함을/ 나의 이기심과 허영심과 약점들을/ 비난보다는 이해의 눈길로 감싸 안는 친구야/ 하지만 꼭 필요할 땐/ 눈물나도록 아픈 충고를 아끼지 않는/ 진실한 친구야// 내가 아플 때엔/ 제일 먼저 달려오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엔/ 함께 울어 주며/ 기쁜 일이 있을 때엔/ 나보다 더 기뻐해 주는/ 고마운 친구야/ 고맙다는 말을 자주 표현 못했지만/ 세월이 갈수록/ 너는 또 하나의 나임을 알게 된다.// 너를 통해 나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기뻐하는 법을 배운다./ 참을성 많고 한결같은 우정을 통해/ 나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본다./ 늘 기도해 주는 너를 생각하면/ 나는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나도 너에게 끝까지/ 성실한 벗이 되어야겠다고/ 새롭게 다짐해 본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 못해/ 힘든 때도 있었지만/ 화해와 용서를 거듭하며/ 오랜 세월 함께 견뎌 온 우리의 우정을/ 감사하고 자축하며/ 오늘은 한 잔의 차를 나누자/ 우리를 벗이라 불러 주신 주님께/ 정답게 손잡고 함께 갈 때까지// 우리의 우정을 더 소중하게 가꾸어 가자./ 아름답고 튼튼한 사랑의 다리를 놓아/ 많은 사람들이 춤추며 지나가게 하자.// 누구에게나 다가가서/ 좋은 벗이 되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모든 이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행복한 이웃/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벗이 되자./ 이름을 부르면 어느새 내 안에서/ 푸른 가을 하늘로 열리는/ 그리운 친구야...//

        친구야 너는 아니 / 이해인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줄 때 사실은 참 아픈거래/ 친구야 봄비처럼 아파도 웃으면서 너에게 가고픈 내 맘 아니/ 향기 속에 숨겨진 내 눈물이 한 송이 꽃이 되는걸 너는 아니// 우리 눈에 다 보이진 않지만/ 우리 귀에 다 들리진 않지만/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엄마가 혼잣말로 하시던 얘기가 자꾸 생각이 나는 날/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벗에게 1 / 이해인
내 잘못을 참회하고 나서/ 처음으로 맑고 투명해진/ 나의 눈물 한 방울/ 너에게 선물로 주어도 될까?// 때로는 눈물도/ 선물이 된다는 걸/ 너를 사랑하며 알았어// 눈물도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임을/ 네가 가르쳐주었어// 나와의 첫 만남을/ 울면서 감격하던 너// 너를 너무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내 마음/ 이해하면서도 힘들었지?// 나를 기다려주어 고맙고/ 나를 용서해주어 고맙고// 그래서 지금은 내가 울고 있잖아//

벗에게 2 / 이해인
내가 누구인지/ 벗이여/ 오늘은 그대에게 묻고 싶다// 잠에서 깨어나/ 거울 앞에서 바라보는/ 낯선 얼굴의 나// 밤길을 걷다/ 나를 따라붙는/ 나보다 큰/ 나의 검은 그림자가/ 두렵고 낯설었다/ 이젠 내가 나와 친해질 나이도 되었는데/ 갈수록 나에게서 멀어지는 슬픔// 나를 찾지 못한 부끄러움에/ 오늘도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내게// 벗이여/ 무슨 말이라도 해다오//

벗에게 3 / 이해인
내가 죽더라도/ 너는 죽지 않으면 좋겠다/ 꼭 죽어야 한다면/ 내가 먼저 죽으면 좋겠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같은 날 같은 시에 죽으면 좋겠다// 이 또한/ 터무니 없는 욕심이라고/ 너는 담담히 말을 할까// 우정보다 더 길고 깊은/ 하나의 눈부신 강이 있다면/ 그 강에 너를 세우겠다// 사랑보다 더 높고 푸른/ 하나의 신령한 산이 있다면/ 그 산에 너를 세우겠다// 내게 처음으로/ 하늘과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내 목숨보다/ 귀한 벗이여//

우정일기 1 / 이해인
1/ 내 마음속엔 아름다운 굴뚝이 하나 있지. 너를 향한 그리움이 하얀 연기로 피어오르다 노래가 되는 너의 집이기도 한 나의 집. 이 하얀 집으로 너는 오늘도 들어오렴, 친구야.//
2/ 전에는 크게, 굵게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한꺼번에 많은 것을 이야기하더니 지금은 작게, 가늘게 내리는 이슬비처럼 조용히 내게 오는 너. 네가 어디에 있든지 너는 쉬임없이 나를 적셔준다.//
3/ 소금을 안은 바다처럼 내 안엔 늘 짜디짠 그리움이 가득하단다. 친구야. 미역처럼 싱싱한 기쁨들이 너를 위해 자라고 있단다. 파도에 씻긴 조약돌을 닮은 나의 하얀 기도가 빛나고 있단다.//
4/ 네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구나. 네 대신 아파줄 수 없어 안타까운 내 마음이 나의 몸까지도 아프게 하는 거 너는 알고 있니? 어서 일어나 네 밝은 얼굴을 다시 보여주렴. 내게 기쁨을 주는 너의 새 같은 목소리도 들려주렴.//
5/ 내가 너를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너도 보고 싶니, 내가?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처럼 너도 좋아하니, 나를? 알면서도 언제나 다시 묻는 말. 우리가 수없이 주고받는 어리지만 따뜻한 말. 어리석지만 정다운 말.//
6/ 약속도 안했는데 똑같은 날 편지를 썼고, 똑같은 시간에 전화를 맞걸어서 통화가 안되던 일, 생각나니? 서로를 자꾸 생각하다보면 마음도 쌍둥이가 되나보지?//
7/ '내 마음에 있는 말을 네가 다 훔쳐가서 나는 편지에도 더 이상 쓸말이 없다'며 너는 종종 아름다운 불평을 했지? 오랜만에 네게 편지를 쓰려고 고운 편지지를 꺼내놓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무슨 말을 쓸거니?' 어느새 먼저 와서 활짝 웃는 너의 얼굴. 몰래 너를 기쁘게 해주려던 내 마음이 너무 빨리 들켜버린 것만 같아서 나는 더 이상 편지를 쓸 수가 없구나.//
8/ '밥 많이 먹고 건강해야 돼. 알았지?' 같은 나이에도 늘 엄마처럼 챙겨주는 너의 말. '보고 싶어 혼났는데... 너 혹시 내 꿈 꾸지 않았니?' 하며 조용히 속삭이는 너의 말. 너의 모든 말들이 내게는 늘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구나, 친구야.//
9/ 나를 보고 미소하는 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아도, 네가 보내준 편지들을 다시 꺼내 읽어봐도 나의 그리움은 채워지질 않는구나. 너와 나의 추억이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으로 빛을 발한다 해도 오늘의 내겐 오늘의 네 소식이 가장 궁금하고 소중할 뿐이구나, 친구야.//
10/ 비오는 날 듣는 뻐꾹새 소리가 더욱 새롭게 반가운 것처럼 내가 몹시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네가 내게 들려준 위로의 말은 오랜 세월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단다.//
11/ 아무도 모르게 숲에 숨어 있어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와 나를 안아주는 햇빛처럼 너는 늘 조용히 온다.//
12/ 네가 평소에 무심히 흘려놓은 말들도 내겐 다 아름답고 소중하다. 우리집 솔숲의 솔방울을 줍듯이 나는 네 말을 주워다 기도의 바구니에 넣어둔다.//
13/ 매일 산 위에 올라 참는 법을 배운다. 몹시 그리운 마음, 궁금한 마음, 즉시 내보이지 않고 절제할 수 있음도 너를 위한 또 다른 사랑의 표현임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다. 매일 산 위에 올라 바다를 보며 참는 힘을 키운다. 늘 보이지 않게 나를 키워주는 고마운 친구야.//

우정일기 2 / 이해인
14/ 내 얕은 마음을 깊게 해주고, 내 좁은 마음을 넓게 해주는 너. 숲속에 가면 한그루 나무로 걸어오고, 바닷가에 가면 한점 섬으로 떠서 내게로 살아오는 너. 늘 말이 없어도 말을 건네오는 내 오래된 친구야, 멀리 있어도 그립고 가까이 있어도 그리운 친구야.//
15/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천사의 몫을 하는 게 아니겠어? 참으로 성실하게 남을 돌보고, 자기를 잊어버리고, 그래서 몸과 마음이 늘 사랑 때문에 가벼운 사람은 날개가 없어도 천사가 아닐까? 오늘은 그런 생각을 해보았어.//
16/ 친구야, 이렇게 스산한 날에도 내가 춥지 않은 것은 나를 생각해 주는 네 마음이 불빛처럼 따스하게 가까이 있기 때문이야. 꼼짝을 못하고 누워서 앓을 때에도 내가 슬프지 않은 것은 알기만 하면 먼데서도 금방 달려올 것 같은 너의 그 마음을 내가 읽을 수 있기 때문이야. 약해질 때마다 나를 든든하게 하고, 먼데서도 가까이 손잡아 주는 나의 친구야, 숨어 있다가도 어디선지 금방 나타날 것만 같은 반딧불 같은 친구야.//
17/ 방에 들어서면 동그란 향기로 나를 휘감는 너의 향기. 네가 언젠가 건네준 탱자 한알에 가득 들어 있는 가을을 펼쳐놓고 나는 너의 웃음소릴 듣는다. 너와 함께 있고 싶은 나의 마음이 노란 탱자처럼 익어간다.//
18/ 친구야, 너와 함께 별을 바라볼 때 내 마음에 쏟아져 내리던 그 별빛으로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너와 함께 갓 피어난 들꽃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을 가득 채우던 그 꽃의 향기로 나는 너를 그리워한다.//
19/ 네가 만들어준 한 자루의 꽃초에 나의 기쁨을 태운다. 초 안에 들어 있는 과꽃은 얼마나 아름답고 아프게 보이는지. 하얀 초에 얼비치는 꽃들의 아픔 앞에 죽음도 은총임을 새삼 알겠다. 펄럭이는 꽃불 새로 펄럭이는 너의 얼굴. 네가 밝혀준 기쁨의 꽃심지를 돋우어 나는 다시 이웃을 밝히겠다.//
20/ 너는 아프지도 않은데 '아프면 어쩌나?' 미리 근심하며 눈물 글썽인다. 한동안 소식이 뜸할 뿐인데 '나를 잊은 것은 아닌가?' 미리 근심하며 괴로워한다. 이러한 나를 너는 바보라고 부른다.//
21/ '축하한다. 친구야!' 네가 보내준 생일카드 속에서 한묶음의 꽃들이 튀어나와 네 고운 마음처럼 내게 와 안기는구나. 나를 낳아주신 엄마가 더욱 고맙게 느껴지는 오늘. 내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너를 만날 수도 없었겠지? 먼데서 나를 보고 싶어하는 네 마음이 숨차게 달려온 듯 카드는 조금 얼굴이 상했구나. 그 카드에 나는 입을 맞춘다.//
22/ 친구야, 너는 눈물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니? 너무 기쁠 때에도, 너무 슬플 때에도 왜 똑같이 눈물이 날까?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가 호수처럼 고여오기도 하고, 폭포처럼 쏟아지기도 하는 눈물. 차가운 나를 따스하게 만들고, 경직된 나를 부드럽게 만드는 고마운 눈물. 눈물은 묘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내 안에도 많은 눈물이 숨어 있음을 오늘은 다시 알게 되어 기쁘단다.//
23/ 아무리 서로 좋은 사람과 사람끼리라도 하루 스물네 시간을 함께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것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를 늘 쓸쓸하게 하는 것 중의 하나란다. 너무 어린 생각일까?// 24/ 나는 따로 집을 짓지 않아도 된다. 내 앞에서 네가 있는 장소는 곧 나의 집인 것이기에, 친구야. 나는 따로 시계를 보지 않는다. 네가 내 앞에 있는 그 시간이 곧 살아 있는 시간이기에, 친구야. 오늘도 기도 안에 나를 키워주는 영원한 친구야.//

비밀 / 이해인
겹겹이 싸매 둔 장미의 비밀은/ 장미 너만이 알고/ 속으로 피흘리는 나의 아픔은/ 나만이 안다// 살아서도 죽어 가는/ 이 세상 비인 자리// 이웃과 악수하며 웃음 날리다/ 뽀얀 외롬 하나/ 구름으로 뜨는 걸/ 누가 알까// 꽃밭에 불밝힌 장미의 향기보다/ 더 환히 뜨겁고/ 미쁜 목숨 하나// 별로 뜨는 사랑/ 누가 알까//

왜 그럴까, 우리는 / 이해인
자기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는/ 그리도 길게 늘어놓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네/ 아니, 처음부터 아예/ 듣기를 싫어하네// 해야 할 일 뒤로 미루고/ 하고 싶은 것만 골라하고/ 기분에 따라/ 우선 순위를 잘도 바꾸면서/ 늘 시간이 없다고 성화이네// 저 세상으로 떠나기 전/ 한 조각의 미소를 그리워하며/ 외롭게 괴롭게 누워 잇는 이들에게도/ 시간 내어주기를 아까워하는// 건강하지만 인색한 사람들/ 늘 말로만 그럴듯하게 살아 있는/ 자비심 없는 사람들 모습 속엔/ 분면 내 모습도/ 들어 잇는 걸/ 나는 말고 있지// 정말 오 그럴까/ 왜조금 더/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 그토록 이기적일까, 우리는.......//

어느 말 한 마디가 / 이해인
어느 날 내가 네게 주고 싶던/ 속 깊은 말 한 마디가/ 비로소 하나의 소리로 날아갔을 제/ 그 말은 불쌍하게도/ 부러진 날개를 달고 되돌아왔다/ 네 가슴 속에 뿌리를 내려야 했을/ 나의 말 한 마디는/ 돌부리에 채이며 곤두박질치며/ 피 묻은 얼굴로 되돌아왔다/ 상처받은 그 말을 하얀 붕대로 싸매 주어도/ 이제는 미아처럼 갈 곳이 없구나/ 버림받은 고아처럼 보채는 그를/ 달랠 길이 없구나/ 쫓기는 시간에 취해 가려진 귀를/ 조금 더 열어 주었다면/ 네 얼어붙은 가슴을/ 조금 더 따뜻하게 열어 주었다면/ 이런 일이 있었겠니/ 말 한 마디에 이내 금이 가는 우정이란/ 얼마나 슬픈 것이겠니/ 지금은 너를 원망해도 시원찮은 마음으로/ 또 무슨 말을 하겠니/ 네게 실연당한 나의 말이/ 언젠가 다시 부활하여 너를 찾을 때까지/ 나는 당분간 입을 다물어야겠구나/ 네가 나를 받아들일 그 날을 기다려야겠구나//

 

 

[스크랩] 이해인 시 모음♣ 5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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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李海仁, 본명: 이명숙)은 천주교 수녀, 시인
1945년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하였다. 태어난지 3일만에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서울 창경초등, 부산 동래여중, 김천 성의여고, 필리핀 성 루이스 대학 영문학과 졸업, 서울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하였다. 1964년에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입회한 이후부터 '해인'이라는 필명으로 천주교 발간 잡지《소년》에 작품을 투고하기 시작했다. 1968년에 첫 서원을 하였고, 1976년에 종신서원을 하였다. 1976년에 첫 시집인《민들레의 영토》를 발간하였다. 1998년~2002년 부산 가톨릭대학교의 교수로 지산교정에서 '생활 속의 시와 영성' 강의하였다. 그의 작품 《말의 빛》은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언어 영역 읽기 교과서에 실렸다. 시집으로 민들레의 영토, 내 혼에 불을 놓아,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시간의 얼굴, 엄마와 분꽃,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작은 위로, 작은 기쁨, 엄마, 희망은 깨어있네, 작은기도, 이해인 시전집1. 2,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산문집, 번역서가 다수 있다. 새싹문학상, 여성동아 대상, 부산여성 문학상, 천상병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