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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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10. 1.

터미널 1 / 이홍섭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터미널 2 / 이홍섭
강릉고속버스터미널 기역 자 모퉁이에서/ 앳된 여인이 간난아이를 안고 울고 있다/ 울음이 멈추지 않자/ 누가 볼세라 기역 자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다// 저 모퉁이가 다 닳을 동안/ 그녀가 떠나보낸 누군가는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며/ 그녀는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는데//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든 아이는 앳되고 앳되어/ 먼 훗날, 맘마의 저 울음을 기억할 수 없고/ 기역 자 모퉁이만 댕그라니 남은 터미널은/ 저 넘치는 울음을 받아줄 수 없다//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돌아오는 터미널에서/ 저기 앳되고 앳된 한 여인이 울고 있다//

터미널 3 / 이홍섭
오늘부터 어머니는 텅 빈 자궁이다// 한때 머물렀던 집으로/ 나는 이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 평생 지아비 병수발로/ 간신히 여성이었던 어머니, 마취에서 깨어나시면/ 차마 시원하실까// 갓 태어난 아이들의 울음소리 요란한 산부인과/ 간이 침대에서/ 나는 텅 빈 천장을 보고 있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텅 텅 빈 터미널에 서 있다//

터미널 4 / 이홍섭
이 터미널은 지하 1층 지상 3층// 지하에는 장례식장/ 지상 3층에는 산부인과/ 그 사이를/ 늙고 병든 환자들이 오간다// 사람들은 3층에서 태어나/ 지하로 내려갔다가/ 검은 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퀭한 눈으로/ 주머니 속의 차표를 만지작거린다//

터미널 5 / 이홍섭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늙으신 아버지 앞에서 몸을 부르르 떤 일/ 슬픈 어머니 곁을 떠나려 했던 일/ 한 여인을 끝끝내 사랑하지 못한 일//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푸른 하늘을 향해 팔뚝질했던 일/ 컴컴한 밤, 죽어서 외로운 부도를 향해 오줌발을 세웠던 일/ 한 여인을 끝끝내 떠나보내지 못한 일//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다시 돌아오는 이 터미널//

터미널 6 / 이홍섭
떠나갈 버스도/ 돌아올 버스도 없는 텅 빈 터미널// 한 소나기 퍼붓다 지나간 들판마냥/ 텅 빈 적막 위에서/ 청소 아주머니들이 쓰레기통들을 연다// 깡통은 깡통대로,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대로/ 종이는 종이대로/ 다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내 떠나면/ 내 안의 어둠도 저렇듯 쏟아져나와/ 텅 빈 터미널을 채울 것인가// 청소 아주머니들이 돌아가자/ 적막이 벌떡 일어나/ 천천히 터미널의 지퍼를 올린다//

터미널7 -美林山房記 / 이홍섭
아이의 울음소리 들리는 곳에 짐을 풀었으나/ 내 울음만 듣다 한철을 보냈다// 아이의 말이 트일 때쯤 짐을 싸려 했으나/ 이제는 가난한 애비가 문장을 만들지 못한다// 아이가 말을 얻고, 애비가 문장을 잃는 사이/ 짐을 풀고, 짐을 싸기를 반복하는 사이// 너가 오고 내가 가는 이 아름다운 이승에/ 우리가 머물다 갈 소슬한 집 한 채가 다 지어졌다//

터미널 8 / 이홍섭
도립병원, 암수 서로 정다운 은행나무 두 그루 사이로/ 검은 장의차 한 대가 빠져 나온다// 하루에도 두세 번 문을 열었다 닫는/ 은행나무 부부가/ 장의차 위로 샛노란 은행잎 몇 장을 띄워 준다// 인간보다 오랫동안/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해 온 저 은행잎이/ 오늘은 죽은 자를 안내할 것이다//

터미널 9 / 이홍섭
아난다*야, 밤하늘의 별들이 유난히 반짝이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이 터미널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아난다야, 나는 평생토록 병원과 터미널에 쪼그리고 앉아 생을 구경(究竟)하여 왔으니, 나의 경전 또한 그곳에서 펼쳐볼 수 있을 것이다. 아난다야, 슬퍼하지 마라. 이 세상은 만나서 아프고, 또 헤어져서 아픈 것이다. 슬픔은 너무도 가까이에 있고, 기쁨은 별똥별처럼 사라지고 만다. 아난다야, 산다는 것은 그렇게 아픈 것이다. 저 모텔의 불빛처럼 우리는 모두 지나가는 객일 뿐이다. 아난다야, 그러니 문고리를 붙잡고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이제 버스가 오면 나는 다시 객으로 돌아간다. 아난다야, 슬퍼하지 마라. 산다는 것은 그렇게 아픈 것이다.//
* 아난다: 붓다를 오랫동안 곁에서 시봉한 제자. 붓다의 열반을 지켰다.

밤비 / 이홍섭
남들 회사갈 때/ 나 절에 간다/ 내 거처는 非僧非俗의 언덕 한켠// 나의 본업은/ 밤 새워 내리는 밤비를/ 요사채 뒤뜰 항아리에 가득 담는 일/ 하지만/ 내리는 밤비는/ 항아리를 가득 채우지 못하니// 나의 부업은/ 나머지 빈 곳을 채우는 일/ 나는/ 항아리를 껴안고/ 비 내리는 꿈속을 헤맨다//

입술 / 이홍섭
수족관 유리벽에 제 입술을 빨판처럼 붙이고/ 간절히도 이쪽을 바라보는 놈이 있다/ 동해를 다 빨아들이고야 말겠다는 듯이/ 입술에다 무거운 자기 몸 전체를 걸고 있다/ 저러다 영원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유리를 잘라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시라는 게, 사랑이라는 게/ 꼭 저 입술만하지 않겠는가// 오동꽃 / 이홍섭
오동꽃이 왔다/ 텅 빈 눈 속에// 이 세상 울음을 다 듣는다는 관음보살처럼/ 그 슬픈 천 개의 손처럼/ 가지마다 촛대를 받치고 섰는 오동나무// 오랜 시간 이 신전 밑을 지나갔지만/ 한 번도 불을 붙인 적 없었으니// 사방으로 날아가는 장작처럼/ 그 덧없는 도끼질처럼/ 나는 바다로, 깊은 산속으로 떠돌았다// 내 울음을 내가 들을 수 없는 일/ 自己를 붙잡고 운 뒤에야/ 울음이 제 몸을 텅 텅 비우고 난 뒤에야/ 쇠북처럼 울음은 비로소 가두어지고// 먼 곳에서 오동꽃이 왔다/ 갸륵한 신전이 불을 밝혔으니/ 너는 오래오래 울리라//

목련 / 이홍섭
꽃피는 봄날에도/ 군용담요를 펴고/ 으라차차 화투장을 까는 봄날에도/ 일진 사나운 한 사내가 있어/ 물끄러미/ 자기 패를 들여다보고 있나니// 낙장불입이로다/ 낙장불입이로다//

민들레 / 이홍섭
사랑은 귀신도 모르게 해야 한다는데/ 내 사랑 감출 수 없어 꽃으로 피어났어요// 구하지 않았는데 밤하늘에 별이 뜨고/ 부르지 않았는데 청청하늘에 시린 낮달이 떠요// 후, 불면 날아가는 게 사랑인 줄 알지만/ 그래도 명치끝에는 언제나 맑은 옹이가 남아 있어// 그 힘과 그 부끄러움으로 길게 목을 빼어요//

달맞이꽃 / 이홍섭
한 아이가 돌을 던져놓고/ 돌이 채 강에 닿기도 전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던/ 돌 같던 첫사랑도 저러했으리//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왔거나/ 그로부터 너무 멀리 가지 못했다//

해바라기 / 이홍섭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순교한 적이 있었던가/ 목울대가 넘치도록/ 울어본 적이 있었던가// 저토록 빼곡이/ 자잘한 상처들만 보듬어왔으니// 내 한 번도/ 고개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메밀꽃 필 무렵 / 이홍섭
이국종(異國種) 당나귀의 귀가 순해지는 밤// 오랫동안 헤매었던 사내의 몸에서/ 개울처럼 피가 빠져 나갑니다// 영 너머 처녀무당은/ 역마의 피가 다 빠지고 나면/ 흰 당나귀 눈망울에서/ 싸래기눈 같은 꽃이 피리라 했습니다//

 

갈대의 춤 / 이홍섭
잎을/ 다 던져버린 나무들이야말로/ 흐르는 강물의 비밀을/ 알 것 같으다 사시사철 푸르른 잎 튀웠던/ 나무들이야말로/ 강물의 끝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 같으다// 그러나, 온몸의 피/ 다 던져버린 갈대의 춤은/ 얼마나 외로우리 바람 불면 우거지는/ 슬픔의 면적은/ 또한 얼마나 넓으리/ 강물 흐르다 멈춘 자리에/ 나를 멈추어 세우고/ 정신없이 바라보는/ 저 황홀한 춤//

                 꽃 피지 않았던들 / 이홍섭

그대 사랑/ 꽃 피는 바람에 사라졌습니다/
꽃 피지 않았던들/ 우리 사랑 헤어졌을까요//

밤에 듣는/ 빗소리, 천 년의 시간을 펼쳤다 접는/ 저 연잎의 하염없음으로/ 우리 사랑, 밤을 건넜겠지요//

그대 사랑/ 꽃 피는 바람에 사라졌습니다/
꽃 피지 않았던들/ 우리 사랑 언제까지나/
후두둑 후두둑 피어났겠지요//

꽃 피지 않았던들/ 꽃처럼 피어났겠지요//


청단풍 아래 / 이홍섭
나는 불행하다/ 이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 앞산 은 온통 붉게 물드는데/ 나는 여전히 푸르고// 사랑하는 사람은 앞을 지나가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내 붉은 가슴을 열어 보인들/ 당신이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스스로 문을 연다는 정선 자개골,/ 그 골짜기 끝에 서있는 청단풍 한그루// 나는 불행하다/ 이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

매화의 창 / 이홍섭
어느 귀머거리 화가가 그려준/ 매화 한 폭을/ 벽에 걸어놓았더니// 어느 날 벽이 열리면서/ 창이 하나 났다// 벙그는 매화 사이로/ 당나귀 한 마리와/ 조금 무거워 보이는 봇짐과/ 싸래기눈이 지나갔다//

버드나무 한 그루 / 이홍섭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버드나무 한 그루/ 수도승처럼 긴 머리칼과/ 하염없는 그림자// 마을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누구나 버드나무 밑을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온몸에 묻은 버드나무 그림자를/ 금세 잊어버린다// 저물녘, 노을진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버드나무 한 그루/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힘으로/ 그 밑을 지나왔던 기억을 되살린다/ 마치 버드나무 아래에서/ 사진이라도 찍어놓았다는 듯// 밞음과 어둠 사이/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버드나무 한 그루를 거기 있게 한다//

벌초 / 이홍섭
벌초라는 말 참 이상한 말입디다. 글쎄 부랑 무식한 제가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큰 집 조카들을 데리고 벌초를 하는데, 이 벌초라는 말이 자꾸만 벌 받는 초입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 원 참 부모님 살아 계실 때 무던히 속을 썩여드리긴 했지만......조카들이 신식 예초기를 가져왔지만 저는 끝까지 낫으로 벌초를 했어요, 낫으로 해야 부모님하고 좀더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들고, 뭐 살아 계실 적에는 서로 나누지 않던 얘기도 주고받게 되고, 허리도 더 잘 굽혀지고......앞으로 산소가 없어지면 벌 받을 곳도 없어질 것 같네요, 벌 받는 초입이 없어지는데 더 말해 무엇 하겠어요, 안 그래요, 형님//

주인 / 이홍섭
아이가/ 힘겹게 뒤집기를 시작하면서/ 이 철없는 세상을 용서하기로 했다// 마흔 넘어 찾아온 아이가/ 외로 자기 시작하면서/ 이 외로운 세상을 용서하기로 했다// 바람에 뒤집히는 감잎 한 장/ 엉덩이를 치켜들고 전진하는 애벌레 한 마리도/ 여기 이 세상의 어여쁜 주인이시다// 힘겹고, 외로워도/ 가야 하는 세상이 저기 있다//

안반데기 / 이홍섭
이 세상에 관하여 뭘 몰랐을 때/ 강파른 이곳에 왔었다면/ 단지 푸른 배추밭으로만 기억했을 것이다// 참나무 가지를 뚝뚝 꺾으며/ 이곳에 오는 이유는/ 바위 위에 척 엉덩이를 붙인 저 배추 밑동이 부러웠을 터// 재 너머 수하리 갱변에다 밭을 일구지 않고/ 숨이 턱까지 차는 산비탈을 깎은 화전민들/ 그들도 여기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엉덩이를 붙인 채/ 하늘을 향해 푸르고, 거친 숨을 내쉬었을 터// 서러운 삶에 관해 뭘 몰랐을 때/ 이곳에 왔었다면/ 단지 길을 잃었을 뿐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강릉, 프라하, 함흥 / 이홍섭
카프카는/ 살아서 프라하를 떠나지 않았다/ 뾰족탑의 이끼와/ 겨울 안개가/ 그를 기억한다// 내곡동 지나/ 보쌀 지나/ 남대천 둑방을 따라/ 바다로 간다/ 안목에 가면/ 바다가 둥지고, 바다가 무덤인/ 갈매기들이 산다//

춘천, 프라하, 함흥 / 이홍섭
이렇게 안개가 내리면/ 귀가 커 외롭던 카프카가 좋고/ 모르긴 해도, 당나귀를 닮았을 백석(白石)이 좋다// 멀리 불빛, 불빛 같은 것도 잠기고/ 살아 있는 것들 모두 겸손하게 사라질 때/ 언덕 위 자취방에 돌아와/ 주인집 노부부가 아끼는 노란 국화를 바라보는 일도//

초당 순두부 / 이홍섭
순두부 같은 밤이 온다/ 모질게 마음 먹어도/ 나는 늘 초당바닷가에 서 있다// 모두가 떠난 뒤/ 바다소나무에 기대어/ 꾸역꾸역 토하던 여름밤/ 캄캄한 해변과/ 외로움에 떨던 너// 모두부 같은 마음도/ 다 부질없다/ 부질없다고 너는 또 말한다// 순두부가 오는 밤//

영월 / 이홍섭
영월에 가면 세수하고 싶다// 영월에 가면/ 먼저 서강에 가서/ 이 마을 처녀처럼 세수하고 싶다// 비누가 없어도/ 비누거품 하나 일지 않아도/ 물처럼 만져지는/ 내 맨 얼굴 같은 거// 영월에 가면/ 영월에 가면/ 서강 갱변*의 모래 같은/ 해정한 사내가 되어/ 이 마을 처녀 곁에서/ 세수하고 싶다//
* 갱변: 주위가 넓게 터진 공간, '강변'의 강원도 사투리.

서귀포 / 이홍섭
울지 마세요/ 돌아갈 곳이 있겠지요/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구멍 숭숭 뚫린/ 담벼락을 더듬으며/ 몰래 울고 있는 당신, 머리채 잡힌 야자수처럼/ 엉엉 울고 있는 당신/ 섬 속에 숨은 당신/ 섬 밖으로 떠도는 당신// 울지 마세요/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동강할미꽃 / 이홍섭
마흔 넘어 낳은 늦둥이 아들놈 보고 싶어 태권도 학원에 갔더니 계단을 내려오던 조무래기 한 놈이 “할아버지세요?”라고 물으며 빤히 쳐다본다. 창졸간에 한 세대를 건너고 보니 지나온 세월이 꽤 무상하기는 한 것이었다.// 절벽 끝에서 처녀보다 더 빛나는 동강할미꽃도 자기 이름을 처음 불러준 이가 참으로 미웠을 것이다. 미워서 맑디맑은 동강에 얼굴을 비추고는 동강처녀꽃, 동강처녀꽃 하고 수없이 되뇌었을 것이다. 되뇌이다, 되뇌이다 처녀보다 더 빛나게 되었을 것이다.//

낙산사 배꽃 / 이홍섭
의상은 가고/ 배꽃 같은 선묘는 홀로 남아/ 떠나간 의상을 그리워하니// 그 천 년의 기다림으로/ 낙산사는 여자가 되었다// 배꽃이 필 때면/ 선묘는 그리움을 실어 먼 바다에 몸을 맡기고/ 그러면, 빈 절을 지키는 담장에는/ 온통 눈물 같은 별들이 돋아나니// 배꽃 필 때/ 낙산사에 오면/ 선묘는 없고, 댕그라니 담장만 남아 있다/ 담장만 남아서/ 가슴에 박힌 별들을 뜯어내고 있다//

​ 한계령 / 이홍섭
사랑하라 하였지만/ 나 이쯤에서 사랑을 두고 가네// 길은 만신창이// 지난 폭우에/ 그 붉던 단풍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집도 절도 없이/ 애오라지 헐떡이는 길만이 고개를 넘네// 사랑하라 하였지만/ 그 사랑을/ 여기에 두고 가네// 집도 절도 없으니/ 나도 당신도 여기에 없고// 애간장이 눌어붙은 길만이/ 헐떡이며, 헐떡이며/ 한계령을 넘네//

대관령 입새 / 이홍섭
구정 전날인데/ 대관령 입새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안경을 벗어들고/ 보도블록에 주저앉아 훌쩍이고 있다// 제삿날만 되면/ 뜨내기 서울살이의 설움을 굽이굽이 싣고 와/ 한바탕 마당에 풀어놓다가/ 술 깬 다음날이면/ 문밖에서 서성이던 삼촌일까// 상고 밴드부장 출신으로/ 밤거리를 전전하다/ 어느 날 밤 대관령을 넘어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작은댁 막내 아저씨일까// 구정 전날인데/ 친척들은 다 모였을 텐데/ 훌쩍이는 남자는 일어설 줄 모른다//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 입새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남애 / 이홍섭
어쩌면 없는 당신을 찾아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없지만 남애,* 라고 부르면/ 왠지 금방이라도 따뜻해질 것 같아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은 없지만, 없는 당신이 이곳으로 저를 데려왔습니다/ 가슴에 돌을 달고 오랫동안 이 바닷가에 머물고 싶습니다// 햇볕에 달아오르는 돌이 천천히 당신을 불러오리라 믿습니다//
*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에 있는 해변

소래 포구 / 이홍섭
소래 포구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소래, 하고 부르면 소래가 올 것 같아요// 여래를 본 적이 없지만/ 여래, 하고 부르면/ 이 덧없는 사바를 건널 수 있을 것처럼요// 아주 작은 포구라지요/ 내 작은 입술을 댈 만은 한가요// 그곳으로 가는 철길도 남아 있다지요/ 가슴을 대면 저 멀리서 당신의 바다가 일렁인다지요// 소래, 하고 부르면 당신은 정말 오시나요/ 여래, 하고 부르면/ 파도치는 난바다를 잠재울 수 있는 것처럼// 소래, 하고 부르면/ 빈 배 저어저어 당신의 포구에 닿을 수 있나요//

안목 하구 / 이홍섭
하구로 가는 길이/ 마음의 골짜기 같을 때/ 그 깊은 골짜기 어디쯤에/ 슬픔도 따라오지 못할 길이 있었던가// 너무 버거워/ 그림자를 물에 담그면/ 태평양 같은 삶이/ 환히 보이곤 했었다// 그 깊은 골짜기 어디쯤에/ 자기 상처가 둥지인 새 한 마리/ 훨훨 날고 있었던가//

영북(嶺北) / 이홍섭
꽝꽝 얼어붙은 강 밑에서/ 내장까지 다 보여주며/ 나 좀 봐, 나 좀 봐 하는 빙어를 보면/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살과 뼈가 녹아가며/ 침묵의 거친 숨을 내쉬는 황태를 보면/ 꼭, 꼭 이놈이 시인 같다// 겨울이 와서/ 새들도 날지 않는 겨울이 와서/ 빙어와/ 황태와/ 꽝꽝 얼어붙은 강과// 눈보라 치는 언덕//

서강(西江)에 눕다 / 이홍섭
시 한 줄 떠오르면 돌로 지긋이 눌러놓고/ 봉긋이 솟아오른 앞산도 저만치 밀어놓고// 독하게, 가슴 가득 찬 빈 잔처럼 아득하게/ 맑디 맑은 서강은 길게만 누웠네//

청파(靑坡) 여관 -경포 / 이홍섭
두 량짜리 기차가/ 지나가던 그곳에/ 이제는 기차 지나가지 않고// 대신, 기차 지나가는 소리에/ 가슴 저미던 여관이 하나 남아 있는데// 나는 자꾸만/ 죽은 나방이 끼어 있는 숙박부를 뒤적이며/ 속도를 줄이던 딸랑이 소리며/ 커져오던 불빛이며/ 기차바퀴처럼 따스했던 수선스러움을/ 생각하는 것이다//

등대 / 이홍섭
나 후회하며 당신을 떠나네//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 지친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불빛을 잘못 보고/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이제 떠나면/ 다시는 후회가 없을 터/ 등 뒤에서, 등 앞으로/ 당신의 불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먼 바다로 나아갈 터//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이라// 나 후회하며/ 어둠 속으로 나아가네//

다람쥐 / 이홍섭
가을산 시린 계곡에/ 독거노인처럼 앉아 있는데/ 어디서 쪼르르 새끼 다람쥐 한 마리// 너와 내가 바라보는/ 앞산의 단풍도/ 어제의 단풍이 아니듯// 저 단풍이 다 지고 나면/ 또 멀리서 우리 앞에/ 흰 눈이 한 자씩 내려오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새끼 다람쥐 여린 등에는 줄무늬가 다섯 개, 꼬리 끝까지 이어진/ 시리디시린 운명줄이 한 개// 갈 길 첩첩한 늦둥이 아들놈도/ 어느새 쪼르르 다섯 살//

무지개 / 이홍섭
서산 너머에서 밤새 운 자 누구인가/ 아침 일찍 무지개가 떴네// 슬픔이 저리도 둥글 수 있다면/ 내 낡은 옷가지 서넛 걸어놓고/ 산 너머 당신을 만나러 갈 수 있겠다// 아픔이 저리도 봉긋할 수 있다면/ 분홍빛 당신의 가슴에/ 내 지친 머리를 파묻을 수 있겠다// 서산에 뜬 무지개는/ 당신의 눈물처럼 참 맑기도 하지//

​구멍 / 이홍섭
나에게는 구멍이 많다/ 여기도 구멍/ 저기도 구멍/ 내 삶의 담벼락은 구멍 천지다// 구멍이 많아 슬플 때는/ 슬픔이 모든 구멍으로 흘러넘칠 때는/ 하루 종일/ 검은 돌이나 삼킨다/ 돌을 삼키고// 구멍 숭숭 뚫린 담벼락이/ 나를 삼키고/ 오냐, 큰 구멍이여/ 오려면 와라/ 정중하게 와서/ 나를 통째로 삼켜라// 나는 구멍과 싸운다/ 구멍은 슬픔이고/ 구멍은 나의 적이고 구멍은 나의 동지이고/ 구멍은 운명이다// 흰 돌을 게워 낼 때까지/ 내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두고 온 소반 / 이홍섭
절간 외진 방에는 소반 하나가 전부였다/ 늙고 병든 자들의 얼굴이 다녀간 개다리소반 앞에서/ 나는 불을 끄고 반딧불처럼 앉아 있었다// 뭘 가지고 왔냐고 묻지만/ 나는 단지 낡은 소반 하나를 거기 두고 왔을 뿐이다//

몽유비원도 1 / 이홍섭
깨어나 보니/ 옆에 엄마는 없고/ 내 울음도 어느 순간 공허해졌을 때/ 그때 나는/ 심심산골의 문을 열고/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코엑스 몰 지나고/ 잠실대교도 건너/ 휘황한 서울의 문을 닫고/ 내 방에 들어올 때/ 그때 나는/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들과/ 듣다 만 시디와/ 산사에서 가져온 뜯어진 녹차봉지 사이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깨어나면/ 내 옆에 누가 있고/ 내 울음은 어느 허공을 맴돌 것인가// 깨어나면,//

몽유비원도 2 -火宅, 花宅 / 이홍섭
불타는 집에 오래 살았습니다/ 세상은 커다란 화덕 같은 것이어서/ 발을 딛는 순간, 발을 떼야 했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마라톤 선수 같지만/ 멀리서 보면, 춤꾼 같습니다// 꽃 피는 집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세상은 커다란 꽃밭 같은 것이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눈을 떼면, 이쁜 꽃들이/ 모두 사라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집이 불타고, 집이 꽃 피어납니다/ 발을 디딜 수도, 발을 뗄 수도 없습니다/ 눈을 뜰 수도, 눈을 감을 수도 없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소리쳐 우는 것도 다 까닭이 있습니다/ 이제 막 꿈에서 돌아온 아니가/ 서럽게 우는 것도 다 까닭이 있습니다//

좌복 / 이홍섭
외진 절에서 기다란 좌복 하나를 얻어왔다/ 누구에게나/ 텅 빈 방 안에서/ 온몸으로 절을 올리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찔레나무 가지 끝에서/ 막 고개를 쳐드는 자벌레 한 마리/ 가지가 찢어져라 애먼 하늘을 볼 때//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 / 이홍섭
젊은 장정도 오르기 힘든 깔딱고개를/ 넘어온 노파는/ 향 한 뭉치와 쌀 한 봉지를 꺼냈다/ 이제 살아서 다시 오지 못할 거라며/ 속곳 뒤집어 꼬깃꼬깃한 쌈짓돈도 모두 내놓았다/ 그리고는 보이지도 않는 부처님전에/ 절 세 번을 올리고/ 내처 깔딱고개를 내려갔다// 시방 영감이 아프다고/ 저녁상을 차려야 한다고//

돌탑 / 이홍섭
부질없다/ 부질없다/ 하, 부질없다 해도// 쌓고/ 또 쌓는/ 저 마음은/ 어쩌지 못해// 흰 눈썹 날리는/ 호랭이 노스님도/ 슬며시/ 돌 하나/ 얹어 보시는 것이다//

천부당만부당 부처님 / 이홍섭
연꽃등 허방을 밝히고 가는 도심 포교당 경내// 여래는 법당에 좌정해 계시고/ 아내는 시장통에 장 보러 가고/ 세 살배기 아이는 좋아라 절 마당을 뛰어다니는데// 합장을 올리며 절에 들어서던 노보살님이/ 천방지축 뛰어노는 아이를 보며 미소 지으시더니/ 천부당만부당하지, 암 천부당만부당해 하며 지나가신다// 며칠 뒤면 여래께서 이 사바에 오신 날/ 아이는 잔디밭에 들어가 민들레를 따는데/ 노보살님은 어쩌자고 천부당만부당 하셨을까// 노란 민들레를 손에 꼭 쥔 아이를 품에 안고/ 연꽃등 너머 여래를 보는데/ 여래는 노보살님의 천부당만부당을 들으셨는지/ 그 큰 귀를 늘어뜨리고는 말없이 눈을 감으시고// 천부당만부당한 삶을 살아온 늙은 애비도/ 내가 모르는 삶을 살아갈 이 여린 아이에게만큼은/ 천부당만부당한 일들이 일어나질 않기를/ 또한 간절히, 간절히 빌어보느니//

심우도(尋牛圖) / 이홍섭
없는 소를 내놓으라니/ 애가 타네/ 애간장이 다 녹네// 빈털로 돌아가려니/ 마누라 보기 민망하고/ 마을 불빛은 꺼질 줄 모르네// 소는 무슨 소/ 담벼락에 기대어 뒤돌아보니/ 내가 헤매고 다닌 산/ 한 마리/ 병든 소로 누웠네//

겨울안거 / 이홍섭
젊은 수좌들은 한소식 하기 위해 선방으로 들어가고/ 노보살은 정성스레 무청을 다듬어 요사채 처마에 매단다// 첫눈은 그제서야 돌부처의 눈썹을 스친다//

그림자 / 이홍섭
내가 죽어면/ 그림자는 어디로 가나/ 기린처럼/ 목이 길었던/ 내 그림자// 한 번도 내 앞에서 서지 못했으되/ 언제나/ 나보다 먼 곳을 바라보던/ 갈애의 눈동자// 어둠속에서/ 함께 울든 그 많은 날들을 두고// 내가 죽어면/ 그림자는 어디로 가나// 초원을 성큼 성큼 걸어/ 나 없는 곳으로 가나//

생일 / 이홍섭
나에게도 생일이 와서/ 소고기 두 근 끊어다가 부모님께 드렸더니/ 어머니는 그걸로 미역국을 끓여서/ 내 밥상 위에 올려 놓으신다// 오늘부터 삼백 예순 날/ 나는 또 이 세상에서/ 가장 순한 손님이 되었다//

폭설 / 이홍섭
간밤부터 폭설이다// 내 살과 뼈가 된/ 강원도 오지 마을들은 또 두절이다// 이런 날, 젊은 어머니는 백설기를 찌시고/ 천장에서 싸리꿀을 내리셨다// 토끼 같았던 내 눈과 귀는 이내 순해져갔다//

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바람 / 이홍섭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창을 열고 대관령을 보네/ 친구들은 대관령을 넘는 게 꿈이라고 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영 너머를 넘어가는 꿈 같은 건 꾸지 않았네/ 하긴 이상하지, 왜 나는/ 일찍부터 한곳에 머물길 원했었는지/ 왜 일찍부터 저 너머, 미지의 세계를 꿈꾸지 않았었는지/ 하지만 후회 같은 건 없네/ 내가 가장 먼저 창을 열고 대관령을 바라보는 것은/ 순전히 흰 자작나무숲 때문이지/ 대관령을 넘어온 찬 바람이/ 이마를 스치는 순간, 나는 대관령 정상에서/ 무리 지어 자라는 흰 자작나무 떼를 상상하게 되네/ 자작나무 떼를 지나온 하얗고/ 투명하고, 수정처럼 차디찬 바람 말일세/ 고향에 돌아온 것은/ 순전히 이 바람을 맞고 싶어서이지/ 여름 가고, 가울 가고/ 흰 눈 내리는 겨울이 와도/ 영 너무 도시에서는 이 바람을 맞을 수 없었다네/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은/ 순전히 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바람 때문이라는 걸/ 이 아침은 깨우쳐주네/ 창을 열면/ 거기 흰 갈기를 날리며/ 수백 마리 백마가 바다를 향해 달리지//

우리 동네 나이트에서는요 / 이홍섭
우리 동네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나이트클럽이 하나 있는데요. 뭐 서울처럼 물 좋은 나이트는 아니구요. 그냥 동네 아저씨들과 아줌씨들이 신나게 몸을 흔들다가 눈 맞으면 껴안고 돌다가, 뭐 그러다가 스리슬쩍 자리를 뜨기도 하는 곳인데요…// 며칠 전 후배 한 놈이 나이를 건사 못하고 이곳에 들렀다가 한 아줌씨한테 제대로 걸렸는데요. 그 아줌씨는 모처럼 총각 만났다며 구두 뒷굽이 나갈 정도로 신나게 놀았는데요. 문 닫을 때가 되자 잘 놀았다며 후배놈에게 지폐를 몇 장 찔러주고는 부러진 뒷굽을 들고 휘이휘이 사라지더라나요…// 며칠 뒤 후배놈이 중앙시장 앞을 지나가는데 웬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보니 그 아줌씨가 어물전에서 고기를 팔고 있더래요. 양손에 싱싱한 산 문어를 움켜쥐고는 시장통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있더라나요…// 후배놈은 그렇지 않아도 그 아줌씨가 찔러준 지폐에서 비린내가 났었다며 쪽팔려 죽겠다고 말하는데… 이놈의 죽은 문어 대가리 같은 놈을 어물전에 내다 팔 수도 없고…//

가난한 시인 / 이홍섭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내 꿈은 가난한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가난이 뭔지 몰랐으나/ 그냥 가난한 시인이 되고 싶었다// 가난이 바다를 부르고/ 가난이 달맞이꽃을 열어 보이고/ 가난이 솟대를 날아오르게 했다// 가난이 산을 부르고/ 가난이 절을 부르고/ 가난이 당신을 부르고/ 가난이 하늘 높이 손을 들어 올렸다// 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꿈은 가난한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가난한 시인으로 왔다가/ 가난한 시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시인 이솝 씨의 행방 1 / 이홍섭
나무들이 허공 속으로 양팔을 쭉 뻗어올리자/ 후두둑 단추들이 떨어진다. 겨울이 들켜버리는/ 순간이다. 갑자기 양파 속처럼 눈이 시려온다// 몸이 무거워진 것일까. 한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보도블록 한 장씩이 달라붙는다. 오래 전에 버린 질문처럼/ 안간힘을 다해 척척 달라붙는다// 어쩌면 내 기억은 잘못 익은 유산균 음료 같은/ 것인지도 몰라. 그 속에 가느다란 빨대나 처박고 사는/ 나는 병든 짐승인지도 몰라. 빨대를 냅다 던져버리고 달아나면?// 날아가는 새들의 발이 보인다.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보도블록 한 장씩을 양발에 꿰차고 바람을/ 거슬러올라간다. 그들이 불끈불끈 솟아올랐음을/ 나는 안다. 그들은 어느 숲속에다 저들의 길을 내고 있는 것일까// 여기저기서 나무들이 양팔을 뻗어올린다. 저들의/ 뿌리는 너무 깊게 박혀 있다. 벌받는 아이처럼/ 손을 올릴 때마다 후두둑 단추들이 떨어진다. 단추들을/ 주워들고 걷기 시작한다. 버릴 데가 없다//

시인 이솝 씨의 행방 2 / 이홍섭
길 위에 버려진 똥을 보고 있노라면/ 똥 눈 짐승의 창자가 들여다보인다/ 놀라워라, 똥 눈 짐승의 내부가 보인다// 밤샘 끝의 새벽녘, 거울 속의 너를 보고 있노라면/ 퍼질러 앉아 멍하니 쳐다보는 너를 보고 있노라면/ 놀라워라, 세상이 환히 들여다보인다// 시퍼런 멍이 보인다//

시인 이솝 시의 행방 3 / 이홍섭
이제는 바다에 가지 않는다. 앰뷸런스 한 대가 소리치며 달려와 금세 사라진다 누군가 죽어가거나 태어난다는 사실이 문득 머물렀다 이내 사라진다 한때 이 길 위로 걸어가면 예언자가 되고 싶었다 가로수 그늘 아래서 부르던 노래를 나는 기억한다// 이 길로 곧장 가면 바다가 솟아오르리라 이제는 가지 않는 바다 내가 버린 질문은 다 씻겨져 망망대해로 흘러갔을까 잎 떨군 가로수가 두 발을 버둥댄다 누가 저 가로수를 땅속 깊이 처박아놓았을까// 거리를 활주로 삼아 휙휙 솟아오르는 빈 봉지들 바다를 활주로 삼아 하얗게 날치떼가 솟아오르곤 했다 날개 달린 물고기...... 시를 쓰는 일은 행복 없이 사는 훈련 같다고 어느 시인은 썼었다 어떤 빙신이 행복 없이 사는 훈련을 한단 말인가 행복이란 대체 있기나 하단 말인가 휙 솟아올랐다가 컴컴한 골목 속으로 사라지는 저 빈 봉지들 헛것인 영혼들// 아이 하나가 골목 안에서 뛰어나오다 넘어진다 산타가 그려진 풍선이 아이의 손을 떠나 까마득한 하늘 깊숙이 파묻힌다 두 손을 들어 귀를 막는다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엎드린 채로 이쪽을 빤히 쳐다본다 바다로 가는 버스가 힐끔 쳐다보고 그냥 지나간다//

시인 이솝 씨의 행방 4 / 이홍섭
이 강가에 얼마나 자주 나오곤 했던가/ 많은 것들을 학대해왔고, 나는 너무 많은 것들에/ 부끄러워했다 헤어질 것들 많아 강가에 나오면/ 얼굴에 물때가 끼일 때까지 서 있곤 했다 앞을 지나가는 것들은/ 하나같이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는 물푸레나무처럼 서서 하늘 같은 바닥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헤젓곤 했다/ 이 강가에 얼마나 자주 나오곤 했던가 또한/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곤 했던가/ 지금 나는 또 이렇게 강가로 나와/ 한없이 숨어드는 위쪽을 한 번 보고, 또한 바다로 흘러드는/ 하류 쪽을 한 번 보면서/ 길 잃은 어린 갈매기모양 두리번거리는 것이다/ 이 강가에 얼마나 자주 나오곤 했던가/ 때로는 분노가 밀려와 무수히 돌을 던지고/ 때로는 알 수 없는 연민이 가득히 밀려와/ 종일 물수제비만 뜨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도 내 머릿속을 맴도는 말들/ ―녹슨 펌프, 파헤져진 흙, 높이 솟은 첨탑, 검은 새/ 모두 병들고 찌든 얼굴을 한 것들임을 나는 안다/ 내 나이는 아직 젊고 나는 행복에 관하여 노래하고 싶다/ 스쳐가는 것들이 왜 하나같이 무덤 속을 열어 보이는지/ ……나는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금 나는 또 이렇게 강가로 나와/ 물수제비 멈춘 자리에 나를 멈추어 세우고/ 온몸에 물때가 끼일 때까지 서 있는 것이다/ 삼십년대에 백석이, 그리고 윤동주가 그리하였던 것처럼/ 이 강이 시작한 쯤에 서 있을 대관령의 흰 자작나무떼와/ 이 강이 끝나는 쯤에 매어져 있을/ 안목 하구의 그 작은 빈배를 생각하는 것이다//

시인 이솝 씨의 행방 5 -초당(草堂) / 이홍섭
굶주린 산이/ 제 살을 끌어당겨 골짜기를 만들고/ 스스럼없이 눈을 받는 겨울입니다/ 펑펑 내리는 눈은/ 겨드랑이까지 적셔오구요// 한때는 굴속에 갇힌 토끼처럼/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두 귀를 쫑긋 세우던 때가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귀멀고/ 한결 눈 밟아졌습니다/ 거미줄 같이 얽혀 있던 핏대도 사라졌구요// 여기가 숲속인지 아득한 바다 속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나무들은 해초처럼 흔들리고/ 새들은 느린 속도로 지느러미를 움직입니다// 모든 길들이 사라지고/ 그 어떤 길이나 낼 수 있는 지금/ 저는 갇혀 있는지요/ 저는 자유로운지요//

시인 이솝 씨의 행방 6 / 이홍섭
지나가는 구름이 가볍고/ 내 마음이 솜털 같을 때가 있다/ 입을 열면 뭉게뭉게 떠다니는 말들, 알 수 없는/ 연민과 슬픔 따위// 나는 물밑 세상을 너무 많이 보았구나/ 투명한 얼음 밑으로/ 환히 떠다니던 고기떼/ 잡지 않고 그냥 들여다보기만 했던/ 추운 겨울날들//

두 갈래 길 / 이홍섭
나에게도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한 길은 안목 가는 길/ 다른 한 길은 송정 가는 길/ 한 길은 외로움을 비수(匕首)처럼 견디는 길/ 다른 한 길은 그대에게로 가는 먼 길// 그 길들 바다로 흘러가기에/ 이것이 삶인가 했습니다/ 찬물에 밥 말아 먹고/ 철썩철썩 달려가곤 했습니다// 나에게도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한 길로 가면 그대가 아프고/ 다른 한 길로 가면 내 마음이 서러울까봐/ 갈림길 위에 서서 헤매인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길 아닌 길 없듯이/ 외로움 아닌 길 어디 있을까요/ 사랑 아닌 길 어디 있을까요// 나에게도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잠든 그대 / 이홍섭
잠든 그대 너무 이뻐/ 나 그대를 떠날 수 없네/ 한낮의 사랑은 믿을 수 없는 사랑/ 열 번을 더 헤어져도/ 잠든 그대 너무 이뻐/ 나 그대를 떠나지 않겠네// 검은 속눈썹을 접어/ 달을 부르는 그대, 한낮의 고통/ 한낮의 이별 모두 조약돌로 가라앉히고/ 저수지처럼, 호수처럼 잠드네/ 잠든 그대 너무 이뻐/ 나 오늘도 별과 함께 떠오르겠네//

단식광대 1 / 이홍섭
입이 비뚤어졌으니 너의 웃음이 시대적이로다/ 귀가 당나귀 귀처럼 커졌으니/ 너의 귀 기울임도 시대적이로다/ 코가 딸기처럼 붉어졌으니/ 너의 괴로움이 시대적이고, 너의 취함이 영원하도다// 그리고 낯선 시월의 밤이 찾아와/ 바람 불고 낙엽 부서지는 소리 들려올 때/ 너의 긴 그림자 끌리는 소리// 뒤돌아보지 마라//

단식광대 2 -발가락이 닮았다 / 이홍섭
육십년대는 나의 출생과 닮지 않았고/ 칠십년대는 나의 십대와 닮지 않았고/ 팔십년대는 나의 이십대와 닮지 않았다// 구십년대는 나의 삼십대와 또한 닮지 않을 것이고/ 그 이후의 생도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잘들 가거라, 나의 시대여/ 발가락만 내려다보는 불쌍한 나여//

파로호 / 이홍섭
저 먼데서 누가 아픈가/ 잔물결이 시름시름 밀려온다/ 바다보다 더 깊은 파로호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고인돌, 푸릇푸릇 숨쉬고/ 그 위로 가을햇살이/ 부챗살처럼 쏟아져내린다// 저 먼데서 누가 아픈가/ 은사시나무 이파리들, 잔물결처럼 반짝이고/ 고인돌처럼 서서/ 온몸에 빗살무늬를 꿈꾸는 그는//

별 / 이홍섭
일찍 뜨는 별은/ 마음 약한 별, 천 년을 슬퍼하고/ 천 년을 그리워하며// 자기를 들여다볼 수 없어/ 마음을 통째로 삼켜버린 별//

종이계단 / 이홍섭
벚꽃이 화사하게 피니/ 즐겨 오르던 이 길이/ 어쩐지 허구 같다 곧장 가면/ 죽음에도 닿을 것 같아/ 가던 길을 싹둑 자르고 돌아선다// 죽음이, 완벽한 허구 같고/ 죽음이 완벽한, 허구 같고// 자꾸 쉼표를 지우며/ 내리는 꽃이파리들, 눈꽃들/ 풍비박산의 아름다움 속에 사는/ 헛것인 영혼들//

7번국도 -등명(燈明)이라는 곳 / 이홍섭
사랑도 만질 수 있어야 사랑이다// 아지랑이/ 아지랑이/ 아지랑이/ 길게 손을 내밀어/ 햇빛 속 가장 깊은 속살을/ 만지니// 그 물컹거림으로/ 나는 할 마를 다 했어라//

도망자 -동해(東海) / 이홍섭
한 사내가 바다 앞에서 서성거린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갔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삶은 얼마나 많은 핑계거리를 마련해두고 있는지/ 그는 한때 삼류소설을 열심히 읽은 적도 있었다/ 삼류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이내 사라져버렸으므로/ 그는 주인공들을 버렸다(개나 데려가라지)/ 그가 기억하는 것은/ 자갈밭과 더럽혀진 잔모래들, 녹슨 이끼들뿐/ 그는 일생의 하루를 바다에 닿는 데 탕진했다/ 겁 많은 자들이 그러하듯 그도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그것이 그의 죄였다/ 자신의 일생을 그 무엇에도 비유하지 못한 죄/ 그는 겁이 많았다// 안개가 몰려와 그의 두 발에 철커덕 수갑을 채운다/ 그는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허겁지겁 말들을 주워먹는다/ 그의 입가에 모래알들이 밥알처럼 묻어난다/ 일생의 하루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흘려 보낸 죄/ 그는 안개 탓이었다고 소리친다/ (아아! 개나 데려가라지)//

강 -사람들은 강을 보듯 죽은 사람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마르께스) / 이홍섭
그 해 여름/ 뒷산에서 내려온 아카시아 뿌리는/ 방바닥을 뚫고/ 마침내 천장을 뚫었/ 다 아버지는/ 톱을 들고 와 매일 뿌리를 잘랐/ 다 누이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고/ 몇 개의 잔기침으로 자리에 누웠/ 다 열아홉의 나이로/ 나도 따라 눕고/ 강은 또 어디에서인가 내려와/ 집 앞을 열심히 흘렀/ 다 밤이면/ 익숙하게 잘려나가는 나무의 뿌리/ 더이상 천장을 뚫지 않았/ 다 밤의 문을 열면/ 문턱에 가득히 쌓여 있는 톱밥/ 그 해 여름이 다 가도록/ 누이는 일어나지 못하고/ 강은 쉬지 않고 흘렀/ 다 마침내 아버지도 눕고/ 가족 모두가 누워버렸을 때/ 강은 또 어디에서인가 내려와/ 집 앞을 지나/ 어디론가 흘러갔다//

강은 전생을 기억할까 / 이홍섭
어디 마음 둘 데 없을 때/ 쪼그려 앉아/ 흘러가는 강물이나 바라보는 것은/ 강이 자신의 전생을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거야// 마음 둘 데 없다는 것은/ 지금 내가 현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두 발로 서 가는 사람에게나/ 외발로 서 있는 나무 밑에 가 울고 있겠지// 쪼그려 앉아/ 얼굴에 물때가 끼일 때까지 앉아 있는 것은/ 강의 전생에 위로 받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무심하게 흘러가는 저 강물에 위로받을 수 있을까// 큰 홍수가 나면 알지/ 강물은 자신이 기억하는 길을 따라 달려가고/ 길을 막으면 그 자리에서/ 한 생을 걸고 범람한다는 것을, 강이 휘어 흐르는 것은/ 다 전생이 아프기 때문일 거야// 어디 마음 둘 데 없더라도/ 해질 무렵에는 강가에 나가지 마, 강의 전생이/ 아니 너의 전생이/ 붉은 노을 속에 눈 뜨는 것을/ 차마 보지는 마//

그늘, 그늘 / 이홍섭
불타오르는 열정도/ 거꾸로 처박히는 자멸의 몸짓도/ 일찍이 가져본 적 없다// 다만, 지나간 삶이/ 지금 지나가는 그늘만하겠다는 생각을/ 어느 다 자란 느티나무 아래서 해본 적이 있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지금은 곁에 없는 한 사람을 몰래 떠나보낼 때였는지/ 어쩌면, 그 훨씬 이전부터였는지// 나는 또다시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곰곰이 곱씹어보는 것이다//

큰 슬픔 / 이홍섭
새들은 날아서/ 하늘을 품고// 바람은 불어서/ 허공을 안는다// 인간만이 걸으면서/ 큰 슬픔을 껴안는다// 쓰라린 불빛도/ 멀리서 바라보면 꽃이다// 꽃 진 세월을/ 안개와 몸 섞으며/ 그가 가고// 깊은 밤/ 나는 적멸이 되어/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할 때// 저 멀리 듬적듬적 꽃 피는/ 불빛, 불빛들//

섬 / 이홍섭
바다가 기르는 상처// 만약/ 저 드넓은 바다에/ 섬이 없다면/ 다른 그 무엇이 있어/ 이 세상과 내통할 수 있을까//

철새는 날아간다 / 이홍섭
철새를/ 지상서 밀어올리는 힘은/ 팔 할이 연민이다/ 그 어떤 힘도/ 경포호에서 추운 시베리아로/ 철새를 날아가게 할 수 없으니// 저 외로운 개 밑에는/ 얼마나 많은 연민이 숨어 있는가//

오후 네시의 빈의자 / 이홍섭
오후 네시에는/ 배고픈 개들도 얌전하다/ 플라타너스는 생각난 듯 한여름의 먼지를 털어내고/ 산부인과에서는 방금 태어난 아기가/ 길게 하품을 한다, 두리번두리번 광장을 둘러본 뒤/ 울음소리를 한 옥타브 낮추는 비둘기들/ 느릿느릿 광장을 가로지르는/ 달팽이 한 마리가/ 나룻배처럼 떠 있다// 오후 네시에는/ 아무도 광장의 주인이 되려 하지 않는다// 빈 의자는 오래도록 비어 있다//

마음은 척추를 다치고 / 이홍섭
마음이 척추를 다쳤으니/ 세상이 어찌 그늘이 아니겠는가/ 함부로 돌아누울 수도 없으니/ 그대가 어찌 나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그대여/ 머리맡에 놓아둔 물이 다 마르면/ 내가 그대를 껴안아주리라// 마음 약한 별들만 가득한/ 내 품속 새벽 하늘을 보리라//

귀가 / 이홍섭
그날 이후/ 나는 돌아가지 않았네/ 뒷산 아카시아 꽃잎들/ 죽음의 냄새를 무럭무럭 뿜어올리던/ 그날 이후, 나는 돌아간 적 없네/ 시간이란 손가락에 낀 반지/ 몸을 맡기면/ 시간은 나를 끌고/ 아주 작은 원을 그렸네/ 한 여자 떠나갈 때도/ 그 원 망가지지 않았네/ 결코 울지 않았네/ 그날 이후 나는 돌아가지 않았네/ 아카시아 꽃잎들 죽음의 향기 가득 피우고/ 아카시아 뿌리들 세차게 휘감겨와도/ 나는 돌아가지 않았네/ 시간이란 손가락에 낀 반지/ 몸을 맡기면/ 시간은 나를 끌고/ 한없이 외로운 원을 그렸네/ 아카시아 향기에 취해 잠들지 못했네/ 그 원 소용돌이쳐도 울지 않았네/ 다시는 울 수 없었네// 그날 이후 나는 한 번도 돌아간 적 없네//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어 / 이홍섭
나는 이제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었다// 몸으로 밀고 간 산골짜기 끝에는 모난 돌이 하나/ 마음으로 밀고 간 언덕 너머에는 뭉게구름이 한 점// 노래와 향기가 흐른다는 건달바성(乾達婆城)은 멀고// 내 손바닥 위에는/ 구르는 돌멩이 하나와/ 흩어지는 뭉게구름이 한 점// 내가 부른 노래는 구름과 더불어 흘러가버리고/ 내가 맡은 향기는 당신이 떠나면서 져버렸다// 나는 이제 정녕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었으니/ 참으로 건달이나 되어야겠다/ 참으로 건달이나 되어야겠다//

빈집 / 이홍섭
아이는 홀로 남아 고드름이 되었다/ 추운 밤, 처마 끝에 매달려 몰래몰래 울었다// 아버지 돌아온 뒤에도 아이는 몰래몰래 물방울이 되었다/ 추운 밤, 창문을 열면 처마 가득 고드름 주렁주렁 열렸다// 그 아이 자라서 아버지 같은 어른이 되었지만/ 추운 밤마다 작아져 또르르 물방울이 되었다// 지금은 몹시 추운 밤, 나는 빈집으로 가는 길을 안다//

먹돌 / 이홍섭
일곱 살쯤 되었을까// 툴툴거리는 버스를 타고/ 아버지와 함께/ 어느 먼 곳으로 가는 길// 오지의 간이정거장에서/ 버스가 잠시 멈춘 사이/ 아버지는 급히 옥수수 두 개를 사오셨는데/ 어린 나는 무슨 심술이 났는지/ 끝내 그 옥수수를 먹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로부터 사십 년이 흘러갔건만/ 막막해 하시던 아버지의 표정을 닮은/ 먹돌 하나는/ 그 자리에 멈추어 있다// 멈추어서/ 줄곧 나를 따라오고 있다//

돌의 초상(肖像) / 이홍섭
나는 기억한다/ 내가 굴러온 산과/ 내가 흘러온 물과/ 내가 머리를 처박고 흐느끼던/ 숱한 여울목을// 나는 기억한다/ 내 몸에 새겨진 혼돈의 무늬들/ 만질 수 없는 뼈와 살/ 버들치의 가녀린 입술이 달래주던/ 숱한 공포를// 나는 기억한다/ 내 몸을 스쳐간 수많은 사랑과 이별/ 성호를 그으며/ 사라지던 별들의 비명/ 절벽 위에 섰던 숱한 회한의 나날들과/ 붉은 철쭉의 소스라침을// 나는, 너는/ 구르는 돌의고, 흐르는 집이고/ 문디이 가시내고/ 망가진 세계다// 여기 불구의 초상이 있다//

내 마음 속의 당나귀 한 마리 / 이홍섭
내 마음 속에는/ 언제부터인가 당나귀 한 마리 살고 있다/ 귀가 몹시 커다랗고/ 고개를 잘 숙이는 당나귀// 그 당나귀가/ 잘 우는 당나귀인지, 잘 안 우는 당나귀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오랜 친구를 찾아가거나/ 한없이 느린 걸음으로/ 이 도시의 외곽을 배회할 때/ 어느덧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는 당나귀 한 마리/ 나는 이 당나귀가 좋아/ 풀만 먹고 하루를 보낼 때가 많다//

매월당 김시습 -동균 형에게 / 이홍섭
나뭇잎에 시를 써/ 강물에 띄워 보냈다는 매월당// 그가 머물던 오세암 오르며/ 지금 백담계곡 물 위로 떠내려가는 나뭇잎들은/ 죄다 그가 쓴 시겠거니 생각해보니/ 그가 정말 죽었을까 의문이 들고// 지금 내 발밑으로/ 시 한 편 한 편이 떠내려간다고 생각하니/ 그가 저 깊은 산 속/ 어느 너럭바위에 앉아/ 지금도 시를 쓰고 있는 것만 같고// 쓰면서/ 혼자 씨익 웃고 있는 것만 같고//

흰 장갑 - 故 李聖善 시인 / 이홍섭
서울에서도/ 제일 번화한 대치동 사거리였다// 잠깐만 보고 가려구......// 설악산에서/ 막 올라온 선생은/ 마치 주례라도 보고 오신 듯/ 하얀 장갑을/ 끼고 나타나시었다// 그로부터 보름 뒤/ 선생은/ 또 홀연히 사라지는 주례처럼/ 저 세상으로 가신 것이었는데/ 나에게 차마 궁금했던 것은/ 그 하얀 장갑을/ 어디다 두고 가셨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게 하 궁금해 못 견딜 때는/ 지나가는 구름이거나/ 길가의 눈덮힌 돌멩이거나/ 아니면/ 다 떨어진 런닝구라도 붙잡고/ 李聖善표 흰 장갑이라/ 꾸역꾸역 이름 붙여 보는 것이다//

 



이홍섭 시인, 문학평론가
1965년 강원도 강릉시에서 태어나, 강릉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경희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인환 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동국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90년 《현대시세계》 공모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 각각 등단했다.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시인시각 작품상, 현대불교문학상, 유심작품상, 강원문화예술상, 박재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강릉, 프라하, 함흥》, 《숨결》, 《가도가도 서쪽인 당신》, 《터미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