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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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10. 5.

어떤 사람 / 신동집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겁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직이 나는 목례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잠을 지켜 줄 사람인가/ 지향 없이 나의 밤을 헤매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나를 알 수가 없다// 다음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번 나의 눈은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직이 나는 목례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지향 없이 내가 헤매일 차롄가./ 차겁고 뜨거운 어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나와 만난다./ 언제나 이렇게 나와 헤어진다.//

표정 / 신동집
참으로 많은 표정들/ 가운데서/ 나도 일종의/ 표정을 지운다// 네가 좋아하던 나의 표정이/ 어떤 것인지/ 내가 좋아하던/ 너의 표정이/ 어떤 것인지/ 다 잊어버렸다고 하자//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고백만은/ 영원히 아름다운/ 약속 안에 살아 있다// 풍화(風化)하지 않은/ 어느 얼굴의 가능을 믿으며/ 참으로 많은 표정들 가운데서/ 나도 임의의 표정을 지운다// 표정이 끝난 시간을랑/ 묻지를 말라/ 창살 속에서 갇히운/ 나의 노래를 위하여//

오렌지 / 신동집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목숨 / 신동집
목숨은 때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表情)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 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 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體溫)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者)는 죽은 자를 증언(證言)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告發)하라/ 목숨의 조건(條件)은 고독(孤獨)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오라.//

변신(變身) / 신동집
잎을 벗어 버린 나뭇가지는/ 어찌 보면 땅에서 하늘로 뻗은/ 나무 뿌리라 할까/ 뒤엎어 놓은 밤이 내낮이라면/ 뿌리는 가지로 변해도 될 일/ 간절한 꿈에서 열매가 맺고/ 영근 방울에서 보람이 터질 때/ 세계는 얼마나 아리게 도치(倒置)했을까// 뒤엎어 놓은 내낮이/ 우리의 밤이라면/ 백야(白夜)여 주어(主語)없는 강물을 덮어 달라/ 생자(生者)를 뒤엎어 죽은 자라면/ 푸른 하늘은 무덤 속을 날아야 할 일// 말씀은 안테나 끝으로/ 푸라티나의 빛을 퉁기고/ 저기 급하게 피안(彼岸)으로 달리는 짙은 구름群/ 가지로 변해 선 나무 뿌리에/ 흔들이며 달려 오는 풍경(風景)은 밀착(密着)한다.// 꿈을 배우는 제비야/ 옳은 신화(神話)를 알려주마/ 나래 설익은 제비야.//

빈 콜라병 / 신동집
빈 콜라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넘어진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있다.// 빈 콜라 병에는 한 자락/ 밝은 흰 구름이 비치고/ 이 병을 마신 사람의/ 흔적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넘어진 빈 콜라병은/ 빈 자기를 생각고 있다./ 그 옆에 피어난 들국 한 송이/ 피어난 자기를 생각고 있듯이.// 불고 가는 가을 바람이/ 넘어진 빈 콜라 병을 달래는가./ 스스로 풀어내는 음악이/ 빈 콜라병을 다스리고 있다.//

좋았던 날 / 신동집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다./ 두서없이 보내온/ 지난날의 일들./ 그 사이도 하염없이/ 귀한 것은 새어내리고/ 오늘은 벌써 찬바람이 돌고 있다./ 어디로 갔는가/ 제비는 이미 보이지 않고/ 귀뚜리도 바이없이/ 죽을 자리를 더듬고 있다./ 보라 스민 노을은 하르라니/ 서산마루에 떨고/ 더없이 귀한 날은 저문다./ 예저기 불이 돋은 창문들의 마음/ 아이를 찾는 아낙네/ 목소리는 저문다./ 나도 밤이 되어갈 때다/ 별이 되어 갈 때다//

한알의 씨앗 / 신동집
한알의 씨앗에도 움은 돋는가/ 가지에 피어날/ 꽃잎은 지레 보이고// 두 알의 씨앗에도 움은 돋는가/ 가지에 맺을/ 열매는 지레 보이고/ 애달파라, 트지 않는/ 나의 씨앗/ 기다려도 기별은 없고/ 보듬어도 보람은 없고// 봄이 와 무릇/ 씨앗들은 돋아도/ 소망은 바이 없이/ 흙의 잠을 자리라//

노을 / 신동집
더없이 날은 가고 없다/ 잔잔히 번지는/ 수먹물의 노을/ 좋았던 날은 이리저리 가고/ 어디로 제비는 날아갔는가/ 날은 어둑하여라/ 하르라니 떠는/ 비늘구름 하나/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고/ 지나고야 비로소/ 그지없는 노을/ 파르라니 떨며 날은 저문다.//

소년 / 신동집
아득한 옛날/ 호젓한 네거리에는/ 붉은 우체통이/ 고즈너기 서 있었다// 서투른 휘파람을 불면서/ 소년은 우체통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한손엔 잠자리 채를 들고서./ 무심코 잠자리가 한 마리/ 앉다 말다 지나간다.// 보릿집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엿장수 가위소리는 고달피 지나간다./ 내 어느날 다시/ 이 길을 간다 해도/ 여전 그렇게 지날 것이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이없이 변해도/ 홍안은 찌들어/ 어깨처진 남루의 막대는 지나가도.//

하나의 슬픔 / 신동집
하나의 슬픔이 태어나기 위해선/ 적어도 一億年(일억년)의 時間(시간)이 필요하다.// 하나의 슬픔이 삭기 위해선/ 삭아서 노래가 되기 위해선/ 적어도 一億年 (일억년)의 時間(시간)이 필요하다.// 하나의 슬픔이 타락키 위해선/ 타락하여 달콤한 설탕물이 되기 위해선/ 얼마나 또 時間(시간)이 필요할까.// 暗層(암층) 속에 박힌 古生代(고생대)/ 化石(화석)은 이를 알리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이를 알리라.//

악수 / 신동집
많은 사람이/ 여러 모양으로 죽어 갔고/ 죽지 않은 사람은/ 여러 모양으로 살아 왔고/ 그리하여 서로들 끼리/ 말 못할 악수를 한다./ 죽은 사람과/ 죽지 않고 남은 사람과,// 악수란, 오늘/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나의 한 편 팔은/ 땅 속 깊이 꽂히어 있고/ 다른 한 편 팔은/ 짙은 밀도의 공간을 저항한다./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를 그리워 하며/ 살은 사람이 죽어 갈/ 때를 그리어 보며 ……//

항아리 / 신동집
떠나온 사람의 눈에/ 유현(幽玄)한 항아리는 비친다./ 항아리의 겉면을 한 자락 구름이 돈다/ 한 마리 학이 날은다./ 바람을 따라가는 구름의 마음을 아는가/ 구름을 따라가는 학의 마음을 아는가./ 알려면 한평생 걸려도 볼 일/ 걸려서 마침내 학의 부리를/ 또 한 번 이승으로 돌려볼 일이다./ 어쩌면 길이 굽은 하늘에/ 시방도 하염없이 학은 날고 있으니.//

봄비 / 신동집
전에는 잘 다닌 길인데/ 그 사이 왠지 시들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찾는 이 길/ 모퉁이를 돌아서자/ 낯익은 가게들이 몽땅 헐리고 있다./ 약방이며 과일점/ 이런 저런 식당들./ 변했구나./ 얼마 후 다시 이 길을 지나자/ 불도저가 요란하다./ 얼마 후 다시 지나자/ 철골(鐵骨)이 마구 치솟고 있다./ 얼마 후 다시 지나자/ 마친 단장에 미끈한 허우대/. 지극히 당연한 듯 빌딩이 서 있다./ 유수한 모 기업체 사옥./ 어리둥절 들어서 본 나는/ 열없이 도로 나온다./ 수상히 훑어보는 사원도 있다./ 사원이여/ 그럴 필요는 없는데./ 이제야 나도 알아지는 것이 있구나/ 변한 거리에 변한 이 사람/ 때마침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다.//

하일명상(夏日瞑想) / 신동집
노년은 하잘없는/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이런 말을 하던가/ 손뼉 치며 소리 높이/ 허리 굽은 남루를 찬양하라./ 격조 높은 정밀(靜謐)의 이마 푸른 현자도/ 때로는 느닷없는 광기에 사로잡히며/ 스스로의 운명을 이룩하는 수가 있다./ 묵묵히 돌아도 안 보고.// 명심하라. 헤매이며 떠돌던 노한 노년도/ 비로소 냉엄히 끓는 눈을 부릅뜬다./ 이승을 엿본 자 무슨 한이리오/ 떠나며 가벼이 코나 풀 일./ 더위도 바야흐로 막바지 8월/ 귀뚜리도 엊그제 울기 시작했다./ 꿀벌이여, 제비 나는 빈 집에 와 집을 지어라/ 황망히 살다 갈 집을 지어라.//

추일유정(秋日有情) / 신동집
1. 한로(寒露)// 진보라 가지나무에/ 물을 주는 사람의 흰 발도 사라지면/ 어언 소매 끝에 와 닿는/ 한로의 바람 무늬.// 그러면 나의 노래도/ 청자의 하늘빛을 닮을 때가 되었는가./ 노래는 상기 맑아 오르지 못하고/ 부질없이 고이는 한로의 이 냉기.// 나의 의지도 한 마리/ 후조의 나래깃을 닮을 때/ 청자의 심연에서/ 일어서는 나는 고려 선비다.//
2. 가을의 얼굴// 줄기에도 주룽히/ 보석의 열매가 맺는 날이다./ 이마 푸른 선비의/ 마음은 한로에 젖어/ 잘 굽은 나무 사이로 보이는/ 옥빛 하늘./ 그러나 아른대이는 보살님/ 머리에 가리워/ 서역(西域)은 잘 안 보인다./ 그래도 상관은 없는 일,/ 오늘은 돌 속에/ 보살님을 캐는 날이니,/ 제일 맑은 가을의/ 얼굴을 캐는 날이니.//
3. 송신(送信)// 바람은 한로(寒露)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送信)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 없는/ 청자(靑瓷)의 심연이다//

한로(寒露) / 신동집
허수아비의/ 헐어빠진/ 옷자락이나 되어 남는 일이다.// 허수아비의 어깨 위/ 길 잃은 한 마리/ 새나 되어 남는 일이다.//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비록/ 넥타이를 맨다 해도// 으스스 바람 도는/ 한로의 무늬를 어찌할까./ 그런 마음의 들판을 어찌할까.// 남은 일은 미치는 일이요./ 그지없던 날의 옥빛은 갔으니/ 그런 날의 보람은 갔으니.//

추일별곡 / 신동집
하마트면 일 뻔도 한/ 위험한 관계를 미안히 생각하며/ 오늘은 내가 떠날 차례/ 그러면 둘이는 다/ 추일풍경이 되어보는 날이다./ 채칼에 뚝뚝 떨어지는/ 물배 이슬을 거두며/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한자리에 앉고 보면/ 우리네 생활사는 그래도 숨어 드나부다./ 작별의 술잔에 남빛 고름은 비친다./ 허리춤에 찬 향주머니/ 인형의 실눈썹은 비친다./ 가을이 너의 소매끝에 닿아도/ 함부로 설레이진 말일/ 가지에 앉은 새가 엿보고 있으니,/ 아리는 미소를 한 군데 가릴/ 토끼풀 하나/ 노랗게 익은 탱자알 하나/ 너의 손에 들어 있어 더욱 좋은 일./ 추일은 마침 별곡이 던다./ 가다가 잘못 산신령을 만나면/ 꼰바둑이나 한 판 둘 여유는 있어야지/ 이마 푸른 고려선비는.//

평범한 가을밤 / 신동집
평범한 가을밤엔/ 평범한 과일이 낫다./ 단 미를 걸러낸 평범한 말이/ 나에게 더 어울릴 때도 있다./ 떠나는 막차 소리를 기억 속에 들으며/ 한 장의 엷은 잠의 막을 넘어서면/ 꿈 속을 한 개/ 커다란 과일이 떨어진다./ 어느 깊이로 떨어져 갔는지/ 내일 아침 출발하는 바람에게 물어 보리라.//

가을 햇살 / 신동집
우리들이 둘러 앉은 이 언저리/ 나무잎은 물들어/ 더러는 떨어지고 더러는 남아/ 가지에 무늬 맑게 설렁이고 있다.// 보아라, 천지에 부드러운 이 햇살을/ 인제는 한이 없는 가을 이 햇살을./ 이런 날의 한 때를 위해/ 사람은 여태 살아 왔던가.// 해는 짧아라, 가을날의 오후/ 서너 시 혹은 반/ 이런 볕이 너무도 아까워/ 사람은 쉬이 자리를 뜰 수 없구나.// 왕릉(王陵)이 보이는 풀밭에/ 상기도 무늬 맑은 웃음은 감돌고/ 한동안 그지없이 목숨은 기쁘다/ 기뻐서 도리 없이 목숨은 슬프다.//

눈 / 신동집
아주 너를 떠나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펑펑 눈이 오는 밤이었다./ 돌아서는 모퉁이 마다 내자욱 소리는 나를 따라오고/ 너를 내 중심에서 눈의 것으로 환원하고 있었다./ 너는 아주 떠나버렸기에 그러기에/ 고이 들을 수 있는 내 스스로의 자욱 소리였지만/ 내가 남기고 온 발자욱은 이내 묻혀 갔으리라./ 펑펑 내리는 눈이 감정 속에 묻혀 갔으리라./ 너는 이미 나의 지평(地平)가로 떠나갔기에 그만이지만/ 그러나 너대신 내가 떠나 갔더래도 좋았을 게다./ 우리는 누가 먼저 떠나든,/ 황막히 내리는 감정속에 살아가는 것이냐.//

산수도(山水圖) / 신동집
南畵(남화) 속에 나오는 한 老人(노인)의 모습이/ 요즘 자주 눈에 어른거린다./ 어찌 보면 老人(노인)도 아니요/ 젊은이도 아닌 老人(노인)의 모습이다./ 누구의 그림인지 익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많은 그림 속 人物(인물)이/ 포개져 우러나온 모습인지 모른다./ 壓倒的(압도적)인 山水(산수) 아래짬 모서리에/ 반 허리를 굽히고/ 무슨 움직임을 움직이려 하는지/ 나도 잘 몰라질 때가 많다./ 알 때는 나도 이미/ 그런 人物(인물)이 되어 있는지 몰라./ 귀를 모으면 그림 속에 들리는/ 개울물 소리/ 죽어서나 들어볼 개울물 소리다./ 이런 山水圖(산수도) 모서리에 놓이면/ 사람도 차마/ 늙었는지 젊었는지 분간이 어렵다./ 時間(시간)도 필요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時間(시간)에 넘어질 우려도 없이/ 그래 넘어질 希望(희망)도 없이,/ 氣韻(기운) 도는 이 山水(산수) 아래서.//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 어느 대학촌에서 / 신동집
저마다의 진한 겨울을 안고/ 처녀(處女)들은 한 아름씩/ 소포(小包)를 띄우고 있던데,/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다./ 한산해진 우체국에 들어서면/ 갑자기 들어온 이유(理由)를 잊고/ 나는 몇 장의 우표(郵票) 밖에 살 것이 없다./ 말하자면 그들로 볼 때/ 시(詩)는 편리한 날개의 대용일 수도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할 때/ 계원(係員)은 나에게 우표(郵票)를 내어주며/ 잠시 나의 속으로 들어가 본다./ 밖을 나오면 동한(凍寒)의 젖빛 거리/ 어쩌면 띄우고 말 한 장의 편지/ 그 웃머리를 생각하며/ 참으로 거짖 없는/ 한 줄의 육성(肉聲)을 생각하며/ 며칠 못 본 주인(主人) 눅은 악기점(樂器店)으로/ 그 옆의 낯익은 주점(酒店)/ 주점(酒店) 속의 바다로 뛰어든다.//

끝나는 계절 / 신동집
쌀을 안치는 소리가 부엌에 들린다./ 짧은 해는 빨리도 기울고/ 밖에 놀던 아이도 집으로 돌아온다./ 들어서며 부르는 갓 배운 콧노래/ 저무는 날은 오히려 밝기도 하다./ 나에게도 한 계절은 끝나고 있다/ 기울기엔 상기 이른 한 계절이.// 아침에 갈아입은 와이셔츠도/ 후줄히 때가 묻었다./ 청마루 한 모서리/ 어느 날의 잊었던 단추를 주우면/ 멀리 울리는 열차의 기적 소리./ 부엌에 끓는 찌개 소리가/ 노을에 한창 풀어 섞이고 있다.//

잠들기 전 / 신동집
거리의 가게도 뚜르르/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의 수지도 이리저리/ 맞추어 보는 시간이다./ 또한 텔레비전 화면 앞에 모여/ 오늘의 마무리/ 뉴스를 지켜보는 가족도 있다./ 무언가 석간을 더듬는/ 가장의 그늘진 이마 주름도 보이고/ 또는 잠자리 세수도 대강 마치고/ 잠시 거울 앞에 앉는 아낙네/ 그 옆에 고사리 손을 불끈 쥐고서/ 새근거리는 아기의 잠도 보인다./ 고요히 깊어가는 이 밤/ 나의 안에도 나직이 밤 노래는 흐르고/ 스르르 잠들기도 전에/ 꼬리 달린 이삭 별이 하나/ 동녘 하늘로 떨어지고 있다.//

마지막 희망 / 신동집
사랑이란 말은 당분간 안 쓰마/ 이 때묻은 말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때로는 음모/ 흥정이 숨어 있는 이 말을,// 이 말이 정 필요하다면/ 오히려 벙어리가 되마/ 그러나 이 말 없이는 어찌/ 태양은 뜨랴/ 밤하늘에 별은 반짝이랴// 바람은 어찌 나무와 속삭이며/ 비는 땅과 속삭이랴/ 이 말 없이는 또/ 꽃은 어찌 피고 지랴// 처음부터 이 말의 깊이 속에서/ 우리는 사는지 몰라/ 어쩌면 마지막 희망으로/ 이 말의 깊이에서 사는지//

오, 하나씩의 이름들 / 신동집
오, 하나씩의 이름들/ 무시로 떠오르는 하나씩의 이름들/ 돌이며 길, 들이며 강/ 풀이며 나무, 별이며 무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이런저런 이름들.// 이들은 결국/ 하나씩의 암호였던가./ 우리들의 삶의 융단천/ 그 둘레 안으로/ 누구인가 짜 넣은/ 암호였던가.// 우리는 저마다의 암호를 안고/ 이 지상을 살다 가는 것이리라./ 조금씩은 나름으로 풀다 말다 하면서/ 그러나 결코 풀지 못하며,/ 그리곤 다시 한 번 풀기 위하여/ 깨어나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리라.//

이사 / 신동집
늘은 건 세월의 누더기라 하자,/ 그런대로 불에 사른 것도 많다./ 밥을 메겨 시계룰 걸어 놓고/ 문패도 달아 붙이면/ 이 집도 당분은 나의 거처가 된다./ 잊은 물건도 더러 생각이 나나/ 묻지 말라/ 잊기 위한 이사도 있는 법이니./ 이 빠진 고흐의 걸상이/ 여까지 따라오고 보면/ 질긴 건 인연이다./ 수상히 짖던 개도 알아보는지/ 이내 조용해지면/ 머리 위에 째잭/ 인사를 떨구는 새도 두엇 보인다./ 일손을 놓고 우러다 보면/ 앞산 마루 여저기 눈은 아직 남아 있다./ 언제면 이 집도 다시 옮길지/ 기약은 없지만/ 한 번은 혼자 떠날 그런 이사도/ 문득 생각이 난다./ 어느 날 발에 맞는 새 신을 신고/ 아득히 먼 가믈 현(玄)으로 나서면/ 그 때는 무어라 새들은 인사를 할까/ 알아도 보았으면.//

여로 1 / 신동집
사람은 문득/ 원경(遠景) 속에 서 있는 자기를 볼 때가 있다./ 어릴 때 흔히 그린 크레용 그림/ 그 속의 조그만/ 인물을 닮은 자기의 모습을./ 그리곤 잠시/ 지나온 여로를 생각해 본다./ 산과 들이 처음 놓이고/ 한두 채 집이랑 나무, 길이 놓이고/ 여저기 구름이 놓인 크레용 그림./ 그림 속의 인물은 지금도 걸어가고 있다./ 불러도 이쪽을 돌아보는 일 없이/ 한 손엔 무언가 일호 봉투를 들고./ 그렇다, 돌아올 리 없는 나요/ 지금도 원경 속을 가는 사람은.//

동행 / 신동집
길을 가는 우리는 서로 만나/ 인연껏 함께 가는 同行이다./ 同行이란 무엇일까/ 속속들이 상대를/ 아는 것도 아니리라./ 서로는 그런 요구를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저마다 혼자 가는 우리는/ 언제나 더듬거리는 목숨이요/ 다다라 쉴 잠이 어디에 있는지,/ 되도록이면 이마 위에 별을 이고/ 저마다의 밤을 헤어갈 뿐/ 가다가 琴線에 와 닿는/ 그런 것이 있다면/ 고마웁게 받아들이며/ 또한 소중히 나누어 가지며/ 우리는 함께 가는 同行이다./ 인연껏 가다 마칠 그런 同行이다.//

행인 1 / 신동집
길을 가다 발이 무거워/ 한동안 나무 그늘 돌 위에 쉬어 본다./ 이마에 밴 땀을 씻으며 아래켠으로 눈을 돌리면/ 들판을 건너가는 사람의 흰 옷이/ 간혹 조만하게 아른거리고 있다./ 이웃 마을이나 읍내로 잠시 나들이나 가는 길인지,/ 그런데 이들은 왜 하나같이 가면은/ 다시 안 올 행인으로만 보일까./ 길은 분명 같은 길이요/ 내키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길인데.// 한동안 나는 생각해 본다./ 지난 날 인연 있던 사람들의 일을./ 바람이나 잠시 쏘이러 또는 장에나 가듯이/ 가벼운 인사말로 떠난 사람도 알고 보면/ 다시 못 올 헤어짐이 될 줄이야./ 내일 또 만나자던 웃음 먹은 얼굴이/ 지금은 해밝은 하늘에만 걸려있는 사람도 았다.// 쉬었던 몸을 일으켜 발을 다시 옮기면,/ 아른거리며 가는 저 들판의 사람 눈에/ 나도 또한 가면은 아니 올 행인으로나 보일까./ 기우는 해그늘에 제비는 돌아가고/ 철교에 느릿이 화물차는 지난다./ 오는지 가는지 구별도 없이.//

모과나무 / 신동집
유난히도 포근한 초동 날씨/ 더없이 옥빛 귀한 하늘빛이다./ 고마와라, 이런 날도 있었던가/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는데./ 하늘거리며 그리 춥지도 않은 바람이/ 시름없이 건너가고 있다./ 뜰의 모과나무엔 예저기/ 아직도 매달린 가랑잎새들/ 하르라니 살랑이며 맑게 떨고 있다./ 그때는 구슬프기 짝이 없던 나문데/ 그 사이 어언 자라/ 실하고 당당한 나무가 되었다./ 여름이면 보기에도 시원히/ 잎새를 살랑이며/ 호젓한 저녁 한때를/ 심심히도 반겨 주더니/ 그 사이도 식구들은 하나 둘 줄고/ 뜻밖에도 이 몸은 망가져/ 삽시에 많은 것이 변하고 말았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햇살에 살랑이는 모과나무의 향내라 할까./ 햇살 바른 뜰에는 향기 드높이/ 코에 스미던 모과 열매도/ 지금은 거진 다 따고 말았다./ 몇 개만 가지 끝에/ 지금도 남아 있을 뿐./ 바람이 하늘거릴 때마다/ 지금도 향내는 코에 스미듯/ 감돌고 있다./ 드디어 나뭇잎도 다 떨어지면/ 사람들은 영하 깊이 문을 닫아 걸리라./ 원컨대 해가 바뀌면 또/ 가지 추운 나무도 다시 살아나/ 향내 그윽한 열매를 달아 주기를./ 바라는 것이 또 무엇이랴,/ 유난히도 포근한 초동(初冬) 날씨에/ 더없이 옥빛 귀한 이 하늘/ 고마와라, 이런 날도 있었던가/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는데./ 경건히 고개 숙여/ 지팡이를 다시 짚는다.//

싸리나무 / 신동집
잠자리는 살아 있는 싸리나무엔/ 앉지 않는 법이다./ 언제나 죽은 싸리나무/ 그 꼭대기에 가 앉는다./ 몸에 비해 유달리/ 눈이 큰 잠자리는/ 언제나 죽음의 정상에 가 앉는다./ 엷은 나래에 모시 하늘은 비치고……/ 바람이 살짝 싸리잎을 흔들면/ 꿈에서나 깨어난 듯 잠자리는 떠난다/ 어느 또한/ 싸리 마른 가지를 찾아서./ 오늘은 또 오늘의 묘비명이다./ 바람에 휘적이는 묘비명이다.//

편지 / 신동집
거리에도 여저기 군밤이 나돌고/ 가랑잎도 이리저리 굴러다니면/ 다 쓴 편지에도/ 마지막 우표를 단다./ 그러면 나름으로 길을 떠나리라./ 떠나는 후조에 길이 있듯이/ 띄우는 편지에도 길은 있으니/ 시월 상달 높은 하늘에/ 눈을 풀어 적시면/ 사람도 한동안/ 무늬 이는 옥빛이다.//

바다 / 신동집
바다여, 옷에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푸른 잉크 물이다./ 살에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진한 잉크 물이다.// 수면으로 내려앉는 돌층계도/ 뱃전에 날아 뜨는 갈매기떼도/ 떠나는 고동 소리도/ 지우려면 다 지울 수 있지만// 해만의 끝머리 흰 등대도/ 등대 위에 조으는 구름 자락도/ 흩어진 섬들의 밝은 무덤도/ 지우려면 다 지울 수 있지만// 바다여, 한 번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푸른 잉크 물이다./ 찍어서 내가 쓰는/ 가슴의 잉크 물이다.//

마음이 한 때 / 신동집
피며는 그저/ 피는 줄만 알았던 꽃잎들/ 여물면 그저/ 여문 줄로만 알았던 열매들,/ 이들은 왜 하나같이/ 더없는 귀한 걸로 보이는 것일까./ 피며는 그저/ 피는 줄로만 알았던 노을의 분홍빛/ 변하면 그저/ 변한 줄만 알았던 보라며 수묵 어린 빛,/ 고목(古木)은 한 그루/ 노을 다한 하늘에 우뚝 서 있고/ 두어 채 방금/ 불이 돋은 창문들,/ 이들은 왜 하나같이/ 더없는 의미로만 보이는 것일까/ 기쁘고도 서러운 마음 이 한때.//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건 / 신동집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건/ 참 재미 있는 일이다./ 가령 길에서나 어디에서/ 문득 만난 사람이라도/ 꼭히 누구를 닮았다고 짚는 순간에/ 기어코 그는 소를 닮고/ 말 여우 토끼/ 고양이 거북이도 닮는다./ 꼭히 누구를 닮았다고 짚는 순간에/ 과연 그는 아보가도로 빠스깔을 닮고/ 또는 바세도오, 쥐포수를 닮고/ 시골 정미소 주인을 닮는다./ 짖궂은 생각은 다시 얼굴에/ 턱수염을 달아 붙이고/ 갓을 씌우면/ 아 정말 그렇다/ 李朝 때 아무개 참판을 닮는구나/ 참 신나는 일이다/ 동그랑땡.//

한 사람의 슬픔 / 신동집
쓰지 않았다면 좋았을/ 그런 것만 써 왔구나 여태./ 버릴 데도 없는/ 이 역겨운 말 누더기./ 그러나 여전 나는 쓸 것이다/ 모래 위에, 물 위에/ 종이 위에, 허공에./ 결코 쓰지 못할/ 그런 꿈을 위하여/ 나는 쓰고 또 쓸 것이다./ 종국의 수락이/ 부슬비처럼 내릴 때까지./ 나를 늙었다고 하라/ 마음대로 젊었다고 하라./ 기약 없는 이 붓끝에서/ 끝내 터지는 말은 무엇일까./ 울분도 실의도 아니다/ 깊이 엉긴 한 사람의 슬픔이다.//

나의 손 / 신동집
나의 손은 크도 작도 않은 손/ 알맞게 하나님이 만드신 손/ 큰 일은 못해도/ 작은 일은 더욱 못하는 손./ 착한 일은 못해도/ 악한 일은 더욱 못하는 손.// 이런 손에 죄가 있다면/ 분수대로 산 죄밖에./ 넘보지도 얕보지도 않고/ 나름으로 산 죄밖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프나 고프나/ 나름으로 산 죄밖에.// 어느 정도 쥐어도 보고/ 털털 털어도 본 손/ 털어도 별 먼지는 안 나는 손/ 무엇인가 만들고는 부수고/ 부수고는 다시 만들고/ 흩어진 장기알도/ 챙겨서는 다시 두고// 모기 파리는 그 자리에 때려 잡아도/ 함부로 살생은 안한 손/ 약손은 못되어도/ 독손은 더욱 못되는 손/ 어쩌다 꽃을 꺾어도/ 병에 담기 위한 것./ 담아서 짧은 이승/ 마음 주기 위한 것.// 나의 손은 크도 작도 않은 손/ 알맞게 하나님이 만드신 손./ 오늘도 이 손으로 시를 씁니다./ 나의 시를 말이지요,/ 오늘도 이 손으로 코를 풉니다./ 오늘도 이 손으로 도장을 찍습니다./ 어떠캅니까./ 하나님은 아시리라 믿고/ 손톱을 깎습니다.//

비가(悲歌) / 신동집
1// 바람에 희끗이 머리카락은 날린다./ 삐에로여/ 작별의 인사말을 아는가./ 너의 눈 속에 한 자락/ 노을 구름은 돈다./ 길 잃은 잠자리의 그리매도 저물면/ 대지의 노래 속에 떨어지는 나뭇잎들,/ 늦도라지 보라 속에/ 꿈을 헤맨 사람은/ 귀뚜라미 울음에도 마음이 설레이고/ 삐에로여 잠잠히 춤을 거두어라./ 사람의 손에 인형은 때묻고/ 술잔에 남은 머루씨 댓 톨/ 바람에 희끗이 머리카락은 날린다.//
2// 계절 사이로 간간이/ 웃음 소리는 밝게 들린다./ 여름을 살아 남아 여까지 온 사람은/ 비탈에 그늘 여문 가을꽃을 바라본다./ 이것도 그래 다행한 일이다/ 늦도라지 보라 속에/ 비치며 사라지는 행인의 그림자./ 익어 여문 과일의/ 무게가 문득 손에 무거울 때/ 굴러가는 가랑잎은 누구의 것일까./ 귀뚜리여 아직은/ 죽을 자리를 더듬지 말라./ 시월 상달 해 짧은 날에/ 옥빛 바람은 풀어 섞이고/ 이러할 때 상머리 생명은 유정(有情)이다.//
3// 기적 소리도 울고 가면 그만,/ 누가 오래 견딜까/ 이 멀건 들판을./ 한 줄기 걸인의/ 모닥불이 피어 오른다./ 간간이 풍기는 고무 타는 내./ 이러할 때 날카로이/ 새는 노을에 빛나고……/ 저녁 새여 아직은 더 울어라./ 나락 말던 사람의 그리매는 사라지고/ 굽어 도는 강나루 모서리도 저물면/ 남은 건 한 가지/ 최후의 기슭에 별이 뜬다.// 4// 사람이 두 발로 일어서/ 걸어 온 시간이 아득히 보인다./ 내가 두 발로 일어서/ 걸어 온 시간이 아득히 보인다./ 무엇을 위한 여로인가./ 엿장수의 가위 소리는 일찍/ 해진 길로 발을 돌리고/ 우수수 달력 속에 날은 어둡다./ 이승을 엿본 자/ 무슨 한이리오/ 떠나며 가벼이 코나 풀 일./ 삐에로여 잔을 들어라/ 바람이 너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바람이 방금/ 너의 이름을 지우고 있다./ 삐에로여 잔을 놓아라//

금조비가(金鳥悲歌) / 신동집
1// 어느 고도(古都)의 박물관에서/ 마침내 너를 보았다, 황금(黃金)의 새여/ 혹은 보았다고 여전/ 지금도 생각고 있다./ 그리는 크지 않는 순금(純金)의 몸매/ 접동이나 방울새 크기만 할까./ 허공에 고개를 치껴 들고/ 방금도 울 듯이 머문 너의 부리,/ 너의 눈은 뜨고 있는 잠인가/ 자고 있는 생시인가./ 그 사이도 수없이 꽃잎은 피고 지고/ 맺어서 떨어진 열매들의 행방./ 그 사이도 허다히 왕조는 바뀌고/ 발굽 소리는 요란히 지나간 뒤에도/ 여전 울 듯이/ 부리는 허공에 머물고 있다./ 간혹은 내/ 하염없는 생각에 잠길 때면/ 무시로 나의 눈에 너는 어리고/ 울 듯이 굳어 버린 너의 울음에/ 쭝긋이 나귀의/ 귀를 나는 모아 본다.//
2// 오늘도 생각 속에 너를 대하여/ 무엇을 나는 바랄 것인가/ 황금의 새여,/ 그렇다, 죽기 위해 태어난/ 그런 몸은 아니라 너는 말하리라./ 그 말도 맞는 말이다/ 경우에 따라선/ 그 말이 옳을는지 모른다./ 자고로 시인은 무어라 이르던가,/ 너는 죽지 않는 새/ 남들은 다 가도 너는 가지 않는 새/ 그런 새라/ 시인의 한 사람은 말하더라.//
3// 이승에 태어나 누가 한두 번/ 살고 싶은 저/ 영생을 바라지 않았던가./ 보라, 망가지듯 두드리는/ 건반의 두 손을,/ 미친 듯 휘두르는 백발의 지휘봉을,/ 쫓기듯 또한 쫓듯/ 줏어 넘기는 책장을/ 핏발 선 독서의 눈을./ 보라, 신들려 떠는 굿소리/ 구슬픈 저 염불 소리를/ 목메인 기도의 탄식을,/ 보라, 우수수 가랑잎에/ 남은 잔을 비우고/ 나룻배를 부르는 행인의 목소리를./ 누가 한두 번/ 살고 싶은 저/ 영생을 바라지 않았던가.//
7// 한 번의 봄을 살은 사람은/ 한 번의 가을이면 되는 일/ 무엇을 또 바라랴./ 한 번의 꽃을 피운 사람은/ 한 번의 가는 길이면 되는 일/ 무엇을 또 바라랴./ 해 져도 해 떠도/ 그저 멍멍할 따름./ 눈이 탄 사람은 탄 채/ 멀건 들판을 헤매이고/ 아니면 웅크려 식은 간(肝)이나 쪼으며/ 기억의 아침 노을/ 그런 저녁 노을을/ 시리게 다시 또 맞이할 뿐이다.//
8// 황금의 새여, 이젠 눈을 열어라/ 열어서 마침내 울어 보아라/ 소리없는 울음에/ 나의 귀는 열려 있으니/ 살아보고 사라질 목숨의 향기로/ 울어서 참다운 너의 네가 되어라./ 그런 뒤면 또 한번/ 천 년을 잠들면 어떠랴/ 만 년을 잠들면 어떠랴./ 뜻 있는 사람이 그 때도 살아 있다면/ 그들은 그들의 슬픔 속에서/ 간절히 또한 너의 울음을 원할 것이니/ 황금의 새여/ 오늘은 오늘의 눈을 열어 울어라/ 황망히 살다 가는 이 행인을 위하여/ 다하지 못한 그의 꿈을 위하여/ 슬퍼하지도 안하지도 말고서.//

나비 / 신동집
나비는 정작으로 꿈이 서러워/ 높은 봉 넓은 강 하늘도 넘어// 아지랑이 피오른 기와비늘도/ 잡초사 하늘 솟는 무덤도 넘었다// 나래 잎에 꽃가루 휘날리고는/ 나비는 월광의 꿈을 나른다// 어느 날 궂은 비에 나래를/ 저워 다소고시 나래를 저워// 나비는 내 청춘 그늘 아래/ 아름다운 뉘우침인양 죽어 누었더라//

포스터 속의 비들기 / 신동집
포스터 속에 들어 앉아/ 비둘기는 자꾸만 곁눈질을 한다/ 포스터 속에 오래 들어 있으면/ 비둘기의 습성도 웬만치는 변한다/ 비둘기가 노니던 한때의 지붕마루를/ 나는 알고 있는데/ 정말이지 알고 있는데/ 지금은 비어버린 집통만/ 비 바람에 덜럭이며 삭고 있을 뿐이다./ 포스터 속에는/ 비둘기가 날아볼 하늘이 없다/ 마셔볼 공기가 없다./ 답답하면 주리도 틀어보지만/ 그저 열없는 일/ 그의 몸을 짓구겨/ 누가 찢어보아도/ 피 한방울 나지 않는다./ 불 속에 던져 살라보아도/ 잿가루 하나 남지 않는다./ 찍어낸 포스터 수많은 복사 속에 포스터/ 다친 데 하나 없이 들앉아 있으니/ 차라리 죽지 못해 탈이다.//

어느 하오 / 신동집
아이들이 갖고 놀다 버린 풍선(風船)이/ 떴다는 말다/ 시름없이 방안에 딩굴고 있다./ 아이들엔 이미/ 소용없는 물건이 되었는지 모른다./ 오늘은 추석(秋夕)의 뒷날,/ 아이들은 어딘지 밖으로 나가/ 메우지 못한 제마다의 꿈을 찾고 있는지/ 마당귀엔 망가진 잠자리채도 보이지 않는다./ 집안에 혼자 남아 있으면/ 상념(想念)은 유동(遊動)하는 미립자(微粒子)와도 같이/ 흔들리는 풍선(風船)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하오(下午) 한나절 해 그늘은 여물고/ 한동안을 잠기는 라디오의 바로크./ 뜰에 핀 너댓 그루 장미는/ 조만간 찬 바람에 시들고 말겠지만/ 그런대로 얼마를 더 피어서/ 내 눈을 적시게 해 줄 것을 바랄 뿐이다./ 바람 차면 사람들은/ 문을 닫아 걸리라./ 원컨대 투명(透明)한 玉(옥)빛 정밀(靜謐)이/ 헐벗은 나에게도 남아 줄 것을./ 예지(叡智)는 무엇인가/ 처음으로 일러 준 스승이여/ 응시(凝視)마저도 지금은 하나의 잠인가.//

암호(暗號) / 신동집
녹음도 어지간히 우거지고/ 가지의 새도/ 시나브로 울 무렵/ 풀밭에는 이름 모를 노란 들국이/ 가련히도 잔잘히 피어나 있다./ 산들바람이 불면/ 들국은 하르라니 하늘거리며/ 떨어에이고 있다./ 한참이나 이런 들국의/ 애틋한 못브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왠지 자꾸만/ 누구인가의 어른거리는 暗號로만/ 보이는 것은 웬일일까./ 풀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멍멍히 몰라지는 그런 暗號로./ 멀건 들판엔/ 오늘도 깊이 모를 暗號로 어른거리며/ 들국은 피어서 하늘거리고 있다./ 때가 되면 들국은 스스로 피어나리라/ 피었다간 스스로 지고 말리라./ 누가 알아주면 다행/ 몰라도 그만/ 무슨 상관일가./ 져서는 때가 되어/ 다시 또 피어나리라./ 우리는 나름으로 조금씩/ 풀다 말다 하면서/ 그러나 결코 풀지 못할/ 그런 暗號를 안고/ 해 짧은 날의 地上을/ 황망히 건너가는 것이리라.//

시인 / 신동집
하늘거리는/ 들판의 들국/ 보다는 좀더/ 살면 다행한 일이다.// 지금을 우는/ 뜰의 귀뚜리/ 보다는 좀더/ 살면 고마운 일이다.// 시인이여, 네가 노래 않으면/ 누가 노래해 줄까./ 그들은 너에게/ 그것을 맡기고 간다.// 햇빛이여, 바람이여/ 별이여 또한 눈비여/ 너이들이 노래 않으면/ 누가 노래해 줄까.// 시인은 너이들에/ 그것을 맡기고 간다./ 유일한 희망으로/ 맡기고 간다.//

분수 / 신동집
겨울이 봄과 함께 온다니말도 안되는 소리/ 무서리도 겨우 어제 그제 일인데/ 하마 내미는 개나리의 눈이 민망하다./ 봄은 봄, 겨울은 겨울/ 사람도 꽃도 다 분수가 있어야지/ 그 정도의 염치는 있어야지/ 아닐바엔 영 피지도 말 일./ 겨울이여, 가혹히 오라/ 다들 죽어 든 시늉을 할 때/ 죽어서 영하 깊이 잠든 시늉을 할 때.//

 

조국으로 가는 길 / 신동집
솜구름 말가히 나르고 푸른 들 기름진 땅/ 불꽃이 마구 올라 붙는 하늘이 서러웁거든/ 우리 눈알을 한데 모아 조국으로 가자/ 노래를 한데 엮어 조국으로 가자// 그대는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운명/ 속일 수 없는 우리의 혈맥/ 보다 아름다이 꾸민 땅도 있으리/ 복되게 사람 사는 부러운 나라도 있으리/ 이득한 한숨 가슴을 덮드래도/ 조국은 지울 수 없는 우리의 발자욱임을 어찌하느냐// 조국은 자랑스런 우리의 깃발이다/ 조국은 자랑스런 우리의 훈장이다// 우리 눈알을 한 데 모아 조국으로 가자/ 노래를 한 데 엮어 조국으로 가자/ 그대는 자랑스런 우리의 꿈이 아니냐/ 그리하여 조국으로 가는 길은 항쟁의 길이다/ 자유로 가는 길은 진격의 길이다// 조국은 한양 고난속에 부활하는 것인가/ 넘어져도 열 번 일어나는 용기를 배우자// 하나로 가는 길은 영광의 길이다/ 양편바다 함박꽃이 피는 길이다//

진혼 / 신동집
가장 미더웁던/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장 미더웁던/ 나 자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일은 정처없이/ 펄럭이는 일이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그러나 되도록이면 탁하지 않게./ 약간은 흙바람에 눈이 시려도/ 그럴 수 있는 일,/ 아침 노을의 무슨 약속이/ 한 그루 나무로 자라던가./ 가장 바라던/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장 바라던/ 나 자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일은 갈피 없이/ 펄럭이는 일이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추하지 않게./ 그러면 이 펄럭임도/ 약간은 진혼의 노래가 될는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 돌아오지 않은 나 자신을 위하여./ 언덕마루에 상기/ 비가는 바람불고 있다.//



신동집(申瞳集.1924년∼2003년) 시인
대구 중구 인교동에서 출생했다. 호 현당(玄堂). 1951년 서울대 정치과 졸업. 1959년 미국 인디애나대 수학. 1948년 습작시집 『대낮』을 간행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영남대 교수(1955∼1969), 계명대 교수(1970∼1986), 동대학교 외국어대학장(1982∼1985) 역임하고 1985년 경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 『대낮』, 『서정의 유형』, 『제2의 서시』, 『모순의 물』, 『들끓는 모음』, 『빈 콜라병』, 『새벽녘의 사랑』, 『귀환』, 『송신』, 『신동집 시선』, 『미완의 밤』, 『해뜨는 법』, 『장기판』, 『진혼ㆍ반격』, 『암호』, 『신동집 시전집』, 『송별』, 『여로』, 『귀환자』, 『누가 묻거든』, 『백조의 노래』, 『고독은 자라』, 『목인의 일기장』, 『시인의 출발』 등 많은 시집을 낸 다작 시인이다. 아시아 자유문학상, 경북문화상, 현대시문학상, 한국현대시인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대한민국 문화옥장, 옥관문화훈장, 세계시인상m 도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03년 지병인 고혈압으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