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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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10. 9.

쓰봉* 속 십만원 / 권대웅
"벗어놓은 쓰봉 속주머니에 십만원이 있다"//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무슨 큰 비밀이라도 일러주듯이/ 엄마는 누나에게 말했다/ 속곳* 깊숙이 감춰놓은 빳빳한 엄마 재산 십만원/ 만원은 손주들 오면 주고 싶었고/ 만원은 누나 반찬값 없을 때 내놓고 싶었고/ 나머지는 약값 모자랄 때 쓰려 했던/ 엄마 전 재산 십만원// 그것마저 다 쓰지 못하고/ 침대에 사지가 묶인 채 온몸을 찡그리며/ 통증에 몸을 떨었다 한 달 보름/ 꽉 깨문 엄마의 이빨이 하나씩 부러져나갔다/ 우리는 손쓸 수도 없는 엄마의 고통과 불행이 아프고 슬퍼/ 밤늦도록 병원 근처에서/ 엄마의 십만원보다 더 많이 술만 마셨다// 보호자 대기실에서 고참이 된 누나가 지쳐가던/ 성탄절 저녁/ 엄마는 비로소 이 세상의 고통을 놓으셨다/ 평생 이 땅에서 붙잡고 있던 고생을 놓으셨다// 고통도 오래되면 솜처럼 가벼워진다고/ 사면의 어둠 뚫고 저기 엄마가 날아간다/ 쓰봉 속 십만원 물고/ 겨울하늘 훨훨 새가 날아간다//
* 쓰봉(zubon 일본어): 양복바지. '바지'의 방언(강원,경상,전라,충청)
* 속곳: 여성들이 치마 바로 밑에 입던 속옷.

엄마의 노을 / 권대웅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야/ 회귀본능일 뿐이라구/ 펄떡거리며 저녁 강을 거슬러 가는 연어들처럼/ 마지막 생의 행진이야 축제야/ 투병을 하던 엄마가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세상에 들였던 자기 자리를 거두는데/ 어찌 안 아플 수가 있니/ 어떻게 흔적도 없이 갈 수가 있겠니/ 저 노을처럼 말이야/ 엄마의 눈가에 노을이 펄럭였다/ 태양이 지는 자리/ 엄마의 시간과 추억이 지는 자리/ 이생에서 얻은 기운을 이생에서 다 쓰고 가듯/ 허공에 마지막 두 손을 불쑥 내민 엄마의 팔뚝이/ 저기 강물을 헤쳐 거슬려 가는 연어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야/ 먼저 온 사람이 먼저 가는 것뿐이라구/ 그 위로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이곳 속 저 너머 / 권대웅
이곳 속 저 너머/ 햇빛이 꽃잎의 비밀을 열 듯이/ 새들이 저들의 신호를 알아듣듯이/ 이곳에 또다른 저곳이 있습니다/ 그림자가 있듯이/ 기억 속에 분명 풍경이 남아 있듯이/ 이곳에 저 너머가 있습니다/ 허공을 날아가던 나비가 보였다 사라지며/ 이쪽과 저쪽을 드나들 듯이/ 아지랑이가 걸어간 자리/ 메아리가 갔다 오는 자리/ 가끔씩 쿵 하고/ 공간이 하품하는 소리//

휘어진 길 저쪽 / 권대웅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과 공간을 챙겨/ 기쁨과 슬픔, 떠나기 싫은 사랑마저도 챙겨/ 거대한 바퀴를 끌고/ 어디론가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기억 속에는 아직도 솜틀집이며 그 옆 이발소며/ 이빨을 뽑아 지붕 위로 던지던 기와의 너울들/ 마당을 지나 아장아장 툇마루로 걸어오던/ 햇빛까지 눈에 선한데/ 정작 보이는 것은 다른 시간의 사람들뿐/ 저기 부엌이 있던 자리/ 지금은 빌라가 들어선 자리/ 그 이층 베란다쯤 다락방이 있던 자리/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가슴에 초승달처럼 걸려있다./ 몇 년 만에 아기를 업고 돌아온 고모와/ 고모를 향해 소리를 지르던 아버지는/ 말없이 펌프질을 하던 할머니는/ 그 마당 그 식솔과 음성들 그대로 끌고/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낯설어 더 그리운 골목길을 나오는데/ 문득 내 마음속에 허공 하나가 무너지고 있었다/ 허공의 담장 너머 저기/ 휘어진 골목 맨 끝/ 기억의 등불 속에 살아오르는 것들/ 오, 그렇게 아프고 아름답게 반짝이며/ 살고 있는 것들.//

내 몸에 짐승들이 / 권대웅
늑골에 숨어살던 승냥이/ 목젖에 붙어 있던 뻐꾸기/ 뼛속에 구멍을 파던 딱따구리/ 꾸불꾸불한 내장에 웅크리고 있던 하이에나/ 어느 날 온몸 구석구석에 살고 있던 짐승들이/ 일제히 나와서 울부짖을 때가 있다/ 우우 깊은 산/ 우우우 울고 있는 저 깊은 산/ 그 마음산에 누가 절 한 채 지어주었으면.//

심우도 / 권대웅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를 끌고 가네/ 길은 멀고 날은 저무는데/ 돌아보니 첩첩 빌딩이네/ 빨리 가려다가 더 늦게 가는 자들이여/ 오토바이를 타고 간 사람이나 비행기를 타고 간 사람이나/ 모두 오리무중이네//

기다리는 편지 / 권대웅
창문이 열리지 않는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겨울의 끈질긴 고집/ 관성은 오랜 기억을 닮는가보다// 마당에 가까스로 내려오는/ 봄 햇빛 한 줌/ 비틀비틀 걸어가다 나비가 되고// 그리움이 많은 쪽으로 기울어지는 허공/ 빨랫줄에 구름이 걸려 펄럭일 때마다/ 하얗게 표백되는 기억들// 기다림도 오래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가보다// 하늘의 길섶 한구석 기우뚱 무너지고/ 그 빈 길로/ 우와 쏟아지는 바람에/ 쿨럭쿨럭 기침을 하는 빨래들// 때로 너무 추운 겨울을 지나고 나면/ 지평선 너머 아지랑이 올라가는 소리가/ 중얼중얼 편지 읽는 소리로 들리기도 하는가보다// 녹슨 우체통에 잔설이 녹는/ 봄날의 끝.//

시간의 갈피 / 권대웅
시간과 시간 사이에 난 길/ 새벽 다섯 시와 여섯 시 사이의 샛길/ 오전 열 시와 열한 시 사이의 섬/ 오후 두 시와 세 시가 만나는/ 눈부신 여울목/ 저녁 여섯 시에서 일곱 시로 가는 길에/ 서있는 우두커니와 물끄러미/ 그 시간이 되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울음/ 혼자서만 너무 그리워했던 눈빛/ 억장이 무너져 쌓인 적막/ 꽃들의 그림자와 떠나지 못한 햇빛들/ 이쪽으로 올 수도 없고/ 저쪽으로 가지도 않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를 서성이는 응어리/ 그 시간의 갈피에 숨어 살고 있는 것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다함없이//

맴맴 사랑해 맴맴 / 권대웅
버스 안에서였습니다. 등뒤에서 무척 시끄럽고 부산스러운 느낌이 들어 돌아보았더니 아이들 세 명이 수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들끼리 손짓으로 얼마나 깔깔거리며 신명났는지 소리가 나지 않아도 들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한참동안 그들의 수화를 들었습니다. 그러다 무심코 버스 창문으로 보이는 플라타너스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무들도 옆의 나무에게, 건너편 서있는 나무에게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팔랑거리는 수백 수천 개의 손짓으로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있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내는 저 수 많은 문자들 나뭇잎의 말들. 그러자 갑자기 곤충들의 이야기도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맴맴 사랑해 맴맴, 쓰륵쓰륵 사랑해 쓰륵쓰륵. 도시 공중으로 울려 퍼지는 이 말을 듣다가 문득 나는 깨달았습니다. 살아있는 그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말을 건네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돌쩌귀 아래 벌레들의 꿈틀거림, 달의 곁을 스쳐가는 구름의 소리, 떼지어 날아가는 새들의 신호, 나뭇가지 까치집 속에서 들려오는 뒤척임. 그리고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더 많은 것들... 그들의 말은, 언어는, 손짓은, 눈빛은, 냄새는, 소리는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들려오는 뉴스보다 아름다웠습니다.//

통화(通話) -故 손혜경 화백께 / 권대웅
달빛이 나뭇잎을 흔들며 마당에 내려올 때마다 바람이며 나뭇잎이며 그 빛의 입자들이 분명 무슨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요한 그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문득 우리가 사는 이곳은 공간의 버전만 다를 뿐, 서로 스치며 지나가는 둥근 회전문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오버랩 되며 공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햇빛이 꽃잎의 비밀을 열 때마다 하늘 저 편에 무지개가 걸릴 때마다 질량불변의 법칙처럼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고 이곳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영혼이 더 성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아지랑이가 아닐까? 봄바람이 아닐까 이제 막 솟구쳐 오르는 새순이나 꽃봉오리가 아닐까? 햇빛으로 혹은 달빛으로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을 당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하늘색나무대문집 / 권대웅
십일월의 집에 살았습니다/ 종점에서 내려 가파른 언덕을 올라/ 얼키설키 모인 집들과 몇 개의 텃밭을 지나/ 막다른 골목 계단 맨 끝 문간방/ 그 집에서 오랫동안 가을을 바라다보았습니다/ 창문 밑에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나팔꽃, 해바라기/ 저녁의 적막을 어루만져 주던 가문비나무/ 가끔 아주까리 넓은 잎사귀가 슬픔을 가려주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담장 너머 이어지던 지붕과 지붕들/ 그 위로 햇빛이 만들어놓던 빛나던 개울들/ 황금여울을 따라 저녁의 끝까지 갔다 왔습니다/ 돌아오면 처마 밑 어둠이 뚝뚝 떨어지고/ 어디선가 쌀 일구는 소리 너무 커 적막해라/ 눈을 감고 술렁이는 내 마음속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리운 것이 너무 많아 불을 켜기 힘든 저녁/ 하늘색나무대문을 열고 나가/ 해바라기가 서 있던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나팔꽃 까만 눈동자처럼 한 시절 야물딱지게 맺히고 싶었습니다//

장독대가 있던 집 / 권대웅
햇빛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다/ 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죽어서도 할머니를 사랑했던 할아버지/ 지붕 위에 쑥부쟁이로 피어 피어/ 적막한 정오의 마당을 내려다보곤 했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떠나가던 집/ 빨랫줄에 걸려 있던 구름들이/ 저의 옷들을 걷어 입고 떠나가고/ 오후 세 시를 지나/ 저녁 여섯 시의 골목을 지나/ 태양이 담벼락에 걸려 있던 햇빛들마저/ 모두 거두어 가버린 어스름 저녁/ 그 집은 어디로 갔을까//

당신과 살던 집 / 권대웅
길모퉁이를 돌아서려고 하는 순간/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 햇빛에 꽃잎이 열리려고 하는 순간/ 기억날 때가 있다// 어딘가 두고 온 생이 있다는 것/ 하늘 언덕에 쪼그리고 앉아/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어떡하지 그만 깜빡 잊고/ 여기서 이렇게 올망졸망/ 나팔꽃 씨앗 같은 아이들 낳아버렸는데/ 갈 수 없는 당신 집 불쑥 생각날 때가 있다// 햇빛에 눈부셔 자꾸만 눈물이 날 때/ 갑자기 뒤돌아보고 싶어질 때/ 노을이 붕붕 울어댈 때/ 순간, 불현듯, 화들짝,/ 지금 이 생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기억과 공간의 갈피가 접혔다 펴지는 순간/ 그 속에 살던 썰물 같은 당신의 숨소리가/ 나를 끌어당기는 순간//

저 집 / 권대웅
저 언덕 지나가는 길에 집이 있었네/ 허리 굽은 등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집/ 저녁 여섯 시면 할머니 삐그덕 문을 열고 나와/ 혼자 쌀을 일던 집/ 깊은 우물처럼 마당이 보이는 집/ 여름 내내 큰딸 같은 해바라기가 담장 위에 서 있던 집/ 이따금 연탄재를 버리려고 문 밖에 나왔다가/ 이마에 손을 얹고 뒤돌아보는 집/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너무나 고요해 숨이 다 막히는/ 저 집에서 불도 켜지 않고/ 진종일 할머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저 언덕 지나가는 길에 저 집/ 내 마음속에도 들어 있는 저 집/ 언제나 그 속에서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는/ 납골당(納骨堂) 같은//

민박 / 권대웅
반달만한 집과/ 무릎만한 키의 굴뚝 아래/ 쌀을 씻고 찌개를 끓이며/ 이 세상에 여행 온 나는 지금/ 민박 중입니다./ 때로 슬픔이 밀려오면 바람소리려니 하고 창문을 닫고/ 알 수 없는 쓸쓸함에 명치끝이 아파오면/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녀서 그러려니 생각하며/ 낮은 천장의 불을 끕니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손톱만한 저 달과 별/ 내 굴뚝과 지붕을 지나 또 어디로 가는지/ 나뭇잎 같은 이불을 당기며/ 오늘밤도 꿈속으로 민박하러 갑니다//

벚꽃놀이 / 권대웅
저 발칙한 것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놀러 나온 여중생들이 공중에/ 불쑥 검지 손가락을 내보이고 있다/ 봄바람에 개 다리를 떨며/ 슬쩍 걷어올린 다리 치마 속으로/ 언뜻 보이는 분홍 팬티/ 그거 보러 그까짓 거 보러/ 어둑어둑한 공원길/ 연애 나온 아줌마 아저씨/ 달빛 아래 화장하고 나와 히히덕 거리는/ 저 딸년들 분 냄새에/ 가슴 뭉클 달아오르네//

제비꽃 / 권대웅
근심도 전염인 것이어서/ 그대 앓던 病 내게로 오고/ 내가 앓던 病 다시 그대에게로 가/ 붉게 뜬 황혼이나 철새 날아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서로를 닮아가는 저녁/ 깊은 물그늘을 흔들며/ 江은 하늘을 닮아가고/ 하늘은 더 큰 그림자를 물들이는데/ 안개젖은 풀섶이나 낮은 샛터로 나가/ 아무도 부르지 말고/ 少少히, 少少히// 우리 그렇게 한 번 웃어볼까//

나팔꽃 / 권대웅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젊은 부부/ 단칸방이어도 신혼이면/ 날마다 동방화촉(洞房華燭)인 것을/ 그 환한 꽃방에서/ 부지런히/ 문 열어주고 배웅하며 드나들더니/ 어느새 문간방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갓 낳은 아이/ 야물딱지게 맺힌 까만 눈동자/ 똘망똘망 생겼어라/ 여름이 끝나갈 무렵// 돈 모아 이사 나가고 싶었던 골목집/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저 나팔꽃 방 속//

분꽃 / 권대웅
꽃속에 房을 들이고/ 살았으면/ 지붕이랑 창문에는/ 꽃등을 걸어놓고/ 멀리서도 환했으면/ 꽃이 피면/ 스무 살 적/ 엄마랑 아버지랑 사는/ 저 환한 달/ 속을 다 보았으면/ 그 속에서 놀았으면/ 밤새 놀다가/ 그만 깜박 졸다 깨어나면/ 그렇게 까만 눈동자/ 아이 하나 생겼으면//

엄마의 꽃 / 권대웅
엄마는 철쭉꽃을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싫어했던 꽃/ 입술에 덕지덕지 찍어 바른 촌스러운/ 립스틱 같은 꽃/ 봄밤이면 그 입술로/ 철쭉꽃 핀 공원 한 바퀴 돌고 들어와/ 툇마루에 앉아 오지 않던 아버지를 기다리던/ 엄마의 꽃무늬 고무줄 월남치마가 너무 싫어/ 나 같아도 안 들어올 거야!/ 왜 그랬을까/ 대문을 걷어차고 나가던 발길질의 흔적이/ 철쭉꽃 속에 스며들어/ 해마다 철쭉이 피는 봄밤이면/ 내가 뱉었던 말 평생 듣게 해주는 꽃/ 제사 지낼 때 네 아부지랑 밥 같이 놓지 마!/ 죽어서도 엄마는 혼자 밥 먹고 싶었을까/ 봄밤이면 엄마도 꽃피고 싶었을 거야/ 뜨거워지고 싶었을 거야/ 철쭉 공원에서 울다 왔을 거야/ 왜 이제 알았을까/ 활짝 핀 철쭉꽃을 바라보다/ 엄마가 혼자 밥 먹던 봄처럼/ 목이 메어오는 밤//

맨드라미에게 부침 / 권대웅
언제나 지쳐서 돌아오면 가을이었다./ 세상은 여름 내내 나를 물에 빠뜨리다가/ 그냥 아무 정거장에나 툭 던져 놓고/ 저 혼자 훌쩍 떠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나를 보고 빨갛게 웃던 맨드라미/ 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단지 붉은 잇몸 미소만으로도 다 안다는/ 그 침묵의 그늘 아래/ 며칠쯤 푹 잠들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며 일어서는 길에/ 빈혈이 일어날 만큼 파란 하늘은 너무 멀리 있고/ 세월은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 변방의 길 휘어진 저쪽 물끄러미 바라보면/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문을 여는 텅 빈 방처럼/ 후두둑 묻어나는 낯설고도 익숙한 고독에/ 울컥 눈물나는 가을.//

담장이 넝쿨 / 권대웅
김과장이 담벼락에 붙어있다/ 이부장도 담벼락에 붙어있다/ 서상무도 권이사도 박대리도 한주임도/ 모두 담벼락에 붙어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밀리지 않으려고/ 납작 엎드려 사력을 다해/ 견뎌내는 저 손/ 때로 바람채찍이 손등을 때려도/ 무릎팍 가슴팍 깨져도/ 맨손으로 암벽을 타듯이/ 엉키고 밀어내고 파고들며/ 올라가는 저 생존력// 모두가 그렇게 붙어 있는 것이다/ 이 건물 저 건물/ 이 빌딩 저 빌딩/ 수많은 담벼락에 빽빽하게 붙어/ 눈물나게/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과꽃 지는 봄 / 권대웅
저녁의 고요가 나뭇가지 사이로 스민다// 적막을 들킬까봐 꼼짝 않던 꽃들이/ 빗소리에 화들짝 불을 켜자/ 분홍불 꽃 속으로 들어간 발자국이 보인다// 그 사내 빗방울로 걸어와서/ 나뭇가지에 쪼그려 앉은/ 그 여자 손목 붙들고 들어간// 꼿 속으로 구름이 흐르고/ 수많은 봄이 지나가고/ 봄비 내리는 저녁이면/ 어느 알 수 없는 먼 공간에 불이 켜진다// 꽃잎은 지고 있는데/ 빗줄기를 붙잡고 올라간 방/ 어느 해인가/ 적막이 더 환해/ 고요의 희미한 빛에 세 들어/ 당신과 내가 살다 간 방//

여름 / 권대웅
연못 속에 구름이 살고 있었다/ 자신이 쏟아부었던 분량의 소나기가/ 그다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무거운 지게를 지고 살았으면/ 소금쟁이가 됐을까/ 1초에 자기 몸길이 백배나 되는 거리의 물위를/ 가볍게 걸어다니는 소금쟁이가/ 물속에 사는 구름의 생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풀섶에서 쓰르라미가 울었다/ 종일 두 앞발을 비비며 우는 소리/ 흐르는 시냇물에 번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여름 한철 온 생을 빌고 있다// 그림자 한 점 없는 뙤약볕 시골길을 걷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루나무 꼭대기/ 파란 연못에 내 전생이 환하게 보이다/ 까무룩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무도 없는 시골길/ 너무 환한 생의 정면과 적막이 무서워 울었다//

8월의 눈사람 / 권대웅
여름내/ 해바라기가 머물던 자리/ 나팔꽃이 피었다 사라진 자리/ 목이 쉬도록 살아 있다고/ 매미가 울어대던 자리/ 그 빈자리/ 흔적도 없이 태양 아래 녹아버린/ 8월의 눈사람들// 폭염 한낮/ 밥 먹으러 나와 아스팔트 위를 걷다가/ 후줄근 흘러내리는 땀에/ 나도 녹아내리고 있구나/ 문득 지구가 거대한 눈사람이라는 생각/ 눈덩이가 뒹굴면서 만들어놓는/ 빌딩들 저 눈사람들// 8월 염천(炎天)/ 해바라기가 있던 자리/ 화들짝 나팔꽃이 피던 자리/ 내가 밥 먹던 자리/ 돌아보면/ 그 빈자리// 선뜻선뜻, 홀연, 가뭇없이//

겨울 굴뚝 / 권대웅
모란시장에 들러 잔술을 마셨습니다/ 오후 내내 내리던 눈이 진눈깨비로 바뀌어/ 시장바닥 여기저기 가난한 속옷처럼 쌓이고/ 소도시에서 보내는 겨울은 밑불 없는 불씨 같아/ 돌아오는 길에 축대 밑에서 두 번씩이나 미끄러졌습니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 언덕 위로/ 지게꾼처럼 느릿느릿 저녁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희망이란 얼마나 큰 고통인지/ 집집마다 켜 놓은 알전등에 눈물꽃 피는 저녁/ 기차 소리인지 먼 기억의 소리인지/ 전깃줄 위 소리의 적막에 놀라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좇아/ 오늘도 굴뚝에 헛연기를 피워/ 하늘로 띄웁니다//

설국(雪國) / 권대웅
눈이 내린다/ 누군가 지상에 살며 저녁마다 켰던/ 등불이 내린다/ 어느 목련꽃 속을 지나왔을까/ 환하다/ 그 고요한 흰 미소 너머/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설국/ 지붕마다 열 뼘 두께 눈이 쌓이고/ 며칠째 발이 묶인 주점 등불 아래/ 누군가 술을 마신다/ 맑은 술잔에 담긴 설원(雪原) 속으로/ 기차가 달린다/ 멀어져가는 불빛 한 점/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밤의 긴 머리카락/ 하얗게 사랑해 하얗게/ 적멸이 되어 돌아오는 말과/ 꽃봉오리속에 갇혀 지샌/ 눈의 날들/ 너무 환해 기억이 나지 않아/ 밤에도 하얬다//

허공 속 풍경 / 권대웅

처마밑으로 제비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허리둘레가 넓은 아버지처럼 든든해 보이던/ 장독대 항아리들과/ 병정 같은 펌프가 우뚝 서있던 마당/ 툇마루에 모이던 햇빛이 담장을 지나/ 지붕 위로 올라갈 때마다 할머니는 아깝다며/ 소쿠리에 굴비 몇 두릅을 더 얹으셨다/ 햇빛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남은 생이 아까웠던 할머니/ 온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반지르르 닦아놓으시던 경대 위로/ 세월이 비껴가는 줄만 알았다/ 돌아보면 햇빛이 거두어가 버린 집/ 신기루처럼 보였다 사라지는 집/ 어른거리는 골목길 너머 장독대 너머/ 할머니는 아버지는 모두 허공을 살다간 것이었을까/ 제비들이 처마밑으로 물고 오던/ 씨줄의 공간과 날줄의 시간들이/ 잡히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있는/ 저 허공 속//

​적막강산 / 권대웅
​다 살지 못하고 간 모든 것들은/ 세상에 적막으로 남는다/ 매미들이 뚝/ 숨을 끊은 자리/ 돌진하던 넝쿨들이 그만/ 멈춘 자리/ 사랑해라고 말했던 자리/ 못을 뽑아놓은 것처럼/ 흔적만 남아있는 자리/ 너무나 커서/ 너무도 적막한,/ 살다 만 그 자리//

수목장 / 권대웅
나무에게로 가리/ 해에게도 가지 않고 달에게도 가지 않고/ 한 그루 큰 말씀 같은 나무에게로 가리// 깊고 고요한 잠/ 나뭇잎은 떨어져 쌓이고 세상에서 나는 잊혀지고/ 땅 밑을 흐르는 구름과 별들 양치식물들 눈 뜨는/ 시간 속으로 뿌리 같은 손길 하나가 나가와 나를 깨우면/ 훅, 달의 뜨거운 호흡에 빨려드는 바닷물처럼/ 나는 푸른 나무의 바다로 들어가리// 아득하여라 나무의 바닷속/ 바람 불고 봄이 오고 빗방울 떨어져/ 어떤 기운이 꽃봉오리 꼭 잠긴 몸속으로/ 나를 밀어내면 아, 나를 밀어내면/ 비로소 알게 되리/ 햇빛과 꽃잎과 만나 열리는 저 존재의 비밀을/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하늘과 땅의 팔만대장경을// 또 다시 나뭇잎은 떨어지고/ 햇빛과 빗물과 추억은 날아가/ 살아남은 것들의 들숨이 되고 치유가 되어/ 이 세상 천지간 무소유로 선/ 나무에게로 가리/ 사람에게도 가지 않고/ 저 세월 속으로도 흐르지 않고/ 한 잎 피고 지는 것도 화엄(華嚴)인 나무에게로 가리//

햇빛이 말을 걸다 / 권대웅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황금여울 / 권대웅
네 눈 속 깊은 곳에/ 참고 있던 맑은 눈물이 흘러서/ 봄날 환한 햇빛 위를 날아가네/ 아 눈부셔라/ 수정처럼 투명한 네 눈물이 햇빛과 만나는/ 저 슬픔이 눈부셔/ 새들은 그 공중을 지나가다가/ 그만 눈이 멀어버렸네//

삶을 문득이라 부르자 / 권대웅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오전/ 낯선 골목길 담장 아래를 걷다가/ 누군가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는 순간,/ 내가 저 꽃나무였고/ 꽃나무가 나였던 것 같은 생각/ 화들짝 놀라 꽃나무 바라보는 순간/ 짧게 내가 기억나려던 순간/ 아, 햇빛은 어느새 비밀을 잠그며 꽃잎 속으로 스며들고/ 까마득하게 내 생은 잊어버렸네/ 낯선 담장집 문틈으로/ 기우뚱/ 머뭇거리는 구름 머나 먼 하늘/ 언젠가 한 번 와 본 것 같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고요한 골목길/ 문득 바라보니 문득 피었다 사라져버린 꽃잎처럼/ 햇빛 눈부신 봄날, 문득 지나가는/ 또 한 생이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진짜 삶 / 권대웅
진짜란, 슬프고 외롭고 지치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겪어내는 과정이야./ 그래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겸손할 줄 아는 것이야./ 편리하게 사는 것이 불편하게 사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겠지/ 그러나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부딪혀보는 것,/ 안 가는 것보다 가보는 것, 안 살아본 것보다 살아본 것이 더 낫지 않니?/ 흔적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삶에 치열했고 진지했다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진짜 삶이 아닐까./ 도전이나 열정에서 오는 고통은 우리 영혼에 유익한 무엇인가를 안겨다 주지./ 부딪히고 넘어지고 아프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했던 순간들/ 진짜 삶이란, 과정들 바로 그 순간 속에 있는거야.//

갯벌 / 권대웅
바다가/ 답답하고 긴 저의 치마를/ 훌러덩 걷어올리자/ 오 저 구릿빛 다리 사이로/ 뒷물하지 않은 냄새들/ 꿈틀거리는 생명들/ 살아 있음의 희열//

게 / 권대웅
바다는 언제나 정면인 것이어서/ 이름 모를 해안하고도 작은 갯벌/ 비껴서 가는 것들의 슬픔을 나는 알고 있지/ 언제나 바다는 정면으로 오는 것이어서//

처서 모기 / 권대웅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는데/ 서리가 내리고 입동이 지나갔는데도/ 어디선가 날아와 자꾸 문다/ 팔 다리 몸통까지 뒤틀며 등짝을 긁는데/ 물린 데도 없는데/ 왜 자꾸 긁느냐고 아내가 묻는다/ 이렇게 따갑고 가려운데/ 그러면 누가 와서 무는 것일까/ 윙윙 왱왱/ 어둠 속에 입이 삐뚤어진 모기들이 날아다녔다/ 너의 피가 필요한 모기/ 그래서 더 험악하게 물고 헐뜯는/ 뒤틀린 모기 입들이 무서워/ 허공에 팔을 헤저으며 나는 그들을 쫓았다/ 머릿속 어딘가가 가려웠다/ 마음속 어딘가가 절룩절룩 아팠다/ 물린 데도 없는데 자꾸만 몸을 긁었다//

장자의 두꺼비 / 권대웅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장자가 일러주었다/ 두꺼비와 능구렁이를 보아라/ 알을 밴 두꺼비를 잡아먹은 능구렁이가/ 두꺼비의 독에 의해 죽고/ 오히려 죽은 두꺼비의 알은 깨어나/ 죽은 능구렁이 몸을 파먹고/ 두꺼비 새끼들이 태어나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두꺼비가 능구렁이에게 잡아먹히지만/ 실상은 잡아먹히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위한 것이다/ 세상일이 다 그와 같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내 몸을 새들에게 / 권대웅
푸른 하늘에 뿌려다오/ 구름을 닮은 날개와/ 추억을 닮은 눈동자/ 어울려 저녁별 살찌우는 양식이 되어다오/ 지상의 발걸음은 하찮은 것이었으니/ 육신은 껍데기뿐이었으니/ 거리를 배회하던 등불과 안개/ 오랜 늑골 깊이 쌓인 슬픔도 꺼내가 다오/ 내 심장의 씨앗과/ 내 뇌수의 고통 또한 파헤쳐 찬찬히 뿌리고 싶으니/ 세월의 머리카락과 붉은 잎 섞여 타오르는 들판/ 날아오르는 것들은 다 새가 아니라고/ 오, 날아오르는 것들은 다 환희가 아니라고/ 어두운 이 지상의 창문과 지붕 위/ 너의 눈을 빌어/ 너의 날개를 빌어/ 수천 갈래 흩어지는 숨구멍/ 공기 속을 흐르는 공중에 묻어 다오//

달소 / 권대웅
소가 달을 끌고 간다/ 느릿느릿 쟁기 하나로/ 어두운 저 무한천공을 갈고 있다/ 걸음이 무거워져 뒤를 돌아볼 때마다/ 달이 자라나고 있다/ 끔뻑거리는 눈동자가 안쓰러워/ 훠이훠이 소몰이꾼처럼/ 새들의 울음이 밀어주고 가는/ 하늘에 달이 차오를수록/ 소의 등에 앉은 구름이 가볍다/ 커질수록 환해져야 한다는 것/ 둥글어질수록 가벼워져야 한다는 것을/ 달을 끌고 가는 보이지 않는 소가/ 저 어둠 속에서 말해주고 있다//

달에게 가리 / 권대웅
달에게 가리/ 달 한 귀퉁이에 집을 짓고/ 장독대를 만들고/ 마당에는 서너 평의 텃밭/ 별들이 물어다 놓은 씨앗으로/ 당신이 밤에도 볼 수 있는 꽃들을 키우리/ 달빛에 발효되는 그리움들/ 구름이 달을 지나가는 순간/ 꽃은 당신 닮은 아이를 낳으리/ 환하여라/ 밤이면 세상 슬픈 꿈마저도/ 강물 위에서 반짝이고/ 언덕에 엎드려 울던 별들과 새들/ 숲 속의 시냇물들 저 하늘로 흘러가리/ 달에게로 가리/ 달 지붕 위에 굴뚝을 만들고/ 부뚜막에는 둥근 밥솥/ 첫 새벽밥 지어 놓고/ 밤새 당신 바라보다가/ 눈썹이 하얗게 새어 없어져도 행복해라//

프라하의 달 / 권대웅
다섯 평 남짓/ 작은 삼층 다락방/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프라하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아아아! 풀문~/ 내 이마에 환하게 다가와/ 말을 거는/ 그 달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이 살아있다는 것…// 손글씨로 쓴 달시 한 편/ 림에 적어 넣고 싶다./ 아프고 힘들었던 추억조차/ 아름다워 보인다.//

아를의 달 / 권대웅
간다. 그리운 저 미친놈​/ 사이프러스 나무 옆 밀밭 위로​/ 여름밤 하늘을​/ 노랗게 불 질러놓고 불 질러만 놓고​/ 절룩거리며 간다​/ 이 골목 저 골목 떠도는​/ 시린 귀​/ 달빛이 그것을 모아 꿰매주고 있는데​/ 술병에 해바라기를 꽂아 놓은 한 사내가​/ 담벼락에 구겨 앉아 울고 있다/ 가슴에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는 사내​/ 고흐라는​/ 외로운 눈물겨운​/ 저 미친놈//

타지마할의 달 / 권대웅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이 있어./ 갠지스 강물에서 반짝이는 햇빛과/ 보리수나무 위로 펄럭이던 노을/ 한 점 한 점 떼어와 빚은/ 흰빛 위에 둥근 달 한 송이.// 빨강과 노랑 눈부신 물방울 같았다가/ 사막에 오아시스 같았다가/ 비가 오면/ 페르시아꽃처럼 투명하게 푸르러져/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피는 꽃.// 행복한 눈물이었어./ 이십이년 동안 한 여인에게 바쳐진/ 영혼의 서사시였어.// 사랑을 잃은 당신에게 헌화하기 위해/ 오체투지로 이생을 건너오다가/ 무릎이 닳아 가벼워진 구름궁전이었어.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이 있으니…/ 22년 동안/ 한 여인에게 바쳐진/ 영혼의 서사시// 사랑을 잃은/ 당신에게 헌화하기 위해/ 오체투지로/ 이생을 건너오다가/ 무릎이 닳아/ 가벼워진 구름궁전/ ‘타지마할’//

향일암의 달 / 권대웅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바라본다(觀)는 의미의/ ‘관음’이야말로/ 한 단어로 된 시(詩)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그 천 개의 달 아래 핀/ 천 개의 동백꽃을/ 누가 붉다고 했는가// 동백의 붉은 잎과/ 잎 속의 노란 수술과/ 달빛에 섞인/ 동백꽃은 분홍이었다// …// 지구 최남단 끝으로 가/ 바다를 바라보고 살거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도승이 되는// 둘 중 하나가 이루어졌다면/ 나는 어쩌면/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낮달 / 권대웅
삶은 너무 정면이어서 낯설었지요/ 목이 메어 넘어가는 찬밥처럼/ 숭고하고도 눈물났지요/ 그림자를 휘적거리며 전봇대처럼 외로웠지요/ 슬픔도 오래되면/ 영혼이 밝아진다구요/ 생은 박하사탕 같아서/ 그렇게 시리고 환했지요//

바라나시에서의 시 / 권대웅
강물이 슬픈 피리소리 같다./ 강바닥 저 깊은 수초 아래 앉아/ 물고기 한 마리가 불고 있는/ 유장한 피리소리가 갠지즈강을 끌고/ 아득히 먼 태양 속으로 흐른다./ 늙은 소의 눈망울 속으로 풍덩 빠져/ 몸을 씻는 낮달이 성자 같다./ 똥도 널어놓은 더러운 빨래도/ 모래 속에 잠든 개들 마저도/ 바라나시에서는 성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지나가는/ 강의 겨드랑이 같은 냄새와 향냄새/ 그 수많은 향기들을 잘 버무리고 말리며/ 날아가는 햇빛들/ 황금빛 먼지들이 강물 위로 반사될 때마다/ 아 너무 눈부셔 눈이 멀어 기억날 것 같아/ 슬픔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갠지즈강과 함께 저 태양 속으로 흐른다./ 장작불에 타다만 죽은 자의 발 하나가/ 정처없이 강물 위를 걸어간다.//

아득한 한 뼘 / 권대웅
멀리서 당신이 보고 있는 달과/ 내가 바라보고 있는 달이 같으니/ 우리는 한동네지요.// 이곳 속 저곳/ 은하수를 건너가는 달팽이처럼/ 달을 향해 내가 가고/ 당신이 오고 있는 것이지요.// 이생 너머 저 생/ 아득한 한 뼘이지요.// 그리움은 오래되면 부푸는 것이어서/ 먼 기억일수록 더 환해지고/ 바라보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꿈속에서 꿈을 꾸고 또 꿈을 꾸는 것처럼/ 달 속에서 달이 뜨고 또 떠서// 우리는 몇 생을 돌다가 와/ 어느 봄밤 다시 만날까요.//

화석 / 권대웅
어느 날 갑자기 수화기에서 돌멩이들이 튀어나왔다/ 어느 날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붉은 벽돌이 시멘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나의 혀는 축대처럼 굳었다 할 말이 없다/ 신문을 읽으면 자갈밭을 걷는 것 같은,/ 자판기를 두드리면 찍혀 있는 알 수 없는 새 발자국들/ 나는 이제 나를 나라고 쓸 수 없다// 저 돌로 되어 있는 집/ 저 돌로 지은 집/ 저 돌로 지은 마음// 나뭇잎과 슬픔을 섞어보아도/ 다시 한 번/ 구름과 눈물을 범벅해 보아도/ 나를 쓰는 것이 너를 읽는 것이/ 가시덤불 헤쳐 나가는 것처럼 힘들다// 어느 날 깨어나서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은 말하는 벙어리들/ 어느 날 깨어나서 내가 처음으로 읽은 것은 박쥐들의 언어/ 말하지 않아도 말할 수 있는/ 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삶을 꿈꾸었다/ 비틀비틀 돌멩이를 맞으며 돌멩이를 읽으며/ 수세기가 지나간 어둠 속에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권대웅
하얀 싸리꽃이 밤새/ 대웅전 앞마당을 쓸고 있다/ 한 잎의 풀처럼 달빛에 움직이며/ 마당을 쓸고 있는 저 소리/ 고요하고 고요하여라/ 봄밤/ 댓돌과 마당을 지나 돌계단까지/ 하얗게 쓸어내고 있는/ 저 싸리꽃 빗질 소리를 듣다가/ 아! 비로자나불/ 싸리꽃이 절 마당을 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꽃을 피우며 피워내며/ 저 달에 새겨진 경(經)을 읽는 소리였구나/ 그래서 마당이 그토록 밝고 환했구나/ 꽃향기가 났구나//

착불(着拂) / 권대웅
이 세상에 나는 착불로 왔다/ 누가 지불해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어서// 내가 나를 지불해야 한다// 삶은 매양 가벼운 순간이 없어서/ 당나귀 등짐을 지고/ 번지 없는 주소를 찾아야 했다// 저녁이면 느닷없이 배달 오는 적막들/ 골목에 잠복한 불안/ 우체국 도장 날인처럼 쿵쿵 찍혀오는/ 살도록 선고유예 받은 날들// 물건을 기다리는 간이역의 쪽잠 같은 꿈이/ 담벼락에 구겨 앉아 있다//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으로/ 이 세상에 온 대가를 지불하고/ 빗방울은 가문 그대 마음을 적시는 것으로/ 저의 몫을 다한다// 생이여!/ 나는 얼마나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야/ 나를 지불할 수 있는가/ 얼마나 더 울어야/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모든 날들은 착불로 온다/ 사랑도 죽음마저도//

지금은 지나가는 중 / 권대웅
모든 것이 지나가고 있는 것들이다/ 비가 내리는 것 아니라 지나간다/ 불이 켜지는 것 아니라 지나간다/ 마음도 바뀌는 것 아니라 지나간다/ 우선멈춤 서 있는 전봇대/ 어둠 속에서 껴안고 있는/ 너의 알몸도 지나가는 것이다/ 지하철이 지나갈 때마다/ 건너편 서 있던 당신이 사라진 것처럼/ 어디론가 지나간 것이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만났을까 아뜩하다/ 한때 내 몸을 흠뻑 적셨던 소나기들/ 눈이 너무 부셔/ 눈물마저도 은빛 지느러미처럼/ 아름다웠던 날들 속으로/ 눈먼 사랑이, 모닥불이 지나간다/ 공중에서 일가를 이루던/ 나뭇잎들이여 먼지들이여/ 세월의 녹색 철문이 쿵! 하고 닫히는 순간/ 어느새 훌쩍 자란 침엽수처럼/ 보이지 않는다 잡히지 않는다/ 온 곳으로 돌아가는 길/ 이 세상에 지나가는 것들은 모두/ 그곳으로 가는 길/ 태양이 담벼락에 널려 있던/ 저의 햇빛을 데려간 자리/ 여름의 목쉰 매미들이 돌아간 자리/ 그곳으로 가기 위해 태어나고 사랑한다/ 모두가 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금 모두 지나가는 중//

메아리는 어디로 갔는가 / 권대웅
나무의 나이테를 따라가면/ 턴테이블처럼 그해 살던 여름이 들려/ 빗방울 소리 초록그늘 저녁 짓는 소리/ 골목길 가득/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 메아리는 스며 나무의 기억이 되고/ 잎의 말이 되어/ 다시 오는 봄 꽃봉오리/ 새소리처럼 내려오는 햇빛/ 겨우내 어깨에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다/ 쩡 하던 공명/ 산 그림자처럼 강으로 내려와/ 강바닥을 넓히고/ 물고기 비늘이 되고/ 턴테이블처럼 나무의 나이테를 따라가면/ 겨울이 지워져가는 그 길 맨 끝 오두막집/ 둘이 살다 홀로 남아 그리워하던 울음들/ 빈혈이 일어날 만큼 파란 하늘에 구름이 되고/ 초저녁별이 되고//

중력 / 권대웅
1/ 나뭇가지에 떨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모과 한 알/ 찬바람 불고 눈발이 날리는데/ 자정이 가까워지는데/ 보문동 재래시장 포장마차/ 백열전등 아래 홀로 앉아/ 남은 국수 다 팔고 들어가려하던/ 이 세상 떠난 우리 엄마 같다.// 2/ 차도와 인도 사이에 리어카가 걸려/ 뒤뚱거리고 있다/ 팔십 세 할머니가 하루 종일 주운/ 폐휴지 오십 킬로그램 이천오백 원이/ 지구에 매달려 있다/ 그 무게보다 가벼운 허리 굽은 할머니/ 전 생애가 담긴 리어카를/ 온힘을 다해 끌어당기고 있다//

인생 / 권대웅
구름을 볼 때마다/ 달팽이가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느릿느릿 지게를 짊어진 할아버지처럼// 밤하늘의 달을 볼 때마다/ 세간이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 같았습니다/ 흥했다 망했다 살다 간 아버지처럼// 그렇습죠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겠어요// 하늘에 세 들어 사는/ 구름처럼 달처럼/ 모두 세월에 방을 얻어 전세 살다 가는 것이겠지요//

저녁이 젖은 눈망울 같다는 생각이 들 때 / 권대웅
눈은 앞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뒤를 볼 수도 있다/ 침묵이 아직 오지 않은 말을 더 빛내듯/ 보지 않은 풍경을 살려낼 때가 있다/ 눈을 감았을 때/ 바보의 무구한 눈망울을 보았을 때/ 마음의 뒤란에 가꾸고 있는 것이 많을 때/ 뒤를 만지듯/ 얕은 것보다 깊은 것들을 살려내는 눈// 황소의 젖은 눈처럼 저녁이 온다/ 꿈뻑거리는 큰 눈 속으로 땅거미가 진다/ 땅속이 환해서 뿌리가 자란다//

초저녁별 / 권대웅
들판을 헤매던 양치기가/ 하룻밤을 세우려고/ 산중턱에서 피우는 모닥불처럼/ 퇴근길 주머니에 국밥 한 그릇 값밖에 없는/ 지게꾼이 찾아갈 주막처럼/ 일찍이 인생이 쓸쓸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창문을 열어놓고/ 뻐끔뻐끔/ 혼자 담배를 피우는/ 저 별//

땅거미가 질 무렵 / 권대웅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길을 걷다보면/ 풍경 속에 또다른 풍경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언젠가 만난 것만 같은/ 어스름녘/ 젖은 하늘의 눈망울/ 물끄러미 등뒤에 서서/ 기억나지 않는 어젯밤의 꿈과/ 까마득하게 잊었던 시간들/ 생각날 듯 달아나버리는 생의 비밀들이/ 그림자에 어른거리다 사라진다/ 잡히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 만져지지 않으며 살고 있는 것들이/ 불쑥불쑥 잘못 튀어나왔다가/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시간/ 그 밝음과 어둠이 섞이는 삼투압 때문에/ 뼈가 쑤시는/ 땅거미가 질 무렵//

양수리에서 / 권대웅
江에 사는 사람들은 江을 닮아간다/ 그물을 올리며 그들은 자기 가슴에 남은 양식을 확인한다/ 인자한 아버지처럼 칭얼대는 물의 투정 위에 돛대를 풀어놓고/ 말없이 강바닥을 넓혀가는 그들// 그물을 따라 자주 세월의 아픈 흔적도 따라 올라와/ 멀리 유전(流轉)하는 구름 한번 바라보며 고개 숙이면/ 사무친 물속 깊이 올라오는 물방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철없는 물고기떼 무심히 지나갈 때/ 홀연 슬픔이 많은 모습으로 저녁 햇살은 떨어지고/ 물살에 입술 부비는 노을 애태우지 않아도/ 알지 내 알어, 고개 끄덕이며 자기 가슴 묻고/ 지금 살아있는 것들/ 무수히 파닥이는 것들 다스리며 돌아오는 그들/ 그윽한 깊이 감추며 후광(後光)에 비치는 붉은 얼굴/ 모두들 쳐다볼 때/ 허, ㅡ 손 한번 흔들어 물속에 어우러지는 그들/ 햇빛에 탄 팔뚝은 푸드득 튕기는 한 마리 잉어처럼/ 그물을 펼쳐 생기찬 양식을 풀어 던질 때/ 물풀 같이 미끄러운 들의 손가락// 물의 깊이를 헤아려/ 가슴에 江이 흐르는 여자는 얼마나 따뜻할까/ 젖은 몸 푸릇한 내음 풍기며/ 낮게 낮게 가라앉는 풀잎/ 멀리 눈을 들어 젖은 머리카락 돌아서는/ 물푸레나무 그림자 길게 드러눕고/ 어슴푸레 짙어오는 어둠속으로 일찍 돌아가는 그들// 알고 있는 것일까/ 두갈래의 물이 만나는 슬픔/ 어우러져 한데 흘러가야 할 세월/ 밤이 되자 물새알 같은 달이 부풀고/ 江의 아픈 늑골로부터 피어오르는 안개, 안개/ 물의 조상으로부터 받은 계시/ 그들의 법으로 잠든 밤, 이밤에 벌어질 반란을/ 고요와 적막에 묻혀/ 물 뒤척이는 소리 깊은 밤/ 그래 알지 알어 , 꿈 속에서도 물과 함께 어우러져/ 江에 사는 사람들/ 江이 흘러가야 할 세월을 다스린다//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생의 정면(正面) / 권대웅
어느 순간 와락 진저리쳐질 때가 있다// 허리를 굽히고 마당을 쓰는데/ 머리 위로 쓰윽 이상한 바람이 지나간 것 같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무 일 없듯이 가을 하늘 너무 푸르고 맑을 때/ 힘이 없는데 정면으로 맞장떠야 할/ 어느 한순간이 올 때/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뙤약볕 시골길/ 흰 적막이 가득 들어 있을 때/ 맑은 정신으로 눈이 떠진 새벽/ 오로지 홀로 나와 맞닥뜨릴 마지막 시간이 떠오를 때// 홀연 엄습하는 생의 낯섦을 견디며/ 불안한 영혼들이 숙연해지고 고요해져 간다//

북항(北港) / 권대웅
목련이 핀다/ 꽃 속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정박해 있던 배가 하늘로 떠난다/ 깊고 깊은 저 먼/ 꽃의 바다// 눈이 내리고 눈이 쌓여/ 오도가도 못 하는 마을에/ 백발(白髮)의 노모가 혼자 저녁을 짓는다// 들창 너머 목련나무로 배가 들어온다/ 겨우내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말이 터진다.// 나무에 수없이 내리는 닻/ 저 구름 너머에서 들어오는 배와/ 통음(通音)하던 하얀 눈송이들이/ 펑펑 운다// 떠나는 곳이 있고 돌아오는 것이 있지만/ 이 세상에 항구는 단 하나다/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봄 항구에 꽃이 핀다//

구름의 집 / 권대웅
구름의 집은 어디인가./ 떠도는 땅 낮은 언덕을 지나 방공 초소를 지나/ 오래된 송전탑 위/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서/ 하늘은 구름을 닮고/ 구름은 하늘의 빈 마음을 닮아 가는데// 빨갛게 핀 여름 꽃들이/ 이름도 잊고 세월도 잊고/ 저렇게 많이 모여 있는 지평선 끝/ 하얗게 일어서는 열기 속으로 경춘선/ 만원 버스가 지나간다/ 손 흔들며 가는// 사람의 집은 어디인가/ 오래된 지붕 높이 떠 있는 구름/ 마음도 더없던 추억도 다 지나고 난 하늘에 머무는/ 구름의 빈집에 사람의 집이 있다//

포복(匍匐) / 권대웅
구름은 하늘에서 얼마나 포복을 하고 갔으면/ 발목이 뭉뚱그려졌을까/ 바람은 땅바닥에 얼마나 몸을 기고 다녔으면/ 온몸이 닳아 없어졌을까/ 그렇게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며/ 구름은 어느 성지로 가는 중인가/ 바람은 어느 사원을 돌아 나오는 중인가/ 허공에 지탱하고 서 있기 위해/ 땅속 깊이 포복을 하는 나무/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 양팔 다리 무릎이 해지도록 흘러가는 강물/ 지렁이는 흙 속에서 얼마나 꿈틀거렸으면/ 껍질이 다 벗겨진 것일까/ 엉겅퀴는 얼마나 많은 가시밭길을 걸었기에/ 꽃 입술에 가시가 박혀있을까/ 간절하게 갈망하고 갈구하고 열망하는/ 저 생의 오체투지들/ 나는 얼마나 이 세상 바닥을 기고 기어야/ 비로소 투명해질 수 있을까//

파랗게 사랑했던 날들 / 권대웅
'푸른' 이라는 색채의 이미지 속에는/ 청춘, 덧없음, 절망, 추억의 이미지가 혼합되어 있다./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 라고 말한 로르카 시인처럼/ 푸른 바다 앞에서/ 내 청춘을 너무 사랑해 절망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푸름은 '우울' 이었다./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던 절망의 망집을 바다에/ 버리고 섰을 때 비로소 바다도 우울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푸른색이 주는 고독함으로 혼자서도/ 오래 아름다울 수 있던 푸른 발자국의 나날들.// 바다 위를 날아가던 푸른 물고기를 본 적이 있는가,/ 은빛 햇살보다 빛나는 지느러미로/ 푸드득 튀어오르던 물고기/ 슬픔에 파랗게 녹이 슬어 우우 입술을 내밀고/ 절망의 늑골 속에 갇혀 있어도/ 등 푸르기만 하던 시절.// 햇빛은 카페인처럼 두 눈을 적시고/ 눈부신 물결 위로 파랗게 부서지던 슬픔들, 사랑들/ 실의와 덧없음도 그때는 너무 아름답게 나를 생포했었다./ 수많은 청춘과 추억의 동력으로/ 오늘도 이 세상에 생성과 소멸을 가르치며/ 푸른 여울의 길을 열어주고 있는 저 바다는...//

하루의 시간 / 권대웅
오늘 하루는/ 내 생애의 축소판.//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잘 때까지/ 하루 종일 희망을 말하는 사람,// 그게 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늘 모퉁이 연못 / 권대웅
물속에서 잠자리 날개가 어른거렸다/ 저녁 바람이 두어 번 두드렸을 뿐인데/ 연못을 들어올리며 날아오르는 잠자리/ 물결이 하늘 가장자리로 퍼진다/ 물을 열고 들어가면/ 투명한 하늘 물고기 살 속 같은 구름/ 햇빛 너울 너머/ 또 하나의 연못이 어른거리며/ 이곳 속 저 너머의 경계가 뒤바뀔 때가 있다/ 그때 내가 살았던 것일까/ 지금 살고 있는 것일까/ 물살에 날개가 비칠 때마다/ 붕붕 연못이 날아가고/ 빗방울이 모여들어 구름이 된다/ 초저녁 달 창문에 불이 켜졌을 뿐인데/ 연못이 환하다/ 그 창밖과 이 창 안을 오고 가며/ 잠자리 날개가 세상을 끌고 가고 있다//

 



권대웅 시인
1962년 서울 출생.

1987년 <시운동> 통해 등단.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양수리에서> 당선.

시집 <당나귀의 꿈>,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

장편동화 <돼지저금통 속의 부처님>, <마리이야기>

카툰에세이 <하루>

수필집으로 <하루>, <천국에서의 하루>, <당신이 별입니다>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