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쿤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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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10. 13.

두 사람 / 라이너 쿤체


두 사람이 노를 젓는다.

한 척의 배를.

한 사람은

별을 알고

한 사람은

폭풍을 안다.

 

한 사람은 별을 통과해

배를 안내하고

한 사람은 폭풍을 통과해

배를 안내한다.

마침내 끝에 이르렀을 때

기억 속 바다는

언제나 파란색이리라.

뒤처진 새 / 라이너 쿤체
철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오며/ 도나우강을 건널 때면, 나는 기다린다/ 뒤처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 남들과 발 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 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

당부, 당신의 발밑에 / 라이너 쿤체
나보다 먼저 죽어요, 조금만/ 먼저// 당신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혼자 오지 않아도 되도록//

늙어 / 라이너 쿤체
땅이 네 얼굴에다 검버섯들을 찍어주었다/ 잊지 말라고/ 네가 그의 것임을//

자살 / 라이너 쿤체
모든 문들 중 마지막 문/ 그렇지만 아직 한 번도/ 모든 문을 다 두드려본 적 없다.//

나와 마주하는 시간 / 라이너 쿤체
검은 날개 달고 날아갔다, 빨간 까치밥 열매들/ 잎들에게 남은 날들은 헤아려져 있다// 인류는 이메일을 쓰고// 나는 말을 찾고 있다, 더는 모르겠다는 말,/ 없다는 것만 알뿐//

8월 은유 / 라이너 쿤체
지평선에는/ 또 하루 이글거리는 날의 표지/ 붉은 태양원반을 이마에 찍은/ 흰빛 아침은-/ 한 마리 단학(丹鶴) 비단 잉어/ 천상의 연못들에서 왔구나//

흩어진 달력종이 -한여름 / 라이너 쿤체
오늘은 일 년 중 낮이 제일 긴 날/ 종도 안 쳤는데 빛은 와/ 잠자는 사람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 눈에 들어오는 것, 그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이 날이 그 영혼 속에 뿌리내리도록/ 이 날을 어두운 시간들을 위해 품고 있도록//

예술의 끝 / 라이너 쿤체
넌 그럼 안 돼, 라고 부엉이가 뇌조한테 말했다./ 넌 태양을 노래하면 안 돼./ 태양은 중요하지 않아.// 뇌조는/ 태양을 자신의 詩에서 빼어버렸다./ 넌 이제야 예술가로구나/ 라고 부엉이는 뇌조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름답게 캄캄해졌다.//

은(銀)엉겅퀴 / 라이너 쿤체
뒤로 물러서 있기/ 땅에 몸을 대고/ 남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기/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기//

녹슨 빛깔 이파리의 알펜로제* / 라이너 쿤체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자갈 비탈에서도 돌 틈에서도/ 어떤 눈길 닿지 않아도//
* 알펜로제: 철쭉 종류. 수목한계선 부근에서 자라 눈 속에서도 꽃을 피워 '눈 속 장미'라고도 한다.

지빠귀와의 대화 / 라이너 쿤체
지빠귀네 집 문을 두드린다/ 지빠귀는/ 움칫 하며/ 묻는다, 너니?// 내가 말한다, 조용하구나// 나무들이/ 애벌레들의 노래를 칭찬하고 있어, 지빠귀가 말한다// 내가 말한다,……애벌레들의 노래라고?/ 애벌레들은 노래를 못하는데// 노래를 못해도 괜찮아, 지빠귀가 말한다,/ 걔들은 초록빛이잖아//


자전거 타기 / 라이너 쿤체
기분전환, 자아/ 숲으로 가자// 자동차 모는 사람들이/ 어른 같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리고 정말로, 숲속/ 가지 뻗은 오솔길 위에서는, 따다닥 따다닥/ 바퀴살에서 아이들 장난감 소리가 난다// 우리가 내릴 때면/ 덜덜거리는 털이채에서 내리듯 내릴 때면, 정신은/ 고운 모래// 놀이하도록 유혹한다//



자동차를 돌보는 이유들 / 라이너 쿤체
또 차고에 있군요!/ (딸이/ 버려둔 책상을 보며)// 머나 먼 거리/ 때문이란다, 딸아// 머나 먼 거리 때문이지/ 한 단어에서 다음 단어까지의// 단어에서 단어까지/ 땅을 다지면서 천천히/ 다짐을 침묵한다.//

 


이륙 이후의 연시, 혹은 당신과 같은 비행기 안에서 / 라이너 쿤체
땅에 드리워진 그림자 좀 봐 저 조그만 그림자/ 우리와 함께 날고 있어/ 그렇게 우리들의 두려움 중 가장 큰 두려움이/ 우리 아래 남아 있어/ 이렇게 낮은 때는 일찍이 없었지/ 한 이가 다른 이보다 훨씬 먼저 죽을 가능성이//

 


쉬운 먹잇감 / 라이너 쿤체
그들은 핸드폰에 단단히 매달려있다// 존재하는 것 또 존재했던 것/ 죄다 불러낼 수 있다/ 손가락 끝으로// 하지만 그들은 벌써 모르게 되었다,/ 무얼 모르게 되었는지도//

민감한 길 / 라이너 쿤체
샘물 위의 땅은/ 민감하니 나무 한 그루도/ 베어서는 안 된다. 뿌리 하나/ 뽑혀서는 안 된다// 샘물이 마를 수도/ 있으니까// 얼마나 많은 나무가 베어졌는가./ 얼마나 많은 뿌리가/ 뽑혔던가./ 우리들/ 마음속에서// 날과 일 사이의 기사(騎士) / 라이너 쿤체
새들이 노래 불러 잠을 짖는다/ 생각들이/ 심장에 박차를 가한다// 뛰쳐 일어난다, 나는 아직/ 누워 있는데// 내달려 심장을 으스러뜨리겠구나, 내가/ 안 일어나면//

에드바르 뭉크 : 루주 에누아르, 채색판화 1898 / 라이너 쿤체
우리는 배제된 사람들/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누구든 배제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포옹한다// 포옹은 모든 사람을 배제한다/ 한사람만 빼고//

매일 -엘리자베트를 위하여 / 라이너 쿤체
하루하루는/ 한 장의 편지// 저녁마다/ 우리는 그것을 봉인한다// 밤이/ 그것을 멀리 나른다// 누가/ 받을까//

한 잔 쟈스민 차에의 초대 / 라이너 쿤체
들어오셔요, 벗어 놓으셔요 당신의/ 근심을, 여기서는/ 침묵하셔도 좋습니다//

프라하로부터 돌아옴 -1968년초 드레스텐 / 라이너 쿤체
학설은 내 혓바닥 위에 놓여 있는데, 그런데/ 세관원은 이(齒) 사이를 뒤진다//

좋은 아침에의 믿음 -마음속에서 맨발인 사람들(얀 스카첼) / 라이너 쿤체
네가 시 한 편을 쓸 때, 그러니까 마음속에서 네가/ 맨발일 때,// 네 속의 무언가가 부서졌던/ 곳들은 피하라// 이끼가/ 사금파리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그런 것이 있다,/ 상처 없는 시구가//

우리 나이 / 라이너 쿤체
우리 나이/ 굽히기가 어려워지는 나이,/ 하지만 쉬워지지/ 숙이기는// 우리 나이/ 놀라움이 커지는 나이// 우리 나이/ 믿음에는 잡히지 않으며/ 태초에 있었던 말씀은 존중하는 나이//

사물들이 말이 되던 때 / 라이너 쿤체
사물들이 말이 되던 때/ 내 유년의 곡식 밭에서/ 밀은 여전히 밀이고, 호밀은 여전히 호밀이던 때,// 추수를 끝낸 빈 밭에서/ 나는 주웠다 어머니와 함께 이삭을// 그리고 낱말들을// 낱말들은 까끄라기가/ 짧기도 하고 길기도 했다//

이젠 그가 멀리는 있지 않을 것 / 라이너 쿤체
이젠 그가 멀리는 있지 않을 것,/ 죽음이// 깨어 나는 누워 있다/ 저녁노을과 아침노을 사이에서/ 어둠에 익숙해지려고// 아직은 동터온다,/ 새날이// 하지만 나는 말한다, 더는/ 말할 수 없어지기 전에/ 잘들 있어!// 고목나무들 앞에서는 절하고/ 모든 아름다운 것에는 나 대신 인사해주길//

시인 출판인 -리차드 크리니츠키를 위하여 / 라이너 쿤체
시의 목숨을 위하여/ 목숨을 건다// 서재 절반을 판다/ 책 한 권을 찍기 위하여// 찍은 종이를 묶는다/ 자신의 명줄로//

시론 -야쿱 에키이를 위하여 / 라이너 쿤체
대답은 저렇게 많이 있는데/ 우리는 물을 줄 모르는구나// 시는/ 시인의 맹인지팡이// 그 지팡이로 시가 사물을들 더듬고 있다.// 인식하기 위하여//

와해 / 라이너 쿤체
멀어버린 내 귓속, 그 안 세상/ 아득한 곳에서 작은 교회의 종을 쳐준다/ 시간을 지킬 줄 모르는 교회/ 그래서, 나도 도무지 모르겠다/ 늦었나, 이른가?/ 작은 교회 종, 제 맘대로 울리니/ 그래도 나는 알지, 종鐘 줄이 누구 손에 쥐여졌는지//

검열의 필요성 / 라이너 쿤체
모든 것은/ 곱게 수정될 수 있다// 안 되는 건 오직/ 우리들 마음속의/ 네거티브 필름//

우리를 위한 하이쿠 / 라이너 쿤체
머리엔 꽃잎/ 흰머리 위 흰 벚꽃/ 봄, 보이잖고//

 

한국 관련 시 -2005년 가을, 노시인 내외가 한국을 방문

한국방문시 양평에서 촬영한 노시인 내외, 사진 출처: 대산문화 


메아리 시조 / 라이너 쿤체
술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안에 든, 단지여서가 아니라/ 숲 안에 든, 숲이어서가 아니라/ 시안에 든/ 무언가에 나 끌리네/ 이 나라로, 산이/ 그림에서처럼 펼쳐져 있다는./ 기꺼이 시인의 세계 석/ 저이가 되어 보려네/ 시로 인해/ 시인의 벗이 된다는.//
* 이율곡 시조 ‘고산구곡가’의 제1곡을 읽고 화답한 시

서울, 궁(宮) / 라이너 쿤체
지붕들에는, 불경을 가지러가는 길 위에 있는/ 스님/ 원승이/ 용/ 돼지/ 이야기 속 인물들/ 종종걸음으로 내림마루를 따라/ 세상의 네 방향으로 가고 있다/ 모든 길은 부처님에게로 이어진다/ 살짝 휘어 오른 추녀/ 끊긴 것 같아라/ 부처님 미소에//
* 한옥의 휘어진 지붕 추녀, 내림마루를 따라 늘어선 잡상(雜像)을 보고 지은 시

서울의 거리 모습 / 라이너 쿤체
모든 사람들이, 그래 보인다,/ 길 위애 있다, 그리고/ 젊다 그리고/ 길 위에 있다, 그리고/ 날씬하다 그리고/ 길 위에 있다/ 귀에는 핸드폰을 대고, 그들은 서로에게 맹세하고 있는 듯하다/ 하나는 다른 이를 위해 창조되었노라고/ 하지만 길 위에 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서울의 선교 / 라이너 쿤체
밤의 고층블럭들 위/ 기독 십자가들, 네온 불빛 가장자리를 두르고/ 빨강으로, 노랗게, 하얗게, 디즈니-/ 천국, 열려있다/ 24시간//

옛 문체로 쓴 한국의 옛날 일 / 라이너 쿤체
충성을 맹세했던 왕에게 충성 지키며, 떠났다/ 현인은 모반자를, 제 살인자의 시선을 피했다/ 말 거꾸로 타고 다리 건너며, 휘두르는 칼 밑으로 들며, 노래 속으로 들며.//
* 선죽교에 죽음을 맞이한 정몽주의 시에서 시취(詩趣)

그렇지만 옛 노래 속에서 / 라이너 쿤체
스스로의 기억에마저 숨겨진/ 산속 외진 곳, 거기로/ 예전에 아들들은 등에다/ 늙은 어미, 꼬부라진 아비를 지고 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한 그릇 밥이/ 냐무도 귀해, 아들들은 이 삶에서부터 내려놓았다/ 짐을 내려놓았다/ 어미아비를 땅에다가,/ 하늘에다가// 이 노래 천년 전을 돌아보네/ 이 노래 천년 후를 내다보네//
*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 고려시대 폐사지 뒤 산자락의 고려장 터를 찾아가 지은 시

 



라이너 쿤체(Reiner Kunze, 1933~) 시인
1933년 구동독 욀스니츠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철학과 언론학을 전공했으며 강의도 맡았다. 정치적 이유로 학문을 중단하고 자물쇠공 보조로 일하다가 1962년부터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6년 동독작가동맹에서 제명당하여 1977년 서독으로 넘어 왔고, 1988년과 89년에는 뮌헨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시학 강의를 하였다. 시집으로 <민감한 길>, <방의 음도>, <푸른 소인이 찍힌 편지>, <자신의 희망에 부쳐>, <누구나 다 하나뿐인 삶> 등이 있고, 산문집 <참 아름다운 날들>과 자료집 <파일명 "서정시">, 여러 동화집 등이 있다. 독일의 대표적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비롯하여, ‘독일 아동청소년 문학상’, ‘오스트리아 게오르크 트라클 상’, ‘프리드리히 횔덜린 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