슴베, 인류문명 열다 / 강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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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19.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사람 마음을 자꾸 낚는다. 무슨 알레고리를 숨겼기에, 삼천 년 나달 동안 시나브로 사람을 부른다. 앞에 선 쑥부쟁이 아가씨도 그 부름 따라온 것일까. 핑크빛 볼 수줍게 피어난 그녀는, 오늘도 캐릭터들 앞에 서서 그리운 임을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다.

마음 안테나를 뽑아 세운다. 그리워 시린 가슴 하나 툭 떨어진다. 앞에 서면 보면서도 모르겠고, 돌아서면 또 보고파지는 캐릭터. 사람을 애태우는 묘한 재주를 팬터마임으로 뽐내는 상(像). 퍼져 나오는 아우라(aura)에, 어떤 메시지가 실렸는지 그 앞에서 마냥 궁구(窮究)케 하는 실존. 무뚝뚝한 모습에 정나미 떨어지다가도, 눈 감으면 또 아련히 그리워지는 존재….

바위벽에서 끊임없이 공연하는 캐릭터들의 팬터마임을 보면서도, 그 뜻이 아리송한 세월을 많이 보냈다. 바위에다 저렇게 짓궂은 캐릭터들을 새긴 걸 보면, 선사시대 이곳엔 개구진 사람들이 살았었나 보다. 다른 곳의 암각화 캐릭터들은 고래, 거북, 호랑이 같은 동물이나 사람, 칼, 사냥 모습 등 사실적인 것들이 많다. 한데 이곳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9호 포항칠포곤륜산암각화’ 캐릭터는 추상적 문양만 있으니, 그 옛날 입체파 조각가라도 살았단 말인가. 연구자들은 이곳 캐릭터들을 칼자루 그림으로 본다. 선인들이 저 칼자루 그림들을 새기며 어우러져 살았다고 생각하니, 하늘색 호기심이 더 짙어진다.

오늘따라 암각화 바위 아래 피어오른 쑥부쟁이꽃이 무척 곱다. 저절로 어릴 때 고향 집 아침 광경이 떠오른다. 도랑가에 쑥부쟁이꽃들이 상기된 얼굴을 살랑대는 아침, 쇠죽을 다 쑨 아궁이가 용광로다. 그 안에 타오르는 숯은 쇳물 색이다. 아버지가 부지깽이로 이글대는 숯을 한곳으로 모은다. 자루가 낡아 못쓰던 어머니의 부엌칼을 쇠 집게로 집어 그 슴베를 숯불 속에 넣는다. 풍구로 숯불에 바람을 불어 슴베를 달군다. 얼마 후, 슴베는 발갛게 달아올랐다.

맞아, 바로 슴베였어! 그렇게 자주 와서 쳐다보고 궁리하면서도, 슴베를 눈치 채지 못하다니! 캐릭터들의 주술(呪術)에 홀려, 그만 넋을 잃었었나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 무언 공연의 주인공, 슴베를 놓칠 수가 없지 않은가. 뜻을 둘러 나타내는 비유법도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앞에서 눈뜬장님 되었어도, 웬일로 캐릭터들이 밉지 않았다. 보면서도 알지 못하게 만드는 요술램프라도 속에 숨겼단 말인가.

아버지는 아궁이에서 부엌칼을 쇠집게로 단단히 집어, 시뻘건 슴베를 새 나무 칼자루에 박기 시작한다. 칼을 꽉 잡은 쇠집게를 망치로 두드리며 힘껏 누른다. 뿜어 나온 흰 나무 타는 연기가 아버지 얼굴을 감싸며 휘돌아 하늘로 오른다. 아버지는 맵지도 않은 모양이다. 마침내, 슴베가 칼자루에 깊이 박혀 보이지 않는다. 칼과 칼자루가 슴베로 인해 하나가 된 순간이다. 둘이 하나로 결합해 칼이 부활했다.

슴베는 칼이 칼자루에 꽂히는 뾰족한 부위다. 칼자루 안에 박혀서, 칼을 잘 쓸 수 있게 하는 결합 부분이다. 칼은 선사시대 선인들에겐 새로 만든 중요한 생활 도구였다. 수렵과 농경이 공존했기에, 칼은 공동체가 사는 데 요긴하게 쓰였을 터다. 칼 사용으로 생산성이 올라 삶의 질은 업그레이드되고, 공동체도 더욱 커지게 되었으리라. 그러니 슴베는, 공동체의 지속과 발전에 숨은 일꾼이 틀림없다.

한데, 이곳 칼자루 그림에는 칼날은 없고 슴베만 있다. 왜 우리 선인들은 칼에서 가장 중요한 칼날은 빼고 칼자루만 새겼을까. 더욱이, 칼자루에 숨어 안 보여야 할 슴베는 왜 U자형으로 표시했을까. 그것은 ‘칼은 하늘이 점지한다’하는 믿음을 선인들이 가졌으리란 생각이 들게 한다. 즉, ‘하늘이 내리는 칼날은 슴베란 중재자를 통해, 땅에 사는 사람에게 풍요와 다산(多産)의 축복을 내린다’라고 믿었을 터다. 믿음의 증표로 새긴 캐릭터가 바로, 이 슴베형 칼자루 그림 암각화일 것이다.

또한, 이 칼자루 암각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그 모양이 여성의 허리 부분을 닮았다. 가운데가 잘록한 칼자루는 손으로 잡기 좋다. 하지만, 그 휘어진 곡선은 젊은 여성의 허리를 닮게 보이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여럿 그림 중 중간 하단부 것은 여성 성기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칼은 하늘이 슴베인 남성을 통해 칼자루인 여성에게 내리는 축복이 아닐까. 더하여 땅에 풍요와 다산이 내려, 대대손손 이어지기를 소망한 것이리라.

아무튼, 지금도 살아있는 저 선사시대의 암각화 캐릭터는 이제, 칼자루와 아리따운 여성이 융합된 팬터마임으로 다가온다. 비록 칼은 숨겨져 있지만, 칼자루마다 U자형 슴베가 살아있지 않은가. 나아가 칼이 하늘을, 슴베가 남성을, 칼자루가 여성을 나타낸다면, 슴베는 남녀가 결합한 공동체를 암유(暗喩)한다. 남녀의 결합은 생명 창조의 요람이다. 새 생명의 탄생은 사랑의 창조가 실현되는 장이다. 그 장은 필연적으로 가족들이 서로 돕는 가정공동체가 된다.

선사시대의 돌칼이나 청동 칼은, 가족과 부족이 살기 위한 경제활동의 가장 중요한 도구였으리라. 칼은 슴베를 만들고 나서 제대로 쓰게 되었을 테다. 슴베 정신이 오늘날 과학기술문명의 시원임은 자명해진다. 경제활동에 쓰는 도구, 기기, 장치, 설비, 방법들로 발전했을 테고. 나아가 화성에 헬리콥터를 띄우고, 인간의 우주선이 태양계를 벗어나 성간우주를 나는 과학기술도 선사시대의 슴베 정신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따라서 슴베는, 인류문명을 여는 과학기술의 디엔에이로 사람에게 자리매김하였다 싶다.

암각화 캐릭터들은 지금도 팬터마임으로 사람들에게 손짓한다. 슴베가 인류문명을 연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파하러 사람들을 초대한다. 하늘 축복 아래 남녀가 함께 가정을 이루어 번영과 행복, 자손의 번성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기쁜 메시지를 주고 싶어서. 선사시대 이래 투명 타임캡슐 안에서, 칼자루 암각화는 연년세세 팬터마임으로 슴베 앞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온 누리에 슴베의 꽃, 인류문명을 활짝 꽃피울 날을 향해….

수상소감

‘팬터마임’이란 생각이 떠오른 것은, ‘포항칠포곤륜산암각화’를 만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처음에는 안내판도 없던 때라 ‘왜 이런 그림을 선인들이 바위에 새겼지?’하고 의문만 났었다. 마음속 의문이 자꾸 꼬리 물고 자라나 틈 있을 때마다 찾아갔다. 어느 날 선사시대의 입체파 그림이라도 본 듯, 그 의미를 찾아보라고 암각화들이 내게 팬터마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오늘은 무슨 메시지를 주려나?’하는 마음으로 찾아가면 말이 없다.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세월을 길게 보냈다. 그 결과 3편의 수필을 썼다. 그래도 이 암각화는 꾸준히 사람을 부른다. 부족한 작품을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아울러 경북의 문화체험 공모전을 시행함으로써, ‘문학과 문화체험을 접목시킨 새로운 형태의 공모전’을 시행하는 대구일보에도 감사드린다. 이 수상을 우리 겨레문화와 지역문화에 더 관심을 가지며, 더 공부하라는 격려로 삼겠다. 또, 작품 속에 우리 문화를 이어 나아가고 정진하리라 다짐한다.
△‘에세이 21’ 추천완료(2006)

△제 1회 포항소재문학상공모 수필부문 최우수상 당선 (2009)

△대구일보 제9회 경북문화체험전국수필대전 은상 당선(2018)

△보리수필문학회 회원(현), △산영수필문학회 회원(현) △경북 문인협회 회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