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 김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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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1. 10. 22.

희멀건 눈으로 멍하니 쳐다본다. 햇살이 환하면 우산은 현관 귀퉁이에서 무료한 삶을 이어간다.

형형색색이 행렬을 이룬다. 비 오는 날은 누군가에게 들림을 받고 세상을 내려다보며 의기양양하다. 주인의 요구에 따라 반원이 되는가 하면 중세의 사원처럼 뾰족하고 둥근 지붕이 된다.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 지나는 눈길을 잡아채거나, 화려한 색으로 자태를 뽐내며 빗속을 누빈다. 날이 들면 찾아오는 실직의 소식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우산의 걸음이 활기차다.

우산은 임시직이다. 언제라도 불러주기만 하면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워한다. 귀한 대접을 받으며 쓰임 받는 날은 높은 꼭대기에 오른 것 같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주변을 살필 여유도 잠시 뿐, 언제 관심 밖으로 밀려날까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리며 가슴을 졸인다.

이십여 년 시간강사를 했다. 강의가 있는 몇 달 동안만 일할 수 있는 날이다. 제 몸 하나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점포 하나 가지지 못한 보따리 장사처럼 휴게실이나 도서관에서 어정쩡하게 빈 시간을 보냈다. 학기가 끝나면 선생도 학생도 아니다. 철저하게 무노동 무임금의 학문을 파는 떠돌이다. 방학이면 맑은 날 우산처럼 한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서 비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반짝거리는 장식품이 달린 우산도 다를 게 없다. 해외 명품이 들어오거나 낙하산이라도 떨어지면 비 오는 날마저 구석으로 보내진다. 허울 좋은 간판과 가방끈이 길다는 겉모습 때문에 햇빛 뒤에 감춰진 고통과 좌절을 실감하지 못했다.

가방끈에 맞지 않는 대우와 차별은 견딜 수 있지만 학기가 끝나면 기약할 수 없는 다음이 불안해 착잡하다. 표류하는 난민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서류를 넣고 기다린다. 전화기로 전해지는 탈락의 소식보다 선택받기를 기다리며 날을 세우고 눈치 보는 모습이 더 처량하다. 소나기가 내리면 긴 세월 동안 빛바랜 우산이라도 요긴하지 않은가. 연륜만큼 예스러운 멋을 바라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좋아해 주는 이들을 만날 때면 무던히 견뎌온 우직함에 뿌듯해진다.

잠깐 쓰이는 것일수록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있어야 한다. 화려한 경력으로 자리를 지켜왔더라도 잠시만 보이지 않으면 새것으로 바뀌는 현실을 알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장마철을 대비하며 우산을 손질하듯 새 학기를 기다리며 단장한다. 잠시라도 비 맞는 누군가를 덮어 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주저앉을 수 없다.

닿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가지고 싶은 소망이 온몸의 촉각을 세웠다. 떠돌이에서 안정된 내 자리를 얻기 위해 오십 중반에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임시직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박사학위가 없어 밀려났던 설움을 만회하기 위해 마음을 팽팽하게 조였다. 젊은이들 틈새를 뛰어다니며 가방끈을 더 늘리겠다고 세월을 거슬러 뜀박질했다. 주저앉으려는 몸을 채근하며 한 단계씩 조일 때마다 입에서 단내가 난다. 부질없는 짓이 될지라도 하고 싶은 일을 얻기 위해 고난과 흥정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

주인공이 되어 내 자리에 앉고 싶다. 힘겹게 사다리를 오르는 여정은 불안한 쫓김의 연속이었지만 안정된 자리를 가지겠다는 욕심으로 온몸을 혹사시키며 안간힘을 썼다. 한쪽 구석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뼈를 깎는 수고를 하더라도 세상의 한가운데 당당히 서고 싶다. 정상은 신기루처럼 늘 산 넘어서 넘실거렸다. 눈을 뜰 때마다 점점 더 작아져가는 내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은 길고 지루하다. 욕망의 유혹을 외면하고 살았더라면 더 행복할 수 있을까.

마지막 학위를 받고 난 뒤 몇 년 동안 죽음에 걸맞은 병치레를 했다. 발은 땅을 딛고 있는데 머리는 하얗게 비었다. 초점 잃은 눈만 허공을 떠다니며 습관처럼 먹고 잤다. 자격만 갖추면 앞길이 환하게 펼쳐질 줄 알았다. 임시직을 벗어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준비했지만 현실은 결코 공정한 게임이 아니었다. 경력이나 실력보다 금력과 연줄에 의해 쉽게 앞뒤가 바뀌었다. 꿈은 그냥 꾸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보다.

운명은 늘 비켜갔다. 파리 목숨 같은 임시직을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장대처럼 꼿꼿이 서서 쏟아지는 물 폭탄도 온몸으로 받아 흘려보낼 수 있는 우산이 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기약이 없다. 임시로 앉은자리에서 밀리거나 잊혀지지 않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쏟아냈다. 곱게 들림 받는 양산 팔자는 못되어도 급할 때 손쉽게 잡을 수 있도록 얌전히 기다려야 할 게 아닌가. 우산의 신분에 맞게 길들이기 위해서라면 더 힘든 여정도 견뎌야 한다. 해가 뜨면 존재조차 흩어져버릴 운명일지라도 기다림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단련되는 것 또한 내 몫인 것을.

물기 머금은 우산들이 각진 통속에 거꾸로 꽂혔다. 장대비를 맞아도 쓰임을 받았으니 뿌듯하지 않은가. 온몸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훔치며 젖은 몸을 말린다. 다음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