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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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10. 26.

어머니가 사는 곳 / 권기만
옷이 엄니 손같이 느껴지는 날/ 나는 아이처럼 엄니가 벗겨주던 대로 옷을 벗는다/ 물끄러미 앞섶 바라보던 콧날 참 따뜻하다/ 내 안의 것을 보는 듯 한 눈빛/ 한 종지 미소 같은 단추를 끄른다/ 눈물 가득 고인 조그만 호수/ 주름진 엄니 손마디 물결처럼 일렁인다/ 얼룩진 윗도리 벗어 빨래통에 던진다/ 던지면서 돌아앉는 뒷모습에 얼른 다시 줍는다/ 엉거주춤 벌린 두 팔/ 엄니가 안아 달랬을 세월 안겨있다/ 단단히 여며주지 못해 힘들어하던 모습/ 후줄그레 어려 있다/ 벗어든 옷으로 엄니 잠시 나를 보듬는다/ 부시시 까슬하다/ 주름진 옷 속 조그만 엄니/ 빨래통에 넣으려다말고/ 부둥켜안고 한참 참는다//

어머니의 양탄자 / 권기만
이불을 편다 하루 종일 접힌 굴곡을 편다/ 두발 뻗듯 반듯하게 편다/ 수평선이 조금 출렁인다/ 파도가 일어서는 가슴 언저리/ 삐뚤삐뚤한 기억도 허리를 편다/ 어머니가 손을 펴면 내 몸에 만월이 뜬다/ 내가 덮고 잔 제일 포근한 이불/ 아직 다 펴주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인지/ 손금 속 밑줄로 몸 낮추고/ 가만히 이마를 짚어오는/ 어머니 언제부터 날고 있었던가요//

동거 / 권기만
얼굴이 간지럽다/ 다섯 마리 토끼가 풀을 뜯는 모양이다/ 아무도 본 적 없지만 내 얼굴에는/ 다섯 마리 토끼가 산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 깡충 깡깡충 뛰어다닌다/ 내가 우울하면 쫄쫄쫄 굶는다// 다섯 마리 토끼가 뛰어다니는 얼굴을 보는 건/ 즐겁다 토끼가 뛰어다니고 있다면 틀림없이/ 맛있는 대화 중이거나 사랑하고 있을 때다/ 소곤소곤은 토끼가 제일 좋아하는 풀이다// 한겨울에는 토끼도 어쩔 수 없이/ 말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잠을 잔다 봄이 오고/ 사방에서 꽃이 터지면 기다렸다는 듯 소풍을 간다/ 꽃 한 송이마다 한아름의 미소가 사는 걸 알아보는 건/ 토끼다 입 다물고 있어도 봄이 지나고 나면/ 살금살금 미소가 살쪄 있다// 소곤소곤 조곤조곤을 뜯다가 어른 토끼들은/ 구름 속으로 이사를 간다 큰소리는 토끼가/ 제일 싫어하는 풀이다 아이들 말은 토끼의 발/ 버짐 핀 듯 얼굴 왼쪽이 간지럽다/ 다섯 마리 새끼 토끼가 풀을 뜯는 모양이다//

발 / 권기만
발 달린 벌을 본 적 있는가/ 벌에게는 날개가 발이다/ 우리와 다른 길을 걸어/ 꽃에게 가고 있다/ 뱀은 몸이 날개고/ 식물은 씨앗이 발이다/ 같은 길을 다르게 걸을 뿐/ 지상을 여행하는 걸음걸이는 같다/ 걸어다니든 기어다니든/ 생의 몸짓은 질기다/ 먼저 갈 수도 뒤처질 수도 없는/ 한 걸음씩만 내딛는 길에서/ 발이 아니면 조금도 다가갈 수 없는/ 몸을 길이게 하는 발/ 새는 허공을 밟고/ 나는 땅을 밟는다는 것뿐/ 질기게 걸어야 하는 것도 같다/ 질기게 울어야 하는 꽃도//

탑 / 권기만
돌은 몇 개만 쌓아도 탑이다/ 가지 위에 가지 올린 나무도 탑이다/ 한 발 위에 한 발 올려/ 산에 오르면 탑이 되는 사람들/ 몸 위에 몸 하나만 올려도/ 삼층탑이다/ 구름 위에 달을 올렸다 해를 올렸다/ 수금지화목토천해/ 누가 쌓은 탑일까/ 꽃잎 위에 꽃잎 올려/ 탑 쌓기 놀이에 분주한/ 애기똥풀 형제/ 나뭇잎 몇 장 띄워 탑 쌓고/ 골짝을 돌아 탑돌이 나선 냇물/ 서로를 무등 태운/ 몸 낮춘 샛강/ 일파만파가, 모두/ 기단석이다//

찬밥 / 권기만
언제 저렇게 많은 알을 슬어 놓았을까// 식탁 위 고들고들한 밥/ 광등 불빛 오밀조밀 들어앉아/ 금세라도 깨어날 듯이 꼬물거린다/ 말간 빛의 알갱이/ 한 숟갈 떠 입에 넣는다/ 생의 막장마저 물어뜯는 것일까/ 공복의 창자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요동친다/ 찬밥 한 덩이로 버티기엔 너무 먼 하루/ 가다가다 어깨 처진 그믐 같은 슬픔,/ 한번 더 불어터지고 있다// 식탁 위, 섬처럼 떠 있는 밥그릇/ 살갗도 대지 않고 언제/ 저랗게 많은 허기를 고봉으로 낳았을까/ 삭발한 희망 한 덩이로 웅크린 반달/ 갱도를 비추는 흐린 램프 같다/ 어디든 막장이라고 자꾸 안전모를 눌러쓴다// 몇 번의 굴절을 더 거쳐야/ 더운밥 둘러앉아 먹을 수 있을까/ 막삽 같은 숟가락으로 눈물을 캔다/ 한때 물컹했던 기억/ 갱차에 퍼담는 반지하 거실/ 어깨 처진 슬픔, 한번 더/ 불어터지고 있다//
* 05 문학저널 신인상 당선작


콩나물 / 권기만
곧추세운 코브라 대가리/ 이빨 잃고도 기죽지 않는/ 단단한 고요의 음계/ 정지 화면/ 멈칫, 하면 먹힌다/ 그게 그가 진화시킨 포획법/ 반쯤 먹힌 손으로/ 모가지째 뽑아 끓는 물에 넣는다/ 몸뚱이가 허물어져도 풀어지지 않는 독기/ 진간장 고춧가루로 절이고 버무려도/ 말짱 쌩쌩/ 조금도 공손치 않다/ 고요를 포획하고 어둠마저 포획했음인가/ 입에 넣는 때를 기다려/ 이빨 사이로 대가리 들이민다/ 몸은 버리고 머리로 살아남는 게/ 진화의 다음 단계라고/ 머리 전부로 눈 동그랗게 치뜬다/ 이런 독기 하나 있느냐고//

내가 좋아하는 과일 / 권기만
따뜻함도 과일처럼 열릴 때가 있다/ 따뜻하다를 따면 몇 개의 계절이 주렁주렁/ 키를 늘린 나무로 열린다/ 따뜻하다를 한입 먹으면/ 남도의 저녁이 목젖에서/ 울음을 터트린다/ 그 울음에 매달려 있는 노을을 따서/ 등뒤로 감추면 밤이다/ 밤에도 따뜻함은 밝아서/ 불인 양 쬐다보면/ 몸속이 동그랗게 부푼다/ 목소리가 환하다면/ 따뜻하다를 따먹었다는 것/ 먹다가 손 비벼보면/ 파란 귀가 푸드득/ 몇 개의 밤을 날아다닌다/ 봄볕에 헹군 나무에/ 손을 걸어놓으면/ 달이 둥글게 익어가는 시간/ 따뜻함도 과일처럼 열릴 때가 있다//

어둠의 회랑 / 권기만
어둠이 미루나무 머리채를 잡으면 지상과 하늘을 이어주는 회랑이 생깁니다 조금 더 어두워지면 벚나무가지까지 내려옵니다 태초의 시간과 이어지는 그 속으로 목을 디밀면 나는 금세 우주 끝에 닿을 것만 같습니다 한 손을 그 안에 밀어 넣고 저 먼 어둠을 향해 손을 흔들면 손끝에서 요령처럼 별들이 짤랑거립니다 만나서 반갑다고 잘 있었느냐고 까무룩 악수해 오는 별별별, 손 안이 화안해집니다// 밤만 되면 우주 끝까지 이어지는 회랑이 생기고 그 회랑 속으로 놀러가 멀리 더 멀리 갔다 오는 남모르는 여행으로 밤이 환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스름이 내리면 하늘 밖으로 옮겨 놓았던 어둠의 회랑을 사다리처럼 내리는 게 보입니다 미루나무가 먼저 회랑을 맞이합니다 나는 그 발치에서 저 높은 곳의 회랑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미루나무가 제 몸을 이어 바닥까지 어둠의 회랑을 연결합니다 수수억 년 반짝이던 별의 이야기가 내 귓속으로 무진장 쏟아집니다 우주와 직통으로 연결된 회랑 속으로 여우와 올빼미가 천천히 걸어들어 갑니다// 마을 앞 공터까지 뻥뻥, 뚫리던 회랑이 어느 날 뚝, 끊어졌습니다 가로등이 가시철망보다 무섭게 으름장을 놓고부터 어둠은 사다리 내릴 곳을 찾지 못해 하늘 어귀에서 두리번거리기만 합니다 끝내 몸 디밀지 못하고 돌아서는 날이 늘어날수록 내 안의 어둠은 희미해져 갑니다 내 맘에 벽면을 만들어주던 어둠이 지워지고부터 별이 와서 걸리지 않습니다 우주와 교신이 끊어지고부터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별이 반짝이지 않습니다 귓가에 부스럼처럼 수북하게 쌓이던 별을 뒤쫓던 달이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깨갱거립니다//

이중섭의 집 / 권기만
섶섬이 보이는 이중섭의 집에 가면/ 어른도 벌거벗고 아이가 됩니다/ 파도는 이중섭이 즐겨 쓰는 붓/ 파도 끝에서 허공으로 몸 뒤집는 그의 붓은/ 평생 내리는 비를 지나 후세까지 내리는 비/ 은종이는 엎질러진 바다의 내면/ 거기에 갇힌 건 그가 처음입니다/ 벌거벗은 아이가 모래판에서 해와 씨름을 하면/ 섶섬이 울룩불룩한 파도를 황소처럼 몰고 와 응원합니다/ 그림자가 돌담에 쌓여 파도가 높아지면/ 집게발에 잡힌 그리움이 파도 끝에서/ 해 질 때까지 해 질 때까지 웃음만 피웁니다/ 그가 마련한 집은/ 코딱지 만한 은박지가 고작이지만/ 바다는 한 번도 좁다 한 적 없습니다/ 아직 다 그리지 못한 코흘리개 눈빛 그려 넣느라/ 은박지만한 바다에 열쇠를 맡겨놓고/ 유채만 저 멀리서 손 흔들고 있는/ 이중섭의 집에 가면/ 수천 페이지의 파도를 넘기다/ 크레용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노을/ 아이들 얼굴에 덧칠하느라 홀딱 벗은 사내/ 어쩌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소래포구 / 권기만
소리가 노래로 정박하는 소래포구에 가면/ 소금의 소리 소라고둥의 소리/ 콩게의 집게발이 펄 옆구리 간질이는 소리/ 먼저 와 닻을 내리고 있다/ 파도의 후렴구를 하나씩 물고/ 바지락이 파도와 화음을 맞춘다고/ 꼬막의 입속에 한 됫박 소금을 퍼담는다/ 소래포구 가자는 말은/ 소리에 닻을 내리고 한 사나흘 정박해 있자는 말이다/ 밀물 썰물로 소리의 결구를 맞추자는 말이다/ 소래포구 가자고 하면/ 낙조에 볼 비벼 보고 싶다는 말이다/ 염전 한 채 들여 놓고 싶다는 말이다/ 상하지 않는 천일염 같은 소리만 한 됫박/ 꾸덕하게 담아보자는 말이다/ 소래포구 갔었다는 말은/ 소리로 정박한 포구가 되어 봤다는 말이다/ 꼬막의 입으로 바닷말 삼켜 봤다는 말이다/ 허연 소금의 갈기로 나부끼는 파도 한 소쿠리/ 무진장 반짝이는 물비늘로 싣고/ 한 사나흘 멍텅구리배가 되어 봤다는 말이다//

참개구리 한 필 / 권기만
내가 걷는 길 속에 참개구리의 길이/ 가로질러져 있다 뱁새와 청둥오리의 길이/ 걸쳐져 있다 경칩 한 필 잘라 나들이옷 해 입은/ 참개구리 가족이 무논을 살피러 간다/ 하늘이 놀러온 옷 대대로 전하려면/ 울음 죄 풀어놓아야 한다고/ 봄이 물레를 잣는 동안/ 선짓빛 울음 올올이 풀어놓는 봄밤,/ 꿈의 선문답이 그려져 있다는/ 광목 한 필,/ 진달래가 발그레 화답한 광목 한 필을/ 이젠 받을 수 없다/ 벌레가 새의 뱃속으로 북을 던지고/ 되받아 옷 한 감 짜는 사이/ 자주 실이 끊어져 봄을 다 짜지 못했다고/ 도로를 가로지르는 참개구리 가족,/ 배냇짓 한 필 짜려면/ 북을 받아주는 무논의 팔이 꼭 필요하다고/ 꽃잎의 등을 두드리는 울음의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어서가자고 어서가야 한다고//

강동약국 / 권기만
강동엔 고래가 산다 강동약국 15평 바다에 사는 고래 한번 잠수하면 3일간 심해로 잠수하는 불가사의한 고래 바닷속 언어로 그린 무지개가 사철 약처럼 팔려 나간다는 강동약국 눈을 감았다 뜨는 곳에 수평선을 걸어놓고 오가는 사람 그 위를 걸어서 집에 가도록 배웅하는 고래 미소 하나로 누구나 고래가 되게 하는// 그가 머문 뒤로 강동에 오는 구름은 고래가 되어 먼 하늘로 헤엄쳐 갔다 그의 눈을 믿고 구름이 된 고래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 순도 깊은 바다가 있다 말 속에서 뭉글뭉글 구름인 어미고래 새끼고래 자맥질하듯 뒤척이는 사소한 눈웃음으로 몸속 병마를 스러지게 하고 달래지 못한 가슴속 바다 눈빛 지느러미로 어루만져 순하게 하는// 강동엔 고래가 산다//

귀신고래울음 한 접시 / 권기만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은 변광성 군락지다 빅뱅의 DNA가 보존되어/ 있다는 처녀자리 은하단 삼엽충 지대를 지나 국부은하군 우리 은하/ 오리온 팔 국부 성간구름을 지나자 은하외곽 태양계가 어둠을 닦고/ 있다 국부은하군 최고의 리조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101번 직바/ 구리 게이트로 나서자 귀신거래울음 한 접시 가게가 보인다/ 해파랑목울대를 목에 걸자 6천 개 지구언어가 소통에 진입한다/ 무인택시에 타면 입국절차는 자동 처리, 해운대 파라다이스 98층/ 스카이 룸에서 바라본 대마도는 두 개의 젖가슴 같다 미리 주문한/ 30만 광캐럿 정우성X-100 모델이 배달되어 있다 영혼 이동 한 시간/ 동안 적응 프로그램까지 마무리되자 움직이는데 별다른 불편이 없다/ 벗어놓은 쌍둥이 아미달라 행성의 잠든 몸이 무거워 보인다 팔을/ 2개로 줄여놓으니 가려운 등은 어찌해볼 수 없다 책 읽어주는/ 아가씨로 지구를 선택해 놓고 상상의 푸름에 올라본다 저녁은/ 빠르게 지나가고 지구의 아침은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온다/ 온몸으로 받아 안기엔 너무도 벅차다 순도 높은 태양의 광전자로/ 에너지를 충전하자 암흑물질처럼 떠돌던 허기와 추위가 씻은 듯/ 사라진다 세포 하나하나가 눈부시게 반짝인다 스프와 샐러드,/ 갓구운 빵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발바닥이 노출된 신발을/ 신는다 은하의 별을 수집해놓은 백사장을 걸어보는 건 꼭/ 해봐야 한다 발밑을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유성의 감촉, 신의 입술은/ 이토록 감미롭다 듣지않고 다만 느끼려 여기에 왔다 살갗을 질주하/ 는 무한대의 파도가 귀를 적신다 젖어서 멍하니 꿈이다 신발을 벗고/ 발목까지 모래 속에 넣어본다 2천여 개의 별을 지나온 고달픔이/ 금빛모래처럼 환해진다 행성여행일지에 자동 기록된 국부거품의/ 동향을 지우고 모래, 불후의 음악이라 적는다 젊은 남녀의 키스하는/ 입술 위로 공간축약 스노보드를 타고 백록에 올랐다 같이 온 일행의/ 행동기록이 빠르게 지나간다 바퀴 없는 차들이 마젤란은하 대사 일행/ 을 태우고 오륙도 해저3만리선착장으로 소리 없이 미끄러지고 있다//

물방울 나라 / 권기만
이슬이 굴러 무당벌레 머릴 친다 상상해봐/ 화난 듯 알록달록해지는 모습이라니/ 토란 잎에 붙은 이슬을 치어라고 생각해봐/ 누가 꼬리를 안으로 말고 있다 생각하겠어/ 햇살이 치어의 등을 간질이면 순식간에 숨어버리지/ 파란 하늘에 치어들이 와글거린다니/ 가장 맑은 눈으로 헤엄치는 치어를 상상해봐/ 몸통도 꼬리도 눈 하나로만 뜨고 있는 치어라니/ 등을 쓰다듬어주면 물 한 방울 뱉어놓고 달아나지/ 몇 놈은 수련 뒤로 숨어들기도 하지/ 그러나 찾아볼라치면 거짓말처럼 숨어버리지/ 거기 어디쯤 강이 있다고 상상해봐/ 치어들이 그 쪼그만 눈으로 굴려먹는 물소리라니/ 또르르 눈만 굴리다 사라지는 치어떼를 만나고 싶어?/ 가지마다 부레를 걸어놓고 있는 새벽 숲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봐/ 입질이 느껴져?//

상다리 부러졌다 / 권기만
나무는 제 몸이 잔칫집 되기를 기다렸다 술에 취하지 않고 속낼 보여도 되는 때에 푸른 속 태워 꽃부침개 구워 가지에 걸어놓으면 잔치 준비는 대충 끝난다 먼 곳을 떠돌던 새가 날아와 허공에 고수레를 외친다 눈요기에 벌써 배 부른 구름 몇 잠시 머문 사이 상다리 하나씩 부러진 봄날에 털썩,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는 손님들// 꽃 흰 살결이 오후를 기어이 상다리 부러뜨린다 그러다 그러다 한 무더기 두 무더기 책임질 것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면 허공이 죄 몰려와 꽃잎 한 상 비운다 아무리 쓸어 담아도 담을 수 없는 나른함 한 상, 상다리 부러져 차려낼 수 없다 일러도 일어나지 않는, 이제 잔칫집에 남은 손님은 털썩뿐,//

직립 / 권기만
불안은 바로 설 수 없음에서 생겼다/ 어깨에 힘주는 버릇과/ 꼬리를 주고 얻은 약간의 높이// 일어섰다고 하지만 그건/ 네 발인 걸 잊고 있는 동안의 고립// 수직이라는 굴레에 갇힌 후/ 더 이상 클 수 없음에서 어리둥절할 때/ 수평을 삼킨 고양이의 걸음이 부러웠다// 인간 이전의 자세를 닮아 가는/ 허리 굽은 노인들/ 허리가 자꾸 주저앉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밤이 되면/ 얌전하게 수평에 입 맞추는 사람들/ 알고 보면 네 발 짐승이다//

세월 / 권기만
하늘에 구름이/ 우리들의 마음을 비쳐줘요/ 마음이 우중충하면/ 날씨도 그래요// 구름이 지나가면/ 세월도 구름따라 흘러요/ 가을바람에 구름이/ 우리들 마음을 실어서/ 어디론가 가네요//

이팝 / 권기만
입맛이 까칠했던 게지/ 저렇게 한꺼번에 침 뱉어 놓은 걸 보면/ 몸속에 게 한 마리 키운 게지/ 뒷걸음치다 주저앉을 수 없어/ 혀 깨물고 있었던 게지/ 바람이 일 때마다 허옇게 부서지는 젖살/ 정말 먹이고 싶었던 게지/ 보낼 수 없는 것을 보내/ 살이 아프다 안으로 곪아 터지면/ 입안에 거품이 이는 걸/ 죽어도 몰랐던 게지/ 아버지 돌아오지 않는 탄광촌 언덕/ 쌀이 익어 이밥처럼 쌀이 익어/ 허옇게 흐드러진 게지/ 먹일 수 없어 입으로 끓어오른 햇살/ 퉤퉤 뒤집어쓰고 허허 곡하는 게지//

디스코텍 / 권기만
박새 꽃기린 괭이눈 노루귀 제비동자꽃/ 기생꽃 홀아비바람꽃 애기똥풀 각시붓꽃/ 각시취 며느리밑씻개 미나리아재비 노인장대// 춤판, 제멋대로 벌여놓고/ 바람이 불 때마다 은근슬쩍 입술을 내민다/ 바람의 엉덩이가 된다//

우물 / 권기만
목마를 때, 경주 박물관 간다/ 뜰 앞 우물에서/ 공손하게 물 한 바가지 떠먹는다/ 이 우물 앞에선 텅 빈 마음이 바가지다/ 조용히 눈 감으면/ 물이 고여와 넘친다/ 넘쳐흘러 하늘에 가 고인다/ 하늘 한 바가지 떠먹기 위해/ 새들은 몸속을 텅 비운다/ 누가 맨 처음 허공에 우물을 파고/ 청동의 치마를 둘렀을까/ 거꾸로 매달려 있어도/ 낭산 너머로 흘러가는 반월半月/ 우물 속에 잠겨 있다/ 때가 되면 텅 비어지는 몸을 들고/ 목울음까지 차오르는 에밀레/ 한 바가지 퍼서 월성月城이 젖도록/ 흐득흐득 마시다보면/ 우물도 달을 퍼서 마시고 있다//

고란사 가는 길 / 권기만
구불텅 과거로 휜 길에/ 달이 뜨네/ 왕조의 눈썹 그리려/ 굽이굽이 백마 타고 달리는 나무/ 숨 찬 물음만 툭툭 던지네/ 기억에서 뜬 삼천 개의 달이/ 고란초에 숨어들었다는/ 고란사는 어디에 있나/ 석탑 앞에 엎드려/ 삼천 개의 눈물로 엎드려/ 기어이 한 번 목놓아야 하는데/ 고란사여 보이지 않는 고란사여/ 달그림자 그렁그렁한 낙화암/ 다 못읽고 돌아앉았을 고란초/ 그 눈물 굽이굽이 발등을 찧네/ 가도가도 보이지 않는 고란사/ 퉁퉁 부운 발등에서 달이 뜨네/ 삼천 개의 달이 뜨네//

배경 / 권기만
나무와 잎으로/ 분가해 나간 몸짓을 보는 것은 가을이다/ 율동을 키우는 동안/ 나무들은 더 없이 행복했고/ 푸른 근육은 여름을 행진했다/ 숲은 내가 믿는 유일한 배경이다/ 그 배경에서 소리로 변하고 싶은 잎들이/ 부지런히 허공을 타종했고/ 대략 수만 톤ton의 박수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가을이 오면/ 가을 내내/ 내 등 뒤에서/ 무더기 무더기/ 박수 친다/ 손 다 떨어져 나가도록 박수 치는 숲은/ 내가 그토록 갈구하던 배경이다/ 이 모든 것이 준비된 응원이지만/ 그것을 모르는 동안 나는 얼마나 작았던가/ 사랑을 잃으면 다 잃는다 말하지 말자/ 내 편은 아무도 없다 말하지 말자// 아낌없이 아낌없이/ 바람 분다//

7번국도 / 권기만
그는 수상스키를 타고 출근한다/ 눈을 멀리두면 물보라를 일으키는 발밑/ 퇴근 땐 어김없이 북극을 향해 시동을 건다/ 기러기가 되어 날고 있는 7번국도,/ 부서지며 흘러가는 것들이/ 부딪치며 손 섞는 모습은 얼마나 눈부신가/ 잠에서 탄생할 때/ 그를 받아 안는 것은 바람의 손이다/ 물방울로 짠 푸른 천을 펼쳐/ 한 마리 봉황처럼 날고 있는 東海,/ 가끔 영화에서처럼 동해를 몰고 부릉부릉/ 광속추월 페달을 밟고 북극으로 내달릴 때/ 시선을 관통하며 부서지는 까마득한 별빛/ 활처럼 원근법에 저장해두고/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돌아다보면/ 말없이 V자를 그려주는 기러기 일만 마리 눈빛/ 처음부터 오로라를 향해 시동을 걸어놓고 있다/ 물보라를 몰고 출근하는 7번국도,/ 눈을 멀리 두면/ 도로는 강으로 진화하고 있다//

발굴 / 권기만
햇살 알갱이로 밥 지어 파는 동네 슈퍼마켓, 똥개 한 마리 Y를 하품 속에 가두고 날짜 지난 수음을 핥는다 전철 타면 지구/ 끝까지 가라고 꼬리 치는 바람, 얼룩무늬 차창은 날마다 못 본 척 딴전이다 담뱃갑처럼 쪼그려 졸다 깬,// 사내가 분광기로 색감을 살핀다 입맛에서 눈맛으로 변해가던 21세기 색깔의 혁명기, 발굴된 사내는 배가 아니라 눈이 고/ 파 있다 막 주문한 블랙버드에 거리가 파노라마처럼 감겨 있다 물감이 색감을 변주하는 표변주의가 21세기에서 시작 됐단/ 걸 확인하는 순간 사내의 눈에서 36가지 색채가 쏟아진다// 물감에 기록된 사내의 녹취록을 옮겨 적다가 불빛에 반응하여 움직이는 인형극이 공연되는 시간을 발견한다 도로는 무대/ 가 된 지 오래 저 위에 서면 누구나 주인공이 되지 물감의 층을 내려가자 도로는 불빛 먹는 회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위장이라 소화가 느려서 남은 기록이다 열두시와 한시 사이의 사람들이 춤에 감전된 듯 흐느적거린다// 허기는 더 큰 허기를 보면 사라진다 사내는 사라진 자신의 허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진화가 시작된 21세기 사내의 위장을/ 관찰한다 블랙버드가 보여주는 스펙트럼에서 사내의 의중을 읽는 건 발굴로는 알 수 없다고 적는다 발굴은 창조라고 다시/ 고쳐쓴다// 몇천 년의 바람을 갉아먹은 생쥐처럼 허겁지겁 뜯어먹은 눈빛 식사에 포획된 격한 허기는 순금보다 귀한 소장 가치가 있/ 다 국립박물관에 전시한다면, '열두시와 한시 사이에 박제된 인형극'과 막 발아한 눈의 위장에서 찾아낸 '내장의 도덕적 결/ 벽증'을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이다 퇴화가 결벽증 때문이라는 사실은 창조성이 아니고는 알아볼 수 없는 단서다// 신인류 기원의 거리였을 자리에 블랙버드를 놓는다 퇴화를 시작한 위장이 사내의 눈에서 한껏 부릅떠진다 쫄쫄 굶어서 모/ 처럼 눈이 파랗게 우러난다//

도서관 / 권기만
사막이 직립해 있는 곳엔 가지 마세요 수천만 페이지 모래바람 펄럭이는 구릉, 낙타처럼 걸어가는 독서는 젊음/ 을 화르르 쏟아놓곤 해요 거기 어디선가 별들이 소곤대지만 제 귀는 사르르 스쳐가는소리만 읽어요 사막을 횡/ 단한 사람도 첫발을 디딘 사람도 똑같이 발을 헛디뎌요 무너지기 좋을 만큼 발밑으로 바람이 흘러요 길이 있다/ 는 말 듣고길 따라 흘러간 사람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아요 갈증이 깊어지면 모래가 물이 되는 사막엔 가지 마세/ 요 은하수가 불모의 강이라고 읽기 싫어요 낙타가 되긴 싫어요 아버진 오래 전부터 모래였어요 바람뿐인 아버/ 지를 낙타라고 읽긴 정말 싫어요/ 사막으로 출근하고 사막으로 퇴근하는 사람들이 발견한 아버지, 수천만 페이지의 사막을 다 건넌 사람은 없어요/ 사막을 횡단하다 사막이 되어버린 아버지, 아버질 펼치면 오아시스에서 별 헤고 있는 어머니, 스스스 미끄러지/ 기만 하는 어머닌 언제부터 유사의 강이었나요/ 바람을 만나야 길을 얻는 모래에게 바람은 낙타란다 낙타의 등에 올라타렴 모래처럼 스스스 달려보렴 다시는 돌/ 아올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안이니 타박타박 낙타처럼 걸어가는 활자들, 길 잃으러 사막 간다 길 버/ 리러 사막 간다//

스타오락실 / 권기만
스크린이 뜬다 배후엔 전선이 있고 광케이블이 잘리면 순식간에 먹통이 되는 도시, 화면에 나타난 전투상황은 에너지 과열이다 십자포 지휘관들에게 아이스 펌프 점검 지시를 내린다 내 임무는 집중포화로 기선 제압하는 것, 빛이 사라진다 동굴보다 더 커지는 동공,// 가상의 적과 마주하고 사는 사람들, 눈 밑엔 장전된 레이저 총, 새로 나온 레드를 장착하기 위해 몇 개의 밤을 알약처럼 까먹는다 황제로 귀환하기 위해 달의 이마를 들이받는 블랙야크, 선가스 산란못에서 수정탑이 솟구친다 예상치 못한 기습이다 떠 있는 구름에서 여왕과 일꾼을 엄호하라, 긴급, 긴급,// 연결체를 만들 시간을 벌어야 한다 우주관문을 통해 공허포격기와 불사조를 조합해 무결점 십자포화를 퍼붓는다 히드라리스크와 바퀴, 저글링을 전진 배치, 사쿠라스 고원에 해가 떠오르기 전 암흑기사가 승리의 꽃을 찾아야 한다// 현실진입 장벽을 폭파하기 위해 스타크래프트 전사를 꿈꾸는 아이들, 긴박했던 밤이 물러가고 가상의 평화가 배경화면으로 처리되는 금속도시, GSL 리그에 참여하는 3일 동안 아침저녁을 삼각김밥으로 때우고 카카볼 한 봉지로 달랜 밤, 그 입구를 지키는 63개의 비늘로 무장한 파충류가 휴전의 낮 동안 태양광자를 충전한다// 나는 엄지에 장착된 발사장치를 열어놓고 천천히 오수에 빠진다//

언어의 도시 / 권기만
0/ 컴퓨터에 단어를 뿌려놓고/ 배고프면 활자화하여 시장에 내다 팔고 있다/ 25000GB 밭엔 비주얼 자바 c++/ 변조된 웃음 소스가 무한대로/ 자판기 너머 미래로 번식한다/ 0과 1의 관계수로 사이로 음악이 폭주하고/ 복제된 야후의 달이 화면 밖의 달과 충돌한다/ 수천 개의 불꽃이 암흑을 가로질러 불발탄처럼/ ,,, 쉼표로 찍힐 때/ 키 큰 잡초같이 흑흑거리는 감정그래프/ 저축한 돈이 없어도 관계수로 사이로/ 발뒤꿈치를 들고 봄이 지나가고/ 반복반복 녹슨 목소리도 지나간다/ 마이크로 칩에 내장된 여자의 손톱/ 메니큐어를 바르고 둔갑한 e-Cord/ 전립선에 꽂으면 사이버세상이 도래한다/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거래되는 뒷골목/ 2500만 가지 입술이 채소처럼 차려진 식탁/ 흙냄새 좀 나지 않으면 어떠리/ 쾌락도 썩으면 0이 된다 중얼거릴 때/ 종자를 알 수 없는 무정자의 무리가/ 이브의 뱀처럼 미라보다리 아래/ 야후의 달을 향해 몰려간다//

이민 / 권기만
여행자로 도로변 창에 비친 내가/ 3시 10분과 15분 사이를 지나간다/ 세대를 넘어 함께 살아왔다는 뜻/ 무수한 분신이 어른거린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며/ 연탄불을 마신 사내/ 하늘공원 터미널에서 배웅할 때/ 차표 같은 가오리연 잡고 달려간다// 사랑하고 싶었으나 딴지만 걸다 망한/ 이젠 마음이 움직여야 행동이 되는 나라에서/ 실컷 살아보겠다며/ 처ㄴ사ㅇ으로 점프한 사내// 그러나 나는 윤회의 고리를 끓고/ 이제 그만 해탈하라고/ 강심에 들어/ 천천히 뼛가루를 뿌린다// 분분히 스러지고다시 잠잠해진 강심에 비친/ 4시 10분과 15분 사이 전생인지/ 후생인지 알 수 없는 내가/ 몇 겹으로 어른거린다//

인간 이후 / 권기만
시간을 늘여 스스로 죽음에 들지 않는 한/ 죽지 않는 인간족이 탄생했다// 페가수스좌에서 반짝 눈을 뜬/ 농염한 미래의 기척// 자숨에서 이주해 온 인간들이/ 아미달라 행성에 내리던 날// 인간의 걸음걸이 거기 어디에도 나이는 없다// 한번도 보지 못한 이방인을 보는 눈빛에/ 지구인이라는 고대문자는 보이지 않았다// 우주인으로 거듭나는 동안 용맹무쌍한 인간은/ 그 오랜 죽음의 존엄을 슬프게도 잊었다// 연약한 첫발이 가진 연민으로 반짝이는 지구/ 푸름을 영원성으로 만든 땀의 유전자만이/ 온전한 지구인을 살아가고 있다는데// 사건의 지평선 위로 행성 이주족들이/ 거대한 비행체를 몰고 지나간다// 나이를 지운 인간으로 아미달라 행성에 내리던 날/ 빛을 가린 무리에 행성의 하루가 종일 컴컴했다//

행성기록자 1 / 권기만
작약이 화색을 꾸미다 놀라 미소를 봉긋으로 바꾼// 우주, 물고기 자리, 고래자리 복합 초은하단, 라니아케아 초은하단, 처녀자리 초은하단, 국부은하군, 은하수 준은하군, 우리은하, 오리온 팔, 굴드 대, 국부 거품, 국부 성간구름, 태양계, 내행성계, 지구, 아시아 대륙, 동아시아, 대한민국, 울산, 북구, 약수*// 100조개의 별이 살고 있는 우주, 100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 100조개의 미생물이 살고 있는 미생물 연합군 연방정부에 불과한 나// 초속 600km로 우주공간을 질주하는 지구에 소속된 몸의 총량에 137억 광년을 더하면 우주의 생물연대가 된다 빅뱅 이후가 오롯이 관통한 짧은 생각으로 영생을 깨우친 푸름// 46억 2020년 숙성된 인간이 걸어간다 숙성에서 동격인 개와 닭을 지나 문지방 너머 할머니 열여덟을 지나간다 문틈으로 시간의 허리가 짧다 무료를 하품하다 눈 마주친 고양이 재빨리 달의 분화구 속으로 꼬리를 감춘//
*우주명 주소

토성 엑스포 / 권기만
은하좌표 bⅡ7, lⅡ36/ 판, 다프니스, 아트라스, 프로메테우스, 판도라, 에피메테우스, 야누스,/ 시간의 닻을 올리고 스타시스템에 접속한다/ 에너지 숙성관에 진흙을 넣을 때/ 모항에서 광자 충전 표시가 뜬다// 푸름 한 송이 생명을 입력하고/ 광선 11호에 승선한 지구인/ 광속 잠금장치를 풀고 꿈의 영역으로 속도를 올린다/ 엔셀라두스, 테티스, 텔레스토, 칼립소, 디오네, 헬레네, 레아,/ 꼬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춤꾼들/ 암모니아 얼음 알갱이 모자를 쓰고 미끄러진다// 광속 불가침 영역에 천천히 중력 닻을 내린다/ 육각형구름방망이 폭풍이 고체 수소 중력 바리케이드를 친다/ 타이탄, 히페리온, 이아페투스, 이이라크, 포에버, 팔리아크, 스카디,/ 서로를 향한 임계 광파가 무한대로 발사된다// 베비온, 스콜, 타르케크, 그레이프, 히로킨, 나르비, 하티,/ 용의 폭풍권 속으로 첫발을 내린 토성 관광 스타호/ 수소 기둥과 탄소 이산화가 뿜는 생명의 숨소리에 겨워/ 제멋대로 던져놓은 수천 가지 별의 씨앗/ 춤사위로 깨워 달아나고 있다 무리지어 무리지어/ 겁 없는 용을 부르고 있다//
* 토성의 위성은 약 160여개가 있다. 지금도 계속 발견 되고 있다.

초끈교실 / 권기만
신문지를 분자 크기로 접고 있다/ 배가 태양이라면 참깨는 지구/ 배와 깨의 거리는 8미터, 겨우 여덟 걸음이다/ 크기와 거리를 버리면 모든 사물이 이웃이 된다/ 태초엔 완두콩만 했던 우주/ 깨 속에 들어있는 137억光年이/ 입속으로 공간이동하면 갑자기 왁자해지는 지구/ 주머니 속에 완두콩 몇 개 넣고 주물럭거리면서/ 몇 개의 우주가 들어 있다고 상상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간들이 출산의 고통을 겪었던가/ 너무도 빨리 크는 완두콩/ 초끈*을 목줄처럼 달고 어디로 끌고 가는 걸까/ 8차원 옆 동네에서 개 짖는 소리/ 달이 완두콩처럼 컹컹 음정을 켜들고 있다/ 그렇거나 말거나 깨 한 숟가락 입에 털어 넣고/ 수백 개의 지구를 와자작 씹어본다/ 그 순간 내 입이 블랙홀로 둔갑한다/ 한 채의 우주가 되어 보는 고소한 입맛/ 압축시켜 저장한 내 몸 어딘가가/ 나선은하의 궤도로 꿀꺽, 접어든다//
* 초끈이론: 자연계의 모든 입자와 기본 상호작용을 미소한 크기의 초대칭적 끈의 진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다부 1 -우주학교 / 권기만
1/ 맘속에 일천억 개의 은하를 품어도 겸손을 배우게 하는 우주학교, 다부 1교 지나 다부 2교 가는 길에 우주에 관한 건 다 있다 위대한 것은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부 1교에 새겨진 법도를 익히는 동안 별에 대해 하나씩 알아 갔다 별을 다 알게 되면 우주를 반 바퀴 돌아오는 졸업여행을 간다 우주를 반 바퀴 도는 동안 몸은 우주를 양자껏 품는다 그러나 영혼과 우주가 일란성 쌍둥이로 다시 태어나면 가르침도 학습도 저절로 완성된다 졸업장으로 고양이과 수목인 재규어마린 한 송이씩 달아준다 입이 뾰족하고 긴 수염수술이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꽃잎 밑에 숨어 있는 가시는 꽃을 건드리지 않는 한 발견할 수 없다//
2/ 지구를 떠나기 전 꽝꽝나무에 숨을 꽂는다 호흡이 필요없는 혹성을 숙제할 땐 심장을 단단하게 정지시켜놓아야 한다 불모의 혹성을 오아시스로 만드는 작업은 두고 온 숨을 고르게 한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 숨을 찾을 때까지 큰숨으로 자라고 있을 꽝꽝, 잎 속 공기가 꽝꽝 터지듯 수십억 년 된 별이 허공을 할퀴며 터지는 고양이성운으로 방향을 잡는다//
3/ 문이 있고 정원이 있고 연못이 있다는 건 상상보다 큰 기적이다 별똥별 수백 개 품어놓은 딸기를 맛본다는 건 꿈이다 수천 개의 은하를 합쳐도 만들 수 없는 장미를 만져본 기억으로 장미성운으로 이동할 때 문득 5월이라는 말이 빛의 백만 배 속도로 거문고좌를 지나간다//
4/ 몸속 만 평의 청보리를 밟으며 우주의 중심으로 미끄러질 땐 눈을 감는다 보는 순간 맘속 모든 어둠이 소멸한다는 퀘이샤, 처녀자리 은하단에 도착하면 정중하게 헬멧을 벗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기억의 꼭지점에서 갈라진 후 137억광년 만에 잡아보는 손, 합체된 기억을 열면 나타나는 황소인간 염소인간 코끼리인간과 뱀인간이 스핑크스를 지나 독수리인간으로 날아오른다//
5/ 왕래할 수 없어 점점 작아지는 아이들, 별천지 구석구석에 주파수를 맞춰놓으면 가야할 곳이 결정된다 2인1조 베가행성 99박100일 투어가 결정된다 중성미자 칸타타에 오른다//
6/ 불빛의 손을 잡지 못하게 하는 일방을 해제하고 십방을 퍼트리는 100일 동안 대기는 흐림에서 푸름으로 바뀐다 바람을 들이키며 울먹이는 나무, 푸름보다 더 밝은 말은 없다고 다독이고 모항으로 돌아오면 휴가가 기다린다 태초를 낳은 어둠 양탄자로 깔린 암흑물질을 둘러쓰고 쉬는 무중력 휴가, 그만한 긴장이완이 없다 이제 별빛은 태초를 낳은 어둠보다 젊다//
7/ 다부를 떠난 지 499년, 모든 곳이 중심이 아니며 또한 모든 곳이 중심인 우주, 중심은 자신뿐, 가정한 중심점에 다다른 날 직지사 뒤쪽 은행나무가 그 큰 붓으로 하늘을 노랗게 칠하고 있다고 지구쪽 별이 꽝꽝 도장을 찍는다//
8/ 좌표상 우주의 중심을 반 바퀴 돌아오는데 999년, 사상의 지평선 위로 떠오른 지구가 한 송이 물방울꿈이다 신비의 극점에서 피어난 가장 푸른 물방울눈, 음정 위에 떠 있는 섬에서 개똥지빠귀 울음소리처럼 선명한 물소리 들려온다 그 소릿길 따라 해당화 여린 가지에 불시착한 달빛처럼 지구에 내린 날, 밤꽃향 그윽한 바람 오리 밖 밤나무 안부를 전한다//
9/ 개구리 울음 한 소절로 천 년의 허기를 달래고 꽝꽝나무에서 호흡을 찾아 숨을 불어넣자 인간의 시간으로 환생하는 세포들, 별이 그토록 제련하고 싶어한 열정이 순금보다 더 밝은 화음을 들려준다 푸름 속에 구현되어 있는 환희가 지구시간을 조용히 탄주해보는 콧노래, 만톤의 중력 보정 장치로도 만들 수 없는 중력장이 저녁이라는 항성을 천천히 관통한다//

다부 2 -5월 / 권기만
1/ 문배주 익어가는 저녁 아를르의 여인을 들으며 달을 본다 저 문을 열고 먼 은하로 달려가던 시절 나뭇가지 사이의 달은 곧잘 은하처럼 흘렀다 HFLS3 은하가 장미성운 위로 떠오를 때 다부 1교 위로 달이 뜨는 것 같았다 Starburst 은하를 항해하며 별의 탄생을 지켜보는 일은 기억이 창조되는 걸 보는 것 같았다 어째서 기억은 꿈의 형태로 존재하는지, 인간에 대한 경외는 그때 완성되었다//
2/ 바람이 잎의 손등을 타고 미끄러져 이마를 짚는다 푸른 숨소리가 늘씬하다 지구에서 석 달 휴가는 꿈이다 푸름은 모든 별을 합쳐놓은 중력을 거느린다 그 그늘에서 한나절이면 우주 한 바퀴 도는 것과 같은 풍광을 중력장으로 만들 수 있다 오월의 회전반경에 접어들면 꿈은 푸름으로 갈아입는다 넝쿨장미들이 완성된 꿈입술을 하고 오월의 눈빛을 턱에 받쳐놓고 지나가는 바람을 못 본 체 하는 토라짐에 내 입에서 낮은 감탄이 터진다//
3/ 안녕, 아가씨들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내 눈 가장자리에 겁도 없이 애인처럼 붉음껏 들어선다 내 몸에서 한동안 가장 밝은 성운의 계절이 시작된다 꿈의 절기를 살고 나면 인간은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된다 다부로 다시 온 까닭은 그 때문, 녹색의 계절을 가진 행성에서 충전된 영혼의 품격은 어쩌면 가장 밝은 별보다 더 밝은지도 모른다는 항성교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처녀자리 은하족 베가성 아이들에게 지구인 교관은 천상의 우물이라 불리는 것도 그 때문//
4/ 내가 모르는 나의 빛은 오월을 살아서일 것이다 아무렇게나 떨어진 후박나무 그 큰 헐떡임을 줍는다 언제부터 은하가 흐르고 있었던 것일까 홀로 먼 여행에 나선 항모를 보듯 후박나뭇잎을 들고 눈 위로 들어올려본다 항성의 풍모가 어렸다가 스러지는 그 사이로 흰당귀 은하가 나타샤처럼 달려온다//
5/ 오월과의 연애는 상비약 같은 것이지, 우주여행 999년 동안 병이 극도로 깊어졌을 때 몇 번 그 길을 다녀온 항성장이 내게 말해주었던 그 말, 가장 깊은 병은 그리움이지, 그때 보았다 내 안의 달이 극도로 야위어 졌을 때 살갗을 뚫고 별이 뜨는 걸, 나부 은하단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나부족 여인을 만났을 때에도 내 마음은 차가운 석영 같았다 자신들보다 더 아름다운 종족이 있단 걸 믿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그건 금지된 불문율, 지구의 오월을 통역할 언어는 없었다//
6/ 오월의 햇살이 병아리 노란 날개처럼 접혀 있는 다부 1교 지나 다부 2교 가는 길, 꿈의 성지를 달이 한 마리 새처럼 둥글게 품고 있다//

외계인 가이드 / 권기만
그는 팔이 네 개다/ 쉴 때는 꼬리를 의자처럼 받친다/ 일상어는 손을 써서 나타내고/ 사랑어는 꼬리를 써서 나타낸다/ 사랑한다고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자/ 눈빛은 벌써 자루다 행성에 도착해 있다/ 지구식으로 꼬리를 치켜세워 지금이 최고야 하다가/ 해저 3만 리 귀신고래 호가 오자 얼른 내 뒤로 숨는다/ 떡 벌어진 입속으로 간신히 밀고 들어간다/ 의자운송기에 타자 예약석이 다가온다/ 느린 항해가 3만 리 호의 장점/ 장생포에서 출발 시드니를 거쳐 리마에서 돌아오는 코스다/ 너무도 다양한 생물군에 한 달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한다/ 수천조의 상상이 꺼지지 않는 빛의 길로 진입했다고/ 큰 눈을 더 크게 껌뻑인다/ 음악처럼 연주되는 자루다 행성은 빛의 변곡점이라며/ 언제 한번 와서 빛 위를 걸어보자 한다/ 포털머신에 올라타기 전/ 꼬리로 나를 감아 꼬옥 안아준다/ 동굴 속 같은 울림을 남기고 그는 갔다/ 그날 이후 서쪽 하늘 중간쯤 자루다의 미소가 걸렸다//

지구에 사는 우주인 6 / 권기만
간질간질한 바람에 속아 꽃이 되어본 적 있으신지// 쑥부쟁이로 무당 사슴벌레로 바퀴 달린 벌과 붕붕 공기를 뿜다/ 박쥐의 저녁으로 날아다녀본 적 있으신지// 바람의 언덕에서 반쯤 지워져본 적 있으신지// 밤의 종점에서 나이를 먹지 않는 마젤란 여자들과 만년처럼/ 하룻밤 꼴딱 새워본 적 있으신지// 발목에 흰털빛 두른 바슘처녀들과 꿈결 풀어/ 물병자리에 앉아본 적 있으신지// 뭇별 한 동이 사서 돌아오는 새벽/ 백 년은 늙지 않는다는 그 물 한 그릇 단숨에 마셔본 적 있으신지// 뱀자리 지나 도착한 은하의 휴양지/ 반짝임만 모아놓은 光年의 푸름에 취해본 적 있으신지// 눈 감고 천천히 지나가는 구름의 문체 // 냇물이 발가락을 건드릴 때 발그레 얼굴이 둥글어지는/ 간질간질한 지구인을 살아본 적 있으신지//

내 안의 타클라마칸* / 권기만
사막에서는 모래가 물이다/ 흐르고 싶은 대로 흐르는 모래는/ 지불할 게 남아 있지 않은 고통에 닿아야 생기는 부력// 혼자를 수없이 횡단해 본 자에게/ 한 걸음은 소금 한 됫박보다 값지다/ 멈춰 있으면서 흐를 수 있는 경지는/ 자신을 수없이 허물어야 도달하는 자리//허문자의 고요로 상처를 지우고/ 흐르면서 흘렀던 것마저 지우는/ 사막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소진하는 것// 모래는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첫 걸음이 마지막 걸음이 되는 타클라마칸에서/ 길을 찾는 건 끝끝내 헛수고다//
* 타클라마칸: 위구르어로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땅

신드바드의 모험 -요술램프 / 권기만
신드바드가 간다/ 7번의 항해와 7번의 죽을 고비를 넘어/ 아무도 없는 어둡고 은밀한 때에 이르러 발견한/ 요술램프,/ 문지름이 요술램프란 걸 최초로 발견한 신드바드,/ 나무도 사람도 램프란 건 아직도 비밀이다// 문지르면 불이 붙는다/ 청동불꽃에 숨어있던 형상,/ 감각의 불꽃이 핀다/ 아주 먼 아라비아의 이야기가 눈을 뜬다/ 나뭇잎에서 출렁이던 파도,/ 용궁의 열두 가지 춤을 뿌려놓는 동안/ 향로에 묻어있는 손들이 빛을 탄주한다/ 문지르면 공연되는 12세기 수피춤,/ 결혼을 서두르는 건 요술램프를 독차지하려는 것,// 문지름을 잊어버리면/ 고물장수가 와서 바꿔 가기도 하는 램프,/ 청동불꽃으로 잠든 램프를 찾아/ 7번의 항해와 7번의 죽을 고비를 넘어/ 신드바드가 간다//

雪國설국 / 권기만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열차는 수전증 걸린 노인 같다/ 툰드라의 혹한이 창틈으로 세상 끝까지 옷깃을 세웠다/ 모든 경계를 다 지워야 도착한다는 꿈에서의 열흘,// 驛舍는 씩씩거림만 남은 주전자 바닥 같다/ 여행자로 살다 간 형은 왜 이 먼 곳에 와서 죽은 것일까/ 시체보관소에 잠들어 있는 형은 너무도 편안했다/ 빙하의 바람을 뼈에 새기면 설국을 찾을 수 있다/ 갈겨쓴 글자가 설인의 흔적 같던 형의 엽서,// 교수직을 던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형은/ 돈이 생기면 보드카만 마셨다/ 형의 수첩을 보고서야 설국으로 가는 길이 있단 걸 알았다/ 삶에 행로를 끼워 넣으면 어디에도 없는 나라가 만들어진다/ 수첩의 흰여우언덕은 이제 찾을 수 없는 나라다// 눈 덮인 북극 하늘을 조금씩 잊으면서 봄은 덧났다/ 한 송이 꽃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뛰어 내렸다/ 살아보고 싶은 존재에 가장 가깝다는 나라,/ 한 번 내디딘 자리에서 지상에 없는 제국을 만나보라고/ 북극점 받아 안고 가만히 날개를 펴는 목련,/ 내 눈속에도 설국의 지도가 그려지고 있다//

몽마르뜨 이젤 / 권기만
물감은 소리를 머금고 감춘다/ 빛을 통과시키고 빛나듯// 붓을 드는 순간 꽃은 떤다/ 물감에 배인 꽃의 입술/ 벗은 어깨가 흘러가는 곳으로/ 한사코 따라나서 보지만// 따라 갈 수 없는 너머를 가리고 있는 붓은/ 문이거나 장막이다// 물감의 소리를 듣게 되는 날이 있다/ 트로이 목마를 타고 도착한/ 그림은 꽃이 만들어낸 성(城)// 성(城)의 운명은 무너지는 것, 감열지처럼/ 지나간 흔적만 흑백으로 남은,/ 누군가 에펠탑을 이젤로 쓰는 그날/ 모든 화가는 거인이 된다// 성벽을 성벽으로 감춘 그림/ 한 장의 손수건처럼 잡아당기면/ 몽마르뜨 언덕이 어깨를 드러낸다/ 소리가 굳어 이젤이 된// 사크레쾨르 성당이 마리아처럼 서 있다//

우르밤바 / 권기만
마추픽추는 고원 위에 있고/ 잉카의 도시는 악보 위에 있네/ 고도가 높아 음정이 되는 심장박동/ 발맞춰 걷다 노래가 된 라마여// 불변의 음정/ 유적으로 앉혀놓은 맞추픽추/ 8월의 고원이 제단이 되면/ 별을 따러 올라가는 라마여/ 그 심장박동 천지를 울리네// 희박한 공기는 진공을 불러/ 심장이 있는 짐승은 모두 북이 되게 하네/ 고도에 맞춰 점점 높아지는 북소리/ 몸이 북이 되는 경계를 알 때까지/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공명에 이를 때까지/ 쉬지 않고 고도를 오르는 라마여// 몸은 언제부터 심장의 순례지였나/ 음정의 요새 맞추픽추/ 타박타박 발소리에 감추고/ 원색의 옷감이 화음처럼 펄럭일 때/ 마추픽추는 고원 위에 있고/ 잉카의 도시는 악보 위에 있네//

나나가 사랑한 / 권기만
기억하지 않아도 말이 되는 발과/ 늙은 와인 두 병이 잠들어 있다/ 안달루시아의 개를 따라간 낙타가/ 피아노 위에 쓰러져 있다 소리는 뼈에서/ 바람으로 진화하다 혹에서 멈춰 있다/ 분열로 우정을 만든 물감을 지나/ 무한 반사각에서 발견된 불멸의 시간에 도착해 있다/ 압생트가 통과된 귀와/ 사라진 오후가 피의자가 되었을 때/ 순회재판소 소장이 죽었다/ 모험가들이 돌아왔고 꺼졌던 벽지에 불꽃놀이가/ 점화됐다 보호종인 문화를 심어뒀다는 가슴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문자가 타종되는 방을 지나/ 나나가 끝없는 설원을 걸어갔다/ 다른 세상에서 온 다리들의 집회를 지나/ 프랑스에서 태어나 아르헨티나에서 자란 흰색과/ 붉은색이 넘어진 채 돌기둥이 되어 있었다/ 외상으로 산 작은 입술과 선 굵은 칵테일 잔/ 피아노를 개조한 방에서 깼을 때/ 막심 고리키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오래된 침묵이 다음 주인공이냐고 물었지만/ 지나간 질문이 불간섭주의를 천명하며 돌아섰다/ 자유가 희망인 시대의 아침이었다//

 



권기만 시인
1959년 경북 봉화 출생.

2005 문학저널 신인상 당선, 2012년 『시산맥』으로 등단.

최치원문학상, 월명문학상, 울산문학상.

시집으로 〈발 달린 벌〉이 있다.

시산맥 동인 , 두레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