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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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11. 15.

김재혁(金在爀) 시인
1959년 충북 괴산 출생.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의 대표적인 릴케 연구자로서 시인 및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1994년 <현대시>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 『아버지의 도장』 『딴생각』이 있다. 그 밖의 저서로 『릴케와 한국의 시인들』, 『바보여 시인이여』 『릴케의 예술과 종교성』, 『릴케의 작가정신과 예술적 변용』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릴케 전집 1-기도시집 외』, 『릴케전집2-두이노의 비가 외』, 『릴케 : 영혼의 모험가』, 『노래의 책』, 『로만체로』, 『넙치 1,2』, 『푸른 꽃』, 『겨울 나그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소유하지 않는 사랑』, 『골렘』, 『사랑의 도피』, 『세계의 동화』, 『민들레꽃의 살해』, 『환상동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말테의 수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변신』, 『회상록』 외 다수가 있다. 독일에서 『Rilkes Welt』(공저)를 출간했으며, 오규원의 시집 『사랑의 감옥』을 독일어로 옮겼다.

 



번역의 유토피아 / 김재혁
이곳엔 사랑이 넘실대지요./ 고통도 바지를 걷고 함께 개울을 건넙니다./ 수초들은 뒤엉켜 있고,/ 가끔 미끄러운 돌이 딛는 발을 밀쳐 내는군요./ 모두 사연을 갖고 사는 세상입니다./ 사연들은 글자로 서서 머릿속을 헤맵니다./ 글자들에게 사연을 물으면/ 모두 담배나 피워 물 뿐,/ 수초 속에 숨은 그리움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건넌다는 것은/ 늘 실패한 첫사랑입니다./ 그래서 아쉽지요.//

시詩 -아내에게 / 김재혁
내 삶의 강물 위에/ 누가 띄워 놓았나/ 이십여 년 전부터 떠 있는/ 종이배 하나/ 내 마음 흔들릴 때마다/ 멀미하는 가엾고 조그만/ 예쁜 돛단배 하나/ 그대//

시인의 아내 / 김재혁
한 끼 동태국은 아름답게 끓여주지 못했지만/ 속은 살뜰하게 끓여주었지./ 국물 팔팔 끓어 부유하는 연꽃,/ 사라지면 무척 쓸쓸하겠지./ 문득 가을 아침이라고 올려다본 하늘에/ 그 구름이 떠 있더군. 지난 여름날 아침에/ 커피를 끓일 때 우리 머리 위에 떠 있던 구름./ 올 여름이 진하게 팔팔 끓더니/ 무르익은 기억이 떠올랐군./ 우리 잠시 가스 불을 끄자.//

시집 / 김재혁
쓸쓸한 생각들의 지하창고다./ 그 어두운 길을 거닐어/ 누군가 올까 기다린다./ 추억의 앨범이다./ 울긋불긋 기억들이 물들어 있는./ 누구하고 한잔하고 싶을 때/ 그 기억의 창고에서/ 좋은 포도주를 한 병/ 발견할 수 있다면/ 영혼을 취하도록/ 세수시켜 줄 수 있다면//

책 / 김재혁
구름보다 더 늙은/ 책이 내 얼굴을 쳐다본다,/ 내 얼굴을 들이마시고 어루만진다,/ 내 마음을 제본하여 읽어 보라고 내민다./ 책의 손가락이 내 속을 더듬으며/ 뒤틀린 내 영혼의 손목에 봉침을 놓으며 웃는다./ 병원 복도에서 소리 지르는/ 반 귀머거리 노파,/ 귀먹은 책이 나를 향해 소리친다,/ 생의 계절은 늘 그늘이었다고,/ 앞을 못 보는 책은/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면/ 낡은 귀를 쫑긋 세운다,/ 책의 행간을 바람이 지난다,/ 책의 밭고랑에 시간이 흐르며/ 물결친다, 책에 해일이 일어/ 사랑이 묻히고 죽음도 묻히고/ 책에 눈이 내려 어둠이 진다.//

꽃, 비가 / 김재혁
​봄마다 꽃들이 부르는 비가는/ 나무를 물들이고 나무는 운다,/ 지난봄에 보았던 북한산 산수유 꽃은/ 새가 되어 내 가슴속에 살면서/ 가끔 내 가슴을 두드리며 운다,/ 서 있다는 것은 저편을 향한 비가다,/ 꽃 속에 비가가 숨어 있다는 건/ 비 오는 거리에 서 있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꽃은, 어느 봄날의 꽃이든/ 어두컴컴한 빈 방에 덩그마니 매달린 의자다,/ 의자엔 죽음이 걸터앉아 엉덩이를 들썩이며/ 비가를 부른다, 앞뒤로 일렁이며 삶의 비가를,/ 노래를 입안으로 흘려 넣으며, 그래 그렇게/ 흔들리며 달이 고개를 돌릴 때까지/ 잠시 이런저런 빛깔로 아픔을 노래해 보는 거다/ 노란 눈물 빨간 눈물 하얀 눈물//

저녁, 나무들 / 김재혁
다 흘러가지 않은 저녁 속에/ 둥지에 내려앉은 새처럼/ 그저 일순의 숨결이라도/ 행복 속에 가두고 싶다는 듯/ 잎들의 날개를 접는 나무들,/ 이젠 쓰고 남은 시간도 접어/ 뒷주머니에 꾸깃꾸깃 집어넣고/ 다 흘러가지 않은 저녁 속에//

소리 / 김재혁
산책로를 걷다 보면/ 여름의 주머니를 뒤지는 소리들,/ 딱따구리는 제 골머리가 터지도록/ 나무의 속에다 딱딱딱 공허를 털어놓고/ 날아가던 구름은 귀를 열고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나무들은 발가락으로 땅속을 헤집고/ 안 보는 듯 슬쩍 남의 허벅지를 훔쳐본다,/ 가끔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는 낙엽송들,/ 땀에 묻어나는 진하게 꿍친 생각들,/ 민들레는 고양이 눈을 노랗게 뜨고/ 입을 오므려 동그랗게 야옹 소리를 내고/ 돌멩이는 바람에 몸을 비비며/ 발꿈치를 돋운다./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 무수한 소리들 사이로 전류가 흘러/ 세상의 정적에 불이 들어온다,/ 수첩을 꺼내든 나무들 소리를 끼적거린다.//

공원 / 김재혁
붉은 바닥은 햇볕을 쬐고 있다./ 은빛 철봉은 잡아줄 손을 기다리고/ 벤치에는 고요가 앉아 있다./ 운동기구 몇은 건강하게 서 있고/ 가로수 몇 그루 밥상의 수저처럼 놓여 있다.//

바람의 씨 / 김재혁
아주까리씨 하나를 입에 넣고 잘게 씹는다. 입에서 한 무더기 꽃이 피어난다. 입은 점점 더 커져 풀무가 된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는 생각이 피워 올리는 폭포, 한 톨의 아주까리씨가 풀무를 돌린다. 꽃의 너울 속으로 넘나드는 바람의 혼절한 모습, 지나온 역을 향해 흔드는 손짓이 내 속에 다시 바람의 씨를 흩날린다. 바람은 언제나 늙은 꿈의 주름을 지우나니//

딴생각 / 김재혁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한 발짝 떼어 놓을까. 가만있을까. 다 그만둬. 딴생각이 펼쳐 놓은 마당가 바지랑대에 잠자리// 가 앉았습니다. 잠자리의 눈이 닿는 곳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사는 일은 역시 팍팍합니다. 저만치 옛사랑이 흘러갑니// 다. 옛사랑은 비안개에 젖어 있습니다. 또 한 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그냥 마구 걸어갈까. 다 그만둬. 멀리 가로등 불// 빛이 안개 속에서 숨을 고릅니다. 술래의 등 뒤로 딴생각이 펄떡입니다. 길가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누군가 술래가// 되면 딴생각은 그의 등뒤에서 발걸음을 살짝 죽입니다. 곳곳에 딴생각들이 무궁화꽃을 피웁니다. 사람들 마음마다 몰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꽃의 향기를 맡으려 구부린 여인의 그 허리 / 김재혁
꽃의 향기를 맡으려 구부린 여인의 그 허리,/ 선명하다. 차라리 사랑을 염하여/ 내 눈망울을 긁은 그 허리,/ 어지럽다./ 바람,/ 입술마다/ 꽃잎을 물었다./ 바보라고./ 바람이 세차게/ 날아와/ 뚫고 간/ 옛사랑의 망막,/ 꽃의 향기를 맡으려 구부린 여인의 그 허리.//

어머니의 이마 / 김재혁
봄바람에 호박꽃 떨어질 때 장뜰로 향하던 급한 마음 실어가곤 하던 수레바퀴 소리 들리네요. 새끼 돼지 몇 마리의 무게가 삶의 무게를 그래도 덜어 주었을까요. 십오 리 장의 신작로엔 햇볕이 내리쬐고 치마폭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던 다섯 살 배기의 손아귀엔 힘이 들어갔지만 구 남매의 흔들리는 생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려 길바닥에 떨어진 낙엽의 시린 겨울을 생각했던 밝은 이마는 반짝였어요. 세상의 어둔 협곡에서 찬바람 불어와도 쉴 때를 생각지 않던 사랑은 하늘하늘 가을빛 코스모스 길에서도 늘 바쁘기만 했지요. 생의 얼룩이 햇살을 받아 그 이마엔 늘 무지개가 떴지요. 차가운 겨울날 문풍지 떨림에 오늘 어머니 이마의 빛살이 전해져 오네요. 시냇가 실잠자리의 짙은 보랏빛 떨림보다 설레어 나는 생의 신작로를 멀리 굽어봅니다. 거기 슬픈 단조 하나 펄럭거릴까 하여.//

아버지의 풍경 / 김재혁
아버지를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것은 아버지의 안경에 비치던 풍경이다. 지나가는 차창처럼 때론 그곳엔 바깥 측백나무에 와서 앉던 참새들이 비치기도 했고, 때론 하늘에 떠가는 구름이 비치기도 하였으며, 마주 않은 어머니의 얼굴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약간 비켜서서 그것을 바라보던 나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늘 아버지의 TV에 나올 수 없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늘 한쪽 방구석에 앉아 뭔가 조몰락대며 만들거나 만화책을 보는 게 취미였던 내게 아버지의 카메라는 시선을 던져 주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임종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아버지의 병실을 찾았을 때 아버지의 눈길은 나의 움직임만을 좇았다. 아버지의 눈길은 내 몸에 와서 끊임없이 달라붙었다. 삶이라는, 공부라는, 인생의 성취라는 방패로 내 모습을, 내 마음을 은근슬쩍 가리고 아버지의 마음의 반경 속으로 뛰어들기를 꺼려했던, 살아 계실 때도 마치 성묘 가듯 했던 나는 가슴 찔리는 아픔을 느끼며 슬그머니 자꾸만 그 눈길을 떼어 냈지만, 그때 아버지의 마지막 눈에는 내 안경에 어떤 풍경이 비쳤을까. 볏단에 싸인 홍어처럼 고독하게 익어 가던 아버지의 아쉬운 눈길에 설익은 아들의 안경 너머로 무엇이 비쳤을까./ 이제 나는 중년의 언덕바지에서 지나온 길을 멀리 바라보며, 식탁에 마주 앉아 있는 나의 아내와 두 딸을 바라보며 그들의 눈엔 지금 내 안경에 무엇이 비칠까 생각해 본다. 바깥에선 지는 저녁 햇살이 홍옥 속에 갇힌 여인의 비탄처럼 수만 개의 거미 눈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다.//

초 여름의 풍경 / 김재혁
날이 덥다./ 보이지 않는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귄다./​ 새들의 울음소리에 나뭇잎들이 시든다.// 더운 날 나무에게는 잦은 새 소리가/ 불안처럼 느껴진다.// 익어가는 토마토마다/ 빨갛게 독기가 차 오르고/ 철길을 기어가는 전철의 터진 내장에서/ 질질질 질긴 기름이 떨어진다.// 약속에 늦은 한낮이/ 헐레벌떡 달려온 아파트 화단엔/ 기다리는 풀벌레도 없다.// 아이의 손에 들린 풍선이 터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고무타는 냄새가 난다.//

인사동 고가古家에서 / 김재혁
고가(古家)는 과거로 통하지 않는다/ 고가는 주름살을 지우고 차(茶)를 나른다/ 고가의 방문은 모두 닫혀 있고 골마루에선/ 조선(朝鮮)일보 문화부 기자가 차를 마신다/ 조선일보는 조선시대 신문이 아니다/ 과거의 눈을 감은 고가는 푸른 대나무를 품고 있다/ 이제 대나무는 절개를 상징하지 않는다/ 절개는 현재의 것이 아니다 대나무는/ 봄바람에 잽싼 몸놀림을 한다/ 떨어지던 햇살도 날렵하게 움직인다/ 기왓장의 주름 속에는 참새 집도 없으며/ 시간의 센 머리카락은 검게 물들여져 있다/ 옛날의 기억은 괄호 안에서 먼지에 쌓여가고/ 현재의 고가는 괄호 밖에서 차를 나른다/ 조금 있으면 모든 게 완전히 현재가 되리라/ 서울시가 이 터에 고층 빌딩을 짓기로 했으므로/ 고가는 고가(高價)에 팔렸다 고가를 소유한/ 사람은 이 괄호 안에서 춤을 출지도 모른다/ 알지 못할 미래는 바람만이 수확할 것이다//

하얀 히잡의 여인 / 김재혁
엊그제/ 달이 떠서 들여다보던/ 빈 공간에 오늘은/ 가을안개들이 조잘대고 있다./ 바로 같은 시간대/ 엊그제는 달이었던 것이/ 오늘은 다리 밑에서 자고 일어난 듯/ 푸석한 얼굴의 안개들이다./ 계절이 히잡을 뒤집어쓸수록/ 오랜 길 흔들려 온 듯 멀미가 심해진다./ 고향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나이를 재고 돌아온 새벽엔/ 먼 길 걸어온 듯 다리가 뻐근하다./ 가까운 앞산은 그새 늙어 키가 작아졌고/ 멀리 화전민들만 옮겨 다니던/ 이름 모를 검은 산은 여전히 검다./ 어릴 적 흐르던 개울을 보고 돌아와/ 하얀 히잡을 한 여인들의/ 뜻 모를 말들만 창 너머로 듣는다./ 거주지를 떠나 설거지통에 발을 담근/ 국화들은 어제 옷차림 그대로이지만/ 모두 무슨 색 속에 잠들고 싶은 건지/ 이곳의 창밖에도 하얀 말들뿐이다.//


인터뷰하는 거닐니우스* / 김재혁
그의 덥수룩한 머리에 늦은 봄비가/ 떨어지던 날 나는 보았네/ 얼굴에 스치는 빗방울에/ 어리는 철쭉의 붉은 빛을/ 곁눈으로 바라보며/ 깊은 생각 속에서 붉은 혀를 꺼내/ 핫도그 같은 마이크를/ 맛있게 아작아작 깨물며/ 지나가는 나를 향해 슬쩍/ 미소짓던 그의 그 시커먼 동굴에서/ 이처럼 쏟아지던 하얀 낱말들을.// 이젠 걷지 않고 서서/ 농경민족이라도 된 듯/ 고대의 정기를 온몸에 받는다며/ 하루 종일 걸어다니던 구두를/ 잠시 벤치 옆에 쉬게 하고/ 지금까지 발로 번/ 낱말들의 수를 헤아려/ 마이크 속에 집어넣던,/ 잠시 이상해진 거닐리우스,// 정말 따의 정기를 느끼려면/ 구두를 벗어야 하리./ 거닐리우스여,/ 맨발로 거닐어라./ 서 있지 말고 걸어라/ 주머니에 들어올 낱말들의/ 보상을 생각하지 말고/ 거닐리우스여/ 니힐리스무스여/ 밟은 땅마다 붉은 꽃을 피워라/ 차라리 옷마저 벗으면/ 노란 호박꽃이라도 필까// * 거닐리우스: 고려대학교 안암동 캠퍼스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베회 하는 턱수염 덥수룩한 한 중년의 사내에게 붙여진 별명. 최근에는 MBC TV에 고려대학교의 명물로 소개된 적이 있음.

다람쥐길 / 김재혁
비가 오지만 일단 창문을 열고서 안개에 싸인 산을 바라보며 다람쥐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길은 전설을 향해 나 있다고 하면 조금은 과장이 되겠지만, 은유는 더 큰 시적 명료성을 위해 현실을 흐리게 만든다, 라고 한 어느 상징주의자의 말을 생각하면 그리 나쁜 과장도 아니다.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 도로표지판 없이 만든 길이 다람쥐길이다. 굳이 현실에서 찾자면 안암동 고려대 본관 뒷길이다. 1970년대를 살던 다람쥐들이 이용하던 길을, 학생들이 더 빠른 길을 개척하기 위해 잠시 다람쥐들과 공동으로 이용하다가, 이제는 옛 다람쥐들은 후사를 북악산 산기슭에 남긴 채 전설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현재의 넓어진 길 입구에는 게으른 고양이 두서너 마리가 수업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킨 학생 한둘과 함께 벤치에 죽치고 있는, 말하자면 이름만 다람쥐길이다. 다람쥐길 안쪽에는 푸른 등불들이 살고, 짙은 어둠이 은밀하게 몸을 씻고 있다고 한다면 이 또한 과장이겠지만, 고요가 노랗게 피어 있는, 검은 빗줄기 속에 천국의 음향이 흠뻑 젖어 있는, 인생의 공휴일 같은 곳을 그리워한다면, 가만히 다람쥐길이라고 되뇌어보라. 비가 오더라도 안개의 냄새를 맡기 위해 언제나 창문을 열고서 전설의 안쪽을 향해 걸어가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