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 이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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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11.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금상

물레 위 흙덩이에 온 마음이 놓였다. 미끄덩거리고 부드러운 촉감에 흙덩이를 불끈 잡는다. 손가락 사이에서 미어터지듯 삐져나와 버리는 것이 아쉬워 남은 것을 그러모아 다시 주먹을 쥐어본다. 시원하고 차진 흙의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

그릇을 만들기 위해 질흙을 잘 반죽해 떼어 놓은 덩어리를 ‘꼬박’이라고 부른다. 두드리고 비비고 매만지며 썰질 할 땐 무엇을 만들지 기분이 들뜬다. 조형토를 주물러 도톰한 사발이든 너른 접시든 얼추 형체가 드러날 땐 설렘도 커진다. 옆자리의 도공은 빠르게 돌아가는 물레의 속도를 잊은 듯 혼신의 기를 모아 자유자재로 형태를 넓혀간다.

꼬박은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이다. 어릴 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꿈을 꾸었던 건 성정이 말랑했기 때문이다. 화가도, 성악가도, 자선사업가도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시절에는 부잣집 맏며느리를 꿈꾸었지만 현실은 그냥 맏며느리가 되었다. 원하는 대로 이룰 수는 없어도 와글거리는 불씨를 품은 삶은 설레고 호기심이 샘솟는다.

나이가 들면서 순환되지 않는 몸의 구석은 돌이 되어간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마음도 굳어간다. 마침내 도자기처럼 완전한 정물이 되어 삶을 마감하는 것이 우리들 생의 수순과도 같다. 어깨가 석회화 되어 수술을 받은 형부도, 침샘에 돌이 생겨 치료를 받은 동생도 끝내 굳어가는 것을 막아내진 못했다.

나를 ‘자기야’라고 불렀던 친구가 있었다. 우린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며 운동을 하고 밥을 먹으며 소소한 것들을 많이 나누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내 옷차림이며, 우리 집 식탁의 위치까지도 바꾸기를 바랐고, 나는 내 생각과 가치관을 주입시키려고 애썼다. 누구도 상대방이 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가깝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강요하기 바빴다. 섭섭함과 갈등이 깊어지고 마침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땐 등을 돌렸다. 왜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토록 서로를 정형화하려 했을까?

완성된 도자기끼리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품어주고 담아낼 수는 있어도 스며들 수 없기 때문에 생동감이 없다. 유약을 바르고 천 도가 넘는 불 속에서 한 방울 마른 물기조차 털어내고서야 굳어진 때문일까. 자기만을 고집하는 도자기는 스스로 깨져 버릴지언정 작은 탄력도 용납하지 않는다. 혹여 부서지더라도 이징가미나 사금파리무덤에서 흙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타인에게는 아집이라 폄훼하고 스스로는 신념이라 포장하면서 자기 안에 갇힌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도의 짜이잔盞은 한 번만 굽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짜이는 언 몸을 나른하게 풀어주지만, 마시고 난 뒤엔 미련 없이 찻잔을 땅바닥에 던져 버린다. 잔은 깨지고 부서지며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 꼬박이 될 준비를 한다. 티베트 승려들은 색을 입힌 모래알로 공들여 만든 만다라를 완성된 순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지워버린다. 현상에 집착하거나 형상에 고정되지 않겠다는 것이리라. 짜이잔과 모래 만다라는 영원을 꿈꾸는 인간에게 삶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뇌 과학자들은 책을 읽지 않으면 학습기억의 자리에 신념이 들어찬다고 한다. 그것을 ‘신념기억’이라 부른다. 부끄럽게도 그토록 정치나 종교 같은 이야기로 핏대를 세운 까닭이 있었구나 싶다. 검증되지도 않은 일에 목소리만 커졌던 나를 돌아본다. 뇌는 습관이라는 틀을 벗어나기 어렵게 설계되어 생각, 고정관념을 바꾸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하지만 뇌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도전하도록 디자인 되었다고도 한다. 아직은 꼬박이 될 기회가 열려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흙은 모든 것의 바탕이지만 누구나에게 밟히기만 한다. 오히려 다져질수록 모두를 떠 받쳐 준다. 그런 흙이 ‘상선약수上善若水’인 물과 뒤섞였으니 꼬박은 태생부터 성인군자인 셈이다. 누군가가 주무르는 대로 규정되지 않는, 미래로의 격렬한 약동이 언제나 그의 내면을 흐른다. 꼬박을 만지는 도공은 흙의 성질에 맞게 무엇을 만들까 고민한다. 흙이었다가 꼬박덩이가 되었다가 어떤 무궁한 모양으로 변하며 가능의 희망을 보여준다. 그가 자신을 고집한다면 침대 틀을 맞추어 놓은 프루크루테스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세상의 어머니는 흙을 빚는 도공과 닮았다. 아기는 아장아장 걸음마도 하기 전에 밖을 향해 나아가는 본성을 타고났다. 나는 아이들을 산과 들판으로 이끌었으며, 알게 모르게 농업학교로 진학시키기 위해 포석을 깔았다. 어린 꼬박들은 가끔씩 저항하면서도 깔아 둔 길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왔다. 엄마가 씌워준 차안대에 가려 오히려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못 박은 게 아닌지 걱정도 됐다. 하지만 남과 다투어 이겨야만 자신을 빛내는 경쟁보다는 땅에서 흙과 더불어 일하는 공부가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가끔 다른 사람과 같은 길을 가도록 했다면 지금 쯤 아이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그려본다. 돌아가고 엎어지고 주저앉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게 우리들의 운명이고 인생이니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꼬박은 꼬집고 두드려 맞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방짜유기도 망치로 단련하여 놋그릇이 되고, 달궈진 쇠도 수많은 담금질을 통해 보습으로 탄생한다. 국어사전에는 어떤 상태를 고스란히 그대로 지속하는 모양을 일컬을 때 꼬박이라고 쓴다. 옛 도공 가운데 선지자가 있어, 무궁하게 변화하는 흙덩이를 꼬박이라 이름 지은 것은, 부지런히 치대고 주무르지 않으면 도자기처럼 굳어버리기 때문은 아닐까.

온 종일, 물레 위에서 매만지고 다듬은 꼬박은 널찍한 사발로 태어났다. 호수 같은 그 안에 내가 이루지 못한 것, 이루고 싶은 꿈들을 다 담을 수 있을 것 만 같다. 그러나 완성된 순간 꿈은 사라지고 마니 사발도 원래 내가 소망했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나의 꼬박은 꽃이나 벌레, 혹은 강물이나 바람, 구름이 되고 싶었는지도.

옛날 사람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꾸만 아이들에게 훈수 두려는 노파심이 든다. 그건 또 다른 꼬박의 꿈을 방해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본능인 양 꿈틀거린다. 세월을 밟아오니 옹고집 같이 굳어진 나를 만난다. 그릇 속에 담긴 물은 제 모양대로 형태를 달리하지만, 정작 도자기로 굳어지면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그릇들이 많다. 그런 도자도 한 때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꼬박이었다는 사실을 기억이나 할까.

나는 자식들에게는 엄마이고, 남편의 아내가 되고, 텃밭에서는 농부로 탈바꿈을 한다. 몇 개의 고정된 틀 속에 갇혀 지내왔지만, 넓은 세상에서 끊임없이 변태하는 삶에 대해 호기심도 끓어오른다. 이제라도 멈추지 않고, 더 이상 완고해지지 않으며, 고착되지 않기 위해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주물러야겠다.

다시 꼬박이 되려고 한다.

수상소감
주왕산에 화려한 단풍이 내려앉을 때, 주산지의 왕버들은 이파리 몇 개를 붙잡고 물에 반쯤 잠긴 허리를 굽어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겉치레를 아무리 해 본들, 떨어지는 낙엽 같기만 한데, 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되묻게 됩니다. 코로나로 세계가 불에 덴 듯, 그 난리를 치르는 동안, 술자리를 줄이고, 모임을 미루면서 만나게 되는 세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앞으로는 외연의 확장보다 내면으로의 여행이 삶을 풍요롭게 할 것만 같습니다. 문학은 예술의 근본으로써 나 자신을 끊임없이 ‘꼬박’이 되도록 격려해 줍니다. 어쩌다가 창조적인 삶을 살게 되었는지 이끌리듯 여기까지 왔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두 손 모으고 깊이 감사드리게 됩니다. 수확의 계절에 결실을 보니 기쁨이 흥건합니다. 함께 행복해하는 가족과 글동무들의 얼굴에 철모르는 꽃이 핍니다. 많은 작품들 속에서 제 글을 건져 올린 눈 밝은 심사위원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 가을에 어울리는 문학 잔치를 마련한 경북일보관계자분들과 알게 모르게 엮여서 인연이 된 모든 분들께 존경심을 느낍니다.
이정화 약력 : 2018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 대상 수상, 2018 경북문화체험 수필 대전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