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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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11. 19.

하영 시인
1946년 경남 의령 출생하고 마산여고, 창신대(昌信大) 문예창작과 졸업하였다. 1989년 《문학과 의식》에 「미뉴에트」 외 2편이 당선되어 등단. 이 당선 신인상 공모詩(1989), 2000년 《아동문예》에 동시 「애기똥풀꽃」 외 2편으로 아동문예문학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 저서로는 시집 『너 있는 별』, 『빙벽 혹은 화엄』, 『자귀꽃 세상』, 『햇빛 소나기 달빛 반야』와 동시집 『참 이상합니다』, 『꽃밥 한 그릇』, 인도순례기 『천축 일기』가 있다. 남명문학신인상, 아동문예문학상, 경남아동문학상, 마산시 문화상, 경남예술인상(공로상), 시민불교문화상(문학상), 2016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큰창원한마음예술제 올해의 작가상 등을 수상하였다. 경남여류문학회장 역임, 한국아동문예작가회, 경남현대불교문인협회, 경남문인협회, 경남문학관, 경남아동문학회, 마산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프리즘문학회 회원

 




작은 날개가 젖는다 / 하영
실상사 대웅전 처마 끝에는/ 등푸른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 그의 슬픔이 너무 맑고 고와/ 자세히 살펴보니/ 아가미가 움직인다/ 지느러미도 움직인다/ 이곳에는 강도 바다도 없는데/ 쉴새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다/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너의 바다는/ 아무 것도 품지 말라고 으름장을 내면서도/ 시퍼런 가슴을 열고 내려다보는/ 저 가을 하늘/ 너는 저 높은 하늘로 날아가서/ 출렁이는 바다에 몸을 던져라/ 갸날픈 네 등에 실한 날개 돋아나도록// 맑은 하늘 아래 비가 내린다/ 마주선 장승이 가을비에 젖는다/ 천년 만년 젖던 그대로 젖는다/ 나도 돌이 되어 함께 젖는다/ 아. 내 작은 날개도 젖고 있구나//

아지랭이 / 하영
굳게 닫힌 창을 열고, 내 방에 들어와, 머리를 쓰다름고, 볼을 비비고, 입술을 포개어 취하게 하더니, 슬그머니 손목 잡아 끌고, 봄 들판에 나와// 나처럼 가벼이 날아 보아라/ 나처럼 부드러이 살아 보아라// 개울에서/ 풀밭에서/ 그리고/ 허공에서//

600살 은행나무 / 하영
남문에서 대조루로 올라가는 왼쪽 길가/ 육백 살 넘은 은행나무 아래서/ 꽃은 피워도 열매 맺지 못하는 사연을 듣습니다.// 열 가마의 은행을 세금으로 내던 것을/ 철종시대 들어와서 스무 가마 내라 하니/ 걱정이 태산 같은 전등사 스님들/ 지혜롭고 도력 높은 추송스님 찾아가/ 하소연을 하였다네// 한 걸음에 달려오신 백련사 추송스님/ 은행나무 아래에 거적을 깔고 앉아/ 사흘 밤낮 간절하게 기도를 하시더니/ "이제, 이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오."/ 추상 같은 말씀에/ 갑자기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천둥 번개 폭우가 쏟아졌다네// 놀란 대중들 정신을 차려보니/ 기도하던 스님들은 홀연히 사라지고/ 그 후부터 은행이 열리지 않았다네// 하늘이 노한 거라고,/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탐욕은 또한 그칠 줄을 모른다고/ 등 뒤에서 누군가 혼잣말을 합니다//

할미새 / 하영
할미새는 시를 모른다/ 시를 몰라도 그리움을 안다// 그리움을 아는 것은 시다/ 영혼이 맑게 우는 것은 시다/ 천둥 번개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다// 노랑 할미새의 울음을 보던 날/ 달맞이꽃을 생각한다/ 달맞이꽃이, 칠레의 환페르난세스 점을 그리워하듯/ 가브리엘 미스트랄이나 파블로 네루다를 그리워한다// 달맞이꽃의 서원이/ 달에 닿아 별에 닿아/ 서로의 눈물을 나눠 마시며/ 월견초나 월하향, 혹은 야래향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정겨웁게 서로를 부르듯/ 채송화꽃이, 꾀 11만 씨앗으로 이 땅에 와서/ 색색의 꽃잎으로 기쁨을 나눠주듯/ 눈물은 내 삶을 든든한 뿌리로 자라게 한다/ 절망을 먹고도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면 /절망은 더 없는 자양이 된다// 절망의 절망에게 할미새를 보낸다/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도/ 노랑 할미새나 알락할미새를 날려 보낸다/ 그리움을 하는 것이 바로 시가 되는 밤//

명화 한 점 / 하영
투명한 유리잔에 말린 감국 서너 송이 넣고/ 팔팔 끓여 뜸들인 물을 붓는다/ 따끈한 물에 기분이 좋아진 감국/ 살며시 옷고름 푼다// 드디어 꽃잎 사이로 좁다란 오솔길 열리고/ 갈래머리 소녀 깡충깡충 뛰어간다/ 경쾌한 뜀박질 소리에 영사재 솟을대문 스르르 열리고/ 옥색 도포자락 사이로 흘러나온 할아버지 사서삼경/ 청아하기도 하다// 신식 불파마 머리를 옥양목수건으로 가린 어머니/ 모락모락 김나는 고구마/ 함지박 가득 담아 부엌에서 나오신다// “에미야 해 지기 전에 국화를 따거라/ 내일 아침 서리 내리것다”// 뒤란의 국화꽃 일일이 따서/ 대청마루에 늘어 말려 꽃베개 해주시던 어머니/ 우리 육 남매 꿈길마저 행복했던/ 내 마음속 환한 벽에 걸어둔 가장 따뜻한 그림// 오랠수록 더 환해지고 또렷해져서/ 외롭고 서러울 때마다 꺼내보는/ 명화 중의 명화 한 점.//

백련사 가는 길 / 하영
동백은 잘 자랐더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붉은 꽃망울을 다복다복 수놓고 있었습니다/ 조촐하고 단아함 속에서 품어내는 숨은 향기는/ 화엄의 입구를 환히 밝히고 있었습니다// 치맛자락에/ 그리움 한없이 풀어/ 매화를 그리고 새를 그리던 사람과/ 소곤소곤 정담 나누며/ 함박눈 두텁게 껴입고/ 강진 백련사 가는 길// 마음으로만 마신/ 작설차(雀舌茶) 한 잔/ 참 따뜻하고 향기롭습니다//

운주사에서 -원은희 시인에게 / 하영
오늘은 이곳에 머물기로 하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따뜻한 미소로 반겨주는/ 이쁜 손길에 머물기로 하네// 믿음과 믿음/ 서원과 서원으로 탑을 쌓아/ 저 먼 별에까지 닿고자 했던,/ 천불 천탑으로 징검다리를 놓아/ 미륵의 나라로 가고자 했던,/ 이름없는 민초들이/ 한 단 한단 소망을 쌓아올린 이곳에/ 머물기로 하네// 저 탑을 딛고 가면/ 등 돌리고 돌아서는 마음 밭마다/ 바라밀의 꽃씨를 뿌릴 수 있으리/ 그리하여 마침내 불국토에 닿을 수 있으리// 나 오늘 이곳에 머물러/ 돌에서 자고 돌에서 깨어나고 싶네//

들풀에게 / 하영
한때는/ 꽃이 되고 싶었다// 사막의 꽃처럼/ 뒤틀린 아픔 속에서도/ 살면서 만나는 고난도/ 진한 향기가 된다고 믿었다// 꽃으로 살아갈 수 없는/ 얼어붙은 계절에도/ 홀로 일어서는 깃발처럼/ 밤새 눕지 못하는/ 생의 투지/ 화려한 이름 하나/ 욕심 내지 않고도/ 그대 삶이/ 꽃보다 아름답다/ 실은 눈물 나게 향기롭다//

석류 / 하영
곡차 한 사발에/ 구름과 바람을 잘 비벼/ 마시고// (허물이 벗겨진/ 가을 하늘을 향해)// 파안대소破類大笑하고 있다// 낮술도 저쯤 되면/ 품격이 절로 높다//

물매화 첫사랑 / 하영
오랫동안,/ 석간수 흐르는 작은 연못에/ 제멋대로 뛰놀던 은어 한 마리/ 저문 강 저편 바다로 내몰았습니다// 물길이 잦아져 고요할 때까지/ 고요와 고요의 경계가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가슴을 쓸어내리며 바라보았습니다// 오랜 시간 흐른 지금에도/ 물매화 꽃그늘 수시로 드나들며/ 비늘을 번득이는 은어 한 마리//

작약이 가득 피어 있던집 / 하영
무너진 토담 옆/ 깨어진 돌절구가 쓰러져 있다/ 강아지풀이/ 그쪽을 향해 머릴숙인다// 거미줄애 매달린 빗방울들이/ 무지개를 껴언은채/ 달개비돛위에 떨어진다/ 그옆에/ 검정고무신 한짝 엎어져 있다/ 그속으로/ 어린민달팽이 느릿 느릿 기어간다// 마음자리 은밀한 곳에 꼭꼭 숨겨두고/ 사무치게 외로울때마다/ 조금씩 꺼내보며 웃음짓는/ 간혹/ 따뜻한 아랙목에 등 붙이고/ 아무렇게나 누워/ 깊은잠에 빠져도 좋을/ 그리움 가득한 집// 고요하던 마음끝자락/ 잠시흔들린다//

엉겅퀴 꽃 / 하영
저 무덤 가/ 웬 피, 저리 붉으냐// 골 깊고/ 고요 깊은 산수유마을/ 내 마음 문득, 물소리 딛고/ 고요를 딛고/ 그 속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행복해 지려는데// 소리 없이 우는 사람/ 왜 저리 많으냐/ 그 울음/ 왜 저리 붉고/ 아름다우냐//

꽃등 -와룡산 시편 2 / 하영
삶의 돌무더기를 비껴/ 소나무 사잇길을 오른다/ 기암절벽을 오르며/ 낭떠러지 아래로/ 내가 묶은 끈들을 풀어준다// 능선마다 봉우리마다/ 저마다의 불빛으로 찬란하다/ 산수유꽃등을 켜들고 있는 사람/ 고산산부추의 눈물로 눈을 씻는 사람/ 이팝나무 가지로 귀를 후비는 사람/ 산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 오늘 하루 등이 따뜻하다// 오르는 길은 달랐어도/ 한 곳에서 다시 만나/ 꽃등을 켜는 사람들 곁에 서서/ 내 꿈의 등불 하나/ 조심스레 켜본다//

가을 周王山 / 하영
나 이제사 알겠네/ 상처와 상처가 어울리면/ 깊은 상처가 더 깊은 상처를 끌어 안으면/ 따뜻한 이웃이 되고 정겨운 마을이 되는 것을// 절벽을 오르고 오르다/ 그대로 선혈을 쏟고 마는/ 담쟁이 덩굴 그 붉은 울음 위에/ 영혼이 맑은 가을 물소리가 머물다 가네/ 늦가을 잘 익은 햇살 한 줌도 머물다 가네// 잘 아문 상처는/ 여운이 길어 오래 남는 징소리처럼/ 따뜻한 노래로 오래 오래 남을 수도 있다네/ 산/ 첩/ 첩// 단풍 단풍 단풍//

이상한 어른들 / 하영
보글보글 끓는 된장국을/ 후루룩/ 마시면서/ 그 국물/ 참 시원하구나// 뜨거운 찜질방에 비스듬히 누워/ 숨을 몰아쉬며/ 땀을 흘리면서도/ 아이구/ 참 시원하구나//

빙벽 혹은 화엄 / 하영
산그늘에 숨어 살던 쑥부쟁이의 웃음소리/ 빙벽에 달라붙어 있다// 눈을 크게 뜬다/ 눈이 활짝 열린다/ 하반신이 썩어 시꺼멓게 흐르던 물줄기들/ 은빛으로 아름다이 갇혀 있다/ 상처투성이의 위벽들도 비장하게 꿈틀댄다/ (흰 빛은 모든 빛의 죄를 다 용서하는구나)// 산비탈 저쪽에서 쫓겨온 바람들이/ 꽝꽝꽝 못을 친다/ 못을 밟고 올라선다/ 새 숨소리 손끝에 묻어난다// 물이면서 불, 불이면서 물인/ 이 우주의 먼지 사이로/ 빙벽에 달라붙는/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미세한 가루가 된 내 물소리//

달빛 반야 / 하영
소나무가지에 걸린 달빛으로/ 정갈한 옷 한 벌 지어/ 숨 멎을 듯 그리울 때,/ 마음이 그대에게 가자고 할 때마다/ 꺼내 입으리// 그 마음길,/ 댓잎에 사운대는 바람소리/ 산짐승 울음소리 발자국소리는 물론/ 풀벌레의 숨소리까지 고이 싸서/ 아스라한 하늘 저쪽​/ 아득한 하늘길에 던져두리// 저 옷 한 벌,/ 추운 이들/ 바라만보아도 참으로 따뜻해지리//

주머니 속의 섬 / 하영
하동포구 모퉁이를 돌아 19번 국도,/ 섬진강 모래톱에 서면/ 나는 문득 바다가 된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섬 하나 꺼내 놓으면/ 바라만 보아도 가슴 아려 눈물 나는 윤슬,/ 함께 어울려 반짝이는/ 가리비 조가비 매생이들이 너나들이 하며/ 물보라꽃 높이높이 피워올린다/ 이윽고 마흔 아홉의 아버지/ 향기로운 윤슬, 밟으면 나타나신다/ 사랑에도/ 발효의 시간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고/ 잊는 것에도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시던/ 아버지,/ 환하게 웃으시며 등 내미신다/ 가까이 다가오는 수평선 자락 들어 올리면/ 작은 섬들이 파도소리를 내며 줄줄이 올라오고/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등 내어주고 싶은 낮은 산들도/ 졸망졸망 뒤따라온다//

이어도 봄바다 / 하영
가파도 청보리밭 단숨에 지나/ 마라도 살레덕 선착장에 내려/ 바람이 오는 쪽으로 두 손 모으며// 깨끗이 씻어 말린 차돌멩이에/ 이름과 날짜를 또박또박 쓰고/ 색색의 꿈을 적고 소망을 적어/ 네게로 가는 디딤돌을 놓는다/ 디딤돌 하나하나 징검돌 되고 징검다리 되라고/ 한마음 한뜻으로 탑을 쌓는다// 거친 바다 품에 안겨/ 밀려가서는 또다시 밀려오고/ 오는 듯하다가 미련 없이 달아나는/ 수천수만 그리움의 물결로 온몸 적시며/ 나는 나를 그 속에 잠시 집어던졌다// 내게로 오는 시간 떠나는 시간/ 기쁨으로 맞이하고 배웅하면서/ 샹그릴라 향해 가던 이들과 함께/ 유토피아 향해 발길 재촉하며/ 고마움 가득한 집짓기를 위하여//

파도에게 / 하영
보물선의 손풍금 소리를 싣고 왔었다/ 암세포처럼 번지는 그리움을 싣고 왔었다/ 겹동백 붉은 선혈에 젖은/ 저녁놀을 싣고 왔었다// 오늘은 또/ 눈부신 이별을 싣고 왔구나// 내게 무엇을 주려느냐/ 내게 무엇을 주려느냐/ 또 무엇을 주려느냐// 주었던 그 모두를 거둬 가거라/ 나를 떠나려는/ 순백의 영혼마저 싹 쓸어 가거라.//

시인 이육사 / 하영
섬나라 왜인들에 빼앗긴 조국/ 우리들 말과 글 이름마저 앗기고/ 씻을 수 없는 겨레의 한/ 심장 깊숙이 새겨놓았다/ 민족시인 이원록* 가슴 속에도/ 가시지 않은 응어리/ 울분 가득하여 몸부림치다/ 이름도 바꾸었다/ 수인번호 264로/ 젊은 피는 서릿발 타고와/ 시가 된 광야 청포도 교목/ 형장의 칼날 아래서도 굴하지 않던 젊은 기백/ 옥중에서 이슬로 사라진 사십의 나이/ 영원히 잊지 못하는 그 이름/ 시인 이육사//
* 이원록: 이육사의 본명

(왼쪽)1934년 서대문형무소 수감당시 (오른쪽)1941년 북경으로 떠나기 전 친구들에게 준 사진. 출처:이육사문학관


원음圓音 / 하영
당신의 말씀은/ 길짐승 날짐승도 다 알아듣나니// 한 번 잠이 들면 천년 동안이나 잠자는/ 깊은 바다 조개도 다 알아듣고/ 꿈길에서도 색색의 구슬을 빚나니//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댓돌 위의 신들도/ 스스로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나니// 말이 끝난 곳에서 말없음의 말씀으로/ 해 뜨고 달 뜨고 별이 뜨고/ 다시 해가 뜨나니// 그 안에서도/ 생각의 잔가지를 쳐내지 못한 채/ 가슴이 먼저 달려가지도 못한 채/ 향기로운 무늬로/ 오래도록 남고 싶어 하나니// 그 안에서/ 세상의 안부를 묻고 싶어 하나니//

분반좌分半座 그늘 아래 / 하영
기축년 윤오월/ 황포돛배 타고 낙화암 간다/ 마음 급한 코스모스 앞세우고/ 틈새마다 끼어 있을 부여융의 허리끈 찾으러 간다/ 고란수 한 잔, 청해 달게 마시고/ 말없는 백마강, 말없이 내려다본다/ 의자왕도 태자 융도 일만여 명의 백성과 소정방도/ 아득한 저쪽 세월로 봉인된 시간 속에/ 말없이 묻히고/ 흔적 또한 찾을 길 없다/ 황포돛배에 몸 싣고 구드래 나루터로 돌아오는 길/ 온갖 설움들 모여/ 향기롭게 꽃을 띄운 강물 위에/ 햇빛이 마른자리를 내어 준다/ 그 옛날 그 분이 다자탑전(多子塔前)에서/ 흔쾌히 자리를 내어 주시듯/ 그리움의 발자국 수없이 난 길을 걸어/ 궁남지 연밭길 에돌아 나오니/ 하얀 꽃잎마다 인욕선인이 가부좌 틀고 앉아 계신다/ 그 분이 내어주신 분반좌(分半座) 그늘 아래/ 안타까운 마음길만 내려놓은/ 기축년 윤오월//

3월이 / 하영
―민이야 노올자// 봄바람이 창문을/ 살며시 두드렸다// 산수유나무들이/ 옹알이를 시작하고// 돌담에 걸터앉은 개나리들/ 소리 내어 웃는다고// ―나랑 노올자/ ―나랑 노올자/ ―내 손이 따뜻해졌어// 살며시 살며시/ 창문을 두드린다//

나의 오월, 폴리트비체 / 하영
전나무 삼나무 너도밤나무 사이를 사쁜사쁜/ 내게로 오신다/ 내 보폭만큼씩 정답게 다가오신다.// 그 동안 열심히 살았다고, 참 수고 많았다고/ 우렁찬 목소리로 칭찬해 주시며/ 열여섯 호수 위에 은빛면사포를 끝없이 펼쳐놓고/ 마로니에 꽃 한 송이 상으로 주신다// 일흔 해를 살면서/ 단 하루도 완전한 내 것이 아니었던 날들을/ 온전히 받아주시는 그의 품에 안겨/ 사나흘만이라도 함께 살고 싶다// 무지개송어들이 청록색 요정을 따라/ 에메랄드그린(Emerald green) 물결 속으로 사라진다/ 핑크빛 줄무늬, 무지개 색 비늘도 함께 사라진다//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던/ 크고 작은 호수 층층계단을 돌며 왈츠를 추고 싶었던/ 2016년, 나의 오월은/ 온갖 경계를 허물고 함께 하고 싶은 맘 꾹꾹 눌리며/ 나무판 디딤돌 사이로 빠져나가고/ 높고 낮은 100여개의 폭포소리만/ 세상의 한나절 휘돌아 내 등을 또닥인다//

그 해, 팔월 / 하영
뜨거운 황토밭에서/ 팥알, 녹두알이/ 타악 탁/ 불꽃의 껍지를 깨고/ 스스로 쳐 놓은 울타리를/ 뛰어넘고 있었다// 꼬이고 뒤틀린 사슬을/ 뜨겁게 담금질하여/ 시퍼런 바닷물에 내던지고 있었다//

입춘날 아침 / 하영
똑똑똑똑/ 부지런히 달려온 따슨 바람이/ 여린 손으로 창을 두드린다// 열어줄까 말까/ 열어줄까 말까// 와락 달려들어 볼을 비비고/ 입 맞추면 어쩌지?/ 내 마음 마구 흔들면 어쩌지?/ 망설이는 사이// 아젤리아 붉은 입술 오물오물거리고/ 애기 수선화는 엉덩이를 슬쩍 들어올린다//

봄비 소리에 / 하영
영춘화 꽃송이 기지개를 켜고요/ 매화꽃이 하품을 시작하고요/ 물풀 속 피라미도 지느러미 흔들고요/ 할머니 기침 소리 더 일찍 잠을 깨시고/ 누나의 눈시울은/ 수선화 꽃잎처럼 촉촉이 젖었습니다//

참 좋은 친구 / 하영
귀에다 입을 대고/ 소곤대지 않아도/ 코에 코를 맞대고/ 비비대지 않아도// 나를 보고 웃고 있는/ 네 얼굴을 보면/ 나는 네 마음을 다 알게 된다/ 네가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듯이// 그럼 그럼 그렇지/ 우리는 좋은 친구/ 참 좋은 친구니까//

안개와 는개 / 하영
다 버리고 가라 하였지만/ 소슬소슬 내리는 빗속에서/ 제멋대로 자란 머위 잎을 따 배낭에 넣네/ 다 놓아버리라 하셨지만/ 부도탑 아래 보들보들한 야생차 새순/ 서너 잎 따서 맛을 보네/ 파스텔로 그려놓은 듯 산빛은 부드럽고/ 비자나무는 안개비를 자욱하게 뿌리네// 다 버리고 가라 하였지만/ 일주문 기둥에 등 붙이고 앉아/ 달래 냉이, 취나물 돌나물을 파는/ 촌로의 굵은 주름살 속에 숨은/ 질곡의 역사를 마음 가득 담아 가네// 거친 손으로 빚은 한 그릇의 평안을/ 쑥털털이에 고명으로 얹어 먹고/ 일주문 안으로 들어선 나와/ 문밖에서 서성이는 나를 보네// 너와 나 사이/ 나와 나 사이의 간극은/ 비자나무와 치자나무 사이에서 비를 피하는 꽃과 꽃잎/ 용문사 기왓골을 오르내리는 산안개였네/ 삶과 죽음 또한 안개비와 는개였네//

소욕지족少欲知足 / 하영
쑥을 캔다/ 오래전, 화개장터 대장간에서 벼린/ 손때 묻어 반질반질 윤나는 칼로/ 달래 냉이 머위 씀바귀를 캔다// 연필 깎듯 정성껏 깎은/ 백양나무 칼자루에 꽂혀/ 너에게 기우는 내 마음자리만큼 굽은 칼로/ 내 피 만들고 내 살 만들려고/ 쏙쏙 머리 내미는 새 생명을 캔다// 쓴맛과 단맛의 행간 사이로/ 걸림 없이 드나드는 봄볕처럼/ 그 행간에 주저앉아/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 하면서/ 후회하고 뉘우치고 참회하면서/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기로 한다// 다 내어주고도/ 아직도 줄 것이 많이 남았다는 듯/ 온몸 잘렸어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한 봄나물의 소욕지족少欲知足//

늦은 저녁이 달다 / 하영
늦은 저녁/ 현관 앞 초코허브/ 눈빛 향기롭다// 고마워서,/ 숱이 많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귓불을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그 아이,/ 가진 향기를 몽땅, 내 손에 건네준다/ 그 손으로 먹는 늦은 저녁이/ 달다// 그래그래, 오늘은 네가/ 고단한 내 하루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말랑말랑한 스펀지다/ 칠흑의 어둠을 뚫고 나온 협궤열차의 기적 소리다/ 정성껏 등피를 닦고 심지를 갈아 끼운 램프 불빛이다// 달다, 혼자 먹는 늦은 저녁밥//

저녁강 / 하영
생각을 불러내는 바람 소리/ 생각의 단단한 몸을 푸는 물소리// 뒤에 뒤에 그 뒤에/ 물잠자리 날으고/ 너도 보고 있을 달 떠오른다// 등 뒤에서/ 누가 자꾸 네 이름을 부른다//

바삭바삭 가을 / 하영
햇볕이 바삭바삭/ 바람도 바삭바삭// 낙엽도 바삭바삭/ 채반 위 빨간 고추도 바삭바삭// 빨랫줄 그네 타는 내 바지도/ 바삭바삭// 남모르게 흘렸던/ 눈물과 슬픔들도/ 바삭바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