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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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11. 26.

김참 시인
1973년 경남 삼천포(현 사천)에서 태어났다. 인제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인제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 『미로 여행』, 『그림자들』, 『빵집을 비추는 볼록거울』이 있다. 현대시동인상, 김달진문학상 젊은시인상, 지리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인제대학교, 동의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지난여름 / 김참
천둥치는 날들이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슬레이트 지붕에서 빗방울이 끝없이 떨어져내렸다. 나무들은 흠뻑 젖었고 비 맞은 비둘기들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거실 피아노의 하얀 건반이 저절로 움직였다. 내 귓속으로 음악이 흘러들어왔다. 생선 뼈다귀를 문 검은 고양이들은 지붕과 지붕을 뛰어다녔다. 시계탑에서 열한시의 검은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비에 젖은 청년이 공원을 향해 힘껏 뛰었다. 나는 방에 드러누워 책을 읽었다. 천둥치는 날들이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나무들이 흠뻑 젖었다//

오늘의 날씨 / 김참
비가 내린다. 비는 건넛집 붉은 벽돌을 적신다. 천둥소리 울리고 벼락이 떨어지고 텔레비전 안테나에 매달려 있던 박쥐가 지붕으로 떨어진다. 고양이가 떨어진 박쥐를 물고 지붕 위를 뛰어다닌다. 다시 벼락이 떨어진다. 옥상 피뢰침 옆에서 괴성을 지르던 고양이 두 마리가 시커멓게 탄다. 비가 내린다. 커다란 미꾸라지들이 비를 타고 내려온다. 사람들이 양동이를 들고 나와 떨어진 미꾸라지를 주워 담는다.// 비가 내린다. 비를 피해 날아온 딱따구리들이 돌담 위에 내려앉는다. 가로수 위에도 건넛집 옥상에도 딱따구리들이 가득하다. 옆집 여자가 꽃무늬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온다. 사방에서 딱따구리들이 날아든다. 옆집 여자의 어깨에도 그녀의 머리에도 그녀의 꽃무늬 가방에도 딱따구리들이 날아와 붙는다. 딱따구리들이 그녀의 어깨와 그녀의 머리와 그녀의 꽃무늬 가방을 쪼아댄다. 옆집 여자가 쓰러지고 그녀의 가방이 바닥에 떨어진다. 비가 내린다. 죽은 아이를 업은 여자가 천둥치는 거리를 가로질러 간다.//

오후 풍경 / 김참
창가에 앉아 거리 풍경을 본다. 햇빛 받은 거리의 유리창과 지붕들 번쩍번쩍 빛나고 있다. 지붕들 사이로 보이는 강물은 은빛으로 출렁이고 물속을 돌아다니던 물고기들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연인들이 앉아 있는 둑 옆으로 화물을 실은 기차들이 덜컹덜컹 지나가고 기차가 지나간 하늘 위로 은빛 물고기를 입에 문 검은 새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간다.//

시간이 멈추자 / 김참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 건물들은 허물어지고 길들이 지워졌다. 시간이 멈추자 공중에 비탈길이 생겼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시간의 반대편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간의 반대편에는 달이 있었고 별이 있었고 둥근 기둥이 있었다. 두 마리 새가 기둥 위에 앉아 있었다. 기둥 밑에는 장작이 타고 있었다. 검은 치마를 입은 처녀들이 기둥을 향해 걸어왔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눈이 없었다. 코도 없고 입도 없었다. 그녀들은 기둥을 지나 나무 밑을 걸어갔다. 사람들의 머리통이 주렁주렁 매달려 붉은 열매로 익어가고 있는 나무 밑을 지나갔다. 나는 나무 뒤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어디선가 두 마리 개가 달려왔다. 여자들이 기둥을 향해 재빨리 달렸다. 시간의 반대편에는 달이 있었고 별이 있었고 두 마리 새가 기둥 위에 앉아 있었다.//

우리들의 낙원 / 김참
달빛 노랗게 쏟아지는 내 방 유리창엔 검은 치마에 검은 구두를 신은 여자가 거꾸로 매달려 있고 달빛 노랗게 쏟아지는 검은 길 옆 검은 자동차엔 검은 안경 검은 티셔츠의 여자가 앉아 있고 달빛 노랗게 쏟아지는 검은 하늘엔 검은 구름 검은 별 검은 새들이 날아가고 달빛 노랗게 쏟아지는 검은 바다 검은 돛단배엔 검은 리본 검은 눈썹 검은 눈동자의 여자가 앉아 있고 달빛 노랗게 쏟아지는 검은 들판 위로 길게 뻗은 검은 길에 쓰러져 있는 검은 군복 검은 총 달빛 노랗게 쏟아지는 검은 숲엔 검은 모자 검은 입술 검은 장갑 검은 권총을 든 여자가 서 있고 달빛 노랗게 쏟아지는 검은 숲 검은 달빛 아래 시커먼 침엽수들 몸을 흔들고 달빛은 자꾸자꾸 쏟아져 노오란 나비들을 만들어 내고//

대저를 지나며 / 김참
한때 이곳엔 양철지붕들이 늘어서 있었고 버드나무 그림자 드리워진 물길도 있었다. 버드나무 그림자로 덮여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물길은 깊고 어두웠지만 나는 고인 물위에 고요히 떠 있는 연두색 개구리밥을 바라보곤 했다. 물길 앞엔 시멘트 다리가 있었고 마을버스가 서는 오래된 가게도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도 버스를 타고 가다 물위에 고요히 떠있는 개구리밥들을 바라보곤 했을 것이다. 그녀가 물길 앞의 시멘트 다리와 오래된 가게와 늙은 나무들을 고요히 바라보는 동안 햇빛은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따듯하게 비추어 주었을 것이다.//

오즈로 가는 길 / 김참
1/ 나는 동화의 마을을 지나가는 주인공입니다. 마을의 집들은 깜찍하고 백양나무 잎들은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군요 아이들은 인형처럼 오똑하게 코를 세우고 걸어가지요 화물을 실은 검은 기차들 느릿느릿 지나가는 화요일 오후 철공소에서 쨍쨍쨍 공기를 가르며 퍼져나가는 망치소리, 들리나요 참나무 밑의 참새들이 모이를 쪼며 짹짹거리는 소리, 술집 옆 돼지우리에서 꿀꿀대는 새끼 돼지 젖 달라는 소리, 듣고 있나요 오래 전에 죽은 할머니가 손수레를 끌고 가며 우유를 사라고 부르는 노랫소리, 듣고 있나요? 내 얘기를 듣고 있나요?//
2/ 할머니, 음악의 가장 밑바닥엔 어떤 소리들이 있나요? 침묵이 있지. 아니예요 가장 밑바닥에서 울리는 소리들은 텅 빈 방을 가득 채워주는 걸요. 아니야 맨 밑바닥에는 어떤 소리도 없단다 추억과 노래, 사랑의 속삭임들도 언제나 바닥 아래로 가라앉는단다. 추억은 소리가 아닌걸요. 아냐 추억은 언제나 깊숙이 가라앉지 그건 너무 무거워 물고기처럼 낚아 올릴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누군가 추억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힘찬 새가 되어 날아가버리지 하늘로 날아간 허무한 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단다 새가 된 추억은 사라질 뿐이야//
3/ 부드러운 라디오의 음악 낮게 울려퍼지는 오후 지붕 위의 비둘기들은 한가롭게 졸고 있었지요 언덕의 백양나무 잎들이 무척이나 펄럭거렸고 곡마단의 어린 소녀 통나무에 앉아 분홍색으로 피리를 불었지요 나는 빨간 지붕에 누워 흘러간 노래를 불렀고 산꼭대기 구름은 수많은 양떼들을 만들어냈지요 개들도 축 늘어진 오후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오고 들새들은 진종일 짹짹거렸지요//

불빛환한 집 / 김참
길 건너 불빛 환한 집으로 간다 방문 열면 욕실이 있고 욕실 문 열면 거실이 있는 낯선 구조다 여기는 분명 내 집 같은데 왜 이리 낯선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저 하얀 얼굴의 여자는 또 누군가. 꽃가게에서 사온 꽃나무를 화분에 심는 동안 여자는 노랗고 탐스러운 꽃을 바라본다. 당신은 누구냐며 물으려하는데 욕실 문이 벌컥 열린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검은 얼굴의 여자가 협탁 위의 담배를 피우며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나라의 말을 건넨다 누구냐고 묻는 것 같다 하얀 얼굴의 여자가 창문을 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나라의 노래다 황당하다 나는 거실과 욕실의 방을 지나 길 건너 불 켜진 편의점으로 간다 길 한가운데 서서 불빛 환한 집을 돌아본다 두 여자가 화분들 늘어선 창문을 통해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길 건너 불빛 환한 내 집의 옆집에서 현관문을 열고 낯선 여자가 나온다 길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나를 향해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나라의 말로 소리를 지른다 무단횡단은 안 된다 하는 것 같다 편의점 문을 열고 나는 내가 늘 피우는 밤배 한 갑을 주문한다 편의점 주인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하얀 손가락을 들어 길 건너 불빛 환한 내 집을 가리킨다 내 집을 점령한 낯선 여자들은 당분간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

거울 속으로 들어가다 / 김참
밖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계속되어 너는 벽과 바닥과 천장이 모두 거울로 된 방에 숨고 말았다. 너는 끝없이 불어났다. 처음에 거울 밖의 너는 거울 속의 네가 여섯 명뿐인 줄 알았다. 그러나 너는 열두 명에서 스물네 명으로 계속해서 불어났다. 겨울 속의 그들은 네가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빨리 생겨났다. 너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거울 속 그들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네가 잠을 자기 위해 거울로 된 방바닥에 드러누우면 겨울 안 깊고 깊은 곳에 있는 그들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일 년이 지나자 달에서 날아온 비행접시들이 쉴새없이 지붕들 위를 날아다녔고 불길한 검은 새들이 들판을 가득 메웠다. 너는 거울 속에 있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바깥에서는 하얀 밤이 계속되었다. 하얀 밤 하얀 밤 하얀 밤들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좀처럼 잠들 수 없었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하지만 너는 거울 속에 있는 그들을 하나씩 잡아먹었다. 나는 이빨을 딱딱거렸다. 너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두려웠다. 마침내 너는 거울의 방에서 걸어나왔다. 그러나 나는 어두운 골방에 틀어박혀 흑백영화를 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건 길고도 지루한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볼 영화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하얀 밤에 자막이 내려왔다. 사람들과 동물들, 나무들과 물고기들의 길고 긴 이름이 천천히 내려왔다.//

구름 / 김참
구름, 내가 꽃향기 맡으며 계단을 내려갈 때 뒷산을 넘어가던, 구름, 내가 달리는 기차 타고 검은 터널 빠져나올 때 포도밭 위에 떠 있던, 구름, 내가 수초 사이 작은 물고기 구경할 때 저수지 잔물결 위에서 출렁이던, 구름, 내가 참외밭을 지날 때 강 건너 산자락에 걸려 있던, 구름, 미끄럼틀 타던 아이가 엄마 손 잡고 집으로 돌아갈 때 아파트 피뢰침 꼭대기에 걸려 있던, 구름, 내가 구멍 뻥뻥 뚫린 커다란 달을 보며 음악을 들을 때 밤하늘을 횡단하던, 구름//

연금술사 / 김참
연금술사의 집 밖 연못에는 악어와 뱀과 물고기들이 산다 연금술사는 작업실에서 낮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나 작업실 문을 발로 꽝 차며 졸고 있는 아내의 머리통을 후려친다 그의 아내는 깜짝 놀라 허겁지겁 달아난다 창밖에는 파란 나무 흰 나무들이 무섭게 자란다 연금술사의 솥에는 쇳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작업실 구석 갈색 항아리에는 녹색 뱀들이 꿈틀거린다 그는 냉장고 문을 열고 포도주를 꺼내 벌컥벌컥 마시며 항아리의 녹색 뱀들을 차례차례 쇠솥에 집어던진다 뱀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녹는다 그는 선풍기를 켠다 그의 아내가 들어온다 그녀의 바구니에는 풋사과가 담겨 있다 그는 사과 하나를 와작와작 씹어먹으며 그의 아내가 빈 항아리를 들고 나가는 것을 본다 그는 솥의 쇳물을 틀에 부어 금화를 만든다 그의 아내가 들어와 금화 한 닢을 들고 나간다 그는 사과를 다시 씹어먹는다 그의 아내가 항아리에 뱀을 담아 들어온다 선풍기가 회전을 멈춘다//

생각하는 묘지 / 김참
묘지는 항상 생각한다 즐거웠던 운동회와 여행과 폭약놀이의 추억과 사랑했던 사진 속의 여인을 돈을 벌기 위해 공장과 공사장을 전전했던 일들과 향기로운 샴페인과 달콤했던 입맞춤을 묘지는 항상 생각한다 신혼여행과 회갑잔치와 병원에서의 일들을 그리고 묘지가 눈을 뜨던 장례식의 설레던 순간들을 꽃다발과 흙더미들이 유쾌하게 쏟아지던 순간들을//

계단으로 이어진 복도들 / 김참
길을 따라 걸어도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데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걸고 있었네 모자 쓴 소녀가 잔디밭에 앉아 고운 노래 부르는 공원을 지나 나는 걸었네 어두운 유리창 늘어선 건물 안으로 들어갔네 흰 페인트로 칠해진 긴 복도가 끝없이 늘어나기 시작했네 유리창을 통해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네 수많은 계단으로 이어진 복도를 따라 검은 옷의 사람들이 힘없이 걸어다니고 있었네 창문들이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사라지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계단에서 복도로 복도에서 계단으로 어지럽게 얽힌 어두운 건물에 홀로 남아 나는 한 발짝도 앞으로 움직일 수 없었네//

임금님의 요리사와 40인의 도둑 / 김참
임금님이 포도주 두 병을 비웠을 때 주방에서 일하던 요리사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요리사의 며느리는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옷을 짜고 있었습니다 요리사가 구워낸 칠면조가 임금님 식탁에 올라갔을 때 요리사의 아내는 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잔치가 있는 이웃집에서 접시를 닦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의 요리사가 창고에서 포도주 병을 꺼내 쌓인 먼지를 닦고 있을 때 감옥에 갇혀있는 노름꾼의 큰아들이 죽었습니다 노름꾼의 큰아들이자 사촌오빠의 사위가 죽은 줄도 모르고 왕비는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술 취한 임금님이 식탁에 엎어져 코를 골고 있을 때 요리사의 막내딸은 아홉 번째 항아리를 열고 뜨거운 기름을 부었습니다 임금님이 잠꼬대를 하고 있을 때 요리사네 옆집에 사는 할머니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항아리 속에 웅크린 채 뜨거운 기름에 데어 죽었습니다 알리바바네 뒷마당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요리사가 휘파람을 불며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 요리사네 옆집 사는 할머니는 아들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고 요리사의 며느리는 골방에 틀어박혀 옷을 짜고 있었습니다//

도마뱀 / 김참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자를 따라 사거리 갈빗집에 갑니다 갈빗집 통유리에 회색 도마뱀들이 죽은 나방처럼 붙어 있습니다 마을 청년들은 고기타는 냄새 가득한 갈빗집 밖에서 맨손체조를 합니다 사거리 갈빗집에 앉아 낯익은 사람들이 저녁을 먹습니다 면사포를 벗고 밥을 먹던 여자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고 벌떡 일어납니다 활짝 핀 개나리 덤불이 있는 벽을 따라 뛰어가기 시작합니다 음악에 맞춰 맨손체조를 하던 동네 청년들이 여자를 따라 달리기 시작합니다 여자는 꽃무늬 벽지에 도마뱀들이 붙어있는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를 시작합니다 하얀 사기그릇에 야채스프를 담아 식탁에 올려놓습니다 동네 청년들이 숟가락을 들고 야채스프를 허겁지겁 퍼먹는 동안 도마뱀들은 네모난 식탁에 차려진 둥근 접시들과 접시 옆에 놓인 포크를 밟으며 돌아다닙니다 마을 청년들이 여자의 집에서 아홉시 뉴스를 들으며 녹차를 마시는 동안 천장에 붙어있던 도마뱀들이 식탁 위의 둥근 접시에 떨어집니다 갈비집 주인이 텔레비전을 끕니다 마을 청년과 여자와 도마뱀들이 사라집니다 통유리에 회색 도마뱀들이 죽은 나방처럼 붙어 있는 사거리 갈빗집을 나와 활짝 핀 개나리 덤불 아래를 걸어가는 동안 개나리 덤불에서 뚱뚱한 도마뱀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립니다//

선물 / 김참
나는 너에게 물고기를 주고 너는 그에게 꽃나무 화분을 준다 그는 옆집 여자에게 고양이를 주고 그의 옆집 여자는 네거리 꽃집 남자에게 나무인형을 준다 네거리 꽃집 남자는 밤무대 여가수에게 꽃다발을 주고 밤무대 여가수는 옷가게 주인에게 포도주 세 병을 준다 옷가게 주인은 총포상 여주인에게 검은 우산을 주고 총포상 여주인은 K에게 검은 권총을 준다// 내가 너에게 어항을 주면 너는 그에게 물고기를 주고 그가 옆집 여자에게 꽃나무 화분을 주면 그의 옆집 여자는 네거리 꽃집 남자에게 고양이를 준다 네거리 꽃집 남자가 밤무대 여가수에게 나무인형을 주면 밤무대 여가수는 옷가게 주인에게 꽃다발을 주고 옷가게 주인이 총포상 여주인에게 포도주 두 병을 주면 총포상 여주인은 K에게 검은 우산을 준다// 어느 비 오는 오후 나는 K를 만난다 검은 우산 쓴 K가 나에게 권총 한 자루를 준다 나는 권총을 들고 너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너는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그에게 전화를 한다 그는 옆집 여자에게 그의 옆집 여자는 네거리 꽃집 남자에게 네거리 꽃집 남자는 밤무대 여가수에게 밤무대 여가수는 옷가게 주인에게 옷가게 주인은 총포상 여주인에게 총포상 여주인은 K에게 전화를 한다//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K와 함께 너의 집 앞에 있는 나에게 다가온다 검은 권총을 빼앗는다 나는 수갑을 차고 비 내리는 철물점과 어둠이 내리는 네거리 꽃집을 지나 경찰서로 끌려간다 검은 쇠창살 안에 갇힌다//

사라진 집 / 김참
자고 일어나니 집이 없어졌다 집을 찾으러 정신없이 돌아다녔지만 어디에도 집은 없었다 놀이터에 앉아 모래를 팠다 모래 속에서 잃어버렸던 진공관 라디오가 나왔고 라디오 밑에서 첫사랑의 흑백사진도 나왔지만 아무리 모래를 파도 사라진 집은 찾을 수 없었다// 한참 모래를 파자 녹슨 철문이 나왔다 철문 안에는 빨간 맨드라미 핀 작은 집이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 보니 내가 태어나기 전에 함께 살던 가족들이 밥상 앞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철문을 열어젖히고 나오니 집 밖은 사막이었다 선인장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사막에는 둥근 비행접시가 있었다 비행접시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은 삽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나도 삽을 들고 땅을 팠지만 아무리 땅을 파도 사라진 집을 찾을 수는 없었다//

사막을 달리는 / 김참
김참 씨가 쓰는 시에는 사막이 나오고 낡은 자동차와 검은 망토 걸친 여자가 나오고 자동차 타고 사막을 달리는 김참 씨가 나온다 아니다 김참 씨가 탄 것은 자동차가 아니다 그가 탄 것은 사막을 달리는 늙은 타조다 아니다 타조를 탄 사람은 김참 씨가 아니라 검은 망토 걸친 여자들이다 아니다 훔친 타조를 탄 김참 씨가 사막을 여행하다가 달리는 자동차에 탄 여자들과 장거리 경주를 한 것이다 아니다 김참 씨가 탄 자동차는 달린 것이 아니다 그의 자동차는 사막에 갑자기 나타난 신기루 앞에서 고장으로 멈춰 서있다 아니다 자동차가 서있는 곳은 검은 선인장들이 끝없이 늘어선 오아시스 마을 어두운 숲속이다 아니다 이마에 뿔 달린 거인들이 묻힌 오래된 모래무덤 앞이다 아니다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이 있는 강변의 하얀 모래밭이다 아니다 햄버거 가게와 약국이 보이는 사거리 횡단보도 근처에서 뚫린 구멍을 통해 벽돌집 안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 검은 벽 앞이다 아니다 검은 벽 앞에 멈춘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늙은 타조다 검은 망토 걸친 여자들이 타조 위에 김참 씨를 태우고 사막의 오아시스 옆을 지나가다가 뿔 달린 거인들이 앉아 있는 벽 앞에 멈춘 것이다 아니다 타조가 멈춘 곳은 벽 앞이 아니다 선인장 숲에 버려진 낡아빠진 자동차에 멍하니 앉아 열린 창문으로 선인장 숲을 바라보는 김참 씨의 낡은 자동차 옆이다 아니다 기찻길과 도로가 교차하는 화장품가게 앞에서 귤과 사과를 파는 좌판 옆이다 아니다 김참 씨는 지금 시를 쓰고 있는 중이다 김참 씨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책상 앞에 앉아 사막에 관한 시를 쓰고 있다 김참 씨는 시를 쓰다 말고 김참 씨에게 신경질을 부린다 이것 보시오 김참 씨! 정말 답답해 죽겠소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시를 쓰고 있어야 하는 거요?//

 

너의 눈 / 김참
너의 눈에는 집과 유리창과 나무가 있고 커다란 염소의 젖을 짜는 여자가 있고 검은 하늘에 담긴 흰 구름이 있다 새들이 날아가고 자동차가 지나가는 너의 눈을 나는 오래도록 바라본다 너의 눈에는 어둠을 달리는 고양이가 있고 어둠을 밝히는 불빛들이 있고 피 흘리며 쓰러지는 영화의 주인공들이 있고 그들을 버리고 떠나는 검은 기차가 있다 기차가 지나가자 흔들리는 나무와 풀들이 있다 너의 눈에는 세계가 담겨 있다 너의 눈 속엔 너의 눈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내 눈이 있다 나는 너의 눈을 통해 내 눈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천장에 붙어있는 커다란 눈 / 김참
나무의자가 있는 그 집 마당 위로 햇빛이 환하게 쏟아진다 날씨가 너무 좋아 집에 있기는 싫었는지 그는 이불을 밀치고 일어나 옷장을 연다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뒤적이며 콧노래를 부르는데 옷과 옷 사이에서 검은 박쥐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 그는 너무 놀라 방바닥에 덜컥 주저앉는다// 창 밖으로 빠져나간 박쥐를 따라 정신없이 돌아가던 그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래진다 창고 옆 나무의자에 유령처럼 앉아있는 여자를 보고 그의 심장 뛰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둥글게 휘어진 나무들 아래로 바람이 불어가며 떨어진 낙엽들을 감아올린다// 그는 하얗게 질려 방바닥에 쓰러진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니 창 밖은 캄캄하고 하늘엔 붉은 별들이 둥둥 떠다닌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집안의 창문들을 잠그기 시작한다 화장실과 목욕탕 사이의 창문과 거실 구석의 작은 창문까지 모두 잠근다 방으로 돌아와 밖을 살펴보니 창고 옆에는 빈 의자만 남아있다// 방바닥에 누워 이불을 덮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일어나 마당을 바라보니 창고 옆 나무 의자에 누군가 앉아있는 것 같다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조심스레 잠을 청하지만 천장에 붙어있는 시퍼런 눈이 휘둥그래지는 그의 두 눈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간이역 / 김참
노란나비 날아다니는 하늘은 코발트블루. 그 위에 녹색 양떼구름 둥둥 떠가고 철도 레일 같은 검은 전선들이 코발트블루의 하늘을 양분한다. 하루에 한 번만 오는 기차는 전선이 늘어진 해변 마을을 향해 달리며 길게 기적을 울린다. 건물들 위엔 회색 지붕들 배처럼 떠 있고 지붕에 늘어선 화분에서 선인장들은 노랗게 꽃을 피운다. 벽돌과 벽돌 사이에서 창문들은 오후의 바다처럼 반짝이고 창문과 벽돌을 가르며 늘어선 검은 전선을 타고 기차는 느릿느릿 지나간다. 아이들은 나비처럼 들떠서 파란 물결 넘실대는 해변의 해당화 꽃밭 위를 팔랑팔랑 뛰어다닌다.//

운동회 / 김참
나는 바닷가 마을에 살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을엔 안개가 자욱한 날이 많았습니다. 짙은 안개를 헤치고 나는 학교로 갔습니다. 학교에 가는 동안 안개는 서서히 걷혔습니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따라 교문으로 들어가니 운동장엔 만국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나는 운동회를 하다 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강아지풀과 토끼풀을 밟으며 나는 냇가로 갔습니다. 냇물에 발 담그고 해질 때까지 피라미들과 놀았습니다.//

죽림동의 여름 / 김참
오래된 집터였던 돌담 옆에 밀밭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밀밭 가운데 깊고 푸른 웅덩이가 있는 줄은 몰랐다 돌담을 따라가면 삼나무 숲이 나오는 줄은 알았지만 삼나무 그림자 길게 드리워지는 우리 집 장독대 옆에 오래된 고인돌들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돌담을 따라 가면 개울이 나오는 줄은 알았지만 돌담 옆에 담쟁이로 덮인 우물들이 그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여름이면 동네 아이들이 돌담을 따라 개울로 올라가는 줄은 알았지만 개울가 큰 바위 밑에 하얀 뱀이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돌담에 하늘수박이 주렁주렁 매달릴 때면 돌담에 살던 금빛 새들이 밖으로 나와 하늘수박을 쪼아 먹었다 내가 작은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오며 콧노래를 부르면 돌담 옆에서 놀던 금빛 새들이 하늘로 솟아오르곤 했다.//

 

열대야 / 김참
파란 소가 골목을 돌아다니는 여름밤. 잠 못 드는 내가 파란 소와 함께 산책 나서면 잠들지 못한 사람이 틀어 놓은 음악 때문에 잠들지 못한 새들과 잠들지 못한 새들 때문에 잠들지 못한 풀벌레와 잠들지 못한 풀벌레 때문에 잠들지 못한 아기들. 잠들지 못한 아기 울음소리 아파트 창문 타고 흘러내리는 밤. 거리에 도열한 가로수 초록 잎 열풍에 조금씩 말라 가는 밤. 내가 파란 소 따라 건널목 건널 때 주황색 달이 커다랗게 떠올라 오렌지처럼 타오르는 밤. 그 열기 때문에 잠 못 드는 내가 파란 소와 함께 강변 모래밭을 횡단하는 밤.//

기억의 고집 / 김참
피아노소리 흐르는 창가에서 그는 탱자나무 초록 울타리 안으로 날아가는 참새를 본다 고개를 들어 두 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본다 벌써 두 시군! 습관적으로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며 그는 소파에 드러눕는다 가만히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진다//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고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그는 두 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본다 이런, 시계가 망가졌군! 그는 의자를 딛고 올라가 벽에 걸린 시계를 떼어낸다 쓰레기통에 고장난 시계를 던져버리고 모자를 쓰고 구두를 신고 시계를 사러 밖으로 나간다.// 현관문을 열자 그의 집 정원엔 전에 없던 가시나무들이 가득하다 별일도 다 있군!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문을 열고 집 밖으로 걸어나간다 그의 집 지붕에 줄지어 앉은 검은 눈의 까마귀들이 외출하는 그를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는 기지개를 켜고 검은 소파에서 일어난다 시계를 보려고 벽을 바라보지만 아무리 둘러 보아도 벽에는 시계가 없다 도둑이 들었나 보군! 그는 하품을 한다 모든 일이 다 귀찮은 듯 다시 소파에 눕는다 깊은 잠에 빠진다 가시나무 위의 까마귀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작곡가 / 김참
정전이다 그는 악보를 잠시 한쪽으로 밀어놓는다 부엉이 소리 가득한 가시나무 숲의 깊은 밤 그는 의자에 앉아 기타 줄을 고른다 아무도 없는 아래층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바람인가보군! 앰프에 기타 책을 꽂고 그는 무덤 같은 가시 나무를 위를 위태롭게 날고 있는 박쥐들의 어두운 밤을 연주한다 날카로운 기타소리가 가시나무 숲 어두운 밤 하늘에 울려퍼진다 그는 연주를 멈추고 보름달 뜬 창 밖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검은 까마귀들이 달빛을 가르며 어두운 가시나무 숲을 넘어간다 그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보름달이 뜬 하늘과 창밖에서 흔들리는 백양나무 잎새들을 연주한다 아무도 없는 아래층에서 성냥 긋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램프를 들고 계단을 올라오는 모양이다. 그는 붉은 램프를 든 여자의 발걸음소리를 오선지 위에 그린다 치마 자락을 끄는 소리가 어두운 층계를 따라 올라온다 방문의 손잡이가 돌아가고 천천히 문이 열린다 그는 오선지 위에 공포에 질린 자신의 심장소리를 커다랗게 그려넣는다.//

노란 잠수함 / 김참
노란 잠수함을 타고 우리는 여행을 떠납니다 요정들이 사는 숲을 지나 외눈박이 거인의 외딴 섬 지나 엘리스와 토끼가 사는 동화의 나라를 지나갑니다 총칼 들고 날뛰는 사람들이 사는 전쟁의 나라를 지나 소를 풀 뜯고 바람 시원한 어두운 달나라를 지나고 인조인간들이 사는 기계의 도시를 지나갑니다// 나는 기타를 치며 노래부르고 백 연도 넘어 불안한 피아노를 두들깁니다 우리는 해파리를 안주 삼아 소주도 마셔봅니다 깊은 바다에는 괴상한 물고기도 많지만 지구에서 쏘아대는 이상한 전파들도 들려옵니다 넌 해고야 맘대로 해 죽여버릴거야 따위의 전파가 확성기로 들어와 내 귀의 닫혀진 물들을 두드립니다.// 지구 밖의 전파들은 뚜뚜뚜 윙윙 치직치직 처음엔 노래인줄 알았는데 알고 나니 전부 욕이었지요. 그래도 나의 잠수함은 바다를 지나고 별을 지나고 태양의 불꽃을 지나갑니다 내 대뇌의 블랙홀과 수많은 소행성들을 지나고 내 마음의 창들도 지나고 함정과 수렁을 건네 꿈의 세계로 힘차게 착륙합니다.//

미로 / 김참
그는 이상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 건물은 지상 일층 지하 십오층의 이상한 건물이다 지하 일층에는 선인장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다 그는 가시에 찔리며 선인장의 방을 빠져나와 지하 이층으로 내려간다 지하 이층에는 수많은 항아리들이 있다 그는 항아리들을 자세히 바라본다 물결무늬가 그려진 큰 항아리 두 개와 주둥이가 좁은 녹색 항아리 하나가 있다 거미와 새들이 그려진 항아리들이 제멋대로 뒹굴고 있다 그는 뒹구는 항아리를 발로 차며 지하 삼층으로 이어지는 돌문을 연다 그러나 지하 삼층에는 징그러운 뱀들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는 지하 삼층에서 지하 이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재빨리 뛰어오른다 작은 항아리를 밟고 미끄러져 허리를 다친다 선인장 가시에 얼굴을 할퀴며 그는 지상 일층으로 올라온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는 문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이상한 건물에 갇힌다//

미로야행 / 김참
방 안에 드러누워 소설책을 읽어본다 중간쯤을 펼쳐보니 소설 속의 여자는 해변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다 갈매기들이 머리 위를 맴돌며 날아다니는 정오가 지나자 여자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여자의 그림 속에는 붉은 태양 노란 해바라기 푸른 지붕의 집들이 있다 여자가 그리는 그림 속 푸른 지붕의 집 마당에는 까무잡잡한 얼굴의 남자가 항아리를 만들고 있다.// 그림 속의 남자는 항아리 위에 부엉이와 까마귀와 미루나무를 그려 넣고 있다 여자가 그림 그리기를 멈추고 백사장에 누워 당근 주스를 마시는 사이 그림 속 남자는 항아리를 들고 거대한 아궁이 안으로 들어간다 아궁이 안에는 비밀통로가 있다 남자는 비밀통로를 따라 뚜벅뚜벅 걸어간다. 박쥐들이 붉은 눈을 깜빡거리며 아궁이 밖으로 빠져나가 어두워진 남자의 마당을 날아다닌다 그림 속에서 달이 뜨고 별똥별이 떨어지고 개들이 컹컹 짖는다. 당근 주스를 다 마신 여자는 기지개를 켜고 고무줄로 머리를 묶은 후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려다 달라진 자신의 그림에 흠칫 놀란다.// 남자는 하수도 뚜껑을 열로 비밀통로 바깥으로 나온다 부신 햇살에 눈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니 파란 지붕의 집들이 있고 노란 패바라기 피어 있는 낯선 해변이다 그는 해변을 따라 무작정 걸어간다 모래밭 위에 캔버스를 놓고 그림을 그리는 여자 옆을 스쳐 지나며 여자의 그림을 바라본다 여자의 그림 속엔 낯익은 풍경들이 있다 나는 책을 덮는다 졸음이 쏟아진다 정말 따분한 소설이다 마감이 다가온 원고를 쓰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며 컴퓨터를 켜고 글자들을 찍어나간다.// 방에 누워 오래된 소설을 읽었습니다 소설 속의 여자는 해변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습니다. 정오가 지나자 여자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립니다 여자가 그리는 그림 속에는 붉은 태양 노란 해바라기 푸른 지붕의 집들이 있습니다 여자가 그리는 푸른 지붕의 집에는 까무잡잡한 얼굴의 김참 씨가 항아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부엉이와 까마귀가 앉아 있는 미루나무를 항아리 위에 그리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림 그리기를 멈추고 백사장에 누워 당근 주스를 마시는 사이 그림 속의 김참 씨는 항아리를 들고 거대한 아궁이 안으로 들어갑니 다 아궁이 비밀통로를 따라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박쥐들이 붉은 눈을 깜빡거리며 아궁이 밖으로 빠져나가 어두워진 김참 씨의 마당을 날아다닙니다 그림 속에서 달이 뜨고 별똥별이 떨어지고 개들이 컹컹 짖습니다.// 나는 시 쓰기를 멈추고 당근 주스를 마셔본다 아궁이 속으로 사라진 남자가 계속해서 마음에 걸린다 나는 사라진 사람들을 찾아가기로 한다 집 밖으로 나와 하수도 뚜껑을 열고 하수도 안으로 들어간다 소설 속의 남자와 김참 씨가 열었던 하수도 뚜껑을 찾아 악취가 코를 찌르는 하수도 내부를 돌아다닌다 마침내 나는 열린 하수도 뚜껑을 발견하고 지상으로 올라간다 바깥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파란 지붕의 집들이 있다 노란 해바라기 피어 있는 해변이다 모든 것이 낯설다 나는 해변을 따라 무작정 걷는다 모래밭 위에 캔버스 를 놓고 그림을 그리는 여자 옆을 스쳐 지나간다 나는 여자의 그림을 흘끔 바라본다. 여자의 그림 속엔 낯익은 풍경들이 그려져 있다.//

미궁 / 김참
복잡하게 얽힌 길을 따라갈수록 거리 풍경은 낯설어진다 아파트 벽에서 수평으로 뻗어나 온 검은 나무는 건너편 아파트 옥상에 걸려 있고 머리에 뿔인 달린 사람들은 아스팔트를 뛰어다닌다 길은 다시 여러 개로 갈라진다 나는 아무렇게나 걸어간다 거리를 따라 뻗어 있는 낮은 집들의 유리창 위에는 똑같은 크기의 검은 라디오가 매달려 있고 라디오에서는 똑같은 내용의 뉴스가 흘러나온다 어떤 유리창 위에는 라디오 대신 책꽂이가 걸려 있다. 책꽂이에는 하얀색과 검은색의 시집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라디오가 걸려 있는 거리의 끝은 계단이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계단 옆 작은 집에는 귀가 없는 남자가 피아노를 치고 작은 집 옆 더 작은 집에는 머리 긴 여자가 귀를 틀어막고 텔레비전을 본다 계단은 점점 가팔라지고 집들이 하나 둘 줄어든다 나는 내려왔던 층층계를 올려다본다 너무 가팔라 다시 올라갈 수 없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자꾸자꾸 아래로만 내려간다 내리막이 끝나는 저 아래쪽 계단에 누군가 쓰러져 있다 가까이 가서 쓰러진 사람의 얼굴을 보니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쓰러진 사람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놀이터가 있다 나는 놀이터로 걸어가 나무의자에 앉는다 맞은편 의자에 커다란 올빼미들이 앉아 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왠지 기분이 나쁘다 놀이터를 나와 여러 갈래로 갈라진 길을 아무렇게 나 걸어간다 거리의 유리창 위에는 똑같은 크기의 검은 라디오가 매달려 있고 라디오에서 는 똑같은 내용의 뉴스가 흘러나온다 복잡하게 얽힌 길을 따라 걸어갈수록 거리 풍경은 낯설어진다 아파트 벽에서 수평으로 뻗어나온 검은 나무는 건너편 아파트 옥상에 걸려 있고 사람들은 머리에 뿔을 달고 아스팔트를 뛰어다닌다.//

매달린 사람 / 김참
나는 사람들이 매달려 있는 커다란 모과나무 밑을 지나간다 매달린 사람들이 아무리 크게 고함을 질러도 내 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사람들을 매단 커다란 모과나무가 내 발 목을 휘어잡는다 나는 모과나무에 거꾸로 매달린다 나는 술병을 들고 사람들이 거꾸로 매 달려 있는 커다란 모과나무 아래를 지나간다 매달린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자마자 나무가 나를 움켜잡는다 나는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고 술병은 땅에 떨어져 조각조각 부서진다 나는 너의 손을 잡고 커다란 모과나무 밑을 지나간다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기도 전에 나무가 우리를 낚아챈다 우리는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다 나는 거꾸로 매달린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내 얼굴들을 본다// 너는 우리들이 매달려 있는 커다란 모과나무 밑을 지나간다 우리는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지만 네 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모과나무가 네 발목을 휘어잡는다 너는 순식간 에 거꾸로 매달린다 너는 노래를 부르며 우리들이 매달려 있는 모과나무 밑을 지나간다. 우리가 고함을 지르기도 전에 너는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고 만다 너는 거꾸로 매달린 또 다른 네 얼굴을 본다 아무리 뜯어봐도 너와 꼭 같은 얼굴이다.// 이마에 커다란 눈 달린 남자가 우리들이 거꾸로 매달린 모과나무 밑을 지나간가 우리들은 입을 쩍 벌리고 남자의 이마에 박힌 커다란 눈을 본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나무에 매달린 우리를 바라보는 순간 커다란 모과나무가 남자의 발목을 억세게 휘어잡는다 남자의 이마 달린 커다란 눈이 땅바닥에 툭 떨어진다 남자는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또 다른 그의 얼굴들은 본다.//

그림 속에 갇힌 사람들 / 김참
커튼을 흔들며 들어온 바람이 먼지 쌓인 그림을 스쳐가는 미술실, 나는 의자에 앉아 이젤 위의 그림을 본다 그림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미술실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에는 그림 그리는 여자가 있다. 검은 옷을 입고 있다 그녀의 그림에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남자가 있다 불꺼진 미술실 의자에 앉아 권태롭게 창 밖을 바라보는 남자의 왼쪽 머리 위에서 어둠 을 밝히는 백열등이 올빼미의 노란 눈처럼 반짝인다 그림 속 어두운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다 뒤통수만 보이는 남자가 의자에 앉아있는 그림이다 내가 그림을 보는 사이,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남자가 여자의 그림 밖으로 나와 여자의 그림을 바라본다 나는 미술실 구석에서 그림 밖으로 빠져나온 남자를 그리고 있는 푸른 눈의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란다 여자가 그리고 있는 그림의 왼쪽 벽에 걸린 그림 속에서 나를 닮은 사람이 깜짝 놀라는 내 모습을 보고 더 깜짝 놀란다 그의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고막을 크게 울린다 의자에 앉아서 뒤통수를 그리고 있던 여자가 푸른 눈의 여자에게 커피 한 잔을 뽑아준다 두 여자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를 닮은 사람이 그림을 빠져나온다 여자들 몰래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나간다 미술실 밖으로 퇴장한다 잠시 후 나를 닮은 남자가 미술실 문을 열고 들어와 입이 쩍 벌어진 나에게 말한다 이봐! 당신,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공원에서 / 김참
어둡고 쓸쓸한 공원에 누워 꿈을 꾼다. 수많은 집들이 늘어선 거리를 갑옷 입은 기마병들이 지나가는 꿈.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는 긴 행렬을 지붕 위의 티티새들이 수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꿈.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의 무덤 옆을 지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끝없이 걸어가는 꿈. 술 취한 도굴꾼이 칼과 항아리가 묻힌 내 무덤을 파헤치는 꿈, 누군가 무덤 밖으로 뛰어나가 거리를 질주하는 꿈. 내 꿈 밖으로 빠져나간 사람들이 붉은 지붕들 위를 고양이처럼 뛰어다니는 꿈. 불켜진 집들의 유리창에는 끝나지 않는 나의 꿈을 지켜보는 눈동자들이 가득하다.//

곤충들 / 김참
한 그루 나무가 서있는 해변의 외딴 집 뒤에서 솟아오른 희뿌연 안개는 집과 푸른 지붕과 금간 벽을 덮는다 안개 낀 밤, 해변의 산책로를 따라 창백한 얼굴의 사내가 지나간다 그가 지나가는 집 뒤 참나무 둥지에 곤충들이 붙어있다 참나무 아래 떨어진 마른 잎에도 곤충들이 붙어있다 희뿌연 안개를 뚫고 곤충들이 날아다닌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가면 천장에서 검은 곤충이 떨어졌다 벽에도 유리창에도 곤충들이 가득했다.//

 

나비 / 김참
날아다니는 나비를 본다 흰 날개 펄럭이며 배추밭을 훨훨 나는 나비 한 마리 담쟁이로 둘러싸인 양철지붕 작은 집 돌담에 앉은 나비 두 마리 혼자 사는 사내가 열어놓은 창틀 선인장 화분 노란 꽃 위에 내려앉은 나비 세 마리 노란 꽃 위에 내려앉아 지저분한 사내의 방에 걸린 커다란 거울을 바라보는 나비 네 마리 사내의 방을 펄럭펄럭 날아가며 잠든 사내가 틀어놓은 시끄러운 음악을 듣는 나비 다섯 마리 양철지붕 작은 집은 하얀 나비들로 가 득하다.//

 

거미와 나 / 김참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내가 소파에 누워 책을 읽는 동안 배고픈 거미는 내 발톱을 갉아먹고 조금씩 살이 오른다. 내가 낮잠을 자면 거미도 내 귓속에서 낮잠을 자고 내가 노란 꽃 활짝 핀 해변을 거닐면 거미도 내 귓속에 누워 꿈을 꾼다. 어두운 부엌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 거미는 줄을 타고 내려와 내 발가락을 갉아먹는다. 봄이 와서 마당 가득 분홍빛 모란이 피면 거미는 집 곳곳에 투명한 집을 짓는다. 벌레들의 무덤을 만든다.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초승달 뜬 하늘에 하얀 별 총총 박힌 어둡고 깊은 밤 거미는 네 귀를 쫑긋 세우고 내 귓속에 하얀 알을 낳는다. 여름이면 새로 태어난 거미들이 집 곳곳을 기어 다닌다. 귀가 넷 달린 수 백 마리 회색 거미들. 내 살을 파먹고 통통하게 살이 오를 작은 거미들. 장마가 지나가면 거미들은 투명한 줄을 타고 논다. 습하고 무더운 날이 계속 된다. 거미는 내 살 을 갉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나는 빨랫줄에 걸린 생선처럼 조금씩 야위어간다//

거미의 집 / 김참
빈집들이 늘어선 골목을 지날 때마다 괴상한 소리가 들린다 나는 길옆에 자전거를 세우고 빈집 대문을 연다 빈집 마당엔 회색 거미들이 기어다닌다 귀가 네 개 달린 커다란 거미들이 유리창에 달라붙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거미들이 네 귀를 쫑긋 세우고 벽과 지붕을 기어다닌다 빈집은 온통 거미줄로 얽혀 있다. 바람에 날려온 작은 박쥐들이 끈끈한 거미줄에 걸려있는 빈집 마당엔 녹슨 자전거가 있다 자전거 앞바퀴에도 자전거 뒷바퀴에도 커다란 거미들이 매달려 있다 거미줄에 걸린 작은 박쥐들은 날개를 힘껏 저어보지만 끈끈한 거미줄을 벗어날 수 없다. 나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본다 거실 소파에 사람얼굴의 거미가 앉아있다. 침대 위에서 내려온 커다란 거미들이 마룻바닥을 돌아다닌다. 거미줄에 걸린 박쥐를 향해 커다란 거미들이 몰려간다 거미줄에서 박쥐의 검은 날개가 힘없이 떨어진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는 두 귀를 감싸고 거미들로 가득한 빈집을 뛰어나온다. 자전거를 타고 빈집들의 골목을 지날 때마다 커다란 거미들이 네 귀를 쫑긋 세우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가시나무 골목 -여왕의 죽음 / 김참
가시나무가 자라는 골목 끝에는 늙은 여왕이 사는 궁전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고 찬바람도 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궁전 꼭대기 방의 나무의자에 앉아 여왕은 독한 포도주를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검은 털의 커다란 까마귀들은 젖은 가시나무 위에 앉아 병들고 지친 여왕을 위하여 시끄럽게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먹구름이 몰려들고 천둥이 치기 시작했습니다 까마귀들은 미친듯이 날아올랐고 시퍼런 번개가 궁전 꼭대기에 내려꽂혔습니다. 장례식 오후의 가족들처럼 골목은 비에 흠뻑 젖었습니다 가시나무 골목 끝 묘지 옆에서 나무들은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까마귀들은 식탁에 앉아서 마른 빵을 쪼아먹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이 내려와 궁전 꼭대기 방으로 이어진 계단을 뚜벅뚜벅 올라갔습니다 계단의 난간에는 검은 털의 까마귀들이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가시나무 골목 -안개 / 김참
가시나무 골목에 안개가 끼고 갑자기 버스가 멈추었습니다 안개 때문에 더 이상 운행을 할 수 없으니 손님 여러분은 모두 걸어가셔야 합니다! 운전기사의 말에 사람들은 투덜거리며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가시나무들이 우두커니 서 있는 골목과 골목을 돌아 그는 시계방을 찾아갔습니다 갑자기 모든 길이 낯설어졌습니다.// 골목에 앉아 안개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골목 한쪽에서 기타소리 들렸습니다 골목에 드리워진 안개 속에서 긴 손가락을 움직이며 희미한 실루엣의 청년이 아름다운 리듬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안개에 젖은 돌담에 기대어 그는 눈 감았습니다 안개를 뚫고 귓가에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었고 붉은 벽돌 아래 드리워진 가시나무 그림자만 있었습니다 안개가 걷히자 그는 정류장을 찾아 뛰어갔습니다 버스를 타고 덜컹덜컹 흔들리며 반대쪽으로 흘러가는 가로수들을 바라보지만 기타소리가 자꾸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가시나무 골목 -서곡 / 김참
골목에는 가시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목 쉰 새들이 앉아 있는 나무 밑으로 검은 치마 입은 소녀가 지나갔습니다. 가시나무 밑에는 검은 고양이가 엎드려 있었습니다 어두운 골목 끝에는 활짝 열린 창문들이 있었습니다 창문 사이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하얀 손가락들이 누르는 피아노의 검은 가락에 맞춰 소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목 쉰 새들이 앉아 있는 가시나무 가지 사이로 소녀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골목은 늘 어두웠고 가시나무 위에는 언제나 목 쉰 새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검은 치마 입은 소녀의 조그만 노래를 듣고 있었습니다.//

가시나무 골목 -마지막 노래 / 김참
소녀는 피아노 뚜껑을 닫고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삼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을 걸어 올라 갔습니다 옥상의 꽃나무 화분이 눈을 맞아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이런 불쌍하기도 하지! 소녀는 화분을 들고 피아노가 있는 이층 거실을 향해 나선형 계단을 빙글빙글 내려왔습니다 소녀는 거실 구석 낡은 전축을 켜고 이제는 아무도 듣지 않는 오래된 음반을 틀었습니다 바이올린 소리와 기타소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아주 오래된 음반은 잡음을 내며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벽에 붙어있던 달팽이들이 거실바닥에 툭 떨어졌습니다 소녀는 떨어진 달팽이를 피아노 위에 올려놓고 흰눈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리는 창 밖을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눈 맞은 까마귀들이 비틀비틀 날아가는 가시나무 골목의 오후 세시를 알리는 벽시계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작업을 마친 사람들이 소녀가 사는 삼층집 밑을 지나가며 하얀 눈송이 위에 불붙은 담배꽁초를 버리는 가시나무 골목의 오후 네 시를 알리는 벽시계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소녀는 창 밖을 바라보며 피아노 뚜껑을 열었습니다 조그만 목소리로 가시나무가 자라는 골목을 위한 마지막 노래를 불렀습니다.//

12월 32일 / 김참
세수를 하려고 수도꼭지를 돌리니 피가 쏟아진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거울을 보니 머리에 뿔이 돋아 있다. 거실 벽을 뚫고 들어온 꽃나무가 시퍼런 꽃을 피우고 있다. 밥솥을 열어보니 검은 뱀들이 혀를 날름거린다 너무 놀라 집밖으로 뛰어나가니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들 가득하던 거리에 잡초만 무성하다 공원의 시계탑 분침이 거꾸로 돌아가고 잔디밭 나무의자 뒤에서 자동차들이 녹슬어간다 어두워진 하늘에서 붉은 구름이 몰려온다 피처럼 붉은 비가 내린다 내 뺨에 끈적끈적한 핏방울이 떨어진다 우산을 찾으러 집으로 들어오니 거실 의자에 낮선 여자들이 앉아 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방으로 돌아와 눈을 비비고 창문을 열어보니 창 밖은 푸른 바다다 커다란 고래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한 하루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으니 새들이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 창백한 내 얼굴을 사납게 쪼아댄다.//

그곳에 관한 기억 / 김참
스피커에서 흐르는 몽롱한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셨습니다 진열장에 술병과 레코드가 가득했고 벽에는 음산한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오후의 햇살이 술병에 반사되어 신비롭게 출렁거렸습니다 몽롱한 오르간 반주에 실려 환각적인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었고 진열장에 오래된 레코드가 가득했지만 술병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인은 커피 한 잔을 가져다준 뒤 벽에 걸린 그림만 바라보았습니다 뾰족한 산과 회색 건물 맞닿은 나무 그늘에서 여인들이 낮잠을 자는 그림이었습니다.// 다음날 그곳에 가니 스피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주인은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진열장엔 레코드들이 가득했지만 진열장은 없었습니다. 가게 안을 유심히 둘러보니 전날과 달리 벽에는 커다란 거미들이 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다음날에도 그 곳을 찾아갔지만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가게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에도 그 곳을 찾아갔지만 그곳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구멍 뚫린 검은 벽 / 김참
구멍 뚫린 검은 벽 안에 있는 것은 벽돌집이다. 마루에 놓인 토분의 꽃나무에 물을 주는 이는 계단을 밟고 내려온 사람이고 마당에 흩어진 달걀을 줍는 이는 현관문을 열고 나온 사람이다. 거실의 전축에 레코드판을 올려놓는 이는 머리에 뿔 달린 사람이고 회오리를 치며 벽돌집 마당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것은 스피커에서 불어나온 바람이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뚫린 구멍을 통해 보는 것은 벽돌집에 사는 낯선 사람 | 들이다. 참 이상하죠. 어제는 없던 집이 오늘 갑자기 생기다니요. 그러게요 정말 별일이네. 요. 저기 마루에 서있는 사람 좀 보세요. 온 몸에 크고 작은 시계들이 잔뜩 붙어 있어요. 저것 좀 보세요. 검은 털의 커다란 소들이 구멍 뚫린 침대에 누워 신문을 읽고 있잖아요.// 창고에서 망치를 들고 나와 검은 벽에 구멍을 뚫는 이는 토분에 물을 주던 사람이고 뚫린 구멍을 통해 벽돌집을 빠져나온 것은 벽돌집을 돌아다니던 바람이다. 뚫린 구멍을 통해 벽돌집 괴상한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맴도는 것은 마당을 돌아다니던 회오리바람이고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뾰족하게 돋아나 는 것은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돌아가는 뿔이다.//

 

검은 날들의 기록 / 김참
살다보면 검은 날들이 있기 마련이다 검은 날에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 홀로 우두커니 남는다 옥상 위에서 나는 몽롱해진다 자동차는 개가 되어 검은 길을 달리고 울타리에는 나팔꽃 대신 파리지옥이 돋는다 나는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진다 그렇다! 검은 날은 나를 자꾸 뛰어내리게 한다 나는 눈을 가리고 고함을 지르며 옥상 아래로 뛰어내린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면 아무도 없는 빈방에 나 홀로 처박혀 있는 검은 날// 그렇다! 살다보면 검은 날도 있기 마련이다 한번 시작되면 끝나지 않는 검은 날. 아무도 잠들 수 없는 검은 날. 달력에도 나와 있지 않은 검은 날.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먹구름들은 비를 쏟으며 우루루 몰려다니고 비 맞은 자동차들은 버터처럼 녹아 길 위에 달라붙는다 나는 사라진 사람들을 찾아 뛰어간다 검은 날, 한번 시작되면 끝나지 않는 검은 날. 그렇다! 살다보면 검은 날도 있기 마련이다//

검은 집에 사는 검은 얼굴들 / 김참
마당의 검은 화분들마다 노란 꽃들이 피어나는 집에는 연탄보일러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두운 마루를 울리며 괘종시계 소리가 새어나가는 창문으로 검은 나방들 날아 들어와 펄럭펄럭 날개를 휘젓고 있습니다 소리 없이 방문이 열립니다 벽을 기어다니던 벌레들이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낮선 얼굴의 사람들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인형처럼 춤추기 시작합니다 비가 내리면 나는 악몽에 시달립니다 내 꿈의 어두운 방에서 나는 검은 벽지 위를 기어다니는 검은 얼굴의 사람들을 봅니다 사람들은 내가 틀어놓은 음악에 맞춰 고개를 흔듭니다 비가 옵니다 벽지에 붙어 있던 사람들이 자꾸 떨어집니다 떨어진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어둠에 잠긴 작은 집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공중에서 사람들이 자꾸만 떨어져 내립니다.//

검은 시집 / 김참
권총 든 사내가 여자의 손을 잡고 불타는 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 나는 해변의 나무의자에 앉아 검은 시집을 읽었다 아이들이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들고 비 내리는 골목을 지나갈 때 유리창에는 푸른 나방이 붙어 있었다.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아스팔트 위를 뛰어갈 때 사내는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여자의 긴 목이 툭 떨어졌다 목 잘린 아이들은 떨어진 머리통을 차지하려고 주먹을 휘둘렀다 검은 나방들은 비를 피해 불타는 나무를 향해 날아드는데 나는 의자에 앉아 검은 시집을 읽었다 목잘린 아이들이 내 시집을 빼앗아 여자가 쓰려져 있는 아스팔트 위를 달려갔다.//

검은 새가 앉아 있는 나무 / 김참
벽돌집 사과나무에 검은 새들이 앉아있다 나는 사과나무에 앉아 지저귀는 검은 새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검은 새들이 앉아 있는 나무 옆에 벽돌집이 있다 벽돌집 지붕과 벽돌집 창틀에도 검은 새들이 앉아 있다 벽돌집 화단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바구니를 든 여자들이 지나다닌다 화단에 빨간 열매를 매단 나무가 있고 가지 위에 검은 새들이 앉아 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나는 검은 새들이 앉아 있는 나무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벽돌집 옆을 지날 때마다 검은 새들이 나무 위에 앉아 까악 까악 울부짖는다.//

공명 / 김참
내 방에 오래된 기타가 있고요. 녹슨 즐엔 거미줄이 엉켜 있어요. 내가 기타를 치면 파란 거미들 줄을 타 고 방안을 돌아다녀요. 내가 꿈속의 낯선 거리를 걸으면 거미들은 내 꿈 안팎을 넘나들며 무럭무럭 자라 요. 내 방과 내가 걷는 낯선 길이 거미줄로 어지럽게 얽혀요. 내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기타를 치면 거미들은 줄을 타고 나무에 올라 나뭇가지에 오래된 기타를 주렁주렁 매달아요. 기타들이 끝없이 매달린 길을 따라가면 거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공명통을 맴돌다 귓속으로 흘러들어와요.//

시간이 멈추자 / 김참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 건물들은 허물어지고 길들이 지워졌다. 시간이 멈추자 공중에 비탈길이 생겼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시간의 반대편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간의 반대편에는 달이 있었고 별이 있었고 둥근 기둥이 있었다. 두 마리 새가 기둥 위에 앉아 있었다. 기둥 밑에는 장작이 타고 있었다. 검은 치마를 입은 처녀들이 기둥을 향해 걸어왔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눈이 없었다. 코도 없고 입도 없었다. 그녀들은 기둥을 지나 나무 밑을 걸어 갔다. 사람들의 머리통이 주렁주렁 매달려 붉은 열매로 익어가고 있는 나무 밑을 지나갔다. 나는 나무 뒤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어디선가 두 마리 개가 달려왔다. 여자들이 기둥을 향해 재빨리 달렸다. 시간의 반대편에는 달이 있었고 별이 있었고 두 마리 새가 기둥 위에 앉아 있었다.//

납골당 / 김참
흰 꽃이 핀 봄의 들판 밑에 납골당이 있다. 죽은 것들이 땅에 뼈를 묻는 동안 납골당은 새봄에 필 꽃을 품고 있다. 납골당 구석에는 창백한 쥐들이 돌아다니고 어린 뱀들은 가만히 잠들어 있다. 우리는 모두 납골당으로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뼈를 납골당에 맡기고 봄의 들판을 가득 채울 흰 꽃의 연둣빛 잎이 되거나 호두나무 열매가 될 것이다. 우리는 거름이 되어 울퉁불퉁한 호박으로 익어갈지도 모른다. 밤이 검은 박쥐를 키우는 동안 납골당 유령들은 납골당으로 돌아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편안한 잠자리를 준비한다.//

이천년 / 김참
집 뒤에는 언덕이 있었고 언덕에는 고인돌이 있었다. 나는 삽을 들고 미루나무들이 서 있는 고인돌 앞에 도착했다. 고인돌 위로는 노란색 별들이 무섭게 날아다녔다. 나는 고인돌 밑을 파나갔다. 땅 밑에서 잠을 자던 구렁이들이 언덕 아래로 달아났다. 바람이 불자 언덕 밑의 대밭이 흔들렸고 대밭에서 이천년 전의 여자들이 걸어나왔다. 항아리를 들고 대광주리를 들고 이천년 전의 여자들이 걸어나왔다.// 우리 마을에는 이천년 전의 도시가 있다. 사람은 없고 흔적만 남아 있다. 여자들만 살았던 이천년 전의 나라에는 많은 돌담이 있었다. 밤이었다. 하늘에서 불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이천년 전의 마을이 시뻘겋게 불타올랐다. 이천년 전의 산과 나무, 여자들과 아이들이 불타올랐다. 이천년 전의 닭과 돼지, 오리와 염소들이 불타올랐다. 모두 타버리고 돌들만 남았다. 돌담과 고인돌과 깨진 항아리들만 남았다. 나는 고인돌 밑을 파나갔다. 고인돌 위에는 노란색 별들이 무섭게 날아다녔다.//

또 한 사람이 사라지고 / 김참
검은 철제의자가 있는 방안에 흰 구름이 흘러다닌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고 의자에 앉아 있던 그의 유령이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눕는다 그는 눈알을 뽑아 깨끗이 닦은 후 호주머니에 쑤셔박는다 그의 유령이 잽싸게 일어나 그에게 선글라스를 건네준다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아파트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간다 창문 밖으로 흰 구름도 빠져나간다. 그는 검은 승용차를 타고 시내를 빠져나간다 들판에는 무너진 건물들이 즐비했고 담쟁이와 나팔꽃이 가득했다 들판 가운데 마른 우물이 있고 우물 옆에 구름이 걸려 있는 나무가 있었다. 나무에는 눈동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수평으로 뻗은 나뭇가지에는 살찐 까마귀들이 줄줄이 앉아 깍깍깍 울고 있었다 그는 트렁크에서 권총을 꺼내 빵빵빵 갈겨주었다 총알은 포물선을 그리며 지구 반대편에 가 박혔지만 까마귀들은 나무를 박차고 올라 공중에서 어지럽게 맴돌았으며 눈동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우물 속에서 눈동자 없는 여자가 올라와 그의 손을 잡고 우물 안으로 사라졌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그의 유령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검은 자동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유령이 모는 검은 자동차는 도로 위를 야생마처럼 달려나갔다.//

내 머리통을 가진 사람들 / 김참
그 숲의 쓰러진 나무 밑에 독버섯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네 어느 날 처녀들이 숲으로 소 풍을 왔네 독버섯 자라는 나무 옆을 지나갔네 울긋불긋 독버섯들 아름답게 돋아난 숲에는 작은 통나무집들이 있었네 통나무집 지붕엔 붉은 버섯들이 따닥따닥 붙어있었네// 아침을 먹고 대문 밖을 나서니 벽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렸네 똑 똑 똑 벽을 두드리니 벽에 서 내 머리통들이 차례로 튀어나와 서로 다투기 시작했네 내 머리통을 가진 사람이 내 머 리통을 가진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쳤네 머리통 하나가 땅바닥에 툭 떨어졌네// 벽에서 긴 손이 뻗어나와 떨어진 머리통을 들고 벽 속으로 사라졌네 머리가 떨어진 사람 의 목에서 머리통 하나가 불쑥 돋아났네 내 머리를 가진 세 사람이 벽 앞에 앉아 어젯밤 악몽을 이야기하고 있었네// 어제는 무서운 꿈을 꾸었지 내가 시퍼런 칼을 들고 네 팔다리를 자르는 꿈 잘린 팔다리를 이 지붕의 버섯처럼 자라는 꿈 내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커다란 구멍을 파는 꿈 우리의 잘린 팔다리를 구멍에 집어넣으며 킬킬거리는 꿈// 그 숲에는 독버섯이 자라고 있었네 쓰러진 나무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네 어느 날 처녀, 들이 숲으로 소풍을 왔네 독버섯 자라는 숲을 지나갔네 울긋불긋 독버섯들 아름답게 핀 숲에는 작은 통나무집들이 있었네 통나무집 지붕에 붉은 버섯들이 따닥따닥 붙어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