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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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11. 30.

김소연(金素延) 시인
1967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나, 가톨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여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현대시사상》에 「우리는 찬양한다」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등이 있다. 노작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17년간의 화이부동…“시어의 뜻 얘기 하느라 밤 새우기도 했죠”

[우리는 짝] 부부 시인 함성호-김소연 문학 동인으로 만나 1995년 결혼 시 세계 다르지만 삶은 찰떡궁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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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 김소연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잔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그런 것 / 김소연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창문 바깥에서가 아니라 저 멀리 대관령에서/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다 빨래를 널고 창문을 열어두고 바깥에 앉아 볕을 쬐고 있을 때 고양이가 다가와 내 그림자의 테두리를 몇 걸음 걸었고 저쪽에 웅크렸다// 꿈에서 일어난 일들이 쏟아져 내렸다 허벅지에 떨어진 동그란 핏방울이었고 그다음 양철 주전자였고 그다음 도살장 옆 미루나무였다// 단식을 감행했다 내가 아니라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저 먼 제주도에서/ ‌아침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많이 아팠다 내가 아니라 저 먼 시베리아에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친구가// ‌할머니는 선지를 좋아했고 엄마는 할머니를 좋아했다 나는 심부름을 좋아했다/ ‌자박자박 붉은 물기를 밟으며 도살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한 발씩 한 발씩 서늘해졌다 검은 앞치마를 두른 아저씨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동물들은 걸려 있거나 누워 있었다 질질 끌려 우리집 앞을 지나간 건 어제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쪼그려 앉아 선지를 먹었다 아주 오래전 그 집에서가 아니라 조금 전 꿈속에서/ ‌멀리서 날아온 빈혈들이 할머니의 은수저에 얹혀 있었다 할머니의 은빛 정수리처럼 똬리를 튼 채로// 아침은 이런 것이다/ ‌도착한 것들이 날갯죽지를 접을 땐 그림자가 발생한다 바로 거기에서/ ‌나무가 있었다면 새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사람이 아니라 저기 빈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가//

여행자 / 김소연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간 사람이 있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비둘기를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나는 지금 바깥을 내다본다/ 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해한 사람이/ 가장 오래 서 있었을 자리에 서서// 우주 어딘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에서 시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축을 도살하고 고기를 굽는 생활처럼 태연하게// 잘 지냅니까,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는 낯선 땅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잠깐의 반가움과/ 오랜 두려움뿐이다// 두려움에 집중하다 보면/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었던 사람이/ 실은 자신의 피폐를 통역하려 했다는 것을// 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내쫓으면서/ 나는 알게 된다// 아파요, 살고 싶어요, 감기약이 필요해요,/ 살고 싶어서 더러워진 사람이 나는 되기로 한다// 더러워진 채로 잠드는 발과/ 더러워진 채로 악수를 하는 손만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했던 사람이/ 불구가 되어간 곳을 유적지라 부른다/ 커다란 석상에 표정을 새기던 노예들은/ 무언가를 알아도 안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한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 하루에 한 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땅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

그늘 / 김소연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 눈동자도 없이/ 눈꺼풀도 없이// 외투를 세탁소에 맡기러 가는 길과/ 교회의 문전성시와/ 일요일과/ 눈썰매와// 벚나무는 곧 버찌를 떨어뜨리겠지/ 벌써 침이 고이네// 거미처럼 골목에 앉아/ 골목에 버려진 의자에 앉아/ 출발도 없이/ 도착도 없이// 벌거벗은 햇볕/ 벌거벗은 철제 대문/ 그늘에 앉아 젖은 무릎을 말리네// 해빙도 없이/ 결빙도 없이// 북극여우와 바다코끼리와 바다표범과/ 흰 무지개와 흰 운무와/ 쇄빙선도 없이/ 해협도 없이// 버찌는 잠시 돌 옆에 머물겠지/ 개미는 버찌를 핥겠지/ 혓바닥도 없이/ 사랑도 없이//

수학자의 아침 / 김소연
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본다/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겨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안겨 있는 사람을 더 꼭 끌어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다/ 눈알에 기어들어 온 개미를 보는 일이다/ 살결이 되어버린 겨울이라든가, 남쪽 바다의 남십자성이라든가// 나 잠깐만 죽을게/ 단정한 선분처럼// 수학자는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을 세기로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 구조를 세기로 한다//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잘 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구요// 잠깐만 죽을게,/ 어디서도 목격한 적 없는 온전한 원주율을 생각하며// 사람의 숨결이/ 수학자의 속눈썹에 닿는다/ 언젠가 반드시 곡선으로 휘어질 직선의 길이를 상상한다//

반대말 / 김소연
컵처럼 사는 법에 골몰한다/ 컵에게는 반대말이 없다 설거지를 하고서/ 잠시 엎어 놓을 뿐// 모자의 반대말은 알 필요가 없다/ 모자를 쓰고 외출을 할 뿐이다/ 모자를 쓰고 집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게 가끔 궁금해지긴 하겠지만// 눈동자 손길 입술, 너를 표현하는 너의 것에도 반/ 대말은 없다/ 마침내 끝끝내 비로소, 이다지 애처로운 부사들에/ 도 반대말은 없다// 나를 어른이라고 부를 때/ 나를 여자라고 부를 때/ 반대말이 시소처럼 한쪽에서 솟구치려는 걸/ 지그시 눌러주어야만 한다/ 나를 시인이라고 부를 때에/ 나의 반대말들은 무용해진다// 도시에서/ 변두리의 반대쪽을 알아채기 시작했을 때/ 지구에서 변두리가 어딘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뱅글뱅글 지구의를 돌리며// 이제 컵처럼 사는 법이/ 거의 완성되어 간다// 우편함이 반대말을 떨어뜨린다/ 나는 컵을 떨어뜨린다/ 완성의 반대말이 깨어진다//

연두가 되는 고통 / 김소연
왜 하필 벌레는/ 여기를 갉아 먹었을까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들고 네가/ 질문을 만든다// 나뭇잎 구멍에 눈을 대고/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나뭇잎 한 장에서 격투의 내력이 읽힌다// 벌레에겐 그게 긍지였겠지/ 거긴 나뭇잎의 궁지였으니까/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 그래서 우리는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준다// 물조리개를 들 때에는 어김없이/ 산타클로스의 표정을 짓는다// 보여요? 벌레들이 전부 선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시간이 여위어간다/ 아픔이 유순해진다/ 내가 알던 흉터들이 짙어진다// 초록 옆에 파랑이 있다면/ 무지개, 라고 말하듯이/ 파랑 옆에 보라가 있다면/ 멍, 이라고 말해야 한다// 행복보다 더 행복한 걸 궁지라고 부르는 시간/ 신비보다 더 신비한 걸 흉터라고 부르는 시간// 벌레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든 네게서/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먼지가 보이는 아침 / 김소연
조용히 조용을 다한다/ 기웃거리던 햇볕이 방 한쪽을 백색으로 오려낼 때// 길게 누워 다음 생애에 발끝을 댄다/ 고무줄만 밟아도 죽었다고 했던 어린 날처럼// 나는 나대로/ 극락조는 극락조대로/ 먼지는 먼지대로 조용을 조용히 다한다//

누군가 곁에서 자꾸 질문을 던진다 / 김소연
살구나무 아래 농익은 살구가 떨어져 뒹굴 듯이/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너무 많은 질문들이/ 도착해 있다// 다른 꽃이 피었던 자리에서 피는 꽃/ 다른 사람이 죽었던 자리에서 사는 한가족/ 몇 사람을 견디려고 몇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우리는 같은 사람을 나누어 가진 적이 있다/ 같은 슬픔을 자주 그리워한다//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마다/ 나를 당신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지난 연인들이 자꾸 나타나/ 자기 이야기를 겹쳐 쓰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 되어간다// 당신은 알라의 얼굴에서/ 예수의 표정이 묻어나는 걸 보았다고 했다/ 내 걸음걸이에서 이제는/ 당신이 묻어나오는 걸 아느냐고/ 당신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는/ 두 개의 바다가 만나는 해안에/ 도착해 있다// 늙은 아기가 햇볕에 나와 앉아 바다를 보고 있다/ 바다가 질문들을 한없이 밀어내고 있다// 우리에게 달라진 것은 장소뿐이었지만/ 어느새 우리들 기억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메타포의 질량 / 김소연
맨처음 우리는 귀였을 거예요 아마. 따스한 낱말과 낱말이 포켓사전처럼 대롱거리는 귓불이었을 거예요 아마. 그때 우린 사전의 속살을 들춰보았죠. 여긴 두 페이지가 같네요? 파손인가요? 그 다음 우리는 그릇이었을 테죠 어쩌면. 아이스크림을 컵에 담듯 살아 온 날들이 흘러내리지 않게 자그마한 그릇처럼 웅크려야 했을 테죠. 그때 우리는 맛있었죠. 그때 우리는 양손바닥으로 밀착되었을 테죠. 고해와 같았을 테죠 어쩌면. 딸기 맛과 멜론 맛이 회오리처럼 섞일 때면 하루가 저물었죠. 그런 후에 우리는 서로가 기록이었죠. 손목이 손을 놓치는 순간에 대해. 시계가 시간을 놓치는 순간에 대해, 대지와 하늘이 그렇게 지평선을 만들듯이 윗입술과 아래 입술을 그렇게 하여 침묵을 만들었죠. 등 뒤에서는 별똥별이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내렸죠. 그러곤 우리는 방울이 되었어요. 움직이면 요란해지고 멈춰서면 잔잔해지는, 동그랗게 열중하는 공명통이 되었죠. 환희작약 흐느낌, 낄낄거리는 대성통곡, 은총과도 같이 도마뱀의 꼬리와도 같이. 우리는 비로소 물줄기가 되었죠. 우리는 비로소 물끄러미가 되었죠. 이제 우리는 질문이 될 시간이에요. 눈먼 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는 시간이죠. 덧없지 않아요. 가없지 않아요. 홀로 발음하는 안부들이 여울물처럼 흘러내리는 이곳은 어느 나라의 어느 골짜기인가요. 이것은 불시착인가요 도착인가요. 자 우리의 질문은 낙서인가요 호소인가요. 언젠가 기도인가요?//

현관문 / 김소연
열어둔다// 바닥에 빗자루를 댄다/ 오늘 아침은 빗자루가 쓸지 않고 있다/ 타일 바닥을 스다듬고 있다// 내가 오면 제일 먼저// 누가 오기로 한 날이 아닌 날에도/ 매일 아침 현관문 앞에 알록달록/ 꼴림을 그려놓던/ 인도 사람 얘기를 해줘야지// 무성하게 자란 보스턴 고사리를 문밖에 놓아둔다/ 네가 오기로 한 날이니까// 열어둔다/ 시간에 조금씩 주름이 접힌다/ 시간이 조금씩 허점을 다듬는다// 밤새/ 평생동안 잃어버리기만 했던 우산들이 모두 돌아와/ 수북이 쌓여 있다/ 평생 동안 젖어 있었을 우산들을/ 하나하나 편다/ 그대로 둔다/ 네가 오면 제일 먼저// 이것들을 보겠지/ 우리 집을 칠월의 포도송이 같다고 해주면 좋겠다/ 아니면 팔월의 오동나무// 열어둔다//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 김소연

먼 훗날/ 내 손길을 기억하는 이 있다면/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줄/ 시 한 수 미리 적으며/ 좀 울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아래서/ 실컷 좀 울어볼까 한다/ 사랑한다는 단어가 묵음으로 발음되도록/ 언어의 율법을 고쳐놓고 싶어 청춘을 다 썼던/ 지난 노래를 들춰보며/ 좀 울어볼까 한다/ 도화선으로 박음질한 남색 치맛단이/ 불붙으며 큰절하는 해질 녘/ 창문 앞에 앉아/ 녹슨 문고리가 부서진 채 손에 잡히는/ 낯선 방/ 너무 늦어 너무 늙어/ 몸 가누기 고달픈 어떤 때에/ 사랑을 안다 하고/ 허공에 새겨 넣은 후/ 남은 눈물은 그때에 보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세상을/ 베고 누워서//


다른 이야기 / 김소연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너는 매일매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어떤 용기를 내어 서로 손을 잡았는지 손을 꼭 잡고 혹한의 공원에 앉아 밤을 지샜는지. 나는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되뇌고 되뇌며 그때의 표정이 되어서. 나는 언제고 듣고 또 들었다. 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형을 안고 좋아했듯이.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 귀여운 병아리들이 무서운 닭이 되어 제멋대로 마당을 뛰어다니다 도살되는 것처럼. 그날의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가 없어져버리는 게 좋았다. 먹다 남은 케이크처럼 바글대는 불개미처럼. 그날의 이야기가 처음 만났던 날을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혹한의 공원에 앉아 떨고 있을 것이 좋았다. 우리가 그곳에서 손을 꼭 잡은 채로 영원히 삭아갈 것이 좋았다.//

경배 / 김소연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좋아하는 친구가 베란다에서 키운 부추를 주어서/ 나란히 누운 부추를 찬물에 씻지/ 좋아하는 친구가 보내준 무쇠 프라이팬에 부추전을 부치지/ 젓가락을 들고 전을 먹는 동안에// 나쁜 음악을 이제는 듣지 않아/ 나쁜 생각들을 완성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 부추를 먹는 동안엔 부추를 경배할 뿐// 저편 유리창으로 젓가락을 내려놓는/ 너의 모습이 보였는데/ 왜 그렇게 맨날 억울한 얼굴이니/ 병이 멈추었니/ 비명이 사라졌니// 나의 병으로 너의 병을 만들던 짓을 더 해주길 바라니/ 예의를 다해 평범해지는 일을 너는 경배하게 된 거니/ 참 독하다 참 무섭다 하면서/ 너를 번역해줄 일이 이제는 없겠다// 모든 게 끔찍한데/ 가장 끔찍한 게 너라는 사실 때문에/ 너는 누워 잠을 자버리지/ 다음 생애에 깨어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지/ 익숙해져버린 나를 적응하지 못한 채 절절매지/ 젓가락을 들어 올려/ 전을 다 먹을 뿐// 만약 이 세상이 대답이었던 것이라면/ 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더 강하고 더 짙은 이 부추였을까/ 병이 멈추어버린 병은 어떻게 아픈 척을 해야 할까// 부추를 받고 귀여운 인형을 친구에게 건넸지/ 무쇠 프라이팬을 받고 예쁜 그림책을 친구에게 건넸지/ 귀엽고 예쁘게/ 여리고 선량하게// 혼자 있을 때마다 나쁜 것들만 떠올리는데/ 나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아/ 가지런한 부추들/ 파릇한 부추들//

바깥 / 김소연
얼굴은 어째서 사람의 바깥이 되어버렸을까// 창문에 낀 성에 같은 표정을 짓고/ 당신은 당신의 얼굴에게 안부를 물었다// 안에 있어도/ 바깥에 있는 것 같아 바깥으로 나와버릴 때마다/ 안쪽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 집에 가자며 누군가 손을 내밀 때/ 거긴 숙소야, 나는 집이 없어/ 당신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비바람에 우산들은 뒤집히고/ 상인들은 내다 걸은 물건들에 비닐을 덮어주고/ 행인들은 뛰거나 차양 아래에 멈춰 섰다// 처마랄 것도 없는 처마 아래에서/ 잠자리 두 마리가 교미를 하고 있었다/ 꼬리를 바르르 떨었지만 고요함을 잃지 않았다/ 꼬리는 어째서 그들의 바깥이 될 수 있었을까// 사나운 꿈은 어째서 이마를 열어젖히는가/ 낯선 짐승들이 한 마리씩 튀어나와 베개를 짓밟아서/ 꿈 바깥으로 당신은 자꾸 밀려났다// 당신은 다시 잠이 들었다/ 얼굴을 벗어/ 창문 바깥에 어른대던 저 나뭇가지에다/ 걸어둔 채로// 당신의 바깥은 이제 당신의 얼굴을 쓰고 있다/ 안으로 들어오겠다고 당신의 방을 밤새/ 부수고 있다//

편향나무 / 김소연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이 세계에서/ 백년은 살아야겠지/ 미치지 않고서 그럴 자신이 있겠니/ 용기라는 말을 자주 쓰는 자는 모두 비겁한 사람이 되었다/ 내 생각을 나보다 더 잘 읽는 자는 모두 적이 되어 있었다/ 아침마다 나는 고쳐 말하고만 싶었고/ 작년의 감이 새까맣게 매달려 있는 사월의 감나무를/ 빨랫줄을 꽉 물고 있는 빨래집게들을/ 등에 난 흉터를/ 아까 본 그 사람을/ 거북이처럼 걷던 그 사람을/ 거북이는 등이 있어서 다행이고/ 같은 맥락에서/ 거북이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다행이고/ 배낭을 메고 내가 나를 거듭 떠났다/ 나를 배웅하기 위하여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났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곳으로 가서/ 얼굴을 버리고 돌아와 얌전하게/ 생활을 거머쥐는 나에게로 벚꽃 잎들이 달라붙을 때/ 얇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거대한 흉터라는 걸 알아챈다면/ 진짜로 미칠 수 있겠니//

i에게 / 김소연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지난겨울 죽은 나무를 버린 적이 있었다. 마른 뿌리를 흙에 파묻고서 나무의 본분대로 세워두었는데, 지난겨울 그렇게 버려지면 좋았을 내가 남몰래 조금씩 미쳐갔다. 남몰래 조금만 미쳐보았다. 머리카락이 타오르는 걸 거울 속으로 지켜보았고 타오르는 소리를 조용히 음미했다. 마음에 들었다. 뭐랄까, 실컷 울 수도 실컷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화사한 얼굴이 되었다. 끝까지 울어보았고 끝까지 웃어보았다. 너무 좋았다. 양지에 앉아 있었을 때 웅크린 어느 젊은이에게 왜 너는 울지도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젊은이의 눈매에 이미 눈물이 맺혀 있더라. 그건 분명 돌멩이였다. 우는 돌을 본거야. 그는 외쳤어. 미칠 것 같다고! 외치는 돌을 본거야. 그는 더 웅크렸고 웅크림으로 통째로 집을 만들고 있었어. 그 속에 들어가 세세연년 살고 싶다면서.// 요즘도 너는 너하고 서먹하게 지내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아직도 매일매일 일어나니. 아무에게도 악의를 드러내지 않은 하루에 축복을 보내니. 누구에게도 선의를 표하지 않은 하루에 경의를 보내니. 모르는 사건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듯한 기분으로 지금도 살고 있니. 아직도, 아직도 무서웠던 것을 무서워하니.// 너는 어떠니. 도무지 시적인 데가 없다고 좌절을 하며 아직도 스타벅스에서 시를 쓰니. 너무 좋은 것은 너무 좋으니까 안 된다며 여전히 피하고 지내니. 딸기를 먹으며 그 많은 딸기 씨가 씹힐 때마다 고슴도치 새끼를 삼키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여전히 괴로워하니. 식물이 만드는 기척도 시끄럽다며 여전히 복도에서 화분을 기르고 있니. 쉬운 고백들을 참으려고 여전히 꿈속에서조차 이를 갈고 있니. 너는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마음에 든다고 밀했었다. 나도 그때 여기가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들었다. 지난겨울 내가 내다버린 나무에서 연둣빛 잎이 나고 연분홍 꽃이 피고 있는데 마음에 들 수밖에. 지난겨울 내가 만난 젊은이가, 아니 돌멩이가, 지금 나랑 같이 살고 있다. 나도 그 옆에서 돌멩이가 되었다. 우는 돌멩이 옆에 웃는 돌멩이이거나 외치는 돌멩이 옆에 미친 돌멩이 같은. 그는 어떨 땐 울면서 외치면서 노래를 한다! 나는 눈을 감고 허밍을 넣지.//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사갈시 / 김소연
내가 설령 울부짖는다 해도 여러 서열의 천사들 중 누가 이 소리를 들어줄 것인가? 만일 천사가 하나/ 갑자기 나를 가슴에 끌어안는다면 그 강한 존재에 눌려 나는 사라지리라.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겨우 견딜 수 있는 무서운 일의 시초에 불과하기에.*//

어느 과학자는/ 태양의 흑점을 너무 오래 쳐다보았다고 했다// 무려 25초 동안이나// 그래서 눈이 멀었다고 했다/ 그래도 좋았다고 했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마다/ 노인이 되어본 적이 있었다// 무려 25년 동안이나// 그래서 죽어본 적도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좋았는지를// 말하지 않기 위해/ 바람둥이, 좌파, 모리배, 쇼퍼홀릭으로/ 산 적이 있다// 그래도 좋았고/ 그래서 좋았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파리에 대하여 생각할 것이다// 무려 25초 동안이나/ 이 아름다운 나의 케이크 위에/ 앉아 있던 파리의// 그 좋았던 시간에 대하여//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제1비가 첫 구절.

우산 / 김소연
그녀의 말과 그녀의 말 사이로/ 나무가 가지를 비틀며 끼어든다/ 나무가 빠르게 이파리를 펼쳐 보인다/ 그녀의 말과 그녀의 말이 그늘 속에서 잠잠해진다/ 그 아래를 천천히 천천히 슬리퍼를 끌며 지나가는 사람들/ 말들이 피곤을 씻고 길 위에 내려앉는다/ 말들을 신발코로 툭툭 차며 사람들이 지나간다/ 말들은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굴러간다/ 아이 하나가 뒤뚱거리다 넘어진다/ 말 하나를 손 안에 넣고 다시 일어선다/ 말 하나가 조금 더 멀리 날아간다/ 그녀의 말과 그녀의 말 사이에/ 내 말을 몰래 넣어둔다/ 하지 못한 말이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과 함께/ 나뭇가지 끝에 매달리기 시작한다/ 이 그늘을 지나가며 사람들이/ 저마다 우산을 펼쳐든다//

너머의 여름 / 김소연
목화밭 앞에서 씨익 웃는 그녀를 상상한다/ 남몰래 목화솜을 따는 그녀를 상상한다// 목화씨가 발아되기를 기다리는 그녀의/ 매일 아침을 상상한다// 혼자서 양말을 신는 게/ 소원이라던 네가 무사히 허리를 구부려 양말을 신는/ 모습을 상상한다// 잎말이나방의 유충이/ 들끓던 이파리의/ 고충이 아니라// 숨기 위해/ 이파리를 돌돌 말고 그 안에다 알을 까야 했던 유충의/ 고충에 대하여 상상한다// 유충을 박멸해야 목화가 자란다/ 들끓는 것들을 제거해야 소원을 이루는/ 무더운 여름의 무서움에 대해 생각한다// 껍질을 벌리고 솜이 튀어나오는/ 그녀의 목화를 상상한다// 목화를 수확하는/ 야무진 그녀의/ 손바닥과// 장대비와/ 바람과/ 땡볕과/ 콧잔등의 땀방울과// 양말을 신지 않는/ 이 여름이 좋다고 너는 말한다/ 우리는 슬리퍼처럼 헐거워진다//

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 / 김소연
미리 무덤을 팝니다 미리 나의 명복을 빕니다 명복을 비는 일은 중요합니다 나를 위한 너의 오열도 오열 끝의 오한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승에서의 지복도 나는 꿈꾸지 않습니다 궁극이 폐허입니다 한 세기가 지나갈 때마다 한 삽씩 뜨거운 땅을 파고 이 별의 핵 지대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너를 만나길 지나치게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젠 그 안에 들어가 미리 누워봅니다 생각보다 깊고 아득합니다 그렇지만 무섭고 춥습니다// 너는 내 귀에다 대고 거짓말 좀 잘해주실래요 너무나 진짜 같은 완벽한 거짓말이 그립습니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찾듯 거짓말 덕분에 이 우주는 겨우 응석을 멈춥니다 어지럽습니다 체한 걸까요 손을 넣어 토하려다 손을 들고 질문을 합니다 여긴 왜 이렇게 추운가요// 너는 여기로 올 때에 조심해서 와주실래요 뒤를 밟는 별들과 오다 만난 유성우들은 제발 좀 따돌리고 너 혼자 유령처럼 와주실래요 내 몸은 너무 오래 개기월식을 살아온 지구 뒤편의 달, 싸늘하게 식었을 뿐 새가 가지를 털고 날아만 가도 요란을 떠는, 풍화도 침식도 없는 그늘입니다. 뜨거운 속엣것이 고스란히 보존된 광대한 고요란 말입니다 춥습니다// 칼을 들어 한 가지 표정을 새기느라 또 한 세기를 보냈습니다 나를 비출 거울이 없었으므로 아마도 난자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하는 데까진 해 보았습니다 한 가지 표정이기를 바랍니다 피를 너무 흘려 몸이 좀 싸늘합니다 냉기 가득한 살갗에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가 반가워 죽겠습니다// 쥐똥나무 꽃향기가 지독해서 귀를 틀어막고 누워 있습니다 이 꽃이 지고 나면 이 별에는 더위가 시작될 겁니다// 너는 지금 간신히 내 몸 속에 도착해 있습니다 해수의 밀도는 낮아집니다 간빙기를 끝내는 소리가 지구 바깥에서 우렁찹니다 깊은 땅속이 먼저 뜨거워지고 빙산은 모든 것을 묵인하고 버티려다 쩍쩍 갈라져 천둥 같은 울음을 보냅니다 눈물이 이토록 범람하면 지형이 곧 바뀔 겁니다 내 몸에서 거대한 얼음 조각들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서로 부딪쳐 얼음 멍이 들고 있습니다 무정할 수는 없는 순간입니다//

유월 오후의 우유 / 김소연
우리를 우리라고 불렀던/ 마지막 시간이 끝났다// 수천 명이 은닉해 살 수 있는/ 거대한 건물의 뒷문으로// 우리는/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빠져나왔다/ 모여서 담배를 피웠다/ 하얀 신발 코에 검은 재가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붉은 입술로부터 희디흰 연기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보고 있었다// 자판기에서/ 우유 버튼을 눌러/ 종이컵을 손에 쥐었다 비로소 따뜻했지만// 찰랑거리는 컵 속에서/ 수천 명이 은닉해 절규하는/ 거대한 건물이 비쳤다// 우리는 입술을 오므리고서/ 그 희디흰 물을/ 한 모금씩 마셨다// 있잖아,/ 나는 포유류의 젖이 왜 흰색인지 이제야 이해가 되려고 해/ 라고 누군가에게 말하지는 못했다// 종이컵을/ 손안에서 구기며/ 이제야 첫 끼를 때웠네,/ 라는 혼잣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수 없는 시간 동안/ 나는 매일 찬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그날을 떠올리며// 허연 우유 속을 유영하며 지냈다/ 여자 하나가 등을 보이고 돌아앉은 순간이었지만/ 그 여자의 아기는 가장 살고 싶어 한 순간이었다// 수천 개의 심장이/ 제각각 출렁이고/ 수천 개의 맥박이/ 제각각 요동치는// 누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모두가 이 건물에 은닉해 있다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수천 개의 창문이 꽉꽉 닫힌/ 거대한 건물의 아주 자그마한 처마 아래에서/ 유월이 오면// 꼭 만나자는 약속 대신에/ 나는 쪼그리고 앉아 희디흰 목화솜을 벌려// 씨를 꺼내 땅에 묻었다/ 이젠 정말 끝이구나 하면서//

있다 / 김소연
기러기가/ 기러기처럼 모여서/ 날아가고 있다 시커먼 물웅덩이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기러기들 속에/ 거위가 다가와/ 주둥이를 대고 있다// 빗방울이 만든 웅덩이에/ 빗방울이 모여지고 있다/ 하나가 수면에 닿을 때마다/ 동심원이 점점 더 커다래지고 있다// 완벽한 세계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한 이이가 바라보고 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짚고/ 갸웃거리다/ 종이배를 띄우고 있다/ 출항하지도/ 정박하지도 않는 종이배에/ 다른 아이가 팔을 뻗어/ 작은 종이배를 조심스럽게 포개고 있다/ 인부들이 높다랗게 포갠 기왓장을 이고 지나가고 있다/ 저쪽에서 인부들이// 인부들을 부르고 있다/ 지붕없는 집에서 기왓장을 이고서/ 아이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새장 / 김소연
가장 훌륭한 죄를 생각해 냈다며/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어서 당신은 내 앞에 나타났다/ 무럭무럭 죄가 자라나서 성당 지붕이 뽀족해졌고/ 지붕을 떼어내 모자를 쓰고 왔다고 당신은 말했다/ 지을 죄를 미리 생각해두느라 꼬깃꼬깃해졌다고/ 새가 보고 싶어서/ 개구리를 꿀꺽 삼키려고 너무 가는 목을/ 이리저리 젖히는 왜가리를 당신은 그렸다고 했다/ 당신에게 줄 새장을 손에 들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무 큰 새를 그린 너무 큰 손으로 당신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머리를 조아렸다/ 무릎을 꿇고서야 무릎이 생겨났다//

돌이 말할 때까지 / 김소연
얘기를 끝내자마자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창 바깥을 쳐다보았다/ 백색의 햇살 너머 북한산을 보았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뭘 보고 있는지 묻는 그에게 나는 날씨가 좋다고 말했다/ 버스에 그를 태워 보내고 나는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책을 얼굴에 덮고 잠이 들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들과 우정을 나눌 차례가 왔고 아침이 왔다/ 주워온 조약돌 하나를 꺼내어 마주했다 돌이 말을 할 때까지//

가지 않네, 모든 것들 / 김소연
지난한 종이들 너무 많아라/ 정든 세상, 지루했던 스무 살들이여 잘 가거라// 공터에 나와서 그대와 나/ 어두운 그림자처럼 우두커니 서서/ 식는 불꽃 바라보고 있다/ 나무 막대로 한 번 뒤적일 때마다/ 작은 불꽃들 위로 위로 솟는다/ 그대 옛여인과 내 옛남자의 사진/ 한데 섞여 재가 되고 있다/ 수많은 한숨과 적절한 외로움의 나날들/ 그대 일기장과 내 일기장/ 몇 권의 노트로 요약되는 우리의, 그렇게/ 무관했던 세월들/ 한데 섞여 재 될 수 있으니/ 뼈아프게 행복하여라// 나는 석유 붓고 그대 성냥을 긋고/ 저 지리한 편지들과/ 시효 지난 약속들 다 타는 동안// 부디 그대여/ 저 먼곳으로 날아가보렴, 그대 여자가 살던/ 그 동네로, 그대 외로운 수음의 날들이 견뎌낸/ 그 옛집으로 날아가렴, 훠이훠이 그렇게/ 그곳에 마음 두고 몸만 오렴/ 저걸 봐, 정발산 저 쪽으로 쓰러지는 저 해를,/ 마지막처럼 자기의 빛을/ 온 마음으로 산란시키는 저것을/ 그러나/ 내일 또 반복되는 저 석양을/ 그대는 다 타버린 우리의, 그러나 각자의/ 내력을 움켜쥐며/ 아, 따뜻하다// 하며 웃네/ 너무 다르게 살아왔어도/ 거기서 거기인, 그렇고 그런/ 짧은 청춘의 흔적들 이제 한 줌 재가 되었다/ 새카매진 손 마주잡고/ 우리 현관문을 연다// 그대와 나, 두 켤레의 신발이 현관에 남는다//

불귀 2 / 김소연
이해한다는 말// 이러지 말자는 말// 사랑한다는 말/ 사랑했다는 말// 그런 거짓말을 할수록 사무치던 사람/ 한번 속으면 하루가 갔고// 한번 속이면 또 하루가 갔네/ 날이 저물고 밥을 먹고// 날이 밝고 밥을 먹고// 서랍 속에 개켜 있던 남자와 여자의 나란한 속옷// 서로를 반쯤 삼키는데 한달이면 족했고// 다아 삼키는데에 일년이면 족했네/ 서로의 뱃속에 들어앉아 푸욱푹// 이 거추장스런 육신 모두 삭히는 데에는 일생이 걸린다지// 원앙금침 원앙금침// 마음의 방목 마음의 쇠락 내버려진 흉가// 산에 들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쑥부쟁이, 아카시아// 그 향기가 무모하게 범람해서// 나, 그 향기 안 맡고 마네// 너무 멀리가지 말자는 말// 다 알 수 있는 곳에 있자는 말/ 이해한다는, 사랑한다는, 잘 살자, 잘 살아보자// 그런 말에도 멍이 들던 사람// 두 사람이 있었네//

우리 바깥의 우리 / 김소연
우리는 서로의 뒤쪽에 있으려 한다// 등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다만 등을 보고 있으려고// 표정은 숨기며/ 곁에는 있고 싶어서// 옆자리는 비어 있고/ 뒤에 서서 동그랗고 까만 팔꿈치를 쳐다보면서/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등 뒤에서 험담이 들려올 때/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제대로 듣지 못하면서// -말하는 것 좀 봐/ -말하지 못하는 것 좀 봐// 단 하나의 사건에서/ 모두의 죄들이 한꺼번에 발각되는 순간이 온다// -이제 전부가 죄인이 되었는데 앞으로 벌은 누구에게 받나/ 추위 때문에 소름이 돋는 건지/ 소름이 돋기 때문에 춥다고 느끼는 건지//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너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우리 바깥에는 우리가/ 우리로부터 바깥으로 우리에게로/ 우리 바깥의 우리를// 우리는 마주 보고 있지 않았다/ 마주: 이것은 바라보는 걸 뜻하지 않았다 언제 단념하게 될지 지켜보는 걸 뜻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말하는 자의/ 두려움을 보고 있다// 분명히 맨 뒤에 서 있었는데/ 자꾸 맨 앞에 서 있다// 우리는 등을 보이지 않으려다/ 곧 얼굴을 다 잃어버리겠다//

빛의 모퉁이에서 / 김소연
어김없이 황혼 녘이면/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 이따금 나는 무지막지한 덩치가 되고/ 이따금 나는 여러 갈래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의 충고를 따르자면/ 너무 빛 쪽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불빛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국화 그림자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었다지만/ 내 그림자는 나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다// 커다란 건물 아래에 서 있을 때/ 그는 작별도 않고 사라진다// 내가 짓는 표정에 그는 무관심하다/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에 그는 관심이 있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지금은 길을 걷는 중이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싶다//

                타만네가라 / 김소연

지느러미 달고/ 바다 속을 떠돌아다니며/ 물고기들 손끝으로 만지다 놓아주던/ 여름이 있었고// 아무 말 하지 않고/ 어떤 사람도 떠올리지 않은 채/ 한쪽 끝과 한쪽 끝에/ 가난한 집 한 채가 놓인 길 위를/ 맨발로 걷기만 하던/ 여름이 있었고// 소낙비를 맞아/ 뚝뚝 물이 떨어지는 곳을 입고/ 맑은 하늘이 다 말려줄 때까지/ 강 건너는 물소를 쳐다보며 앉아 있던/ 여름이 있었고// 젖은 나뭇잎들 끌어 모아/ 한 잔 찻물을 끓이기 위해/ 한나절을 불 지피던/ 여름이 있었다// 10월도 여름이었고/ 11월도 여름이었고/ 12월도 여름이었으나// 눈 뜨면 봄이었고/ 그날 아래 가을이었고/ 꿈속은 겨울이었던/ 여름이었다//

* 타만 네가라Taman Negara: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말레이시아의 열대우림. 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


손아귀 / 김소연
탁상시계를 던져본 적이 있다/ 손아귀에 적당했고 소중할 것도 없었던 것을// 방바닥에 내던져/ 부서뜨려본 적이 있다// 부서지는 것은 부서지면서 소리를 냈다/ 부서뜨리는 내 귀에 들려주겠다는 듯이 소리를 냈다// 고백이 적힌 편지를/ 맹세가 적힌 종이를// 두 손으로 맞잡고/ 천천히 찢어본 적이 있다// 이렇게 가벼운 것이잖아 하며/ 손목의 각도를 천천히 틀면서 종이를 찢은 적이 있다// 찢어지는 것도 찢어지면서 소리를 냈다/ 찢고 있는 내 귀에 기어이 각인되겠다는 듯 날카롭게/ 높은 소리를 냈다// 무너지는 것들도/ 무너지는 소리를 시끄럽게 낸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는 것을 항변하는/ 함성처럼 웅장하게 큰 소리를 냈다// 이 소리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 소리들을 내가/ 기억하는 것이 나의 무고를 증명한다는 듯/ 기억을 한다 하지만// 망가지는 것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조용히 오래오래 망가져 간다// 다 망가지고나서야/ 누군가에게 발견이 되는 것이다// 기억에만 귀를 기울이며 지나간 소리들을 명심하느라/ 조용히 오래오래 내 귀는 멀어버렸다// 한밤중에 눈을 뜨면 내가 키우는 식물이/ 자객처럼 칼을 뽑아 나를 겨누고 있다//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매일매일 무화과처럼 나를 말린다// 시원하게 두 동강이 나서/ 벌레가 바글대는 내부를 활짝 전개할 날을 손꼽는다// 오늘 아침 나의 식물은/ 기어이 화분을 두 동강 냈다// 징그럽고 억척스럽고 비대해진 뿌리들이/ 그 안에 갇혀 있었다//

내 방에서 하는 연설 / 김소연
당신은 왜 그런 배역을 맡았습니까/ 직장인의 첫인상은 어떻게 만들어야 합니까/ 한순간도 위험하지 않은 인상착의를 소화하고서/ 단 한 번도 위험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군요// 암암리/ 암암리// 참담합니까/ 전혀 참담하지 않습니까/ 참담합니까//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그랬던 적도 있고 안 그랬던 적도 있습니다/ 사실이거나 음해이거나/ 광산이거나 공장이거나/ 낙태 혹은 패혈증// 선생님의 편견에 부합되지 않았다고 해서/ 왜 그렇게까지 당황하셨습니까// 실업수당이거나 자업자득이거나/ 바르는 약이거나 먹는 약이거나// 나름의 이유는 있었겠지요/ 각자의 선택에 달렸겠지요// 드라마입니까 프로파간다입니까/ 누구 편에 서겠습니까/ 단결 또는 분열/ 승리 혹은 세력// 여러분께 또 묻겠습니다// 조용한 힘만을/ 미미한 일들을/ 욕실과 주방과 유언지를/ 기억과 기회를/ 가까운 사람을// 돌려주세요/ 의외의 것들을/ 분노를// 리얼리스트를 위협 인물을/ 헛소리마, 개자식들아!/ 무엇보다 유머를// 갈등의 본질은 늘 알던 것이었겠지요/ 실패하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실패하는 것을 경험했겠지요/ 이것은 지켜보는 것만을 뜻하진 않습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 하나 마나 한 소리/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한 번 더 하고 싶습니다// 사실은 누군가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되어버리고 만다는 걸 잘 아니까/ 선생님의 편견은 부당하게도 당당해질 수 있었습니다// 암암리/ 암암리// 취소 버튼을 누르세요/ 참담해지세요/ 실패가 아니라 비굴함이라고 적어두세요// 여러분께 묻지 않겠습니다/ 여러 겹의 따옴표 속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모르는 척하느라 애쓰지 마세요// 내 옆에서/ 내 뒤에서//

목련나무가 있던 골목 / 김소연
언덕 아래 사람 사는 불빛이 차오릅니다 흰 입김을 앞으로 내밀면서 언덕을 내려오는 당신, 한 쪽 손에 들려진 짐꾸러미를 잠시 내려놓고, 한 쪽 어깨에 짊어진 가방을 내려놓고, 당신은 나를 올려다봅니다// 기다리던 택시가 오고, 당신은 가방이랑 짐꾸러미를 챙겨 들고 차 문을 닫습니다 짐을 챙기느라 당신을 미처 챙기지 못한 당신은 내 옆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며 당신이 서 있습니다 깜박깜박 졸음에 빠져듭니다// 깨우려다 그만둡니다 내 주먹마다 흰밥이 피고 그 밥알들이 환하게 저물어 다 떨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당신의 이불이 되어줄 때까지, 나는 혼자 뜨거운 차 한 잔을 오래 마시며 이 겨울을 지나가고 싶습니다// 눈이 옵이다 저 저녁을 다 덮는 흰 이불처럼 눈이 옵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당신은 짧은 길을 길게 돌아서, 찬 기운 가득한 빈집에 들어가 버리고, 당신이 남긴 당신과 나는, 이 눈을 다 맞고 서 있습니다// 봄이 올 때까지 주먹을 펴진 않을 겁니다 내 주먹 안에 당신에게 줄 밥이 그릇그릇 가득합니다 뜸이 잘 들고 있습니다 새봄에 새 밥상을 차리겠습니다 마디마디 열리는 따뜻한 밥을 당신은 다아 받아 먹으세요//

시인 지렁이 씨 / 김소연
가늘고 게으른 비가 오래도록 온다/ 숨어 있던 지렁이 씨 몇몇이 기어나왔다/ 꿈틀꿈틀 상처를 진흙탕에 부벼댄다/ 파문이 인다/ 시커멓고 넓적한 우주에서/ 이 지구는 수박씨보다 작고,/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지렁이 씨의 꿈틀거림도 파문을 만든다/ 광활한 우주를 지름길로 떠돌다 돌아온 빗방울에는/ 한세상 무지렁이처럼 살다 간 자들의 눈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눈물이 파문을 만든다/ 빗방울도 파문을 만든다/ 이토록 오랜 비도 언젠가는 그치리라// ......그러면?// 그러면 지렁이 씨들이 꿈틀꿈틀, 생애 전체가 환부인 꿈틀꿈틀 그들의 필적을 나는 바라보겠고, 시 쓸 일이 없겠다//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 김소연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입술을 조금만 쓰면서/ 내 이름을 부르고 나니/ 왼 손바닥이 가슴에 얹히고/ 나는 조용해진다// 좁은 터널을 통과하려는/ 물줄기의 광폭함에 가슴이 뻐근할 뿐이다// 슬프거나 노여울 때에/ 눈물로 나를 세례하곤 했다/ 자동우산을 펼쳐 든 의연한 사내 하나가/ 내 처마 밑에 서 있곤 했다// 이제는/ 이유가 없을 때에야 눈물이 흐른다// 설거지통 앞/ 하얀 타일 위에다/ 밥그릇에 고인 물을 찍어/ 시 한 줄을 적어본다// 네모진 타일 속에는/ 그 어떤 암초에도 닿지 않고/ 먼길을 항해하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방주가 있다// 눈물로 바다를 이루어/ 누군가에게 방주를 띄우게 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평생토록 새겨 왔던 비문(碑文)에/ 습한 심장을 대고/ 가만히 탁본을 뜨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너를 이루는 말들 / 김소연
한숨이라고 하자/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할 재간이 없어/ 지구 바깥을 맴돌며 평생토록 야간 노동을 하는/ 달빛의 오래된 근육// 약속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한 번을 잘 감추기 위해서 아흔아홉을 들키는/ 구름의 한심한 눈물// 약속이 범람하자 눈물이 고인다 눈물은 통곡이 된다/ 통곡으로 우리의 간격을 메우려는 너를 위해/ 벼락보다 먼저 천둥이 도착하고 있다/ 나는 이 별의 첫 번째 귀머거리가 된다/ 한 도시가 우리 손끝에서 빠르게 녹슬어간다// 너의 선물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상어에게 물어뜯긴 인어의 따끔따끔한 걸음걸이/ 반짝이는 비늘을 번번이 바닷가에 흘리고야 마는/ 너의 오래된 실수// 기어이/ 서글픔이 다정을 닮아간다/ 피곤함이 평화를 닮아간다/ 고통은 슬며시 우리 곁을 떠난다// 소원이라고 하자/ 그것은 두 발 없는 짐승으로 태어나 울울대는/ 발 대신 팔로써 가 닿는 나무의 유일한 전술/ 나무들의 앙상한 포옹//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상처는/ 나무 밑동을 깨문 독사의 이빨 자국이라고 하자/ 동면에서 깨어난 허기진 첫 식사라 하자/ 우리 발목이 그래서 이토록 욱신욱신한 거라 해두자//

미래가 쏟아진다면 / 김소연
나는 먼 곳이 되고 싶다// 철로 위에 귀를 댄 채/ 먼 곳의 소리를 듣던 아이의 마음으로// 더 먼 곳이 되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할까/ 꿈속이라면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악몽을 꾸게 될 수도 있다// 몸이 자꾸 나침반 바늘처럼 떨리는 걸로 봐서/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봐 괴로워하면서/ 몸이 자꾸 깃발처럼 펄럭이는 걸로 봐서/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을까봐 괴로워하면서// 무녀리로 태어나 열흘을 살다 간/ 강아지의 마음으로/ 그 뭉근한 체온을 안고 무덤을 만들러 가는/ 아이였던 마음으로// 꿈에서 깨게 될 것이다/ 울지 마, 울지 마/ 라며 찰싹찰싹 때리던 엄마가 실은/ 자기가 울고 싶어 그랬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여기에 와서/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든다// 꿈이라면 잠깐의 배웅이겠지만// 불행히도 꿈은 아니라서 마중을 나온 채/ 그 자리에서 어른이 되어간다/ 마침내 무엇을 기다리는지 잊은 채로// 지나가는 기차에 손을 흔들어주는/ 새까만 아이였던 마음으로// 지금 나는 지나가는 기차가 되고 싶다// 목적 없이도 손 흔들어주던 아이들은/ 어디에고 있다는 걸 알고 싶다//

장난감의 세계 / 김소연
전화국을 지나/ 병원을 지나 삼거리에 밥 먹으러 나갔다/ 생선 한 마리를 오래 발라 먹었다// 제 몸 몇 배쯤의 나방을/ 머리통만 야무지게 먹고서 나머지를 툭 버려버리는/ 도마뱀을 지켜보면서// 하루의 절반/ 나머지 절반// 어떤 절규가 하늘을 가로질러 와 발밑에 떨어졌다/ 나는 오후에 걸쳐 있었고 수요일에 놓여 있었다// 같은 장소에 다시 찾아왔지만/ 같은 시간에 다시 찾아가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없었던 것들이 자꾸 나타났고/ 있었던 것들이 자꾸 사라졌다 이를테면/ 장난감을 선물 받은 가난한 아이처럼/ 믿어지지 않게 믿을 수 없게// 아침에만 잠시 반짝거리는 수만 개의 서리// 하루의 절반/ 나머지 절반// 오전엔 건너의 소가 소에게 뿔을 들이받았고/ 오후엔 어미 고양이가 아기 고양이를 물고 다녔다// 개구리야, 너는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에 장난감이었단다/ 그때 나는 장난감의 내부를 꼭 뜯어보고야 말았지// 개구리를 따라 강가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 강가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깊어 빠져 죽기에 충분했다.//

막차의 시간 / 김소연
버스가 출발의 형식으로서/ 우리를 지나쳐버렸다// 멀어졌지만/ 저것은 출발을 한 것이다// 멀어지는 방식은 모두 비슷하다/ 뒷모양을 오래 쳐다보게 한다// 버스는 한 번 설 때마다 모두의 어깨를 흔든다/ 집에 갈 수만 있다면 이 흔들림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아침이면 방에서 나를 꺼냈다가/ 밤이면 다시 그 방으로 넣어주는 커다란 손길/ 은혜로운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고구마를 키운 이후로/ 시간도 얼마나 무럭무럭 자라는지를 알게 되듯/ 슬픔 뒤에 더 기다린 슬픔이 오는 게 느껴지듯// 무언가가 무성하게 자라지만/ 예감은 불가능해진다// 휙휙 지나쳐 가는 것들이/ 내 입김에 흐려질 때// 차가운 유리창을 다시 손바닥으로 쓰윽 닦을 때/ 불행히도 한 치 앞이 다시 보인다// 몸이 따뜻해지는 일을 차분하게 해본다/ 단추를 채우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둔다//

1984년 / 김소연
기름 얼룩에 절은 옷가지며 이불들 어머니는 개켰다 폈다만 하였다 풍경이 일그러진 집안 내력을 장마 끝에다 널어 놓았다 양지에 앉아서 동생은 젖어 못 쓰게 된 일기장을 태웠다 잘 타지 못하는 젖은 생각들이 매운 연기를 피워 올렸다 하얀 안개를 내뿜으며 저편에서 소독차가 달려왔다 꽁무니에는 아이들이 우루루 따라가고 있었다 휘어지고 모서리가 터진 장롱처럼 나는 골목에 우두커니 세워져 있었다 소각되는 미래가 집집마다 연기로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곰팡이 호흡을 했다/ 아침도 어두웠다/ 조그만 비에도 우리는 어지러웠다/ 물의 발바닥이 밟고 다니는 낮은 위치를/ 더 낮게 낮추기도 했다/ 꿈들은 자꾸 누전되었다/ 고래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는 젖은 꿈을 꾸었다/ 물이 빠진 자국은 뚜렷한 선을 남겼고/ 우리는 해마다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주문을 외며/ 도배지를 발랐다// 더 이상은 젖을 꿈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슨 힘일까,/ 벽지를 들고 곰팡이가 일어서고 일어나는 지칠 줄 모르는 그것은//

이 몸에 간질간질 꽃이 피었네 / 김소연
오래도록 밟아서 생긴 숲길을/ 아무 작정 없이 걸어보았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눈치 채는 이가 없었네/ 품에 안겼던 사내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게 되자/ 심장에 뿌리를 박고/ 분꽃들이 만개했네/ 다 알 만한 물방울이/ 풀 끝에 맺혀 있었네/ 아득히 들리던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칠 때/ 땀구멍을 뚫고 채송화가 피었네/ 멀리 누런 벼들은/ 논바닥에 발톱 벗어둔 채/ 누워 있었네/ 나는 발이 시렸네/ 발가락 사이로 패랭이가 피었네/ 허벅지를 타고 나팔꽃이 만개했네/ 오래도록 밀봉해 둔 과실주를/ 아무 작정 없이 열어 독배하였네/ 새들이 울어댈 때 귓속에 길이 열렸네/ 길을 잃어도 길 속에 있었네//

끝물 과일 사러 / 김소연
끝물은/ 반은 버려야 돼./ 끝물은 썩었어. 싱싱하지 않아.// 우리도 끝물이다.// 서로가 서로의 치부를 헛짚고/ 세계의 성감대를 헛짚은./ 내리 빗나가던 선택들. 말하자면/ 기다림으로 독이 남는 자세./ 시효를 넘긴 고독. 일종의 모독./ 기다려온 우리는 치사량의 관성이 있을 뿐./ 부패 직전의 끝물이다.// 제철이 아니야./ 하지만 끝물은/ 아주/ 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