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댓말의 세계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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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1. 11. 30.

티브이에서 토크쇼나 인터뷰를 시청하다 보면 자연스레 반말을 섞어 쓰는 경우를 목격할 때가 많다. 그때마다 나는 괜스레 당사자도 아니면서 ‘왜 반말이람?’이라고 혼잣말을 한다. 상대방이 나이가 어릴 때, 나이가 어린 여성일 때에 반말은 더 자주 목격이 된다. 물건을 판매하는 이가 고객인 나를 포함해 내가 살 물건에까지 표하는 이상한 존칭도 이제는 다반사가 됐다. 어법을 몰라서 그러는 걸로 느껴진다기보다는 어법을 어기면서라도 최대치의 존칭을 써서 고객을 대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느껴진다. 모두가 그렇게까지 존칭을 하면서 상품을 팔기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강박일 것이다.

‘했음’ 같은 식으로 소위 ‘음슴체’도 상용화된 지 오래다. 반말을 하기도 뭣하고 존댓말을 하기도 뭣한 어정쩡한 경우일 때에 사용한다. 어감은 고압적이기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하대의 느낌이 묻어 나온다. 말로 할 때에는 사용할 리 없는 문어체다. 문자메시지와 인터넷 시대, 즉 타이핑으로 주로 대화를 하는 시대의 ‘하오체’나 ‘하게체’인 셈이다. 특히나 유머를 구사할 때 이 어법은 절묘하게 사용되곤 한다. 자기 경험담을 최대한 객관화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내용과 어법의 질감 차이를 발생시킨다. 청자와 이야기 사이에서 기존의 스토리텔링이 소격효과를 발휘해 왔다면, 이 경우는 화자와 이야기 사이에서 소격효과를 발휘해 유머를 배가시킨다.

오늘은 라디오 출연차 방송국에 가면서 내내 생각했다. 진행자가 나보다 10년 조금 못 미치는 윗사람인데, 호칭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에 대해 고민을 했다. 같은 분야 사람은 아니니 ‘선배’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고, ‘○○씨’라는 호칭이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지만 어감상 왠지 모를 하대의 느낌으로 통용된다. 그 나이라면 그 분야에서 대체로 선생님으로 불릴 것을 예상해 ‘선생님’이라고 부르자니 내 나이가 제자뻘은 아니고,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아서 최대한 호칭을 부르지 않는 어법을 사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낯선 후배와 자주 말을 주고받을 관계가 형성될 때마다 호칭을 정리하는 일을 우선 겪게 된다. 선생님이라고 부르자니 살갑지가 않고, 선배라고 하기엔 연령 차이가 크고, 언니 혹은 누나 같은 호칭은 우리 사이에 아직 어울리지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덧 주로 ‘선생님’이라 불리는 사람이 돼 있지만, 여전히 나에겐 가장 민망한 호칭이다.

선생님이라는 말에는 존경심과 그에 값하는 업적 같은 게, 최소한 인품 같은 게 포함되는 것만 같아 자격이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샘’이라고 좀더 다정한 어법으로 옮겨 가게 되면 그나마 덜 불편하다.

나는 대체로 모두에게 존댓말로 일관한다. 가족이나 진배없이 친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존댓말을 한다. 상대를 존중하고 싶은 마음 때문만은 아니다. 존댓말의 세계가 너무 복잡해서 귀찮을 지경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자연스레 반말을 할 때도 굳이 존댓말을 챙겨서 한다. 존댓말의 거리감이 못내 서운해서 반말을 종용해 오는 경우도 많다. 존댓말에 포함된 게 거리감이 아니라는 구차한 설명을 해 가며 존댓말을 나는 고집한다.

왜냐하면 그 경우는 우리 사이가 사적인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적 영역에서 교제가 행해질 때 반말로 호형호제를 해 가면서 쌓은 친화력에 공정함이 사라질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 주며 반말을 사용해 온 한 선생님에게 얼마 전에 받은 메일에는 존댓말이 적혀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나를 존중해 주고자 하는 선생님의 깊은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서운했다. 거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반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면 덜 서운했을까. 아마도 덜 서운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