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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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1. 12. 3.

김행숙 시인
1970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현대문학》에 「뿔」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노작홍사용문학상, 전봉건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이다. 시집으로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 『적막한 손』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등이 있다.

 



1월 1일 / 김행숙
공중으로 날아가는 풍선을 보면/ 신비롭습니다. 손바닥만 한 고무풍선에/ 공기를 모으면 점점 부푸는 것,/ 점점 얇아지는 것…… 꼭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놓치면 영영 잃어버리는 것……// 추운 겨울밤 손바닥을 오므려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길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이 지붕 위로 둥둥/ 떠오를 거예요. 이들은 언젠가부터 마음에/ 공기가 가득해진 사람들이었어요./ 지붕 위에서 수레를 잃은 노점상과 지갑을/ 잃은 취객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에요./ 두 사람은 허공에서 잠시 얼어붙은 허깨비/ 같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을 모르겠습니다."// “형씨, 혹시 담배 가진 거 있습니까?"/ 추운 겨울밤 손바닥을 비벼서 불을/ 피울 수 있다면……// ​우리는 저마다 기다란 불꽃 같을 거예요./ 우리가 감추는 꼬리처럼 공중으로 날아가는/ 재를 보면 오늘이 1월 1일 같습니다. 작년/ 이맘때도 꼭 이랬어요. 그날도 나는 길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구걸을 했어요./ 아침에 본 거울처럼 그가 나를 슬프게/ 건너다보고 있었어요.//

커피와 우산 / 김행숙
“우산을 두고 갔네. 걘 늘 정신이 없지. 그 대신 매일같이 체중계에 올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제 무게를 달아본다고 해. 조금 빠지고 조금 찐다고 해도 살이야말로 존재의 확고한 고정점이지.” 그래서 우린 살을 꼬집어보곤 하잖아.// “내게 「커피와 담배」는 진정한 옛날 영화야. 꽤 유명한 배우들이 여럿 카메오로 출현했었지. 아는 얼굴이 잠깐씩 비춰지는 거야. 그러면 모든 게 우연처럼 느껴져. 커피 한 잔, 담배 두 개비면 뭐든 충분했다는 기분이 들지. 우리가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절은 이제 전생이 되어버렸어.” 그러니까 향수란 것은 유령의 감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어.// 이런 비닐우산은 투명하고 가벼워 유령의 손에 쥐여주면 딱 좋을 것 같다. 유령도 비에 젖을 때가 있겠지. “우산은 커피 한 잔 값이면 살 수 있어. 그 돈으로 담배 한 갑을 살 수도 있지. 우산과 커피와 담배는 모두 비와 썩 잘 어울린단 말이야.”// “그렇다면, 길 건너 편의점에 이 커피를 들고 가서 우산으로 바꿔 올 수 있는 사람, 있어? 우산을 물고, 빨고, 태워, 연기로 날려버릴 수 있는 사람, 여기, 누구, 있어? 그럴 수 없다면, 우산과 커피와 담배의 값이 같다는 게 무슨 소용이람. 결국 우리는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거야.” 하나를 가지기 위해 내가 포기한 것들을 말해줄까?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네.// 이 카페로 걔가 다시 돌아왔다. 우산을 찾기 위해 너는 뭘 잃어버렸니? 누구에게 버림받고 비닐우산 하나를 지키려는 거니? “오늘은 정말이지 비를 맞고 싶지 않아. 비를 맞으면 죽고 싶을 거야.” 비는 아까 그쳤어. 그렇지만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다, 그치? 하늘빛, 너의 얼굴빛……//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김행숙
내 기억이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사람처럼 내 기억이 내 팔을 늘리며 질질 끌고 다녔다, 빠른 걸음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촛불이 바람벽에다 키우는 그림자처럼 기시감이 무섭게 너울거렸다/ 사람보다 더 큰 사람그림자, 아카시아나무보다 더 큰 아카시아나무그림자/ 그러나 처음 보는 노인인데…… 힘이 세군, 내 기억이 벌써 노인을 만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나를 돌보고 있었다// 기억이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

이 세계 / 김행숙
이것을 이 상자에 넣었으므로 저쪽 상자엔 넣을 수 없지*// 이것이 네 신발이야/ 걷고 뛰어라, 상자가 충분히 커다랗다면 저쪽 세계를 기웃거릴 이유가 없지/ 쫓아가는 경찰도/ 쫓기는 도둑도 모두 죽어라 뛰어간다/ 상자를 살짝 흔들면 경찰이 쫓기고 도둑이 죽어라 쫓아간다,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인데/ 밤이 오면 너는 신발을 성경책처럼 가슴에 품고 잠이 드네/ 내 아기, 세상모르게 잘 자라, 모든 강물이 다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단다**/ 나는 신발 공장의 일개 노동자/ 새 신발을 새 상자에 넣는 일을 한다네/ 상자 속에, 상자 속에, 상자 속에, 상자 속에······ 하, 이것은 끝이 없네/ 이것이 깊고 깊은 어둠이야/ 어둠 속으로/ 손을 넣어 잘 찾아봐, 이것이 네 신발이야//
* 황 정은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p.21,

** 「전도서」 1:7

이 책 / 김행숙
낭독을 하겠습니다./ 나는 이 책의 저자를 알지 못하지만, 킁킁 짐승의 냄새를 맡듯이 책의 숨소리, 문체의 숨결을 느낄 때./ 내가 이 책을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책 뒤에 숨겨진 사랑을 내가 은신시켰다고 생각해요./ 아아, 나는 사랑 없이는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해요. 바람에 맡겨진 나뭇잎 같은 마음으로 낭독을 하겠습니다./ 익사하려는 사람이 서서히 잠수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고개를 숙이며 낭독하겠습니다./ 익사하려는 사람이 갑자기 허우적거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머리를 쳐들며 낭독하겠습니다./ 이 책을 부정하고, 강하게 부정하는 마음으로 낭독하겠습니다./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녹일 듯이 뜨거운 목소리를 냅니다./ 목소리에게 허공은 펄럭이는 종이입니까./ 내 목소리도 하얗고 허공도 하얗습니까./ 목소리는 허공을 만지고 허공은 목소리를 만집니다./ 이 책이 낭독되고 있습니다./ 내 목소리도 만질 수 없고 허공도 만질 수 없습니까. 지금도./ 지금도 이 책은 이 책입니까.//

                        뿔 / 김행숙


우산을 모자처럼 쓰셨네/ 어디를 향해 서 계신가, 알 수 없네/ 따라서 내 시선은 자유롭네/ 찬찬히 훑어나가다/ 걸레처럼 훔쳐보지만/ 시선의 애무로는 벗길 수 없네/ 큰 모자, 저 엉뚱하게 큰 머리/ 실실실 비는 내려/ 우산을 모자처럼 쓰셨네/ 내 시선은 비처럼 주저앉네/ 앉은걸음으로 바짓부리 맴을 도네/ 나이테를 그리고 있어/ 늙어가는 남자/ 부동의 남자/ 우산을 모자처럼 쓰셨네/ 큰 모자 아래서/ 작은 계집애 조잘대지/ 재밌네, 저 엉뚱하게 큰 머리// 빙빙 도네/ 어지러워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네/ 머리 위에 그 남자의 뿔/ 말은 안 했지만/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던 것이네//


저녁의 감정 / 김행숙
가장 낮은 몸을 만드는 것이다/ 으르렁거리는 개 앞에 엎드려 착하지, 착하지, 하고 읊조리는 것이다/ 가장 낮은 계급을 만드는 것이다, 이제 일어서려는데 피가 부족해서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현기증이 감정처럼 울렁여서 흐느낌이 되는 것이다, 파도는 어떻게 돌아오는가/ 사람은 사라지고 검은 튜브만 돌아온 모래사장에/ 점점 흘려 쓰는 필기체처럼, 몸을 눕히면 서서히 등이 축축해지는 것이다/ 눈을 감지 않으면 공중에서 굉음을 내는 것이 오늘의 첫 번째 별인 듯이 짐작되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이제 눈을 감았다고 다독이는 것이다/ 그리고 2절과 같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별의 능력 / 김행숙
나는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당신의 폐로 흘러가는 산소./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태울 거야./ 당신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알고 있었니?/ 당신이 혐오하는 비계가 부드럽게 타고 있는데/ 내장이 연통이 되는데/ 피가 끓고/ 세상의 모든 새들이 모든 안개를 거느리고 이민을 떠나는데//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 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 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 3시간 이상씩 명상을 하고, 헛것들을 보지. 매우 아름다워./ 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 당신 머리에서 폭발한 것들을 사랑해./ 새들이 큰 소리로 우는 아이들을 물고 갔어. 하염없이 빨래를 하다가 알게 돼./ 내 외투가 기체가 되었어./ 호주머니에서 내가 꺼낸 건 구름. 당신의 지팡이./ 그렇군.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하염없이 낮잠을 자다가// 눈을 뜰 때가 있었어./ 눈과 귀가 깨끗해지는데/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는데/ 털이 빠지는데,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2분간 냄새가 사라지는데/ 나는 옷을 벗지. 저 멀리 흩어지는 옷에 대해/ 이웃들에 대해/ 손을 흔들지.//

인간의 시간 / 김행숙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 물결처럼// 우리는 깊고 부서지기 쉬운//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

포옹 / 김행숙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엎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호흡 2 / 김행숙
호흡은, 호흡기관을 폭파할 듯, 호흡기관 이후에 나의 호흡은, 저것은,/ 마치 오로라의 날개와 같이.// 아, 나는 쓰러지길 원해. 어느 날에는 바위섬에 다가가는 파워풀한 파도로서/ 나는 비인간적으로 파랗지. 항상, 항상 끄떡없는 바위섬이로군. 맨앞에서 희게,/ 희게 부서지는 파도여, 나의 발작이 시작됐다. 남은 의식은 누군가 숨겨 놓은 비디오카메라의 것./ 당신의 눈동자가 환해질 때 그곳에 남아 있는 것. 그러나 저것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다 보여지지 않는다.//

머리카락이란 무엇인가 / 김행숙
빨강과 검정 사이에서 너의 머리카락은 매일매일 자랍니다. 눈이 가장 밝은 사람도 머리카락이 자라는 순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눈이 어두운 우리에게 머리카락은 한 달 후에 자라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에 대하여…… 너의 눈빛에 대하여…… 나의 마음에 대하여…… 어느 날 한 달 후에 알게 되는 것들. 나는 그럴 줄 몰랐어.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해도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머리카락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습니다. 나는 너처럼 너는 나처럼 거울의 혼동이 가득한 곳. 세상의 모든 미용실은 기이합니다. 14세기에서 가위가 전승되는 곳에서 도구들은 발전의 발전을 하였습니다. 미용실에서 지구인이 외계인인 척하며 걸어나오고 외계인이 지구인인 척하며 걸어나와서…… 우리는 하나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둘이다, 우리는 셋이다, 우리는 넷이다, 우리는 다섯이다. 그렇게 말해도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침묵으로 돌아갔습니다. 각각의 침대에 누웠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왜 머리카락은 끝없이 자라는가. 성기를 감추듯이 머리카락을 감춘 여인들이 사랑하고 슬퍼하고 투쟁하는 이야기를 밤새 읽었습니다. 아침이 밝자 소설의 문장처럼 나는 너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었습니다. 나는 잘 못 읽었어요. 나는 잘 못 읽었어요. 나는 못 읽었어요. 어쨌든! 나는 읽었어요. 머리의 반쪽은 비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 머리카락은 시간처럼 시간처럼 끝없이 자라는가. 왜 머리카락은 정치적인가. 마침내 누가 머리카락을 해석하는가//

얼굴의 탄생 / 김행숙
어둠이 몰려서 온다. 녀석들. 녀석들/ 검은 비닐봉지 같은 얼굴을 하고 걸어오면서 찢어지는 얼굴을 툭, 하고 떨어지는 물체. 죽은 건 줄 알았는데 개의 죽음은 또 아주 멀었다는 듯이 발을 모아 높이 뛰어오르고, 착지와 비약으로 이루어지는 선상에서 음표처럼// 빵, 하고 택시가 지나가고 빵, 하고 택시가 지나가고 빵, 하고 택시 아닌 바퀴들이 지나가고// 오른쪽 어깨 위에 어둠, 왼쪽 어깨 위에 어둠, 나는 어깨인지 어둠인지 녀석들인지 나는 나에 한정 없이 가까워// 나는 거의 끝까지 멀어지고. 어둠에는 초점이 없으리. 녀석들의 노래. 잔치를 위해 돼지가 돼지라고 부를 수 없을 때까지 분할되고. 환하게. 남녀노소 고기를 씹는다. 이빨 사이에 고기가 끼고. 그러나 고기라고 부를 수 없을 때까지// 나는 코만 남아서 정신없이 냄새를 맡는다. 냄새의 세계에는 비밀이 없으리. 녀석들의 노래. 녀석들의 코. 돌출적인. 뭉툭한. 냄새는 약 기운처럼 퍼져 여기 오래 있으면 냄새를 잃게 돼. 우리들은 장소를 옮겨 코를 지키자. 어둠이 우리를 벗겨내는 곳으로// 툭, 다른 곳에 떨어지는 물체처럼 죽은 건 줄 알았는데. 녀석들 어둠 속에서 얼굴을. 얼굴을. 나라고 부를 수 없을 때까지.//

얼굴의 몰락 / 김행숙
전우처럼 함께했던 얼굴은 또 한 명의 전우처럼 도망쳤다. 끝을 모르는 고요한 밤의 살갗 속으로// 그리고 다시 얼굴이 달라붙을 때의 코는 한없이 옆으로 퍼져 있었다. 귀는 늘어져 늘어져서 이어지는 꿈과 같았다. 비누칠을 해서 꿈을 씻어내도 얼굴의 높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콧구멍은 파묻혔다. 냄새가 나지 않는 세계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나는 맑아지고 의심이 없어진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빛. 햇빛. 햇빛이 비추는 이 거리의 닳은 구두코. 신발을 신은 사람들. 늪처럼 발부터 빠진다.//

해변의 얼굴 / 김행숙
얼굴로부터 넘친 얼굴,/ 나는 당신이 모르는 표정을 짓지만// 내 얼굴엔 무언가 빠진 게 있을 거야.// 코로부터 넘친 코, 코에서 코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면 결국 코가 없고/ 귀로부터 넘친 귀, 귀에서 귀까지 귀를 막고 뛰어가면 세상은 온통 귓속 같고/ 입을 꽉 다물면 이빨은 자라지 않고, 편도선은 부풀지 않는가. 거품은 일지 않는가.// 사진 속의 파도처럼 내 혀는 꼬부라져 있네./ 얼굴을 침실처럼 꾸미고, 커튼을 내리고, 나는 혀를 달래서 눕히네. 나는 사탕 같은 어둠을 깔고// 나는 당신이 모르는 표정을 짓지만/ 내 얼굴엔 무언가 남아도는 게 있을 거야.// 여관 여주인처럼 자다 깨어, 자다… 열쇠를 건네네./ 빈방 같은 눈동자/ 소파 같은 입술/ 그리고 샤워기 밑에서 50분 동안 비 맞고 서서// 얼굴로부터 넘치는 저 얼굴,/ 닮은 얼굴을 하고 비를 피하네.// 얼굴을 차양같이 꾸미고/ 그리고 오늘은 얼굴을 베란다같이, 해변같이, 모래알같이 꾸미고//

옆모습 / 김행숙
옆모습은 너의 절반일까/ 똑같은 눈/ 똑같은 코/ 냉장고와 프라이팬에 나뉜 고깃덩어리처럼/ 꽁꽁 어는 것/ 불 위에서 녹고 타는 것// 옆모습은 어디서부터 어디로 어디까지 확장될까/ 상상은 잘 펼쳐지지 않는다/ 똑같은 모양으로 구부러진 팔을 상상하는 순간/ 무서워!/ 태어나지 않은 동생들처럼/ 팔은 꿈속에서도 먼지 속에서도 자란다// 선반은 언제나 너무 높고/ 네가 발꿈치를 들 때/ 손이 손을 떠나 네가 문득 비었을 때// 똑같은 손이란 무엇일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란 무엇일까/ 네가 네게 칼자국을 몇 개 긋고/ 싱싱한 화초처럼 불꽃을 심을 때/ 오그라드는 살과/ 명확해지는 뼈/ 너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하여// 천천히 회전한다/ 네게 박수를 보낼 수가 없어!/ 오른손이 왼손을 모르고/ 오른손이 오른손도 모르고/ 너는 자꾸 벗어난다//

목의 위치 / 김행숙
기이하지 않습니까. 머리의 위치 또한.// 목을 구부려 인사를 합니다. 목을 한껏 젖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당신에게 인사를 한 후 곧장 밤하늘이나 천장을 향했다면, 그것은 목의 한 가지 동선을 보여줄 뿐, 그리고 또 한 번 내 마음이 내 마음을 구슬려 목의 자취를 뒤쫓았다는 뜻입니다. 부끄러워서 황급히 옷을 주워 입듯이.// 당신과 눈을 맞추지 않으려면 목은 어느 방향을 피하여 또 한 번 멈춰야 할까요. 밤하늘은 난해하지 않습니까. 목의 형태 또한.// 나는 애매하지 않습니까. 당신에 대하여.// 목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문득, 세상에서 가장 긴 식도를 갖고 싶다고 쓴 어떤 미식가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식도가 길면 긴 만큼 음식이 주는 황홀은 천천히 가라앉을까요, 천천히 떠나는 풍경은 고통을 가늘게 늘리는 걸까요, 마침내 부러질 때까지 기쁨의 하얀 뼈를 조심조심 깎는 중일까요. 문득, 이 모든 것들이 사라져요.// 소용없어요, 목의 길이를 조절해봤자. 외투 속으로 목을 없애봤자. 그래도 춥고, 그래도 커다란 덩치를 숨길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목을 움직여서 나는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다리를 움직여서 당신을 떠나듯이. 다리를 움직여서 당신을 또 한 번 찾았듯이.//

당신과 당신 / 김행숙
당신과 당신은 u와 U/ 너희들은 커플링 같구나/ 나는 당신을 끼고/ 당신은 당신을 끼고// 비스듬한 오후에는 다 같이 비스듬하게/ 정면으로 오는 차는 정면으로 충돌하고/ 연인들의 짧은 이름은 폭죽/ 대낮을 배경으로// 내가 아는 연인들의 가장 긴 이름은 일주일 후/ 나의 에세이에는 주제가 없고/ 나에겐 이름이 없다/ 없는 것들의 목록을 당신과 당신이/ 당신과 당신을 우르르 탕탕 노래하고// 저 난동을 어린이처럼 지켜보는구나/ 조용해진 당신과 당신은 W와 w/ 사이사이에 모가지 없이 서 있구나/ 나는 당신을 당기고/ 당신은 당신을 당기고// 우리들은 나누어 가진다, 천진하게/ 당신과 당신은 공연에 참여한다/ 거짓말을 할 때도 천진하게//

옆에 대하여 1 / 김행숙
어느날 아침/ 내가 침대에서 본 남자는/ 죽어 있었다/ 더 이상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실컷 자고 오후엔 우리 소풍을 가요./ 나는 남자 옆에서 그/ 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잤다.// 해변은 휘어져 있었다./ 그런 옆에 대하여,/ 노을에 대하여,/ 화염에 대하여,/ 그녀에 대하여,/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옆에 대하여 2 / 김행숙
이제 말 울음소리는 뚝 그치고, 양호실에 가서 좀 누워 있으렴. 커튼을 치고, 갈기와 바람에 대해 떠들렴. 나도 언젠가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애.// 옆엔 어떤 아이가 누워 있을까요? 왜 모두들 내게 잠을 권할까요? 내 무릎에 알코올을 발라준 여자도 그랬어요. 그녀는 날아갈 것처럼 청결해요. 그리고 나는 앞발을 들고 서 있었어요.// 양호실은 쓰러지기 위해 오는 곳이야. 저 아이처럼. 저 아이 옆에 누워서 종이 칠 때까지 앞발과 갈기와 바람에 대해,// 한 마리 말과 두 마리 말에 대해, 한 개의 침대와 두 개의 침대에 대해, 흐르는 강과 달리는 산에 대해, 떠들어도 좋다고 여자는 내게 미소를 보냈을까요? 커튼을 치고,// 알약을 다시 세기 시작하는 여자와 침대를 나란히 누운 아이들.//

어떤 손님 / 김행숙
더러운 신발에서 끈을 풀고 솟구쳐 오르는 손님. 현관에 손님이 서 있다.// 아, 생각이 났다. 나는 2년 전에 당신을 초대한 적이 있었다. 그때 했던 6인분의 요리가 생각났다. 그때 입었던 옷은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나 기억나는 것과 기억나지 않는 것과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억나지 않는 것과……// 아, 2년 후에 갑자기 기억나는 것이 있다. 대화중에 ‘법적으로 결혼 가능한 친족’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명 숨은 뜻이 있었을 거라고, 2년 후에 궁금해하는 것은 얼마나 낯부끄러운 짓인가. 손님! 손님들!// 비밀스러운 애정과 비밀스러운 적의가 비밀스럽게 교환되는 자리에서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2년 후에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과 “당신은 그대로예요”라는 말이 오버over하는 것과 감추는 것……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과 2년 후에 말할 수 있는 것과 2년 후에는 말할 수 없는 것과 영영 말할 수 없는 것……// 현관에 손님이 아직 서 있는 것이다. 서서 마주하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둘 다 어색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서 손님에게 앉을 자리를 권해야 해//

조각공원 / 김행숙
비둘기 한 마리가 발가락 사이에 부리를 넣었다 뺐다 넣었다를 시계추같이 반복한다. 그의 발가락 옆에서 「무제 Ⅱ」라는 그의 이름을 보았다. 끄덕끄덕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잔디를 손바닥으로 쓸면서 한 여자가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느리게 움직일 때마다 풀들은 순순히 몸의 방향을 바꿨다. 그녀가 하는 생각을 알 수 없었다.//

그곳에 있다 / 김행숙
신체는 깎아지른 듯 절벽이 되었어/ 기도하기 좋은 곳/ 자살하기에 더 좋은 곳에서/ 나의 신체는 멈추었다/ 나는 그리워했다/ 그리워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 절벽에 매달린 기분으로/ 너의 손을 잡았을까/ 그런 기분으로/ 너의 손을 놓칠 때/ 허공을 할퀴는 분홍 손톱들이 활짝 활짝 피어나는 곳에서/ 저녁의 꽃처럼 오므리는 곳에서//

떨어뜨린 것들 / 김행숙
여름 과일은 물주머니지/ 겨울에 물은 얼지/ 강물이 단단해지고 있어/ 10센티쯤……/ 내 얼굴에도 눈이 쌓였으면……/ 나의 시체처럼 그것은 내가 볼 수 없는 풍경이겠구나// 아이들은 흙장난을 하다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하곤 하지/ 어느 날은/ 야구공이 굴러간 곳에서 이상한 것을 줍지/ 손을 잃어버린 손가락 같은 것/ 뭐지?/ 찾았니? 저쪽에서 한 아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어/ 과일을 깎다가 둥근 과일을 떨어뜨리자/ 향기로운 벌레가 기어 나왔어//

세월 / 김행숙
발이 보이지 않게 달리기를 하지요. 점점 빠르게./ 아아아 느리게. 마지막 숨결은 얼마나 멀리 있는 걸까요? 가까운 듯.// 나는 달리기에요. 오른발 다음에 왼발, 모레 새벽에는 국경을 넘게 되지요./ 총성이 까마귀 울음소리보다 자주 들리는 곳,/ 이곳에서는 점치는 여인들만이 늙어서 죽습니다. 탕, 탕, 탕,// 총알을 피하듯, 나쁜 음식과 나쁜 꿈을 피했습니다.// 지금은 말이야, 가족이 만들어지는 혼돈의 밤을 정리하기 위해/ 세번째 총성이 너의 귀를 흔드는 시각./ 눈을 흐리게 하고, 탕! 거울 앞에 서보아라./ 노파는 혼례복을 입은 손녀를 불러 마주하였습니다./ 아름답구나. 처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십년 후, 왼발 다음에 오른발, 나는 달리기에요./ 오른발 다음에 왼발, 세월은 보이지 않아요.// 나는 지나갔어요. 가장 슬픈 마음도 나를 붙잡지/ 못해요.//

마지막 여관 / 김행숙
조금 전에 키를 반납하고 떠나는 손님을 봤는데 분명히, 당신은 그 손님과 짧은 작별인사까지 나눴는데// 당신은 빈방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더 이상 빈방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당신은 기껏해야 작은 여관의 문지기일 뿐인데, 세계의 주인장처럼 당신의 말은 몇 겹의 메아리를 두르고 파문처럼 퍼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동심원 가운데 서 있으면 나도 나를 쫓아낼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한겨울 산속에서 길을 잃은 나무꾼 이야기 같은 게 자꾸 생각나고,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인데, 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까? 왜 그런 이야기만 기억날까? 왜 그런 이야기에 도시빈민 출신의 내가 나오는 것일까?// 깊은 산속에서 나는 간신히 여관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여관도 쓰러질 것 같고, 나도 쓰러질 것 같지만, 이런 산속에 여관이 있다니,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여관은 귀신의 집이었습니다. 산 사람은 손님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나는 숨을 쉬지 않고도 말할 수 있어요. 실로 나는 산 사람이 아니요, 유령 같은 존재올시다.// 죽은 사람 흉내 내는 것들은 이제 아주 지긋지긋하다고 당신이 치를 떨었습니다. 당신의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두 번 다시 시체 따위 치우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내가 잠들면 죽게 돼 있다고 마치 당신은 나의 운명을 일러주는 것 같았습니다.// 잠만 자겠습니다. 나는 시퍼런 입술을 벌렸지만, 내게도 얼음 같은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룻밤 / 김행숙
하룻밤만 재워줘. 밤은 충분히 길고, 너무 큰 가방은 언제나 이야기보따리지./ 머나먼 친척 아주머니는 19세기 나그네처럼 오늘 밤에도 문을 두드려.// 그렇지만 아주머니, 우리 집엔 빈방이 없어요. 빈방이 있다면, 왜 내가 여동생들과 한방을 쓰겠어요? 속옷을 나눠 입는 우리들은 서로를 반사해요. 거울 앞에선 것처럼 나는 독창적인 인물이 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얘야, 마구간이라도 괜찮단다. 말은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동물이잖니./ 우리들의 머나먼 할아버지가 말 위에서 굴러 떨어져 죽어갈 때, 그는 비밀을 품고 있었단다. 그가 하룻밤을 더 달렸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을 테지.// 그렇지만 알 수 없어요, 아주머니. 나그네가 두드리는 문이 모두 열리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 마을은 강간과 간통으로 세워졌어요. 전설적인 인물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알에서 까마귀처럼 깨어났지요. 아주머니가 내 어머니라고 해도 놀랍지 않지만, 우리집엔 마구간도 낡은 자가용도 없어요.// 하룻밤은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 지나가버린단다. 그렇지만 얘야, 영원히 눈을 감는다면 하룻밤은 계속해서 흐르지. 머나먼 친척 아주머니의 미소와 함께.//

물의 친교 / 김행숙
물고기는 움직이는 심장처럼/ 그러나 매우 조용히 살아가는 것들이야/ 물고기가 물고기를 뜯어먹을 때도 고요하지// 오늘 아침 너는 피어나기 시작한다/ 너는 완전히 힘을 뺐다/ 내 안에서 자라는 식물들처럼 알 수 없이/ 새로운 삶처럼 끝없이/ 너의 머리카락이/ 흔들려// 나는 너를 거칠게 대하고 싶어/ 죽은 체하는 걸까/ 산 체하는 걸까// 나는 그림자와 친해/ 내 옆에 나무 한 그루가 있고/ 나는 나무 한 그루의 그림자와 친해/ 달빛은 검은 물체를 떨어뜨리지/ 햇빛은 잘게 부서지지/ 반짝이지// 어젯밤 너의 눈빛은 하염없이 머물렀지/ 마치 눈먼 자 같은/ 그런 눈빛/ 그런 목소리로 너는 인생보다 긴 고백을 시작했어//

타인의 의미 / 김행숙
살갗이 따가워,/ 햇빛처럼/ 네 눈빛은 아주 먼 곳으로 출발한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뒤돌아볼 수 없는/ 햇빛처럼/ 쉴 수 없는 여행에서 어느 저녁/ 타인의 살갗에서/ 모래 한 줌을 쥐고 한없이 너의 손가락이 길어질 때// 모래 한 줌이 흩어지는 동안/ 나는 살갗이 따가워,// 서 있는 얼굴이/ 앉을 때/ 누울 때/ 구김살 속에서 타인의 살갗이 일어나는 순간에//

탁자의 유령들 / 김행숙
여러분은 탁자를 완성하기 위해 착석하셨습니다. 앉아 계신 여러분, 앉아만 계신 여러분, 뒷면이 없는 여러분,/// 한 분이 아닌, 두 분이 아닌 여러분, 여러분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리포트의 뒷면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결정을 뒤집어도 아무도 살아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아닌, 두 분도 아닌 한 분이 손을 번쩍 드셨습니다. 누구세요? "저, 저, 저(는 왜 말을 더듬을까요?)기요, 펜이 바닥에 떨어졌어요. 별 뜻도 없이 딴 뜻도 없이 굴러가는 저것을 어떡해."// 주우세요! 애타게 찾으세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탁자 밑으로 들어가는 일은 간첩의 신분처럼 위험한 것입니다. 엿듣고 싶으세요. 탁자 밑에서 영원히 나오지 마세요. 입도 뻥긋하지 마세요. 침도 삼키지 마세요. 당신은 비밀이고 우리는 비밀이 없어요. 당신은 없어요.// 그리고 손톱으로 탁탁탁 탁자를 두드리시는 분, 몹시 신경에 거슬립니다. 마치 노크 소리 같지 않습니까. 탁자에 문이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어라, 손톱이 매우 깨끗한 분이시로군.// 우리에게는 동의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부정해야 할 것이 똑같이 높은 산입니다. 밤을 새워도 끝나지 않고 밤을 새우지 않아도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만장일치란 얼마나 지난하고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꿈인가요? 꿈결처럼 우리는 박수를 칩시다.//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 김행숙
나는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푸르스름한 침낭 속에서 아아아, 기지개를 켜며 필라멘트처럼 눈을 깜박였다. 박사님, 물결을 일으켜줘요. 내게 감동을 불러일으켜줘요.// 나는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박사님은 굿모닝, 내게 또 오늘 하루를 기념하며 뽀뽀를 해주죠. 오늘은 18세기 초, 내일은 21세기 말이래요.// 나의 사랑은 자살을 선언한 사이보그, 그의 숭고한 정신을 사모하기 위해 나는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흰쥐들은 나날이 무섭게 살이 찌는데요, 박사님, 박사님, 내일쯤엔 흰쥐들이 우리의 마차를 끌 수 있을까요?// 오늘은 18세기 초, 나의 거대한 사랑은 더러운 망토를 펄럭이며 저토록 고독하게 걸어가요. 내일은 21세기 말, 우리들의 결혼식이 있어요.// 박사님, 박사님, 실험실 밖에서는 아무도 실험을 하지 않나요? 나는 실험실에서 태어나서, 첫울음 대신 첫사랑 나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님은 굿바이, 굿바이, 나의 미래를 축복해주시겠죠.// 나는 아직 작은 가슴이지만은요, 쿵, 하는 소리는 땅에서 하늘까지//

호르몬그래피 / 김행숙
호르몬이여, 저를 아침처럼 환하게 밝혀주세요.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태풍의 눈같이 표현하고 싶습니다. 저 자가 제게 사기를 쳤습니다. 저 자를 끝까지 쫓겠습니다.// 당신에게 젖줄을 대고 흘러온 저는 소양강 낙동강입니다. 노 없는 뱃사공입니다. 어느 곳에 닿아도 당신이 남자로서 부르면 저는 남자로서// 당신이 여자로서 부르면 저는 여자로서 몰입하겠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세번째, 네번째, 일곱번째 사다리에서 거지가 될 때까지 카드를 만지겠습니다. 녹초가 되게 하세요. 호르몬이여,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로 눈꺼풀을 내리시고// 제 꿈을 휘저으세요. 당신의 영화관이 되겠습니다./ 검은 스크린이 될 때까지 호르몬이여, 저 높은 파도로 표정과 풍경을 섞으세요. 전쟁같이 무의미에 도달하도록// 신성한 호르몬의 샘에서 영원히 반짝이는 신호들//

어두운 부분 / 김행숙
내일 저녁 당신을 감동시킬 오페라 가수는 풍부한 감정과 성량을 가졌다. 예상할 수 없는 감정까지 당신에게.//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모두 아는 감정일 것이다. 그 중에서.// 나는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우리가 모두 아는 것이 사실일 때에도. 내일까지 바닥을 끌고 가는 긴 드레스 속에는 발목이 두 개, 곧 끊어질 듯. 젖도 크다, 곧 터질 듯.// 나는 믿을 수 없다. 나는 마룻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은빛 칼처럼 빛이 올라오는 틈새가 있다.//

지하 1F에 대해서 / 김행숙
여기서는 네 개의 층을 볼 수 있다. 옥상은 쏟아질 듯한 산을 밀어내고 있다. 대성고등학교 건물 일층과 지층은 한남연립 마동이 가리고 있다./ 지하에 대해서라면 한남연립 마동 베란다에서 욕망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당신의 지하를 구경할 수 있는 베란다를 욕망한 때가 있었다. 거기서도 널어놓은 팬티는 잘 마르는가?// 당신은 방학 중인가? 대성고등학교 남자애들은 방학 중이다. 빈 교실에 왜 커튼은 마스크처럼 입을 막는가? 당신은 정말 방학 중인가? 혹시?/ 마스크 뒤에서 사내애가 자위를 하고 있다. 나는 세상에 꼴리는 게 많아. 이유 따위는 없어. 입을 조금 열었지만 그는 불특정한 남자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커튼이 약간 구겨졌다가 괜찮아, 하면서 팽팽해졌다.// 학교 옥상은 죽지 않고 병신이 될까 봐 무서운 곳이었다. 당신은 어디 있는가? 나는 갈 데까지 갔어도 당신의 지하를 구경할 수 있는 베란다는 욕망의 영역이다./ 나는 저녁에 화분을 사러 나갈 것이다. 나는 베란다의 여자답게 꽂힐 것이다. 물 주러 오는 남자는 병신이다.//

화분의 둘레 / 김행숙
이 작은 화분 한 개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감상할 수 있습니다. 꽃을? 꽃과 잎을? 꽃과 잎과 벌레를? 나는 화분의 세계를 망칠 수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아시겠습니까.// 플러그를 뽑듯이 나는 화초를 뽑아 던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물이 끓지 않고, 이제부터 조용해져야 하는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전화선을 자르듯 너의 줄기를 자르고, 이전과 이후가 각각인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나는 가장 가난한 삶을 생각했습니다. 지금부터, 라고 생각했습니다.// 발자국이 없고, 물이 없고, 짹짹짹 새소리가 없고, 엄마가 없고 엄마가 없는. 엄마 없이 떠있는 지표면에서. 한 명의 아기도 울지 않는 별에서 살아가는 어떤 삶, 열렬하고 고독하고 게으른 삶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나는 가장 넓은 화분의 둘레를 생각했습니다. 나는 걷다가 걷다가 지구에는 골목길이 참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호주머니 속에서 동전 몇 개를 내내 만지작거렸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많습니다. 내일도, 라고 생각했습니다.//

연애편지를 쓰자 / 김행숙
어둠을 동그랗게 오려낸/ 스탠드 불빛 아래서/ 꿈결처럼/ 너도 언젠가 그런 편지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옛날 연애편지를 쓰자// 이 연애편지에서 나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밤바다의 등대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매우 어려운 것을/ 꿈꾸는 눈동자나/ 노래하는 심장과 함께/ 그때 우리는 열렬해/ 외롭기도 해/ 그랬지, 나는 오래전에 너의 창문을 두드리고 두드리다/ 갔지// 세게 두드렸으면 유리창쯤 깨졌을 텐데……/ 피도 봤겠지/ 너도 봤겠지/ 오버over하는 건 연애의 본질일까, 실수일까// 지우개는 아직 하얗고/ 밤중에 밀려나오는 지우개 가루는 검다/ 모래로 쓴 글씨처럼/ 애써 지울 필요도 없어!/ 우리는/ 내일 또 지워진 후에 아주 옛날식 연애편지를 쓰자//

신도림新挑林 / 김행숙
늙은 사내 머리를 흔들며 존다. 늙은이의 머리가 가볍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낮술 먹은 청년이 상대 없이 삿대질을 한다. 분을 푸는 청년과 묵묵부답 이순의 귀. 오류,개봉,구로, 신도림...... 문은 개폐를 반복했지만 문의 개폐는 역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신도림역 혹은,// 재수생 시절 서소문 공원에서 삼립식빵을 뜯다가 뺨을 얻어맞은 일이 있었다. 벤치에 길게 누워 자던 남자는 홀린 듯이 일어나서 나를 때렸다. 더러운 사내는 조금 비틀거렸지만 유감없이 구겨진 신문을 적선하고 사라졌다. 이유 모르게 나는 자꾸 불량스러워지고 싶었다./ 카세트를 어깨에 맨 맹인이 천천히 지나간다. 오류, 개봉...... 점입가경.// 검은뻐꾸기 운다. 신라음반 자연의 소리는 사계의 경계가 없다. 괭이갈매기와 휘파람새 나란히 날아간다. 동전을 몇 닢 그의 모자에 떨어뜨린 이부는 가볍게 웃으며 슬며시 배를 쓸어본다. 툭툭 발로 찬다고?/ 맹인의 지팡이가 발등을 때렸다. 나는 그에게 들킨 기분이었지만 여운 없이 날아간 검은 뻐꾸기. 오류, 개봉, 구로, 신도림......//

가로수의 길 / 김행숙
플랫폼에서 서서히 떠나는 기차처럼 지나갔지/ 그래서 너는 참 길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 기차처럼/ 너는 다음 칸을 가졌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갔어/ 그 외에는 가진 게 없다는 듯이/ 기차에 대해 생각하고/ 너에 대해 생각하고/ 길거리에는 얼마나 많은 가수들이 모자를 내려놓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그들이 가장 크게 입을 벌렸을 때/ 땅이 조금 흔들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똑바로 걸을 수가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가로수와 가로수의 간격은 법으로 정해져 있을까, 발과 발을 모으고 서서/ 뾰족한 자세로 그런 생각을 해/ 가로수와 가로수의 사이는 다정한 곳일까/ 무서운 곳일까/ 달리는 자동차와 달리는 자동차 사이에 대해 생각하고/ 치어 죽은 것들과/ 죽어가는 것들로부터 너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경적소리가 되고 싶어/ 모두 빨리 대피해야 합니다/ 이 도시를 텅 비웁시다/ 미래에/ 유령이 되어 돌아오자, 다신 돌아오지 말자, 사이에서 유령의 감정을 생각해내려 애쓰며/ 거울을 보다가 유리를 보듯이/ 너를 높이 높이 떠올리며 걸어갔어/ 유리창은 어떻게 박살이 났을까/ 유리에서 맑은 하늘까지/ 너는 참 길구나, 그렇게 생각이 길어져/ 맑은 하늘에서 물속에 잠긴 도시까지/ 화염이 애타게 포옹한 우리들의 도시까지//

침대가 말한다 / 김행숙
나는 침대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작은 삐걱거림도 모두 나의 본성에서 연유하는 것. 그러나 도마 위에 누웠다고 느끼는 건 오직 너의 문제, 파 뿌리처럼 발이 잘렸다고 소리치는 건 나를 떠날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진실로진실로 이 순간만큼은 네가 대파의 아픔에도 공감한다는 것인가.// 너는 왜 모든 문제를 네게 끌고 들어오는가. 오늘 너는 식칼처럼 누워있다. 침대는 어느 연인을 눕히듯이 너의 어린아이를 붑히듯이 식칼도 눕힐 수있다. 너는 내 위에서 무엇을 저미고 다지고 마침내 팔을 높이 쳐들어 내리치고 있는가. 언제나 너의 침대는 모든것을 부드럽게 이어주고 싶다. 나는 너의 팔이 펜과 이어지고 노트와 이어지고 긴 이야기와 끝없이 이어지던 밤을 기억한다. 아침에 스르륵 잠이 들었고 가장 밝은 한낮까지 이어지던 꿈을 나는 이어가고 싶다.// 그러나 거울 위에 누웠다고 느끼는 건 오직 너의 문제. 너는 침대를 독차지했다고 생각한다. 너는 침대의 기억을 무시한다. 내 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너는 상상하지 못한다. 너는 한 장의 시트를 갈면 모든 게 지워지는 줄 안다. 죽어가는 사람이 죽는 순간에 남긴 무의미한 음절을 나는 기억한다. 그가 이루지 못한 것은 결국 하나의 단어인가. 죽음의 입술로부터 가능성을 이어받은 음절과 다음에 올 음절은 빛처럼 갈라져서 먼 곳으로 떠났다. 그것은 무한한 문장이 되고 우주처럼 무한한 편지가 된다. 나는 그의 똥오줌도 기억하고 그의 말년의 사랑도 기억한다. 나는 사랑하는 한 쌍의 몸들을 솜털까지 기억한다. 잠을 청하는 인류는 최종적으로 제 몸을 누일 땅을 파듯이, 오오 죽음을 핥듯이 다른 몸을 탐하고 미워하고 곡해하고 그리고 가장 외로워한다. 잠의 사전에 중단은 없다. 잠은 불꽃과 같아서 너희의 엉덩이는 앗, 뜨거워지는 것이다. 내게 오랫동안 머물렀던 정든 육체가 동굴처럼 깊어지던 순간들을 시시각각 변하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듯 나는 그릴 수 있다. 작은 몸을 괴롭힌 욕창이 그가 잠든 사이에 더욱 장엄해지듯이 너희는 어디라도 더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왜 너는 외면하는가.// 너는 참을 수 없는 것을 보았다는 듯이 돌아 눕는가. 혼자서 너는 연극을 하는 것 같다. 누가 너의 대사를 썼는가. 나는 무대인가. 어둠 속 팔짱을 낀 관객인가. 그러나 어느쪽으로 돌아눕든 그것은 오직 너의 문제, 그것이 오늘의 고독이다// 침대는 인간적인 변덕과 무관하다. 나는 언제라도 어디라도 너와 함께할 것이다. 연약한 너는 하루도 지치지//

눈 / 김행숙
오늘은 눈(目)과 눈(雪)이 같은 소리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런데 쌤, 칠판에 어지럽게 눈이 내리고 있어요// 너는 눈이 싫구나, 눈을 감으면 눈이 보이지 않는다// 내게서 눈을 빼면 뭐가 남을까요?// 눈사람에게서 눈을 빼면 뭐가 남을까?// 쌤, 뱀처럼 목을 빼서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저 구름 속에는 눈송이가 천만 관객의 눈동자처럼 가득 차 있어요// 그리고 네 눈 속에는 구름이 가득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감정이 생기고 슬픔이 밀려오고/ 호올로 눈 속을 걸어 멀리 여행을 떠나게 돼요// 눈의 나라로 달려가는 아이들의 발자국은 금세 지워진다,/ 이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어져버리지// 그래서 쌤은 아이를 잃어버렸나요? 눈은 환상을 만들어요// 너는 눈이 좋구나, 조심하렴,/ 더 많이 보는 눈은 비밀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요?/ 창밖에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어요//

눈사람 / 김행숙
왜 나는 눈이 오면 눈사람을 만들까?/ 햇빛이 비치면/ 왜 나는 가난한 집 아이로 태어났을까?// 눈사람은 좋겠다.// 시간이 펑펑 남아도네. 눈보라처럼 어지럽게 아이들은 자라고 눈사람은 점점점 자란다. 눈사람이 작아졌다! 엄마가 죽었다. 내가 예뻐지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가 죽었다. 눈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 때문에 나는 점점 이상해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자세히 좀 말해줄래? 요즘은 거울도 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 나직 아직 남아 있는데 마치 다 녹았다는 듯이.// 내 눈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마치 찬장에서 설탕이나 기름병이 사라졌다는 듯이/ 사소하게/ 나는 시장에 간다.//

숲 속의 키스 / 김행숙
두 개의 목이/ 두 개의 기둥처럼 집과 공간을 만들 때/ 창문이 열리고/ 불꽃처럼 손이 화라락 날아오를 때/ 두 사람은 나무처럼 서 있고/ 나무는 사람들처럼 걷고, 빨리 걸을 때/ 두 개의 목이 기울어질 때/ 키스는 가볍고/ 가볍게 나뭇잎을 떠나는 물방울, 더 큰 물방울들이/ 숲의 냄새를 터뜨릴 때/ 두 개의 목이 서로의 얼굴을 바꿔 얹을 때/ 내 얼굴이 너의 목에서 돋아나왔을 때//

미완성 교향악 / 김행숙
소풍 가서 보여줄게/ 그냥 건들거려도 좋아/ 네가 좋아// 상쾌하지/ 미친 듯이 창문들이 열려 있는 건물이야/ 계단이 공중에서 끊어지지/ 건물이 웃지/ 네가 좋아/ 포르르 새똥이 자주 떨어지지/ 자주 남자애들이 싸우러 오지/ 불을 피운 자국이 있지/ 2층이 없지/ 자의식이 없지/ 홀에 우리는 보자기를 깔고// 음식 냄새를 풍길거야/ 소풍 가서 보여줄게/ 건물이 웃었어// 뒷문으로 나가볼래?/ 나랑 함께 없어져볼래?/ 음악처럼//

착한 개 / 김행숙
착한 개 한 마리처럼/ 나는 네 개의 발을 가진다/ 흰 돌 다음에 언제나 검은 돌을 놓는 사람/ 검은 돌 다음에 흰 돌을 놓는 사람/ 그들의 고독한 손가락/ 나는 네 개의 발을 모두 들고 싶다,/ 헬리콥터처럼/ 공중에/ 그들이 눈빛 없이 서로에게 목례하고/ 서서히 일어선다/ 마침내 한 사람과 그리고 한 사람//

고양이 / 김행숙
고양이가 되겠다고 집을 나온 첫날 밤부터 눈에서 빛이 났던 건 아니죠. 열세살 때부터 고독한 눈알을 원했는데요, 초점이 사라질 때까지 눈알을 빙빙 굴렸을 뿐이었죠 누가 좀 뻥, 차줬으면// 포물선을 그리며 고양이 한 마리가 날아가는 거예요. 아, 그렇게 풀밭에 눕고 싶어요// 밤은 길고 낮잠은 달콤해요. 그녀는 여섯 마리의 고양이 새끼를 배고 있어요. 그년느 나의 선생이었고, 연인이었죠. 안녕, 라라. 고양이의 길은 여러 갈래, 여섯마리의 고양이 새끼 같은 것. 안녕, 미미.// 고양이가 되겠다고 처음 고백했을 때, 형은 정겹게 내 귀에 대고 말했죠. 넌 원래 고양이 새끼야. 네가 담요에서 나와 기어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붕 아래 쥐새끼들이 싹 없어졌다니깐.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려보라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형은 나의 전도사였죠.// 형은 검은 양복을 입는 사기꾼이 되었구요. 나는 또다시 털갈이가 시작됐어요. 아. 그렇게 힘이 없고 부드러워요. 올겨울에는 나는 더 무성해지고 더 포근해질것 같아요.// 이제 아주 멀리 고양이의 길을 가요. 고요한 새벽마다 울음 소리를 연습했답니다. 그건 고양이의 것이죠. 달빛처럼 바람소리처럼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영영 모를 거에요.//

말라깽이 L의 식탐 / 김행숙
늘 좋은 음식을 먹고 있어요. 음식과 헤어지지 않아요. 당신과 헤어졌어요.// 당신은 내게 통닭을 사가지고 오는 존재였어요. 나는 웃는 해골이었는데, 아침마다 당신은 내게 물을 부어 마셨죠. 당신은 道人이 되었어요.// 통닭이 날아가겠어요? 내가 먹은 통닭은 500마리, 백일기도를 드렸지만 살이 찌진 않았어요. 아, 통닭은 차례차례 날아갔군요. 항문을 막아야 했을까요?// 지금은 여행 중이에요. 오리의 마을, 염소의 마을, 은갈치의 마을, 道를 물었어요. 道를 모르시니 음식점을 가르쳐 주세요. 음식점을 물었어요. 애석하게도 L의 집을 모르시니 道를 가르쳐 주세요.// 음식은 그 고장의 색깔이고 향취랍니다. 오징어의 마을, 고추장의 마을, 감자의 마을, 흑돼지의 마을, 여행은 계속됩니다.//

우는 아이 / 김행숙
우는 애들을 달랠 순 없어요. 난 머릿속이 출렁거릴 때까지 울죠. 애들이 날 달래지 않으면 애들이……애들이……익사할지도 몰라요.// 애들은 정말 겁도 없어요. 물속에서 노래를 해요. 엄마……엄마……엄마……저 뻐끔거리는 입들을 좀 보세요.// 표면으로 올라온 물방울들이 잇달아 터지고 있어요. 공기가 가시처럼 찌르나 봐요. 애들이 너무 오래 물속에서 놀고 있어요.//

번개에 대해 / 김행숙
고백컨대, 내게서 뚝 떨어지는 곳에서 떨어지는 번개를/ 맞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번개에 대해// 번개 양편의 구름에 대해 나는 올려다 보는 자이다. 이때/ 내가 맞은 비의 굵기에 대해// 잘 말할 수 없다 나는 편향된 자이기 때문이다. 번개에 대해// 뚝 떨어진 곳에서 정전이 되기도 하지만 구름은 다치지 않는다./ 구름은 구름의 규칙이 있다// 나는 번개에 대해 수정하지 않겠다//

대청소의 날들 / 김행숙
가루비누 같은 눈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죠. 그런데 정말 오늘은 가루비누, 칠일을 내릴 듯이 내렸어요. 사람들의 입술에서 비눗물이 흘렀구요. 거품을 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니까요.// 검은 동자는 핏물에 빠져 있어요. 오늘은 어쩌면 눈물로 뭔가를 씻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모두들 눈을 감길 무서워해요. 오늘은 분명 이변(이변)이어서 결심하기가 매우 두렵지요// 배를 쥐고 구역질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골목이 마구 꿈틀거렸어요. 멀리 있는 강이나 바다를 생각해 봤지만 가루비누, 참 아득하게 내렸죠. 우리가 순순에 대해 생각해야 했을까요? 우리는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어요.// 가루비누, 칠일을 내리 듯이 퍼붓고 군인들이 마침내 물청소를 시작햇어요. 사람들은 얌전했지요. 그런데 더러운 강아지들이 사라지고 우리가 이윽고 발가락 벗은 기분이 들면, 거지와 집에서 아침저녁으로 세수하는 사람들을 구별할 수 없으면,// 그때는 실종된 사람들도 보일까요? 우린 점점 유리처럼 투명해졌어요.//

하이네 보석가게에서 / 김행숙
언니, 나는 비행기를 탈 거야. 나는 아무 것도 버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너무 가벼워졌어./ 마리오는 아름다운 남자야.// 안녕. 나는 보따리 장사를 할 거야. 보석가게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감정하지. 가짜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아는 건 멋진 일이야. 언니, 곧 부자가 될게. 라인 강가에서.// 한국 남자를 사랑해보지 못했어. 오늘밤에도 언니는 시를 쓰고 있니? 언젠가는 언니 시를 읽고 감동하고 싶어. 안녕.// 11월에 나는 마리오를 만나지. 언니는 한국어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 우리가 어렸을 때 문방구에서 마론인형을 훔치는 언니를 봤어. 눈물이 주르르 모래처럼 흘렀어.// 언니,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모래는 가장 아름다운 흙의 형상이었지. 나는 매일 밤 기도를 해. 언니가 우리 집을 떠나던 날에 나는 왜 쓸쓸해 지지 않았을까? 언니를 위해 기도할게. 안녕.//

문은 안에서 잠근다 / 김행숙
후려갈기듯이 그가 문을 닫았다고 생각했을 때,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문은 반발하여 조금 열린 채 떨리고 있었다 그가 부르르 떨고 있는가?/ 오래 참으셨군, 나는 빈정거렸지만// 나는 바닥을 드러낸 채 그의 침대에서 너무 오래 기생했다/ 두께 없는 얄팍한 사랑을 원고지 구기듯이 했네 나는 썼지만/ 구겨진 그를 펴서 다시 읽고 싶지 않았네 그는 때때로 아,벌어져 있었네/ 그의 침대에서 나를 핥고 지나가는 문장들을 나는 너무 쉽게 받아들었네/ 그가 없는 그의 침대에서 나는 뜨거워지지, 그러니 그가 없는 그의 침대에서/ 참을 수 없었네 오래 참으셨군, 나는 빈정거렸지만 내가 나쁘지 않은가?/ 문을 닫았다고 그는 믿지만 문의 반동은 그의 행위에서 비롯하니/ 이것이 내가 받은 교훈의 전부다// 이제 내 낙서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다시 바람이 나침반인가?/ 자꾸 펄럭이니 문 밖의 풍경은 빠르게 늘어났다가 줄어들고 늘어..../ 나는 중얼거린다, 문은 안에서 잠근다.//

사춘기 1 / 김행숙
노랑머리 소년을 아십니까?/ 방과 후에 미용실에서 아줌마들의 머리를 감겨드/ 렸어요.// 이모의 미용실입니다./ 이모는 맞고 사는 여잔데요, 아줌마들은 내놓고/ 同情했어요.// 노랑머리 소년을 아십니까?/ 아줌마들이 참 예뻐했어요. 잡담을 하는 그녀들은/ 조금씩 음탕했는데요,// 후딱 봄이 갈 것처럼 뭉텅, 봄나무에 꽃은 빠져버리고,/ 봄볕을 받는 수건들은 희미했어요./ 치밀어오르는 노랑머리 소년을 아십니까?//

입맞춤 -사춘기 2 / 김행숙
선일여자고등학교 2층 복도 같은 복도입니다. 그런 복도라면 나는 복도 위의 복도와/ 복도 아래의 복도를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대걸레를 밀며 달려갔다 달려왔지요. 그런 복도라면 어느 쪽도 이쪽이어서 우리들은 계단을 함부로 오르내렸지요./ 여자애가 화장실에서 치맛단을 접고 나올 때는 말입니다. 무릎이 보일 듯 말 듯 했지만요, 이쪽과 이쪽 사이에서 못 할 말이 뭐 있겠습니까? 우리는 생각보다 참 욕도 잘했고/ 참 쉽게 웃기도 잘했습니다. 창문에 붙어서 우리는 창문만 닦았고, 그런 복도라면 우리는 복도 위의 복도와 복도 아래의 복도에서 창문만 닦겠지만,/ 정말 뭐가 더 잘보였겠습니까? 어쩌면 선일여자고등학교 2층 복도 같은 복도입니다.//

소녀들 -사춘기 5 / 김행숙
좋아하는 상점이 생길 거라고 말해주었다. 너희는 매일 상점에 들러서 몇 가지 물건을/ 쓰다듬을 거야. 그때의 기분과 손길을 잘 기억해두렴./ 열네 살이 되면, 그렇게 백 번 만지고 몇 가지 물건을 사는 동안 열네 살이 된 여자애를/ 친구로 사귀겠지. 너흰 둘 다 상점에서 물건을 훔친 경험이 있지./ 이제는 전부 시시해졌어, 그 애가 울면서 말할 거야. 쓰다듬어주렴. 좋은 친구는 아주/ 부드러워.// 기억할 것들이 생기지. 열두 살이 되면,/ 열네 살이 되면, 나뭇잎을 떨어뜨릴 만큼 깔깔깔 웃기도 했지만//

에코의 초상 / 김행숙
입술들의 물결, 어떤 입술은 높고 어떤 입술은 낮아서 안개 속의 도시 같고, 어떤 가슴은 크고 어떤 가슴은 작아서 멍하니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 같고, 끝 모를 장례행렬, 어떤 눈동자는 진흙처럼 어둡고 어떤 눈동자는 촛불처럼 붉어서 노을에 젖은 회색 구름의 띠 같고, 어떤 손짓은 멀리 떠나보내느라 흔들리고 어떤 손짓은 어서 돌아오라고 흔들려서 검은 새떼들이 저물녘 허공에 펼치는 어지러운 군무 같고, 어떤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꿈에서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영원히 보게 될 것 같아서 너의 마지막 얼굴 같고,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아, 하고 입을 벌리는 것 같아서 살아 있는 얼굴 같고,//

새의 위치 / 김행숙
날아오르는 새는 얼마나 무거운지. 어떤 무게가 중력을 거스르는지./ 우리는 가볍게 사랑하자. 기분이 좋아서 나는 너한테 오늘도 지고, 내일도 져야지./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겨울 코트엔 온통 깃발이 묻고./ 공중에서 죽어가는 새는 중력을 거절하지 않네./ 우리는 죽은 새처럼 말이 없네./ 나는 너를 공기처럼 껴안아야지. 헐거워져서 팔이 빠지고, 헐거워져서 다리가 빠져야지./ 나는 나를 줄줄 흘리고 다녀야지. 나는 조심 같은 건 할 수 없고, 나는 노력 같은 건 할 수 없네. 오늘은 내내 어제 오전 같고. 어제 오후 같고./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오늘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오늘은 발자국이 생기기에 얼마나 좋은 날인지./ 사람들은 전부 발자국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네. 춥다. 춥다. 그러면서 땅만 보며 걸어다니네./ 눈 내리는 소리는 안 들리는데 눈을 밟으면 소리가 났다./ 우리는 눈 내리는 소리처럼 말하자. 나는 너한테 안 들리는 소리처럼 말했다가/ 죽은 새처럼 말했다가/ 죽은 새를 두 손에 보듬고 걸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