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빛깔 / 박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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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1. 12. 7.

산골의 가을은 목덜미에서부터 온다. 스산한 기운이 뒷목을 파고들어 등뼈로 스미면 보랏빛 바람 닮은 가을 들꽃은 핀다. 시린 등을 핑계 삼아 화덕 앞에 앉았다. 화르르 타는 장작위에 지난여름 말려둔 인진쑥 몇 가닥을 올린다. 온기 사이로 그윽함이 밀려든다. 너울거리는 불길 속에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보인다.

손바닥만 한 라디오를 옆에 끼고 쇠죽솥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어린이 연속극은 끝난 지 오래다. 골목에선 꼬맹이들 노는 소리가 뒷덜미를 끌어당긴다. 계집아이의 골난 입술이 십 리 밖까지 튀어 나간다. 땔감을 한꺼번에 밀어 넣고 솥뚜껑을 뚫어져라 노려봐도 김이 날 생각을 않는다. 굵은 장작이라도 있다면 넣어두고 달아날 텐데 불쏘시게 같은 짚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 버릴까 애가 타서 자꾸 엉덩이가 들썩인다. 땔감을 아끼라는 아버지 말은 안중에 없이 몇 움큼을 집어 꾹꾹 쑤셔 넣는다. 구수한 쇠죽 내음을 맡은 소가 아궁이 쪽을 기웃거리며 "움머" 하고 운다.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솥전엔 금세 뜨거운 김이 흐른다. 잠시 뒤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나고 불을 그만 지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진다.

잽싸게 일어나 도망치듯 밖으로 나간다. 들 건너 강수골에서 밀려 온 이내가 골목을 덮는데 왁자하게 떠들던 조무래기들은 흔적조차 없다. 배꼽마당으로 달려가 휘 둘러보아도 아이들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사무치게 외롭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몸속에서 일어난다.

여름이 지나면 소꼴을 뜯는 오빠들 일도 한가롭다. 짚을 섞어 푹 익힌 소죽을 주어야하므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은 계집아이 몫으로 남는다. 실컷 뛰어 놀고 싶은 마음에 부리나케 마쳐도 어스름 저녁마다 허방만 짚고 돌아온다. 이게 다 그놈의 황소 탓이다. 소가 어디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방정맞은 생각을 하며 외양간을 흘낏 넘겨다본다. 죽통을 말끔히 비운 소가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저의 밥 당번인 걸 아는지 순한 눈을 껌벅이며 계집아이를 쳐다본다. 잠깐 흔들리려던 마음을 모질게 다잡는다. 다시는 갈고리로 소잔등을 긁어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계집아이의 이런 속을 들여다보셨다면 아마 열두 번도 더 쫓겨났으리라. 소는 아버지 다음으로 대접받는 이 집의 농사꾼이며 살림밑천인 때문이다.

놀 일이 없어진 계집아이는 정지 앞을 어정거린다. 바닥이 푹 꺼진 정지엔 촉수 낮은 백열등이 노랗게 흔들리고 어머니는 막 밥을 푸는 중이다. 누룽지라도 주려나 싶어 상 차리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주걱이 설거지 통으로 들어가는 걸 보니 누룽지 먹긴 그른 모양이다. 어머니는 뻣뻣한 광목 앞치마를 펼쳐 들고 뜨거운 밥그릇을 감싸더니 상으로 옮기신다. 맨 꼴찌로 푼 계집아이 밥은 가장 나중에 상에 얹힌다. 매번 똑같다. 빨래를 갤 때도 마찬가지다. 오빠들 옷을 먼저 개고 나서야 계집아이 옷을 갠다. 한번은 무심코 오빠 옷을 타고 넘었다가 어머니께 싫은 소리를 한 됫박쯤은 들어야 했다. 계집애라는 까닭에 아들 다음으로 밀리는 건 암만 생각해도 분한 일이다. 밥맛이 싹 사라진다.

계집아이는 밥상 앞에서 끼적거리다가 아버지께 혼이 난다. 오빠들이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일이다. 아버지는 계집아이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게 분명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눈을 부릅뜬 채 버릇없다며 나무라신다. 계집아이가 반짝거리면 아들들이 빛을 잃는다고 여기는 분이니 그러시는 것도 당연하다. 사내아이들처럼 말타기 놀이나 씨름을 하며 노는 것도 아버지한테 들키는 날엔 어찌될지 알 수 없다. 아예 계집아이가 눈에 띄지 않고 자라주길 바라시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집안의 울타리 안에서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신다. 아들들 보다 서열이 밀리는 어머니는 아버지의 힘에 견줄 바가 못 된다. 자신도 여자이면서 아들을 더 위하는 어머니의 행동은 더욱이 이해할 수 없다. 계집아이가 갈수록 사람들 앞에서 주눅이 드는 것도 따지고 보면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아들 딸 차별이 유난한 독재자 아버지 때문이고 강력한 가부장제 아래서 기를 펴지 못하고 고개 숙이는 어머니 때문이다.

큰댁에 잔치가 있던 날이었다. 어른들은 모두 식장으로 몰려들 가시고 코흘리개 어린아이들과 사촌 올케만 집을 지키며 남아있었다. 꼬맹이들끼리 설치고 노는 걸 지켜보느라 올케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닌 모양이었다. 계집아이가 풀쩍거리며 사내 녀석들 사이를 뛰어다니는 꼴은 더 못 마땅한가 보았다. 놀기 좋아하고 눈치는 모자라는 계집아이는 자신을 쳐다보는 올케의 눈 꼬리가 거세가 올라가 있는 것도 보지 못했다. 신나게 노는 중에도 마당 뒤퉁이 화덕에 얹힌 가마솥에서는 소고기국 끓는 냄새가 맛있게 났다.

점심때가 되어 올케가 대청마루에 두레상을 펴고 아이들을 불러 앉혔다. 계집아이 앞에도 귀한 소고깃국 그릇이 놓여졌다. 한 술 크게 떠서 입에 넣는데 숟가락이 입 안에 쩍 달라붙었다. 정지로 달려가 새 숟가락을 가져와선 다시 한 술 떴다. 다른 아이들 숟가락은 멀쩡한 데 계집애 숟가락엔 벌건 기름이 그대로 묻어났다. 몇 번을 바꾸어도 마찬가지였다. 억지로 국물을 삼켰지만 전에 먹던 소고깃국 맛은 아니었다. 무엇이든 남기는 법을 모르는 계집아이는 맛없는 국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날 일을 떠올리니 서러운 눈물이 울컥 쏟아진다. 일부러 식은 국을 주고 그것도 모자라 숟가락을 여러 번 바꾸는 걸 보면서도 모른 체한 올케보다 아버지가 더 밉다. 어디서든 할 말 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지 않고 윽박을 질러가며 얌전하게 만든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다. 계집아이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밥 먹던 숟가락을 휙 내던진다.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버럭 귓전을 때린다. 뺨이 얼얼한 걸 보니 몇 대 쥐어박힌 것도 같다. 이럴 땐 어머니 뒤로 숨는 게 그나마 낫다.

서러운 걸로 따지면 골목에서도 마찬가지다. 또래 계집애들은 거의가 언니 아니면 여동생이 있다. 계집아이만 혼자다. 게네들끼리 편을 짜서 덤비면 혼자인 아이가 밀리는 건 당연하다. 울고불고 집으로 가봤자 어머니는 뻔한 말씀만 하신다. 아이들 싸움에 어른이 펴드는 게 아니니 기대도 하지 말란다. 언제나 계집아이 편은 하나도 없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들려준 믿기지 않는 말을 떠올리곤 위로를 삼아야 했다.

"그래도 아야, 내가 니를 낳았을 때 너거 아부지가 큰집에 가서 뭐라꼬 캤는 줄 아나. 요번에도 또 아들 낳아으마 미역국도 안 끓이줄라 캤는데 딸냄이 낳아서 끓이준다 캤다 안 카나."

또래들 사이에서 기죽어 사는 건 죽기보다 싫다. 한 나절을 버티고 서서 눈 흘기며 싸워도 막판에 저희편이 나타나면 허무하게 지고 만다. 계집아이는 차츰 또래들과 어울리는 걸 멀리한다. 싸움에 지는 것 보다 어울리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붙박이 가구처럼 집안에서만 지내다보니 아궁이 앞이 차츰 좋아진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지켜보며 갖가지 공상을 즐기게 되면서 아궁이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다. 느긋하게 불을 지피며 구수한 소죽 냄새를 맡는 건 무척이나 감미롭다. 땔감마다 다른 불꽃의 모양과 색깔이 있다는 걸 알아 가면서 계집아이는 아궁이 불을 때는 저물녘이 기다려지곤 하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린계집아이는 간 곳 없고 화덕 앞에 수북하던 인진쑥 다발도 바닥이 났다. 두고두고 조금씩 쓸 땔감이었으나 유년시절을 여행하는 소중한 촉매제로 쓰였으니 아까울 것도 없다. 지난여름 산쑥이라고도 하는 인진쑥을 베어다 말릴 때부터 이미 그것의 용도는 정해져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법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해준 향내가 아직도 코끝에 아련하다.

돌아보면, 사춘기를 지날 무렵 내가 기억하던 유년의 추억은 혼탁한 무채색으로 덧칠해져 있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철이 들면서 멍 자국마냥 물든 가을꽃처럼 조금은 색감이 부드러워지긴 했으나 여전히 그리운 건 아니었다. 그때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지금, 나는 따뜻한 화덕 앞에 앉아 나의 유년의 빛깔을 본다. 보랏빛을 띄는 가을꽃 속에도 수만 가지 빨강과 파랑이 깃들어 있듯 내 지난 어린 시절은 다채로운 무지개 빛깔이 숨어 있었다. 다만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어 알지 못했다. 어린 계집아이가 화덕 앞에 앉아 꿈꾸던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리라는 걸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 모두의 유년은 숭배하고픈 시간의 빛깔로 반짝인다는 걸 이제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