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소리 / 신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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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2021. 12. 7.

가을은 소리로부터 오는가 보다. 낙엽 구르는 소리, 벼 익는 소리, 편지 쓰는 소리, 기러기 날아가는 소리가 소리를 물고 소리가 되어 끝없이 번져 나간다. 가을 음악회, 나도 가을이 되어 음악회를 따라나선다.

잎 떨어진 나뭇가지에 음표가 된 참새가 겨울을 부르며 배경 음악처럼 조용히 깔린다. 허수아비 옷깃에서 뛰쳐나온 귀뚜라미가 비올라를 들고 무대 뒤편에서 별들을 재우느라 귀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흥얼거린다. 가랑잎이 하프 소리를 머금고 시나브로 떨어지고, 콘트라베이스를 활로 긁으며 갈대가 웅웅거린다. 개울물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에서 오카리나를 불고 있는 벌레소리도 멀리서 들린다. 첼로를 켜는 억새의 춤사위가 나긋나긋하다. 작은북을 두드리는 대숲 소리가 고즈넉한 오솔길을 불러 모은다.

백파이프를 불며 군악대처럼 고향을 찾아가는 기러기떼 소리가 가을 하늘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다. 팀파니를 두드리는 파도소리도 가끔 들리고, 계곡물이 피아노를 치며 흘러가는 소리도 간간이 무대 사이를 비집고 있다. 가을 동화를 읽어주는 플루트 같은 엄마의 목소리가 아이를 보듬고 있다. 어디선가 묵직한 소리를 내는 호른이 소나무를 흔들며 홀가분한 일탈을 즐기고 있다. 가슴을 쥐어짜며 캉캉대던 매미의 허물, 낡은 기타가 되어 한편에 비켜서 있다. 저 멀리서 반짝거리는 별들의 합창 소리가 들리고, 구름 사이로 서두는 달의 발걸음도 보이는 듯하다.

단풍잎은 여인의 붉은 오르가슴이 되어 무대 위를 흐르고, 어디쯤엔 들국화가 노란 깃발을 흔들고 있다. 눈앞에 드러나는 힘없는 하얀 잎맥이 겨울바람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다.

가을 음악회의 주제는 비움일까, 나눔일까 아니면 떠남일까. 그도 아니면 자연을 맞는 인간의 회한일까. 눈을 감으니 악기들이 자연을 제치고 스산스럽게 내 마음을 오간다. 귀뚜라미에게서 비올라를, 갈대에게서 콘트라베이스를, 오카리나, 클라리넷, 백파이프, 팀파니, 모든 악기를 주르륵 떼어버린다. 자연의 소리가 내 마음을 채우기 시작한다. 괜히 악기 소리에만 기대고 있었구나. 가을소리는 자연과 하나된다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임을 일깨운다. 인위人爲가 아닌 무위無爲를 배워 자연인이 돼라 한다.

저 가을소리의 묶음, 자연을 알려거든 분별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 한다. 그리하여 고요함에 머무르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이른다. 실용주의, 자본주의에서 익힌 삿된 마음을 버리고 사물의 흐름, 자연의 본성에 따라 자유롭게 노니라고 타이른다. 가을소리에서 죽비를 읽는다.

가을이야! 크게 소리를 외쳤더니 가을이 성큼 다가와 내 귀를 간질인다. 귓불을 따뜻하게 만지며 귓속말을 해 주시던 어머니가 성큼 다가오는 것 같다.

지금 나는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가을소리를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