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 그리고 곡선 / 신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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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8.

자연에 직선은 없다. 불국사 가는 길, 토함산 고갯길 모롱이를 돌 때마다 굽이굽이 동해바다가 숨었다, 드러났다 한다. 고갯길이 바다를 품고 있는 것 같은 푸근한 마음, 곡선이 내게 주는 자연의 맛이다.

탐험가와 원주민의 단거리 경주 일화가 있다. 탐험가는 모든 걸 경쟁과 승패로만 보는 문명인이었기에 앞만 보고 빨리 달렸다. 원주민은 곡선으로 달리며 꽃과 바다를 눈에 가득 담으며 느리게 달리는 자연인이었다. 누가 더 지혜로운가. 누가 더 행복한가.

쭉쭉 뻗은 고속도를 달리다 보면 바둑판 모양의 논을 볼 때가 많다. 사각형은 농지 관리가 편하고, 농기계 사용도 수월하다. 경계가 분명해 토지분쟁의 소지가 없고, 생산량 측정에 많은 도움이 된다. 구체적인 직선이 추상적인 곡선보다 깊이는 없을지 몰라도 생활에 편리함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편리함 속에는 지나쳐 버리는 것도 많다. 느리다, 넉넉하다 같은 느긋한 형용사가 숨어버리고, 걷는다, 돌아간다 같은 느린 동사가 가물거리고, 황톳길, 시냇물 같은 구부러진 명사들이 저 멀리 버려져 있음을 알 듯 모를 듯 희미해져 버린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내치거나 외면하는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인간의 유죄다.

직선은 1등, 1퍼센트, 한 줄에 목을 매고, 나도 모르게 조급하고 냉혹하고, 최고, 최대의 신봉자가 된다. 운동선수들의 슬럼프는 멈춤과 쉼 없는 질주, 직선의 삶이 그 원인이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인정과 운치가 있는 따뜻한 사람을 만드는 곡선의 여유가 필요한 것이겠다.

우리는 자나 깨나 사각의 틀 속에 갇혀 산다. 철도에서 시작된 직선의 모더니티는 인간의 주거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구가 조밀한 곳엔 원형 건물 짓기가 어렵다. 주변에 틈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건물이 사각형이니 집안의 생활용품도 네모 일색이다. 직선은 개발과 성장이라는 코드의 대표적인 상징이요, 편리함이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다. 직선은 무신론적이며 비도덕적이라는 말도 있듯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풀기 어려운 계층 간 갈등, 세대 간의 대립도 직선적 사고에 의한 압축적 성장이 빚어낸 모순인지도 모른다.

나의 삶도 직선적 삶이었다. 학교에서건 사회에서건 앞만 보고 달렸다. 이게 시대적 소명이요, 미덕인 줄로만 여겼다. 경주마처럼 옆을 가리고 주어진 트랙만을 질주했으니 도대체 ‘나’가 없는 허깨비였던 셈이다.

고향 제주섬에 가면 해안길을 걷기 마련이다. 해안길을 걸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넉넉한 곡선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직선적 행위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어느 순간 부메랑이 되어 나의 상처가 되었음을 고해하는 신성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 남은 세월, 구불구불 돌아들며 동화처럼 살 순 없을까. 곡선의 섬이 꼬불꼬불 직선의 삶을 다독거리고 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세상은 첨단 과학기술 뿐만 아니라 기본 원리와 전통 기술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고 한다. 어느 해인가 일본의 한 의료기기 업체의 현장 주임이 노벨화학상을 받은 건 우연이 아니다. 석사도 박사도 아니요, 대학 연구실이 아닌 현장 실험실에서 ‘단백질 분리 촬영법’의 기초원리를 발견한 것이다. 첨단 지식 기반 사회는 전통 과학기술의 축적 없이는 모래성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노벨화학상을 배출한 제작소에는 ‘깊은 샘의 물이 멀리 흐른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곡선이다.

무한 경쟁시대의 진짜 승부수는 무엇일까. 옛날 음악감상실이 그리운 건 왜일까. 아날로그적 소비방식에는 곳곳에 틈이 있었기에, 신청한 노래에 눈을 감고, 가사에 빠지고 사색에 잠길 수 있었지 않은가. 생각의 공터가 향수가 되어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무한 경쟁시대를 헤쳐 나가는 진짜 승부수는 빨리 달리기일까. 깊이 달리기일까. 어차피 인생은 속도가 아니고 방향일 텐데, 느림의 자유 아다지오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어두운 곳에 빛이 있고, 빛 속에 어둠이 있다. 빛이 밝은 것은 어둠 때문이다. 직선 속에도 곡선이 있고, 곡선 속에도 직선이 있다. 옛 선인들이 썼던 엽전이 생각난다. 옆은 둥글고 가운데 네모가 뚫려있는 상평통보는 방여원方與圓이라는 동양의 전통사상과 맞닿아 있을 성싶다. 안으로는 방, 반듯하게, 밖으로는 둥글게, 원처럼 살라는 뜻일 게다.

코이카 봉사단원인 딸과 함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모스크에서 보았던, 곡선 가운데 환상적으로 융합되는 아라베스크 무늬가 떠오른다. 교사시절 원의 넓이 공식을 찾아가며 땀을 흘렸던 일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 원은 곡선인데 어찌 넓이를 계산해야 하나. 원의 중심에서 한없이 잘라 붙인 부채꼴을 길게 늘어놓으면 직사각형이 된다. 직사각형의 가로는 원둘레, 원주의 반과 같고, 세로는 반지름과 같기 때문에 원의 넓이는 반지름 ×반지름 ×원주율이 된다. 어려운 적분법을 이용해도 답은 같다. 결국 넓이란 어떤 도형을 직사각형으로 바꾸는 것임을 일깨우는 수업이었다. 그때, 원을 자르고 붙여가며 직사각형을 만드는 노작 학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음악에도 화성과 선율이 조화를 이룰 때 더욱 정교해지고, 깊은 울림이 흐르며, 발레에서도 아라베스크 명칭으로 한 발로 서는 자세를 가다듬기도 하듯이 직선과 곡선이 서로 상보적이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직선과 곡선은 무슨 이념이거나 슬로건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사이다. 디지털에 목매달지 않아도, 아날로그의 향수에 빠지지 않아도 살아가고,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혼재된 디지로그로 생활하고 있듯이. 묻고 싶은 것은 경영학이나 정치학처럼 ‘그러니까’하는 사회 과학적 시각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인문학적 사유방식도 외면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자신을 내세우고 드러내는 억센 직선으로부터 어떤 모양이든 상대를 포용하는 나만의 곡선 하나를 긋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