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가도 모를 일 / 박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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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 12.

한 해에 두 번씩 혼사를 치르는 일은 결단코 하지 않겠다던 내가, 일이 묘하게 되느라고 큰 녀석 장가보내던 해, 남부끄럽게도 딸마저 시집을 보내게 되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던 딸애가 하루는 마음에 드는 청년이 생겼다고 집으로 데려와 인사를 시키면서 “아버지 때문에 사귀게 된 거에요.” 라고 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싶었는데, 알고 보니 녀석의 이름이 나와 똑같은 ‘영수’라는 거였다.

아버지와 이름이 똑같다는 사실이 운명의 끈인 양 잡아 끌더라며 “아빠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 아니겠어요?”라고 했다. 그럴싸한 핑계였다.

그러나 혹여 올해 안에 식을 올리자면 어쩌나 싶어 “청년이 내 맘에도 썩 든다마는 한 해 두 번 혼사는 치를 수 없으니 서둘지 말라.”고 단단히 못을 박아 놓았다.

이때만 해도 “우리가 뭣 하러 서두르겠느냐.”고 모녀가 입을 맞추었지만, 그 해 가을, 걱정하던 바가 현실로 다가오고야 말았다. 양가 부모 첫 대면하는 자리에 나갔더니 나의 지엄한 당부는 깡그리 무시된 채 결말이 나 있었다. 아내와 딸애가 이미 그쪽 집안과 한통속이 된 듯했다.

지난 뒤에 생각하니 서울행 고속버스 안에서 집사람이 건넨 말에 남다른 의미가 있었나 보았다. 어디 가서 궁합을 보았더니 딸애가 내년에는 결혼을 못할 운세라고 했고, 사윗감이 2대 독자여서 무척 서두르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게 다 짝짜꿍이 되어서 하는 얘기인 것을 나는 상견례 자리에 가서야 알았다. 결국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봄에 혼사를 치르신 터에 저희 형편을 헤아려 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사돈 되실 분이 점잖게 말문을 열더니

“양가가 모두 교육자 집안이니 기왕이면 겨울방학을 피해서 12월 초가 좋겠습니다만….”

어안이 벙벙해진 내가 무슨 얘기냐 싶어 아내 쪽을 바라보니 허벅지를 꼬집으며, 우회적인 표현으로 동의를 하고 있지 않은가.

“준비가 전혀 돼 있지 못해서 그게 걱정이에요.”

여기에 사부인 되실 분과 사위 될 녀석이 쐐기를 박고 나왔다,

“혼수 걱정일랑 아예 하지 마세요. 빈손으로 보내주셔도 됩니다. 두 사람이 벌어서 하나하나 장만해 가야죠 뭐.”

“12월 7일 일요일이 길일이라고 해서 저희는 그 날로 합의를 봤습니다.”

“안 돼!” 소리가 목구멍에서 꿀꺽 넘어가 버렸다. 박 고집도 자식을 맡길 분 앞에서 주눅이 들어 버렸다. 벙어리 냉가슴 앓을 도리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그 집 식구가 된 듯 편을 들고 나오는 딸년이 괘씸했고, 맞장구를 치는 아내까지 미웠다.

하지만 어쩌랴. 무대에 선 배우처럼 너털웃음까지 날리며 상견례를 마치고 나왔지만, 기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갑자기 딸과 남남이 된 듯했다.

딸애를 키울 때 생각이 났다. 아들 이름은 돌림자를 따느라 작명가의 손을 빌렸지만, 딸년 이름은 사랑의 징표로 직접 작명까지 해주었던 애비였다. 말미암을 유由에 참 진眞자를 골라 참되고 진실하게 살라 일렀고, 여기에 이름이 사람 운세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 마음에 걸려 명망 높은 시조시인 김상옥선생께 감정까지 받는 지성至誠을 받치지 않았던가. 체격 작은 게 늘 안쓰러워 손찌검은 고사하고 큰소리로 꾸지람 한 번 하지 않고 키운 딸아이이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대학 졸업반 때 어려운 취직 문을 뚫어주고자 이력서를 들고 서울 바닥을 헤매다가 운 좋게 고마운 선배 한 분을 만나 평생직장까지 마련해 주었던 애비가 아닌가.

버스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섭섭한 마음만 부풀어 올랐다. ‘혼수고 뭐고 해줄 것도 없지.’ 하고 중얼대자 옆자리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아내가 “딸 보내는 게 섭섭해서 그러죠?” 하고 거들었다.

“달랄 때 줘야죠. 오죽하면 딸을 둔 부모는 전당포 주인에 불과하단 말이 나왔을까요. 임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저 잠시 맡아 기르는 것뿐이라잖아요.”

“우리가 급할 게 있어, 꿀릴 게 있어.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쓸데없는 고집 그만 피워요. 빨리 애들 보내고 여행이나 다니자던 당신 아녜요?”

아내 말이 옳은 듯 느껴졌지만 한번 구겨진 내 마음은 펴지지가 않았다. 이런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살림을 차릴 전세방을 구했노라고 연락이 오자, 아내는 혼숫감을 장만할 목록을 내밀었다. 돈이 얼마쯤 있어야 구색을 갖추겠느냐고 묻자 ‘줄잡아 두 장은 들겠는데 손에 쥔 돈은 한 장 밖에 안 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서둘러 치르는 혼사지만 해줄 건 해 주어야겠다 싶었다. 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아 서울 가는 아내 손에 한 장을 더 쥐어 주었다.

이튿날 내려온 아내는 말없이 대출받아 가져갔던 돈을 도로 내놓았다. 딸애가 집안 형편을 눈치 채고 헐한 것만 골라서 한 장으로 끝을 냈다고 했다. 순간 사돈 되실 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뭐야?”

소리를 벌컥 질러댔다.

“애비 망신 주려고 또 짰어? 빚 얻어 줬다고 되가지고 와? 남편 무능하다고 광고 내고 싶어? 당장 내일 가서 좋은 걸로 더 사주고 와!”

혼수를 해 주느니 못해 주느니 떠벌리던 내가 되레 덜 썼다고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듣다 못한 아내가 휑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애가 어떤 딸인데…. 손 귀한 우리 집에 연년생 오빠와 남동생 틈에 태어나 겉돌며 자라, 늘 가슴 한 구석에 찬바람이 돌던 딸애였다. 젖 뗄 무렵부터 고모네 집으로, 외갓집으로 내돌려도 잘만 자라던 아이. 이런 성장 과정이 오히려 신의 축복인 양 심성이 밝고 모나지 않으며 곧게 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던 딸이 아니던가. 모든 게 무능한 애비 탓이란 생각이 들자 가슴이 저며 왔다. 빈손으로 시집가겠다는 그 애 마음이 어땠을까 싶었다. 아내는 문 밖에서 훌쩍이고 있었다.

남들은 딸 시집보내는 날 서운하고 허전해서 눈물 흘린다는데 우리는 미리 울어 버리고 말았다. 아내의 어깨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결혼식은 서울에서 조촐하게 치렀다. 청첩장은 아들 때보다 반으로 줄였으나 많은 분들이 멀리까지 오셔서 축복해 주었다. 큰 은혜를 입은 기분이었다. 내가 괜한 고집을 부렸던 것 같았다.

딸이 딸을 낳던 날, 죄나 지은 듯 애비 어깨가 축 늘어지더니 지난해 가을 친정에 와 사내애를 순산하자, 괜스레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딸 둔 부모를 전당포 주인에 비유한 것은 얼토당토않다. 그보다는 애프터서비스를 책임진 영구 보증인이란 말이 옳을 듯하다.

이제 어엿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딸애는, 맞벌이 직장생활에다 시부모 봉양하랴, 고단한 삶을 꾸려가면서도 언제나 밝고 명랑하다. 마음 씀씀이에 정이 넘치고 어른스러워졌다.

딸에게 배우는 경우도 있다. 어떤 때는 우리가 그 애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멀리 있어도 마음을 잘도 헤아린다. 친정나들이를 올 때는 등산용 양말이며, 모자, 땀복 같은 것을 사들고 온다. 산에 심취한 애비가 가장 좋아하는 선물임을 훤히 알기 때문이다.

그 애가 집에 오면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몰라 짜릿한 긴장감을 맛보기도 한다. 머리는 왜 그리 짧게 깎았느냐, 넥타이가 촌스럽게 그게 뭐냐, 구두 좀 닦아 신어라…. 허점을 콕콕 찔러 지적하는 딸아이다. 아내에게 듣는 잔소리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재잘거리는 딸애 말소리가 도란대는 여울물 소리 같기도 하고 고운 멜로디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밤늦게 또는 새벽같이 전화가 걸려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시댁 어른들 귀염은 받고 있는지 그것도 늘 신경이 쓰이곤 한다.

딸이 뭐길래 남의 집 사람으로 주고 나서도 늘 가슴에 넣고 살며, 이토록 아파도 하고 기뻐도 하는 건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