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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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2022. 1. 13.

김언 시인
1973년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부산대학교 산업공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8년 《시와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숨쉬는 무덤』, 『거인』, 『소설을 쓰자』, 『모두가 움직인다』, 『한 문장』,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시론집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산문집 『누구나 가슴에 문장이 있다』가 있다. 미당문학상,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상, 박인환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인의 말 / 김언
이상하게 외로운 시만 계속 썼는데, 이상하게 외로워지지 않는다. 아직 덜 외로운가? 그래서 더 외로운 시를 썼는데, 닳는 것은 시고 닳으면서도 부대끼지 않는 것이 또한 시라는 말씀. 참 외롭다. 외롭게 들리지만 외롭게 있는 그 말을 더 외로우라고 퍼뜨린다. 여기서도 퍼뜨리고 저기서도 뿌리다 보면 삐라처럼 발견되는 장소가 있다. 저것은 국경을 넘어온 말이다. 저것은 국경을 넘어와서 혼자 있는 말이다. 바람 한 점에도 금방 뒤집어지는 말. 바람 한 점에도 휙 날아가 버리는 말. 달아나서도 어딘가 도착하는 말. 도착하다가 곧 떠나는 말. 그걸 외롭다고 하지 않으면 괴롭다고 할 것인가?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럼 불행하다고 할 것인가? 행복과 불행 둘 사이에 끼어서 꼼짝하지도 못하는 말을 계속 듣고 있다. 어느 쪽이든 가라. 가다 보면 종착지가 있을 것이다. 그게 어딜까? 여기는 아닌 것 같다.

2018년 6월 김언

기하학적인 삶 / 김언
미안하지만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다./ 우리는 구이고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변함없는 크기를 가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칭을 이루고 양쪽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인격을 좋아한다./ 피부가 만들어 내는 대지는 넓고 멀고 알 수 없는/ 담배 연기에 휘둘린다. 감각만큼 미지의 세계도 없지만/ 3차원만큼 명확한 근육도 없다. 우리는 객관적인 세계와/ 명백하게 다른 객관적인 세계를 보고 듣고 만지는 공간으로/ 서로를 구별한다. 성장하는 별과 사라지는 먼지를/ 똑같이 애석해하고 창조한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나왔지만/ 우리가 만들어 낸 자연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메바처럼/ 우리는 우리의 반성하는 본능을 반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결된 집이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우리의 주변 세계와 내부 세계를 한꺼번에 보면서 작도 한다./ 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고향에 있는/ 내 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다. 거기/ 누가 있는 것처럼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 점을 찾는다.//

밤에 오는 사람 / 김언
조금 있으면 눈이 내린다 잠깐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밤을 새워 산책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눈썹 밑으로는 전부가 그늘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가 내 손을 잡고 가는지 잠깐 옆에 있는 사람이 지켜볼 것이다 여기서는 대부분이 밤에 오는 사람이다// 조금 있으면 눈이 내린다 여기서는 대부분이 밤에 오는 사람이고 어떤 바람은 쉽게 썩는다 나는 둘 중에서 가운데 바람을 택하고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 몸으로 태어나서 잠깐 옆에 서 있는 여자는 빈틈없이 공기를 껴안고 또 이렇게 우는 것이다 나는 겨우 괴로웠다// 조금 있으면 눈이 내린다 이 문장은 어긋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용건 없는 사람 / 김언
점점 용건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용건만 있으면 뭐라도 할 텐데// 없다. 너에게도 없고 나에게도 없는 것/ 그것이 없다. 용건을 말하라.// 간단히 말하고 간단히 돌아와서/ 용건이 무엇이었는지 곱씹어보는 것// 그것이 없다. 용건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다. 있었으면 이제라도 없었던 것 같다.// 용건 없이 만나는 사람. 너는 친구인가?/ 용건 없이 만나는 친구는 용건이 부족해서// 만나다가 만다. 용건 없이는 지탱하기 힘들다./ 부부 사이에도 간단한 용무가 있고 용건이 있어야 하는데// 누구보다 더 지독히 있어야 살 수 있는 사이인데/ 용건이 없어지면서 들어왔는지 나갔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아내다. 남편이다. 무심하게 용건을 말한다./ 내일부터 여행 가. 어제는 친구 집에서 잤어.// 당신을 재워줄 수 있는 친구는 무슨 용건으로/ 당신을 재워줬는가? 당신이 타고 갈 비행기는// 또 무슨 용건이 있어 당신을 태우고 가는가?/ 용건이 없어서 간다. 용건이 없어서 아무 거라도 타고 가는/ 당신은 또 무슨 용건이 있어서 나를 찾아왔는가?/ 없어서 왔다고 했다. 알겠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 용건이라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것이다./ 다시 찾아오라고 용건을 만들어주었다.// 그는 돌아가면서 내게 없는 용건을 꺼내어/ 얌전히 지갑 속에 넣었다.//

키스 / 김언
나는 나라고 가끔씩 싱거운 생각을 한다. 너는 너라고 가끔씩 싱거운 맛을 본다. 내 생각이 어디 발라져 있나, 물어보면 손가락을 쭉 뻗어 내 입술을 가리킨다. 너는 너라고 맛은 네가 보고 네 입술은 달다 쓰다 말이 없다. 한없이 거추장스러운 이빨을 가지고 있다. 혀를 깨물고//

사랑 / 김언
그건 내게 없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을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주어야 사랑이라고 한다. 그것이 무어든 그것은 내게 없는 것이어야 하고 네게 주어야 하는 것이고 네게 줄 수 없다면 다른 것은 필요 없다. 내게 없는 것이어야 한다. 내게 없는 것만 있다. 내게 없는 것만 네게 줄 수 있는 것, 그걸 꺼내어 네 품에 안겨 주는 것 내게 없다는 데도 바다처럼 흔한 것. 바다처럼 넓은 것, 바다처럼 깊고 빠져나올 수 없는 그것을 다시 꺼내어 네게 안겨 주는 것, 바다는 멀다. 바닷가 출신에게도 멀다. 줄 수 없기에 가질 수 없는 것, 가질 수 없기에 주어야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배운다면 참으로 난감한 바다가 멀리 있다. 만질 수 없는 바다가 멀리 있다. 보아도 보아도 바다뿐인 바다가 멀리 있다. 그 바다를 보러 가자고 사랑이 있다. 그 바다를 보러 가서도 사랑이 있다. 사랑은 짐이다. 사랑은 조개껍데기처럼 빛나고 나뒹군다. 아무렇게나 여기 있고, 저기 있다. 저기 있고 여기 있다. 어디에 있어도 홀가분하지 않다. 가뿐하지도 않다. 그것은 무겁다. 몹시도 무거운 바다를 보고 왔다. 그리고 웃는 바보들이 있다. 사진 속에만 있다. 도대체 언제적 사진인가?//

자유의지 / 김언
나는 내 의지로 거기 있다.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순전히 내 의지로 조종당하고 있다. 순전히 내 의지로 사경을 헤메고 있고 순전히 내 의지로 기적에서 깨어났다. 순전히 내 의지로 눈이 내린다. 순전히 내 의지로 모르는 명단에 있다. 거기서 정착하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고 힘든 일인지는 순전히 내 의지로 모른다. 알아봤자 모르는 사람들이 순전히 내 의지로 들어왔다가 나간다. 순전히 내 의지로 기억되고 있다. 순전히 내 의지로 줄을 서고 멈출 수 없다. 순전히 내 의지로 기차가 온다. 순전히 내 의지로 버스는 출발했고 비행기는 멈춰 있다. 순전히 내 의지로 무관하고 무의미하고 무성의하고 어쩐지 축제 같다. 아침마다 오는 발기의 순간도 순전히 내 의지로 감퇴했다. 짜릿하게.//

한 표정 / 김언
기쁨과 슬픔과 짜증이 한 표정/ 즐거움과 의심과 분노도 한 표정/ 너는 왜 한 사람인가/ 혼란과 지루함과 후회도 왜 한 사람인가// 풀밭의 토끼는 외롭다/ 저렇게 장난스러운 토끼는 처음 본다/ 저렇게 흡족한 토끼도 처음 본다/ 저렇게 흥분하고 저렇게 공포에 떨고 있으니// 여러분이 있어 내가 웃는다/ 당신들이 있어 나는 회의적이다/ 믿을 수 없이 많은 귀를 잘랐다/ 토끼가 어디로 갔나/ 토끼가 어디로 갔나/ 귀를 쫑긋 세우고// 한 사람이 대화하고 있다/ 그것도 표정이라고// 외로움과 갈망이 냉소와/ 또 한 사람이/ 악수하고 돌아설 때//

방황하는 기술* / 김언
친구가 있고 여자친구가 있으며/ 토론이 있고 회합장소가 있다/ 내가 하룻밤 묵었던 호텔이 있고/ 매음굴이 있으며 유치원이 있고/ 가끔 쉬어가는 벤치가 있다/ 학교로 가는 길이 있으며/ 장례를 지켜보는 무덤들이 있다/ 지금은 잊혀진 유명한 카페가 있고/ 한번은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미로의 입구에서 나를 발견했다/ 얼마나 많은 방황이 필요하고/ 얼마나 많은 기술이 필요한가/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기 위해서는/ 지나온 길을 또 지나가기 위해서는//
* 발터 벤야민

두 사람 / 김언
나는 두 사람이 되려 한다./ 너를 가진 사람과/ 너를 가지지 못한 사람./ 너를 가졌으면 너를 포기하는 사람./ 너를 가지지 못했으면 너를 가지고 싶은 사람./ 나는 두 사람이 되려 한다./ 포기하는 걸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과/ 가지고 싶은 걸 가지지 않으려 하는 사람./ 포기하지 못해서 더 포기하고 싶은 사람과/ 가지고 싶어서 더 가지지 않는 사람이/ 되려 한다. 나는 너희 두 사람이 되려 한다./ 두 사람을 가지고 싶어 한다./ 가지고 싶은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가져봤자 소용없는 사람과 가지고 싶어도/ 소용없는 사람이 되려 한다./ 소용없어서 너를 버리는 사람이 되려 한다./ 소용 때문에 너를 버리고 아까워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 너는 포기한 사람이 되려 한다./ 내가 포기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 너는 생경한 사람이 되려 한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되려 한다./ 너는 떠나고 있다. 미련 없이 나를 말하고 있다./ 홀가분하게 나는 두 사람이 되려 한다./ 떠나고 없는 사람과 떠나도 소용없는 사람과/ 떠나봤자 다시 사람을 찾는 사람이 되려 한다./ 너를 가지고 싶어 한다. 너를 가지고 싶어 하는/ 나를 포기하려 한다. 너는 이미 포기했다./ 포기하는 걸 포기했다. 그래서 남는 사람이/ 내가 되려 한다. 그마저도 포기한다면/ 나는 완벽히 두 사람이 될 것이다./ 여기 없는 사람과 저기 없는 사람./ 어디에도 없는 사람과 어딘가에 없는 사람./ 거의 없는 사람과 거의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려 한다. 그런 사람이 되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과 아무것이나/ 하고 있는 사람. 둘 사이에 누가 들어서더라도/ 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두 사람도 아닐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되려 한다./ 너무 없는 사람이 너를 지나갔다.//

진술서 / 김언
진술서를 써야 한다. 쓰다가 관둬야 한다. 계속 쓰면 안 된다. 마치는 곳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전에 시작하는 진술서의 첫 문장을 써야 한다. 첫 문장은 진술이다. 마지막 문장도 진술이다. 진술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본 것이 없다. 진술이 없으면 아무것도 죽인 적이 없고 상하게 한 적도 없고 건드린 적조차 없다. 건드린 적이 없으니 진술조차 없는 곳에서 진술서를 써야 한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내가 죽이지도 못한 것을. 아무것도 상하게 한 적이 없는데 이미 상해버린 것을. 일목요연하게 명확하게 그리고 인상적으로 건드리는 말. 건드려야 일어나는 말. 그 말을 몇 번에 걸쳐 고쳐 쓰고 있다. 고쳐 쓰라고 한다. 그래서 고쳐 쓴다. 나의 진술을 너의 요구를 누군가의 죽음을 몇 번에 걸쳐 죽어도 납득이 되지 않는 죽음을 너의 요구대로 나의 진술대로 한 번 고치고 두 번 고치고 수십 번도 넘게 고치면서 누더기가 된 나의 첫 문장을. 계속해서 잘못 쓰고 있다. 계속해서 잘못 있다. 그 현장이.//

색청 / 김언
당신의 글씨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 당신의 코에서는 취한 소리가 들린다. 당신이 눈을 감는 소리는 입에서도 나는데 그것은 아무리 묘사해도 들을 수 없는 안개 같은 맛이다. 취한 뱀이 천장을 기어다니는 맛이다. 당신은 그걸로 글씨를 쓴다. 그것에 반해 냄새를 맡는다. 냄새는 오래되었다. 당신이 말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로 얼음은 실제로 차갑고 구름은 실제로 뜨겁고 눈은 실제로 무겁다. 너무 무거워서 비는 초록색이다. 너무 가벼워서 9가 8보다 더 빨간색이듯이. 은색이듯이, 진홍색이듯이, 변해가는 색깔은 변해가는 기억을 대문에 붙여둔다. 대문은 이대로 가면 검은색이고 흰색이고 또 다른 색이다. 문을 닫으면 큰소리가 난다. 문을 열면 더 요란한 주인이 소리를 내고 있다. 날카롭고 눈부신 철 대문에 끼어서 손가락이 부었다. 아주 특별한 재주를 가진 것처럼 우는 소리도 차갑다. 비웃는 소리도 그에 못지않다. 얼마나 의심이 많았으면 우는 사람 앞에서도 손 한 번 내밀지 않고 혀를 날름거렸을까. 취한 뱀처럼 바닥에 툭 떨어졌다. 6은 뒤집어도 뱀이다. 9는 다시 보아도 6이다. 8이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고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사이렌 소리는 물과 불을 가리지 않는다.//

발음 / 김언
나는 천천히 집어삼켰다/ 아무 소문도 새어나오지 않도록/ 누군가의 귀에서 내가 확인되도록/ 여러 사건들이 이루어놓은 나의 몸과/ 마음과 이따위 상처 받기 쉬운 건물들/ 사이로/ 무수하게 많은 증거들이 떠다닌다/ 기침을 하고/ 튀어나오는 순간/ 말이 되어버리는 저 먼지/ 저 공기 하나가/ 눈을 가지고 있고 입을 가지고 있으며/ 나의 몸매를 이루어간다/ 아무도 엿보지 않는 굴뚝에서/ 또 한 사람의 입김이 흘러나올 때/ 풍선껌처럼 부푼 그의 육감이 실감 난다/ 냄새 때문에/ 나는 나를 지지하고/ 나는 내 주변을 맴돌아 흩어져가는/ 견해를 불쾌하게 인정한다/ 세포들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그의 눈과 입과 코에서/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피투성이 내 얼굴을/ 보고하고 다녔다/ 그 손이/ 다른 손의 얼룩을 덮어간다/ 나는 묻어 다녔다//

거울 / 김언
강을 삶아서 만든 이 모래 모래는/ 잘게 빻아서 유리를 만들고/ 유리 안에서 만난 우리는/ 처음 만나는 것처럼 이름을 묻고/ 공기 속에 뭐가 있는지 물었다./ 공기를 헤집고 당신 대답이 튀어나왔다./ 물방울이 번지고 재가 날아올랐다./ 강에서 흔히 보던 새다./ 유리에서 흔히 비치던 모습이다./ 자주 안 보이던 모습이다./ 오늘은 무슨 일로/ 모래 씹는 표정이 되어 이쪽을 본다./ 뭐라고 말하려는지 가만히 보고 있다.//

洙暎수영을 생각함 / 김언
선생, 아직도 런닝을 입고 계시군요/ (그는 런닝이 아니라 런닝구라고 바로잡아주었다)/ 처음 뵙던 날이 생각납니다/ -九五八年度 現代文學 六月號였을 겁니다/ 그때 선생은 새를 보여주셨지요/ 움직이는 悲哀라고 하셨던 기억도 납니다/ (그는 새가 아니라 비라고 정정해주었다)/ 저는 움직이는 비애를 모릅니다/ 가라앉은 뿌리는 더더욱 모릅니다/ 30년은 실패하기에도 짧은 시간이었지요/ 바람이 불어도 혹 바람이 불어와도/ 여기는 어수선한 변방입니다/ (그는 변방에서 변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면/ 뜻밖에도 아메리카가 나온다고 했다)/ 저를 괴롭게 만드는 건 선생의 그 말투입니다/ 선생이 말을 더듬는 이유가/ 생활에서도 말을 더듬는 이유가/ 한 가지도 제대로 말하기 힘든 이 나라에서/ 여러 가지도 말하기 싫은 것임을 잘 압니다/ 압니다만 움직이는 바다 한가운데/ 떠듬떠듬 철근을 박고/ 다리를 놓은 것 또한 선생이었습니다/ 그건 생활이겠지요 선생이 말을 더듬어야 하는/ 생활이겠지요 (그는 자기가 자기의 시가/ 어떻게 사기치는지 유심히 지켜봐 달라고 했다)/ 선생이 선생의 시를 배신하는 것만큼/ 통괘한 일도 없겠지요/ 선생의 시가 선생의 시를 거들떠보지 않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겠지요 없겠지만/ 한 달에서도 제가 깨끗한 날은 며칠이 안 됩니다/ 그런 날에도 태반은 바깥의 날씨를 모르는 날입니다/ (그는 내가 모셔야 될 날은 따로 있다고 충고했다)/ 선생, 저는 시가 (안) 될 때 시를 씁니다/ 시가 (안) 될 때 시를 쓰고/ 전화는 하지 말고 편지도 쓰지 말고 시를 씁니다/ 시가 (안) 되겠다 싶을 때 사랑은 가고/ 어김없이 사랑은 가고 시는 씁니다/ 내일이 오늘로 도착하는 이 짧은 순간에도/ 사랑은 가고 어김없이 시는 씁니다만/ (그는 이 무수한 반복이 좋다고 했다)/ 오늘을 멀리 보아야 하는 내 몸이 왜 아픈지/ 왜 아픈지 알면서도 왜 자꾸 병을 키우는지/ 선생은 모르고 내 시는 더더욱 모릅니다/ (나는 용기를 달라고 했지 지혜를 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길어질수록 실패로 치닫는 내 시가/ 장시를 싫어하는 선생의 시가/ 오늘은 아무래도 용기를 배우는 날인가 봅니다/ 시가 (안) 되는데도 전화를 걸고 편지를 쓰고/ 다시 시가 (안) 되는 쪽으로 말을 겁니다/ 내일이 오늘로 도착하는 시간/ 종이가 부스러기가 되는 그 긴 시간 동안에도/ 선생은 선생의 시가 좀더 난해해질 것을 요구하고/ 저는 이 시가 선생을 추억하는 이 시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노려보고 있겠지요/ (그는 10년 전 어느 참고서 지문에서/ 내 눈을 처음 보았다고 회고했다)//

말(김수영) / 김언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도 기침도 한기도 내 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 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렸다 익살스러울 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 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하지 못한 말 / 김언
그는 어떤 말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 것. 그가 말하지 못했던 것. 그가 말하는 것을 잊어버렸거나 놓쳐버렸던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모르는 게 당연한 그 말을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가 끝내 말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그것들을 알아들을 방법이 내게는 없다. 없으므로 말한다. 그것이 무얼까. 그는 어떤 말을 하지 않고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다른 말을 하면서 그 말을 억제하고 있었다. 삭제하고 있었다. 없는 것처럼 하고 있었다. 정말 없는 것처럼 말하고 그래서 정말 없는지도 모르는 그 말을 그는 했어야 했다. 그는 그 말을 했어야 했다. 그는 그 말을 놓치지 않고 일지도 않고 언젠가는 해야 할 사람 같았다. 나는 거기까지만 안다. 그가 하지 않았던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착각/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말하고 싶었다. 나는 말하지 못했다. 말할 틈을 놓쳤거나 말할 자신을 잃었거나 말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에 하지 않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는 내가 어떤 말을 하면서 어떤 말을 숨기고 있었는지 모를 것이다. 그는 내가 어떤 말을 밀쳐두고 어떤 말을 대신하면서 참고 있었는지 몰랐을 것이 다. 알았다면 말했겠지. 그게 무어냐고 묻기라도 했겠지. 묻는 것을 참기라도 했겠지. 그는 정말 모른다. 내가 어떤 말을 하지 않고 있었는지를 나도 모른다. 그가 하지 않고 남겨둔 말을 궁금해서 일어나고 궁금해서 자리가 파한 다음에도 그 자리에 앉아서 떠나지 않던 그 말을 누가 대신해준다면 좋겠다. 그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나타나지 않고 그 말을 하고 있다.//

삶 / 김언
고생을 많이 했지만 시는 아니다./ 웃음을 많이 줬지만 희극은 아니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지만/ 사업도 아니다. 이게 무얼까?/ 갑자기 주어지는 이 난관에 대해/ 내 손은 바닥이 될 정도로 빌고 있다./ 비굴하지만 진 것은 아니다./ 늠름하지만 확고한 것도 아니다./ 떳떳하지만 내가 왜 이런 말을 할까?/ 의심하면서 칼은 칼집을 향해 간다./ 칼집에는 칼이 들어 있고/ 쑥 들어가 있고,/ 거기서도 개는 땅을 파고 있다.//

물 / 김언
물방울 하나가 물방울 하나를 만나러 간다. 둘은 물이다. 둘은 물이고 한동안 만난 적이 없다.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까? 일단은 포옹부터 먼저 하겠지. 그리고 떨어지지 않겠지. 반갑다고 껴안은 것이 지겹다고 소리치는 장면으로 옮겨가겠지. 어느 쪽이든 먼저 떨어지려고 난리를 치겠지. 그게 눈에 보이는가. 그게 귀에 들리는가. 아무런 차이도 없는 발버둥과 흐느낌과 그럼에도 떨어지지 못하는 둘 사이를 물이 가른다. 물이 갈라놓고 있다. 물은 물 때문에 헤어졌다. 물은 물을 찾아가서 위로받고 있다. 다른 이유가 있을까?//

돌 / 김언
돌에게는 시선이 없다. 돌에게는 돌의 눈이란 게 없다./ 돌에게는 돌의 대상도 없는데/ 돌이 있다. 돌이 있는 것을 본다./ 저 돌이 어떻게 말하는지/ 저 돌이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돌처럼 앉아서/ 돌처럼 앉은 내가 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매번 인정하다가 본다. 돌이 있다./ 돌이 있는 것이 돌과 함께 있다./ 돌은 주변을 거느린다. 주변은 돌을 감추고 있다./ 드러내고도 있다. 돌은 주변에 파묻혀서/ 주변과 다름없이 돌을 보여준다./ 돌을 보여주는 주변이 있다./ 주변에 둘러싸인 내가 문득 하늘을 보아도/ 하늘에는 주변이 있다./ 하늘이 주변이다. 주변이 하늘이면/ 주변은 땅도 되고 그늘도 되고 햇빛도 되겠지만/ 햇빛은 타들어간다. 그늘은 달구어진다./ 가만히 있으면 주변이다. 주변이 옮겨 다닌다./ 주변을 옮겨 다니고 주변에는 돌밖에 없다./ 오로지 돌만 있는 주변이 주변에 있다./ 주변에서 주변은 돌을 감춘다./ 마치 돌이 없는 것처럼 주변은 주변을/ 감싸고 겉돌고 돌이 사라진다./ 사라진 자리에 돌이 있다. 돌아가는 자리에도/ 돌이 있다. 주변이 그렇게 만들었다./ 주변이 나를 그렇게도 몰아세우듯이/ 돌이 있다. 주변이/ 나를 그렇게도 불러 모으듯이/ 돌이 생겼다가 사라진 자리에서 나를 본다./ 돌은 눈이 없다. 시선도 없고 대상도 없이/ 나를 본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었던가/ 돌 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돌멩이​ / 김언
갑자기 날아드는 돌멩이란 없다. 우연히 개입하는 전쟁이 없는 것처럼 내 머릿속에 박힌 이 돌멩이도 어느 정도는 충분히 예약을 하고 왔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속도로 어떤 솜씨로 돌멩이는 머리 근처에서 거미줄을 찢고 들어왔다. 며칠 전부터 바람은 흔들리고 있었고 몇 시간 전부터 요동치고 있었고 거미줄 탓은 아니었다. 바람보다 치밀한 계산과 바람보다 노련한 솜씨로 찢어놓은 거미줄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늦었다. 거미는 죽었고 죽었거나 달아났고 돌멩이는 내 머릿속을 굴러다닌다. 조용히 들어왔던 모양 그대로 내 손을 만지작거린다. 약간은 거칠게 다룰 것처럼.//

장기근속자 / 김언
나는 오래 머물러 있었다./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게 죄악이라는 걸 알기까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십 분이면 다 정리되는 것들이/ 여기 있었다./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 내가 뼈를 묻을 곳처럼/ 엄살을 떨던 여기/ 충성을 떨던 여기/ 엄살이든 충성이든/ 열정이든 과로든/ 내가 무엇을 떨든지 간에/ 시간만큼은 알아주리라/ 믿었던 여기/ 시간이 가장 먼저/ 배신하는 여기/ 여러 곳이 아니라/ 오직 한 곳/ 십 년 넘게/ 걸어서 들어오고/ 뛰어서도 들어온 곳을/ 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 일 분이면 충분했다//

상관없는 밤 / 김언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같이 병실을 쓰고 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고 곧 떠난다. 나와 상관없는 사라들이 회진을 돌고 몇 마디를 묻고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누워 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간식을 나누어 먹다가 체하고 토하고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그걸 치운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머리맡의 꽃병을 갈고 어서 나으라고 말한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주사기를 들고 혈관을 찾는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울고 있다. 나와 상관없이 절망하고 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의 절망적인 상태를 절망한다. 아무래도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려울 모양이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다시 오겠다고 하고 나갔다.//

칼맛과 살맛 / 김언
칼맛을 아는 자와 살맛을 아는 자가 만나서 싸웠다.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나서 칼맛을 아는 자가 말했다. 내 살을 남김없이 바쳐도 아깝지 않은 맛이야. 인정! 그러자 살맛을 안다는 자가 대꾸했다. 내 칼이 제대로 임자를 만났군. 그 맛에 폭 빠져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말이야. 그는 살에 담긴 칼을 빼지 않고 돌아갔다. 살과 칼은 서로를 맞물고 놓지를 않았다. 마치 천생연분인 것처럼 각자의 집을 허물고 한집에 붙어 살았다. 칼집이 아니면 살집인 그 집에서.//

완제품 / 김언
부서져라 쥐고 있다. 부서지기 직전까지 쥐고 있다. 부서지고 나서도 쥐고 있다. 내 손아귀에 들어온 컵은, 유리는, 모래는, 바위는, 불덩어리는, 물은, 심지어 공기는 모두 쥐어졌다가 풀려난다. 어디 한 군데 상한 곳이 있는가? 내 손이 묻는다. 피가 묻은 손으로, 물이 묻은 손으로, 불에 찔린 손으로, 공기에 놀란 손으로 더 움켜쥘 것이 없는지 살피다가 놓는다. 다 놓치고 나서야 놓는다. 다 부서지고 나서야 형태를 갖추어가는 그것을 뭐라고 부를까?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다. 내 손을 보라.//

컵 하나의 슬픔 / 김언
컵 하나를 생각하다 보면 컵 하나의 슬픔이 보인다 보이다가 안보이는 슬픔도 보인다. 슬픔은 담겨 있다. 컵 하나가 있으면 컵을 둘러싸고 맺히는 물방울도 슬픔의 모양으로 둥글고 슬픔의 자세로 흘러내리고 슬픔의 말로가 되어 말라가는데 말라붙는데 컵 하나는 덩그러니 컵 하나는 엉뚱하게 컵 하나는 재질과 상관없이 컵 하나의 모양과 자세와 성정까지 다 담아서 슬픔의 기둥으로 슬픔의 웅덩이로 슬픔의 틀린 말로 슬픔의 그릇된 호명으로 계속해서 네 네 대답하는 슬픔의 자동 응답기처럼 컵이 있다 하나가 있고 둘이 있고 셋이 있어도 컵은 컵이고 슬픔은 안 보인다 안 보이는 게 차라리 나았다 싶을 정도로 흘러넘치는 슬픔을 한 잔 따르고 두 잔 따르고 세 잔째는 이미 폭탄처럼 이것저것 다 들어가서 어지러움을 동반하고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컵 하나의 용도는 계속 슬픈 것. 계속 슬프라고 서 있는 것. 아니면 진작에 쓰러졌을 내가 무슨 정신으로 서 있겠는가. 비우자고 서 있다. 계속 따르라고 컵이 있다//

마음이 / 김언
말을 하려고 태어났다. 말을 하지 못해서 태어났지. 누구든 내 잠을 깨운다면 그 말을 하겠네. 나는 쫓겨날 줄 알았고 쫓겨나서도 쫓겨나는 줄 알았고 그래서 네 발을 핥고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고 말하겠지. 나를 버렸으니 네가 불쌍한 거야. 네가 가슴 아픈 거야. 그걸 모른다면 몰라서 더 불쌍한 너의 발을 핥고 빨고 씻어주었지. 말 못 하는 내가 오늘은 어디서 잠을 이루고 오늘은 누구한테서 음식을 받아먹고 또 오늘은 어느 집 개에 몰려서 쫓겨 다닐까? 죽었다고 한다면 안심이 될까? 네 마음. 살았다고 한다면 한숨을 놓을까?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나는 마음인데. 나도 마음이고 너도 마음인데 말 못 하는 내가 말 못 하는 내게 하는 말을 어찌 알겠니? 잘 가라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울먹거리는 말도 나는 다 알아듣는데 나는 기어이 모르고 있다네. 몰라서 잠들었다네. 어느 길바닥에 나를 맡겨버리고 돌아간 너의 흰색 승용차를.//

미학 / 김언
나는 혼자서 쉽게 놀지 않는다. 어딘가에 타인을 만들고 있다./ 고요하고 거침없이 적을 만든다. 그를 사랑해도 좋다./ 그와 무엇으로 대화하겠는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위험에 대해/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취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항상 손님을 만든다. 분노를 만들기 위해 그를 쫓아가도 좋다. 꼭 그만큼의 간격으로/ 누군가를 방문하고 멱살을 잡는다./ 나는 혼자서는 쉽게 풀지 않는다. 어딘가에 꼭 오해를 만들고 있다.//

왕은 죽어서도… / 김언
방금 전까지 아프다고 하더니 웃고 있다. 이건 왕의 자격도 없는 왕의 캐릭터. 연기는 부족하지만 마스크는 깨 괜찮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있다. 진실은 부족하지만 마음만은 비단결인 시종들도 같이 등장한다. 이 연극에서 왕은 죽은 뒤에도 3백 년 뒤에 나타나서 군중들이나 빵 부스러기 속에 섞인다. 속삭임이 적당하지만 구호가 더 잘 어울린다. 당신의 우유부단한 독재는 영구 집권과 영생과 다음에 환생할 적임자를 위해서 고뇌하고 또 고뇌하는 거실과 어울린다. 오늘은 나의 아흔아홉 번째 생일을 축하할 연주를 위해서 33년째 연습하고 있는 군악대를 치하하고 돌아왔다. 사료를 보면 그는 마흔다섯 살에 죽고 열두 살에 보위에 오르고 군악대는 악보를 공개할 수없다. 이 곡은 결코 연주된 적이 없으니 오로지 왕을 위한 3악장. 군악대와 예비 군악대와 예비 군악대를 위한 예비 군악대까지 모조리 무덤 안을 지켜라. 그들은 연주하는 자세 그대로 돌이 되거나 뼈가 되거나 부스러기가 되고 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무덤 안에서도 그들은 각자의 포즈를 신경 쓴다. 방금 전까지 죽겠다고 하더니 웃고 떠들고 잠잠해지고 있다. 서서히 행복하다.//

지금 / 김언
지금 말하라. 나중에 말하면 달라진다. 예전에 말하던 것도 달라진다. 지금 말하라. 지금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말하고 왜 말하는지. 이유도 경위도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은 기준이다. 지금이 변하고 있다. 변하기 전에 말하라. 변하면서 말하고 변한 다음에도 말하라.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아니면 지금이라도 말하라. 지금은 변한다. 지금이 절대적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이 되어버린 지금이. 지금이 될 수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그 순간이다. 지금은 이 순간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 말하라.//

어쩌다가 만났을까? / 김언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오는 사람을 생각한다. 저녁에 나가서 아침에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둘이 만나는경우는 아침이나 저녁 이 둘뿐이지만, 만나기는 만난다. 나가는 사람과 들어오는 사람이 인사한다. 둘은 아직 부부다.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다. 다음에는 언제 만날까? 약속을 정하지 않는다.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오는 사람과 저녁에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만난다. 만나기는 만난다. 어쩌다가 우리는 만났을까?//

외로운 공동체 / 김언
미묘한 시간대를 살고 있다./ 알 수 없는 기름을 흘리고 있다./ 당신의 흥미는 왜 동어반복인가./ 악수를 청한다. 악수!/ 엽서 한 장도 안 되는 몸무게가/ 굳어지기 전에 찍어달라고/ 말없이 백기를 흔든다./ 외계의 손을 흔든다./ 아무도 외롭지 않은 풍성을/ 들고 뛰어갔다./ 시간이/ 무한정 들어간다./ 도착하고 싶은 곳이 없다./ 당신의 눈은 크고 넓고/ 함정이 많은 동네./ 태어나기 위해 창문을 닫았다./ 아무도 외롭지 않은/ 당신의 각오는 왜 혼자 있는가./ 적과 흑이 나란히 걷고 있다./ 가끔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고/ 당신은 눈을 깜박인다./ 여기가 어디냐고.//

정체성 / 김언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선수가 있다/ 자정에도 결혼하는 남자가 있다/ 중세에도 공항이 있으며/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회화에도 한계가 있다/ 올라갈 수 없는 계단이 있으며/ 시간이 무한정 들어가는 노래가 있다/ 뒤엉킨 손과 팔다리가 있다/ 내 경력의 대부분은 거기서 쌓았으며/ 고래와 관련된 일은 아니다/ 그는 물고기가 아니니까/ 밀가루도 아니니까/ 붕어빵의 깊은 고민이 거기 있다 그게 누굴까?//

테이블 / 김언
우리는 문제를 열고/ 대화에 푹 빠진다/ 사랑에도 빠지고/ 우울증에서 벗어난다/ 어디라도 좋다 각자의 입장에서/ 우리들의 의견은 모인다/ 반경 1km 이내/ 거기 있다고 생각되는/ 당신의 상상은/ 깊이 깊이 다른 건물을 쌓아올린다/ 사이좋게 평행선을 만든다/ 우리 관계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서로의 인력에 끌린다/ 지하 깊은 곳에서/ 비밀이 고갈되는 순간/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손가락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폭넓은 의견과 차이를 교환한다/ 미리 정해놓은 공간에서/ 우리는 뚜껑을 열고/ 협상에 들어갔다/ 수위를 조절해가며/ 푹 빠진다//

제육이 돌아가는 밤 / 김언
제육덮밥이 생각났다./ 집으로 가는 길에/ 오징어덮밥도 아니고/ 낙지덮밥도 아니고/ 제육덮밥이 생각나서/ 식당들을 기웃거렸다./ 제육이 쓰인 글자를 찾아서/ 이 식당에도 가보고/ 저 식당에도 가보다가/ 벽면에 가까스로/ 제육덮밥이 붙은 식당/ 한 곳에 눈길이 머물고/ 들어갔다./ 제육덮밥 냄새가 난다./ 나는 것 같다. /아니어도 상관없는 냄새가 난다./ 일단은 시키고 보자./ 제육덮밥 하나./ 제육덮밥은 곧 나온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눈앞에 스마트폰을 켜두고/ 한 숟갈씩 두 숟갈씩/ 제육덮밥을 퍼 넣는다./ 제육과 덮밥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저녁이다./ 한꺼번에 삼키고 있는 저녁이다./ 나의 살과 피가 되기 위하여/ 들어오는 제육덮밥./ 나의 살과 피가 되는 줄도 모르는/ 제육덮밥./ 한 그릇 제육덮밥이 다 비워졌다./ 더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 계산을 치르고 나왔다./ 트림이 나올 것 같다./ 제육덮밥이 들어간 냄새다./ 제육이 들어간 입에서/ 덮밥과 함께 나오는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제육 냄새와 함께 들어서는/ 나만 있을 것이다./ 덮밥 냄새와 함께 무언가를 쓰고 있는/ 나만 있을 것이다./ 생각나면 이런 문장이나/ 덧붙이는 내가 있을 것이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 17:1)/ 물론 나는 화목하다./ 조금 살이 쪘을 뿐/ 고기라고는 나뿐인 집에서.//

어디서 구멍이 났는지 모른다 / 김언
문을 여니까 화장실에서 울고 있는 네가 보였다. 변기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네가 보였다. 왜 우니?/ 물으려다가 관두었다. 어차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왜 우냐?/ 물으려다가 한 번 더 관두었다. 어차피 소용없는 일이다. 무엇 때문인지 누구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우는 사람은 우는 사람이다. 이미 흘러넘치는 사람이다. 막으려고 물어봐야 이미 늦었다./ 울음이 그칠 때까지 눈물이 막힐 때까지/ 아니면 눈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면서 화장실을 본다./ 너를 본다. 다행히 화장실에는 작은 창 하나가 없다./ 울음이 새어나갈 바깥이 없다./ 눈물이 흘러내릴 외벽이 없다./ 창이 있었다면 당연히 보였을 오늘 아침의 구름이 거실 창밖으로 흘러 흘러가고 있다./ 그걸 보느라고 네가 우는 것도 잊은 채 멈추어 서 있다./ 너를 어떻게 달래야 할까? 구름을 어떻게 멈추어야 할까?/ 나는 타인이다. 사랑하는 타인. 증오하는 타인. 상관없는 타인./ 어느 쪽이든 흘러가는 구름과 멈춰 있는 오늘 아침의 타인./ 한 사람으로도 충분한 타인이 두 사람으로도 벅찬 타인을/ 멈춰 세우고 있다. 화장실 앞에서 구름을 참는다./ 물이 새듯이 흘러내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어디서 구멍이 났는지 모르겠다.//

오늘 아침 / 김언
오늘 아침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오늘 아침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데 새소리 들린다. 오늘 아침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데 휴대폰에 충전기 꽂는다. 충전기에 휴대폰 꽂는다. 두 사건은 다르다. 엄연히 다르다.// 오늘 아침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내가 일어나 있고 아랫집의 서너 살 먹은 아이의 울음소리도 일어나 있고 그 엄마와 아빠도 일어나 있고 바깥으로 나와 아이를 달랜다. 그치지 않는 울음도 그치는 울음만큼이나 울음이니까 곧 그치겠지.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오늘 아침엔 아무 일도 계획하지 않았는데 할 일이 태산 같다. 빨래하고 빨래 널고 설거지하고 밥하고 밥 먹고 다시 설거지하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일. 나가서 멀거니 하늘만 보다가 돌아오는 일. 이런 일로 바쁘다는 게 바쁜 나의 일상이지만 바쁘기는 마찬가지. 바쁘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까// 오늘 아침엔 무슨 일이라도 벌일 계획을 짜는데 하루는 길다. 한 달도 길고 일 년도 길기는 마찬가진데 변하지 않는다. 인생이 그대로다. 처지만 바뀌고 입장만 바뀌고 감정도 바뀌고 생각도 바뀌어서 오늘 아침을 맞는데 그대로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내 시집이 얼마나 팔렸나 교보에서 예스24에서 알라딘에서 확인해보고 전날과 하나도 다름이 없음을 확인해보고 좌절하는 일.// 좌절하는 일도 그만둔다. 그만두어야 한다. 그대로 있으면 뒤처지는 인생. 뒤로 나자빠지는 인생. 판매지수와 같다. 팔리지 않으면 관두어야 한다. 파는 일을 관두든 파는 일을 보는 일을 관두든 아무튼 관두면서// 오늘 아침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기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하루가 가기를 계획하고 짠다. 적당히 짜면 적당히 간다. 하루가 간다. 그 많은 하루를 이렇게 보냈다. 허비했다고 자책하지는 말자. 인생은 어차피 낭비니까. 엄연히 다른 두 인생 앞에서// 오늘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기를.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기를. 다시 들어보면 새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유령 산책 / 김언
이 시간이면 그 도시도 전혀 다른 새벽을 보여준다./ 나의 발걸음도 수상하다. 아무도 없을 때/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그의 눈에 띄면서 나는 드디어 사람이 되었다.// 직전의 영혼은 모두 유령이었다./ 누가 발견하기 전 나의 걸음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나의 보행과 나의 생각과 나의 입김이 그의 눈에서 순간 빛나고/ 나는 놀란다. 사람이 된 것이다. 아무도 없을 때//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도 없는 나의 보행이 걸어가면서/ 그를 본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를./ 한 사람의 윤곽과 어렴풋한 입김을/ 그 생각을.// 멀리서 나를 발견한 그는 가까스로 유령에서 빠져나왔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고 있다. 직전의 나처럼.//

얼마 남아 있지 않다 / 김언
말할 것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말해야 하는 것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말하고 싶은 것은 말하고 싶지 않은 것만큼이나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장소에서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칭찬을 하고 험담을 하고 욕을 퍼붓고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증오를 심고 왔다. 너는 나를 미워해야 한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나를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시간을 아까워 말고 충분ㄴ히 증오하라.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충분히 멀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길고 얼마 안 남았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물을 마신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술을 마시는 기분으로 담배를 피우고 애인을 찾고 애인을 찾아서는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정을 주었다. 돈 몇 푼을 얹어서 그것도 정이라고 푼돈에 푼돈을 얹어서 주었다. 다 가져라. 얼마 남지 않은 정은 얼마 남지 않아서 바닥을 보일 테지. 바닥까지 긁어모아서 너에게 준다. 얼마 남지 않은 사랑을. 기억을. 망각을. 그러고도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걸어다니는 지도 / 김언
이 지도에는 비 오는 날이 빠져 있다. 두통이 심한 날도 빠져 있고 무엇보다 새벽이 빠져 있다 내가 걸어다니는 이 지도에는 어제까지 안개가 끼어 있었다 꽃이 피어 있었다 꽃이 피었다가 사라진 바로 그 지점에 어제까지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누워 있는 그로부터 이 지도는 유래한다 그의 이름은 이 지도 어딘가에 숨어 있고 안개가 끝나는 지점에서 또 한 사람의 핏줄이 자라고 있다 핏줄이 자라서 사람이 될 때까지 나머지는 걸으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이 지도에는 지금 사람이 빠져 있다//

내일은 / 김언
내일은 계절의 여왕 오월에 걸맞게 전국에 함박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기가 막힌 날씨에 들떠서 줄줄이 교외로 빠져 나가고 시내는 텅 비었다 내일은 프로야구장마다 관중들이 꽉꽉 들어찼고 다저스의 찬호는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260경기 연속안타행진을 계속하였다 내일은 무하마드 알리가 은퇴한 지 30년만에 헤비급 챔프의 자리에 올랐고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떨어라 아니 털어버리라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내일은 다시 돌아와 유언을 번복하시고 나는 다시는 제사 같은 건 지내지 않아도 되었다 내일은 보이지도 않는 먼 별이 그보다 더 먼 별에게 두드려 맞는 것이 보였고 가슴 깊이 멍이 든 어머니는 장례가 끝나자 곧바로 나와 동거에 들어갔다 내일은 벌써 5개월 된 그녀가 지겹다고 투덜거렸고 나는 우리 사이 그만 이쯤에서 지우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뱃속의 아기가 버럭 고함을 질렀고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만삭의 배를 이끌고 화장실로 기어 들어갔다 내일은 태초의 거룩한 말씀이 하수구를 통해서 올라왔고 사람들은 온종일 썩은 냄새에 코를 막고 지나갔다.//

전봇대와 고양이의 마을 / 김언
아침마다 썩는 냄새가 푹푹 쌓이는 마을, 이 마을 정중앙에 커다란 전봇대가 하나 서 있다 사람들은 이 전봇대를 중심으로 밤새 쓰레기를 쌓아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날이 밝으면 전봇대 꼭대기에서 도둑고양이들이 내려와 쓰레기더미를 뒤진다 꼬리를 잔뜩 세운 고양이들은 밤새 참아왔던 허기를 게워내고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썩는 냄새를 꾹꾹 채워 넣는다 오전과 오후 내내 도둑고양이들이 만찬을 즐기는 동안 집집마다 인간들은 밤새 내놓을 쓰레기를 장만 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윽고 쓰레기를 장만하지 못한 집들의 불안과 초조에 뒤섞여 저녁이 몰려온다 저녁이 밤으로 바뀌기 전에 도둑고양이들은 전봇대 꼭대기로 올라가고 잔업에 밀린 인간들은 피곤함도 잊은 채 마지막까지 쓰레기 만드는 일에 열중한다 전봇대를 중심으로 밤새 쓰레기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가까스로 목표량에 도달한 인간들은 오늘도 무사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돌아간다//

숨쉬는 로봇 / 김언
그것은 24시간마다 사랑을 배운다. 어제 배웠던 사랑을 오늘 다시 사랑이라고 부른다. 갈아끼워도 사랑은 사랑이고 증오는 없고 제가 태어나던 그때의 아이들은 모두 늙었다. 일부는 죽어서 다시 아이들의 모습과 걸음걸이와 단내나는 이빨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썩지도 않고 시간마다 똑같은 숨을 내쉬고 24시간마다 사랑은 태어난다. 새들에게 비행을 가르치고 물고기에게는 매일 수영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봉사를 가르치고 봉사를 위한 사랑을 가르치고 증오는 지웠다. 증오는 인간으로도 충분하니까. 일주일마다 갈아끼우는 머릿속 필터에는 늘 분진과 함께 인간의 눈으로는 확인이 안 되는 이상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인간으로 치면 심장 근처이거나 가슴속에 있어야 할 그것이 몇 세대를 거듭하면서 사람의 귀에도 차츰 들리기 시작하여 이제는 누구를 만나도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손님이라고도 부르지 않고 다만 슬프다는 이름을 주었다. 시간을 먹어도 부르지는 않고 고프지도 않고 지겹게도 사람을 먹고 사는 짐승이 바로 그였다.// 그가 로봇이라면 옆집에서는 오늘 또 한 명의 슬프다가 태어났다. 고통과는 거리가 먼… 이 통증은 이제 <나>의 것이기도 하다.//

방명록 / 김언
(큰손님이 오셨군요 나는 이 말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이 말을 기대했던 게 분명하다 새벽에 불쑥 나타나서는 가까이에 이렇게 좋은 분이 살고 계셨군요 이 말 한 마디에 넘어오길 기다렸는지도 모른다(모른다? 이보다 더 우유부단한 말이 있을까 나는 썼다가 자꾸 지운다(지우는 버릇이 있다 처음 연애편지 쓸 때도 그랬다 썼다가 지우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했었는지 편지를 완성하고서도 종이가 너무 더러워 다시 옮겨 썼던 (옮겨 써야 했던 기억이 있다 글을 쓰는 건 하필이면 나무를 옮겨 심는 것과 같다(분갈이하려고 묘목을 뽑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도 떨어져나가는 건 대부분이 잔뿌리다 글을 쓴다면서 시를 쓴다면서 언제나 가장 섬세한 부분을 다친다(다치는 것이다 내 배려의 눈길이 죽음의 눈길이기도 하다는 걸 많은 시인들이 모르고 있다(모르거나 무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내 시에 내가 개입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싫어하는데도 자꾸 개입한다 혹자는(앙리 메쇼닉은 이걸 현대성의 증거로 보기도 하지만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우선 절망한다 (간섭할 줄 모르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는 간섭의 역사다 동물을 보면서(유순한 혁명도 모르는 동물을 보면서 나는 자꾸 안으로 숨는다(안으로 숨으면서 또 간섭한다 반드시 간섭한다 한번이라도 내 글을 방문한 사물들이 그걸 증명한다(그들 대부분이 죽었거나 다쳤거나 이름을 바꾸었다 나는 그 시체를 먹고 살점을 먹고 이렇게 자랐다 나는 내 이름조차도 바꾸었다 이제 내 몸이 그걸 견디지 못할 차례다(요즘 들어 식도가 자주 아프다 아버지도 물론 식도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자격을 의심 한다(요절할 자격을 의심한다 요절의 반열에 아무나 오르는 게 아니므로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너무 일찍 갔고 나는 너무 늦게 간다는 사실이다(요절을 하든 노환으로 가든 사고사로 가든 한번은 간다. 반드시 간다는 사실이다 (나는 요즘 이것조차도 의심한다 인간은 죽지 않는다. 고로 나는 죽지 않는다는 명제까지도 먼 미래로부터 나는 각오하고 있다 있는데 그런다고 죽음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영원히 죽지 않고 살든 한번은 죽든 내가 내 죽음을 보지 못한다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쓴다 죽음을 대비해 쓴다(여기서의 죽음은 물론 글쟁이로서의 죽음이다 랭보는 이미 서른이 되기 전에 죽었었다(서른 대신 스물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가 한창 때 이 별에 남기고 간 그의 방명록이다(우리나라에 소개된 방명록 제목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었다 죽음 이후(글쟁이로서의 죽음 이후 그가 육체를 정리한 곳이 이 별에서도(이 지옥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곳(아프리카였다는 사실은 이 글을 정리하는 (정리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많은 글에서 이런 식으로 정리하는 걸 배웠다 배웠는데 내 인생을(죽음을 정리하는 데는 아무 쓸모가 없는 말이라는 건 나보다도 이 글이 더 잘 안다(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괄호 밖에 다 있었다(괄호 밖에 있을 때는 안에 다 있는 줄 알았었다(끊임없이 들어가는데도(개입하는데도 내가 내 글을 닫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까(처음부터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모른다?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이 있을까(나는 썼다가 계속 지운다(지우는 버릇이 있다(//

그늘 / 김언
풀밭에는 그늘이 졌고 딱 한 사람만큼 그늘이 졌고 한 사람의 생긴 모양대로 그늘이 졌고 아니다, 아니다 그늘은 그늘이 생긴 대로 생겨서 졌고 지는 대로 어른거리는 그늘은 풀밭에 있고 그늘진 곳에 있고 그늘진 곳에는 짙음과 어둠을 더해가는 푸름이 있고 푸름은 푸름 혼자서 전부가 아니고 하나도 아니고 꽃 한 송이에도 꽃밭으로 돌변하는 풀밭이 있고 풀이 있고 밭이 있고 또 무엇이 있어서 그늘이 졌고 바람은 알 수 없고 바람대로 알 수 없는 길을 한 사람이 서 있다가 가는 쪽에도 그늘이 지고 그늘이 지다가 잠깐 멈추었다. 이쪽을 돌아보는 사람의 눈도 잠깐 멈추었다. 풀밭이 어른어른하다. 풀도 꽃도 밭도 모두 아닌 것처럼 졌다.//

불멸의 기록 / 김언
그는 없는 사람을 중심으로 모였다가 흩어진다./ 둘 사이에는 모종의 삼각관계가 있다. 유지된다./ 한쪽은 존재하는 힘으로 한쪽은 불멸하는 힘으로/ 이미 불멸하고 없는 미래를 향해서 날아간다./ 사실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환멸의 기록이다./ 먼저 다가온 자의 손을 뿌리치기 힘든 곳에 오늘과 내일/ 어제 만난 그 사람의 둥근 무덤이 있다./ 그는 기록을 남겼다./ 마멸하고 없는 순진한 돌덩이가 그의 얼굴이다./ 없는 사람을 중심으로 앞에서 봐도 투명하고/ 뒤에서 봐도 덩어리가 분명한 공기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 자리의 공기는 그 자리의 공기를 향해서 달아난다./ 그 모양 그대로 한 사람의 얼굴과 두 사람의 생각과/ 모두 잊어버린 뒤에 문득 떠오르는 창문 하나의/ 불빛 속에 어두운 턱을 괴고 앉아 사실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없는 것을 존재해왔다./ 그는 멀리 있거나 가까이 숨어 있다./ 둘 사이에는 모종의 사실관계가 존재한다. 흩어진다./ 중심에서 만나는 한 사람의 헛것과 뒷모습ㅡ/ 그는 내려가거나 올라가지 않는다. 끊임없이/ 요동치는 그의 기록의 사실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안 보이는 힘으로 누구보다 투명하고 굵은/ 글씨로 물장구를 친다. 그 아이는 늙지 않았다./ 그 사이에는 사람이 없다. 기록이 가능할 뿐이다. 어떤 제목도.//

이 문장이 다시 씌어지는 예문 하나 / 김언
사라졌던 그가 암덩어리로 발견되었다 그 시각에 나는 통증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다고 우리가 들었다 그러자 세상에서 가장 긴 문장을 쓰는 사람을 알고 있다고 내가 말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지금 수술실에 있다 암덩어리로 발견되는 그 시각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따위 질문은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모든 증거가 충분하고 어떤 증거는 불충분했다 사라졌던 그가 암덩어리로 발견되는 그 시각 나는 누가 내 얘기를 들어줄 것인지 우리가 지켜볼 것이다 이 문장은 다시 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